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7/48)

* * *

오드리아는 몇 날 며칠을 시름시름 앓았다. 그녀가 정신을 잃은 동안 공작가는 깊은 어둠에 빠졌다.

라미엘은 단 한시도 오드리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언제나 침대 머리맡에서 그녀를 지켰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역시 주위의 만류에 겨우 발걸음을 뗐지만 하루에 수십 번씩 그녀의 상태를 보러 찾아왔다.

의식을 잃은 채 눈을 감고 있는 그녀를 볼 때마다 이런 상황을 만든 황태자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사실 오드리아가 쓰러진 것은 연기였다. 처음에는 정말로 만 하루가 넘도록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오드리아가 눈을 스르르 떴을 때, 그녀의 손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라미엘이 손을 꽉 붙잡은 채로 선잠이 든 것이다.

오드리아는 눈동자만 움직여 라미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사이에 살이 꽤 빠진 것 같았다.

“오드리아 님. 일어나셨어요?!”

몸을 닦을 것을 가지고 들어온 메릴이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의 얼굴에 안도감이 가득 찼다.

“쉬이…… 조용해.”

오드리아는 꽉 잠긴 목으로 겨우 소리를 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황태자가 얼마나 광기에 휘말린 인간인지를 오드리아는 똑똑히 목격했다. 황태자의 만행은 지긋지긋할 정도였다. 그는 라미엘의 아픈 과거를 들쑤셨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두 알게 된 오드리아는 그동안 라미엘이 황궁을 드나들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황태자가 그에게 무례하게 굴 때마다 그는 언제나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게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서였을까. 오드리아는 그동안 지나쳐 온 모든 순간들이 떠올랐다.

어머니를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고 어린 라미엘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간 사람들이다. 시간이 지났다고 용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오드리아는 도저히 황태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의식을 차리지 못한 척 다시 눈을 감았다. 메릴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치졸한 수라고 해도 좋았다. 황태자를 더욱더 벼랑 끝으로 밀어낼 수만 있다면. 그녀는 이 정도 꼼수는 황태자에게 마땅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아니, 이건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그가 가지고 누리던 모든 것들을 빼앗을 것이다. 그가 라미엘에게 했던 것처럼.

사실, 오드리아는 황태자가 뭔가 일을 벌이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이었지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황태자궁에 출입하는 시녀들로부터 그동안 정보를 수집해 오고 있었다.

황태자는 포악한 성정으로 시녀들을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유혹이 생길 만한 돈과 황궁을 나온 이후의 삶이 보장되자마자 고민 없이 황태자의 정보를 넘겼다.

오드리아는 그래서 모든 상황에 증거를 남겼다. 황태자가 빠져나갈 수 없도록.

그가 무슨 짓을 벌일 기미가 보인다면 오드리아는 그걸 빌미로 황태자를 압박할 생각이었다.

오드리아 덕분에 불길을 피할 수 있었던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본 모든 것을 빠짐없이 증언했다. 상대가 황태자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은인인 오드리아 님에게 해코지를 했다니. 그들은 자신들을 만나러 온 오드리아가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깊이 분노했다.

“제가 전부 봤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남작님에게 협박하시는 것을요!”

“병사들이 화재가 난 곳의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오드리아 님을 죽일 작정인 것이 분명합니다!”

오드리아는 그동안 많은 선행을 해 왔다.

백성들 사이에서 그녀의 평판은 따라올 자가 없을 만큼 좋았다. 트루디 대공의 이미지가 이전에 비해서 좋아진 것 역시 오드리아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증언과 명백한 증거. 황태자가 도망갈 수 있는 구멍은 없었다.

결국, 오드리아의 계획대로 황태자가 저지른 화재 사건은 오드리아와 라미엘을 노린 황태자가 그를 위해 아무 상관없는 수많은 백성들을 위험에 빠트린 일로 세간에 알려졌다.

