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5/48)

chapter 20. 버려진 황자

라미엘은 최근 들어 생각에 빠지는 시간이 많았다.

얼마 전부터 트루디 대공이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트루디 대공이 뭔가를 알게 된 건가?’

라미엘은 그런 직감이 들었다.

‘왜 갑자기…….’

트루디 대공이 폭로하기 전에 오드리아에게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하지만 라미엘은 더 이상 황가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오드리아에게 말하는 순간 지금까지의 모든 행복이 깨질 것만 같았다.

라미엘은 도저히 사실을 밝힐 수 없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집에서 태어난 거였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자신의 과거를 버리자 오히려 그의 과거를 찾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라미엘이 보기에도 상황은 점점 그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모든 상황이 라미엘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라미엘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이미 트루디 대공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조차도 자신이 황자였다는 사실을 잊었을 만큼. 그래서 지금까지 그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젠 아무도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모두가 어린 황자가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잊은 줄 알았다. 이렇게 갑자기 그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있을 줄은 전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라미엘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개였다. 어떻게든 발뺌을 하고 아닌 척하는 것 혹은 솔직하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 것.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지든 라미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후에도 오드리아와 지금처럼 함께 있을 수 있을 것인지였다.

‘역시…… 대공께 말하는 것이 나으려나.’

라미엘은 트루디 대공을 찾아갔다. 그가 왜 찾아온 것인지 아는지 트루디 대공이 주위 사람들을 모두 물러나게 했다.

“그래. 무슨 일이지.”

“할 말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트루디 대공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가는 듯한 얼굴이었다. 라미엘은 고르고 고른 말을 내뱉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누구냐고 물으셨지요.”

“…….”

“저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결심한 일이어도 그동안 단 한 번도, 실수로라도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말하는 것은 굉장히 낯선 감각이었다.

“라엘 르세테움.”

“…….”

“그게 제 진짜 이름입니다.”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꺼낸 풀네임.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그래도 목소리 끝이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트루디 대공 역시 이미 짐작하고 있었는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저 잔잔한 호수 같은 시선으로 라미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찾으신다.”

그의 정체를 스스로 밝히면서도 그를 찾는 사람이 황제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라미엘과 그의 어머니를 버렸으니까.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황궁을 도망쳐 나온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와 왜 찾는 것이지. 라미엘은 지금까지 중 그 어느 때보다 흔들렸다.

“만나 보겠나.”

“…….”

라미엘은 대답할 수 없었다. 황제를 만나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왜 찾았냐고? 이제 와서? 무슨 목적으로?’

그의 마음속에 불길이 치솟았다. 라미엘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본 트루디 대공이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저를 왜 찾은 겁니까.”

라미엘의 눈빛이 도전적으로 변했다. 아무리 트루디 대공이라도 황제와 함께 그를 찾았다는 것은 그 목적이 무엇인지에 따라 그에게 등을 돌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글쎄. 나는 그저 명에 따랐을 뿐이라서.”

“…….”

“직접 만나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되겠지.”

그의 거부감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지.”

트루디 대공이 화제를 전환하며 물었다. 황자로 돌아가고 싶은지, 자신의 신분을 복원하고 싶은 건지, 혹시 지금까지 자신의 정체를 숨긴 목적이 따로 있는 것인지.

고민할 필요 없는 대답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였으니까. 그래서 그저 자신의 진심을 터놓았다

“……저는 오드리아의 남편인 채로가 좋습니다.”

라미엘은 더 이상 과거의 일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차지했으니까.

오히려 자신의 진짜 신분이 드러나게 되면 괜한 분란만 생겨날 것이다.

