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른 아침 트루디 공작가의 연무장,
언제나처럼 제레미아와 라미엘이 일찍부터 나와 훈련 중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제레미아의 검끝이 거칠었다.
사정을 봐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것이 아무래도 심기가 불편한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는 무슨 이유지. 라미엘은 그의 공격을 겨우 막아 내며 생각했다.
라미엘과 제레미아의 훈련은 대부분 대결의 형식을 취했다. 호각을 다투다가도 막판에 라미엘이 밀리곤 했다.
그저 본능에 따라 검을 휘두르는 그를 상대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오늘은 유난히 심했다.
끊임없이 공격하던 제레미아의 검이 결국 라미엘의 목에 다다랐다.
“제가 졌습니다.”
제레미아의 검끝이 점점 그의 목을 뚫을 기세로 파고들자 라미엘은 검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양팔을 들어 항복 선언을 했다. 그의 검끝이 사납게 라미엘을 노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라미엘의 항복 선언에도 제레미아는 검을 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힘이 들어갔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정말 위험해질 것 같을 때였다.
“조심해.”
“…….”
“내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제레미아는 라미엘에게 위협하듯 경고했다. 그대로 검을 검집에 넣은 채 먼저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역시, 알고 있는 거겠지.’
그가 오늘 라미엘을 위협하듯 경고한 것은 바로 얼마 전, 황궁 연회에서 오드리아와 함께 있는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곳에서 오드리아와 함께 춤을 출 때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퍼지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럼 그때는 정면 돌파해야지, 하고 나름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귀족들의 편견은 그의 생각보다 견고했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오드리아와 라미엘이 함께 춤을 추는 건 단순히 그가 그녀의 호위 기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함께 춤을 춘 모습은 라미엘의 재발견 정도에서 그쳤다.
하지만 제레미아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챈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라미엘은 생각했다. 그는 라미엘이 오드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경계했으니까. 그녀의 호위기사이니 함께 있는 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그러면서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라미엘에게 오드리아를 맡기고는 했다. 그게 아무것도 모른 채 한 판단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하고 있는 한 라미엘의 고생길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라미엘은 어릴 적 제레미아에게 받았던 끔찍할 정도로 고된 훈련을 떠올렸다.
그러자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드리아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백 번, 천 번이라도 기꺼이 또 할 수 있었다.
* * *
그 이후로도 오드리아에게 황태자의 서신이 몇 번이나 왔다. 모두 무시하고 있었지만 답신을 보낼 때까지 황태자는 계속 보낼 기세였다.
‘하…… 피곤해. 황태자는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그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황태자가 오드리아에게 호의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오웬 자작가의 사건이 있고 난 다음부터였다.
그때부터 오드리아에 대한 평가가 천장을 모르고 치솟았고 공작가의 진정한 실세라는 소문이 돌았다.
공작가의 고명딸인 오드리아가 그의 황태자라는 자리를 더욱 굳건하게 받쳐 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속내가 적나라하게 보여서 더욱 불쾌했다.
‘답장을 보내야 하나.’
무시하면 알아서 포기하겠지 싶었는데 단호하게 거절해야 하는 걸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게 뭡니까.”
라미엘이 들어오면서 테이블 위에 있는 황태자의 서신을 발견하고 물었다. 벌써부터 눈썹 사이가 구겨져 있었다.
“별거 아냐.”
오드리아는 서신을 옆으로 밀어냈다. 신경 쓸 것이 분명한데 알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라미엘의 시선은 서신을 좇고 있었다.
“오필리아 숍에 갈 거야.”
오드리아는 라미엘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화제를 전환할 말을 꺼냈다.
“……알겠습니다.”
라미엘은 찝찝해하면서도 대답했다. 오드리아는 황태자가 보낸 서신을 계속해서 무시할 생각이었다. 아주 잠시 답장을 보낼까도 생각해 봤지만 역시나, 이런 경우는 무시가 답이다.
오드리아와 라미엘이 함께 외출하는 모습을 신시아가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뭐가 즐거운지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계속 서로를 향해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본능에 이끌리듯이.
‘역시…… 황궁에서 느낀 게 착각이 아닌 걸까.’
신시아는 황궁에서 두 사람이 춤을 추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당시 두 사람의 모습은 인상적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신시아는 ‘혹시’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저 직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오랜 시간 모신 오드리아를 위해 두 사람이 함께 춤을 췄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두 사람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그건 단순히 두 사람의 빼어난 외모 때문만이 아니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표정, 익숙한 듯 자연스러운 스킨십. 그 모든 것이 어우러졌을 때 나오는 것이었다.
‘오드리아와 라미엘이라.’
한 번 떠오른 가능성은 신시아의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그러다 보니 최근 그녀의 시선 끝에는 항상 두 사람이 있었다.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조금씩 마음에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서로 좋아하고 있구나.
그런데 그 사실을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구나.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쉽게 밝힐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라미엘이 남작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오드리아에 의해 구해져서 어릴 때부터 공작가에서 지내며 성장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다. 게다가 오드리아의 결혼을 떠올리면 벌써부터 눈물을 떨어트리는 가족까지.
‘그동안 힘들었겠구나.’
신시아의 마음이 한층 무거워졌다. 그녀가 오랜 짝사랑으로 괴로워할 때 자신의 편이라며 힘을 실어 준 것이 오드리아였다. 쥬아나와 제레미아가 결혼 문제로 서로 어긋날 뻔할 때 역시 양측을 오가며 신경을 쓴 것 역시 오드리아였다.
그 덕분에 지금 신시아도 쥬아나도 행복했다.
그런데 정작 오드리아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오드리아는 아직도 혼자였다. 오드리아의 결혼은 곧 가족과는 이별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아쉬운 마음에 모두가 붙잡느라 더더욱 그랬다.
우리가 이기적이었구나. 신시아는 뒤늦게 깨달았다.
오드리아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 결혼하고 싶은 나이가 되었는데. 지금이 너무 행복해서 곧 다가올 미래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오드리아의 결혼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엔 내가 도와주자.’
신시아는 멀리서 봐도 잘 어울리는 오드리아와 라미엘을 보며 생각했다.
오드리아와 라미엘이 오필리아 숍에 들어섰다.
“오드리아 님. 오셨어요?”
페이지가 나와서 맞이했다.
그런데 오드리아의 방문에 그곳에 이미 있던 귀부인과 영애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황궁 연회에서 두 사람이 춤을 추고 난 후부터 두 사람은 관심의 대상이 됐다.
“사무실로 가시죠.”
그 시선이 신경 쓰인 페이지가 오드리아를 안내하며 말했다.
오드리아와 라미엘이 복도를 지나 사무실로 향하는 모습이 유리창 너머로 보였다.
