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라미엘은 오로지 오드리아에게 가장 좋은 것을 사냥해서 바칠 생각밖에 없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 절대 져서는 안 된다.
사냥 대회가 시작되자마자 세 사람 사이에서는 무언의 경쟁이 치열했다. 사냥을 하다 보니 어느새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와 떨어져 혼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동물의 기척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무리였고 그를 향해 다가오는 무리가 멀리서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게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사냥 대회에서 멀리서부터 눈에 띌 만큼 유난히 화려한 일행은 하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라미엘의 앞에 어느새 도착했다.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라 일부러 그가 있는 곳을 찾아온 것이다.
“여기서 사냥을 하고 있군.”
황태자는 천연덕스럽게 우연인 것처럼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미엘은 관심이 없었다.
그의 무관심한 눈빛을 본 황태자는 그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또다시 분노가 치솟았다.
황태자는 계속해서 라미엘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를 무시하고 무리한 요구를 했다. 옆에 시종이 버젓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할 법한 일을 라미엘에게 시키기도 하고, 그가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면 우연인 척 계속 진로를 방해했다.
“검 몇 번 휘둘러서 얻은 작위라 그런가, 귀족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볼품없군.”
“…….”
“트루디 공작가의 이름에 먹칠은 하지 않아야 될 것 아닌가.”
황태자는 라미엘을 계속해서 무시하는 발언을 이어 나갔다. 라미엘은 묵묵히 그 말을 듣기만 할 뿐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악의적이었다.
라미엘은 잠시 고민하긴 했지만 황태자의 요구를 별말 없이 따랐다. 굴욕적인 모습에 황태자는 마치 불량배처럼 킬킬거리며 웃었지만 라미엘은 그런 황태자를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할 뿐, 자존심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얼마나 사냥을 잘하는지 기대하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대체 뭘 잡을지 기대되는군. 설마 짐승에게 먹히지는 않겠지?”
황태자는 명백히 그를 조롱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미엘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가 이제 그만 방해하고 돌아가 주기를 바랄뿐.
다행히도 황태자는 그를 향한 치졸한 짓거리도 질렸는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 라미엘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라미엘은 내심 이만하고 돌아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산 밑에서부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데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것이다.
동물의 형체를 확인한 라미엘의 눈이 커졌다.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 존재할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한 존재였다.
그런데 동물은 이성을 잃고 흥분했는지 주위에 있는 나무를 모두 부수며 앞으로 나갔다. 이러다가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것 같았다.
라미엘은 동물이 흥분한 틈을 노려 급소를 향해 달려들었다. 혹시라도 동물의 시야에 다른 사람들이 눈에 띄기 전에 동물을 죽이기 위해서.
라미엘은 쓰러진 동물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좀 늦기는 했지만 지금 가면 아직 사냥 대회가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산으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말발굽 소리가 들리고 곧 오드리아가 나타났다.
엄청난 크기에 공격성이 강한 동물이 나타난 것보다 오드리아가 나타난 것이 더 위험했다. 그녀가 화를 내면 라미엘은 어쩔 줄을 몰랐으니까.
* * *
사냥 대회가 끝나고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트루디 대공은 황제를 찾아갔다. 황제는 사냥 대회에서 있었던 작은 소란을 보고받았다. 그리고 사냥에서 우승한 트루디 대공의 사위가 무엇을 잡았는지.
제국을 책임지는 자리에 앉은 그는 그 정도 보고만으로도 사냥 대회에서 황태자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황제는 트루디 대공이 결코 호의를 가지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황제가 대신 그 일을 사과할 수도 없었다.
황제가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황태자가 한 짓을 인정한 것이 되기 때문에 더더욱. 아무리 못마땅해도 유일한 후계자였다.
황제는 트루디 대공이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찾아드리겠습니다.”
트루디 대공의 말에 황제는 화색이 돌았다가 다시 수심이 깊어졌다.
트루디 대공이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아서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사냥 대회에서 황태자가 저지른 일에 화가 나서일 것이다.
그는 감정대로 행동하는 편이 아니지만 그게 가족의 일이라면 사정이 달랐다. 트루디 대공은 황태자를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황제는 한숨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황태자는 왜 모르는 걸까.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신하의 눈치를 봐야 하고, 때로는 소중한 것을 포기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지금의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고 나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황제는 트루디 대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부디 죽지 않고 어딘가에 살아 있기를 바라고 찾을 겁니다.”
“…….”
황제는 이전에 자신이 한 말을 트루디 대공이 온전히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확신에 차 말하는 것을 보면 트루디 대공은 만약 황자가 살아 있지 않다면 그를 대체할 사람이라도 만들 작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황제는 트루디 대공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황자의 소식을 알아봐 줄 사람이 그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황자가 죽었다면 제국에 불운이 끼지 않겠습니까.”
트루디 대공은 대놓고 선전포고했다. 지금의 황태자는 절대 안 된다고.