황태자가 했다고 하기에 질이 낮고 악질적인 사건에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다. 황태자에 대한 비난의 시선이 삽시간에 퍼졌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렇게 나서는 데에 오드리아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라미엘은 오드리아를 간호하는 내내 말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그녀가 흘리는 땀을 닦고 몸이 굳지 않도록 열심히 마사지를 하며 곁을 지킬 뿐이었다.

그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오드리아가 다치고 의식까지 잃었다.

“……미안해. 미리 말하지 못해서.”

그동안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녀에게 자신이 황자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몇 번이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가능하다면 끝까지 숨기고 싶었다. 황자라는 사실을 모른 채 그저 살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오드리아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오히려 자신으로 인해 오드리아가 죽을 뻔하기까지 했다. 그때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말할걸. 그래서 오드리아가 미리 조심할 수 있도록 할걸. 그럼 이런 일은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오드리아는 그런 그를 한참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가 지금 스스로를 얼마나 자책하고 있는지가 뻔히 보였다.

오드리아는 화나지 않았다. 그가 왜 말하지 않았는지도 이해했다. 그녀를 믿지 못해서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라미엘은 그저 무서워서 말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의 일상이 깨질까 봐.

지키고 싶은 마음에 숨긴 것이다. 그게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아서 오드리아는 그를 이해했다. 그러니 그가 더 이상 자책하지 않도록 위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이런 일이 닥치니 서운한 마음은 조금 남아 있었다. 지금의 행복은 두 사람이 함께해서 존재하는 거니까. 용기를 내어 얘기해 줬더라면 함께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

오드리아의 침묵이 길어지자 라미엘이 불안으로 어깨를 떨었다.

사실 오드리아는 무엇보다 라미엘이 걱정됐다. 이번 화재 사건은 오드리아보다 라미엘에게 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기억하기도 끔찍한 사건을 눈앞에서 또다시 반복한 것이니까.

혹시 이번 일로 과거의 기억이 자꾸 떠올라 힘들어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게다가 그 일을 저지른 최악의 놈, 황태자. 그동안 라미엘이 황태자에게 스스로 몸을 낮추던 행동들이 떠올라 그녀의 마음을 괴롭혔다.

“그동안 황태자를 상대하는 거…… 힘들지 않았어?”

“아니. 별로 신경 안 썼어.”

애초에 황궁에 드나드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괴로운 일일 수도 있었다. 한때는 그곳에서 살았고 살기 위해서 도망쳐 나온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라미엘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황태자의 발등에 입을 맞추라고 해도 상관없어.”

그놈이 오드리아를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라미엘은 뒷말을 삼켰다. 아직도 불이 나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과거의 사건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오드리아를 이대로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공포 때문이다.

황태자가 그녀를 건드리지만 않았다면 이토록 분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무시하면 되니까. 하지만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순간 라미엘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오드리아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라미엘. 앞으로는 그게 뭐든 다 얘기해 줘.”

“…….”

“나는 너에 대해 알고 싶어. 그게 무엇이든.”

라미엘이 오드리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투명한 액체가 반짝이고 있었다.

“약속해 줄래?”

오드리아가 라미엘을 향해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럴게. 약속해.”

라미엘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에게 오드리아가 의식을 잃었던 지난 며칠은 지옥이었다.

오드리아가 라미엘을 향해 팔을 벌렸다. 라미엘이 오드리아를 꽉 안았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품에 안듯. 라미엘은 너무 무서웠다. 그녀를 잃을까 봐. 다시는 이렇게 안지 못할까 봐.

* * *

황제가 황태자에게 황위를 넘겨준다면 트루디 대공은 반역을 일으키고도 남을 것이다.

과거에는 황실의 안정을 위해 황비와 라미엘을 외면했듯이, 이번에는 제국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황태자를 외면할 것이다. 황태자는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가 될 수 없다.

황제의 분노는 그 즉시 황태자가 궁에 유폐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에 대한 처분이 나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반성하라는 황제의 뜻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가만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을 황태자가 아니었다. 황태자는 자신이 유폐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거 열어! 당장 안 열어!”

