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황제와 만났을 때는 그가 자신의 존재를 아는 것일까 하고 극도로 긴장했었다.
하지만 그는 단지 트루디 대공의 사위로만 알고 있었다. 라미엘 트루디. 그의 이름 뒤에 붙는 성을 중얼거릴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라미엘은 반대였다. 그는 황궁을 나오자마자 처음으로 얼굴을 굳힌 채 트루디 대공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합니다.”
“…….”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라미엘이 단호하게 의사 표시를 했다. 앞으로는 그 어떤 이유라도 이런 자리는 피하고 싶었다.
라미엘은 황자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 것이다. 가능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지내고 싶었다. 누군가 이 행복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만 없다면 그는 지금 이대로 행복과 평화를 계속 이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드리아는 오늘도 옆에서 웃고 있었다. 역시 말하지 않기를 잘했다. 그녀의 얼굴에 걱정으로 인해 그늘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라미엘? 무슨 생각해?”
“……오늘 너무 예뻐서.”
생각에 잠겼던 라미엘이 오드리아를 빤히 바라보며 헤벌쭉 웃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 주며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 어디 갈 거야?”
이미 어디 가는지 알고 있는데도 괜히 물어봤다.
“거기 갔다가 돌아올 때 같이 산책이라도 할까?”
사실은 이 말이 하고 싶어서. 오드리아가 ‘그럴까’라며 답했다. 라미엘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랜만에 단둘이 하는 외출에 들떴다.
오드리아는 봉사를 하러 갈 때마다 특기를 살려 여러 가지 물건들을 직접 만들었다. 그리고 종종 페이지와 함께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소품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가난한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는 좀 더 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오늘은 아이들에게 가르쳐 줄 겸 지금까지 조금씩 만들어 온 물건들을 나눠 주기 위해 페이지와 함께 외출했다.
라미엘은 일정을 마무리한 후 그녀가 있는 곳으로 데리러 갈 예정이었다.
“이렇게 또 와 주시고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이미 오드리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드리아가 만든 것은 손수건부터 시작해서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는 외투에 신발까지 다양했다.
“좋아서 하는 거니 신경 쓰지 마세요.”
그녀는 춥고 배고픈 것이 어떤 것인지 아니까. 그녀에게 쓸모없이 넘쳐 나는 것들을 나눠 주어 그들이 조금이라도 생활이 편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사람을 통해 전달하지 않고 그녀가 직접 오는 것이다.
“마을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밝아졌습니다. 모두 오드리아 님 덕분이에요.”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얘기해요. 다음에 올 때 가져올 테니까.”
“지금 베풀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칩니다.”
“날이 곧 추워질 텐데 겨울을 날 옷이 부족하면 오필리아 숍을 찾도록 해요. 마담 페이지가 잘 챙겨 줄 테니.”
“어유, 너무 감사합니다!”
감사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며 오드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오드리아는 가끔씩 이곳을 찾아와 사람들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시간이 즐거웠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지원만 하고 직접 찾아가지 않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지만 오드리아는 이 시간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가난해서 모든 기회를 박탈당하는 인생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니까. 그녀의 도움을 받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행복을 느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힘을 기르는 법을 가르치면 어떨까 하는데.”
“아이들에게요……?”
“기본적인 것 정도는 할 줄 아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오늘 라미엘이 오는데 한번 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해 주신다면야 저희야 너무 감사할 따름이죠.”
“그럼 라미엘이 오면 아이들에게 다시 설명하는 걸로 하지.”
오드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라미엘이 올 때까지 담소를 이어 나가고 있을 때였다. 순식간에 주위가 혼란스러워졌다. 갑자기 왜 이러지, 의아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필 때였다.
“꺄아아악!”
어디선가 경악에 가까운 외침이 들렸다.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비명 소리가 아무래도 심상찮았다.
“부, 불이야!”
“저기 집에 불났어!”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바로 옆에 있는 집이 불에 잡아먹히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그 불길이 오드리아와 사람들이 있는 건물에까지 퍼지고 있었다.
옆에 있는 집과 가까이 있는 곳부터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도, 도망가!”
사람들은 한순간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기 바빴다.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갑자기 불이라니…….”
이대로는 사람들끼리 엉켜서 큰일이 날 것 같았다. 혼잡한 상황에서 서로 엉키면 살 수 있는 목숨도 죽게 된다. 오드리아가 다급히 정신을 차렸다.
