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것처럼 매일 아침 두 사람을 방해하던 성의 집사가 오늘만큼은 찾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아침 식사를 묻기 위한 노크도 없었다.
단지 이른 점심으로 브런치를 준비해 방문 앞에 가져다 두었다. 두 사람이 방에서 오붓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일어난 오드리아는 온몸이 나른했다.
오늘은 공작가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오후에 출발할 예정이지만 지금부터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하는데도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결국, 라미엘이 오드리아를 품에 쏙 안은 채로 음식을 입 안에 넣어 줬다. 그녀는 먹이를 받아먹는 새처럼 열심히 오물거렸다.
오후가 되어서야 오드리아는 괜찮아졌는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준비를 모두 마쳤다. 언제 또 울 수 있을지 모르는 영지였다.
그래서인지 영지민들은 두 사람이 왔을 때처럼 떠날 때도 모여들어 오드리아와 라미엘이 가는 길을 배웅해 줬다.
“우리 이만 가 볼게요.”
그동안 라미엘과 함께 있지 못해서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오드리아 역시 영지민들의 관심과 애정이 좋았다. 짧은 시간 동안 어느새 정이 들었다.
오드리아와 라미엘은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마차에 탔다. 활짝 웃으면서.
“조심히 가세요!”
“다음에 또 오세요!”
마차는 어느새 출발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두 사람이 탄 마차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크게 흔들었다.
오드리아는 라미엘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었다. 정신없긴 했지만 돌이켜 보면 즐거웠다. 미소가 새어 나왔다.
공작가로 향하는 길.
마차에 탄 오드리아와 라미엘은 피곤한 나머지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오드리아는 갑자기 눈이 떠졌다.
“꺄아!”
눈을 뜨자마자 바로 닿을 거리에 라미엘의 얼굴이 있었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자 반사적으로 비명이 흘러나왔다.
“괜찮아? 많이 놀랐어?”
라미엘이 민망해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드리아는 눈만 깜박였다.
자고 있던 걸 보고 있었던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오드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었다. 피곤에 지쳐 잠들었다. 완전히 모든 것을 내려놓은 상태가 결코 멀쩡할 리 없었다.
‘으아…… 그걸 계속 보고 있었던 거야?’
오드리아는 민망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때, 마차의 문이 벌컥 열리고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얼굴이 보였다. 두 사람은 걱정스런 얼굴로 마차 안을 살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리아! 괜찮아?!”
오드리아가 소리를 지른 것을 듣고 놀란 두 사람이 기다리다 못해 마차의 문을 벌컥 연 것이다. 제레미아가 당황하는 라미엘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 여기서 무슨 짓을 한 거야! 마차가 멈추고도 문이 안 열리는 게 이상하다 했어!”
라미엘은 억울했다. 공작가에 도착했는데 오드리아를 보니 너무 곤하게 자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유난히 피곤해했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아는 라미엘은 그런 그녀를 억지로 깨우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쉬게 놔두자.
그렇게 마차에서 기다리다 보니 지루해서 오드리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런데 보다 보니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을 뿐이다.
살짝 벌어진 입술, 떨리는 눈꺼풀, 그 모든 것을 담고 싶었다. 가까이 가도 더 가까이 가고 싶다는 생각에 어느새 닿을 듯 말 듯한 거리까지 다가갔다는 것이지만.
트루디 대공의 시선이 라미엘을 향했다. 그는 무심하게 마차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았다. 어차피 결혼한 두 사람에게 자신이 더는 함부로 참견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어서 와요.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어요.”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신시아가 인자한 미소를 띠며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어서 와라.”
그러자 트루디 대공 역시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어서 와!”
제레미아도 뒤늦게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두 사람을 반겼다. 정확히는 오드리아 한 사람이지만.
“다녀왔어요.”
오드리아가 마차에서 내리며 활짝 웃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집을 떠나 있었던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며칠 만에 돌아와 집과 가족들을 보자 모든 피로가 날아가는 것 같았다.
* * *
트루디 대공이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집무실을 나와 습관적으로 후원을 향했을 때였다. 그곳에는 이미 제레미아가 있었다.
두 사람의 오래된 버릇이, 여유가 생기면 오드리아가 있는 후원에 오는 것이니 거기까지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한곳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제레미아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뭘 보고 있는 거지.’
트루디 대공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그곳에는 오드리아가 라미엘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역시, 리아가 있구나.’
트루디 대공이 반사적으로 가까이 다가가려고 할 때였다.
라미엘이 오드리아를 향해 손을 뻗어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그러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것 같더니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설마……!’
감히 저놈이 우리 리아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전투적으로 걸음을 내딛으려고 할 때였다. 두 사람의 왼쪽 어깨, 오른쪽 어깨를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대단한 힘으로 붙잡은 게 아니었다. 그저 손을 얹고 있는 게 전부인데 두 사람은 얼음이라도 된 것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자 그곳에는 신시아와 쥬아나가 방긋 웃으며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잠시만요.”
“제레미아. 잠깐 멈춰.”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눈을 찡그렸다. 하지만 차마 신시아와 쥬아나의 손을 뿌리칠 수는 없어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있었다.
“설마…… 두 사람한테 가려는 건 아니죠?”
신시아가 은근하게 질타했다.
“제레미아. 두 사람을 방해하지 마.”
쥬아나가 제레미아를 향해 엄하게 말했다.
“당분간은 오드리아와 라미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 줘야죠.”
“신혼이잖아요.”
신시아와 쥬아나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동시에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리아를 눈앞에 두고도 다가가지 못하다니. 이건 악몽이었다.
