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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을 책임져 (3)화 (3/88)

3화

직원식당 안에 식사 중인 사람들만 대략 50여 명,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36계 줄행랑이 맞을 듯했다. 

수인은 때마침 배식을 받고 자리를 찾는 왕 부장을 얼른 불러댔다.

“부장님. 여기 앉으세요. 전 다 먹었어요.”

“아. 그래. 김 과장.”

수인은 식판을 들고 오는 왕 부장에게 자리를 양보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시후는 아직 상황판단을 못했는지 일어서는 수인을 그저 눈으로만 쫓고 있었다. 

‘저렇게 부끄럼을 타는 애가 어젠 무슨 용기로 그랬던 거야? 아 진짜 더 예뻐 보이네.’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시후는 총총 사라지는 수인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식당에서도 달아나더니, 하루종일 말을 걸어보려 하면 요리조리 시후를 피해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응급 환자가 밀려들어 일에 집중하니 하루가 지나갔다. 그러던 중에 수인은 아버지에게 다녀온다며 주말 내내 자리를 비웠다. 

전화마저 받지 않고, 문자까지 씹어 대는 그녀였다. 그렇게 수인이 시후를 피하는 사이 뜨거웠던 밤을 보낸 지 어느새 4일이나 지나버렸다. 

시후는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12년을 이어오던 선후배 관계에서 연인 관계가 되든 뭐가 되든 정의를 다시 해야겠는데, 수인은 아예 대화조차 피하고 있었다. 

답답했던 시후는 지금이라도 수인을 꼭 봐야 할 것 같았다. 이제 곧 오후 진료 시작이라 진료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자 대기 중이던 환자들이 커다란 키의 하얀 의사 가운을 입은 시후를 쳐다보았다. 

시후는 환자들의 시선을 받으며 곧장 맞은편 김수인의 진료실로 걸어갔다. 수인의 담당 간호사가 놀라서 시후를 쳐다보았다.

“김 과장 안에 있어요?”

“네. 진료 준비 중이세요.”

간호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후는 수인의 진료실 문을 노크도 없이 벌컥 열었다. 옷을 갈아입던 수인이 화들짝 놀라서 주저앉았다.

“어머!”

주저앉는 그녀도 그녀지만, 속이 부글거리며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남자의 다급함은 앞뒤 분간을 못 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야. 김수인!”

“왜? 왜? 아우 깜짝이야.”

수인은 의사 가운을 얼른 걸치며 눈을 치켜떴다. 자그마치 4일이나 속을 새까맣게 태웠던 이유를 당장 내놓으라고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가 이제 또 시각적 자극에 스르르 무너지는 남자였다. 

그는 볼륨감 있는 그녀의 몸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인은 그런 시후를 째려보았다. 미소를 짓다 문득 정신을 차린 시후가 정색을 하였다. 일부러 화난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김수인.”

“왜요?”

화가 난 남자의 얼굴을 보고도 수인은 애써 침착한 척 되물었다. 시후의 입장으론 여자들의 변덕이라면 모르지 않았다. 헤어스타일 어떠냐고 물어보는 여자에게 솔직하게 대답해도, 듣기 좋게 대답해도 똑같이 되돌아오는 살벌한 눈빛과 투정을 경험으로 좀 알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긴 세월 겪어보았던 수인이라는 여자는 단연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남녀의 경계를 넘어 버린 탓일까. 수인도 여느 여자처럼 변덕을 부리는 걸까. 시후는 판단이 잘 서질 않았지만 일단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우리 뭐가 됐든 이야기를 좀 해야 하지 않나?”

“무슨 이야기요? 우리가 해야 할 말이 있어요?”

그녀의 쌀쌀맞은 말투를 들으며 시후는 수인이 그 밤을 기점으로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시후는 시선까지 외면하고 있는 수인을 보자 확신했다. 그녀가 자신을 피한다는 것을. 김수인도  예민하고 알다가도 모를 여자였던가. 시후는 자꾸 시선을 피하는 수인과 딱 마주 보고 싶었다. 

