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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5)화 (5/88)

5화

그렇지만 수인의 귀에는 버려진다는 말 말고 남녀 사이의 상열지사가 가장 크게 와 닿는 말이었다. 역시 사람은 자기 입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기심이 누구에게나 있었다. 수인은 일단 펄쩍 뛰었다. 

“선배! 뭘 다 했다고 자꾸 그래요? 누가 뭘 버려요?”

“너야말로 뭐하자는 건데? 덮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나를 버린다?”

시후가 한 발 다가왔고, 수인은 일부러 눈 질끈 감고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었다. 이 남자 덩치는 산만해서 불안해하는 저 눈빛 어쩔 거냐고. 왜 자꾸 버린다는 말에 힘을 주는 건데. 그냥 통 큰 남자처럼 쿨하게 나오면 안 되는 거냐고. 

그렇게 생각하며 수인은 머리가 팽하고 돌았다. 

그러나 이렇게 나온다면 빙빙 돌릴 필요 없어진 것 같았다. 수인은 바로 이 문제의 핵심을 찔러 버리고 싶었다.

“결혼하시라고요. 나도 내 미련한 12년이 아까워서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한번은 해보고 싶었어요. 그게 그렇게 잘못됐어요?”

다부진 눈매를 하고 수인이 한 발 시후에게 다가갔다. 이젠 속에 담아두었던 섭섭했던 감정 다 쏟아내고 산뜻하게 새 출발 하자는 마음 까지 들었다. 핵심을 말해 놓고 나니 속이 다 시원했다. 

다른 여자, 비록 마음에 아주 안 드는 이도희였지만 집안들끼리 결혼하기로 했다 하니 수인은 자신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고 판단했다. 수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현시후에게 남아있던 감정 모두 털어버리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12년. 참으로 애가 끓는 시간이었지만 수인은 좋은 추억으로 가슴에 남기자 그리 마음먹었다. 그리고 원래 자신의 성격대로 화통하게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시후는 이제야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너 나 좋아했다며? 언제부터야?”

“미쳤어요? 그런 말을 내가 할 거 같아요?”

비아냥거리는 말투를 시후가 모를 리 없었다. 시후의 얼굴 근육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렇지만 수인은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았다.

“그러는 현시후 씨도 문제 아닌가?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아둔해요? 그리고 뭐 내가 결혼한다는 선배 바짓가랑이 잡고 매달리는 것도 아니잖아요. 부담가질 필요도 없다고요. 그냥 억울한 후배 소원 풀어줬다고 생각하시라구요.”

수인이 이렇게 시후에게 정나미 떨이지게 말해본 적은 12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았다. 제일 처음 시후를 보고 홀딱 반해 며칠 밤잠도 못 잤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시후 여자친구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선배 한예원의 존재를 알았을 때조차도 수인은 시후가 싫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딱 싫어졌다.

“너.”

“나 뭐요?”

“너 뭘 믿고 지금 마음대로 말하냐?”

침착한 시후의 목소리에 수인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또 다시 시작이던가. 또 이 지겨운 말싸움을 계속해야 하는가. 

수인은 무더운 여름 날씨에다 안에서 끌어 오르는 열기가 더해 탈진 직전이었다. 하지만 이미 작정을 한 시후는 바짝 다가와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네?”

이 단호함, 더러는 박력 있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수인의 혈압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단호함은 물론 굳건함마저 무장하고 시후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네 마음대로 안 된다고.”

기가 막혀서 수인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시후의 얼굴을 보았다. 도대체 주객이 전도된 듯한 이 분위기는 또 뭐람. 뒷목이 뻐근해진 수인은 간절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현시후 선배.”

“됐고. 나 다른 여자랑 결혼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누구 덕분에.”

억지 억지 이런 억지가 다 있을까. 그 하룻밤이 대체 무엇이기에. 수많은 밤 이 지구상에 사는 남자와 여자들은 제 짝을 찾아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살고 있다. 

이 평범한 일이 수인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일이던가. 이 남자 너무 진지해서 숨이 막혀 왔다. 

“아. 진짜 왜 이래요? 겨우 마음먹고 힘들게 결정한 거라고요. 왜 선배 마음대로 된다 안 된다 그러는데요?”

수인은 아마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검지에 힘을 잔뜩 줘가며 삿대질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면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힐 것 같았다. 그러나 시후는 팔짱까지 낀 채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겠다는 고집불통처럼 서 있었다. 

“너, 나 책임져야지.”