“제가 있는 한 지금의 황태자는 절대 황제가 되기는 힘들 테니 말입니다.”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비록 자신이 황제이지만 지금의 제국을 지탱하는 것은 트루디 공작가이고 자신이 지금까지 치정할 수 있었던 것은 트루디 대공 덕분이었다.
그런 그를 건드렸으니 황제가 아무리 말리더라도 트루디 대공은 따르지 않을 것이다. ‘아아, 미련한 자식이여.’ 황제는 자신의 멍청하고 모자란 아들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차마 편을 들 수는 없었다. 그것이 제국을 위한 길이기에. 황제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트루디 대공의 뜻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황제가 황태자를 포기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황태자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겠지만.
* * *
트루디 대공의 분노와 불쾌감은 황태자뿐만 아니라 라미엘에게도 향했다. 감히 그런 짓을 한 놈도 문제지만 그런 짓을 당한 라미엘 역시 가만히 넘어갈 수 없었다.
트루디 대공이 연무장에서 오전 훈련 중인 라미엘을 직접 찾아왔다.
“함께 외출하지.”
“저, 말입니까?”
“그럼 여기 누가 또 있나.”
“아, 아닙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라미엘은 곧바로 훈련을 마치고 외출 준비를 했다. 트루디 대공은 이미 마차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출발한 마차 안에서는 아무 대화도 흐르지 않았다.
트루디 대공과 단둘이 어딘가를 향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딜 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라미엘은 혹시라도 실수를 하지 않을까 잔뜩 긴장했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은 마차로 이동하는 내내 한 번도 라미엘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도착한 곳은 어느 저택이었다. 그 앞에 많은 마차들이 멈춰 있었다. 트루디 공작가의 일원이 모두 모이는 회의가 열리는 것이다.
왜 이런 곳에 자신을 데리고 온 거지? 라미엘은 놀란 심장을 가라앉히며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한편, 이 상황에 당황하고 있는 것은 회의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트루디 대공이 오랜만에 가주들끼리의 모임에 참석했다. 평소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는 그가 나타나자 모두가 술렁거렸다.
“갑자기 어쩐 일입니까.”
“가문의 중요한 회의가 있을 거니 참석해 달라고 했는데. 아니었나?”
“마, 맞습니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은 참석한 후에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서로 오가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럴수록 다른 사람들은 더더욱 트루디 대공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이렇게 참석했다는 것은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없었다.
다만, 그 이유가 무엇이냐가 관건이었다. 누구도 나서서 물어보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트루디 대공의 입술이 느리지만 분명하게 벌어졌다.
“내가 데려온 사람을 소개하지.”
자리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이 라미엘을 향했다.
제레미아도 온 적 없는 자리였다. 이런 곳에 라미엘을 데려온다는 것은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다들 알겠지만 이번에 가족이 된 라미엘이네.”
“안녕하십니까.”
트루디 대공의 소개를 받은 이들 모두가 놀랐다. 그가 유난히 ‘가족’이라는 단어를 강조했기에. 마치 경고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앞으로 내가 참석하기 힘든 일들은 라미엘이 대신해 줄 거네.”
“……!”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지금 그 말에는 엄청난 힘이 실려 있었다. 트루디 대공의 힘을 나눠 준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앞으로 종종 뵐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라미엘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사람들은 드러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당황하고 있었다.
트루디 대공은 라미엘이 트루디 공작가의 일원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 또한 그를 건드린다는 것은 가문과 트루디 대공을 건드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혹시라도 실수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겠지만.”
사람들은 흠칫했다. 얼마 전에 사냥 대회에서 소란이 있었던 것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그때는 그냥 해프닝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가? 혹시 그때 자신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일이 있었던 건가?
정확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그들은 몸을 사려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럼 먼저 일어나지.”
트루디 대공은 할 말을 마치고 돌아갔다. 그 뒤를 따라 라미엘 역시도. 그가 사라지자마자 남은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봤다. 그와 동시에 자신들의 기억을 되짚어 봤다. 혹시라도 라미엘에게 뭔가 실수한 것이 없는지.
하지만 라미엘은 트루디 대공의 말을 들으며 점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실 트루디 대공이 오늘과 같은 일을 한 이유는 그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라미엘 스스로 자각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또한 트루디 공작가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트루디는 눈치 보지 않는다. 그렇기에 참지 않고 하고자 하는 일을 해낸다. 다른 사람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희생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리고 트루디는 자신의 가족을 건드리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러니 트루디라면 어디 가서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라미엘은 스스로 참은 것이다. 트루디 공작가를 생각해서. 그것은 오히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 깊은 불쾌감을 남겼다. 또한, 참을 수 없는 분노마저도.
그러니 이번의 일은 따지고 보면 라미엘에게 내리는 벌이었다.
“잊지 말도록. 너의 이름 뒤에 따라붙는 성이 무엇인지.”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라미엘의 대답에 트루디 대공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여전히 자신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아서.
그의 예상대로 라미엘은 자신이 트루디라는 성에 흠집을 냈기 때문에 대공이 화를 낸다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
트루디라는 성을 가진 이상 어떤 상황에서도 가슴을 떳떳하게 펴도 좋다.