“너 나 왜 피하냐?”

“피해드리는 거예요. 배려차원으로요.”

이렇게 피하고 달아나면 그도 어쩔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비겁하고 치졸한 걸 알지만, 수인도 방법을 몰라 찾고있는 중이었다. 

“뭐? 배려차원?”

황당한 말이란 걸 수인도 모를 리 없지만, 달리 할 말은 없었고 이 또한 거짓은 아니었다. 그를 피하는 동안 머리 쥐 나게 생각하고 생각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물리적인 거리를 두는 일이 지금으로는 최선이었다. 

수인은 시후를 한번 쓱 쳐다보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책상의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마우스를 클릭하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무심하게 대하면 무심해지겠지, 하는 미련한 바람으로. 그러나 시후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달라져도 너무도 차갑게 변한 수인을 제아무리 태평양 같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양보한다고 해도 불가능했다. 

“김수인.”

“외래 시작 안 해요?”

눈은 여전히 무심하려 애쓰며 모니터를 보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마구마구 흔들렸다. 

“지금 외래가 문제야? 너 요 며칠 왜 이래?”

시후는 수인의 진료 책상을 잡고는 몸을 바짝 숙여왔다. 당장 끌어안고 보고 싶었다며 입을 맞춰도 시원치 않을 판에 남자의 성난 마음에 얼음물만 끼얹어 대는 수인을 다그치고 싶었다. 바짝 다가온 남자의 스킨향이 코를 간질이며 수인을 긴장시켰다. 남자를 여태 이리 차갑게 대해 본 적 없는 수인이었기에 마음이 약해졌지만 참았다. 

또 한 번 시후를 무심하게 대하려 애쓰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였다. 

시후의 참을성이 극에 달해 버렸다. 수인은 누구보다 뜨거운 체온으로 굳어있던 남자의 본능을 깨워냈다. 다시는 사랑을 하지 못할 거라 포기했던 남자를 사정없이 뒤흔든 건 그날 밤 수인이었다. 사랑을 맛보고 자꾸만 갈구하게 되어버린 지금 미칠 것 같았다. 시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김수인. 쌩 양아치네!”

순간 귀에서 이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제 귀의 청력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양아치?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인 것 같았다. 수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껌뻑였다. 그 모습이 남자를 더욱 자극했던 모양이었다. 시후는 이곳이 신성한 진료실이라는 것도 잊은 사람처럼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책임감이라고는 없는!”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여과 없이 입으로 나와 버렸다. 

“순진한 남자 건드려 놓고!”

나이 서른이 넘고 사회생활을 하는 남자가 감정을 이렇게 다 드러내놓는 건 가지고 있는 무기를 다 털리는 거라고 배웠다. 상대가 누구더라도 선을 지켜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지금은 도저히 신사인 척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진료실 안을 뚫고 바깥 복도까지 소리가 퍼져 나갈 듯했다. 이제 다급해진 건 수인이었다.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요? 조용히 안 해요?”

수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후의 입이라도 막아볼 요량으로 손을 내뻗었다. 화를 표출했던 시후가 간신히 이성을 찾았다. 수인이 내젓는 손을 덥석 잡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그리고 한층 부드러워진 눈빛과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피한다고 될 일이야?”

“아…….”

잡힌 손은 무안하게도 그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찌릿하고 전기가 전해졌다. 시후는 커다란 덩치에 애처롭게도 눈을 깜빡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이를 어쩌지. 이를 어떡해. 수인은 손을 빼내려 힘을 주었지만, 시후의 거센 손아귀는 더욱 그녀를 붙잡고 싶어 힘을 주었다. 노크 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는 수인을 더 당겨 끝끝내 끌어 안았을 지도 몰랐다. 

“진료 시작해요. 선배.”

“응?”

“진료하자고요.”