“제 신분은 저에게 언제나 족쇄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 신분 때문에 어떤 수모에도 속이 없는 것처럼 웃어넘겨야 했고 끊임없는 조롱을 듣고 목숨에 위협을 받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만 했다. 제대로 된 가족의 행복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황자이던 시절 그의 기억은 모든 것이 참혹하고 끔찍했다.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황자이기에 죽음과 싸워야 했고 결국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황자였던 그 신분 때문에 제 평화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라미엘은 말을 하면서도 감정이 절제되지 않았다. 목소리에 울음이 끼고 눈이 붉어졌다. 수많은 날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저는 황가와 관련하여 그 무엇도 원한 적이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모두에게 목 놓아 외치고 또 빌고 싶었던 진심이었다. 원하지 않았다. 황권에도, 태어난 순간 정해진 황자라는 신분도.

라미엘은 트루디 대공이 자신의 말을 믿어 주기를 바랐다. 그에게는 오드리아가 전부라는 사실을. 라미엘은 트루디 대공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오드리아의 남편. 제가 원하는 것은 이 자리를 지키는 것뿐입니다.”

애초에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이 어떻게 나올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딱히 황실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전통적으로 황실의 편에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황제는 물론 황태자 역시 비호하고 있었다.

이제는 가족이라고 해도 그런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위험인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리아에게는 말할 건가.”

하지만 트루디 대공이 신경 쓰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트루디 대공에게 중요한 것은 황태자에게 새로운 경쟁자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그 황자가 오드리아의 남편이자 자신의 사위라는 점이었다.

라미엘은 그 대답 역시 쉽게 할 수 없었다.

“이대로 살 거라면 말하지 마.”

트루디 대공이 대신 말했다. 만약 이대로 황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을 거라면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최대한 적은 것이 좋았다. 괜히 아는 사람이 늘었다가는 알리고 싶지 않아도 알려지게 될 테니까.

트루디 대공은 생각보다 무심하게 돌아서려고 했다. 그러다 멈칫, 다시 라미엘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만나고 싶지 않은 건가.”

라미엘은 트루디 대공이 말하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지 눈치챘다. 그 사람은 바로 라미엘의 아버지이자 황제였다.

“만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라미엘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지금 황제를 만나는 건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만 할 뿐이다.

* * *

트루디 대공은 황제에게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했다.

황자를 찾았다고, 그리고 그는 지금의 삶에 만족해서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트루디 대공도 차마 그가 아비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얘기할 수 없었다.

그의 보고를 들은 황제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그 침묵에 담긴 의미가 회한인지 실망인지 혹은 분노인지 트루디 대공조차 짐작되지 않았다. 그저 황제가 말을 하기까지 기다렸다. 황제의 음성이 끊길 듯 희미하게 흘러나왔다.

“그런가.”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역시 회한에 잠긴 것인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황제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행복하다니, 다행이군.”

자신의 처지 때문에 어린아이를 외면했었다. 그때의 기억이 평생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니 이번에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그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다만 그 아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만약 그가 힘들게 살고 있다면 황궁에 불러들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미 행복하다니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그럼 더 이상 찾지 말게.”

황제는 아이를 보지 못해도 괜찮았다. 자신에게는 애초부터 그럴 자격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소식이라도 들은 것이 어디인가. 황제는 그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평소라면 황제의 말에 가타부타하지 않고 무심하게 알겠다고 했을 트루디 대공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라미엘도 황제도 서로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트루디 대공의 말에 황제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궁금해도 할 수 없지 않은가.”

트루디 대공은 순간 황제가 누워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어깨가 처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혹 들을 수 있을까.”

황제의 눈에 약간의 기대가 비쳤다.

“그 아이가 어떻게 컸는지, 지금은 어떤 모습인지.”

트루디 대공은 평소답지 않게 감성적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라미엘에 대해 마치 옛날이야기를 하듯이 이야기해 주었다.

어느 가문에서 일을 하며 자란 얘기, 그곳에서 호위 기사가 된 얘기, 그러다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빼고. 노예 시장에서 그를 처음으로 만나 트루디 공작가에서 그를 거뒀다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황제에게 숨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죄책감을 덜어 주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결혼까지 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하하, 그렇군.”

