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 데릴사위
라미엘은 언제나처럼 아침 훈련을 하러 연무장에 왔을 뿐이다. 그런데 제레미아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팔짱을 끼고 한쪽 발을 들어 올려 라미엘의 앞을 가로막은 제레미아가 입꼬리를 왼쪽 위로 올렸다. 마치 골목의 부랑배가 짓는 미소 같았다.
라미엘은 저절로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이건 지난한 시간 동안 반복 학습이 된 것이다.
“한가해 보이네. 결혼 준비는 별로 안 바쁜가 봐.”
제레미아의 의미심장한 표정에 라미엘은 불안함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아직은 제가 할 일이 없어서요.”
사실 할 일이 있다고 해도 지금은 공작가의 일부 고용인 외에는 일어난 사람이 없을 만큼 이른 아침이었다. 이 시간부터 결혼 준비를 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라미엘은 굳이 불필요한 말로 제레미아를 건드리지 않았다. 제레미아가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결혼을 하면 이것저것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길 텐데.”
“……?”
제레미아의 말투가 상냥했다. 문제는 그럴수록 더 불안하다는 것이다.
“내가 특별히 결혼 전까지 이것저것 지도 편달해 주도록 하지.”
“……?”
“내가 직접, 일대일로 친절하게, 예전처럼 꼼꼼하고 자세하게 알려 줄게.”
제레미아가 말을 중간중간 끊어 가며 강조했다. 라미엘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오드리아의 호위 기사가 되었을 때.
제레미아의 속셈은 분명했다. 교육이라는 핑계를 대고 라미엘을 힘들게 해 나름의 분풀이를 하려는 것이다.
라미엘은 제레미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결혼 전에 할 수 있을 만큼 라미엘을 혹독하게 대할 것이다. 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라미엘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처음부터 라미엘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미 한번 경험해 본 일이었다. 얼마든지 상대해 줄 수 있다.
더구나 라미엘은 제레미아의 유치한 괴롭힘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비록 견디기 힘들 정도의 강도로 훈련을 시키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제레미아의 훈련은 모두 도움이 되었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제레미아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
그런데 라미엘이 너무 잘 버티니 어쩐지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계획대로 흘러가는 듯 흘러가지 않아서.
“할 만한가 봐.”
제레미아가 삐딱하게 물었다. 심기가 불편한 모습이 역력했다.
“죽을 것 같습니다…… 허억.”
누가 봐도 엄살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지만 이상하게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럼 죽지 않을 정도로 해야겠군.”
제레미아가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건 결코 앞으로 봐주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라미엘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오히려 정말 죽기 딱 직전까지 하겠다는 경고였다.
그리고 제레미아의 경고대로 라미엘은 한층 강도 높은 훈련을 받게 되었다. 진짜 죽겠다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만큼.
“나를 한 번이라도 이겨 봐.”
제레미아가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너에게 오드리아를 맡겨도 좋다고 인정해 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라미엘이 제레미아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제레미아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내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역대 전적은 셀 필요도 없이 제레미아의 승리였다.
하지만 라미엘은 포기하지 않고 제레미아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결국 온몸이 남아나지 않았다.
“그래도 곧 결혼인데 몸이 만신창이어서야.”
아이작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제발 살살 좀 하십시오.”
아이작이 제레미아에게 부탁에 가까운 조언을 했지만.
“라미엘. 너도 괜한 고집은 그만 부려.”
이어서 라미엘에게도 그만 몸을 사리라고 충고했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닙니다.”
“좋아. 어디 끝까지 해 보지.”
두 사람 모두 고집불통이었다.
오드리아 역시 최근 제레미아와 라미엘이 하는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 최근 두 사람이 대련을 한다는 것 역시.
하지만 오드리아는 모른 척했다. 두 사람의 대결이 과열되는 것 같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오드리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이게 오빠만의 방식인 거니까.’
이제 곧 라미엘은 한 가족이 된다. 그리고 이건 제레미아가 나름의 방식으로 라미엘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지만 내심 제레미아는 라미엘을 인정하고 있으니까.