이동하던 오드리아가 살짝 고개를 돌려 라미엘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 모습을 목격한 귀부인과 영애들 사이에서 “어머!” 하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바라보기만 해도 황홀하네요.”
“그때 보니 라미엘 남작이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맞아요. 기품이 느껴지는 게…….”
“그런데 오드리아 님 옆에 있으니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져서.”
그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드리아와 라미엘을 보고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 한 영애가 냉정하게 말했다.
“어차피 오드리아 영애와 라미엘 남작이 잘될 일은 없을 텐데요.”
“맞아요. 라미엘 남작이 아무리 잘났어도 트루디 공작가의 영애는 말이 안 되죠.”
오드리아와 라미엘이 아무리 다정한 분위기를 내며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사람들의 편견 때문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사무실로 들어서기 전, 페이지가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의 눈빛을 흘깃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두 사람의 관계를 유일하게 알고 있는 페이지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난감해했다.
* * *
신시아와 쥬아나, 그리고 오드리아가 조용한 방이 따로 있는 커피숍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드리아와 쥬아나는 기분 전환 겸 단순한 외출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신시아는 세 사람과 조용히 얘기를 나누기 위해 외출이라는 핑계로 밖에서 만난 것이었다.
“오드리아.”
신시아가 나지막하게 그녀를 불렀다.
“혹시…… 라미엘과 어떤 사이에요?”
오드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갑자기 튀어나온 라미엘에 대한 언급에 놀란 것은 쥬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오드리아가 최대한 침착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오해일 수 있지만 혹시 두 사람이 특별한 관계가 아닐까 싶어서요.”
“아…… 그게.”
오드리아가 차마 아니라고 해명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에 신시아는 자신이 괜히 아는 척해서 오히려 곤란하게 만든 것인가 싶어 후회할 때였다.
오드리아가 마음을 정한 건지 신시아를 또렷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저는 라미엘이 좋아요, 아빠와 오빠의 허락을 받고 싶어요.”
어차피 언젠가 고백할 생각이었다. 여기서 숨기는 것보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어머니랑 언니는 라미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드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신시아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고 쥬아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대공 각하와 제레미아에게 허락을 받는 건 많이 힘들 거야.”
쥬아나가 현실적인 상황에 대해 말했다. 오드리아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두 사람의 지지가 필요한 것이고.
“분명 굉장히 아쉬워할 거야. 처음엔 반대도 많이 할 테고.”
“오드리아의 결혼을 인정하지 못할 거예요.”
신시아와 쥬아나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오드리아의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역시 힘들구나. 다시 깨달으면서.
그때였다. 방금 전까지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던 쥬아나의 밝고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얘기는 간단하네요.”
쥬아나가 시원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얘기하도록 해.”
“그래.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할 테니까.”
두 사람이 오드리아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요……?”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오드리아는 얼떨떨했다.
“그야 오드리아가 행복해지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응. 사랑하는 사람하고 행복해야지.”
신시아와 쥬아나는 흔쾌히 오드리아의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감사해요.”
오드리아의 가슴이 뜨겁게 가득 찼다. 신시아와 쥬아나가 오드리아의 든든한 편이 되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 * *
신시아는 트루디 대공과 잠들기 전에 차를 함께 마시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드리아 말이에요.”
“리아? 리아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그녀의 이름을 언급했을 뿐인데도 그의 반응은 민첩했다. 신시아는 심각한 분위기가 되지 않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평이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녀의 입 밖으로 나온 결혼이라는 단어에 트루디 대공은 충격을 받은 듯 얼어붙었다.
“갑자기 결혼이라니…….”
그에게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얘기였다. 전혀 준비도 못하고 있었는데 튀어나온 결혼이라는 말에 그는 소화불량에 걸린 것처럼 속이 답답해졌다. 오드리아의 결혼은 그에게는 언제나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갑자기는 아니에요, 그동안 미뤄서 그렇지 지금도 늦은 편이죠.”
신시아의 말대로 오드리아와 또래인 영애들은 대부분 결혼을 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영애들도 정혼자가 있는 것이 당연했다. 오직 오드리아만이 혼자였다.
“…….”
사실 트루디 대공 역시 언젠가 닥쳐올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시간이 허락하는 한 모른 척하고 싶었다.
“좀 더 천천히 생각해 보도록 하지.”
하루라도 늦추고 싶었다. 오드리아가 자신들의 품에서 떠나는 날이 찾아온다면 분명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 닥칠 것이다.
신시아 역시 트루디 대공이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는 것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부터 조금씩 그에게 오드리아의 결혼이란 것에 대해서 인식하도록 해야 했다.
트루디 대공의 얼굴이 어느새 어두워졌다. 오드리아가 결혼을 하면 공작가를 떠나게 된다. 오드리아가 더 이상 공작가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심장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이대로 계속 오드리아와 함께 살면 좋겠지만 그것은 자신의 지나친 욕심이다.
그가 신시아와 함께 살면서 그동안 잊고 있던 새로운 행복을 알게 된 것처럼, 오드리아에게도 그런 행복을 느껴야 할 권리가 있었다.
그것도 그의 사랑스러운 딸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세상의 모든 행복이 그녀의 것이어야 했다.
그러니 당연히 오드리아의 결혼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의 고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너무 그러지 말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언제까지고 오드리아를 혼자 둘 수는 없잖아요.”
“어째서 혼자야. 리아에겐 나도 있고 제레미아도 있고 그대도 있는데……!”
트루디 대공이 변명하듯 외쳤다.
“하지만…… 저에게 당신이 있듯이 오드리아에게도 그런 사람이 필요해요.”
“…….”
“가족에게 사랑받는 것과 남편에게 사랑받는 건 또 다른 행복이니까요.”
트루디 대공은 신시아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면 신시아가 상처받을 테니까.
“오드리아의 행복을 원하잖아요.”
신시아의 은근한 말에 트루디 대공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트루디 대공은 자신보다 오드리아를 더욱 사랑한다.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는 결국 그의 서운한 마음도 아쉬운 마음도 참고 극복할 것이다. 자신의 욕심으로 오드리아의 행복을 가로막을 수 없을 테니까.
“생각을…… 해 보지.”
“정말요?”
트루디 대공의 고심 끝에 꺼낸 한 마디에 신시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오드리아의…… 결혼을…….”
“하지만 기준에 못 미치는 놈은 절대 안 돼.”
하지만 절대 아무나는 안 된다. 그것만큼은 물러날 수 없다는 듯 단호한 눈빛이었다.
과연 트루디 대공의 기준에 맞는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변화만으로도 엄청난 것이다.