* * *
트루디 공작가의 데릴사위가 되면서 라미엘에게는 트루디라는 성이 생겼다. 모두가 동경하는 트루디 공작가의 일원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노예 출신으로 남작이 되더니 이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트루디 공작가의 일원이 되었다.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 제레미아와 쥬아나, 거기에 오드리아와 라미엘까지. 어느새 트루디 공작가는 북적거리는 대가족이 되었다.
식사는 언제나 풍성했고 곳곳마다 인기척이 끊이지를 않았다.
그 안에서 라미엘은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사실 라미엘은 자신에게 생긴 성이 트루디라는 것이 좋았다. 그 성의 주인이 대단한 트루디 대공이라서가 아니었다.
오드리아 트루디, 라미엘 트루디. 오드리아와 같은 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녀에게 소속되어 있다는 감각이 간지러워 미칠 것처럼 좋았다.
“라미엘의 얼굴에 행복이 둥둥 떠다니네.”
“그렇게 좋아?”
동료 기사들이 신혼여행 직후부터 헤벌쭉 웃고 다니는 라미엘을 놀렸다.
“뭐…….”
그런데 평소라면 정색을 하며 무시하거나 한마디 해야 할 라미엘이 얼굴을 붉히며 말을 줄였다.
“진짜 좋아 죽네. 좋아 죽어.”
라미엘의 반응에 질린 기사들이 고개를 저으며 전염될까 봐 멀리 떨어졌다.
그런데 하루 종일 이유 없이 웃고 다니는 것은 오드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오드리아는 작업실에 있을 때도, 후원을 산책할 때도, 잠시 생각에 빠져 있을 때도 계속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고용인들은 “대체 얼마나 좋으시면 두 분 다 정신을 못 차리실까.” 라고 속닥였다.
쥬아나가 방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후원을 가로지르던 제레미아가 걸음을 멈추고 반대편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오드리아와 라미엘이 다정하게 후원을 걷고 있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두 사람은 한 걸음 내딛고 서로를 보며 웃고, 또 한 걸음 내딛고 서로를 빤히 바라보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주었다.
제레미아는 당장이라도 다가가 오드리아와 함께 산책하고 싶었다.
“이제 네가 끼어들 곳이 아냐.”
방에서 기다린다던 쥬아나가 어느새 제레미아의 옆에 다가와서 단호하게 말했다.
“하아, 우리 리아가 어느새…….”
애달픈 제레미아의 시선이 오드리아를 향했다. 그 모습을 보며 쥬아나가 못 말린다며 피식, 웃었다.
오드리아와 라미엘은 뒤통수에 닿아 있는 제레미아의 시선을 알고 있었다.
“쥬아나 언니가 데리고 갔나 보네.”
오드리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나는 이러다 뒤통수가 뚫리지 않을까 싶어.”
라미엘이 장난스레 말했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집요한 시선이 라미엘을 따라다녔다.
하지만 라미엘은 오히려 그게 가족들 사이에서 오드리아와 가장 가까운 존재가 자신이라는 증명인 것 같아서 내심 뿌듯해서 따라다니는 시선을 즐겼다.
그러던 중 오드리아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트루디 공작가의 가장 큰 이벤트이자 대공과 제레미아의 경쟁이 가장 치열한 날이기도 했다.
언제나 특별한 것을 선물해 주고 싶지만 그게 무엇일지 정하는 데까지는 험난한 시간이었다.
“결혼하고 처음 있는 생일이니 좀 더 특별한 걸 해 주고 싶은데.”
제레미아는 이번에도 역시 선물할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결혼하고 처음 하는 선물이었다. 특별한 것을 주고 싶은데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오드리아에게 필요한 것은 아낌없이 주었기 때문에 특별한 날에는 어떤 걸 줘야 할지 오히려 정하기 어려웠다.
“라미엘 님께 물어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뭐?”
제레미아가 업무도 멈춘 채 몇 시간 동안 고민을 하고 있자 그웬이 한마디 했다.
“아무래도 함께 있는 시간이 기니 제일 잘 알지 않겠습니까.”
“…….”
“아니면 슬쩍 물어봐 줄 수도 있고요.”
그웬의 말에 점점 혹했다. 라미엘을 보면 심술이 나지만 자신에게 쥬아나가 특별한 것처럼 오드리아에게 라미엘 역시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면 어찌저찌 넘어가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입장인 트루디 대공에게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보다 더 좋고 오드리아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 싶었다.
“이제 곧 리아 생일이야. 어떤 선물을 하면 좋을까.”
제레미아가 라미엘에게 물었다.
문제는 그런 생각을 한 게 제레미아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트루디 대공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라미엘을 찾았다.
“지금 리아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뭐지.”
“일단 알아보겠습니다.”
라미엘은 양쪽에서 동시에 묻자 정신이 없었다.
게다가 라미엘이 어설프게 숨기는 바람에 오드리아가 이 사실을 눈치채기까지 했다.
“혹시 아빠랑 오빠가 내 선물에 대해서 물어봤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낭패 섞인 라미엘의 얼굴에 오드리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매년 이맘때면 내 선물을 고민하느라 바쁘니까.”
“혹시…… 원하는 거 있어?”
어차피 들킨 거 차라리 물어보자 라는 마음에 라미엘이 물었다.
“응. 있어.”
오드리아는 기분이 좋은지 계속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그러니까 라미엘. 이걸 계기로 둘 사이에서 잘해 봐.”
“……?”
“이걸 기회로 아빠랑 오빠하고 친해지면 좋잖아.”
오드리아는 친해진다는 표현을 썼지만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조금 달랐다.
이번 일을 잘 활용해서 두 사람에게서 좋은 위치를 얻어 내라는 뜻이었다.