감히 내가 가는 길을 막다니! 황태자는 악에 받쳐 고성을 질렀다.

하지만 황태자의 분노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모두가 귀머거리라도 된 것처럼 외면할 뿐이었다.

“내가 여기를 나서는 순간 네놈들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황태자는 그들을 향해 협박을 서슴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모두가 황태자의 유폐가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황제는 자조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는 라미엘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군. 황자의 편이 되어 줄 사람이 대공이라서.”

트루디 공작가. 그곳은 어떤 위험에서도 라미엘을 지켜 줄 것이다. 그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황제인 그보다 더.

그러니 그의 존재를 숨겼다고 해서 황제가 뭐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씁쓸한 마음이 교차했다.

이번 일로 사람들의 동정표가 라미엘에게 모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게다가 트루디 공작가는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가문이었다.

“황태자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지.”

“여전하다고 합니다.”

시종장이 묵묵하게 답했다. 황태자는 여전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고 매일같이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고 있었다.

황제의 눈이 깊게 파였다. 이미 몸이 많이 약해진 상황에서 최근 벌어진 일들이 더해지자 그의 몸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움직이는 것은 순전히 그의 강한 정신력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정리를 해야 하는 건가.’

그의 근심이 깊어만 갔다.

그런 그에게 더 이상 기회를 준다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황제가 한숨을 내뱉을 때였다.

“폐하. 라미엘 트루디 남작이 찾아왔습니다.”

라미엘이 찾아왔다.

얼마 전 사건이 일어나고 그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도 찾아오지 않던 그였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온 거지. 황제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가 들어와 예를 갖춰 인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입술이 타들어 갔다.

“황태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라미엘은 단도직입적으로 요청했다.

황제는 순간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라미엘이 찾아온 이유는 자신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차라리 자신에게 원망을 쏟아 내기라도 한다면 그에게 사과라도 할 텐데.

그는 단지 자신의 볼일을 위해서 허락을 구하러 온 것이다.

“그러도록 해.”

황제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한 번쯤은 제대로 만나는 게 필요하겠지. 그가 허락하자마자 라미엘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라미엘은 망설임 없이 그대로 물러났다. 황제와 오래된 인사를 나눈다거나 하는 것은 일절 없었다. 철저하게 선을 그은 그의 태도에 황제도 라미엘에게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라미엘은 황제의 허락을 받고 유폐되어 있는 황태자를 찾아갔다. 라미엘이 황태자를 만나고 싶다고 하자 황제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허락했다.

무슨 목적인지, 뭘 할 건지, 만약 물어봤다면 라미엘은 대답할 수 있었을까.

라미엘은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조차도 그를 만나서 뭘 확인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번은 제대로 만나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가 무슨 짓을 해도 참고 견디던 모습이 아니라 당당하게 그를 일대일로 보고 싶었다. 그러다 감정을 참지 못하고 황태자를 죽이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고, 라미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황태자가 무슨 짓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 모습을 발견한 황태자의 얼굴에 놀라움과 반가움이 번졌다.

드디어 용서해 주시는구나! 황태자의 얼굴이 밝아질 때였다. 그 문 사이로 누군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황태자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

“네놈이 여길 왜 와!”

라미엘이 황태자궁에 들어서자마자 문은 다시 닫혔다.

황태자의 궁이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열 수 없는 문이 라미엘에 의해서 열리고 닫혔다.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굴욕이었다.

황태자가 라미엘을 무시무시한 기세로 노려보았다. 하지만 라미엘은 황태자가 뿜어내는 살의 따위 가볍게 무시하며 다가갔다. 이미 더 이상 황태자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를 무서워하는 것이 더 우스운 일이었다.

라미엘의 생각을 황태자 역시 알았다. 그래서 더 참을 수 없을 만큼 굴욕적이었다. 황태자는 라미엘을 보자마자 찢어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며칠 밤낮을 술에 찌들어 제대로 걷는 것조차 하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그가 라미엘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라미엘은 손쉽게 황태자를 제압했다. 그러다 보니 라미엘이 황태자를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어 있었다.