“그럼요. 저도 오드리아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신시아는 당연하다는 듯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게 그녀는 트루디 대공을 설득했다.
하지만 신시아는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야 말았다. 선뜻 고개를 끄덕이고 난 뒤 혼자 조용한 방에 들어간 트루디 대공의 뒷모습이, 그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는 것을.
그는 의연하게 마음을 정리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신시아는 웃음이 삐져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아 내고 모른 척했다.
문제는 트루디 대공뿐만이 아니었다. 제레미아 역시 오드리아의 결혼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신시아는 내친 김에 그에게도 오드리아의 결혼에 대해 물어보았다.
“리아의 결혼, 말입니까?”
“그래요. 이제 그 아이도 슬슬 생각해야 하니까요.”
“…….”
제레미아는 침묵을 유지했다. 사실 그녀의 결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트루디 대공보다 제레미아가 더 심할지도 모른다.
“리아도 해야죠.”
그런데 제레미아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라 오히려 당황했을 때였다.
“하지만 아무나는 절대 안 됩니다.”
제레미아의 얼굴이 매서워졌다. 오드리아의 결혼 자체를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받아들이지는 않을 거라는 확고한 의사 표현이었다.
“제가 보기에 리아 옆에 있기에 조금이라도 부족하다 싶으면 절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이 결의를 불태우며.
얼핏 보면 트루디 대공에 비해서는 우호적인 반응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달랐다. 그의 눈에 부족하다 싶으면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은 그 누구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었으니까.
사실 제레미아가 오드리아의 결혼에 대해 생각보다 간단하게 인정한 것은 최근 그녀를 둘러싼 변화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황태자의 존재가 심히 거슬렸다. 그가 오드리아에게 청혼을 한다고 해도 제레미아가 들고 일어나서 반대할 것이다.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 자체를 막고 싶었다. 괜히 사람들의 입에 오드리아와 황태자가 엮이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그러니 황태자가 수상한 짓거리를 하기 전에 오드리아의 결혼을 받아들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황태자 외에 또 다른 재수 없는 놈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긴 했지만…… 그건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트루디 대공의 마음을 돌린 결정적인 한마디는 신시아의 “오드리아를 먼저 생각해 봐요.”라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더 이상 오드리아의 결혼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지금부터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거지, 바로 오드리아가 결혼을 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 말도 나름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래,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최대한 천천히 하면 되지. 트루디 대공은 겨우 마음을 추슬렀다. 그가 마음을 돌리자 신시아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오드리아의 생각도 중요하니 한번 물어보는 게 어때요?”
트루디 대공은 신시아의 속도에 따라갈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 여기서 또다시 고민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러도록 하지.”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는 오드리아를 불렀다. 그 자리에는 제레미아와 쥬아나도 함께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차를 마시는 일은 자주 있기 때문에 함께 담소나 나누자는 핑계였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지금 이 자리가 무슨 목적으로 마련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평소처럼 차를 마시고 가벼운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중간중간에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
‘이제 곧 얘기를 꺼내겠구나.’
그런데 트루디 대공은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몇 번이나 신호를 주고받을 때마다 오드리아를 한번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기를 반복했다.
그럴수록 오드리아의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으면서도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드리아가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였다.
“리아. 오늘 너와 차를 마시자고 한 건…… 그…….”
트루디 대공이 드디어 말을 하나 싶었는데 차마 뒷말이 나오지 않는지 입술이 다시 닫혔다. 그러자 보다 못한 신시아가 오드리아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드리아.”
신시아의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니?”
신시아는 언제나 부드럽지만 결코 약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일에 있어 신시아는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다.
“물론 결혼을 전제로 말이야.”
신시아가 오드리아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그녀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쥬아나는 이 물음에 오드리아가 누구의 이름을 말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전혀 티내지 않았다.
드디어 화제에 오른 결혼 문제. 오드리아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래. 이제 리아, 너의 결혼에 대해서 마음의 준비를 해야지.”
지금까지 입을 열 듯 말 듯 하던 트루디 대공이 힘겹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
그의 바로 옆에서 신시아가 따뜻한 시선으로 오드리아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있었다.
“이건 리아의 뜻이 가장 중요한 일이야.”
그렇게 말하는 신시아의 시선이 트루디 대공을 향했다.
“그래. 만약 원하는 상대가 있으면 말하도록 해. 최대한 너의 생각을 존중하려 하니까.”
트루디 대공이 신시아의 말에 덧붙였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결혼을 인정하는 데까지는 스스로 많은 고민과 혼란이 있었지만, 결혼을 결심한 이상 모든 것은 오드리아가 중심이어야 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을수록 오드리아는 용기가 났다.
왠지 허락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과 함께.
오드리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여전히 망설임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걱정과 불안이 섞인 네 개의 눈동자와 함께 그녀를 향해 응원의 눈빛을 보내주는 또 다른 네 개의 눈동자가 있었다.
오드리아는 몇 번이나 고민했지만 답은 하나였다.
‘말하자.’
결심을 하자마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심장 소리가 모두에게 들릴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큼.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항상 보는 얼굴과 눈빛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을 보는 데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저어…….”
오드리아가 입을 떼자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의 눈빛이 빛났다. 신시아의 눈빛에는 응원과 기대가, 트루디 대공의 눈빛에는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오드리아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라미엘과 결혼하고 싶어요.”
말했다……. 오드리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당해야 했으니까. 그리고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의 너무 놀란 나머지 몸이 딱딱하게 경직된 모습을 봐야만 했다.
“뭐……?”
트루디 대공은 너무 놀라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리아…… 지금 뭐라고……?”
트루디 대공의 반응이 심상찮았다.
“방금 누구라고…… 한 거지?”
대답을 원한 게 아니었는지 트루디 대공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 채 중얼거렸다.
“아니, 잠깐만……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었…… 근데 누구라고? 하아…….”
그는 말하는 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처음에는 귀에 물이라도 찬 것처럼 먹먹했다. 그래서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생각보다 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지켜보는 신시아와 오드리아가 걱정될 만큼.
한편, 쥬아나는 옆에 있는 제레미아의 반응을 살폈다. 그런데 그는 트루디 대공과는 달리 놀라울 만큼 담담해 보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오드리아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사실 제레미아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그래서 오드리아의 말을 들으면서도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역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드리아와 라미엘의 관계를.
오드리아는 지금 말한 게 과연 잘한 일일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신시아가 트루디 대공을 어느 정도 설득한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너무 서두른 게 아니었을까. 초조한 마음에 판단을 잘못한 게 아닐까.
하지만 후회한다고 해서 여기서 물러날 수 없었다. 이미 두 사람의 표정만 봐도 무슨 대답이 나올지 뻔히 알 것 같지만 그래도 할 수 있을 만큼 해야 했다.