오드리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정보를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서 오히려 라미엘과 가까워지고 싶게,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그녀의 말을 이해한 라미엘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이작이 말할 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라미엘은 오드리아의 순진한 미소 뒤에 가려져 있던 모습을 드디어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자신 역시 언제나 오드리아의 뜻대로 움직였다.
“그래서 실망했어?”
오드리아가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물었다.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걱정이라곤 전혀 없는 얼굴로.
실망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오히려 더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다.
“이러니 대공 각하와 제레미아 님이 정신을 못 차리지.”
그녀는 언제나 빠르게 눈치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가족들이 원하는 것을 해 주었다.
자연스레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언제나 감동을 받았다.
“아빠랑 오빠만?”
“그럴 리가. 나도 이미 빠져나갈 수가 없는데.”
오드리아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계속 그녀와 함께 행복하기 위해서라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말 것이다. 라미엘은 의지를 불태웠다.
이것마저도 오드리아의 생각대로라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
오드리아는 다짐을 하는 라미엘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는 상대적으로 라미엘이 두 사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괜찮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라미엘이 점점 위축될 수 있다.
그전에 오드리아는 라미엘이 두 사람 앞에서 당당해지기를 바랐다. 그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자신을 이용하길 바랐다.
“알아냈습니다.”
“그게 뭔데!”
제레미아의 눈이 커지며 라미엘의 말에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경청했다.
라미엘은 오드리아의 조언대로 여우같이 두 사람을 잘 구슬렸다.
“앞으로도 필요하면 얘기하세요. 얼마든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말?”
제레미아의 눈이 기대감으로 일렁였다. 오드리아의 예상대로 그 이후로 제레미아는 눈에 띄게 라미엘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트루디 대공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그런가. 수고했어.”
그렇게 말하는 트루디 대공은 제레미아에 비해서는 표정에 변화 없이 무심하게 들었지만 라미엘은 곧 깨달았다.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집중하고 있는지를.
제레미아와는 반응이 다를 뿐 오드리아가 조금이라도 더 만족할 수 있는 선물을 정하기 위해 라미엘의 한마디 말도 놓치지 않았다.
오드리아의 생일은 가족들만 모여서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생일 축하해, 오드리아.”
신시아와 쥬아나가 평범하면서도 진심이 가득한 축하를 건넸다.
“감사해요.”
오드리아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리아. 생일 축하해. 네가 태어난 게 내겐 가장 큰 선물이란다.”
“리아. 다음 해에도 꼭 축하하게 해 줘.”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오드리아의 생일을 스스로 더 감격하며 축하했다.
“모두들 감사해요.”
어느새 가족이 여섯 명으로 늘어났다. 그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줘 마음이 가득 찼을 때였다.
“리아. 선물이야.”
“이건 내가 준비한 선물이란다.”
계속 타이밍을 노리고 있던 제레미아와 트루디 대공이 경쟁적으로 선물을 내밀었다.
“……?!”
두 사람의 선물은 포장되어 있어 안이 보이지 않았지만 한눈에 봐도 두 개의 선물 크기가 똑같았다.
오드리아가 선물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그러자 커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선물이 무엇인지 드러났다.
“와아!”
선물을 확인하자마자 오드리아가 감탄했다.
커다란 액자에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의 다정한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또 다른 액자에는 제레미아와 쥬아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너무 마음에 들어요!”
두 사람의 초상화를 받고 싶다고 오드리아가 라미엘에게 미리 말해 두었다.
당연히 선물을 풀기 전에 이 안에 뭐가 있을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오드리아는 보자마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제 방에 걸어 둬도 되죠?”
“당연하지.”
“그럼. 선물인데. 꼭 걸어 줘.”
처음 서로의 선물이 같은 거라는 걸 확인하고 인상을 쓰던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도 오드리아가 어느 때보다 기뻐하는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덕분에 라미엘의 위상이 높아졌다.
“라미엘. 이번에 아주 좋았어. 내년에도 부탁해.”
제레미아가 라미엘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부탁하지.”
“……네.”
“아, 가능하면 내년에는 아버님과 다른 걸로 말이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서로를 견제하며 라미엘을 쳐다봤다.
“……네.”
라미엘은 앞으로 매년 이런 상황이 반복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트루디 공작가에서는 웃음이 끊이지를 않았지만 제국의 근황은 그러지 못했다.
최근, 황제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이전에는 며칠 정도 안정을 취하면 괜찮아지는 듯 보이던 황제가 점점 일어나지를 못하더니, 병상에 있은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제국의 하늘엔 어두운 먹구름이 끼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황제의 몸은 회복이 되지를 않았고 그럴수록 후계에 관한 일이 논의되고 있었다.
“이미 황태자 전하께서 잘하고 계시니 걱정할 것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건 말처럼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트루디 대공은 고심했다. 지금의 황제가 죽고 황태자가 황제가 된다면 앞으로 제국은 어떻게 될까.
“부족한 점도 있지만 그건 곁에서 잘 보좌하면 되는 거고.”
“뭘 이리 고민하십니까. 어차피 황태자가 아니면 할 사람이나 있습니까.”
황궁은 언제나 손이 귀했다. 자식이 많은 편도 아니지만 살아남는 이는 더 적었다. 그러다 보니 이번 대에는 지금의 황태자가 유일한 핏줄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황태자가 마음에 안 들어도 그 외엔 마땅한 대안이 없었다.
하지만 막상 황태자가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닥치니 트루디 대공은 찝찝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흉내도 못 내는 건가.”
트루디 대공이 혀를 찼다.
차라리 황태자가 조금 모자란 것이 전부였다면 이토록 고민하지 않았을 텐데.
그는 태어날 때부터 차기 황제였다. 모두가 그를 어려워하고 떠받들어 줬다. 자연스레 세상의 모든 것이 자신의 아래에 놓여 있었다.