“편안하십니까.”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모를 리 없으면서 라미엘은 굳이 황태자에게 물었다.

“네놈이 여긴 어떻게 온 거야.”

황태자는 마지막 인내심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지금 기분대로라면 당장이라도 라미엘을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그러면 자신에겐 정말 아무런 기회도 남지 않을 것이다.

일단 참아야 한다. 그리고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머리로는 알지만 피가 솟구쳤다. 황태자는 손톱이 살점을 뜯을 정도로 강하게 쥐며 간신히 버텼다.

“그게 궁금한 겁니까.”

라미엘이 무심히 말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궁금하지 않습니까.”

여전히 무심한 목소리지만 일부러 그의 신경을 긁기 위한 것이다. 라미엘의 눈초리가 갑자기 매서워졌다.

“이건 전부 당신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야.”

라미엘이 그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 폐위되어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황태자는 폐위당할 것이라고. 그것을 바깥과 단절되어 있다고 해서 황태자가 모를 리 없었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황태자의 주먹 쥔 손등의 핏줄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튀어나왔다.

라미엘은 그런 황태자를 더욱 도발하며 말을 이어 갔다.

“내가 황제가 된다고 해도.”

결국 황태자는 폭발했다. 눈앞에서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감히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말을 태연하게 하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황태자는 라미엘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하지만 라미엘은 무심한 눈빛으로 그런 황태자를 쳐다볼 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황태자는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전부 당신이 멍청해서 이렇게 된 거야.”

“야!”

황태자가 발악하며 소리를 질렀다. 피가 몰려서 얼굴이 시뻘게지고 핏줄이 터질 것처럼 모든 혈관이 튀어나왔다.

“그러게 적당히 좀 하지.”

라미엘이 황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퀭하게 패인 눈 밑, 온몸에서 진동하는 술 냄새.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못난 모습이었다.

“그랬으면 지금쯤 이미 황제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황태자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못나서, 어쩌다 열등감으로 가득 차게 돼서, 아무런 문제없이 평탄하게 황제가 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망치게 된 걸까.

라미엘이 보기에 황태자는 너무 흉측해서 안타까웠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라미엘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대체 뭘 확인하고 싶어서 황태자를 만나려고 했던 것일까.

그를 만나고 나오는 길에도 라미엘은 알 수 없었다. 그저 한 번은 제대로 그를 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

막상 보니 살의는 들지 않았다. 그저 한심하다는 생각만이 맴돌 뿐.

저런 놈에게 그동안 당해 왔던 것이, 그래서 소중한 사람을 잃어야만 했던 것이…… 조금 슬펐다.

그리고 지긋지긋했다. 황태자 때문에 꼬였던 자신의 인생들이. 이제는 그 질긴 인연을 그만 끝내고 싶었다.

터덜터덜, 정처 없이 걷는 힘없는 어깨. 라미엘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걷고 있을 때였다.

“라엘.”

“……!”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라미엘이 걸음을 멈췄다.

목소리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역시나 라미엘이 바닥으로 향한 시선을 앞으로 향하자 보고 싶은 얼굴이 있었다. 오드리아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과도 같은 미소를 짓고서.

“오드리아…….”

오드리아는 라미엘의 어릴 적 이름이 라엘이라는 것을 알고 그의 어릴 적 이름을 불렀다.

“볼일은 다 끝났어?”

“라미엘이 좋아.”

라미엘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낸 말은 힘을 가졌다.

“라미엘이라고 불러 줘.”

그는 지금까지 살아온 이름이 좋았다. 그 이름으로 살아오면서, 라엘이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느끼지 못한 것들을 알게 되었다.

오드리아에게 거짓으로 말하기 위해 무심코 꺼냈던 이름. 하지만 그 이름으로 사는 동안 언제나 오드리아와 함께였으니까.