“저는 라미엘과 결혼하고 싶어요.”
오드리아가 쐐기를 박기 위해 말했다. 흔들리지 않고 또렷하게 그녀의 진심이 전해지도록.
그럴수록 트루디 대공은 혼란스러웠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충격적인 것, 이해가 되지 않은 것, 혼란스러운 것이 너무 많아서 어느 것부터 물어봐야 할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트루디 대공의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입술이 무겁게 벌어졌다.
“내가 아는 그, 라미엘이 맞는 건가.”
“언제부터 그랬던 거지?”
트루디 대공이 최대한 이성을 끌어모아 힘겹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오드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라미엘과 언제부터였을까. 그녀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레.
“데뷔 무도회 좀 지나서…… 였던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우지끈-’ 하는 소리가 났다. 트루디 대공의 팔이 걸쳐져 있는 의자의 한쪽 팔걸이가 부러졌다. 그가 순간적으로 내리누른 힘에 그렇게 된 것이다.
오드리아의 대답에 긴 침묵이 흘렀다. 트루디 대공은 분노를 겨우 억누르는 것 같았다. 오드리아의 데뷔 무도회 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이 더 믿을 수 없었다.
“……안 돼.”
긴 침묵 끝에 입을 연 트루디 대공이 단호하게 말했다.
방금 전까지는 오드리아가 어떤 사람을 말해도 받아 주려 마음을 먹고 있었다. 하지만 라미엘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결심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오드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쉽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렇게 된 것인지, 트루디 대공은 혼란스러웠다.
“인정할 수 없어.”
트루디 대공이 반대 의사를 완강하게 펼쳤다. 오드리아는 그의 반응에 실망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반응이었기에 충격은 없었다.
“잠시만요. 조금만 얘기를 들어봐요.”
신시아가 트루디 대공을 말리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라미엘은 절대 안 돼. 차라리 다른 사람을 찾아봐.”
트루디 대공이 싸늘한 얼굴을 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라미엘만큼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당혹스러웠다. 지금까지 공작가 저택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두 사람 사이에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게다가 라미엘이라니, 그동안 오드리아의 호위 기사로 오랜 시간 곁을 지켰지만 그 많은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그와 오드리아가 나란히 있는 모습을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저는 다른 사람은 원하지 않아요. 라미엘 외에는 생각할 수 없어요.”
오드리아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그의 반대는 각오한 일이고 물러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러자 트루디 대공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어딜 가더라도 너는 트루디다.”
“…….”
“트루디라는 성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는 걸 잊지 마.”
트루디 대공이 엄하게 말했다. 그의 짧은 한마디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오드리아가 아닌 오드리아 트루디다. 트루디 공작가의 영애. 그 성을 짊어진 자로서의 책임감. 그것이 처음으로 족쇄로 다가왔다.
주위의 분위기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던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오드리아의 눈이 붉어졌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은 흔들리지 않았다. 살얼음장 같은 눈을 하고서는 오드리아를 외면했다.
“오드리아. 일단 방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신시아가 오드리아를 향해 걱정스런 얼굴을 하며 말했다. 트루디 대공이 답지 않게 흥분해 있었다. 잠시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네.”
오드리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트루디 대공의 말에 상처를 입거나 하지는 않은 듯 덤덤하게 방을 나섰다.
* * *
오드리아의 한마디로 공작가는 하루 종일 충격과 혼란의 도가니였다. 오드리아와 라미엘의 관계는 순식간에 고용인들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고용인들이 받은 충격 역시 적지 않았다.
“오드리아 님과 라미엘이?”
“라미엘이 유난이기는 했지만, 오드리아 님까지 같은 마음이실 줄은…….”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걸 아는 사람이 여기 어디 있어.”
라미엘은 오드리아에 관해서라면 민감하게 반응하고는 했었다. 하지만 설마 두 사람의 결혼이 언급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고용인들 사이에서 말이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쥬아나가 조용히 집사장을 불렀다.
“만약 이 일이 공작가의 대문 밖으로 한마디라도 새어 나간다면 각오해야 할 거예요.”
“명심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정신이 없어 차마 챙기지 못하는 부분들을 쥬아나가 단속하며 나섰다.
어수선한 상황에 괜히 두 사람의 말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졌다가는 일이 복잡하게 꼬일 것이다. 어쩌면 트루디 대공이 격노해서 문제가 더 커질지도 모른다.
“제발 잘 해결되면 좋을 텐데.”
트루디 대공의 반대가 너무 완강해서 걱정되었다.
쥬아나는 오드리아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기를 바랐다. 그녀가 자신과 제레미아의 약혼에 도움을 준 것처럼 뭔가를 해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 * *
어느새 깊은 밤이 되어 야간 근무를 하는 고용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였다.
제레미아가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밤늦게까지 혼자서 훈련을 하고 있는 라미엘이 있었다. 처음부터 그를 찾아온 것이다.
“여기 있었나.”
그의 목소리에 라미엘이 훈련을 멈췄다. 이미 오랜 시간 훈련한 것 같은데 그의 호흡은 규칙적이었다.
오늘 오드리아가 꺼낸 라미엘과 결혼하겠다는 폭탄발언으로 저택이 발칵 뒤집어졌는데,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평온해 보였다. 제레미아가 얼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오드리아가 너하고 결혼하겠다네.”
“알고 있습니다.”
라미엘이 담담하게 말했다. 오드리아가 직접 얘기해 줬다. 그녀는 좀 더 나은 상황에서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지만, 라미엘은 쉽지 않은 말을 자신도 없는 곳에서 외롭게 혼자 말했을 것이 더 마음 쓰였다.
결국 오드리아가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더욱 책임감이 들었다.
라미엘은 전혀 평온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과연 오드리아와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정신을 붙잡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라미엘은 잡념을 떨치고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는 두 사람의 관계를 오래 전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부디 아니기를 바라면서도 두 사람을 막지 못했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 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자신을 제외하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 역시 라미엘이었으니까.
그리고 결국 우려하던 일이 오늘 터지고야 만 것이다.
제레미아는 물론이고 트루디 대공이 허락해 줄 리 없었다. 지금의 라미엘이 트루디 대공을 설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 역시 그다지 없었다.
끝까지 갈 생각이 없다면 지금 포기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었다.
“오드리아 님과 같은 마음입니다.”
라미엘이 덤덤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이렇게 갑자기 알려진 건 뜻밖이었지만 언젠가는 겪어야 하는 일이었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라미엘은 견뎌 내기로 각오하고 있었다.
“마음만으로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제레미아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마음이 있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라미엘이 지지 않고 말했다. 서로의 마음만으로 모든 것이 나아지지는 않지만 모든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서로를 믿고 버틸 수 있었다.
