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며칠을 울며 고민했고, 몇 일을 한숨만 내쉬며 고민했다. 이제 이 생활도 끝을 내야 할 것이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도 현관 문고리를 돌려 잡기가 힘들었다. 한숨을 내어 쉬고 또 내어 쉬기를 수십 번, 그러다 벌써 이 상태로 한 시간은 족히 서 있었다.
그녀를 또다시 망설이게 하는 사람 소리가 들려왔다. 수인은 현관문에 귀를 바짝 대고 그 소리가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확인을 하고 또 하며 수인의 눈은 파르르 떨렸다.
‘이젠 끝을 내야지. 오늘 밤이 마지막이니까.’
심호흡을 하며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설 때마다 심장은 더욱 떨렸다. 드디어 당도한 201호 앞.
수인은 초인종 앞에서 또 한 번 마른 침을 삼키고는 초인종을 누르기 위해 손가락을 들었다. 매끄러운 감촉이 손가락 끝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꾸욱. 그 남자 현시후가 살고있는 사택의 초인종을 드디어 눌러버렸다.
딩동!
“누구세요?”
이상한 일이었다. 방금까지 한겨울 추위에 떨 듯 그리도 떨었던 수인은 현시후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기 안에 치솟는 용기를 느꼈다. 떨리던 심장이 잠잠해졌다. 하. 역시 위기에 강한 심장이던가. 한 시간을 떨었던 게 마치 거짓말같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문 열어요~”
수인의 목소리를 확인한 시후는 현관문을 빼꼼하게 열고는 쳐다보았다. 수인은 비장한 얼굴로 활짝 열리지 않은 현관문을 확 잡아당겼다.
“이 시간에 왜?”
“술 한 잔 해요.”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허락 따윈 필요 없는 듯 현관에 들어서 버린 수인을 보고 시후는 미간을 좁혔다. 늦은 시간인데 그녀의 얼굴은 어둡고 근심이 가득 차 보였다. 생각할 틈도 주기 싫은지 수인은 시후를 지나쳐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수인은 식탁이 있는 주방으로 걸어가 입고 온 트렌치코트 주머니에서 와인 두 병을 꺼내었다. 그녀의 뜻밖의 행동에 웃음이 날만도 했지만 예고 없는 술손님이 반갑지 않아 그저 기가 찼다.
“나 참.”
그렇지만 그럴만한 이유는 늘 있는 법이니까. 문득 그의 머리에 스치는 부정적인 생각이 그녀의 얼굴과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평소 웃는 인상인 그녀의 표정은 많이 긴장되고 굳어 보였다. 그저 지금 필요한 게 술동무라면 그리해주고 싶은 마음에 시후는 돌아서서 싱크대 상부 장을 열었다.
“그 잔 말고, 그 옆에 좀 큰 잔으로 꺼내요.”
집으려던 잔을 놓고 수인이 말한 큰 잔을 꺼내 식탁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식탁에 앉아있는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미리 귀띔이라도 받고 싶은 마음으로 말을 걸어 보았다.
“또 뭔데? 환자 보호자가 염장이라도 질렀냐?”
“그런 건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잔이나 받아요.”
수인은 능숙하게 와인오프너로 코르크 마개를 빼내었다. 콜콜콜 따라지는 검붉은 색 와인은 진한 향을 풍기며 사택 안에 퍼져 나갔다.
시후는 수인이 눈도 맞추지 않고 심각한 얼굴로 따라주는 잔을 받아들었다. 자신의 잔에 와인을 말없이 채우는 그녀를 보고 더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너 이럴 때마다 내가 수명이 줄어들어. 왜 이러는지 알고나 마시자.”
“알면 협조할 건가? 그냥 술이나 마셔요. 지금은 그러고 싶으니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꽤나 비틀려있었고, 시후에 대한 불만마저 들어있었다. 말을 해버린 수인은 단숨에 한잔을 비워냈고, 또 한잔 가득 와인을 따랐다.