황제는 숨이 가쁜데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 마치 자신도 이루지 못한 것을 해낸 자식이 대견하다는 듯이. 자신의 아이와 얼굴도 모르는 며느리의 행복한 모습이 그려졌다.

“아이는? 아이도 있는 건가.”

“아이는 아직 없습니다.”

“그런가, 아이는 아직 없군.”

황제는 의미 없는 말을 반복하며 머릿속으로 그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렇게 버리듯이 놓아 버린 아이인데,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심지어 잘 살고 있다니. 부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가능하다면, 그대가 신경을 좀 써 줘.”

“…….”

“이건 부탁이네.”

멀리서 지켜보다가 혹 곤란한 상황이 생기거든 도와 달라 황제는 부탁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네.”

황제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트루디 대공은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찝찝함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마치 자신이 라미엘을 숨기는 것 같아서.

‘끝까지 이 사실을 숨길 수 있을까.’

황제를 만나고 나온 트루디 대공은 의구심이 들었다. 그는 바로 지척인 트루디 공작가에 있었다. 게다가 황궁에 수시로 드나들었다.

결국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다. 트루디 대공은 직감했다.

* * *

황태자가 황제를 만나기 위해 갑자기 찾아오자 시종장이 그 앞을 막아섰다.

“폐하께서는 왜 만나지 않겠다고 하시는 거지?”

“휴식을 취하셔야 하셔서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계십니다.”

“누구와도?”

황태자의 목소리가 비틀려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명백한 조소가 흘렀다. 당장 시종장의 목이라도 비틀 것 같은 위험한 분위기였다.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시종장은 끝까지 흔들림 없이 답했다.

“그래?”

황태자가 팔짱을 낀 채 시종장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떻게 할지 고심하고 있는 눈초리로. 주위에 있는 시종들이 긴장한 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그럼 할 수 없지. 다음에 다시 찾아오는 수밖에.”

방금 전까지 내뿜고 있던 위협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황태자는 쉬이 돌아섰다.

황태자궁으로 돌아가는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아무도 안 만난다고?’

시종장이 그에게 한 말을 떠올리자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는 황제가 트루디 대공을 만났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되고 황태자는 안 된다.

‘개 같군.’

욕설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입 안이 독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썼다.

두 사람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독대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자체만으로는 황태자 역시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자신을 만나는 것은 거부하면서 트루디 대공과는 계속 만나는 것은 문제였다. 곧 황제가 될 사람은 그였다. 그런데 자신이 밀려나는 기분을 들게 했다.

그게 황태자의 신경을 건드렸다.

아무래도 황제와 트루디 대공 사이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 없어 답답하다는 것이지만.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분명 황제의 명에 트루디 대공이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다음부터 알아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럴수록 초조해졌다.

“무조건 알아내야 해.”

트루디 대공이 하고 있는 게 무엇이든 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의 움직임을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모든 것은 트루디 대공에 의해 막히게 되어 있었다.

황제와 트루디 대공이 벌이려는 일이 어느 정도 진행이 됐다면 그게 무엇이든 수면 위에 떠올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으니 아직 그들이 뭔가를 제대로 하기 전인 것이라고, 그러니 그전에 알아내서 막아야 한다고. 황태자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추측은 틀렸다.

황제와 트루디 대공이 하는 일은 황자를 찾는 일이었고, 트루디 대공은 이미 그를 찾았으니까. 하지만 이 일을 수면 위로 올릴 생각이 없어서 아직까지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황태자는 트루디 대공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단서를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가는 만큼 자신의 자리도 위험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날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만큼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럴수록 그에게 화풀이를 당하는 시녀와 시종들이 늘어났고 황태자의 평가는 안 좋아졌다.

“트루디 대공을 감시해.”

“하자마자 바로 들킬 것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황태자 역시 고민한 것이고. 하지만 붉게 충혈된 그의 눈은 이미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거 하나 똑바로 못해?!”