“저는 오드리아 님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해 드릴 겁니다.”
라미엘은 결혼을 허락받을 자신이 있었다.
“무슨 수로. 너의 뭘 보고 허락하지.”
제레미아의 말에 날이 서 있었다.
“리아는 이미 충분히 행복해. 가족들의 사랑은 물론이고 원하는 것, 필요한 것 전부 다 가질 수 있지. 오히려 너와 함께하게 되면 지금보다 더 힘들어질 텐데.”
그답지 않게 라미엘의 조건을 무시하는 발언이었다. 트루디 공작가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라미엘을 적나라하게 꼬집은 것이다.
하지만 라미엘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새삼스럽지 않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트루디 공작가였다. 라미엘이 아무리 노력하고 공을 세워도 제국이 망하지 않는 이상 트루디 공작가보다 더 높은 위상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부도 명예도 제국에서 트루디 공작가를 따라갈 수 있는 가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드리아 님은 제가 좋다고 합니다.”
“……!”
제레미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가 오드리아 님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니…… 사랑하는 이 마음만이라도 더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그 어떤 상황이 와도 흔들리지 않을 것. 어떤 손해를 보고 희생을 하게 되더라도 오드리아를 포기하지 않는 것.
지금 자신의 처지로 할 수 있는 최선은 고작 그 뿐이었다.
그러니 제레미아가 무슨 말을 해도 절대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의지였다.
“오드리아 님과 함께할 수만 있으면 뭐든지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라미엘의 단호한 태도에 제레미아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니 이제 겨우 시작된 문제에 흔들릴 생각이 없었다. 라미엘의 결심은 하루아침에 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할 거면 똑바로 해.”
무서운 얼굴로 말했다. 그의 분한 듯 억누른 목소리와 말에 담긴 뜻이 상반되어서 라미엘이 눈을 깜박였다.
“만약 너 때문에 리아가 조금이라도 힘들어지면 가만 안 둬.”
제레미아가 경고했다. 하지만 라미엘은 그의 경고에서 희망을 엿보았다. 힘들게 하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허락하는 것처럼 들려서.
한편, 트루디 대공은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흥분이 가라앉고 진정이 됐다. 그동안 신시아는 그의 곁에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손을 꼭 붙잡고 기다려 주었다.
머리끝까지 치솟았던 뜨거운 열기가 가라앉자 트루디 대공은 자신이 저지른 일들이 떠올랐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믿을 수 없었다.
오드리아에게 화를 냈다. 이상한 책임과 의무를 들먹이며 그녀를 압박했다. 복잡한 감정들이 치솟으며 흥분해서 나온 말들이었다. 진심이 아니다.
신시아의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트루디 대공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방 안을 빙빙 돌았다.
트루디 대공은 안절부절못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인 거야!’
버럭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고 오드리아를 몰아붙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한 적 없는 일들이었다. 분명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라미엘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토록 오래 숨겨 왔다니.
오드리아의 붉어진 눈가가 떠올랐다. 자신이 오드리아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아무리 당황했어도, 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러면 안 됐는데. 트루디 대공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몇 번을 자책해도 괴로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언제나 강하고 든든한 사람, 모두에게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트루디 대공은 오드리아 앞에서 한없이 약하고 흔들렸다.
“제이.”
신시아가 조심스러우면서도 다정한 손길로 트루디 대공의 양손을 붙잡았다. 그제야 트루디 대공이 행동을 멈췄다.
“괜찮아요.”
신시아가 트루디 대공을 달래며 미소를 지었다. 마음의 안정이 생기는 그런 미소였다.
“오드리아도 제이의 마음을 알 거예요. 당신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문제라는 것을요.”
“……상처받았을까.”
“만약 그랬다고 하더라도 괜찮을 거예요.”
신시아는 트루디 대공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오드리아가 상처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신시아처럼 그녀를 달래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은 라미엘일 것이고.
신시아는 트루디 대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만 이걸 말하면 트루디 대공이 또다시 걱정할 테니까, 이건 말하지 말자.
“라미엘은 훌륭한 기사예요.”
“그걸로 자격을 갖추는 것은 아니지.”
훌륭한 기사는 라미엘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있다. 트루디 대공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훌륭한 기사는 많지만 라미엘만큼 뛰어난 기사가 제국에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것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뺀다면 찾기 어려울 것이다. 신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트루디 대공은 라미엘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말했어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오드리아의 결혼을 결심한 것과 그걸 체감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으니까.
“지금이라도 가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역시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지금 당장 가서 오드리아에게 모두 오해라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야겠다. 그렇게 문 앞으로 빠르게 걷던 트루디 대공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결혼은……!”
트루디 대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지금 오드리아에게 달려간다면 미안하다고 하면서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해야 할 것만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신시아는 그 모습을 보며 역시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신시아가 오드리아를 찾아왔다. 차를 함께 마시지 않겠냐는 제안에 오드리아가 화답했다. 곧 차와 간단한 디저트가 준비되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신시아가 찻잔을 매만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드리아.”
“네.”
“혹시…… 대공 각하께 서운한 마음이 들었나요?”
신시아가 오드리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어제의 일로 그녀가 상처를 받고 트루디 대공을 원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만약…… 그렇다고 해도…… 너무 많이…… 너무 오래는 미워하지 않아 줄 수 있을까요?”
신시아는 오드리아의 행복을 응원하지만 동시에 트루디 대공을 사랑했다. 그가 상처받은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편치 않았다.
“그럴 리가요.”
오드리아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제가 어떻게 아버지를 미워해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신시아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온전한 진심이었다.
트루디 대공과 오드리아가 함께한 시간이 얼마인데, 그 시간 동안 트루디 대공이 보여 준 진심이 얼마나 크고 넓은데, 고작 그런 몇 마디로 어떻게 트루디 대공을 미워할 수 있을까.
“오히려 아버지가 괜히 자책하실까 봐 걱정이에요.”
“분명 대공 각하께서도 받아들일 거예요.”
“말씀만이라도 감사해요.”
어차피 각오한 일이었다. 오드리아는 마음을 더 강하게 먹었다. 트루디 대공이 그녀의 결혼을 바로 인정해 주지 않더라도 그를 상처 주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를 보면 제가 잘할게요.”
오드리아가 신시아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지금 두 사람이 서로를 찾지 않는 것은 이 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부분에서 물러날 수 없어서였다. 그래서 우연히 마주칠 때까지 서로 참고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나, 트루디 대공이 오드리아와 우연한 만남을 가장하기 위해 후원을 찾았다. 그는 모를 것이다. 오드리아 역시 그를 만나기 위해 지금 그가 있을 만한 곳을 떠올려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눈이 마주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트루디 대공이 다가오지 못하는 것이 느껴졌다.