그것이 그를 오만하고 독선적으로 만들었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기분을 이유로 막무가내 행동을 일삼았다.
그건 단순히 부족한 정도가 아니었다. 게다가 황태자인 지금이 이 정도인데 황제가 된다면 얼마나 심해질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다른 황위 계승권자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것이 가장 아쉬웠다.
chapter 18. 버려진 황자
황제는 병석에 누운 채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이제 자신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것이 한 달일지 반년일지 아니면 일 년을 버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이상은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럴수록 지난날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날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데도 미련이 남아 자꾸만 붙들고 있는 기억을.
황제는 자신을 찾아온 트루디 대공을 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트루디, 혹시 기억하나.”
“무엇을 말입니까……?”
황제의 말에 전혀 짐작조차 되지 않는지 트루디 대공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황비가 죽을 때 말이네…….”
“……?!”
트루디 대공이 드물게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을 본 황제가 느릿하지만 정확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 황비궁에서 나온 아이의 시체는…….”
“…….”
“황자가 아니다.”
“……!”
트루디 대공의 눈이 커졌다. 사실 황제에게는 황태자 외에 아들이 한 명 더 있었다.
황후에게서 낳은 황태자와 황비에게서 낳은 황자. 하지만 황비는 황궁에서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었다. 세력을 만들지도 황후와 싸워 이길 수도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황비궁에 불이 나는 사고가 발생했고 그때 황비와 함께 어린 황자도 목숨을 잃었다. 이게 공식적인 발표였다.
하지만 암암리에 황비궁에서 발견된 어린아이가 황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이 돌았었다. 아주 잠깐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도 안 된다며 무시해서 곧바로 사그라들기는 했지만.
황후가 버티고 있는 황태자에게 힘도 없는 황비가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당연히 황자에게도 미래가 없었다.
그 당시 황비궁에 화재가 났을 때도 사람들은 황비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을 뿐이지 존재감도 옅은 어린 황자의 죽음에 관심을 갖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황제는 지금 버려지고 결국엔 비참하게 죽은 황자가 살아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 그럴 것이다…… 황자는 그때 죽지 않았을 거야…….”
트루디 대공의 얼굴이 복잡해졌다. 황제는 황자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황비가 죽게 두지 않았을 거야.”
황제가 확신에 가득 차 말했다.
오래전에 잃어버린 아들의 생사는 황제마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아는 황비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황자를 살려 황궁 밖으로 내보냈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기에 황비궁 화재 사건 역시 자세히 파헤치지 않고 조용히 정리한 것이다.
찾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저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어쩌면 찾았는데 이미 황자가 죽었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가슴속에 묻어 왔었다.
그런데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이 자꾸만 떠올랐다. 죽었다면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살아 있다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혹시 찾을 수 있을까.”
황제가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미안하지만, 그대에게 부탁을 할까 하는데.”
황제가 트루디 대공에게 부탁했다. 혹시라도 황태자가 눈치채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괜히 잘 살고 있는 아이의 인생을 자신이 망칠 것 같았다.
병석에 누운 지 한 달 동안 생각했다. 누구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고 부탁하면 좋을지.
역시나 트루디 대공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황제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지금껏 죽은 줄 알았던 황자를 찾는 것.
그건 누가 봐도 황태자에게 후계를 잇게 하지 않고 다른 황자에게 주려 한다는 의심을 사기 좋았다. 황제의 마음을 파악하기 위해 트루디 대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찾는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황제가 단순히 몸이 좋지 않아 약해진 마음으로 찾으려는 것이면 매정하게 끊을 생각이었다.
“그다음은 그대의 뜻에 맡기지.”
황제는 방금 전 위험한 발언을 했다. 어쩌면 후계의 문제로 번질지도 모르는 일인데 트루디 대공에게 맡긴다니.
황태자는 방약무인했다.
게다가 곧 자신이 황제가 될 거라 생각한 나머지 고삐가 풀린 것처럼 행동했다. 자신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그리고 황제 역시 그런 황태자의 행태를 알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의 근심은 깊어만 갔다.
못나더라도 자신의 아들이다.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자신의 판단이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태자에 대한 불안한 평가가 이어지자 당연히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황제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를 나무랐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처럼 말했지만 실상은 분을 겨우 억누르고 있는 것뿐이었다.
황태자는 요즘 분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라미엘과 오드리아에 관한 소식을 접하기만 해도 그날은 황태자궁의 물건이 남아나지 않았다.
“누가 누구와 결혼해?!”
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나를 무시하더니 감히……!”
황태자가 이를 갈며 오드리아를 떠올렸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황태자였는데도 언제나 자신의 자리가 불안했다.
자신의 자리를 굳건하게 만들기 위해서 오드리아 트루디와 결혼해 누구도 넘볼 수 없게 하려고 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다가가 호의를 표시하기까지 했는데, 감히 그녀는 황태자가 보낸 서신에 답장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하루아침에 노예 출신의 호위 기사 나부랭이와 결혼을 발표했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느꼈던 분노가 아직도 생생해서 치가 떨렸다.
감히 제국의 황태자를 걷어차고 만난 상대가 그런 놈이라는 사실에 그의 자존심이 짓뭉개졌다.
황태자는 날이 바짝 서 있는 상태로 연무장을 찾았다. 거기서 아무나 붙잡고 분을 풀지 않으면 쌓여 있는 화를 도저히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런데 하필 황태자가 황궁 연무장에 도착하니 라미엘이 있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황궁 기사단과 각 가문 기사단의 합동 훈련 때문에 최근 한 달 동안 계속 이곳에서 훈련 중이었는데 마침 황태자의 시야에 잡힌 것이다.
