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8/48)

chapter 16. 결혼 허락

라미엘은 공작가에 도착해서 오드리아의 얼굴만 보고 곧바로 황궁으로 향해야 했다.

“이제 가 보겠습니다.”

“황궁에 갔다가 오후에 오는 거야?”

“아무래도 그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잘 다녀와.”

오드리아가 웃으며 라미엘을 배웅했다. 그런데 라미엘은 바로 황궁으로 가지 않고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오드리아 님…….”

라미엘이 오드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한 걸음 가까워졌습니다.”

“…….”

“앞으로는 절대 헤어지지 않을 겁니다.”

라미엘의 말에 오드리아가 환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였다.

그제야 라미엘은 아쉬운 발걸음을 떼어 황궁으로 향했다. 오드리아는 라미엘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라미엘이 황궁으로 향하고 오드리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어제와 같은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가 있었다.

아이작이 싱글벙글 웃으며 오드리아를 향해 다가왔다. 굉장히 즐거운 일이 있는 것처럼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오드리아 님. 오늘 라미엘이 돌아온 거 아십니까.”

아이작은 분명 오드리아가 놀랄 것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응. 오늘이네.”

오드리아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라미엘을 만나기까지 한 오드리아에게서는 기대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아이작은 오드리아의 기대 이하의 반응에 실망한 듯 목소리가 쳐졌다.

“좀 더 기뻐하실 줄 알았는데…… 별로 반갑지 않으신가 봅니다.”

“돌아온다는 건 알고 있었잖아.”

아이작은 오드리아의 반응에 실망한 듯 입을 삐죽이더니 언제나처럼 그녀의 뒤에 서며 말했다.

“그래도 라미엘을 만나면 반가운 척이라도 해 주십시오. 분명 그걸 기대하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아이작은 오드리아의 미지근한 반응에 실망할 라미엘을 떠올리며 부탁했다.

“……왜 그러십니까.”

갑자기 오드리아가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자 당황한 아이작이 뒷걸음질 치며 물었다.

오드리아는 그런 아이작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나 한량처럼 행동하지만 라미엘을 신경 쓰고 있었구나. 오드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라미엘은 황궁에서 황제를 직접 알현할 예정이었다. 그에 앞서 시종장에게 황제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몇 가지 항목을 안내받았다.

“절대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됩니다. 물어보시는 질문에는 바로 대답을 해야 합니다. 대답하기 곤란할 때 역시…….”

시종장은 계속해서 주의사항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도 불안했다. 분명 대답은 하는데 제대로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명심하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보통 황제와 첫 대면을 한다고 하면 아무리 대단한 가문의 자제라고 할지라도 긴장했다. 역시나 라미엘도 긴장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래서 혹시나 실수를 하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워 문 너머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불안해했다. 하지만 시종장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막상 황제의 앞에 서자 라미엘은 마치 황궁에 여러 번 와 익숙한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그리고 시종장이 알려 준 대로 예를 갖추고 황제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기다렸다.

황제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자 라미엘이 고개를 더욱 깊게 숙였다.

“그대가 이번에 공을 세웠다는 라미엘인가.”

“트루디 공작가 소속 기사 라미엘이라고 합니다.”

“흠…….”

황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는 라미엘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도록.”

“…….”

하지만 라미엘은 대답을 하지도 고개를 들지도 않았다.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시종장이 꽤나 주의를 줬나 보군. 괜찮으니 고개를 들라.”

황제는 불쾌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애롭게 다시 말했다.

벌써 황제가 두 번이나 말했다. 이번에도 고개를 들지 않으면 상황은 정말로 이상하게 흘러갈 것이다. 라미엘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그제야 라미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여전히 시선을 바닥에 두어 얼굴의 반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소문이 자자한 라미엘의 외모가 충분히 보였다.

“정말 잘생겼군.”

황제가 감탄하며 말하자 라미엘이 어깨를 움찔하며 떨었다.

“눈에 띄는 외모야.”

황제의 이어지는 말에 라미엘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관찰하듯 빤히 쳐다보았다.

사실 황제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오랫동안 봐 왔기에 라미엘을 봐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를 보는 순간 놀라고 말았다.