그 후에 따르는 상황은 얼마든지 트루디 공작가가 책임진다는 것이었지만 라미엘은 전혀 다르게 해석했다.
그리고 그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사냥 대회가 끝난 날 오드리아는 라미엘에게 화가 나서 한동안 말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오드리아, 같이 산책할까?”
“아니. 오늘은 좀 쉴래.”
오드리아가 피곤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래. 그럼 같이 쉴까.”
라미엘이 오드리아의 어깨를 감싸며 다정하게 말했을 때였다.
“라미엘.”
“……응.”
“혼자 쉬고 싶어.”
오드리아의 단호한 거절에 라미엘은 심장이 발밑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라미엘은 오드리아의 화가 풀리지 않자 초조해졌다.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
자신은 정말 괜찮은데, 오드리아는 괜찮지 않다는 것이 라미엘의 큰 문제였다.
“다음부터는 트루디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행동을 할게.”
결국 라미엘의 한마디에 오드리아의 속상함이 폭발했다. 그녀는 라미엘을 향해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너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네가 너무 소중한 나는 어떡해?”
“오드리아…….”
“정말 괜찮을 리 없잖아! 제발 너를 소중하게 생각해.”
라미엘에게는 오드리아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라미엘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자신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황태자가 준 행동들에 어떤 모욕을 느끼더라도 무시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게 오드리아는 마음이 아팠다.
“내 일에 네가 화를 내는 것처럼, 나도 네가 당하는 일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라미엘은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오로지 잘못했다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말 외에는.
그제야 라미엘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저 적당히 참고 넘어가자고 생각한 일들이 오드리아를 힘들게 했다는 것을.
“약속할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라미엘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오드리아를 향했다.
그는 약속할 수 있었다. 자신은 무슨 일을 당해도 아무렇지 않지만 그로 인해 오드리아가 속상해하고 힘들어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오드리아는 그제야 라미엘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다시 이런 일이 있으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경고와 함께.
제레미아는 여전히 라미엘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죽을 때까지 네놈이 마음에 들 일은 없을 거야.’라고 다짐한 것처럼.
“마음에 안 들어.”
제레미아는 라미엘의 얼굴에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불만을 들은 라미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혹시라도 고개를 돌리면 제레미아의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칠까 봐 라미엘은 고개를 고정한 채 절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게 다른 기사들의 눈에는 잘 보였다.
사실 지금까지 라미엘을 온갖 핑계로 괴롭힌 것은 제레미아였다. 그 사실을 트루디 공작가의 기사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었다.
제레미아의 분노는 첫 번째, 라미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오드리아가 걱정한다. 그녀가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면 자신의 속까지 문드러지는 기분이었다.
‘감히 우리 리아를 걱정시키다니.’
두 번째는 그래도 라미엘을 괴롭힐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제레미아뿐이라는 것이다. 조금 더 마음을 넓게 쓰면 트루디 대공까지. 그 이상은 절대 안 된다.
누가 알면 유치하다고 비웃음을 당하겠지만 이건 전부 오드리아를 차지한 놈에게 부리는 것이기에 제레미아는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놈은 무슨 자격으로 괴롭힌단 말인가.
“역시 마음에 안 들어.”
제레미아가 또다시 중얼거렸다. 그의 분노에 찬 목소리에 모두들 침을 삼켰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서 연무장을 벗어났다. 여전히 화가 난 어깨를 하고서.
“그러게 왜 그랬어?”
“제가 뭘 말입니까.”
아이작의 핀잔에 라미엘이 진심으로 투정을 부렸다.
오드리아가 그토록 화를 내는 것을 보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하지만 제레미아까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머리로 생각해.”
라미엘과 제레미아는 많은 점이 닮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제레미아는 본능에 충실한 편이고 라미엘은 이성적이었다. 비록 오드리아의 일에 관해서는 라미엘도 충동적이긴 했지만 그 외에는 지극히 이성적인 편이다.
그러니 제레미아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아이작의 충고는 오히려 라미엘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고민하던 라미엘이 제레미아에게 다가가 말했다.
“앞으로는 제레미아 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당하지 않겠습니다.”
“뭐?”
제레미아의 얼굴이 씰룩였다. 하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레미아 님에게만 당하겠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는 말이 아니라 제레미아에게만 당하겠다니.
이게 무슨 이상한 선언이야, 싶었지만 제레미아의 표정을 보니 나름 효과가 있는 것이 확실했다.
“뭐, 그러든가. 어차피 나한테 이기는 건 불가능하니까. 대신 다른 놈들은 절대 안 돼.”
“네, 알겠습니다.”
라미엘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결혼 전에 라미엘이 제레미아를 이겼던 일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라미엘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게 제레미아 나름대로의 애정 표현이라는 것을. 자신의 가족이 다른 사람에게 당하고 오면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는 것과 같은 거라고.
“뭐야. 기분 나쁘게 왜 웃어.”
