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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6)화 (6/88)

6화

반동으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난 수인은 차가움에 소름이 쫙 돋아났다. 서빙을 하던 점원과 부딪혀 버린 수인의 가슴에 차갑고 특유의 시나몬향이 물씬 감도는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엄마야~”

새하얀 수인의 블라우스는 검고 찐득한 액체에 흠뻑 젖어버렸다. 음료를 쏟아버린 서빙 하던 직원도, 수인도 너무 놀라 펄쩍 뛰었다.

“죄송합니다. 어떡해요. 잠시만요. 물티슈 가져다 드릴게요.”

“아. 아.”

당황하여 몸에 들러붙는 블라우스를 앞으로 당겨 잡고 수인은 점원이 가져다준 물티슈로 가슴을 문질렀다. 

90도로 사과하는 점원에게 제 잘못도 있으니 괜찮다고 하고 자리로 돌아온 수인은 찐득한 음료가 스며들어버린 블라우스를 열심히 닦아댔다.

시후는 눈앞에서 출렁이며 과격한 손동작으로 블라우스를 닦아내는 수인을 보고 헛기침이 마구 나와 버렸다. 거부 할 수 없는 수인의 매력이었고, 시후를 남자 중에 남자로 만들어준 마법의 힘이기도 했다. 

시각에 약한 것이 남자이기에 시후는 눈을 떼지 못하고 수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출렁출렁, 흐뭇하게도 그날 자신에게 들이대었던 슬립 차림의 수인이 떠올랐다. 그 생각에 수인의 손가락에 닿았던 제 소중한 부분이 스르륵 힘을 받아 반응을 하였고 또 한 번 시후는 헛기침을 해댔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던 시후가 자신의 반응하는 몸을 간신히 다스리며 말했다.

“거. 대충 닦지.”

시후의 말에도 수인은 아주 필사적으로 출렁이며 가슴을 문질러 댔다.

“아우 찐득해. 아, 맞다. 내 차에 선배 셔츠 하나 있는데.”

“내 셔츠?”

이성을 되찾아 다행이라 안도하며 시후는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면서도 손동작을 멈추지 않는 수인을 보며 알 수 없게도 입 꼬리가  자꾸만 승천하는 게 지금은 아주 문제였다. 이래서 사랑에 중독이 되는 건가. 겨우 하룻밤이었는데 시후는 이미 수인에게 중독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그 사정도 모르는 수인은 그저 앞에 닥친 현실 문제에 기를 쓰고 있을 뿐이었다. 

“지난번에 세탁소 갈 때 선배 옷도 내가 찾아왔거든요. 검정 색 셔츠.”

“어쩐지. 그 셔츠가 어디로 갔나 했다.”

“그거라도 갈아입어야겠어. 속옷까지 다 스며들어서 찝찝해요.”

굳이 언급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수인의 사족 같은 언급에 시후의 몸은 후끈 달아올랐다. 

남자의 상상은 여자들이 감히 견적을 낼 수가 없다. 몸에 열감기가 올 때처럼 후끈거리기 시작했다. 목이 저절로 탔고, 손은 저절로 술잔을 집어 들게 했다. 벌컥벌컥 뜨거워진 몸의 온도를 낮추려 필사적으로 맥주를 털어 넣었다. 

잠시 후 시후의 옷을 걸치고 나타난 수인의 모습은 더없이 가관이었다. 한주먹으로 쥐면 쥐어질 것 같은 작은 몸매의 수인이라 덩치 큰 시후의 셔츠가 맞을 리 없었고, 헐렁하게 입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발칙한 그녀는 이번에도 속옷까지 생략한 듯했다.

또 한잔을 숨도 안 쉬고 들이 키고 있는 남자를 보고 수인이 깜짝 놀라 말했다. 

“어머! 혼자 몇 잔을 마신 거예요?”

수인이 앞자리에 앉으니 출렁이는 가슴이 고스란히 시후의 망막에 맺혔다. 이렇게 도발적인 수인이었던가. 12년을 붙어 다녔지만 그녀가 이리도 육감적인 신체라는 걸 그날 밤에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김수인.”

남자의 목소리는 시원한 맥주로 인해 살짝 열감이 낮아져 있었다.

“네?”