‘잘 걸렸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황태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최근 트루디 공작가의 데릴사위가 되어서 마치 돛배에 선풍이 분 것처럼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가소로운지. 모두에게 보란 듯이 그놈을 짓밟아 주고 싶었다.
‘고작 데릴사위가 된 주제에 잘난 척하고 다니기는.’
라미엘은 단 한 번도 잘난 척을 한 적이 없었다.
라미엘은 처음부터 모두에게 인정을 받던 기사였다. 스스로도 강인한 기사였기에 주위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황태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공작가의 데릴사위가 되어 기고만장하다고 여겼다.
언제나 트루디 대공에게 인정받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황태자의 열등감이었다.
황태자는 처음부터 라미엘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일부러 개인 훈련 중인 다른 기사를 불렀다. 훈련 상대를 빌미로 황태자는 기사들을 고의적으로 괴롭혔다.
다른 기사들이 보기에도 적나라할 정도로 질 나쁜 훈련이었다. 하지만 황태자가 훈련이라고 말한 이상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 또 시작이네.”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는지 지겹다는 듯 어느 기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차갑게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기사들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는 기사가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그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다음!”
황태자는 또 다른 타깃을 찾아서 끊임없이 이어 나갔다. 그럴수록 기사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를 누르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계속될 것 같았다.
하지만 감히 누가 나설 수 있을까. 감히 황태자를 상대로 그에게 망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그게 아니더라도 황태자는 강했다.
아무리 논란이 있는 황태자라고 해도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엘리트 교육을 받아 왔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때문에 유명하지 않을 뿐이지 그 누구를 상대해도 지지 않을 만큼 황태자는 강했다. 모두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것밖에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라미엘이 황태자에게 밀려 쓰러진 기사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황태자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를 끌어내기 위해 한 짓이었다. 그리고 라미엘은 멍청하게 바로 걸려들었다.
라미엘은 곧바로 공격하지 않았다. 황태자의 검을 막아 내며 그를 살피는 것 같았다.
황태자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그는 검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검을 맞대어 보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황태자는 라미엘에게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처음부터 강하게 공격을 이어 나갔다. 아직은 잘 막고 있었지만 한번 흐트러지기 시작하면 그대로 무너질 것이다.
그가 의도한 대로 라미엘이 움직이자 황태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검을 맞대면 맞댈수록 황태자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라미엘은 무너지기는커녕, 초반에는 실력을 감추고 있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눈빛부터 검을 잡고 있는 손아귀의 힘까지 모든 것이 달라졌다.
라미엘이 크게 휘두른 검과 맞닿은 순간 황태자의 발이 뒤로 밀려났다. 갑작스런 상황 역전에 황태자가 당황해서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 순간 라미엘의 눈빛이 돌변했다. 황태자가 스스로 무너지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결국, 생각보다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승부가 결정됐다. 그것도 라미엘의 압도적인 승리로.
“…….”
정적이 감돌았다. 차마 숨소리도 크게 내뱉을 수 없었다.
라미엘이 승리했다. 기사들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기뻐했지만 신경질적인 황태자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긴장감이 흘렀다.
황태자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존재 때문에 가려진 실력자라고 한다면 라미엘은 그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자들 때문에 억지로 숨겨진 실력자였다.
라미엘을 찍어 누르고 모두에게 자신의 힘을 보란 듯이 보여 주려고 한 황태자의 계획은 망가졌다. 게다가 볼썽사나운 꼴까지 보이고야 말았다.
“승부는 난 것 같습니다.”
라미엘이 덤덤하게 내뱉는 말에 황태자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아니면 더 하시겠습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라미엘의 목소리는 평이했다. 만약 황태자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으면 얼마든지 이어서 하겠다는 듯이.
‘제길!’
황태자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더해 봤자 자신이 망신당할 뿐이었다.
황태자의 시선이 라미엘을 향하자 모두가 긴장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몇몇 기사들이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자신은 이토록 분한데 라미엘은 별다른 동요마저도 없었다. 그 모습을 불쾌하게 노려보며 황태자는 신경질적으로 검을 검집에 넣으며 돌아섰다. 잠시 라미엘을 노려보았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트루디 가문의 일원이 되었다고 내가 우스워 보이기라도 하는 건가.’
황태자는 연무장을 빠져나가는 내내 이가 부서질 듯이 강하게 물었다.
방금 전 자신이 당한 수모를 절대 잊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고작 그런 놈에게 당한 일을 넘어간다면 자신을 우습게 보고 황태자의 자리를 위협하는 자들이 생겨날 것이다.
황태자가 연무장을 완전히 나서자마자 기사들이 라미엘에게 다가왔다. 걱정과 고마움이 섞인 모습이었다.
“라미엘. 괜찮아?”
황태자와의 대련을 본 기사들 중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그는 다리를 절뚝이고 한쪽 어깨가 비틀린 듯 기울어져 있었다.
“네. 괜찮습니다.”
“하지만 황태자께서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텐데.”
“뭐, 그때도 상대해 드리면 되겠죠.”
라미엘이 무심하게 답하자 기사는 더 초조해졌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왜 모르는 걸까.
‘그래도 괜찮으려나. 무슨 일이 있어도 대공 각하께서 계시니, 어떻게든 되겠지.’
기사는 괜히 라미엘에게 위험을 경고해서 불안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가만히 있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라미엘은 정말로 황태자의 보복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그에 대한 관심조차도 없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싶자 라미엘이 돌아가려고 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라미엘은 칼같이 돌아가는군. 역시 신혼이라 그런가.”
그는 지난 한 달 동안 황궁에서 합동 훈련을 하면서도 언제나 정확한 시간에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가고는 했다.
“오늘 고마웠어. 어서 가 봐.”
“그럼.”