오드리아가 먼저 그를 향해 다가갔다.
“아빠.”
평소보다 더 친근하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제야 그의 얼굴에서 긴장이 풀리는 것이 보였다.
“저랑 산책해요.”
오드리아가 트루디 대공의 팔에 자신의 팔을 쏙 넣으며 그를 앞으로 당겼다. 아주 작은 힘이었는데 트루디 대공은 그대로 앞으로 끌려왔다.
이걸로 그의 마음을 돌릴 생각은 없었다. 단지, 트루디 대공이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되는 죄책감을 느끼며 힘들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오드리아는 일부러 산책하는 내내 더 씩씩하게 쉬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 * *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의 앞에서는 의연하게 행동했지만 속내는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좀 더 준비된 상황에서 얘기할걸.”
오드리아가 라미엘에게 속상한 마음을 토로했다. 혹시라도 자신의 판단 때문에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마음이 쓰였다.
“처음부터 쉽게 허락해 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잖습니까.”
라미엘은 의연한 반응을 보였다.
“두 분을 설득시키겠습니다.”
라미엘은 흔들리지 않았다.
“아빠는 내 결혼 자체를 인정하지 못해서 더 반대하는 거야.”
오드리아는 혹시라도 라미엘이 문제라고 생각할까 봐 걱정됐다.
“걱정 마세요. 그 마음은 누구보다 제가 제일 잘 아니까요.”
라미엘은 오히려 의연했다.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트루디 대공의 마음을 이해했다.
“오드리아 님이 데뷔 무도회를 치렀을 때 제가 그랬습니다.”
“데뷔 무도회 때?”
“점점 더 멀어지는 오드리아 님을 보면서 이대로 손이 닿지 않게 될까봐 초조했거든요.”
라미엘이 그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오드리아 역시 그게 언제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떠나라고 했던 거구나.’
오드리아가 라미엘을 향해 미안한 마음이 들려고 할 때였다.
“그러니 자신 있습니다.”
라미엘이 확신에 찬 모습으로 말했다. 흔들림 없이 단단한 그의 눈을 보니 그의 말대로 정말 잘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드리아가 기운을 내며 씩씩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은 여전히 오드리아와 라미엘의 관계를 믿을 수 없어 괴로워하고 있었다.
신시아의 말에 오드리아의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심은 했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오드리아가 결혼 상대를 꺼낼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동안 몰래 서로 좋아하고 있었다니.
혼돈에 빠진 트루디 대공은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라미엘과 결혼이라니. 어느새 그놈과…….”
결혼이 곧 신분이 된다. 지금은 아무리 대단한 트루디 공작가의 영애라고 해도 결혼을 하게 되면 오드리아 역시 남편의 신분을 따르게 된다.
정확한 출신을 모르는, 노예가 될 뻔했던 공작가의 기사. 이제 갓 남작위를 받은 신생 귀족. 영지도 없고 저택도 없는 허울뿐인 작위였다. 트루디 공작가의 영애 오드리아에게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것들밖에 없었다.
그리고 트루디 대공 역시 만약 오드리아가 결혼을 한다면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은 상대와 하기를 바랐다.
오드리아가 그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고 다른 사람들이 감히 무시하지 못할 만한 자리. 그런데 라미엘은 그중에 무엇 하나 해당하지 않았다.
트루디 대공이 고민하는 것을 지켜보던 신시아가 그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올렸다.
트루디 대공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라미엘 남작 정도면 괜찮지 않나요?”
신시아가 고민하고 있는 트루디 대공에게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다른 건 모두 배제하고 오직 라미엘 남작, 한 사람만 봤을 때요.”
“…….”
“뛰어난 실력을 지닌 데다가 무엇보다 오로지 오드리아만 바라보는 사람이잖아요.”
“……!”
“그보다 중요한 게 있을까요?”
신시아가 트루디 대공을 지그시 바라보며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오드리아가 좋아하고 또 좋아해 주는 사람과 함께하는 게 가장 행복한 일 아닐까요?”
신시아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깊게 울렸다. 트루디 대공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면…….”
“혹시 다른 사람들 중 마음에 둔 이가 있나요?”
신시아의 입꼬리가 짓궂게 올라갔다. 그녀는 트루디 대공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트루디 대공 역시 그녀의 의도를 눈치챘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아 애써 시선을 피했다.
“없으시죠.”
신시아가 트루디 대공의 팔을 손가락으로 은근하게 누르며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다른 누구라도 분명 싫어하셨을 거죠?”
트루디 대공은 빈말로라도 아니라고 변명할 수 없었다. 신시아의 말대로였다. 분명 라미엘이 아니어도 반대했을 것이다. 그가 노예 출신이어서도, 볼 것 없는 남작이어서도 아니었다.
그저 오드리아가 온전하게 마음을 준 상대라서, 오드리아를 빼앗긴 기분이 들어서, 그래서 계속 부정하고 있었다.
트루디 대공이 신시아의 말에 점점 흔들릴 때였다.
똑똑-, 짧은 노크와 함께 제레미아가 들이닥쳤다. 그는 화가 난 것을 숨길 생각이 없는지 발걸음이 거칠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제레미아의 얼굴이 심각했다.
“지난 연회 때부터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주시하고 있었는데…….”
“……?”
“아무래도 황태자의 행동이 수상합니다.”
“그게 하루 이틀 일인가.”
트루디 대공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했다. 황태자가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적당히 놔둬. 지금은 황태자가 문제가 아니니.”
지금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은 트루디 대공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을 때였다. 제레미아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리아에게만 신경이 쏠려 아무것도 보지 않으니 정작 다른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에는 감도 잡지 못하시는 것 아닙니까.”
제레미아가 트루디 대공을 나무라며 말을 이었다.
“황태자가 리아에게 청혼하려는 것 같습니다.”
“뭐……?!”
“아직 공식적인 언급은 없지만 곧 얘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트루디 대공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황궁 연회에서 오드리아에게 접근하는 황태자를 볼 때부터 기분이 찝찝했다. 음험한 그자가 뭔가 꿍꿍이를 벌일 것 같아서 그동안 그의 행동을 꾸준히 감시하고 있었다.
오드리아에게 서신을 몇 번 보낸 것 이후에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동안 황태자는 오드리아에게 청혼을 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청혼을 거절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황태자였다.
그가 오드리아에게 청혼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가 될 것이고 그 사실이 오드리아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을 것이다.
‘감히 리아에게 흙탕물을 튀기려 하다니.’