“무. 무슨 책임을 져요?”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하는것 같았다. 수인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버벅거렸다. 자신을 열망하듯 보고 있는 시후의 눈을 보는 순간 그 밤이 떠올라 얼굴이 금세 불타올랐다. 

그날 해도 너무하긴 했다. 속옷마저 생략하고 전력투구하듯 현시후에게 달려들었다. 억울했던 지난날의 보상은 아니었지만 미련조차 가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나름대로의 12년을 매듭짓고 싶었다. 

“너, 나하고 할 거 다 했잖아. 적나라하게 다시 말해? 우리 잤잖아.”

시후의 거침없는 말에 놀란 수인은 입을 가린 채 야산 아래 누가 있을 리 없지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허억. 왜 이래요?”

수인은 벌게진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 수인은 똑바로 보며 시후는 와이셔츠 단추를 막 풀어냈다.

“지. 지금 뭐해요?”

수인은 시후의 손을 붙잡아 멈출 수도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시후는 마지막 끝 단추까지 모조리 풀어내고 바지 속에 있는 와이셔츠 자락을 박력 있게 끄집어내 펄럭였다. 

눈을 질끈 감고 외면하고 싶은데 수인은 그마저도 안되어 짜증이 났다. 그의 몸을 만지고 비비던 그 감촉이 머리에 뱅뱅 돌았다. 

활짝 열어젖힌 와이셔츠 사이로 시후의 탄탄한 가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울긋불긋 수인이 입술로 마구마구 도장을 찍어 대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시후는 셔츠를 펄럭이며 열어 놓고 가슴부터 배까지 친절히 손으로 쓸어내리며 어필했다. 수인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비명을 질러댔다. 사실은 시후에게 지른 비명이 아니라 제 자신에게 지르는 비명이었다. 

“꺄!”

“이거 기억 안 나?”

수인은 비명을 질러대면서도 눈앞에 드러난 시후의 가슴과 배 근육을 눈으로 훑어 내렸다.

“온통 김수인 키스마크야. 너 완전 날 뜯어 먹으려 들었어.”

얼굴을 가린 채 수인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미쳤다. 돌았다. 어디서 이런 짓거리를 배웠던 걸까. 그때를 생각해보니 저도 모르게 미친 듯이 시후의 몸을 깨물고 핥았었다. 과감하다 못해 돌았었다. 수인은 다리를 달달 떨어댔다.

“더 아래도 보여줘?”

“됐어요!”

두 팔을 내 저으며 강하게 거부하는데, 시후는 피식 웃으며 그런 수인을 보고 있었다.

아무리 밀어내 보라지. 이게 밀어서 밀릴 일인지. 시후는 펄쩍 뛰는 수인이 그저 귀여워 깨물어 주고 싶었다.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얼굴에 오른 열을 식히는 수인을 보고 시후는 흐뭇하게 웃었다. 어찌 저리 귀엽고 예쁜지, 열 받아 빨개진 얼굴까지 예뻐서 시후는 계속 허파에 바람이 든 사람처럼 웃음이 나왔다. 

시후는 피식 또 한 번 웃고는 수인의 자동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어 놓고는 수인을 쳐다보았다.

“아. 진짜 귀여워서 미치겠다.”

차 밖으로 보이는 수인은 맨땅을 발로 차고 머리를 쥐어뜯고 혼자 보기 아까울 만큼 귀여움을 터트리고 있었다. 

제법 차 안이 시원해지자 시후가 창문을 내리고 수인을 불렀다.

“가자. 시원한 거 마시자. 너 그러다 탈수로 쓰러지겠어.”

하지만 수인은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내어 땅을 구르듯 쿵쿵 걸어 차에 올라탔다. 더워도 너무 미칠 듯이 더운 한여름 8월이었다. 하도 열 받은 상황이라 더운지도 모르고 땀을 뻘뻘 흘리며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지금 시간은 저녁 7시인데 열기는 아직도 30도에 육박하는 것 같았다. 

“거. 옷 좀 제대로 입어요!”

여전히 벌어진 와이셔츠 상태로 운전을 하는 시후에게 수인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뭐 이미 할 거 다 한 몸인데 뭐.”

버터 백만 개는 입에 문 것처럼 느끼함에 미칠 것 같았다. 아무리 경계선을 넘었다 하여도 밀폐된 공간에서 헐벗고 있는 남자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예전의 현시후는 적어도 모범적이며 반듯한 남자였다. 그런 남자를 자신이 버려 놓은 것 같아 미칠듯이 짜증이 일었다. 

“현시후! 원래 그런 저질스러운 말 하는 남자 아니잖아!”