라미엘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그의 강인한 눈빛과 높은 콧대를 따라 이어지는 적당히 도톰하면서 입꼬리가 긴 입술, 날렵한 턱에 넓은 어깨와 등.

외모는 그 누구보다도 남자다운데 이상하게 처연한 분위기가 엿보였다. 저절로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외모였다. 그런데 능력까지 대단했다.

황제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국경에서 그대가 펼친 활약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보고되더군.”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대 덕분에 국경의 소란이 조용해졌네. 자칫하면 귀찮은 일이 될 뻔했는데 말이야.”

라미엘은 황제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오늘 황제가 그를 부른 이유는 명확했다. 이번 일에 대한 공을 치하하기 위해서. 지금의 이 말들은 그 얘기를 위한 부산물이었다.

“무엇을 원하지?”

황제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번 일에 대한 공으로 원하는 것이 있는지를.

라미엘이 잠시 망설이며 답이 없자 황제가 다시 한번 그를 향해 말했다.

“대가는 받아야지. 무엇이든 말해도 좋으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망설이지 말도록 해.”

황제는 공을 치하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아끼지 않는 편이었다. 상벌을 확실히 해야 다시 좋은 결과가 돌아온다는 것이 그의 철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라미엘의 대답에 황제가 흥미를 보였다.

“그게 무엇이지?”

라미엘은 망설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것만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바닥을 향해 내리깔고 있던 라미엘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향해 황제의 시선과 마주했다. 그가 천천히 입을 뗐다.

“작위를 받고 싶습니다.”

라미엘이 흔들림 없이 올곧게 말했다.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작위였다.

“작위라…… 어떤 작위를 원하는 거지?”

귀족들 사이에도 엄연한 계급이 있었다. 공작, 후작, 백작, 남작과 자작과 같은. 그중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것이다.

라미엘은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작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생각해 둔 것이 있었으니까.

“남작위를 원합니다.”

황제가 라미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번 일에 대한 대가로 남작이라.”

황제는 생각에 잠겼다. 방금 전까지는 뭐든 들어줄 거 같더니 갑자기 고민하는 듯한 모습에 라미엘은 불안해졌다.

그때였다. 라미엘과 황제의 시선이 마주쳤다.

“남작은…… 아쉽지 않나.”

고작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냐는 물음이었다. 황제는 그가 최소 백작 이상은 말할 줄 알았다는 듯 싱겁게 반응했다.

“저는 그 이상을 원하지 않습니다.”

라미엘은 확고했다. 어차피 남작보다 높은 작위는 필요 없었다.

“원하는 건 정말 그게 전부인가?”

“네.”

황제는 그 외에도 더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라미엘은 정말로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었다.

황제는 뭔가 아쉬운지 곰곰이 고민을 하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저택을 원한다면 하사해 주지.”

황제는 라미엘을 만나기 전 그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들은 상태였다. 그가 트루디 공작가에서 기거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어서 꺼낸 말이었다. 남작위인데 제대로 된 저택 역시 필요할 테니까.

남작위를 가진 귀족들 중에는 영지가 없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제대로 된 저택도 없이 다른 귀족의 저택에서 기거하는 경우는 없었다.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라미엘은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황제는 라미엘의 말이 단순한 예의로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저택을 준다는데 거절하다니 신기하군. 황제는 의아했지만 받을 사람이 원하지 않은데 굳이 줄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원하는 재물이 있으면 줄 수도 있는데.”

“저 혼자 한 일이 아닙니다. 남작위를 받는 것만으로 넘칠 만큼 과분합니다. 만약 제게 주실 것이 있으면 그동안 함께 싸운 이들에게 나눠 주셨으면 합니다.”

라미엘은 이번에도 정중하게 거절했다.

황제는 그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제를 잘 해결해 준 것이 기특해서 이것저것 원하는 것이 있으면 다 들어주자고 작정하고 나왔는데 생각보다 별것 없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동료를 위한 배려라.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 그렇게 하도록 하지.”

“폐하의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다시 공작가로 돌아가는 건가.”

“네. 앞으로도 그곳에서 지낼 생각입니다.”

라미엘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사실 황제는 남작이 되어도 공작가에서 지내면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알려 줄까 했지만, 그건 왠지 과한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서 참았다.