이제는 ‘라미엘’이 진짜 이름이었다.

그녀는 구세주였다.

어쩌면 황태자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를 자신을 전혀 다른 인생으로 살게 해 준 사람.

어머니가 마지막 순간까지 꼭 만나라고 했던 행복.

오드리아는 라미엘에게 구원이자 신이자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였다. 그녀의 발등에 백 번이라도 입맞춤하리라.

라미엘은 오드리아를 향해 다가가는 동안 말없이 맹세했다.

“돌아가자, 라미엘.”

오드리아가 라미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라미엘은 마치 이 순간만이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녀의 손이 다가오는 순간 시간이 느려지고 목이 탔다.

“우리 집으로.”

라미엘이 오드리아의 손을 잡는 순간 그제야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게 착각이든 아니든 라미엘의 시간은 분명 그렇게 흘렀다.

공작가에 도착하자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 제레미아와 쥬아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며 두 사람을 맞이해 주었다.

“어서 오거라.”

“어서 와요.”

“늦었네.”

조금씩 다른 표현이지만 결국엔 모든 말이 두 사람을 반기는 것이다. 라미엘은 드디어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기쁨과 행복은 모두 오드리아가 제게 준 것이다.

* * *

라미엘이 황태자궁을 찾은 사실은 곧바로 모두에게 알려졌다.

두 사람 사이에 경쟁 구도가 만들어졌다. 유폐되어 있는 황태자와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온 것뿐만 아니라 트루디 공작가라는 날개를 달고 나타난 황자 라미엘.

두 사람 중 누가 차기 황제가 될지 사람들의 눈치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태풍의 눈이 고요하기 때문일까.

정작 트루디 공작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특별히 긴장감이 흐르거나 심각한 분위기는 없었다. 언제나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라미엘은 이른 아침부터 제레미아에게 이끌려 고강도 훈련을 하고 있었고 트루디 대공과 오드리아는 그 모습이 잘 보이는 정자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구경하고 있었다.

“저 무식하게 힘만 센 놈과 어울리더니 비슷해지는군.”

무식하게 힘만 센 놈이라며 한심하게 바라보기에는 제레미아와 트루디 대공은 지나칠 정도로 똑 닮았다. 게다가 라미엘은 얼떨결에 같은 취급을 받아 버렸다.

“사이가 좋아 보여서 다행이에요.”

오드리아가 두 사람이 서로 대결을 펼치며 훈련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뭐……? 설마 저게 그렇게 보이는 건가.”

이번에는 트루디 대공이 오드리아의 말에 황당해했다. 아무리 눈에 넣어도 끔찍하게 사랑스럽기만 한 딸이지만…… 오드리아의 시력이 괜찮은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오드리아의 눈은 정확했다. 두 사람은 툭하면 서로 경쟁을 벌이며 잡아먹으려고 혈안이었지만 그건 그들 나름의 관계였다. 지금도 상대가 되는 파트너와 검을 맞대고 있다는 사실에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으니까.

“이제 저한테 밀리시는 것 같습니다.”

“하! 건방지게.”

두 사람이 검을 맞댄 채 서로에게 밀려나지 않게 버텼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제레미아에게 그동안 밀리는 일이 많았던 라미엘이 어느 순간부터 밀리지 않게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제레미아의 기습 질문에 순간 라미엘의 힘이 빠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제레미아가 몰아붙였다.

“아직은 나한테 멀었어.”

바닥에 등을 붙이고 쓰러져 있는 라미엘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치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기는 게 전부인 세상에 그딴 게 어디 있어.”

제레미아가 먼저 트루디 대공과 오드리아가 있는 정자로 향했다.

“다음에 두고 보십시오.”

라미엘이 제레미아를 향해 경고했다. 이런 얕은수에 당한 것이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다음번에는 꼭 이기겠다고 다짐했다.

“다음이 어디 있어. 지금이 중요하지.”

제레미아는 끝까지 라미엘을 약 올리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방금 그 말, 진심이야. 이제 슬슬 어떻게 할지 정해야지 않겠어.”

