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충격으로 굳어버린 수인을 보고 도희는 도도하게 미소를 지었다.
“집안끼리 결정한 일이야.”
시후는 결혼에 관심이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절친했던 동기들이 결혼할 때도 지나가는 말로도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집안에서 추진한 일이라면.
퍼즐 조각처럼 그렇게 맞춰져 버렸다. 기선대학 이사장의 딸 이도희, 기선대학병원 병원장의 아들 현시후.
평상시의 자신답게 재치있는 말주변으로 이 상황을 모면하면 좋으련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도희, 이렇게 기구하게 얽혀가는 인연이었던가. 아버지 때부터 안 좋은 인연으로 고단했던 일들이 가득 떠올랐다.
침묵하는 수인 앞에서 상대방을 정확하게 간파해버린 이도희는 이제 제대로 공격태세를 갖춘 독수리 같았다.
“인기 없는 남자보다는 낫다고 생각은 해. 그렇지만 수인아. 이건 너무했다.”
경멸과 멸시를 담아 쏘아붙이는 도희 앞에 수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겨우 떨림을 감추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무는 일이었다. 수인이 떨수록 이도희는 조금 더 날카롭고 깊이 상처를 내고 싶어 안달이었다.
“수인아. 너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야? 그 잘난 김수인이 어쩌자고 현시후를 남몰래 10년 넘게 짝사랑했을까? 너무 징그럽다.”
뻣뻣해진 고개를 간신히 드는 수인을 보고 도희는 눈을 느른하게 떴다. 그러다 픽 하고 웃는 소리는 내었다.
“막장 드라마 수준이다. 너 이렇게 찌질한 거 다른 애들이 알까 봐 내가 다 부끄럽다.”
도희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스르륵 올라가 붙었다.
“얘. 김수인. 현시후 주변 맴도는 거 더는 하지 마. 10년 넘게 짝사랑이라니 그거 정신질환 아니니? 더더구나 이제 현시후는 내 남자야. 나하고 너, 우리 집안과 너희 집안 더는 엮이지 않는 게 남들 보기도 좋지 않겠어? 난 말이야. 수인아.”
수인은 아니라고 부정을 할 수 없고 그게 뭐 어떠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었다. 말 그대로 처참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작정하고 온 도희는 더더욱 잔인하게 굴고 있었다.
“너 원래 싫었어. 내 경고 무시하면 너한테 가지고 있던 감정 다 쏟아낼지도 몰라. 널 괴롭히다가 그것도 성미에 안 차면 또 모르지, 너희 아버지까지 괴롭혀줄 자신 있는데. 우리 아버지도 너희 아버지라면 이를 갈고 계시니까.”
고운 얼굴을 하고서 악마 같은 말을 쉽게 내 뱉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이도희를 만난 시간 모두를 지우고 싶었다. 현시후를 짝사랑했던 일들을 이도희에게 평가받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아버지까지 거론된다는건 더더욱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수인이 존경하는 아버지까지 괴롭히겠다는 그 말이 수인을 떨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힘든 아버지였다. 하필 기선대학병원 근처에서 자선의원을 운영하느라 여기저기서 공격의 대상인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의로운 의료행위에 박수는 쳐 주지 못할망정 같은 의사들이 더 눈엣가시처럼 대하는 게 현실이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치는 건 죽는 것보다 싫은 일이었다.
오후 진료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을 만큼 수인의 머릿속은 하염없이 복잡했다. 그러나 마음이 급했던 이 남자는 외래진료가 끝나자마자 수인을 찾아와 더 상황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가자고요. 나가서 얘기해요.”
사회적 체면이라는 게 있었다. 더구나 현시후는 이 의료원의 스타였다. 그를 흠모하는 여직원들 때문이라도 수인은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어딜 가자는 거야?”
“일단 차에 타요. 좁은 의료원 안에 소문 이상하게 나긴 싫거든요?”