사실 라미엘이 황태자의 만행에 나선 것은 황태자가 연무장을 휘젓는 바람에 발이 묶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돌아가야 자신도 집에 갈 수 있으니.
결국, 참다못해 그를 돌려보내기 위해 나선 것이다.
‘빨리 가자.’
이미 생각보다 많이 늦었다. 오늘 일찍 돌아가면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몰래 단둘이 온실에서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조금만 늦어도 두 사람이 끼어들 것이다.
라미엘은 공작가를 향해 걸음을 빨리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서 황태자의 존재는 깨끗하게 지워졌다.
황태자는 라미엘에게 당한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날의 치욕에 대한 불쾌감은 점점 더 짙어질 뿐이었다.
단지, 같은 방법을 사용했을 때 똑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어서 다른 방법을 찾았을 뿐이다. 확실하게 그를 눌러 줄 방법을.
때마침, 곧 사냥 대회가 있을 예정이라는 사실을 안 황태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가장 적절한 장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가 주최하는 정기 사냥 대회가 열렸다. 하지만 최근 황제의 건강이 좋지 않아 황태자가 대신 주최하게 되었다.
사냥 대회는 수도 인근에 있는 황가 소유의 산에서 열렸다.
사실 사냥 대회는 단순했다. 주로 친목을 도모하고 그중에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도 하는 장.
오전에 모여서 자유롭게 인사를 하다가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들은 산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귀부인들과 황궁의 시종들, 그리고 사냥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이 산 밑에서 시간을 보내며 내기를 하기도 하다 보면 어느새 사냥을 하러 간 자들이 하나둘씩 돌아온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동물을 잡아 오거나 희귀한 동물을 잡아 온 사람이 승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런 일이 있으면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경쟁적으로 오드리아에게 바치고는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서로에게 사냥물을 바칠 상대가 있었다.
“신시아. 그대에게 가장 귀한 걸 잡아다 주겠소.”
“기대할게요.”
신시아가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쥬아나.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 잡아다 줄게.”
“전부 다?”
“응. 뭐든 원하는 건 다.”
“그럼 나는…….”
쥬아나가 신이 나서 원하는 것을 쉴 새 없이 늘어놓았다.
오드리아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볼 때였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시선이 오드리아를 향했다. “리아.” 동시에 그녀를 부르면서.
“오늘도 언제나처럼 가장 귀한 걸 주마.”
“리아. 내가 뭘 잡아올지 기대해.”
두 사람이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오드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요……? 아빠랑 오빠는 어머니랑 언니한테 줘야 하지 않나요?”
“신시아와 리아, 두 사람에게 바칠 것 정도는 충분히 잡을 수 있어.”
“걱정 마. 남들보다 훨씬 좋은 걸 잡아다 줄 테니까.”
두 사람의 당연하다는 반응에 오드리아의 동그랗게 커졌던 눈이 반달 모양이 되었다.
“기대할게요.”
오드리아가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었을 때였다.
“오드리아는 제 것을 가장 기대할 겁니다.”
지금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라미엘이 오드리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건 결과를 봐야 아는 거지.”
제레미아가 지지 않고 눈에 힘을 주자 트루디 대공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기대되네요.”
“그러게요. 우리 결과를 예상하면서 기다릴까요.”
“그거 좋은 생각이네.”
신시아와 쥬아나가 세 사람의 경쟁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며 즐겼다.
“오드리아도 같이할 거지?”
쥬아나가 오드리아를 향해 물었다. ‘당연히 할 거지?’ 하는 눈빛으로.
“아, 저는…….”
오드리아가 고민하자 세 사람이 긴장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럴까요. 그럼?”
오드리아가 신시아와 쥬아나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늘 사냥 대회는 그대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자 하는 것이니 마음껏 활약하시오.”
황태자가 모두를 향해 말했다. 이제 곧 본격적으로 사냥을 시작하려는 것이다.
“과연 누가 얼마나 대단한 결과물을 보일지 역시 기대하도록 하지.”
말을 이어 가며 주위를 둘러보던 황태자의 시선이 라미엘의 앞에서 멈췄다.
“……?”
그 시선을 오드리아는 정확하게 눈치챘다.
‘왜 라미엘을 빤히 보는 거지.’
불안한 느낌이 스멀스멀 그녀의 감정을 건드렸다.
“부디 아무도 다치지 않기를 기원하지.”
황태자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모두 안전하게 돌아오도록.”
황태자가 모두를 향해 말했다. 오드리아의 귀에는 라미엘을 향한 경고처럼 들린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의 말을 끝으로 참석한 귀족들이 말을 타고 출발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라미엘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산속으로 향했다.
이제 해가 질 때가 되어서야 돌아올 것이다. 그때까지는 이곳에서 남은 사람들끼리 시간을 보내며 기다릴 것이다.
산 밑에 있는 귀부인과 영애들은 대부분 여유롭게 차를 마시거나 데리고 온 애완동물과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오드리아는 세 사람이 떠나고부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냥 대회가 시작되기 직전, 그는 분명 라미엘을 향해 경고하듯이 말했다.
그 순간 황태자가 짓던 불쾌한 미소가 걸러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었다.
‘사냥 대회에서 이긴다는 것은 잠깐의 유흥이자 성취감이지, 대단한 것도 아니잖아. 별거 아니야.’
만약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라미엘은 강했다. 황태자에게 허무하게 당할 리 없었다. 게다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까지 있으니 더더욱.
그러니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오드리아는 몇 번이고 스스로를 안심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사그라지지 않고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도 맴돌았다. 레이디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는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새 시간이 저물고 노을이 지려 하고 있었다.
“이제 돌아오네요.”
한 귀부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사냥을 나갔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고 있는 게 보였다. 황태자가 돌아오고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도 돌아왔다. 사냥의 수확물을 가지고.