“일단 어린아이와 몸이 불편한 분들 먼저 도와주세요!”
오드리아가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페이지도 바로 그녀를 도와 사람들을 정리하는데,
“나갈 수가 없어요!”
누군가 절박한 소리로 외쳤다.
“문이 잠겨 있어요!”
“그럴 리가. 아까까지도 열려 있던 문인데!”
페이지가 사람들을 비집고 지나가 문을 열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말대로 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제 어떡하죠?”
사람들이 불안에 떨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갑자기 불이 나더니 하필 이 타이밍에 멀쩡한 문이 잠긴다는 게.
‘화재가 아닌…… 방화인 건가.’
오드리아는 직감했다. 이건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고. 오드리아의 눈빛이 매섭게 돌변했다.
정말 방화라면 아마도 범인의 목적은 오드리아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죽이기 위해 죄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고 이런 짓을 벌인 거겠지.
그리고 하필 많은 방법 중에 방화인 이유. 이 상황을 만든 자의 목적을 눈치챈 오드리아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이런 악질적인 짓을 벌일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잠시만요.”
그녀가 나서자 모두가 비켜 주었다. 오드리아가 문 앞까지 가서 세게 두드렸다. 분명 밖에서 상황을 살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독 안에 든 쥐가 발버둥치는 것을 구경하고 싶을 테니까. 오드리아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내보내 줘.”
“…….”
오드리아가 밖을 지키고 있는 자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밖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들은 오드리아의 말을 당연하게도 무시했다.
“너희가 누구의 명령을 받고 이러는지 알겠지만, 나중에 목숨이라도 구제받고 싶으면 내 말 듣는 게 좋을 거야.”
“……!”
그들은 여전히 오드리아의 말을 무시했지만 일부가 동요하고 있는 것이 문 너머로도 느껴졌다.
명령을 따를 뿐 사실 이런 일이 내키지 않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오드리아의 경고가 정말로 무서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내가 무사히 살아나가든 죽든 절대 무사하지 못할 거야.”
문밖을 지키고 있는 자가 오드리아의 말을 무시하고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황태자가 너희를 지켜 줄 수 있을 것 같아?”
“그걸 어떻게, 흡!”
드디어 반응이 흘러나왔다. 도중에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다물기는 했지만. 오드리아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비틀어졌다.
그것만으로도 황태자가 맞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진짜 저질이구나, 황태자.’
오드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방화인 이유를 깨닫자마자 오드리아는 황태자가 주동자라는 사실을 이미 확신했었다.
그의 속셈은 뻔했다. 오드리아가 불길 속에 있는 상황을 만들어 라미엘의 어릴 적 악몽 같은 기억을 떠올려 그를 괴롭히려는 것이었다. 이런 비열하고 질 나쁜 짓을 벌일 사람은 황태자밖에 없었다.
‘절대 용서 못해.’
사람들의 목숨을 벌레만도 못하게 여기면서 심지어 라미엘의 아픈 상처를 들쑤시려 하다니.
오드리아가 닫힌 문 너머를 노려보며 다짐하며 입을 열었다.
“내 아버지와 오라버니께서 이 일을 알게 되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야.”
“…….”
“그러니 지금 기회 줄 때 문 열어.”
우선 이곳을 나가야 한다. 그러려면 이자들을 어떻게든 구슬려야 했다. 그녀의 한마디에 오드리아의 뒤에 있던 사람들이 조마조마하며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바라봤다.
하지만 문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고 실망한 사람들이 거세지는 불길이 잡아먹은 집 안을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할 때였다.
“문이 열려요!”
한 사람의 외침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문을 바라봤다. 그러자 문틈 사이로 서서히 빛이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활짝 열렸다.
“페이지. 사람들을 통솔하도록 해.”
“오드리아 님은요?”
“나는 마지막으로 나갈게.”
“그럼 저도 오드리아 님과 같이 있겠습니다.”
“안 돼. 한 명은 사람들을 정리해야지.”
“하지만…….”
“걱정 마. 바로 나갈 테니까.”
페이지는 걱정이 되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망설일 시간도 없었다.
“절대 지체하지 말고 나오셔야 해요!”
“응. 그럴게.”
오드리아는 애써 페이지를 안심시키고 나서야 뒤로 빠졌다.
페이지가 멀어지자마자 오드리아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지금 나갈 수 없었다.
오드리아가 나간 순간 저들은 문을 닫아 버릴 테니까. 그래서 오드리아는 사람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이곳에 있어야만 했다.