“얼른 라미엘이 이겼으면 좋겠다.”
오드리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얼른 제레미아가 말하는 교육이라는 것을 끝내고 함께 있고 싶었다.
“오늘은 라미엘이 올 겁니다.”
아침 식사를 끝내고 하루를 시작하려는데 최근 임시로 그녀의 호위를 다시 맡고 있는 아이작이 말했다.
“라미엘이……?”
오드리아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제가 오늘 황궁에 가 봐야 해서 말입니다.”
“알겠어. 어서 가 봐.”
오드리아의 얼굴에 들뜬 게 여실히 드러났다.
“이런, 너무 좋아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이작이 눈을 가늘게 뜨며 놀리듯이 말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그에 아랑곳 않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이작이 먼저 자리를 떠나고 오래 기다리지 않아 라미엘이 왔다.
오랜만에 두 사람이 하루 종일 같이 있는 시간이었다. 게다가 오드리아 역시 오늘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서 갑자기 하루가 비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둘이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잠깐 못 보던 사이 라미엘은 고생을 얼마나 했는지 살이 빠진 것 같았다.
제레미아와 대결을 하는 게 많이 힘든 건가 싶어서 마음이 쓰였다.
“괜찮아?”
오드리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습니다.”
라미엘은 괜찮다고 했지만 오드리아 눈에는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오드리아가 손을 뻗어 라미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걱정 가득한 시선이 라미엘의 눈동자에 비쳤다.
“정말 괜찮아?”
오로지 라미엘만을 바라보며 건네는 다정한 목소리. 이 눈빛을 붙잡고 싶은 충동에 라미엘이 살며시 입을 열었다.
“저…… 투정 좀 부려도 됩니까.”
내려간 눈썹과 불쌍한 듯 의기소침한 표정에 오드리아가 크게 당황하며 곧장 대답했다.
“얼마든지. 전부 들어줄게.”
오드리아가 시선을 고정한 채 귀를 쫑긋 집중했다. 라미엘이 하는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라미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참으면서.
“사실…… 힘듭니다.”
“……!”
라미엘의 약한 소리에 오드리아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가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얼마나 힘든 거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라미엘의 손을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이 꼭 붙잡았다.
사실, 라미엘은 버틸 만했다. 물론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라미엘은 제레미아가 약 오를 만큼 그의 훈련을 소화해 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걱정하지 않도록 씩씩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얼굴을 쓰다듬어 주는 오드리아의 손길이 기분 좋았다.
자신을 걱정하는 오드리아의 시선이 좋았다.
다정하게 말하는 오드리아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자꾸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더 힘들었던 척, 불쌍한 척을 자신도 모르게 하고 있었다.
“요즘 온몸이 만신창이입니다. 얼마 전에는 제레미아 님한테 급소를 공격당해서…….”
라미엘은 일부러 앓는 소리를 했다. 오드리아가 더더욱 자신을 동정하도록.
“얼마나? 어디 한번 봐 봐.”
오드리아가 라미엘이 다쳤다는 어깨를 확인하려 했지만 옷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힘든 건…….”
그럴수록 라미엘은 불쌍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가려 했다. 그런데 더 이상 힘들었던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적응해 버렸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아직 오드리아의 따뜻한 시선을 계속 받고 싶은데. 라미엘이 골똘히 생각한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건…….”
라미엘이 오드리아와 시선을 마주하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드리아 님과 함께 있지 못하는 겁니다.”
“…….”
“매일 보고 싶은데 제레미아 님과 함께 있다 보니 마음껏 찾아오지도 못해서”
라미엘의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뭐든 할 말을 찾으려 애쓰다 보니 정말 힘들었던 게 떠올랐다.
최근 오드리아를 만나지 못한 만큼 지금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귀했다.
“그리움만 쌓이는 겁니다.”
“아, 정말…….”
라미엘의 담담하지만 정직한 고백에 붉어진 오드리아가 라미엘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가 부끄러워하자 라미엘의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가슴이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흥. 불쌍한 척하긴.”
집무실에서 나와 잠시 몸을 풀기 위해 후원을 가로지르던 제레미아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한 말이었다.