문제는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라미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에게 달려갔다.
“라미엘은요? 같이 안 돌아오나요?”
“아직 안 왔나.”
트루디 대공이 산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냥 대회다. 목표물을 쫓다 보면 어느새 뿔뿔이 흩어진다. 그러니 좀 늦게 도착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조금 늦나 보군.”
조금 늦을 수도 있다. 그다지 이상하지도 걱정할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쾅쾅, 마치 위험을 알리듯이. 오드리아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산에서 내려오는 이들 중 어디에도 라미엘이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오드리아는 본능적으로 시종들의 시중을 받고 있는 황태자를 보았다.
오드리아는 얼마 전, 황궁에서 있었던 황태자와 라미엘의 일을 알고 있었다.
오드리아가 아는 황태자는 그런 수모를 당했는데 그냥 지나갈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비열한 방법을 찾아서라도 라미엘에게 똑같이 갚아 주려 할 것이다.
‘설마…….’
그때 황태자의 비죽거리는 미소와 눈빛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드리아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대로 옆에 있던 말에 올라타 달렸다. 산으로 가기 위해서.
‘역시 재수가 없더라니.’
오드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나지막하게 욕지거리를 날렸다. 오드리아는 과거에 장사를 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빠른 눈치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멀리서 나누는 대화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을 만큼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오드리아는 분명히 보았다. 황태자가 이죽거리는 미소와 함께 라미엘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을.
“오드리아. 지금 어딜 가는 거야!”
“무슨 일이야!”
갑작스러운 오드리아의 행동에 놀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급하게 말에 올라타 오드리아의 뒤를 쫓았다.
사실 오드리아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지는 꽤 되었다.
그런데 오늘 사냥 대회가 시작되기 전, 황태자의 시선이 라미엘을 계속 좇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처음에는 왜 자꾸 이쪽을 보는지 신경이 쓰였다.
그의 입꼬리가 라미엘을 향해 올라갈 때 불길한 기분이 온몸을 휩쓸었지만 언제나 그랬듯 황태자의 열등감이라고 무시했다.
이곳에는 트루디 대공도 제레미아도 있으니까 라미엘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절대 가만 안 둬.’
오드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세 사람이 산으로 다급하게 들어가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 역시 술렁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혹시 아는 사람이 있나.”
“글쎄, 그런데 라미엘 남작이 안 보이는군.”
“대체 무슨 일이지?”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 속닥였다. 황태자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죽거렸다.
그는 몰랐겠지만 옆에 있던 시종은 황태자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얼굴이 너무나 비열해 보여서.
오드리아는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긴장했다. 그동안 말을 여러 번 타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전속력으로 산을 타 본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산속 어딘가에 있을 라미엘을 찾을 때까지 진정되지 않을 것 같았다. 자꾸만 머릿속에서 안 좋은 생각들이 떠돌았다.
“저쪽입니다!”
그때였다. 세 사람을 호위하듯 쫓아온 아이작이 소리를 지르며 방향을 가리켰다. 오드리아가 가장 먼저, 그녀의 양옆으로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달려갔다.
“라미엘!”
“오드리아? 왜 여기에……?”
갑자기 나타난 오드리아의 모습에 라미엘의 눈이 커졌다. 오드리아는 정신없이 말에서 내려 라미엘을 향해 다가갔다.
“라미엘. 괜찮아?!”
오드리아는 여전히 놀란 얼굴로 라미엘을 이리저리 살폈다. 라미엘의 몸이 더러워지고 피곤해 보이기는 하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괜찮은데…… 왜 여기 있어?”
라미엘이 놀란 오드리아를 달래며 물었다. 오히려 깜짝 놀란 것은 라미엘이었다.
“그야, 다 돌아오는데 너만 오지 않으니까…….”
오드리아는 황태자의 수상한 행동은 말하지 않았다.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라미엘이 의문을 품을 때였다.
“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지?”
트루디 대공이 물었다. 그제야 라미엘은 오드리아의 뒤로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런, 제가 걱정시켜 드렸나 봅니다.”
“그래도 걱정한 것보다 괜찮은 것 같군.”
“무슨 일 있었어?”
오드리아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아까 황태자를 떠올리면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오드리아는 무조건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라미엘은 황태자의 ‘황’ 자도 꺼내지 않았다.
“돌아가려는데 신기한 걸 발견하는 바람에.”
“뭐?”
자세히 보니 라미엘의 뒤에 그가 사냥한 것으로 추정되는 동물이 쓰러져 있었다. 그것도 마치 전설처럼 목격담만 도는 동물이었다.
“이걸 실제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거든.”
“이번 사냥 대회의 승리자는 확정이군.”
트루디 대공이 그 동물을 보고 말했다. 분명 그 누구보다도 눈에 띄는 결과물이었다.
“욕심을 부리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되는 것도 몰랐습니다.”
라미엘이 머쓱해하면서도 자랑스러워했다. 라미엘은 자신의 몰골이 이렇게 된 것도, 시간이 이렇게까지 늦은 것도 모두 사냥 때문이라고 했다.
“저걸 잡느라…… 못 온 거야?”
오드리아가 동물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응. 너에게 주고 싶어서.”
라미엘은 당연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오드리아의 칭찬을 기다렸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침묵했다.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라미엘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지금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고를 수 없었다.
지금 여기에 라미엘의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중에서도 오드리아는 확신했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분명 뭔가 벌어진 것이 분명하다고.
특히, 라미엘의 몰골이 그것을 증명했다. 분명 그가 잡은 동물은 잡기 힘든 것이다. 그러니 사냥 도중에 이렇게 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사체가 된 동물의 모습을 본다면 얘기는 달랐다. 깔끔하게 단 한 번에 죽인 듯한 솜씨.