‘마지막에 정신없는 틈을 노리자.’
그래도 오드리아는 어떻게든 이곳에서 나갈 방법을 생각했다.
사람들이 어느새 모두 빠져나갔다. 불길은 점점 더 거세져 당장이라도 건물을 통째로 집어삼킬 기세였다. 오드리아도 더 늦기 전에 나가려고 할 때였다.
“여기까지. 당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 한마디와 함께 문은 굳게 닫혔다.
“오드리아 님!”
“당장 문 열어! 안에 아직 사람이 있단 말이야!”
문밖에서 페이지와 마을 사람들이 오드리아를 구하기 위해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라미엘은 오드리아를 데리러 가고 있었다. 그녀가 부탁한 대로 아이들에게 기본기를 좀 알려 주고 난 뒤,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랜만에 단둘이 시간을 보낼 생각에 그는 들떠 있었다.
근처에 다다랐을 때 그의 시선을 가로막은 매캐한 연기와 높이 치솟은 불길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불길이 있는 곳은 아무리 봐도 오드리아가 있는 곳이었다.
“안 돼……!”
사색이 된 라미엘이 이를 악물고 달렸다.
“……!”
그리고 그곳에는 주위마저도 집어삼키려고 하는 불길을 바라보며 이죽거리는 황태자가 있었다. 그의 모습은 잔인하고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오드리아……!”
라미엘이 그녀를 애타게 부르며 달려가려고 할 때였다.
“어딜 가게?”
황태자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황태자의 얼굴을 보자 순식간에 라미엘의 기세가 험악해졌다.
“당장 비켜.”
라미엘의 위압적인 말에 황태자의 입가가 비뚜름해졌다.
“지금 그렇게 나올 처지가 아닐 텐데.”
그의 말에 라미엘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내게 잘 보여야 저기 갇혀 있는 사람도 구할 수 있을 텐데.”
황태자는 오드리아를 인질로 삼아 협박했다. 어차피 지금은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라는 생각에 그는 의기양양했다.
“지금 당장 구해야 하지 않겠어? 안 그래?”
“…….”
“뜨거운 불길과 연기에 숨이 막히고 괴로울 텐데.”
황태자는 일부러 그를 조롱하며 자극했다. 오드리아를 걱정하는 마음을 이용해서.
라미엘은 당장이라도 비열한 얼굴로 히죽거리는 그를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참았다.
“어떻게 하면 비킬 겁니까.”
만약 그가 비킬 생각이 없다면 라미엘은 검을 꺼낼 계획이었다.
“엎드려서 기어 봐. 그럼 나오게 해 주지.”
라미엘의 앞을 그의 병사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황태자는 라미엘이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시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끝없이 도발했다.
라미엘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됐다. 당장이라도 황태자를 죽이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는 일단 황태자의 요구대로 따랐다. 오드리아를 무사히 나오게 하기 위해.
“만약 오드리아에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황태자에게 고개를 숙였어도 라미엘의 기세는 여전히 그를 잡아먹을 것처럼 험악했다.
“절대 가만 안 둬.”
자신의 평생을 걸고 갚아 줄 것이다. 라미엘은 분노했다.
“감히 네까짓 놈이 황태자인 내게 협박을 하다니 웃기는군.”
하지만 황태자는 라미엘의 경고를 비웃었다. 자신의 앞에서 납작 엎드린 놈이 그런 말을 하는 게 마지막 발악 같아서 더 재미있을 뿐이었다.
“아직 성에 차지 않는데…….”
황태자는 이 시간을 즐기며 여유롭게 시간을 끌었다. 그럴수록 라미엘의 분노는 더 커져만 갔다.
라미엘은 바닥에 이마가 닿을 만큼 더욱더 몸을 숙였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하지만 황태자는 라미엘을 향해 조롱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황태자는 여기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라미엘이 오드리아에게 정신을 쏟는 사이에 두 사람을 붙잡아 처리할 생각이었다. 화재로 인한 불의의 사고로. 그는 이미 결심한 결말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라미엘을 가지고 기분이 상쾌해질 때까지 쥐고 흔들다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트릴 것이다. 어릴 적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생각만으로도 즐거워서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안 되지. 아직 즐길 거리가 한참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초를 칠 수야 없지.’
황태자는 표정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여전히 그의 빈정거리는 듯한 표정과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그러게 왜 남의 자리를 노려. 괜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면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황태자가 조소를 흘리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라엘.”