황태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신경질을 부렸다. 하지만 그의 직속 기사들도 억울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트루디 대공이었다. 그를 감시할 수 있는 사람이 제국에 있을 리 없었다. 분명 시작하자마자 그에게 들켜서 죽임을 당할 것이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그게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이니까!”

기사들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자신이 모셔야 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것을 요구해도 그것을 따르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기사들은 자신 없이 대답했다.

황태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기사들에게 어떻게 진행되는지 물었다.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신통찮았다.

황태자의 기분은 점점 더 안 좋아졌다. 당장 터질 듯 위험한 상황에 황태자궁에서 일하는 이들은 모두 숨조차 편히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황태자는 지금 이 불쾌함을 풀 곳이 필요했다.

언제 죽여도 상관없는 시녀나 시종들 같은 하찮은 것들이 아니라 좀 더 속이 시원해질 만한 상대가 필요했다.

그리고 하필 그의 분풀이가 향해서는 안 되는 곳으로 향하고야 말았다. 자신과는 다르게 승승장구하는 라미엘에게로.

자신이 노리고 있던 오드리아와 갑자기 결혼을 발표하더니 트루디 대공의 비호를 받으며 인생이 달라졌다.

사실 그가 아무리 잘나간다고 해도 황태자인 그에게 충성해야 할 신하 중 한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황태자는 라미엘이라는 존재가 거슬렸다. 그를 제대로 한번 밟아 주지 않으면 성미에 차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그놈 곁에는 트루디 대공의 보물이라고 불리는 오드리아가 꼭 붙어 있었다.

그래서 황태자인 자신 역시도 함부로 건들 수 없었다. 그것이 몹시 불만스러웠다. 자신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

라미엘과 오드리아, 황태자의 자격지심을 자극하는 두 사람이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하지 못할 일이 어디 있어.’

황태자의 눈빛에 적의와 분노가 감돌았다.

* * *

황제를 만나고 온 후부터 트루디 대공과 라미엘 사이에 기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서로의 존재를 눈에 띄게 의식하며 긴장감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게다가 트루디 대공은 최근 뭔가를 비밀리에 조사 중이었다.

‘혹시 그게 라미엘도 관련이 있는 건가.’

아무래도 두 사람 사이에 일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았다. 오드리아는 사실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그녀 또한 이전에 몇 번이나 라미엘에 대해 의아함을 느낀 적이 있었으니까. 다만, 지금까지는 그녀가 묻지 않는 게 라미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한번 알아보는 게 좋겠어.’

오드리아는 라미엘의 과거에 대해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노예시장에서 만나기 전 그의 행적들에 대해서.

그리고 트루디 대공의 눈을 피해야 하는 일에는 페이지가 도움이 되었다.

“알아볼 수 있겠어?”

“라미엘 님은 오필리아 숍으로 끌려왔으니 거기서부터 찾아볼게요.”

오드리아가 페이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시선을 느낀 페이지가 물었다.

“아냐. 자세히 좀 알아봐 줘.”

“네. 그럴게요.”

페이지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접하고 비밀을 공유하면서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위치였다. 거기에 페이지 역시 어린 시절의 라미엘을 알고 있었다.

페이지는 며칠 만에 오드리아에게 드릴 말씀이 있으니 오필리아 숍에 방문해 달라는 연락을 보내왔다. 그녀의 할 말이 라미엘에 관한 것이라는 생각에 오드리아는 한달음에 도착했다.

“알아볼 수 있는 건 전부 알아봤습니다.”

페이지가 내민 문서에는 라미엘에 대한 많은 정보가 들어 있었다. 그가 거리를 떠돌던 시절부터 오필리아 숍의 노예시장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까지. 하지만 그중에는 불명확한 것이 몇 가지 있었다.

“고향을 알 수 없어……?”