수인은 제 차로 시후를 밀어 넣었다. 큰 소리로 말하는 시후를 말릴 겨를도 없이 수인은 떨리는 손으로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야 김수인. 너 양아치냐?”
“뭐 양아치요? 나 원 참. 돌팔이니 의사 아가씨니 그딴 소린 들어봤어도. 살다 살다 뭐 양아치?”
수인은 한적한 산길을 달리다 널따란 곳에 급브레이크를 밟아서 차를 세웠다. 무방비로 있던 시후도, 핸들을 움켜잡았던 수인도 몸이 왈칵 앞으로 쏠렸다.
자동차 시동까지 꺼버리고 수인이 몸을 홱 돌려서 시후를 노려보았다.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왔지만 수인이 알고 있는 이 남자 현시후는 납득이 가질 않으면 끝까지 파헤치는 성격이었다. 이제 방법은 하나였다. 정면 돌파.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너야말로 이 상황을 설명해야지?”
시후의 말투와 눈빛은 여전히 매력적이었지만 수인은 새침했던 여자친구들을 떠올리며 따라 해 보았다.
“내가 무슨 설명을 해야 하죠?”
새침한 척 내뱉고 나니 그리 어색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일부러 차갑게 대하려고 애쓰는데도 수인의 몸은 제멋대로 긴장을 해버렸다.
달라진 그녀마저도 포옹할 마음이 넉넉한 시후는 투정을 부리듯 슬그머니 수인의 눈치를 보았다.
“너 왜 양아치같이 구는데?”
“아니, 현시후 씨. 양아치라니요? 내가 뭘 어쨌는데? 내가 누굴 등쳐먹기라도 했어요? 왜 자꾸 양아치는 들먹이는데요?”
시후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순간, 수인은 고지를 점령해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모질고 독하게 따져 들고 끝장을 내고 싶었다. 그런데 만만히 볼 남자는 물론 아니었다. 수인이 정면 돌파를 선택했는데, 이 남자 현시후는 리얼리티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수인을 졸도시키기에 충분했다.
“여자이고 싶다며? 안아달라며? 그래 놓고 이제와서 모른 척하겠다는 거야?”
이 남자의 리얼리티 대화법에 당한 수인은 누가 들을까 놀래서 두리번거렸다. 사실은 수인이 감추고 달아나고 싶은 마음보다 시후의 답답하고 초조한 마음이 지금 더 큰 문제였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시후는 지금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수인은 부르르 떨며 시후를 노려볼 뿐 말이 없었다.
“왜 대답이 없어?”
“무슨 대답을 해요? 선배는 그러고 싶은 날 없어요? 나도 그냥 그러고 싶었던 날이었어요.”
대답을 독촉하니 하긴 했지만 수인도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하는 본인도 그 지경인데 듣는 이는 더 답답할 노릇이었다.
“너. 김수인 맞아?”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는 하지만 하루 아침에 달라도 너무 달라진 수인 때문에 시후는 적응이 어려웠다. 그런데 말싸움처럼 하고 있는 지금도 그녀는 그날 밤일을 그저 붙였다 떼어 버릴 일회용 밴드같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인의 입장에선 시작한 이상 그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시후에게 충격을 주더라도 끝까지 해 볼 수밖에.
“아. 됐고요. 그래요. 나 선배 오랫동안 짝사랑했어요. 그런데요. 이제 지긋지긋한 짝사랑 그만합니다. 됐어요? 내 마음에서 현시후 그만 내보낸다고요.”
예상한 대로 시후는 몹시도 충격을 받은 얼굴로 굳어졌다. 눈을 여러 번 깜빡거리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너 나 좋아했어?”
수인은 속으로 천 번 만 번 외치고 싶었다.
네. 네! 얼마나 긴 세월 당신만 바라보며 좋아했는지, 당신이 내 마음 알기나 해요?