평소라면 당장이라도 다가가서 두 사람 사이를 방해했을 제레미아지만 어째서인지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못 본 척 불만스런 혼잣말을 남기고 그대로 연무장으로 향했다.
제레미아와 라미엘의 훈련의 마지막은 언제나 대련이었다.
“오늘도 할까.”
“그러시죠.”
언제나처럼 기사들이 벽 쪽으로 물러나고 연무장 한가운데에는 두 사람만이 서 있었다.
“오늘은 부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
제레미아가 약 올리듯이 말하며 여유롭게 섰다.
“기대하시죠.”
라미엘이 자신 있게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까지 매일같이 대련을 했지만 라미엘은 단 한 번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그래도 가끔씩 제레미아의 공격에 반격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그뿐,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제레미아가 이겼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힘과 본능적인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고 지켜보던 동료 기사들도 그만 포기하라고 했다.
그런데도 라미엘은 제레미아를 단 한 번이라도 이기기 위해 죽도록 노력했다. 제레미아에게 꺾이고 꺾여도 포기하지 않았다.
“오늘은 꼭 이기겠습니다.”
“그거 기대되네.”
제레미아와 라미엘가 서로 검을 휘두르며 또 한 번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동료 기사들은 대결의 결과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오늘은 혹시’ 하는 마음에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은 꽤 하네.”
제레미아가 즐거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검을 크게 휘둘렀다.
라미엘의 신발이 바닥에 끌려 뒤로 한참을 밀려나갔다. 역시 오늘도 이대로 제레미아가 이기겠구나 생각할 때였다.
라미엘이 인상을 쓰더니 한없이 밀려나던 발이 멈췄다. 라미엘은 조금씩 버티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제레미아도 살짝 당황한 티가 났다.
“이거 잘하면…….”
지켜보던 기사 중 한 명이 고개를 앞으로 빼며 중얼거렸다.
오늘따라 라미엘이 제레미아를 상대로 잘 버티고 있었다. 아니, 버티는 게 전부가 아니라 제레미아의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
“이 정도로는 아직 몰라.”
다른 기사가 회의적으로 말했다. 여전히 대부분의 기사들은 라미엘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평소보다는 잘 버티고 있었지만 여전히 제레미아가 압도적으로 공격하며 몰아세우고 있는 것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라미엘은 피하고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때였다. 라미엘이 제레미아의 검을 튕겨내며 재빠르게 제레미아 가까이 다가가자 당황한 제레미아가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었다.
단 한 번의 허점을 노리던 라미엘이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공격했다.
“……이겼어…….”
적막이 감도는 연무장에서 어디선가 기사의 신음과도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전까지 대련이 있었던 그곳에 제레미아의 검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라미엘의 검끝이 제레미아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드디어 라미엘이 제레미아를 이겼다. 제레미아는 인상을 쓰며 자신에게 겨눠진 검을 노려보았다.
“걱정 마십시오.”
라미엘이 검을 검집에 넣으며 말했다.
“오드리아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제레미아를 이겼다. 그러니 오드리아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지켜 낼 테니. 라미엘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네가 아니어도 리아를 지킬 사람은 많아.”
그럴수록 제레미아의 얼굴은 험악해졌다. 그의 말에 라미엘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제레미아가 불안한 기분에 인상을 썼다.
“하지만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은 저뿐이지 않습니까.”
“윽.”
제레미아는 그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언제나 리아의 곁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불가항력적으로 떨어져야만 할 때가 있었다.
그때 리아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물론 공작가의 기사는 모두 믿을 수 있는 자들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역시 라미엘이었다. 오드리아에 한해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이젠 제레미아 님도 이겼는데 믿어 보십시오.”
라미엘이 자신만만해하며 말했다.
제레미아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그가 기고만장해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제레미아는 라미엘을 믿었다.
그래서 제레미아는 두 사람의 관계를 어느 정도 짐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방관했던 것이다. 결국 이렇게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되었고.
“그 말,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제레미아는 마치 협박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라미엘은 유쾌하게 웃으며 답했다.