“그래. 끝나고 다시 얘기하자.”

수인의 말에 말 잘 듣는 남자가 되어 시후는 천천히 잡았던 손을 놓고 축 쳐진 어깨로 돌아섰다.

수인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자마자 힘이 빠진 채 진료 의자에 털석 앉아 머리를 쥐어뜯었다. 

사실은 울고 싶었다. 차라리 그날 동창 모임에 가지 말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차라리 좋았을까…….

동창모임이 있던 바로 그 날, 수인은 모처럼 응급실, 입원실 콜도 없는 자유로운 몸이 되어 기분마저 가뿐했었다. 때마침 보고 싶은 친구들이 전부 모였다는 기별은 수인을 들뜨게 만들었다. 모임 장소로 들어설 때부터 왁자한 분위기가 수인을 반겼다.

“오, 반장 왔다. 김수인~”

“득표율 90% 전설의 전교 회장님 납시여~”

수인을 반기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블루스를 추듯 흥겨운 몸짓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학창시절 내내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지내던 그 날이 다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에 수인은 마냥 행복했다. 

“너. 너무했어. 내 한 번뿐인 결혼식에도 안 오고.”

입술을 있는 대로 내밀며 투정을 하는 친구에게 수인은 함박꽃같이 활짝 웃어 보였다.

“미안해. 그날 내가 수술 환자만 셋이었어. 진짜 미안해. 두 번째 결혼식은 꼭 참석할게.”

수인의 실없는 말에도 친구들의 호응은 여전히 뜨거웠다. 왁자한 분위기는 수인을 위주로 돌아갔고, 누군가가 새로 들어오고 나가도 모두가 모를 지경이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 끝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도희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걸었다.

“어머. 이도희. 언제 왔냐?”

“어? 지금.”

의무적인 몇 번의 인사가 오고 가고 다시 시선은 수인에게로 몰려들었다. 수인은 학창시절 내내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쾌활한 성격하며 상큼한 외모에다, 공부도 늘 1등일 정도로 잘했고, 의리 또한 대단한 친구였기에 수인을 싫어하는 친구들은 드물었다.  

“야야. 맥주는 배부르다. 우리 다른 데로 옮기자. 응?”

누군가의 제안으로 십여 명이 장소를 옮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인도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도희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수인은 그녀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이번에 큰 공연 하더라. 축하해.”

“그래. 바쁜 애가 내 소식을 다 듣고. 영광인데?”

도희는 새침한 그녀의 이미지만큼 딱 그렇게 대화를 이어갔다. 

“12월에 독주회 하지? 그땐 무슨 일이 있어도 애들이랑 같이 꼭 참석할게.”

“독주회. 글쎄. 그전에 결혼할 것 같긴 한데.”

“아 그래? 축하한다 이도희. 드디어 유부녀 대열에 합류하는 거야?”

새치름한 도희의 말에 수인은 친구로서 정답게 웃으며 축하해 주었다.

“네가 축하해 주니 기분이 좀 이상하네.”

말에 가시가 잔뜩 들어 있어 아무리 무딘 사람도 아플 것 같았다. 원래 까칠한 성격이라는 걸 알지만 수인은 신경이 꽤 거슬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 아직도 현시후 따라 다니는 건 아니지?”

현시후. 도희의 입에서 나올 필요 없는 이름이었다. 자신의 긴장을 들킬까 두려워서 수인은 아랫배에 힘을 단단히 주었다. 그러나 이미 무언가를 눈치챈 걸까. 이도희는 아량 없이 한 번에 훅치고 들어왔다. 

“너 현시후 오래 짝사랑했다며? 네 의대 동기 김희윤이 그러던데. 근데 수인아.”

예리한 칼끝처럼 이도희의 눈빛이 수인을 깊게 파고들었다. 말을 끊었던 도희가 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경멸하듯 코웃음 소리를 내었다. 

“나 현시후씨하고 약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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