제레미아는 솔직하면서도 솔직하지 못했다. 그래서 라미엘에게 자꾸만 화를 내는 것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라미엘이 자꾸만 웃자 제레미아가 기분 나빠했지만 그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오드리아는 물론이고 트루디 대공도 제레미아도 라미엘이 당한 일을 자신보다도 더 기분 나쁘게 받아들였다. 트루디 대공은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모두에게 경고를 하고 오드리아는 속상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오드리아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 받는 사랑과는 모양도 표현도 모두 다르지만 라미엘도 새로운 가족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제레미아가 가만히 있지 않겠지만. 그래서 라미엘은 그저 웃기만 할 뿐 제레미아의 추궁에 대답하지 않았다.
* * *
“잠깐. 그게 뭐야?”
오드리아가 시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오늘은 오드리아의 드레스 룸을 대대적으로 청소하는 날이었다.
그녀에게는 드레스도 장신구도 넘치도록 많아서 한 번씩 버리지 않으면 감당이 되지 않았다.
“목걸이인데 아무래도 처분해야 하지 싶어서요.”
하녀가 먼지가 쌓인 목걸이를 보여 주며 말했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오드리아는 목걸이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네? 원래부터 여기 있었던 건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오드리아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하녀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문제가 있었다. 오랜만에 봤는데도 한눈에 알아봤다.
‘이 펜던트…….’
오래전, 페이지가 라미엘의 물건인 것 같다며 건넨 펜던트였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오드리아가 곰곰이 생각에 빠지는데 기억을 되짚어 갈수록 그녀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그러고 보니 라미엘에게 이걸 돌려준 기억이 없었다.
오필리아 숍에서 펜던트 목걸이를 받아들고 나왔을 때, 라미엘이 사라졌었다. 그를 찾으러 헤매다가 불한당들에게 휩쓸려 사고가 있었다. 제레미아와 아이작이 와서 간신히 상황이 수습되었는데…… 그러고 난 후에 펜던트 목걸이가 어떻게 됐었지?
‘설마…….’
오드리아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다음부터 펜던트 목걸이를 본 기억이 없었다.
라미엘에게 건네준 기억 역시, 당연히 없었다.
‘왜 지금까지 잊고 있었지?’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이건 명백한 실수였다.
아무래도 그때 오드리아가 펜던트 목걸이를 흘리고 그걸 누군가 수습해서 오드리아의 드레스 룸에 넣어 둔 것 같았다.
- 오드리아 님. 오늘 입으셨던 드레스는 모두 소각시켰습니다. 나머지 소지품들은 드레스 룸에 정리했고요.
그때 방에서 상처를 치료받을 때 메릴이 언뜻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뭐라고 말했더라.’
오드리아의 얼굴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 응. 알겠어.
그게 전부였다. 확인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때는 너무 지쳐서 쉬고 싶은 마음에 메릴의 말을 흘려들은 것이다.
오드리아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라미엘의 물건을 돌려주지 못하고 방치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이건 내가 가져갈게.”
오드리아가 하녀의 손에서 펜던트 목걸이를 챙겨 방으로 가져왔다. 그녀의 손에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째서 이제야 이걸 발견했을까.
오드리아는 밤이 되었을 때, 라미엘에게 펜던트 목걸이를 내밀었다. 처음에는 오드리아의 눈을 보고 있어 미동조차 하지 않던 그가 목걸이를 보고 크게 동요했다.
역시나 라미엘의 것이었다. 그것도 그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한.
“이게 어떻게……?”
라미엘의 혼란스러운 눈동자가 목걸이와 오드리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라미엘. 미안해. 훨씬 전에 돌려줬어야 했는데.”
오드리아가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어디에 있었던 거야?”
라미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눈동자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오필리아 숍에. 지하를 정리하던 중에 소지품이 발견됐는데 아무래도 라미엘 것 같다고.”
“그때라면…….”
“너무 늦었지.”
“…….”
라미엘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아서 오드리아는 그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라미엘은 자신의 손 위에 있는 펜던트 목걸이를 보고 있으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얼떨떨했다.
오래전에 다시는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해 포기했었는데 이렇게 돌고 돌아서 돌아올 줄은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라미엘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오드리아를 바라보았다. 미안해하며 눈치를 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입꼬리를 길게 늘이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 찾아줘서.”
오드리아가 일부러 주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의도치 않게 늦었을 뿐이다.
게다가 이 역시도 오드리아가 아니었다면 절대 자신에게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라미엘은 펜던트 목걸이를 소중하게 손에 꼭 쥔 채 가슴에 가져갔다.
“정말 고마워. 나한테 이걸 돌려줘서.”
라미엘은 흥분하지도 눈물에 잠기지도 않았다. 고저 없이 낮고 잔잔한 목소리였지만 그게 오히려 더 슬프게 느껴졌다.
“라미엘…….”
오드리아가 그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 목걸이…… 어떤 건지 물어봐도 돼?”
오드리아의 시선이 펜던트 목걸이를 향했다. 그건 척 보기에도 라미엘에게 무척이나 소중한 물건인 것 같았다.