라미엘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제레미아는 정자에 있는 오드리아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큼 앞서 나갔다.

“…….”

라미엘의 걸음이 느려졌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라는 제레미아의 말은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화제를 갑자기 끄집어낸 것이다.

라미엘 트루디. 또는, 라엘 르세테움. 그중에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지.

제국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그는 아직까지도 거취를 정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라미엘 트루디로서 지내고 있을 뿐.

이 시간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계속 이렇게 있고 싶었다.

하지만 제레미아가 알려 주고 있었다.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제는 눈앞에 닥쳐 있는 문제를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라미엘! 얼른 와!”

오드리아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그리고 신시아와 쥬아나까지. 그의 가족들이 저곳에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라미엘의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그는 이대로 라미엘 트루디로 살아가고 싶었지만 그가 황자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 이상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오드리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가족들과 평소와 다르지 않은 나날을 보내면서 라미엘은 자신 앞에 놓여 있는 문제를 잊지 않고 있었다.

라미엘이 트루디 대공을 찾았다. 그의 눈빛은 이미 결심을 한 모습이었다.

“만나겠습니다.”

“내일 바로 출발하지.”

“네, 알겠습니다.”

라미엘은 돌아가려다 다시 트루디 대공을 바라보았다. 평범하게 보낸 지난 며칠 동안 내심 궁금한 것이 있었다.

“어째서 그동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내가 하지 않아도 지금 답을 가지고 왔지 않나.”

트루디 대공은 언제나처럼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게 오늘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어. 급하지 않거든.”

그의 말대로 여유로웠다. 하지만 공작가를 한 발만 벗어나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

“내가 나의 가족들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기다려 주는 것이다.”

“…….”

“충분히 생각한 끝에 답을 내리면 그때 내 역할이 거기에 있을 테니까.”

트루디 대공은 언제든, 무엇이라도 해 줄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를 도와주기 위해.

“잊지 마라. 한번 트루디의 성을 가진 순간부터 우린 모두 가족이다.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인생을 살게 되더라도.”

“……네.”

트루디 대공은 여전히 무심한 모습이었다. 그에게는 당연하기에 특별하지도 남다르지도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라미엘은 목 끝까지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 * *

라미엘의 앞에 나타난 황제는 병석에 있었던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강인하고 흔들림 없는 모습이었다.

“너의 황자 신분을 복권할 것이다.”

황제는 고민 끝에 라미엘에게 힘을 실어 줘야겠다고 판단했다.

이미 그의 존재가 공공연하게 알려졌다. 하루빨리 후계자를 정하지 않으면 제국이 혼란스러워질 수 있었다.

황태자는 유폐되어 있고 새롭게 나타난 황자는 황태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상황을 마무리하는 발표가 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불안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라미엘에게 황제가 되는 것을 강요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모두가 라미엘에게 다가가 재촉을 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건 급한 문제였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 오히려 진실이 소문과 뒤얽혀서 더러워질 수도 있었다. 그러니 황제가 직접 그의 신분을 복권하고 공표할 생각이었다.

“저는 필요 없습니다.”

라미엘은 덤덤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황자라는 신분은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라미엘은 이제 와서 황자의 신분을 찾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이뤘다.

여기서 황자라는 신분은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었다. 라미엘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오드리아와 함께 있는 것이니까. 괜한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황제와 독대하고 있는 라미엘. 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황제와 신하의 모습이었다. 그 어디에도 부자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저는 이미 라미엘 트루디입니다.”

그는 황자라는 사실을 부정했다. 그보다 단호한 거절은 없었다.

그런 라미엘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이 애달팠다. 그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당장 급한 상황들을 정리하느라 제대로 시간을 두고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단호하게 그를 부정하는 라미엘을 보니 황제는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였고, 라미엘은 꾹 닫은 입술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황제가 힘겹게 입을 뗐다.

“……아들아.”