“알겠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라미엘은 황제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한 뒤 돌아섰다.

그가 나가고 혼자 남은 황제는 방금 전까지 마주하고 있던 라미엘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흑발이라…….’

황제는 라미엘의 머리색을 떠올렸다. 이상하게 그의 머리카락에 눈길이 갔다. 제국에서 흑발은 그리 흔한 색은 아니라도 그렇게까지 드문 색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의 흑발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리운 색이군.”

황제의 후회와 회한이 담긴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한편, 황궁을 나온 라미엘은 그동안 참고 있던 숨을 토해 내듯이 겨우 내뱉었다.

최대한 평소대로 행동하려고 했지만 황제와 대면한 내내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모른다.

‘혹시 실수하지는 않았겠지?’

황제가 그에게 관심을 둘 일 따위 없을 테니 괜한 걱정이었지만 라미엘은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어쩐지 힘겨운 하루였다. 황제와 독대한 잠깐 사이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럴수록 지친 몸을 이끌고 어서 빨리 공작가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곳에는 오드리아가 있으니까.

라미엘이 공작가를 향해 미련 없이 발을 내딛었다.

* * *

황궁을 나온 라미엘이 드디어 공작가에 돌아왔다. 새벽에 왔다 간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그를 반겼다.

“어서 와. 드디어 돌아왔군.”

“이번에 엄청났다며.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동료들의 환영 인사가 이어졌다. 한 번도 티를 낸 적은 없었지만 내심 라미엘이 사라지자 시원섭섭한 마음에 모두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그의 달라진 위상을 증명하듯 황제에 이어 트루디 대공까지 그를 찾은 것이다.

“대공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기사단원들과 오랜만의 회포를 풀고 있는데 트루디 대공의 보좌관이 그를 찾아왔다. 그는 보좌관을 따라 트루디 대공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라미엘에게 있어 황제보다도 더 높고 어려운 존재인 트루디 대공이 있었다. 그가 라미엘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군. 그대가 국경에서 펼친 활약에 대해서는 전부 보고받았네.”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미엘은 황제 앞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사실, 그가 이번에 이토록 열심히 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그걸 말할 수는 없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은 형식적인 것밖에 없었다.

“남작위를 받는다고.”

막 황제에게 청하고 그가 수락한 일이다. 그 얘기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트루디 대공은 벌써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트루디 대공 역시 제레미아가 남작위를 받게 되었으니 독립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공작가에서 수고한 만큼 트루디 대공 역시 보상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라미엘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저는 앞으로도 공작가 소속 기사로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계속 공작가의 기사이고 싶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굳이 이전처럼 이곳에서 생활할 필요까지는 없어.”

“작위를 받는다고 해도 어차피 허울뿐입니다. 아직 저 혼자 해 나갈 자신이 없어 그런 것이니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미엘은 결코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트루디 대공의 제안에도 꿋꿋이 버텼다.

“남작이 되어서도 계속 공작가에 머무는 것은 그대에게 별로 좋지 않아. 시간을 줄 테니 천천히 준비하는 게 좋겠군.”

트루디 대공은 라미엘에게 유예기간을 주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미엘 역시 그 이상 미룰 수는 없어서 그의 뜻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공작가를 떠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작위 이상의 작위를 원하지 않은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드리아의 옆에 설 수 있는 귀족의 작위. 동시에 그녀의 호위 기사로서 곁을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작위여야 했다.

그 조건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남작위였다.

게다가 라미엘이 백작이 되고 후작이 되고 심지어 공작이 될 수 있다고 해도 트루디 공작가에 비할 수 없었다. 아무리 올라가도 더 대단해질 수 없다면 길거리에 차고 넘치는 돌멩이와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방해물이 될 수도 있지.’

라미엘의 작위가 높아지면 제레미아의 경계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 더 이상 오드리아의 호위 기사라는 위치를 유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라미엘은 오드리아의 옆에 당당하게 있기 위한 준비를 하나씩 준비해 나갔다. 초조해하지 않고 착실하게.

공을 세우고 작위를 받는 것이 첫 번째, 대외적인 평판을 만들어 놓는 것이 두 번째,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놓는 것이 세 번째.