“……!”
담담해 보이지만 날카로운 음성이 들렸다. 라미엘의 눈이 커지고 이 순간만큼은 도저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분명 그가 라미엘의 이름을 불렀다.
“네놈 정체가 뭔가 했더니. 살아 있었던 건가.”
라미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황태자가 그의 정체를 알고 있다.
“너 목적이 뭐야.”
황태자가 라미엘을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릴 때는 곱상하게 생겨 여자인가 싶을 정도였는데. 그사이에 많이 달라져서 전혀 몰라봤지 뭐야.”
비릿한 미소를 띠며 황태자가 이죽거렸다.
“죽은 듯이 몸을 숨긴 다음에 트루디 대공가에 들어가다니. 머리를 잘 굴렸더군.”
“…….”
“나를 몰아내기라도 할 작정이었나.”
황태자의 얼굴에 분노가 가득 찼다. 그는 이미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하아…….”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라미엘은 한숨이 나왔다. 황태자는 또 어떻게 알게 된 거지.
트루디 대공에게 한 번 정체를 들키고 난 후부터 그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는 황태자를 밀어낼 생각도 황제가 되고자 한 적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황자라는 사실도 숨기고자 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들쑤시다니.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 짓을 벌인 거야?”
라미엘의 날카로운 음성이 당장이라도 황태자의 목을 잡고 위협할 것처럼 위험했다.
황태자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지만 곧 표정을 풀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게 왜 살아 돌아왔어.”
황태자가 귀찮다는 듯이 비아냥거렸다.
라미엘은 한심한 황태자의 짓거리에 이가 갈렸다.
“당장 비켜.”
하지만 일단 급한 것은 오드리아를 구하는 것이다. 황태자를 처리하는 건 그다음이다.
그가 황태자를 무시하고 달려가려고 할 때였다.
황태자의 뒤에 있던 사복을 입은 병사들이 라미엘을 둘러쌌다.
“내가 쉽게 보내 줄 거라고 생각했어?”
“……!”
라미엘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오드리아가 잘 견딜 수 있을지, 몸이 상하지는 않았을지, 놀라지는 않았을까, 혹시 자신에게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았을지.
라미엘은 아직 오드리아에게 자신의 정체에 대해 제대로 고백하지도 못했다.
‘좀 더 빨리 고백할걸.’
당장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아 털어놓지 못했는데 황태자 때문에 이런 식으로 알게 하다니. 깊은 후회만큼이나 황태자를 향한 강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디 가서 구해 봐.”
황태자가 옆으로 비켜 주며 말했다. 병사들 역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지금까지 막아 놓고서는 이제야.
뭐 하는 수작이지, 의심부터 갔지만 지금은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라미엘이 당장이라도 튀어가려고 할 때였다.
몸의 중심이 앞으로 쏠렸던 라미엘을 뒤로 밀어냈다. 전혀 대비하지 못한 라미엘은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병사들이 라미엘을 좁게 다시 포위했다.
“아니면 이번에도 너 때문에 죽게 만들든가.”
“……!”
황태자는 명백히 과거의 일을 들먹이며 조롱하고 있었다.
황태자는 라미엘에게 어린 시절의 끔찍한 기억을 재현시켜 줄 생각이었다. 그때는 그의 어머니였다면 이번에는 그의 아내로.
라미엘은 그 사실을 눈치채자마자 폭발했다.
라미엘은 눈 깜박하는 사이에 검을 빼들어 황태자의 심장을 관통하려 했다.
그 순간 건물에 불길이 크게 치솟으면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불길이……!”
“어떡해…… 저 안에……!”
사람들의 경악과 탄식을 들으며 라미엘은 정신을 바로 잡아야만 했다.
오드리아가 여전히 불길 속에 있었다. 여기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해서는 그녀를 구할 수 없다. 라미엘의 눈빛이 단호해졌다.
“지금 저지른 일, 후회하게 될 거야. 아니, 그렇게 만들 거야.”
“대단한 자신감이네. 당장 자기 여자 하나 못 지키는 주제에…….”
황태자가 비아냥거림을 이어갈 때였다. 라미엘이 순식간에 병사들을 제압해 나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미처 방어하지 못한 병사들이 우르르 쓰러지자 허무하게 포위 진영이 허물어졌다.