검붉은 와인이 참 예쁘게도 잔에 담겼지만 와인은 왠지 낭만적인 술이란 생각에 수인은 속으로 와인 말고 소주 두 병이 필요했던 건 아닌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 밤은 와인이 어울려야 했다.
한편 시후의 입장으로는 와인을 음미도 없이 연거푸 마셔대는 그녀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필시 속상한 게 있는 것 같은데 좀처럼 말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평소처럼 들어주는 일이 익숙한 시후는 그저 기다렸다. 또 한잔이 급히 비워지는 걸 보고 그제야 그녀가 좀 천천히 마셔주길 바라며 말했다.
“김수인. 기다려. 안주 될 만한 게 있나 찾아볼게.”
“됐어요. 와인이면 돼요. 선배는 그냥 앉아요. 나 선배 얼굴 안주 삼아 마시고 싶으니까.”
생전 처음 하는 느끼한 말이었다. 말을 해 놓고 수인은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 야릇한 말을 들어버린 시후 역시 낯선 말들에 뜨악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오늘따라 이상한 수인을 시후는 수상하게 쳐다보았다.
어느새 와인 한 병이 금세 비었다. 말없이 잔을 급히 비우던 그녀의 눈에 술기운이 올라왔다. 그러나 속도를 더 높이고 싶은 그녀는 남은 한 병마저 오픈해 다시 잔을 가득 채웠다.
“김수인. 왜 이 야밤에 쳐들어와서 신경 쓰이게 하냐?”
따라 놓은 잔을 빼앗아 시후가 벌컥 들이켜 버렸다. 빼앗긴 잔 때문에 화가 났을까. 그녀의 말소리가 꽤나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치! 자기가 언제부터 나한테 신경을 썼대?”
“뭐 자기? 야. 한 잔 더하면 야자 하겠다?”
활기차고 밝음이 그녀의 평소 색깔인데 오늘따라 분위기는 검정색 물감을 마구 섞어 버린것처럼 그녀의 색깔은 탁하고 어둡기만 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그였기에 공격적인 그녀의 말에도 웃으며 응수를 해주었다.
“야자? 좀 하면 어때? 내가 현시후한테……. 시간이 얼만데…….”
얄밉다. 이리 날카로운 꼬챙이같이 구는데도 여유 있게 웃어주는 저 남자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없이 밉기만 했다. 저 웃음, 저 미소 그게 얼마나 사람 환장하게 하는지 알 턱이 없겠지.
수인은 차마 다 털어놓지도 못하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애처로운 자신의 마음을 달래줄 와인이 또 한잔 필요했다.
“술도 못하는 게 천천히 마시던지.”
“치! 언제부터 내 걱정이래?”
수인의 눈이 샐쭉하게 찢어져 올라가 시후를 째려보았다. 저 얼굴, 너무 밉다. 그렇게 쳐다보질 말던 지. 왜 그렇게 사람 뒤흔드는 얼굴을 해서 쳐다보는지.
“야 인마! 이게 직속 선배 알기를 우습게 아네? 너 오랜만에 뻗쳐 한번 할래?”
이 남자, 겨우 하는 말이라곤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사실 시후 입장에선 이 상황이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래. 해! 하자고! 내가 뻗쳐 그따위께 무서울까 봐? 해요 해!”
역시 술의 힘을 빌린 여자는 대담해져 갔다. 평소에 못 내던 큰 목소리는 기본으로 나왔고, 평소에 하지 못한 행동은 폭발하듯 속에서부터 분출되어 나왔다.
수인은 아까부터 더운 여름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꽁꽁 싸매고 있던 트렌치코트를 확 열어 재꼈다. 그리고 후루룩 흘려버리듯 벗어버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젠 제 행동을 감시할 마음이 없었다. 그냥 폭발하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몸이 따라가고 싶었다.
옷 하나 벗었을 뿐인데 시원하기만 했다. 벗어던진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안에 스킨색의 광택이 나는 슬립 하나가 겨우 몸을 가리고 있었다.
수인을 지켜보던 시후는 제 눈을 의심하였다. 지금 앞에 앉은 김수인이 자신이 알고 있던 그 김수인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눈을 꼭 감았다 다시 떠도 헐벗은 그녀만 보였다. 지금 당황한 건 오히려 현시후인듯 했다.