하지만 세 번째는 라미엘이 노력한다고 해서 실현 가능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오드리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만 알아도 두 사람은 결코 라미엘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테니까.

* * *

남작위는 보통 별도의 작위 수여식을 하지 않는다. 그저 귀족 명부에 이름을 올릴 뿐.

사실상 명예가 전부인지라 제국을 위해 공을 세운 평민에게 가장 흔하게 내리는 작위이기도 했다.

그렇게 얻은 작위로 귀족이 되고 사업을 키워 웬만한 백작가 못지않은 영지를 갖게 된 이들도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을 세워 작위를 얻은 자들의 가능성을 보고 가치를 판단하고는 했다.

현재 라미엘은 가장 미래가 기대되는 남작이었다. 그는 작위를 받기 전부터 눈에 띄는 외모와 실력으로 유명했었기에 더더욱.

라미엘이 제국에 돌아오자, 그는 이미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공을 세워 남작위를 받았다는 소식으로 그의 유명세는 더욱 높아지고 온통 그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어디를 가도 라미엘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화제에 올랐다.

특히, 라미엘에게 호감이 있던 자들은 그의 소식을 반기며 기대했다. 하지만 라미엘에게 열등감을 느끼며 그의 남작위 수여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려고 하는 자들 역시 많았다.

“출신이 어딘지도 모르는 자입니다. 그런 놈에게 작위를 달아 준다고 해서 달라지겠습니까?”

“하지만 이젠 어엿한 남작이 아닙니까.”

“그게 사람을 하루아침에 바꿔 주지는 않죠.”

“못 바꿀 건 또 뭡니까.”

“귀족이란 작위가 중요하죠. 우리들 중 그것 말고 다른 걸로 상대가 되는 사람이 있나요?”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이들이 이토록 뜨거운 반응을 터트리는 것은 남작이 되기 전부터 강렬했던 그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트루디 공작가의 소속이기 때문인지 괴물 같은 실력과 제레미아 트루디와 나란히 있으면 함께 빛을 더하는 그의 외모는 언제나 신경 쓰이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알 수 없는 패배감에 주눅이 들려고 할 때였다.

“고작 남작에 불과합니다. 가문의 역사도 영지도 없는 이름뿐인 작위. 그게 전부입니다.”

라미엘에 대한 평가를 단번에 뒤집는 말이었다. 그 말에 라미엘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들이 격렬하게 동의했다.

이렇게 라미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엇갈렸다. 라미엘을 남작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분위기를 형성하려는 자와 그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들로.

하지만 그에 대한 호의도 악의도 모두 라미엘이 제국에서 가장 화제라는 반증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라미엘과 가까워지는 것이 이득이 될지 아닐지 빠르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나날이 높아만 가는데 남작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을 라미엘은 아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귀족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하는 필수, ‘성’이 없었다.

제국의 귀족들이 나열되어 있는 명부에도 오로지 라미엘, 세 글자가 전부일 뿐이었다.

필요성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에게 조언을 하는데도 라미엘은 성을 만들지 않고 오로지 이름으로만 불리고 있었다.

“그래서 예전처럼 지낸다고?”

“네. 작위 외에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라미엘의 말에 아이작이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전이랑 똑같으면 사람들이 너를 인정하지 않을 거야.”

아이작이 라미엘에게 조언했다. 그가 어떤 생각으로 지금과 같은 생활을 유지하는지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하지만 그럴수록 남작으로서의 위치를 상기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정말로 남작위는 허울뿐인 것이 되고 마니까.

제국에는 이미 그런 귀족들이 많았다. 작위를 가지고 있지만 가난해서 제대로 된 사용인 한 명 두지 못하는 가문. 그래서 일반 백성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귀족들이.

라미엘 역시 그렇게 될지 모른다.

“남작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줘야지.”

“참고하겠습니다.”

그래서 아이작은 걱정스러웠다. 그가 갑자기 분쟁이 난 곳으로 가겠다고 자원을 했을 때, 뭔가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돌아온 뒤, 작위를 얻는 것이 목적임을 깨달았다.