그의 목소리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조심스러웠고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라미엘은 여전히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그때…… 너와 황비를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

황제는 잊지 못했다. 자신을 찾아온 어린 아들의 부탁을, 하지만 모질게 외면했던 자신을, 그리고 마치 자신을 향해 보란 듯이 타오르던 황비궁의 불길을.

그것은 라미엘이 살아 돌아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 불은 마치 자신에게 하는 원망 같았다. 두 사람을 외면한 자신에게 하는 마지막 아우성. 그래서 황제는 더더욱 잊지 못했다.

또다시 대화가 끊겼다. 황제가 사과를 하는 것은 아무리 비공식적인 일이라고 해도 엄청난 일이었지만, 라미엘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괜찮다는 말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원망을 쏘아붙이기엔 지금의 황제는 너무나 약해 보였다.

어느새 나이가 든 황제는 병마와 싸우느라 이 정도 말을 하는데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결국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황제가 될 생각은 없느냐.”

그때 황제가 나직하게 물었다. 황태자가 황위를 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자신의 황위를 라미엘이 이어야 했다.

문제는 정작 라미엘은 황제가 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저는 지금이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라미엘의 뜻을 무조건 받아들이던 황제 역시 이번에는 물러나지 않았다.

“네가 앞으로 어떻게 살든 그건 네 뜻이지만, 이건 너의 뿌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

“네 어미의 자식이라는 걸 말이다.”

황제의 그 말만큼은 라미엘도 거부할 수 없었다.

황제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계속해서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세상을 떠난 황비를 말했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든 어머니의 자식. 그것을 감히 부정할 수 없었다.

오드리아 역시 라미엘이 신분을 복권하기를 바랐다.

그가 황자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어머니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알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다시 추억할 수 있는 것이 남기를 바랐다.

라미엘의 신분이 복권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에게 죄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죽은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황제와 트루디 대공이 보증했다. 감히 그 말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황태자의 만행이 이미 만천하에 알려졌다. 황태자가 폐위당할 것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고 황제가 때마침 과거에 죽은 줄 알았던 황자의 존재를 알려왔다.

“갑자기 나타난 황자라니.”

“이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트루디 대공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외모와 실력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볼품없는 라미엘이 트루디 공작가의 사람이 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결혼을 하는 것을 두고 오만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차기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존재였다니. 사람들은 감탄 섞인 한숨을 내쉬어야만 했다.

이미 권력의 저울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 무게가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황궁을 드나드는 모든 귀족들이 라미엘이 차기 황제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게다가 이런 생각에 힘을 주는 것 역시 황제였다.

게다가 그는 하필 트루디 대공의 사위였다. 그저 갑자기 나타난 무능력한 황자라면 모를까 이미 수많은 공을 세우고 제국 기사단의 존경을 받고 있으며 무려 트루디 공작가의 보물이라는 오드리아의 남편이 황자였다.

황태자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미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쩌다 이미 다 가진 자리를 놓치는지.”

“가만히만 있었으면 알아서 굴러왔을 텐데 말입니다.”

황태자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듯 한탄했다.

수많은 귀족들은 이미 그들이 어디에 줄을 대야 할지 알고 있었다. 아니, 그 줄을 잡아야만 했다.

어떻게든 트루디 공작가에 친분을 만들어야 한다. 그게 트루디 대공이든 제레미아이든 라미엘이든, 어느 쪽이라도.

하지만 그들은 바로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푹 내쉬었다. 원래도 다가가기 힘든 곳이 트루디 공작가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됐으니 오히려 더 힘들어지면 힘들어졌지,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황제를 보고 돌아오자 트루디 대공 역시 황제와 똑같은 질문을 그에게 던졌다.

“황제가 될 생각인 건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라미엘 트루디가 황제가 될 거라고.

“저는 지금이 좋습니다.”

하지만 라미엘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럼 황제는 지금의 황태자가 될 텐데.”

“저와 오드리아를 건들지만 않는다면 관심 없습니다.”