병사들을 거의 다 쓰러트린 라미엘이 살의 가득한 시선으로 황태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기세에 압도된 황태자가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을 칠 때였다.
라미엘은 황태자를 밀어내고 이미 건물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있는 불길을 향해 달렸다.
그 순간에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불에 대한 공포는 완전히 잊힌 상태였다.
앞뒤 재지 않고 불길 안으로 뛰어드는 라미엘을 보고 누군가 뒤에서 ‘위험해!’라고 외쳤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드리아. 제발 무사해 줘.’
그의 몸에 불이 붙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건 고통의 축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모습이 불구덩이에 뛰어든 악귀의 모습과도 같아서 그걸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덜덜 떨게 만들었다.
잠시 후, 라미엘은 오드리아를 품에 안은 채 불길에 먹히기 직전인 건물을 벗어났다. 그리고 오드리아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정신을 잃었다.
* * *
화재를 빙자한 방화 사건이 뒤늦게 트루디 공작가에 알려지자 발칵 뒤집혔다. 트루디 공작가에 흐르는 분위기만 보면 당장 무장을 한 채 황궁으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지금 이게 말이 됩니까! 감히 누구한테 말도 안 되는 만행을!”
“…….”
“정식으로 항의를 해야 합니다.”
감히 트루디 공작가를 이런 식으로 도발하다니. 제레미아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당장이라도 황태자궁에 불이라도 지를 기세였다.
“고작 징계로 끝나게 하지는 않을 거다.”
트루디 대공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뜻은 공식 항의로는 할 수 없는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인데, 아직 황제도 되지 않은 황태자가 저지르다니.
트루디 대공은 당장 터질 것 같은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상황을 마무리한 후에 터트리기 위해. 그리고 그 분노는 결코 쉬이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트루디 대공은 황제를 만나기 위해 가던 중, 황태자와 마주쳤다. 그를 보자마자 트루디 대공의 얼굴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트루디 대공이 황태자를 향해 가까이 걸어갔다. 이번 일에서 진짜 멍청한 짓을 한 자는 바로 황태자였다. 그는 스스로 상황을 최악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그 사실을 트루디 대공은 똑똑히 알려줄 생각이었다.
“무능한 놈이 황제가 될 수는 있어도.”
“뭐?!”
황태자는 영리하지 않았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처음부터 그가 후계자였고 마땅한 대체자도 없었기에 그의 측근들이 그의 부족함을 메워 왔을 뿐.
“천지 분간 못하는 놈이 황제가 되는 꼴을 볼 수 없지.”
트루디 대공의 서늘한 경고였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그렇게 할 것이다. 그가 지금까지 황태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 역시 트루디 대공이 황태자의 무능함을 눈감아 줬기 때문이니.
“이번 일은 절대 잊지 않도록 하지.”
“……!”
“일리세드 르세테움.”
트루디 대공이 황태자의 풀네임을 불렀다. 그는 명백하게 황태자를 하대하고 있었다. 더 이상 그를 황태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황태자는 초조해졌다.
주위에 있는 시종들이라도 괴롭히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그럴수록 황태자의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 * *
이번 황태자의 실수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그가 벌인 일로 잊혔던 황자의 존재가 모두에게 알려졌다는 것이다.
아무도 몰랐던 버려진 황자의 생존 소식. 게다가 병에 걸린 황비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궁에 화재를 일으켰다는 것까지 알려지며 그녀의 처절한 모성애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라미엘과 오드리아를 위험에 빠트리려고 한 황태자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고 그에 대한 평가가 곤두박질을 쳤다.
그런 놈에게서 황태자의 자리를 빼앗아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황태자의 행동은 스스로 제 발등을 찍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필, 오드리아를 건드리다니. 황태자가 쓸 수 있는 방법 중에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황제는 병석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고 분노했다. 황제는 말리는 시중들을 뿌리치고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이…… 미친놈!”
“폐하! 진정하십시오!”
“움직이시면 몸에 무리가 갑니다!”
시종과 시녀들이 놀라 황제를 만류했지만 분노한 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금까지 침대 위에만 누워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형형한 기세였다.
황태자궁으로 황제가 들이닥쳤다.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습니까. 저를 부르시지.”
갑작스런 황제의 등장에 놀란 황태자가 달려 나왔지만 그를 맞이하는 것은 황제의 불호령이었다.
“네놈이 제정신이냐!”
“폐하…….”