그가 무슨 이유로 작위를 원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받은 작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행동을 하는 것 같아 지켜보다가 결국 한마디 조언을 한 것이다.

그의 조언에 대한 라미엘의 대답은 뻣뻣했지만 아이작의 말에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이작의 조언은 일리가 있었다. 그의 말대로 이곳에 있더라도 남작으로서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사람들 역시 그를 남작으로 인정할 것이다.

존재감을 보여 줄 수 있는 곳. 뭐가 좋을지 라미엘은 고민했다.

라미엘은 돌아온 후로 내내 바빴다. 그래서 오드리아는 그가 돌아온 직후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오드리아가 연무장을 찾았다.

“라미엘은?”

연무장 안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지만 그중에 라미엘은 보이지 않았다. 오드리아가 아이작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 일이 좀 있다며 외출했습니다.”

“그래?”

오드리아의 얼굴에 아쉬움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본 아이작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무슨 일로 찾으십니까. 혹시 전할 말이 있으시면 저한테라도.”

“아냐. 나중에 하지.”

그녀는 괜찮다며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이게 몇 번째인지 모른다.

그녀가 라미엘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누군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찾아오려고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데, 이번에도 라미엘은 자리를 비운 후였다.

‘대체 어딜 간 거야.’

오드리아는 돌아오고 나서 달라진 라미엘에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 * *

페이지는 언제나처럼 매장 안을 둘러보고 난 후 작업실로 와서 새 드레스를 만들고 있었다.

이번에 황궁에서 연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그때 참석할 오드리아와 신시아, 그리고 쥬아나의 드레스를 제작해야 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바빴다.

하지만 서로 다른 스타일의 드레스를 만든다는 생각에 페이지의 얼굴은 밝았다.

“페이지 님. 손님이 찾으십니다.”

고용인의 보고에 페이지는 응접실로 향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라미엘……?”

손님은 라미엘이었다. 페이지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 봐도 오드리아는 없었다.

“혼자 온 거야?”

“네.”

라미엘은 어쩐지 민망해하는 것 같았다. 페이지는 라미엘이 개인적으로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페이지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무슨 일이야?”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부탁이라니, 페이지는 라미엘의 말에 호기심이 들었다. 오드리아가 없으면 눈도 마주치지 않던 라미엘의 부탁이 무엇일지.

“내게 부탁할 일이라, 그게 뭘까.”

페이지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라미엘을 빤히 바라보자 그는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외면했다.

사실 라미엘이 페이지에게 할 만한 부탁이라는 것은 한정적이었다. 아니, 그전에 그가 그녀에게 부탁할 만한 일이라는 것이 애초에 없었다.

“그래서. 부탁이 뭐지?”

페이지 역시 라미엘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가 남작이 되었다는 것도, 그로 인해 지금 가장 큰 화제라는 것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는 라미엘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라미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옷을 하나 맞추고 싶습니다.”

“옷……?”

물론 이곳은 오필리아 숍이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의 옷을 만드는 곳이고. 하지만 그의 부탁이라는 것이 옷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페이지는 당황했다.

“예. 연미복을 하나 맞춰 주셨으면 합니다.”

라미엘이 정중하게 부탁했다. 페이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따로 생각해 둔 스타일이라도 있어?”

“네.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건 오직 마담 페이지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

고민 없이 바로 돌직구를 던지는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두 사람은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오늘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는 국경 지역의 소란이 조용해진 것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그곳에서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라미엘 역시 참석할 예정이었다.

오드리아는 당연히 라미엘과 함께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제가 모시지 못합니다.”

라미엘의 뜻밖의 말에 오드리아의 눈이 커졌다.

“왜? 라미엘도 참석할 거잖아.”

“잠시 들를 곳이 있어서 조금 늦게 갈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알겠어.”

오드리아는 알겠다고 했지만 연회에 참석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내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라미엘이 돌아오고 나면 그때부터는 이전처럼 언제나 함께일 줄 알았는데, 그가 너무 바빠서 보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다.

“출발하자.”

오드리아는 마차에 타기 전까지 혹시나 해서 라미엘을 바라봤지만 그는 정중하게 그녀를 모신 뒤 마차에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나 지켜볼 뿐이었다.