“네. 다들 갑자기 거리에 나타난 아이라고들 했습니다. 처음부터 고아였다고 하니 아무래도 고향을 알아내는 건 무리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오드리아에게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했었다. 그리고 그게 가짜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고향을 알 수 없고 어느 날 갑자기 길에 나타났다라…….’

그럼 나타나기 이전에 부모와 헤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라미엘에게서 가끔 느껴지던 위화감이 떠올랐다.

거리를 헤매다 노예 시장까지 흘러간 소년이었지만 라미엘의 행동에는 격식이 배어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익혀 굳은살이 박인 것처럼.

생각해 보면 거리의 소년이 그런 예법을 자연스럽게 익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거리에 나오기 전에 배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라미엘은 최소 몰락한 귀족 출신일지도 모른다.

그럼 그 시기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이 시기에 가문이 망했거나 문제가 있었던 가문은 없어?”

오드리아의 물음에 페이지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페이지 역시 이미 알아봤었다.

“수도는 물론이고 인근 영지까지 알아보았지만 없었습니다.”

“그래…….”

오드리아가 생각에 잠긴 채 페이지가 가져온 정보들을 다시 자세히 살폈다.

라미엘의 흔적은 그의 뿌리에서 끊겼다. 그가 태어난 곳. 그의 가족.

‘그 시기에 몰락한 가문이 없다면 뭘까.’

평범하지 않은 신분이지만 고아가 되어야만 했던 상황. 제 한 몸을 지키기 위해 잔뜩 날이 서 있었던 라미엘의 어린 시절. 언제나 벼랑 끝에 몰린 채로 버텨 온 것이 분명했다.

“혹시 몰라 범위를 넓혀 라미엘 님이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부터 확인해 보기도 했지만 라미엘 님의 가문으로 추정되는 가문은 없었습니다.”

그렇게까지 찾아봤는데도 없었다면 귀족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 대체 누구지.”

라미엘의 진짜 신분은 무엇인 거지. 도저히 갈피를 잡지 못할 때였다.

“다만…….”

페이지가 입술을 뗐다.

“라미엘 님과는 상관이 없을 테지만 그 시기에 큰 사건이 하나 있긴 했습니다.”

“그게 뭔데?”

페이지는 기대하지 말라는 전제를 먼저 깔아두고 말을 이었다.

“황궁에 불이 난 적이 있는 거 혹시 기억하세요?”

“……?!”

페이지가 낮게 속삭였고 그녀가 말한 사건을 떠올린 오드리아의 눈이 커졌다.

“설마……?”

“그 당시 황비궁에서 화제가 일어나 황비마마와 황자 전하께서 돌아가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페이지의 말에 오드리아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말도 안 돼.’

설마 그럴 리 없었다. 오드리아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가능성을 지워 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라미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불구덩이에 뛰어든 어머니……. 그 말은 그저 비유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오드리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금까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넘어갔던 사소한 순간들을 떠올리고 기억을 조합해 나갔다.

그러고 보면 라미엘은 불을 무서워했다. 그가 숨기려고 했지만 함께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 수밖에 없었다. 밤에 아무리 어두워도 횃불을 켜지 않으려고 하고 불이 있으면 얼굴이 굳어지고는 했었으니까.

오드리아는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때 수도를 발칵 뒤집은 충격적인 일이었던 황비궁 화재 사건.

그때 황비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수도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황비와 함께 황자 역시 죽음에 이르렀는데도 사람들은 오로지 황비의 죽음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쉽게 잊힌 죽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런 것을 이용해 누군가 마음을 먹는다면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빼돌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때 죽지 않았다면…….’

오드리아는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 없었던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러자 오드리아는 또 한 가지가 떠올랐다. 그녀가 계속 놓치고 있던 것.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오드리아는 그날 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라미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오드리아가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목 근처로 다가갔다.

그녀가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라미엘의 몸에 있었다. 그녀가 돌려준 후부터 언제나 걸고 다니는 펜던트 목걸이.