수인은 제 앞에 놓인 맥주잔을 비우다 놀라서 잔을 내려놓았다.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고서 시후가 입을 열었다. 

“너 내 결혼 이야기, 누구한테 들었어?”

곧이곧대로 다 대답할 수는 없었다. 시후의 약혼녀가 될 거라는 이도희라는 이름조차 자신의 입으로 내뱉기 싫었다. 

“어. 있어요.”

“누구?”

집요하게 캐묻는 시후에게 수인은 시선을 피하며 거짓말을 했다. 어떻게든 알게 되겠지만 지금 제 입으로 이도희 이름을 내뱉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마지막 자존심 같은 것이었다. 

“김희윤이요.”

“OBGY?”

시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게 보여서 수인은 다시 슬그머니 시선을 피자 쪽으로 돌렸다. 산부인과 펠로우 하는 절친 희윤이를 팔아 버려 미안했지만 지금은 자신부터 살고 볼 일이었다.

“아는 사람 거의 없는데 어떻게 알았대?”

주름 하나 없이 반듯한 미간을 좁혀가며 심각해하는 시후였고, 그의 성미를 잘 아는 수인은 이 이야기를 길게 끌어봤자 어느새 자백하게 될 게 뻔해서 강하게 나갔다. 

“흥! 지금 그게 중요해? 당신 현시후씨가 결혼한다는 게 더 중요한 사실 아닙니까? 네?”

강한 어조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시후는 맥주잔을 들이켰다. 휴, 수인은 시후가 보지 못한 사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대로 넘어가라 제발. 자꾸 따지다 혹시 희윤에게 확인 전화라도 할까 봐 수인은 조마조마해졌다. 그런데 또 왜 이딴 걸로 조마조마해야 하는지 불쑥  화가 났다. 

잘못한 게 누구였지? 아니지. 잘못한 일은 아니지만, 지금 왜 이 지경이 되었는데 자신이 쫄고 있는지 생각할수록 열 받는 일이었다. 따지려 입을 벌리려는데 시후가 먼저 선수 쳤다.

“누가 결혼 한대?”

“네?”

“말했잖아. 다른 여자와 결혼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고. 김수인 때문에.”

띵~ 

마치 커다란 종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사방천지 울려대는 종소리만 들릴 뿐, 왜 여기 갇힌 건지 모르겠다.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그녀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커다란 현시후라는 종에 갇혀버렸다. 

수인은 목이 타서는 제 앞에 놓인 맥주잔을 치켜세워 들이켰다. 그러나 시후가 얼른 잔을 붙잡는 바람에 반밖에 넘기지 못했다.

“술도 못하는 게. 천천히 마셔. 또 엎어지면 오늘은 내가 너 덮칠 거니까.”

남자는 진심이었다. 수인과의 강렬했던 그 밤은 내내 시후의 머리와 몸에 남아있었다. 지금이라도 수인이 예스만 해준다면 수인과 또 다시 뜨겁고 긴 밤을 보내고 싶은 늑대 본능이 마구 꿈틀거렸다. 

“헉! 왜 이래? 누가 들어요!”

“들으면 뭐?”

뻔뻔하게 리얼리티로 나오는 남자에게 말로 따져 무엇 할까. 수인은 머리를 테이블에 쳐 박고 싶었다. 

이 와중에 남자는 친절하게도 수인의 앞 접시에 피자 조각을 올려주며 빈속에 맥주를 들이켜는 수인을 걱정했다.

“피자 먹어라. 빈속에 맥주만 마시지 말고.”

와. 딱 돌겠네. 물론 그는 평소에도 친절한 편이었다. 친오빠가 있지만 그딴 있으나 마나한 친오빠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늘 몸에 매너가 배어 있었다. 

수인에게 피자를 챙겨주면서도 정작 본인은 맥주만 연신 들이켰다. 그것도 아주 생각이 많은 얼굴을 해서 수인은 또 무슨 꼬투리를 잡으며 혈압을 올려댈지 두려웠다.

맥주잔을 내리던 시후는 할 말이 떠올랐는지 눈썹을 꿈틀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너 완전 의도적이었구나.”

의도? 국어사전에 의도란 무엇을 하려는 생각이나 계획이라고 나와 있다. 계획이라면 그 밤은 분명 수인의 계획 내지는 계략적인 밤이었다. 또 그 밤을 이야기하려는 건가. 수인은 시작부터 입을 틀어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의도적으로. 