“네.”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말은 진심이었다.
* * *
오드리아의 결혼식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물론 절차상의 여러 사건 사고가 있기는 했지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물론이고 신시아와 쥬아나까지 관심을 갖는 공작가 최대의 이벤트였다.
“결혼식은 어디서 하고 싶니.”
후보지는 다양했다.
수도에 있는 가장 큰 교회. 이곳은 많은 레이디들이 결혼식 장소로 원하는 곳이지만 공간을 빌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또 다른 곳은 황궁이었다. 황족들이 결혼식 때 쓰는 홀이 있었다. 황족이 아닌 오드리아가 그곳에서 결혼한다는 건 원칙상 불가능했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못할 곳도 없었다.
하지만 오드리아가 원하는 곳은 후보지에 없었다.
“플로렌스 홀에서 하고 싶어요.”
오드리아에게 플로렌스 홀은 조금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결혼식은 그곳에서 하고 싶다고 마음을 먹었다.
“더 좋은 곳들이 있는데, 왜 플로렌스 홀이니.”
신시아가 다른 곳을 추천하고 싶은지 오드리아에게 물었다.
“어머니도 그곳에서 결혼식을 하셨잖아요.”
플로렌스 홀에서 두 번의 결혼식이 있었다. 오드리아가 본 적 없는 레이첼의 결혼식, 그리고 그녀가 직접 준비했던 신시아의 결혼식.
그 모습을 보면서 오드리아는 가족들의 축복을 받으며 이곳에서 결혼을 하고 싶다고 결심했었다.
“그때 결혼식이 어떠셨어요?”
오드리아의 물음에 신시아는 자신의 결혼식을 떠올렸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정신이 붕 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신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렌스 홀에서 하는 결혼식은 무척이나 뜻깊을 것이다.
오드리아의 결혼식이다. 모두가 나서서 그녀를 위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했다. 오히려 이것저것 해 주려고 하는 사람들을 정리하는 게 오드리아의 가장 큰 역할일 정도였다.
마음은 고맙지만 대부분 사양했다. 사람들이 서운해해도 이게 최선이었다.
“웨딩드레스는 제가 책임지고 만들겠습니다.”
페이지가 그 어느 때보다 자신 있게 말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오직 오드리아 님만을 위한 드레스를 만들어 드릴게요.”
그녀는 이미 드레스 구상을 했는지 의욕이 가득했다.
“잘 부탁해.”
오드리아는 페이지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녀가 만든 드레스를 오드리아도 입고 싶었으니까.
오드리아는 결혼식 때 입을 드레스는 물론이고 구두와 주얼리 모두 페이지에게 맡겼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결혼식에는 준비할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결혼식에 초대할 사람들을 선별하는 것이다. 가까운 관계의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신중하게 정해야 했다.
오드리아의 결혼식에 초대받는 사람은 트루디 공작가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보니 참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혼식에 초대할 사람은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가 엄선해서 골랐다. 괜한 분란을 일으킬 사람, 진심으로 축복하지 않을 사람들을 모두 배제했다.
신시아는 오드리아의 결혼식은 오로지 축복을 위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두 사람이 결혼하면 지낼 곳을 새로 준비해야지.”
“지낼 곳이요?”
오드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결혼하고 나서도 지금 방에서 지낼 거니?”
신시아의 말에 오드리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지금까지 당연하게도 자신이 지내던 방에서 라미엘과 함께하게 될 줄 알았다.
언제나 똑똑하고 영민한 오드리아는 정작 이런 일들 앞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였다.
“본관 옆에 있는 별관을 고치라고 일러두었어. 그곳에서 지내는 게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아서.”
오드리아가 지내는 곳은 본관에 있는 방이었다.
물론 그냥 방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좋은 곳이었지만 그 위로 올라가면 제레미아의 방이 있었고 그보다 좀 더 올라가면 트루디 대공의 방도 있었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오드리아가 씨익, 웃으며 신시아의 제안을 냉큼 받아들였다.
같은 건물에 있으면 분명 라미엘의 생활이 그다지 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일부러 별관에 따로 마련을 해 주는 것이다.