제레미아는 참을 수 없었다. 그가 움직이기 전에 먼저 대처해야 했다. 제레미아의 말을 전부 들은 트루디 대공이 손가락 마디로 눈 사이를 꾹 눌렀다.
“하, 기어이 주제를 모르고…….”
그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지난번부터 계속 시야에 알짱거리며 거슬리더니, 결국 이렇게 나오는 건가.
갑자기 황태자가 이런 일을 벌이는 이유는 뻔했다. 감히 리아를 이용하려 하다니. 오물을 뒤집어쓴 것만큼이나 불쾌했다.
“그놈 때문에 괜히 일이 복잡하게 됐군.”
역시 마음에 안 들어. 트루디 대공의 입 안이 썼다.
트루디 대공이 라미엘을 따로 불렀다. 그런데 어느새 라미엘의 옆에 오드리아가 있었다.
“분명 혼자 오라고 했을 텐데.”
“제가 따라왔어요.”
라미엘이 대답하기 전에 오드리아가 먼저 가로챘다. 라미엘은 잘못 없다며 보호하는 모습이었다. 트루디 대공은 차마 그녀에게 뭐라고 하지 못하고 불편한 헛기침을 했다.
“오드리아 님과의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내가 너의 무엇을 믿고 허락해 줘야 하지.”
트루디 대공은 여전히 그를 허락할 마음이 없었다.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그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트루디 대공의 마음에 들 리 없었다.
“제가 어떤 사람이 되면 되겠습니까. 대공 각하의 마음에 들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라미엘은 각오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있었다. 트루디 대공이 요구하는 조건이 있다면 무엇이든 맞출 생각이었다.
“작위가 더 높아지면 되겠습니까.”
라미엘이 트루디 대공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면 재산이 부족합니까.”
트루디 대공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없자 라미엘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도 아니면 아직 힘이 모자랍니까.”
라미엘의 눈빛이 당당해서 그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은 대공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가 모두 해내고야 말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트루디 대공은 침묵을 지켰다. 라미엘이 말하는 조건은 모두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건 오드리아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트루디 대공이 넘치도록 가지고 있는 것들이었으니까.
그럼 무슨 조건을 내밀어야 하지, 고심하던 트루디 대공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럼 너는 뭘 할 수 있지.”
한참을 헤맨 끝에 내린 결론은, 역으로 라미엘에게 묻는 것이었다.
“제가…….”
사실, 라미엘은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지금까지 해 온 것들 역시 그것을 위한 포석이었다.
“데릴사위가 되겠습니다.”
망설임 없이 훅 치고 들어온 말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
트루디 대공은 겉으로 표가 나지 않았을 뿐 마음속으로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
“결혼한 후에도 이곳에서 아빠랑 오빠랑 함께 살고 싶어요.”
오드리아가 쐐기를 박았다.
데릴사위라니, 그 말은 결혼 후에도 오드리아가 공작가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이 살자고 했잖아요.”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계속 함께 있을 수 있다고?’
데릴사위라면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특히, 라미엘은 제대로 된 성이 없었다. 만약 그가 결혼을 한다면 성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데릴사위로 들어온다면 라미엘은 라미엘 트루디가 된다. 오드리아는 여전히 오드리아 트루디로서 살아가는 것이고.
“제가 성이 바뀌지 않는다면, 라미엘이 어떤 신분이든 상관없지 않나요?”
오드리아의 말은 당돌했다. 하지만 정곡을 찔렀다.
“성이 바뀌지 않는다니…….”
“제가 결혼을 해도 오드리아 트루디인 거예요.”
오드리아의 말에 트루디 대공이 되묻자 오드리아는 ‘오드리아 트루디’라는 풀네임에 힘을 주며 말했다. 트루디 대공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제가 공작가의 일원이 되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라미엘은 남작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을 만들지 않았다. 그 때문에 라미엘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는 사람이 생기는데도 불구하고.
설마 그 이유가 바로 이것을 위한 거였나? 라미엘의 말을 들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저는 성도 저택도 없으니 제가 오드리아와 결혼을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
“고작 남작이 데릴사위가 된다고 하는데 불만을 나타내는 이 또한 없을 테고요.”
라미엘이 쐐기를 박았다. 그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
더 높은 지위와 부를 얻을 수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된 저택 하나 없는 남작위를 택한 이유.
라미엘은 처음부터 트루디 공작가의 데릴사위가 될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 나타나도 오드리아의 짝으로는 한없이 부족하다고 느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끌릴 수밖에 없는 조건을 미리 선점하기 위해.
“……이런다고 허락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트루디 대공이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하지만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다.
“트루디라는 이름이 사위 하나 때문에 그렇게 쉽게 무너지나요?”
오드리아의 도발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확하게 먹혀들었다.
트루디의 이름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을 지탱하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있는 한 더더욱. 영원불멸. 이 단어에 어울리는 것은 황가가 아니라 트루디 공작가였으니까.
역시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오드리아였다.
고민하고 있는 트루디 대공에게 신시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의 아내로서, 오드리아의 엄마로서, 같은 여자로서. 많은 것이 담긴 말이었다.
“오드리아의 결혼으로 가문의 이익을 얻을 생각은 없으시잖아요.”
“당연하지! 감히 오드리아의 결혼으로 다른 것을 생각하다니!”
만약 그런 계략을 세우는 놈이 있으면 가만두지 않을 것처럼 트루디 대공은 분노하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며 신시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당신이 가장 고려하는 게 뭐예요?”
“그야, 리아의 행복이지!”
트루디 대공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하는 동시에 신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트루디 대공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오드리아의 행복이었다. 그 마음을 신시아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뻔했다.
오드리아가 좋아하는 사람, 어떻게든 결혼하고 싶어 하는 상대를 의심 없이 허락해 주는 것.
트루디 대공이 고개를 떨궜다. 마치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강하게 뺨을 한 대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지금까지 내가 뭘 한 거지.”
“뭐긴요.”
신시아가 트루디 대공의 눈을 상냥하게 마주친 채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딸을 위한 아버지의 고민이죠.”
“……리아가 서운해하고 있을까.”
“그럴 리가요.”
누구의 딸인데요. 신시아가 진심으로 말했다. 오드리아 역시 트루디 대공의 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트루디 대공의 강한 거부에도 포기하지 않고 그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신시아. 그대가 있어서 다행이야.”
트루디 대공은 지금 이 순간 신시아의 존재의 대단함을 느꼈다. 그녀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고 오드리아의 행복을 축복해 주지 못할 뻔했다.
트루디 대공은 신시아를 끌어안았다. 오드리아가 아니었으면 얻지 못했을 소중한 사람을.