“무슨 소리예요?”

“너! 크리스마스 당직서고 아침 해장술까지 걸치고 집에 와서 뭐라고 했어?”

크리스마스라면 외과 의사들에게는 즐거운 성탄절이 아니었다. 때마침 눈이라도 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면 교통사고가 급증하고, 연말연시라 너무 흥겨워 다치고 이래저래 응급실이 미어터지는 날 중에 하루였다. 

어찌나 힘이든지, 함께 고생했던 남자 간호사 진창욱에게 울먹이며 화장실 잠깐 다녀오겠다는 애절한 눈빛을 보낼 정도였다. 그날도 수인은 연이틀 계속되는 당직을 서고 너무 피곤해서 소주 한잔에 쓰러질 것 같은 몸이었다. 

“혹시 진창욱 쌤이 뭐라고 했어요?”

수인은 재빨리 기억장치를 더듬었다. 누구에게도 척지지 않고 좋은 성격으로 살고 있지만 시후를 마음에 뒀던 일은 매우 조심했었다. 그러나 사람은 더러 실수하는 존재이니 자기도 모르게 친하게 지내는 남자간호사에게 슬쩍 시후에 대해 흘린 게 있었나? 다시 머리를 풀가동해서 훑어보았다. 

“뭐? 진창욱? 잠깐. 너 진창욱하고 뭐 썸 타고 그런 사이 아니지? 아니지?”

다급해 보였다. 남자의 질문에 그래,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저 큰 덩치가 눈물을 펑펑 쏟는 건 아닐까, 잠깐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수인은 눈에 힘을 주고 그를 째려보았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해요!”

“그렇지? 아. 난 또.”

저 안도하는 모습은 또 뭐람. 덩치가 아깝다. 떡 벌어진 어깨 하며, 팔뚝의 저 근육들이 무색할 정도로 안도하는 저건 뭐라고 해석해야 할까. 수인은 시후를 계속 째려보았다. 

“아. 맞다. 다시 본론. 사택에 다 와서 기억 안 나냐고?”

“뭐요?”

“하. 야. 너 보기보다 완전 양아치 맞구나.”

또 양아치 소리에 욱해서는 수인이 테이블을 발로 팍하고 찼다. 

“왜? 말로 안 되니까 테이블이라고 엎어보게? 너 그날 소주 한 병에 꽐라 돼서 내가 너 업고 집에 왔지. 기억 안 난다고 어디 잡아떼 보시지?”

수인은 불쑥 떠오르는 기억을 억지로 안 나는 척 눈동자를 위로 뱅글 돌렸다.

“그날 진창욱 쌤이랑 끝까지 마셨던 거 기억나네요. 맞잖아요?”

잡아떼야 했다. 더 길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어졌다. 넓은 시후의 등에 업혀 온 그날은 로또를 맞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서 미치고 싶은 날이었다.  

“그래. 끝까지 마시겠다고 그 난리 치고 바로 쓰러져서 내가 업고 왔다고.”

수인은 피자를 한가득 물어뜯으며 덤덤한 척했지만, 그날 1분 1초도 잊지 않았다. 아마 그날도 술의 힘을 제법 빌렸고 그래서 바로 후회하기는 했다. 

시후는 할 말이 오늘따라 많은지 연신 흥분에 들떠 반쯤 소리를 질러댔다. 

“오다가 1층 왕 부장님 사모님이랑 딱 마주쳐서 그분이 뭐라고 했어? 그러다 두 사람 정분 나겠어요~ 호호호, 하는 말에 너 뭐라고 했어? 우리 잘 어울리죠~ 라며 남의 혼삿길을 다 막았잖아. 와.”

왕 부장님 사모님 흉내까지 내며 시후가 찰지게 리바이벌하는 통에 수인은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뭐. 날조하지 말아요. 내가 아무리 정신이 없었기로 그런 말을 했을 리 없어요!”

수인은 기억이 아예 없는 사람처럼 시치미를 힘껏 잡아떼었다. 그리고 피자를 크게 한입 베어 물고 팔짱을 끼었다. 

무심코 하는 버릇 같은 행동이었지만 지금 수인은 가슴을 보란 듯이 내밀고 있었고 시후는 도저히 거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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