“…….”
라미엘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불편하면 말 안 해도 돼.”
오드리아가 애써 웃으며 손을 내저었을 때였다. 라미엘의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어머니…… 유품이야.”
“……!”
라미엘의 가족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어머니?”
되묻는 오드리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응. 내 어머니.”
라미엘의 목소리가 잠겼다. 그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감정들이 떠오르는 것처럼.
지금까지 오드리아는 라미엘의 과거에 대해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가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의 과거에 대해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도 평범하지는 않으니까. 숨기고 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굳이 그의 어린 시절 안 좋은 기억을 파헤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 현재가 훨씬 더 소중하고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으니까. 역시 묻지 않는 게 낫겠지, 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어머니는…….”
라미엘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면서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돌아가셨어, 나를 지키려다.”
라미엘의 손끝이 떨렸다. 그날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라미엘은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어머니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아직도 가끔…… 어머니가 생각나.”
라미엘은 애달프게 입을 뗐다. 그는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슬픔에 잠겼다. 오드리아는 아무 말 없이 그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었다.
“어머니는 굉장히 아름다운 분이셨어. 다들 내가 어머니를 닮았다고 했는데…….”
“…….”
“지금 내 얼굴에도 남아 있을까?”
어린 시절에는 여자라고 착각할 만큼 예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외모였지만 지금의 라미엘은 선이 굵은 인상의 남자였다.
“어릴 때와는 이렇게 달라진 모습인데.”
“남아 있을 거야. 너의 흑발도 그 눈동자도 어릴 때 그대로니까.”
“맞아. 어머니도 흑발이셨어. 짙은 밤에 수많은 별이 떠 있는 것처럼 아름다운 흑발이었는데.”
그리운 목소리로 말을 잇던 라미엘의 눈가가 어느새 촉촉해졌다.
“또…… 약하신 분이었어.”
라미엘은 고개를 떨궜다. 더는 슬픔을 참기 어려운 듯.
그는 오래되었지만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은 듯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강한 분이었지.”
“…….”
“나를 지키려고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들 만큼.”
오드리아는 불구덩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일까. 설마 실제로 불구덩이에 뛰어들지는 않았겠지. 그런데도 이상하게 오드리아는 찝찝함이 남았다.
라미엘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그땐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원망하기도 했는데.”
오드리아는 그다음 말이 궁금했다. 부디 지금은 괜찮다는 말이 듣고 싶어서.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라미엘이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오드리아의 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너무 애절해서 오드리아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오드리아.”
라미엘이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내가 바라는 건 오직…….”
“…….”
“너와 함께 있는 것뿐이야.”
라미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 외의 나머지는 모두 부정하기 위해서 더더욱 강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
“다른 건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어.”
라미엘은 떨고 있었다. 당장 그녀를 잃기라도 할 것처럼.
그럴 리가 없는데 뭐가 무서운 걸까. 오드리아는 라미엘의 불안하게 떨리는 어깨를 꽉 안아 주었다.
* * *
트루디 대공이 버려진 황자를 찾기로 결심한 이유는 역시 사냥 대회였다.
황태자의 막무가내 행동을 보면서, 게다가 그 일을 당한 것이 라미엘이고 그로 인해 오드리아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니 이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처음 황제에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트루디 대공은 황자가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황제의 예상대로 황비가 자신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무슨 수를 썼다고 하더라도, 어린 황자가 황궁 밖에서 얼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은 자신의 생각을 뒤집어 어린 시절 사라진 황자가 살아 있는 쪽에 걸었다.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황자를 찾아내기로.
그는 황비궁에 화재가 있었던 날을 기준으로 흔적을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황비궁에서 일하던 시녀들의 행적, 혹시 황비와 함께 있었던 어린아이의 시체가 다른 사람의 것이라면 그게 누구인지.
하지만 이미 오래전의 일. 흔적은 전무하다시피 했고 그중에서 실처럼 가는 흔적들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황비를 닮은 검은 머리카락, 어린 시절 황녀가 아닌 황자임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황궁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 못할 만큼 유려했던 미모. 하지만 그것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을까. 그것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희소식이 들려왔다.
“황자는 그때 분명 살아 있었다고 합니다.”
생사 여부가 확인이 된 것이다.
“확실한가.”
“네. 당시 황비궁에서 일하던 시녀가 죽기 전에 동생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고 하니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미 몇 번이고 잘못된 정보가 들어오고는 했다. 생사 여부에 있어서만큼은 그 정보가 진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했다.
보좌관의 확신에 찬 대답에도 트루디 대공은 신중하게 그 정보가 사실인지에 대해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여러 번의 반복된 확인 끝에 확신할 수 있었다.
황자는 그때 분명히 살았다.
가장 중요한 생사 여부에 확신이 들자 속도는 이전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다.
그가 사라진 시점을 시작으로 비슷한 또래의 목격담을 확인했다. 그중에 기억이 흐릿하거나 확실하지 않은 것들과 나이가 더 많아 보였거나 더 어려 보인 자들에 대한 것들까지.