* * *
순조롭게 준비되는 결혼 준비와는 달리 오드리아는 최근 심란했다. 종종 고민에 빠지고는 했다.
“이제 좋은 일밖에 없는데 혹시 다른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오드리아의 드레스를 만들기 위해 치수부터 재던 페이지가 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심드렁한 대답이었지만 누가 봐도 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드리아는 지금도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혹시 결혼식에 문제라도 생겼어요?”
“다 잘되고 있어.”
페이지가 걱정스레 물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여전히 무심하게 대답했다.
결혼식도 잘 진행되고 있다면 오드리아의 고민거리가 뭐지? 페이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아 그녀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봤다.
그때였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직 안 끝났습니까?”
문밖에 있는 라미엘이 물었다.
“아니, 이제 거의 다 끝났어. 들어와.”
오드리아의 말에 라미엘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페이지는 방금 전까지 잰 치수를 기록하고, 오드리아는 소파에 앉았다.
“라미엘 님, 이쪽에 잠시 서 주시겠습니까.”
페이지가 방금 전까지 오드리아가 서 있던 곳을 가리키며 안내했다.
페이지는 오드리아와 라미엘의 결혼이 정식으로 결정이 되고 난 후부터 라미엘을 깍듯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이제 라미엘 님의 치수를 재도록 하겠습니다.”
페이지가 라미엘에게 다가와 예복을 맞추기 위해 치수를 확인했다. 그러는 동안 오드리아가 라미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라미엘이 시선을 느끼고 물었다. 사실 오드리아의 시선은 무시하기 어려울 만큼 따가웠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입술만 삐죽 내밀 뿐 고개를 돌려 버렸다. 라미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오드리아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라미엘의 시선을 외면했다.
‘너 때문이잖아.’
오드리아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나도 모르겠어.”
라미엘과 페이지가 오드리아의 눈치를 보며 속닥거리는 게 들렸다.
“오드리아 님, 혹시 오늘 몸이 별로 안 좋으십니까.”
“……!”
“제가 뭘…… 잘못했습니까……?”
오드리아가 고개를 홱 돌리며 라미엘을 노려보자 그가 한 발 뒤로 물러나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가 그럴수록 오드리아의 기분은 점점 더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바로 그게 문제라고.’
오드리아는 답답했다.
최근 오드리아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아직까지도 라미엘이 오드리아에게 존칭을 한다는 것이다. 오드리아의 호위 기사인 것처럼.
여전히 두 사람은 다정한 연인이 아니라 오드리아 영애와 호위 기사인 것만 같았다.
오드리아는 그게 불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말하는 것 역시 어려웠다.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혹시나 라미엘이 자신을 그저 모셔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함이 튀어나와서.
그래서 라미엘에게 티를 내지는 못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해 보려고 하지만 라미엘의 깍듯한 태도를 볼 때마다 심통이 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아무것도 아냐.”
오드리아는 결국 똑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치수를 다 재고 오드리아와 라미엘이 오필리아 숍을 나왔다. 그런데 여전히 두 사람 사이에는 서먹한 기류가 흘렀다.
각자 결혼 준비를 하느라 자주 보지도 못했다. 결혼식 때 입을 의상 역시 오늘 치수를 쟀으니 중간에 수정을 할 때 빼고는 오늘처럼 함께 외출할 수 있는 날이 없을 것이다.
라미엘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아쉬웠다.
“대체 왜 화가 난 겁니까.”
그래서 오드리아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끈질기게 물었다.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
하지만 오드리아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그럴수록 라미엘 역시 답답해졌다.
라미엘이 오드리아를 계속 빤히 쳐다보자 무시를 하던 오드리아가 결국 입을 열었다.
“왜 자꾸 봐.”
“보고 싶으니까요.”
오드리아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리자 라미엘의 눈빛이 집요하게 따라왔다.
“그만 봐.”
오드리아가 당황하며 손바닥으로 라미엘을 밀어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면 안 됩니까.”
하지만 라미엘도 지지 않고 오드리아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혹시 이런 걸 원한 겁니까.”