그건 아무나 가질 수 없을 만큼 고가의 물건이었다. 그래서 그가 최소한 몰락한 귀족가의 자제일 거라고 생각했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단순히 값비싼 물건인 게 아닌 것 같았다. 오드리아의 손이 그의 목에 걸려 있는 펜던트에 닿았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어 그 안을 확인하는 순간 오드리아의 눈이 커졌다.

이미 이 안을 여러 번 봤는데도 불구하고 새겨져 있는 글자에 신경 쓰느라 놓쳤던 부분이 이제야 보였다.

이미 닳고 닳아 희미해져 잘 보이지 않지만 알고 보니 분명하게 보이는 황실의 문양.

이건 황가에서 나온 물건이라는 뜻이었다.

‘그럼 정말…… 그때 죽은 아이가 라미엘이었던 건가.’

황자라고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어린 날의 라미엘은 쉽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 느껴질 만큼 사연이 있어 보였다.

그래서 언제나 분노로 차 있었던 건가.

라미엘이 어린 시절 감당했어야만 했던 일의 크기를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은…… 괜찮을까.’

황비궁 화재 사건은 백성들 사이에서도 많은 말을 낳은 사건이었다. 그때 출처를 알 수 없는 많은 소문들이 떠돌았는데 그중 하나가 황비를 못마땅하게 여긴 황후가 불을 내서 두 사람을 처리했다는 것이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라미엘이 여전히 황비의 죽음에 억울해하고 있다면, 지금은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복수하고 싶을까.’

오드리아는 라미엘의 과거가 어땠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누구였든 라미엘은 오드리아의 남편이고 앞으로 함께할 거니까. 오드리아는 라미엘이 먼저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니 라미엘이 그 사실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다면 오드리아는 기꺼이 모른 체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황궁으로부터 라미엘을 지켜 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사정이 너무 나빴다.

황제가 병환으로 인해 최근 공식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자연스레 제국의 중심축이 차기 황제인 황태자로 옮겨 가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좋을 텐데.’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될까.

라미엘의 진짜 정체를 모르는 상태에서도 황태자는 그를 경계했다. 그런데 만약 라미엘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그는 분명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조금만 더 안정적인 시기였다면 괜찮은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텐데.

만약 라미엘이 진짜 황자가 맞다면 지금은 최악의 시기였다. 그의 존재가 드러나기에는 가장 안 좋은 타이밍. 오드리아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혹시, 그래서인가. 지금이 하필 이 시기여서.’

오드리아의 눈이 커졌다. 순서가 틀렸는지도 모른다. 하필 불안정한 시기에 트루디 대공이 라미엘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기라서 과거에 황자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에 의하여 트루디 대공이 찾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아버지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제국에서 트루디 대공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단 한 사람.

‘황제인가…….’

현재 병환으로 쓰러져 있는 황제. 어쩌면 라미엘의 아버지일 수도 있는 사람.

‘라미엘은 어떻게 할 생각인 거지.’

만약 황제가 찾고 있는 것이라면 느리건 빠르건 결국에는 그의 존재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과연 라미엘을 찾는 목적이 황태자와 라미엘을 경쟁시키려는 것인지 아니면 혹시라도 남아 있는 후환을 처리하기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드리아의 얼굴에 그늘이 깊어져 갔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풀릴지는 알 수 없지만 절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라미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다. 오히려 그런 그를 신경 쓰는 것은 트루디 대공이었다.

결국, 트루디 대공은 라미엘을 따로 불렀다.

“한번 만나 보는 게 어떻겠나.”

라미엘은 트루디 대공의 말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아뇨. 저는 이미 라미엘 트루디입니다.”

그러니 황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의 단호한 표현에 트루디 대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사위로서 만나는 거야.”

“……?!”

“아직 트루디가의 새로 생긴 가족을 정식으로 소개한 적이 없으니까. 그냥 인사를 드리고 오는 자리일 거네.”