앙칼진 수인의 목소리도 이젠 꾀꼬리로 들려왔다. 시후는 앞섶을 자유분방하게 풀어헤친 채 수인을 돌아보았다. 

“나? 원래는 아니었지. 누구 때문에 인생관이 바뀌었어. 마음 가는대로 하려고.”

자신의 결정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지 시후가 빙그레 웃기까지 했다. 수인과 말싸움을 하다가 문득 깨달은 진리라고 할까. 왜 진작 마음 가는대로 살지 못했나 그런 고차원적인 생각까지 넘어갔으나 일단 수인과의 관계 정립이 우선이었다. 

“아우 더워. 아, 짜증 나.”

수인이 계속 불평을 터뜨리자 시후가 에어컨 실내온도를 낮췄다. 둘 다 뼛속까지 차가워지는 바람이 간절했다. 지금 마음의 온도를 낮춰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자꾸 옆으로 돌아보던 시후가 읍내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피자에 맥주?”

“콜!”

이렇게 붙어 다닌 지 자그마치 12년이었다. 시후 옆에 여자친구 예원이 붙어 있던 2년을 빼고, 시후가 군의관으로 군에 갔을 때조차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찾아갔던 수인이었다. 하도 찾아오니 군 위병소 장병들이 수인을 보기 위해 근무 날을 조정할 정도라고 소문이 돌았다. 

서로의 식성과 취향마저 식구처럼 알고 있었다. 수인이 저녁 겸 술안주로 피자와 맥주를 제일 즐긴다는 것도 시후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말싸움은 말싸움이고 저녁 식사시간은 식사시간이다. 다행인 건 오늘 둘 다 응급실 당직이 아니라는 거였다. 이런 날 맥주가 빠지면 섭섭해서 잠이 오질 않을 뿐 아니라 이런 호사는 주어질 때 야무지게 찾아 먹어야 하는 외과 의사들의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종종 찾아가는 피자가게에 제일 에어컨이 빵빵한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땀을 비오듯 쏟았기에 수인은 일단 세수부터 좀 해야 할 것 같아 화장실을 찾았다. 

평소에는 화장을 잘 하지 못하지만 외래가 있는 날이면 그래도 피부톤 정도는 맞춰 메이크업을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거울로 보니 얼굴이 온통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시원한 찬물로 세수를 한 다음 cc크림을 바르고 코랄핑크색 립스틱을 바르고 나왔다.

자기 자리로 걸어가며 수인은 기가 막혔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건 자신인 듯했다. 저 멀리 앉아 있는데도, 매일같이 보는 얼굴과 비주얼인데도, 현시후는 거부할 수 없이 매력적이기만 했다. 

수인은 익숙한 제 시각 세포와 뇌세포에 경계령을 내렸다. 눈을 콱 찔러서라도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머리를 최대한 숙이고 시선을 발치에 두고 걷는 게 지금은 최선인 것 같아 그렇게 걷다가 쿵! 하고 무언가 부딪혔다.

반동으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난 수인은 차가움을 느끼고 몸에 소름이 쫙 돋아났다. 서빙을 하던 점원과 부딪혀 버린 수인의 가슴에 차갑고 특유의 시나몬향이 물씬 감도는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엄마야~”

새하얀 수인의 블라우스는 검고 찐득한 액체로 이미 흠뻑 젖어버렸다. 음료를 쏟아버린 서빙 하던 직원도, 수인도 너무 놀라 펄쩍 뛰었다.

“죄송합니다. 어떡해요. 잠시만요. 물티슈 가져다 드릴게요.”

“아. 아.”

당황하여 몸에 들러붙는 블라우스를 앞으로 당겨 잡고 수인은 점원이 가져다준 물티슈로 가슴을 문질렀다. 

90도로 사과하는 점원에게 제 잘못도 있으니 괜찮다고 하고 자리로 돌아온 수인은 연신 찐득한 음료가 스며들어버린 블라우스를 닦아댔다.

시후는 눈앞에서 과격한 손동작으로 봉긋하게 솟아오른 블라우스를 닦아내는 수인을 보고 헛기침이 마구 나와 버렸다. 저 자극적인 모습이 바로 거부할 수 없는 수인의 그날 밤 매력이었고, 시후를 남자 중의 남자로 만들어준 마법의 힘이기도 했다. 

시각에 약한 것이 남자이기에 시후는 눈을 떼지 못하고 수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지금 흐뭇하게도 그날 자신에게 들이대었던 슬립 차림의 수인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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