라미엘은 머뭇거림이라곤 없이 훅 들어왔다. 남자의 눈을 하고서. 오드리아의 얼굴이 붉어지고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잠깐만!”
방금 전까지 부끄러워하던 오드리아가 고개를 번쩍 들고 라미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나한테 존칭을 쓰는 거야.”
오드리아의 눈꼬리가 내려갔다. 그러자 라미엘이 순식간에 능글맞은 눈빛으로 돌변해 오드리아를 바라보았다. 코끝이 닿을 것 같아 간질간질한 거리에서. 라미엘은 속삭였다.
“그런 거면 진작 얘기하지 그랬어.”
“……!”
“앞으로 실컷 말해 줄게.”
라미엘은 더 가까이 다가가 오드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오드리아.”
오드리아의 귀가 간지러웠다. 정작 안달 내며 화를 낸 건 오드리아였는데 어쩔 줄 몰라 하며 허우적거리는 것도 오드리아였다. 그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은 라미엘이고.
“이거 때문에 서운했어?”
“……!”
“결혼할 때까지는 지키려고 했는데…….”
오드리아만 신경 쓰던 것이 아니었다. 라미엘도 오드리아처럼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빨리 결혼하고 싶다.”
라미엘이 속삭였다. 낮은 목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 눈치 따위 보지 않고 네 옆에 있고 싶어.”
라미엘의 눈빛이 진지하게 빛났다.
오드리아는 그동안 라미엘이 얼마나 많은 것을 참고 인내했는지 깨달았다. 그래서 서운해하던 게 미안해졌다.
“나는 네가 나 때문에 유치해지는 게 좋아.”
항상 어른스럽기만 한 오드리아가 자신 때문에 조급해하고 유치해지는 것을 보면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느껴졌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내게 얘기만 해 줘.”
“……응.”
오드리아가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미엘은 그녀의 그런 표정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봐도 봐도 새롭다. 질리지 않고 빠져들게 된다. 라미엘은 오드리아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오랜만의 외출을 즐겼다. 서로 많은 얘기를 나누고 맛있는 것을 먹고 오로지 단둘이서만 시간을 보냈다.
해가 지고 돌아가야 할 때가 되어서도 돌아가기가 싫어서 괜히 발걸음이 느려졌다.
“왜 이렇게 늦었어.”
저택으로 돌아와 두 사람을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던 제레미아와 맞닥뜨리고, 그의 질투로 인해 라미엘이 시달리기는 했지만, 오늘 외출 덕분에 서로의 마음을 더 잘 알게 되었다.
오드리아는 제레미아와 라미엘의 모습을 보며 미소가 흘러나왔다. 앞으로 이런 시간들이 계속된다는 것이 벌써부터 기대됐다.
- 빨리 결혼하고 싶다.
오늘 라미엘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다. 하지만 그건 오드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빨리 시간이 흘러서 결혼식 날이 됐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라미엘과 가족이 되고 싶었다.
결혼식이 다가올수록 라미엘을 보는 게 더욱 어려워졌다. 제대로 얼굴도 보지 못한 지 며칠째인지 모른다.
“라미엘이 보고 싶어서…… 못 참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오드리아는 힘이 쭉 빠져서 의기소침했다.
사실 오드리아도 서툴렀다. 제대로 된 연애는 이게 처음이라서, 그녀의 눈치로도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서 더 답답했다.
그녀의 마음을 어디까지 말해도 되는지, 어쩔 수 없이 서운한 마음이 드는데 이 마음을 토로해도 되는지, 그녀가 괜한 욕심을 부리는 것인지, 스스로 확신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오드리아는 점점 어른이 되어 갔지만 정작 마음은 어린아이가 되는 것 같았다. 예전이라면 이 정도는 혼자 힘으로 극복했을 텐데.
“결혼은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것과 마찬가지야.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해.”
신시아는 오드리아가 부담 갖지 않도록 위로하며 북돋아 주었다.
자신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고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오드리아의 마음은 한없이 약해졌다. 자꾸만 의지하고 싶어서.