비록 황제는 라미엘의 존재도, 그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하겠지만.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일지라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 주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라미엘이 답했다. 트루디 대공과 함께 그의 사위이자 오드리아의 남편으로 인사하는 자리. 그게 트루디 대공의 진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라미엘은 거절할 수 없었다.

사실 트루디 대공 역시 이렇게까지 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그 역시 라미엘이 황자라는 사실을 알게되자마자 돌아갈 생각이 없으면 숨기라고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황제의 쓸쓸한 표정이 계속 걸렸다.

‘아마 이런 감정의 변화 역시 리아의 영향인 거겠지.’

오드리아가 어릴 때는 다가가지 못해서 같은 저택 안에서 얼굴 한번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렇게 됐을 수도 있었다. 그런 가정을 떠올리니 황제의 마음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어색한 일이었지만 트루디 대공에게 부성애는 본능이었으니까.

그래서 트루디 대공은 가문의 새로운 일원이 된 라미엘을 인사시키고 싶다는 핑계로 두 사람을 만나게 했다.

만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라미엘에게 황자로서가 아닌 라미엘 트루디로서 만나는 것이라고 설득까지 하면서.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오드리아와 결혼해 트루디 가문의 일원이 된 라미엘 트루디라고 합니다.”

“하하. 그대가 내게 일부러 자랑을 하려고 데려오다니. 재미있군.”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라미엘 트루디라고 합니다.”

라미엘은 트루디라는 성에 유독 힘을 주어 말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눈치챈 트루디 대공이 그를 흘깃 바라봤다. 라미엘은 고집스레 시선을 바닥에 두고 있었다.

“라미엘 트루디라. 자네를 기억하고 있네.”

“……영광입니다.”

이전에도 한번 그를 본 적이 있었다. 변방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왔을 때, 그에게 마땅한 상을 내리기 위해서.

황제는 라미엘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그때도 느낀 거지만…….’

그의 시선이 라미엘의 머리카락에 고정되어 있었다. 황제가 중얼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대의 흑발은 볼 때마다 그리운 것을 떠오르게 하는군.”

“그렇습니까.”

라미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머리카락은 황비를 닮은 것이다. 황제는 그의 머리카락을 보며 그녀를 떠올리고 있었다.

“자네 같은 사람이 가족이 되었다니, 대공이 든든하겠어.”

황제가 대견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상하게 정이 가는 자였다. 트루디 대공이 부럽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나도 확실히 약해졌군. 감상적이 된 걸 보니.’

황제의 입가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라미엘이 먼저 돌아갔다. 황제와 트루디 대공만이 남았을 때, 계속 미련처럼 남아 있는 말을 꺼냈다.

“그대의 사위를 보고 있으면 황자가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생각하게 되는군.”

“…….”

“지금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군.”

하지만 볼 수 없겠지. 황제가 자조 섞인 혼잣말을 했다.

“황자 대신이라 할 수 없지만, 그대의 사위를 봐서 다행이야.”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씁쓸함이 여운처럼 남아 있었다.

순간 트루디 대공은 움찔했다. 설마 황제가 뭔가를 눈치챈 것일까. 하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본능으로 알아보는 건가.’

트루디 대공은 그렇게라도 자신의 아들을 보고 행복해한 황제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왜 그때 황비와 황자를 버리셨습니까.”

사실, 그 당시의 상황을 트루디 대공은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때 레이첼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공작가에 칩거한 채 오랜 시간 나오지 않았으니까.

황제가 한참 동안 침묵한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갈라진 목소리 사이에서 그동안의 회한이 느껴졌다.

“……인간이기 전에 황제이기를 택했거든.”

그는 황제가 되기 위해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황제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게 당연했다. 황제로서 황비와 황자를 버리는 것이 그 당시로서는 옳은 선택이었다.

* * *

황태자의 무리한 행동 속에서도 수확이 있었다.