라미엘은 진심이었다. 오히려 그가 황제가 되면 자연스레 오드리아는 황후가 되어야 하는데 그녀에게 괜한 짐을 얹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최대한 오드리아가 자유롭게 그녀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있기를 바랐다.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해.”

라미엘이 황제가 되면 오드리아 역시 떠나야 했다. 그렇기에 당연히 라미엘이 지금처럼 살겠다고 하면 티를 내진 않더라도 가장 반길 줄 알았는데, 트루디 대공의 반대에 모두가 놀랐다.

“지금 황태자는 황제가 되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가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트루디 대공 역시 오드리아가 떠나게 될 것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수없이 떠올린 가능성 중에서 최선의 선택은 라미엘이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바로 이해했다.

황실의 피를 잇고 있는 이상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황위 싸움을 피할 수 없다.

라미엘이 어릴 적 황비가 그런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것도, 결국엔 황위에 방해가 될 존재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비는 자신과 아이를 지킬 힘이 없었고, 그래서 모든 것을 잃어야 했다.

오드리아는 라미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가 황제가 된다면 잘할 것이다. 오드리아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라미엘은 계속 거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이 있는 황궁이니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미엘의 고민은 오드리아 때문이다. 오드리아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모든 선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오드리아와 함께 행복할 수 있을지였으니까.

거기에 방해가 된다면 황제 따위, 라미엘에게 잘 포장된 도로 위에 난데없이 존재하는 돌멩이에 불과했다. 발로 툭 옆으로 쳐서 도로 위에서 없애버리고 싶은 돌멩이.

하지만 오드리아의 생각은 달랐다.

“라미엘. 내가 황궁에 가서 힘들어 할 것 같아?”

오드리아가 자신만만해하며 웃었다.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나는 분명 황제보다 더 유능한 황후가 될 거야.”

얼핏 들으면 뻔뻔한 말이지만 라미엘은 그녀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동의했다.

“분명 그럴 거야.”

라미엘은 오드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분명 자신보다 잘해 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라미엘은 여전히 망설였다.

오드리아 역시 라미엘의 그런 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내 곁에 라미엘, 네가 있으면 나는 어느 곳이든 행복해.”

오드리아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공작가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잖아.”

라미엘은 그 부분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일방적으로 오드리아에게 사랑을 쏟아붓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드리아 역시 가족들을 사랑했다.

그건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 오드리아가 짓는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 오드리아는 온전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 같았다.

라미엘은 오드리아에게서 가족이라는 행복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모든 아이는 자라나서 독립을 해.”

오드리아는 아이를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빠와 오빠의 가족이 아닌 건 아니니까.”

“…….”

“트루디라는 성이 아닌 다른 성을 가지게 된다고 해도.”

오드리아는 어느새 뒤에 와 있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향해 눈꼬리를 휘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아쉬웠다. 오드리아가 공작가를 떠나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아이가, 여동생이, 너무 훌륭하고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자라나서.

이 모습을 더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볼 수가 없어서.

“대체 어디서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생긴 걸까.”

믿을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었다. 그럴수록 오드리아의 말은 모두 들어주고 싶었다.

모든 상황과 조건들이 라미엘이 황제가 되도록 만들었다. 현재가 행복해서 지금 이대로가 좋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지키기 위해서는 결국 황제가 되어야 했다.

라미엘은 오랜 결심 끝에 트루디 대공을 찾아가 결심을 고했다.

“황제가 되겠습니다.”

“그래.”

트루디 대공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이미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라미엘이 결정을 내리기만 한다면. 그러니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그렇게 결심했으면 제대로 하도록 해.”

“네.”

이미 황제가 원하고 트루디 대공이 직접 나서는 일이었다. 라미엘이 황제가 되기 위해 황태자가 되는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대로 된 제왕학을 교육받지 못한 라미엘이었다.

지금부터 속성으로 배워야 했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을 만큼 강도 높은 스케줄이 이어졌지만 라미엘은 훌륭하게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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