그런데 그렇게 조사하다 보니 동일 인물로 추정되는 증언이 반복되는 곳이 있었다. 트루디 대공이 직접 증언을 확인했다.
“내가 하루 재워 준 적이 있어요.”
황자가 황궁에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로 추정되는 시기에 그를 만난 적 있다고 하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만났던 아이가 황자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저 어느 날 갑자기 거리에 나타났고 한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소년이라고 기억할 뿐이었다.
“예쁘장한 어린애가 보호자까지 없는데 멀쩡하게 살 수 있었겠어요?”
“부모도 없겠다, 나쁜 놈들이 죄다 노렸을 거예요.”
“게다가 그때 노예 시장이 한창 활발했을 때라…….”
“분명 그때 브로커 중에 한 명한테 팔려 갔었지?”
“그러고 나선 못 본 거 같은데.”
“나도 그 이후로는 본 적 없어. 설마, 죽었나……?”
“에구구, 불쌍해라. 가지고 있던 돈도 전부 도둑맞고 애가 길거리에서 자고 그랬는데…….”
트루디 대공은 신분을 숨기기 위해 얼굴을 가린 채 그들의 증언을 바로 옆에서 듣고 있었다. 그들이 쉼 없이 떠드는 얘기들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트루디 대공의 얼굴에 그늘이 생겼다.
“그렇게 불쌍했으면 그때 도와주지. 그동안 뭐 했지?”
정보가 필요해서 가만히 듣고는 있었지만 어린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겪었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은 방관했던 것이다. 그래 놓고 이제 와 불쌍하다니. 웃기지도 않는군. 트루디 대공은 생각했다.
“에이, 말도 마십시오. 그게 또 그리 쉬운 게 아닙니다.”
“제가 아예 거두지는 못하고 그래도 오다가다 음식도 챙겨 주고 그러려고 했는데, 애가 얼마나 경계가 심한지.”
“거리 생활을 하는데 고생을 많이 했는지 사람을 믿지 않았어요.”
“귀족 나으리는 모르겠지만 천애 고아인 애가 얼굴이 반반하면 온갖 일을 다 당해요. 그 애도 분명 사람한테 여러 번 데였었겠죠.”
“그때 다들 먹고 살기 힘들어서 제 자식들도 건사하기 힘든데 남의 자식을 좋은 맘으로 거둬들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요.”
트루디 대공의 비난에 증언을 하던 그들이 흥분을 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화를 내는 것보다 그 내용이 마음에 걸렸다.
황궁에서 살아 나온 것은 황제의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황자는 황궁에서 나오자마자 험한 일을 많이 당한 것 같았다.
지금까지 살아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데, 이 얘기들을 황제가 알게 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과연 계속 찾는 게 맞는 일인지 혼란스러워졌다.
“증언들을 정리해서 보고해.”
“네. 알겠습니다.”
심란해진 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듣지 못한 것들까지 보좌관이 모두 정리해서 보고서로 올릴 것이다.
트루디 대공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오랜만에 후원을 거닐었다. 산책을 하는 내내 증인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던 노예 시장, 예쁘장한 어린애, 어쩐지 낯익은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왜 익숙하게 들리는지 알 수 없었다. 알 듯 말 듯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 답답했다.
* * *
연무장은 훈련을 하는 기사들로 북적여야 하지만, 오늘은 대부분의 기사들이 그늘을 찾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훈련이 귀찮아서 농땡이를 부리는 것이 아니다. 연무장의 중심을 두 사람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분은 사이가 좋은 것 같기도 했다가.”
“나쁜 것 같기도 하다가, 모르겠단 말이야.”
제레미아와 라미엘을 구경하며 기사들이 속삭였다.
쾅-! 검이 맞부딪치자 마치 건물이 무너지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강한 굉음이 났다.
“역시 나쁜 것 같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가끔 두 사람이 잘 맞을 때가 있다. 항상 티격태격하지만 늘 훈련을 함께하는 것을 보면 역시 사이가 좋은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은 잠깐.
두 사람의 대련을 보면 정말로 서로를 죽일 기세였다. 사이가 나쁘지 않고서야 저럴 수는 없다. 기사들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과거의 제레미아와 지금의 제레미아에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외모에 대한 반응이었다. 한때는 ‘예쁘다’는 말이 금기어일 만큼 제레미아는 그 단어를 싫어했다.
하지만 라미엘이라는 존재가 나타나고 오드리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되자 왠지 외모로도 라미엘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엉뚱하게 제레미아와 라미엘 사이에 외모 대결이 벌어졌다. 두 사람 중에서 고르라니, 그만큼 행복하면서도 어려운 것은 없었다.
트루디 대공은 평소와는 다른 연무장의 분위기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보고받았다.
“웃기는 걸 하는군.”
트루디 대공은 무심하게 웃었다. 트루디 대공이 제레미아의 모습을 보고 한심한 듯 고개를 저으며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두 사람이 저렇게 싸울 때는 공작가의 고용인들이 대부분 구경하러 오고는 했다.