갑자기 날아온 불호령에 황태자는 뺨을 세게 맞은 것처럼 입 안이 얼얼했다. 하지만 황제는 더더욱 목청을 높여 화를 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해! 그것도 황태자라는 놈이 거리의 낭인들보다 질 나쁜 짓을 하다니!”
“…….”
“무고한 백성들을 위험에 빠트린 것뿐만이 아니라 오드리아 영애와 그 남편을 죽이려 하다니! 너는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폐하의 아들이지 않습니까.”
“뭐?!”
“트루디 대공의 사위가 전부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과거에 죽은 줄 알았던 황자 말입니다!”
황태자가 결국 참지 못하고 억울함에 소리를 높였다. 자신이 아무나 죽이고 싶어 환장한 것이 아니라고,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냐고.
하지만 오히려 황제의 분노를 키울 뿐이었다.
“그래서, 네 행동이 정당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
황태자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황제의 분노는 차갑게 파란 불꽃으로 일렁였다.
“너는 절대 내 뒤를 잇지 못할 것이다! 차라리 황가의 성을 바꾸는 게 나아!”
황제가 버럭 노성을 터트렸다. 지금까지 황태자가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분노한 적 없는 황제였다. 이토록 단호하게 그의 존재를 거부하는 것 역시.
황태자는 라미엘을 죽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과거에는 그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할 수밖에 없었지만, 두 번은 아니었다.
그는 피가 거꾸로 솟구쳐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분노했다. 그 열이 너무 세서 지금 당장 여기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아무리 제가 못마땅해도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황태자가 결국 참지 못하고 황제에게 대들었다. 그 순간 황제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어리석은 놈…… 네가 그런 짓을 저지르지만 않았으면 나는 그가 황자임을 몰랐을 것이다.”
“……!”
“결국 네가 한 짓은 너 스스로를 몰락시키고 내게 잃어버린 황자를 찾게 해 준 것이다.”
황제의 싸늘한 음성이 그를 향했다. 황태자는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멍한 얼굴로 되묻는 황태자의 모습에 황제는 한탄스러웠다. 어째서 이토록 어리석은 것일까. 믿음을 주기는커녕 자신의 고민을 한층 더 깊게 만드는 것일까.
“나는 그가 황자인 줄 몰랐다.”
황제가 황태자의 심장에 쐐기를 박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면 황제는 물론이고 제국민 모두가 그가 황자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냥 그렇게 황태자가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태자가 황자의 존재를 스스로 알려 버렸다. 이제 그는 황제가 되기는커녕 지금의 자리도 지키기 어려워졌다.
어쩌겠는가. 스스로 그리한 것을. 황제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분명…… 만나지 않았습니까.”
황태자는 황제의 말에 혼란스러워하며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분명히 황제와 라미엘이 독대했다.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아아, 그런가…… 그랬던 건가.”
황태자의 말에 황제 역시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갑작스럽게 트루디 대공이 만든 자리. 황제는 그가 자신의 가족을 소개시키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그는 일부러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닌데.
‘그는 내게 그렇게라도 만나게 해 주려고 했던 거였군.’
그리고 라미엘 역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황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황제는 지난번에 만났던 라미엘을 떠올렸다.
그의 흑발을 볼 때면 자꾸만 황비가 떠올랐다. 그래서였나. 그가 황자였기 때문에 볼 때마다 그런 기분이 들었던 건가.
그런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세히 살펴볼걸. 그날 제대로 보지 않고 흘려보낸 것들이 후회되었다.
“그건 그런 자리가 아니었다.”
황제는 라미엘을 소개받을 때까지만 해도 그가 황태자를 잘 지켜 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사냥 대회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기는 했지만 어차피 다른 대안이 없었다.
결국엔 황태자가 황제가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상황은 또 달라질 테니. 믿을 수 있는 든든한 자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고작 그런 걸로 이런 짓을 벌였다니. 결국 그게 네 한계인 거겠지.”
어째서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느냐는 한탄과 나무람이었다. 황태자는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차라리 그저 멍청한 놈이었으면 나았을 텐데…… 이토록 구제불능이었을 줄이야.”
“……!”
“너는 마지막 기회마저도 스스로 차 버린 것이다. 이제부터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체념하고 받아들여라. 네가 책임져야 할 결과물이니.”
황제의 쓸쓸한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황제는 이제 황태자로부터 등을 돌리고 완전히 멀어져 갔다. 황제가 더 이상 보이지 않자 황태자는 바닥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