오드리아가 탄 마차는 그대로 출발했다.

황제는 중요한 일이 있거나 할 때면 연회를 통해서 칭찬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래서 황제는 경사가 있을 때마다 종종 연회를 열었다.

이번에는 국경 지역의 성공적인 소요 진압을 기념하는 연회였다.

오드리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라미엘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았다.

‘왜 안 보이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있는 것인지 라미엘은 연회장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따라 그동안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나서지도 못했던 영식들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오드리아 영애, 오늘도 역시 아름답네요. 저는 웨실리 백작가의 벤자민이라고 합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느끼하고 뻔한 인사말부터 평범한 인사말까지 그녀에게 다가오는 이들은 다양했다.

“저는 유시온 후작가의 페트릭입니다.”

서로가 경쟁하듯이 오드리아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했다. 그들의 자기소개는 끊임없이 이어져 나중에는 누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최근 트루디 대공의 결혼과 제레미아의 약혼의 영향이었다. 지금까지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차마 다가가지 못했는데, 드디어 틈이 생겼다고 생각한 것이다.

오드리아가 적당히 미소를 지으며 거리를 두려고 하는데 연회가 무르익어 가고 있는 것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영식들은 물러나기는커녕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와 오드리아에게 춤을 신청했다.

“저와 춤을 추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번엔 저에게 영애와 함께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오드리아는 그들의 신청을 모두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미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지쳤다. 거기에 춤까지 추고 싶지는 않았다.

‘피곤해.’

이제 막 연회가 시작되었을 뿐인데 오드리아는 벌써부터 돌아가서 쉬고 싶었다. 적당히 인사하다가 모두 거절할 생각을 하며 억지 미소를 끌어모았다.

“저와 함께 춤을 추지 않겠습니까.”

이제 겨우 영식들을 모두 뿌리치고 혼자가 됐나 싶었는데 눈치 없는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죄송하지만…….”

오드리아가 거절하기 위해 입술만 끌어올린 채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뒤돌아봤을 때였다.

“오드리아 영애는 저와 추기로 했으니 포기하시죠.”

오드리아의 바로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그녀를 향해 능글맞은 미소를 짓고 있던 영식은 이미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오드리아는 설마,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방금 전까지 오드리아에게 다가왔던 영식을 노려보고 있었다,

“라미엘……?”

연미복을 입은 라미엘이 자연스럽게 오드리아의 옆에 나란히 섰다.

지금까지 그는 오드리아의 호위 기사였기에 연회장까지 동행을 하더라도 기사복을 입은 채 그 뒤를 지킬 뿐이라,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뿐 아니라 시원하게 앞머리를 뒤로 넘긴 모습이었다.

훤히 보이는 이마와 눈코입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어릴 때는 얼굴을 최대한 가리려고 했고 공작가에 오고 난 후부터는 괜찮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앞머리가 눈을 가릴 듯 말 듯한 상태를 유지해 왔었다.

그래서인지 시원하게 이마를 드러낸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라미엘은 여전히 방금 전 오드리아에게 다가온 영식을 위협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영식이 라미엘의 눈빛에 주눅이 들어 완전히 물러날 때까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오드리아의 놀란 눈이 라미엘을 향했다.

“오늘은 남작으로서 온 거니 그에 맞는 옷을 입은 것뿐입니다.”

라미엘이 입꼬리를 늘리며 말했다. 그의 연미복 차림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눈앞의 그는 눈이 부실 만큼 멋있었다. 모두가 넋을 놓고 바라보게 만들 정도로.

“저 사람…… 대체 누구야……?”

“이번에 작위를 받은 라미엘 남작이잖아.”

“맞다! 오드리아 영애의 호위 기사!”

영애들이 라미엘의 얼굴을 보고 감탄하는 것이 들렸다. 하지만 즉시 오드리아의 반대편 귀로 새어 나갔다.

다른 말들이 귀에 들어오기에는 라미엘이 너무 멋있어서. 오드리아 역시 홀린 듯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으니까.