어느새 그 두 사람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제레미아와 라미엘은 주위 따위는 보이지 않는지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구경을 하고 있던 고용인들 중 하녀 셋이 모여서 나누는 대화가 트루디 대공의 귀에 들어왔다.
“나는 어릴 때도 좋았지만 지금의 라미엘 님이 더 좋더라.”
“맞아. 지금은 정말 남자가 되셨잖아.”
“라미엘 님이 어릴 때 모습을 보고 진짜 깜짝 놀랐었는데.”
그녀들의 대화에 트루디 대공의 발걸음이 자연스레 멈췄다.
“맞아. 제레미아 님과는 달리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그런 외모였었는데, 진짜 아직까지도 잊히지가 않아.”
“홀린 것처럼 보게 되는 외모였지.”
하녀들이 감탄하며 말하는 것은 어린 시절의 라미엘이었다. 생각해 보면 트루디 대공 역시도 라미엘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었다.
‘그 모습이 누굴 닮았던 것도 같은데.’
라는 어렴풋한 기억. 그와 동시에 트루디 대공의 눈이 커졌다. 얽히고설켜 엉망진창이었던 퍼즐들이 제자리를 찾은 것 같은 기분.
트루디 대공의 시선이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하녀들에게서 라미엘에게로 이동했다.
이제는 강인한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 하지만 어릴 때는 분명 소녀라고 착각할 만큼 여린 얼굴이었다.
라미엘이 어렸을 땐 그저 오드리아가 불쌍히 여겨 데려온 어린아이에 불과해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았다. 게다가 트루디 대공 역시 황자를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구석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지금 트루디 대공이 찾고 있는 황자의 어린 시절이 라미엘의 어린 시절과 많이 겹친다는 것을.
라미엘의 현재 나이는 정확하지 않았다. 그저 그 당시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 게다가 라미엘이 나타난 시기도…… 어렴풋이 맞아 떨어졌다.
트루디 대공은 걸음을 멈추고 제레미아와 라미엘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답지 않게 서로 이기고 싶어 했다. 그 두 사람을 충동질하는 쥬아나와 오드리아의 존재가 한몫 톡톡히 한 것 같지만.
트루디 대공은 라미엘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의 얼굴에 있는 점 하나까지도 샅샅이.
뒷목에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다. 마치 엄청난 것을 곁에 두고 지금까지 멍청하게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오히려 한 번도 관련지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일까.
하지만 아직은 확신할 수 없었다.
오래전 일이다. 확신을 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증거가 필요했다.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라는 것도 있었고, 아주 희박한 경우의 우연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그런 것들마저도 물리칠 만큼의 증거와 확신이 필요했다.
트루디 대공은 그 후 라미엘을 관찰했다.
만약 그가 황자라면 기억 상실증이 아닌 한 자신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티를 내지 않았다면 무슨 생각인 것일까.
한 번 의심이 들자 라미엘이 황자일 가능성이 하나둘씩 보였다.
라미엘은 짙은 흑발을 지녔다. 그리고 황비 역시 흑발이었다. 그녀의 하얀 피부를 더 도드라지게 하던 색.
게다가 황자 역시 아름다운 외모로 소문이 무성한 편이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조차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려서 제대로 본 사람은 별로 없지만.
생각해 보면 어릴 적의 라미엘은 수상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다만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
그는 어린 시절, 과거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길거리의 아이, 노예 시장에 팔릴 뻔했으니 결코 편한 삶을 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와중에 기억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황자가 맞다면 어떡하지.’
만약 라미엘이 황자가 맞다면 트루디 대공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가 황자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된다면 황태자와의 황위 다툼이 시작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드리아 역시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황자라는 사실을 숨긴다면 황태자가 이대로 황제가 될 것이다. 그것 역시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트루디 대공은 라미엘이 황자가 맞기를 바라야 할지 자신의 착각이기를 바라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트루디 대공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자의 흔적을 계속 추적했다. 라미엘 외에 다른 가능성이 나타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황자일 가능성이 있는 다른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살아 있다면 라미엘일 가능성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왜 하필 라미엘이지.’
결국, 트루디 대공은 보좌관에게 라미엘의 과거를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기다렸다. 상일지 벌일지 알 수 없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라미엘 님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보좌관의 말에 트루디 대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의 보좌관은 지나치게 유능했다. 그래서 자신이 지시한 일을 눈 깜짝할 사이에 해냈다. 이렇게 빨리 결과를 듣고 싶지 않았는데.
트루디 대공은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을 억누르며 보좌관이 내민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
잠시 후 트루디 대공은 보고서를 덮으며 생각했다.
혹시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라미엘의 과거는 역시나 트루디 대공이 찾고 있는 황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황제가 사랑했던 여자가 낳은 아들, 하지만 황후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지키지 못한 존재, 버려지듯이 방치된 황자, 생사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끝내 버려진 황자, 하지만 지키고 싶었기 때문에 버리는 선택을 한 황제의 후회.