“야. 인마! 옷이 그게 뭐야?”
“여자 속옷 처음 봐요?”
시원한 옷차림처럼 언행마저도 시원하게 나와버렸다. 꽁꽁 얽매었던 사슬을 두둑하고 다 잘라 버린 것처럼 마냥 시원했다.
그러나 시후는 무척이나 놀라버렸다. 여자로 보이지 않던 후배의 벗은 몸을 보게 될 줄이야. 와인을 마셨으나 취한 건 아니었다. 비현실 같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마치 인턴 시절 정신과에서 해보았던 상황극 같기만 한데 대체 뭘까. 시후는 인상을 잔뜩 쓰고 수인에게 경고를 날렸다.
“뭐? 아우. 저게 그냥 직속 후배만 아니면 쥐어 패버리고 싶다!”
“쥐어 패! 차라리 쥐어 패라고!”
코미디 같지만 이젠 술주정에 가까운 대화가 오고 갔다.
아직 술이 부족했던지 수인은 또 와인을 한 잔 들이켰다. 점점 이상한 분위기로 몰아가기에 시후는 남은 와인을 빼앗아버렸다.
“나 안 취했어요!”
“야. 너 취했어. 그리고 그만 너의 집으로 가줬으면 좋겠다. 301호 층간소음 아가씨!”
와인 병을 빼앗으려 손을 뻗은 수인과 와인 병을 사수하려던 시후의 몸이 순간 자석이 서로 붙듯 철컥하고 달라붙었다. 남자와 여자의 몸은 서로의 피부가 닿는 순간 온몸에 전기가 찌리릿 퍼져 나갔다.
시후는 얇은 라운드 반 팔 티셔츠와 치노 반바지를 입고 있어 수인의 몸을 더욱 고스란히 느껴버렸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몸을 떼려던 시후를 수인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두 사람 사이는 이제 틈 하나 없이 바짝 밀착되어 버렸다.
“인마. 뭐하는 거야?”
“오늘 현시후 깨부숴 버릴 거야.”
겨우 용기 내어 말해 놓고 수인 본인도 당황스러웠다.
“뭐?”
수습불가라 판단한 수인은 까치발을 올려 시후의 입술에 다급히 뽀뽀를 해버렸다. 키가 워낙 큰 시후이기에 입술을 오래 붙일 수 없는 게 흠이었지만 일단 수인은 최대한 발가락 끝에 힘을 줘가며 시후의 입술을 훔쳤다.
“오늘 아니면 안 돼.”
진심이었다. 그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수인은 순도 100%였고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었다.
“김수인. 너. 너 왜 이래?”
당황해서 남자는 말까지 더듬었다. 이렇게 예고도 없이 경계를 넘어오다니, 시후는 지금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 오늘은 꼭 여자이고 싶어.”
머리를 사정없이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자신을 여자로 봐달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미 여자의 몸으로 경계를 넘어오는 통에 시후는 벼랑을 더듬어 기어가는 아찔함이 느껴졌다.
“여자로 안아달라고요.”
바짝 추격해 오는 사냥꾼처럼 수인은 빠져나가지 못하게 단숨에 밀어붙였다. 수인은 슬립의 가느다란 어깨끈마저 아래로 내려버렸다. 어깨끈이 볼륨 있는 봉우리에 걸려 아슬아슬 더욱 섹시해 보였다.
그러나 아직 이성이 살아 있던 시후는 조심스러웠다.
“이 자식이 오늘 왜 이래? 너, 남자 무서운 줄을 몰라?”
“그래, 선배는 남자니까.”
중요 단어가 생략된 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인이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랬다. ‘선배는 내 첫 남자니까.’ 말을 삼킨 수인의 눈빛이 한층 요염해져 갔다.
수인은 당황해하는 시후의 배꼽 아래 바지 허리춤을 꽉 움켜잡았다. 이제 달아날 구멍은 단 한 곳도 남겨 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