결코 사냥을 하느라 더러워진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전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겠지.
두 사람을 지켜보던 트루디 대공이 나섰다.
“일단 늦었으니 돌아가지.”
트루디 대공이 가장 먼저 앞장섰다. 산 밑으로 내려가는 네 사람. 하지만 네 사람의 표정은 각기 달랐다.
산 밑으로 내려왔을 때는 이미 밤이 깊었을 때였다. 갑자기 산으로 향한 오드리아와 트루디 대공, 제레미아로 인해 산 밑에는 일대 소란이 일었다.
황궁 기사단들이 그들을 찾으러 산으로 향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라미엘까지 네 사람이 태연하게 돌아오자 모두가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게다가.
“저게 뭡니까!”
“설마 제국 신화에 나오는 그게…… 맞습니까?”
라미엘이 잡은 동물에 모두가 감탄했다. 이미 죽은 사체이긴 하지만 실제로 이걸 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이걸 잡다니 역시 대단합니다!”
“대공 각하의 사위 역시 남다르군요.”
결과적으로는 라미엘의 평판 역시 올라갔다. 모두가 라미엘을 향해 칭찬을 늘어놓았지만 정작 오드리아와 트루디 대공, 제레미아의 표정은 어두웠다.
특히 산에서 내려오는 동안 제레미아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제레미아는 정신없는 와중에 황태자를 정확히 노려보았다. 멀쩡한 모습으로, 그것도 누구도 잡기 힘든 동물을 잡고 모두에게 칭송받는 라미엘을 노려보고 있는 황태자를.
“저 미친 새끼!”
제레미아가 욕지거리를 날렸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의 경고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의 눈빛 역시 매서웠다.
황태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보좌관은 오금이 저렸다.
황태자가 일을 꾸밀 때부터 그는 최선을 다해 말렸다. 트루디 공작가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때때로 황제마저도 그의 눈치를 보는 지경인데, 황태자가 트루디 대공의 심기를 잘못 거슬렸다가 감당하기 힘든 후폭풍을 겪어야 할까 걱정되었다.
사냥 대회의 우승은 당연히 라미엘이 차지했다.
라미엘은 이번 사냥의 결과를 당연하게도 오드리아에게 바칠 생각이었다. 사실 제레미아에게 지고 싶지 않아서 더 열심히 한 것도 있었기에 뿌듯했다.
하지만 어쩐지 오드리아의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오드리아.”
라미엘이 오드리아에게 다가가려고 하는데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오드리아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이번 사냥의 제물은 너에게…….”
바치겠다며 그녀의 손등에 살짝 입맞춤을 하려고 할 때였다. 라미엘은 오드리아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녀가 그대로 손을 뿌리치고 돌아서 버렸으니까.
“어……?”
라미엘은 돌아서 가 버리는 오드리아의 뒷모습을 보며 눈만 끔벅거렸다. 왜 이렇게 화가 났지?
라미엘은 태연했다. 그래서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오드리아의 짐작대로 라미엘은 사냥 중에 황태자와 마주쳤다. 그리고 그것은 황태자의 계략이었다.
황태자는 라미엘을 죽이려고 했다. 정말 죽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꽤 재미있는 모습을 볼 수 있겠지, 기대했다.
황태자와 라미엘. 정정당당하게 겨룬다면 황태자는 라미엘을 이길 수 없다. 그 사실을 라미엘은 당연하게, 황태자는 분하지만 하는 수 없이 인정했다.
하지만 정정당당하지 않다면 라미엘은 황태자를 이길 수 없었다. 그는 황태자니까. 그리고 라미엘은 트루디 공작가의 일원이 되었지만 아직 불안정했으니까.
라미엘은 절대 자신으로 인해서 문제가 생기거나 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 황태자가 자신의 신분을 내세운다면 라미엘은 그를 상대로 져 줄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아무리 비열한 짓을 한다고 해도.
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나갈 수만 있다면 황태자의 유치한 짓거리쯤 얼마든지 웃으면서 참아 넘길 수 있었다.
‘들켜 버렸네.’
하지만 라미엘 역시 깨달았다. 오드리아가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눈치챘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그것 때문에 화가 났다는 것을.
‘쯧.’
라미엘은 조용히 혀를 찼다.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라미엘에게 황태자의 계략은 한심하고 유치했다. 그래서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게 오드리아를 건드릴 줄이야.
황태자보다 무섭고 긴장되고 어려운 오드리아에게 찍히다니. 별거 아닌 일로 괜한 문제를 만들었다고, 라미엘은 후회했다.
오드리아는 오로지 눈치와 직감으로 황태자가 라미엘에게 뭔가를 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달랐다. 라미엘이 잡은 상상 속의 짐승이라 불리는 것. 사실 그것은 아주 극소수의 개체가 현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황가에서 극비로 관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저 처음 보는 존재에 신기해했지만 그 짐승은 엄청난 공격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수많은 사람이 있는 이 산에 우연히 나타났을 리 만무했다. 그 존재를 아는 누군가가 일부러 풀어 놓은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이 사냥 대회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바로 황태자. 그가 일부러 라미엘에게 위협을 가하기 위해 위험한 동물을 이곳에 풀어 놓은 것이다.
‘역시 황태자는 안 돼.’
황태자는 비열하다. 자신의 기분밖에 모른다. 자신의 분이 풀리기만 한다면 못할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런 짓을 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라미엘에게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모자란 것이면 눈감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앞뒤 모르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는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트루디 대공은 생각했다.
게다가 조금 전 사색이 되어 라미엘을 찾으러 가던 오드리아의 모습을 떠올리면 아찔했다. 다시는 그런 얼굴을 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