오드리아는 신시아에게 털어놓았다. 절대 누구에게도 말 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자신의 유치한 마음을. 한참을 경청하던 신시아의 입가에 그림 같은 미소가 걸렸다.
“그야 보고 싶은데 못 보는데 당연한 마음이지.”
“정말요?”
“그럼.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게 더 이상한 거야.”
신시아는 오랜 시간 올곧은 짝사랑을 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자신의 마음에 충실하고 솔직했다. 그렇기에 그녀의 한마디는 오드리아에게 가장 큰 신뢰를 주었다.
오드리아는 신시아의 말을 듣고 나니 라미엘이 더욱 보고 싶어졌다. 함께하려고 하는 결혼인데 왜 만나기는 더 힘들어진 거야.
사실 두 사람이 거의 보지 못하는 것은 결혼 준비로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라미엘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결혼 전 마지막 심술을 부리듯이 라미엘을 데리고 다니며 두 사람이 만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처음엔 두 사람의 그런 모습이 재밌어서 그러려니 했던 오드리아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정은 달랐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트루디 대공에겐 신시아가, 제레미아에게는 쥬아나가 있었다. 오드리아의 마음을 알게 된 신시아와 쥬아나가 나섰다.
“걱정 마. 오늘 볼 수 있을 거야.”
신시아가 오드리아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확신했다.
신시아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주기 위해 쥬아나를 불러 계획을 세웠다. 쥬아나는 사정을 듣자마자 관심을 보이며 승낙했다.
사실 계획이라는 것은 별것 없었다. 신시아와 쥬아나가 각종 핑계를 대며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라미엘은 혼자가 될 것이다.
오늘도 라미엘은 밤늦게까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 훈련을 받을 예정이었다.
갑자기 신시아가 찾아와서 트루디 대공을 데려가고 쥬아나가 나타나서 제레미아를 반강제로 끌고 가기 전까지는.
제레미아는 쥬아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뜨는 와중에도 라미엘에게 외쳤다.
“여기서 꼼짝 말고 훈련하고 있어! 금방 돌아와서 확인할 거니까!”
그렇게 라미엘은 혼자가 되었다. 갑자기 홀로 덩그러니 남은 라미엘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있는 것이 단 하나 있었다. 오랜만에 갖는 자유라는 것.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오드리아가 미치도록 보고 싶다는 것.
라미엘은 오드리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동안 계속 보지 못해서 그리웠던 오드리아를 직접 만나기 위해.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라미엘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방은 비어 있었다.
‘어디 있는 거지?’
시간이 얼마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만나지 않으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는데 오드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신시아, 쥬아나가 두 사람을 데리고 간 것을 알고 있는 오드리아는 당연히 지금 라미엘이 있는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두고서. 그런데 그사이에 라미엘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엇갈렸다. 그럴수록 시간만 허무하게 흘러갔다.
이제 슬슬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돌아올 것이다. 어떻게 만든 기회인데…… 오드리아가 결국 포기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문 앞에 라미엘이 있었다.
“왜 여기 있어……?”
오드리아는 허탈했다. 지금까지 연무장을 비롯해서 라미엘이 있을 만한 곳을 몇 군데나 다녀온지 모른다. 그런데 그토록 찾던 사람이 자신의 방에 있었다니.
“다행이다. 만날 수 있어서.”
오드리아는 시간이 아까워 속상했는데 라미엘은 마냥 기뻐하며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순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갑자기 벌어졌다.
라미엘의 눈가에서 투명한 액체가 떨어졌다.
“……울어?”
오드리아가 멍한 얼굴을 하고서 라미엘을 바라보았다. 순간 라미엘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라미엘은 비참할 정도로 힘든 순간에도 쉽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인생에 흐를 눈물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그의 눈은 언제나 메말랐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라미엘은 혼란스러웠다. 눈물을 흘리는 자신 때문에. 하지만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렀다. 마치 지금까지 흐르지 못했던 눈물까지 지금 터져 나오는 것처럼.
오드리아는 그런 라미엘의 옆에 말없이 쪼그려 앉았다. 사실 라미엘을 보면 할 말이 굉장히 많았다. 시간이 아까우니까 할 말과 하지 않을 말을 머릿속에서 정리했을 만큼.