그렇게 다 쏟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러면 뭘 할까. 유효기간이 지난 영화표를 쥐고 있는 기분인데, 이미 현시후는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될거라는데.
반면 시후는 지금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김수인, 그저 부끄러워 피한다고 생각했다. 그 시간이 길어지기에 마음이 변했나 걱정했다. 그래서 따지듯 말하고 있는데, 이게 무슨 말인가.
자신이 친하고 막역한 선배라 수인이 그리 대하는 줄 알았다. 때로는 누나 같이 챙겨주었고, 손발이 잘 맞는 수술 파트너였고, 같은 전공을 하고 있기에 대화 또한 잘 통했고, 시후의 아팠던 사랑 이야기까지 죄다 들어주던 김수인.
그런데 그런 김수인이 나를 짝사랑했었다고? 시후는 그날 밤의 여자 김수인보다 지금의 김수인에 더 충격을 받아버렸다.
“네가 나를 좋아했다고? 근데 왜 말 안 했어?”
“내가 그 말을 왜 해요?”
고작 대들듯이 하는 말은 여기까지였다. 시후 옆에서 수인은 그냥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시후가 헤어진 전 여친과의 아픈 시간을 겪으며 스스로 새살을 채워가는 모습을 묵묵하게 지켜본 수인이었다.
그리고 깊었던 상처만큼 여자를 두려워한다는 것도 훤히 알고 있는 수인이었다. 그랬기에 묵묵하게 그저 시후 옆에 후배로 있었다. 전적으로 시후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 수인은 긴 세월을 참고 있었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시후는 스르륵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심각해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는 수인을 보니 귀여워서 당장이라도 껴안고 뽀뽀를 미친 듯이 해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일단 왜 수인이 이리 쌀쌀맞게 구는지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잘됐네. 우리 이제 잘 맞춰보면 되는 거잖아.”
“뭐가 잘됐어요? 내 말 못 알아들어요? 그만한다고요.”
“뭐, 그만해?”
놀란 시후가 눈을 크게 뜨고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왜 자꾸 한 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을까. 그는 또 저만치 달아나려는 수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에 현혹될까 두려운 수인은 괜히 화를 내듯 목소리를 높였다.
“바짓가랑이 붙잡고 늘어지지 않을 거니까 마음 편하게 결혼 하시라고요!”
스스로에게도 화가 났지만 자꾸만 도돌이표같이 구는 시후가 정신을 차렸으면 했다. 그래서 그렇게 쏘아붙이곤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버렸다.
지금 당장 신선한 공기를 쐬지 않으면 한없이 치솟는 혈압으로 졸도를 할 것 같았다. 자동차 밖은 우렁찬 매미소리로 시끄러워 더 짜증이 일었지만, 현시후와 단 30센티미터라도 떨어져 있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눈물까지 질질 짜게 될까 두려웠다. 이럴 땐 독하지 못하고 물러터진 성격이 원망스러웠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올랐던 화를 삭히는데 잠시도 참을 수 없던 시후가 곧장 따라 나왔다.
“너 지금 결혼이라고 그랬냐?”
그는 들었던 말들을 일일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 짧은 순간에 수인의 말들을 조목조목 되새겨 본 것 같았다.
“맞잖아요. 결혼한다면서요?”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했다. 12년을 한결같이 후배로 그의 곁에 붙어 있었지만, 더는 초라해 지기 싫었다. 이제와서 오랫동안 너를 짝사랑해왔노라 고백한다 해도 시후의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아는 그녀로선 결말이 뻔했다. 그리고 제일 걱정은 올바른 일을 함에도 힘겹게 살아가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시후는 생각이 달랐다.
“그리고 뭐 네 마음에서 나를 내보낸다? 그게 그러니까, 할 거 다 해 놓고 날 버리겠다 그 뜻이냐?”
시후는 버려진다는 부분이 제일 참을 수 없는지 이 세상 가장 억울한 얼굴을 하고서 수인에게 확인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