라미엘은 오로지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오드리아는 연회에 참석할 때마다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워졌고 그녀가 떠나는 순간 절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원했다. 오드리아와 당당하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춤을 추고 싶다고. 그래서 아이작이 남작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고 충고했을 때 이 순간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당당하게 그녀의 옆에 서 있어도 되는 자리, 그녀의 손을 잡고 무대 위로 올라가 춤을 춰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모습을.

“저와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라미엘이 오드리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연회에 있는 모든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다. 오드리아는 아주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망설임은 잠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감돌았다.

“얼마든지.”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발에 물집이 잡히더라도 라미엘과 함께 춤을 출 것이다. 그녀의 대답에 라미엘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감돌았다.

“영광입니다.”

오드리아가 라미엘의 손을 잡고 무대로 향했다.

사람들이 동요하는 소리를 배경음악처럼 즐기면서, 오드리아와 라미엘은 서로 눈을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노래가 흘러나오고 서로의 손을 잡았다. 서로를 의지하며 발을 내딛고 팔을 살짝 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이 옷은 어떻게 된 거야?”

오드리아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라미엘의 연회복은 오드리아의 드레스와 마치 한 세트 같았다.

색과 디자인이 동일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란히 서 있으면 마치 처음부터 맞춘 것처럼 잘 어울렸다.

“마담 페이지에게 부탁했습니다.”

“페이지한테?”

오드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라미엘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라미엘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담 페이지에게 영애의 드레스와 어울리는 옷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가 일부러 페이지에게 연미복을 만들어 줄 것을 부탁한 것은 그녀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오드리아의 드레스를 만드는 게 그녀이기에.

오드리아는 배시시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라미엘이 그녀에게 찾아가 부탁하는 모습을 떠올리니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라미엘은 오드리아를 이끌었다.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두 사람은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다.

“오드리아 영애와 라미엘 남작이 함께 춤을 추다니.”

“라미엘 남작은 분명…….”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애들의 시선이 서로 오갔다. 한 영애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동안 뒤에서 지킬 때는 몰랐는데…… 저렇게 함께 있으니 분위기가 묘하네요.”

“잘생기고 아름다운 두 사람이 함께 추니 당연하죠.”

“그래도 서로 너무 가까운 게…….”

혼자 있어도 눈에 띄는 라미엘과 오드리아였다. 그런 두 사람이 함께 춤을 추니 모두의 이목을 끌어당겼다.

“설마…….”

그림이 되는 두 사람이 춤을 추는 모습을 본 귀족들은 그들의 상상력을 최대한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단순히 호위 기사여서 아닐까요? 눈치 없이 꼬여드는 것들로부터 지키기 위한.”

지금까지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영애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 말에 다른 귀족들 역시 그럴싸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들의 상상을 확인시켜 줄 사람은 없었다. 오드리아에게 물어볼 수도, 그렇다고 트루디 대공이나 신시아에게 물어볼 수 없으니까. 그저 가십거리를 즐기는 것처럼 흘려 넘기는 수밖에.

오드리아와 라미엘이 함께 추는 모습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역시 보았다. 그리고 신시아와 쥬아나 역시.

“저건…….”

“두 사람 저렇게 있으니까 잘 어울리네.”

쥬아나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제레미아는 그런 쥬아나의 말에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잘 어울리긴.”

제레미아가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돌아섰다. 그 모습에 쥬아나가 피식, 웃었다.

춤이 끝나고 두 사람이 무대에서 내려왔지만 더 이상 오드리아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바로 옆에서 라미엘이 그녀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덕분에 오드리아는 조용하고 오붓한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끝까지 그럴 줄 알았는데, 황태자가 당당하게 다가와 오드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춤을 추자는 것이다.

그는 라미엘의 존재를 투명인간 취급하고 있었다.

오드리아에게 다가온 황태자의 모습에 라미엘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가 연회에 참석해 오드리아의 곁에 있기로 결심한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지난 연회에서 황태자가 오드리아에게 접근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다시는 그가 접근할 수 없게 지키기로 결심했었다.

그런데 황태자는 또 오드리아에게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라미엘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지난번의 일은 아랑곳하지 않는지 황태자가 오드리아에게 춤을 권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드리아가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하려고 할 때였다. 라미엘이 그녀의 앞에 팔을 뻗으며 황태자를 향해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그의 눈은 이미 매섭게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만약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면 큰일이었다.