트루디 대공은 여전히 라미엘이 못마땅했다. 앞으로도 그가 제 마음에 꼭 들어맞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라미엘이 못나서가 아니라 오드리아의 짝이기 때문이다.
트루디 대공은 라미엘에 대해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가 오드리아와 함께일 때, 리아를 힘들게 하지 않을지, 오로지 리아만을 생각하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놈인지.
라미엘은 출신 성분이 확실하지 않다. 어릴 적에는 노예 시장에 있었고 그 이후에는 공작가에서 잡일을 하다 오드리아의 호위 기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남작에 실력 있는 기사.
사실 어울리지 않는 신분이었다. 특히 오드리아에게 가장 좋은 것만 주고 싶은 그의 마음에는.
‘하지만 데릴사위가 되겠다고 했었지.’
그렇게만 되면 그의 신분 따위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라미엘 트루디가 되면, 오드리아가 남작 부인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도 없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그 어느 좋은 가문으로 시집보내는 것보다 트루디의 이름을 계속 이어 가는 것이 가장 좋을지도 모른다. 내심 트루디 대공은 그것을 원하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하지만 곧 이렇게 쉽게 허락할 수 없다며 생각을 단단히 고쳐 잡았다.
다른 부분들도 꼼꼼하게 확인해 봐야 했다.
라미엘의 기사로서의 실력은 트루디 대공 역시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의심할 것이 없었다.
라미엘이 오드리아에게 어떻게 하는지는 공작가의 고용인들에게 조금 묻기만 해도 바로 나왔다.
그는 오드리아가 하는 말이면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가 가는 뒤를 열심히 따라다닌다고 한다.
트루디 대공의 마음이 점점 더 기울어졌다.
“그래. 이건 오드리아를 위한 거야. 절대 그놈이 데릴사위가 되겠다고 해서 마음을 바꾸는 게 아니야.”
트루디 대공이 오드리아와 라미엘을 다시 불렀다. 그 자리에는 제레미아 또한 불려 왔다. 하지만 제레미아도 왜 부른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사실은 알고 있지만.
제레미아는 트루디 대공과는 다르게 그동안 두 사람을 반대하지 않았다. 응원하고 지지해 주지는 못하지만 지켜봐 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전날 밤, 제레미아는 트루디 대공을 만났다. 그리고 오드리아와 라미엘의 결혼을 허락할 거라는 말을 미리 들었다.
‘드디어 허락받는 거군.’
제레미아는 결국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이 온 것이다. 아무래도 데릴사위가 되겠다는 말이 효과가 있었겠지. 제레미아는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두 사람을 지켜봐 줄 생각이지만 그래도 마음이 복잡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오드리아와 라미엘은 긴장했다. 트루디 대공이 무게를 잡고 말할 듯 말하지 않을 때마다 초조해졌다.
트루디 대공이 긴 침묵 끝에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럼 결혼 후에도 공작가에서 지낼 계획인 건가.”
“……?”
이 말의 의도가 뭐지. 설마 허락을 하는 건가. 두 사람의 마음에 기대가 일렁였다.
“네, 공작가의 일원이 되는 거니 당연히 공작저에서 지내야지요.”
라미엘이 흔들림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트루디 대공이 라미엘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고 서로의 시선을 마주한 채 숨 막히는 시간이 흐르고 주위를 지키고 있던 다른 자들마저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을 때였다.
“그래.”
트루디 대공이 낮은 목소리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허락…… 해 주시는 겁니까?”
‘설마’ 하는 의심과 ‘혹시’ 하는 기대가 교차했다.
“정말이에요?”
“그래. 결혼하도록 해.”
트루디 대공이 힘겹게 말했다.
그로서는 엄청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지만 결국 허락을 한 것이다.
오드리아의 시선이 데구루루 굴러 제레미아를 향했다. 제레미아는 오드리아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다. 축하해, 리아.”
제레미아도 웃으며 축하해 주었다. 신시아와 쥬아나의 응원에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인정까지. 완벽한 승낙이었다. 오드리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하겠습니다!”
오드리아는 그대로 트루디 대공의 품에 달싹 안겼다. 라미엘은 허리를 숙이며 감사함을 표했다. 사실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다. 고개를 드는 순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서.
“축하해.”
신시아가 오드리아와 라미엘을 축하해 주었다.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허락을 받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오드리아와 라미엘이 기쁨의 포옹을 했을 때였다.
하필 그 모습을 트루디 대공이 목격하고 말았다. 트루디 대공은 잠시 굳어 있는 것 같더니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오드리아와 라미엘이 당황했지만 신시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마음이 여려서 그래.”
다른 사람이 들으면 경악을 금하지 못할 만한 발언이었지만 오드리아는 신시아의 말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하고 미소를 지었다.
결혼을 허락받기가 어려웠을 뿐, 결혼 준비는 곧바로 진행되었다. 이미 결정한 일을 미룰 이유가 없다는 것이 트루디 대공의 뜻이었다.
그중에서 트루디 대공이 가장 먼저 한 것은 두 사람의 결혼 사실을 모두에게 알리는 것이다. 황제는 두 사람의 결혼 소식에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대단한 조합이군.”
황제는 오드리아와 라미엘의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을 보냈다. 황제가 직접 축하하는 결혼. 그 상황에서 황태자가 불만을 터트릴 수는 없었다.
황태자는 속으로 분을 삼켰다. 자신이 황후감으로 점찍은 오드리아를 별것도 아닌 놈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에.
기껏 공 한두 번 세웠다고 해도 황태자인 자신에게는 감히 댈 수도 없는 주제에, 건방지게.
“황태자가 꽤 열 받아 한답니다.”
“지가 뭔데.”
트루디 대공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제레미아를 노려봤다. 그러자 제레미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입꼬리에는 엄연한 비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황태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언제나 욕심 많고 충동적이라서 실수를 일삼는 그가 눈에 찰 리 없었다.
황태자와 결혼할 바에야 차라리 라미엘과 결혼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라미엘에 대한 호감이 아주 조금은 상승했다.
오드리아와 라미엘의 결혼 소식에는 다양한 반응이 따라왔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오드리아가 대체 누구와 결혼을 하게 될지는 이미 사교계의 공공연한 궁금증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결혼 상대가 오드리아의 호위 기사였던 라미엘이라니!
그는 제국의 레이디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존재였다. 뛰어난 실력에 넋을 잃고 보게 되는 외모로 이미 많은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래도 그가 오드리아와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게다가 또 하나 이어지는 충격적인 소식은 라미엘이 데릴사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무엇 하나 평범한 게 없네요.”
“결혼마저도 입이 벌어지게 만드는군요.”
이 소식을 접한 모든 사람들은 오드리아에게 감탄했다. 그녀의 행보 중 어느 것 하나 무난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5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