라미엘은 버려진 황자였다.
* * *
한편, 라미엘과 제레미아의 외모 대결은 며칠이 지나도록 이어지고 있었다. 나름 두 사람 사이의 자존심 싸움이 되어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제국에서도 내로라할 만한 실력자들이었지만 싸울 때는 어린아이처럼 유치했다.
“그래도 제가 남편입니다.”
리미엘의 한마디에 제레미아의 빈정이 상했다.
기어코 두 사람은 오드리아에게 직접 물어보기까지 했다.
“네? 누가 더 잘생겼냐고요?”
제레미아와 라미엘이 자신에게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선택을 종용하자 오드리아가 난감해했다. 분명 선택받지 못한 쪽을 달래느라 힘들어질 것이 뻔한데.
동정심을 유발하는 애처로운 눈빛에 오드리아가 흔들리고 있을 때였다.
“나는 이쪽!”
쥬아나가 뒤에서 제레미아를 잡아당기며 외쳤다.
“나한테 가장 잘생기고 예쁘고 멋있고 섹시하면 된 거 아냐?”
“그렇긴……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대답하지 않으면 쥬아나에게 무슨 짓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말끝을 흐리니,
“왜 자꾸 유치하게 이런 내기를 하는 거야.”
쥬아나가 제레미아를 단호하게 혼내면서 오드리아를 향해 눈을 찡긋하며 미소를 보냈다.
어느새 오드리아는 흥미진진하게 두 사람을 구경하고 있었다. 제레미아가 아닌 척하면서 겁을 먹은 게 보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쥬아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을 때까지.
결국 오드리아에게 선택받은 것은 라미엘이었다. 라미엘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하고 있을 때였다.
트루디 대공이 깊은 고민 끝에 라미엘을 찾아왔다. 그에게 직접 확인하기 위해.
더 이상의 증거나 증언은 무의미했다. 마지막 확신은 라미엘에게 직접 물어보고 그 대답을 듣는 것 외에는 없었다.
“라미엘.”
“대공 각하.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라미엘이 자동으로 깍듯하게 예를 갖췄다.
트루디 대공은 그런 라미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막상 그를 보니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가늠이 잡히지 않았다. 그답지 않게 이렇게 망설이는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오드리아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대공은 라미엘을 제 서재로 불렀다. 그는 제 앞에 앉은 라미엘을 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어릴 때 어디서 살았지.”
“거처 없이 여기저기 떠돌았습니다.”
라미엘은 갑작스런 과거 얘기에 살짝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트루디 대공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가족은?”
라미엘은 점점 이상했다. 갑자기 과거의 얘기를 계속 물어보는 이유가 뭐지?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없습니다.”
트루디 대공은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라미엘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다. 라미엘은 그의 시선으로부터 위화감을 느꼈다.
“처음부터 없었던 건가, 아니면 돌아가신 건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정말 없는가. 어머니도.”
트루디 대공의 말에 라미엘은 순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어머니라는 단어에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기에.
“……네. 없었습니다.”
라미엘이 낮게 읊조렸다.
트루디 대공은 라미엘이 황자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가 모른 체한다면 억지로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못 찾은 것으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트루디 대공은 그가 어떤 소식을 가져올지 불안과 기대로 연일 잠을 설친 황제에게 거짓말을 했다.
“죄송합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혹시 단서라도 나온 것이 없는 건가.”
황제는 희망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 황제에게 트루디 대공은 원하지 않는 답을 내놓았다.
“죄송합니다.”
“역시…… 그렇군. 내가 너무 늦었나 보군.”
황제는 체념하는 듯해 보였다. 황자를 찾기 시작한 지 꽤 되었는데 아직까지 진척이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황자를 찾는 것은 무리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트루디 대공의 눈에 보였다.
“그래도, 아직 포기하지는 말아 주게.”
황제는 아직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있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트루디 대공은 무겁게 대답했다. 라미엘에 대해서는 아직 말할 수 없었다. 자칫 잘못 꺼낸 한마디로 오드리아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
트루디 대공은 좀 더 상황을 지켜보고 라미엘의 의도를 확인한 후에 결정하기로 했다. 부디 그때가 되어도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 *
트루디 대공은 말없이 라미엘을 꿰뚫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라미엘의 입장으로서는 그가 무슨 의도로 자신을 그렇게 쳐다보는지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실 트루디 대공 역시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은 지금까지 겪어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트루디 대공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라미엘을 한참 바라보다 아무 말 없이 돌아서 가 버렸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반복된 행동이었다.
트루디 대공의 의심은 그 후에도 여전했다. 라미엘은 깨달았다. 트루디 대공이 갑자기 자신의 과거를 물었다. 그게 아무 의미 없을 리 없었다.
‘설마 내 정체를 아는 건가.’
하지만 갑자기 어떻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티 낸 적이 없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
라미엘은 불안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밝힐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과거가 드러나는 순간 더 이상 지금의 평화를 유지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라미엘은 지금 이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