아무리 그의 명령이라고 해도 트루디 대공의 뒤를 밟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황태자에게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명분을 만들 정도로만 움직였다. 그들은 애초부터 트루디 대공에 대해 뭔가를 알아낼 생각이 없었다.

그랬는데, 우연히 황제와 라미엘이 따로 만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두 사람이 따로 만날 이유가 없었다.

‘황제와 라미엘이 만나?’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그가 아무리 트루디 공작가의 일원이 되었다고 해도 용건도 없는데 인사를 올리러 온다니. 그건 분명 의심스러웠다.

황태자는 황제와 라미엘, 그리고 트루디 대공 사이에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눈치챘다.

‘두 사람이 만날 만한 다른 이유가 있나.’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 역시 별다른 게 떠오르지 않았다. 황태자는 사람을 시켜 라미엘의 주위도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어느새 그의 호위를 맡고 있는 인원의 절반 이상이 그의 명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뒤쫓는 데 동원되었다.

자꾸만 라미엘 트루디, 저놈이 눈에 띈다. 그래서 자신이 자꾸만 가려지게 된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내가 황태자야. 내가 제국의 후계자고 제국의 미래야.’

근데 그런 자신이 아니라 엉뚱한 놈이 주목을 받다니, 그러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뻔뻔하게 웃다니. 황태자는 역시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뭔데 폐하께서도 그놈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거야.’

이상했다. 아무리 대단한 자라고 해도 황태자의 자리를 위협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한데도 황태자는 혼자서 그와 경쟁을 하고 있었다.

라미엘 트루디. 그놈을 제대로 꺾어 놓아야 이 답답한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황태자의 분노는 라미엘을 향했다. 곁에서 지켜보는 시종과 측근들마저도 황태자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를 말린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그러다 결국, 황태자가 알아 버리고 말았다. 과거에 죽은 줄 알았던 황자가 살아 있다는 것을.

“쥐새끼처럼 살아 있었어?”

게다가 그 황자가 바로 눈엣가시였던 라미엘이라는 것 역시.

무엇 하나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트루디 대공의 사위가 그놈이었다니.

“역시 거슬리더라니.”

본능적인 거부감이었나. 이상하게 라미엘이라는 놈을 볼 때마다 기분이 나빴다. 기사단에서 잘난 척 구는 것도, 어느 날 갑자기 트루디 대공의 사위가 되더니 모두의 부러움을 받는 것도.

이상하게 주위의 시선을 끄는 놈이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황태자의 곁을 지키던 최측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하긴. 죽여야지. 그것 말고 다른 게 있나.”

황태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그는 오랜만에 즐거워졌다. 목표를 어떻게 처리할지 상상하는 즐거움.

“하지만…… 트루디 대공의 사람입니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그래서 못하겠다는 건가.”

황태자의 날카로운 시선이 쏟아졌다. 강경한 태도에 측근은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크지만 설득할 수 없었다.

“위험 요소는 처음부터 없애야지.”

그의 측근들이 모두 말렸지만 황태자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오로지 방해되는 것을 없애고 황제가 될 생각밖에.

‘이제 정말 조금밖에 안 남았어. 이제 와서 가만히 당할 수는 없지.’

그는 마치 사방에서 공격받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을 위협해 오는 존재를.

‘그 트루디 대공의 사람이면 뭐 해.’

황태자의 눈이 비열한 색을 띠었다.

‘살아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데.’

그래. 그러면 된다.

황태자가 가장 자신 있는 일이다. 정적을 처리하는 것.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아무리 의심이 가도 황태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었다. 그게 트루디 대공이라 할지라도.

황태자는 과거 라미엘의 어미인 황비가 스스로 화재를 일으켜 목숨을 끊은 것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라미엘에게 그날의 일을 재현시켜 줄 생각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해서 몸이 떨렸다. 어서 그 모습을 보고 싶어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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