그런데 라미엘의 눈물이 멈출 때까지 기다리다 보니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지나가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
오드리아가 아쉬워하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라미엘이 고개를 들어 오드리아를 바라봤다. 그의 눈가가 발갛게 부어 있었다.
오드리아가 천천히 라미엘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스르륵 눈꺼풀이 내려가고 오드리아의 입술이 라미엘의 눈가에 닿았다.
그리고 천천히 떨어져서 라미엘을 바라보는데 어느새 그의 얼굴 전체가 붉게 달아올랐다. 당황한 채 눈만 깜박이는 모습에 오드리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괜찮아?”
오드리아가 살짝 고개를 꺾어 라미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민망한지 시선을 피했다. 오드리아는 아쉬웠다. 오랜만에 본 건데 고개를 돌려 버리는 라미엘 때문에.
“결혼식 날에나 볼 줄 알았어.”
오드리아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라미엘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는 진심도 섞여 있었다.
만약 오늘 이런 일을 벌이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두 사람은 결혼식이 되어서야 제대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럴 리가. 만약 그렇더라도 밤늦게 몰래 찾아왔을 거잖아.”
“누가.”
“곧 내 부인이 될 사람이.”
라미엘이 짓궂은 얼굴을 했다. 그대로 오드리아에게 발등을 밟혔지만.
“너는? 안 왔을 거야?”
오드리아가 서운한 척하며 물었다. 그러자 라미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벌써 와 있잖아.”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오드리아의 방 앞이다. 라미엘은 이곳에서 오드리아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은 오드리아가 활짝 웃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아니어도 결혼식 준비로 인해 두 사람은 정신없이 바빴다.
오드리아는 결혼식 준비에 관한 것들을 신경 쓰느라 라미엘은 트루디 대공을 따라 결혼식 전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느라.
게다가 제레미아가 정한 규칙에 따라 매일 혹독한 훈련과 공부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지금 이 짧은 시간이 두 사람에게는 너무나 소중했다. 오드리아는 라미엘을 연무장까지 데려다주겠다며 함께 걸었다.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기 위해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걸었다.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는데 문득 궁금해졌다.
“라미엘. 원래는 성이 뭐였어?”
라미엘은 언제나 라미엘이었다. 그가 공작가에 처음 왔을 때 오드리아가 물어본 이름.
이제 그가 데릴사위가 되면 트루디라는 성을 쓰게 된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오드리아는 라미엘의 원래 성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졌다.
“처음부터 없었어.”
라미엘이 무심하게 답했다. 오드리아는 라미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제국에 성이 없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애초에 성에 별 의미가 없는 사람들은 성이 있어도 잘 쓰지 않았으니까.
“남작이 됐을 때 왜 성을 안 만들었어?”
라미엘은 사람들의 무시를 받아 가면서까지 성을 만들지 않았다.
라미엘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늘어졌다.
“너와 결혼하면 트루디가 될 거니까.”
라미엘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니 임시로라도 다른 성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이.
“나는 너한테 소속된 게 좋아.”
그에게 트루디라는 성은 오드리아에게 소속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라미엘 트루디가 되어 줘서 고마워.”
오드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오드리아는 라미엘이 스스로 성을 갖는 것을 꺼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귀족이 아닌 이상 성이 없다면 얼마든지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라미엘은 남작이 되기 전에도 되고 난 후에도 그러지 않았다.
한 번 가지면 바꿀 수 없는 것이라서 그럴까?
그가 왜 성을 갖는 것을 기피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국 그는 라미엘 트루디가 될 것이다. 오드리아는 그 사실이 좋았다.
오드리아 트루디가 되어서 그녀는 많은 것들을 처음 경험하고 느껴 봤다. 특히 가족들의 넘치는 사랑으로 인한 충만감.
라미엘도 트루디 공작가의 가족이 되어 그 감정을 느끼기를 바랐다. 그래서 혹시라도 남아 있을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의 찌꺼기들마저도 없어져 버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