황태자가 라미엘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오드리아가 그깟 춤 한번 춰 주고 말지, 라는 마음으로 손을 뻗으려고 할 때였다.

“리아. 오랜만에 아빠와 함께 춰 주겠니?”

트루디 대공이 구세주처럼 다가와 허공에 살짝 뻗어 있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럼요. 얼마든지요.”

오드리아는 이때다 싶어 재빨리 트루디 대공을 향해 말했다.

갑자기 끼어든 트루디 대공에 의해 황태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덕분에 라미엘 역시 그를 향하던 시선을 거뒀다.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과 함께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때까지도 오드리아의 시선은 황태자와 라미엘을 향해 있었다. 혹시라도 모를 일이 걱정되어서.

하지만 곧 황태자가 신경질적으로 돌아섰다. 때마침 이어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한 곡 추고 트루디 대공과 함께 무대에서 내려오니 제레미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오드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황태자가 이곳을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오드리아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제레미아의 손을 잡고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갔다.

춤을 추는 내내 황태자의 시선이 집요하게 오드리아를 따라 다녔다.

제레미아는 오드리아와 춤을 추는 내내 황태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가 오드리아를 보고 있는 것이 매우 불쾌했다.

황태자가 의도적으로 오드리아에게 접근하려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그의 귓가에 경고음이 들렸다. 황태자를 조심하라고. 결국 연회 내내 세 사람은 오드리아를 둘러싼 채 보호했다.

제레미아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래도 황태자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다. 지난 연회 때부터 오드리아에게 자꾸만 접근하고 있었다.

‘무슨 속셈이지.’

제레미아는 황태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가 아주 조금이라도 오드리아에게 다가오려고 하면 막아설 생각이었다.

오드리아는 잠시 사람들의 관심이 흩어진 틈을 타서 연회장을 나왔다. 라미엘이 자연스레 그녀의 옆에 있었다.

“앞으로는 꼭 저와 함께 있으세요.”

라미엘이 심각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만 해도 불쾌하다는 얼굴이었다.

“걱정 마. 별로 신경 안 써.”

오드리아는 황태자가 무슨 짓을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무시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제발 좀 신경 쓰세요.”

라미엘의 목 안쪽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그는 애절하게 오드리아에게 빌 듯이 호소했다. 그 모습을 보며 오드리아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라미엘은 황태자에게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몰랐겠지만, 사실 오늘 연회에서 가장 시선을 끈 것은 라미엘이었다.

모두가 그를 힐끔거리며 다가오려고 했지만, 오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신경전 때문에 차마 다가오지 못한 것이다.

‘너나 조심해.’

오드리아는 그렇게 말해 주고 싶은 것을 애써 참았다.

실제로 최근 라미엘에게 관심을 가지는 영애들이 많았다. 오드리아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와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동안 호시탐탐 라미엘에게 다가오려는 영애들의 시도는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그 사실을 라미엘에게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괜히 그가 주변을 의식하는 것도 불쾌하니까.

“그래도 다행입니다. 제가 이제는 못 가는 곳이 없으니까요.”

“……?”

“오드리아 님이 가는 곳이라면 그곳이 오늘 같은 연회라도 제가 함께 있을 수 있으니 걱정이 조금은 덜합니다.”

라미엘이 남작이 되었고 연회에서 오드리아와 함께 춤을 추며 이목을 끌었지만 그는 여전히 오드리아의 호위 기사였다.

그의 말대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녀가 가는 곳에는 언제든 라미엘이 있었다. 오히려 달라진 것은 그 영역이 넓어졌다는 것 정도였다.

“이제 그만 좀 따라다녀.”

“오드리아 님을 지키는 게 제 일인데 그럴 수는 없죠.”

라미엘은 오히려 오드리아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오드리아의 걸음이 빨라져도 그가 보폭을 크게 해서 휘적휘적 걸으면 어느새 나란히 걷는 모습이 되었다.

“그런데 저 어땠습니까.”

“뭐가?”

갑작스러운 라미엘의 물음에 오드리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라미엘이 재킷을 탁 펼치며 늠름한 자세를 했다.

오드리아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쪽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라미엘은 지금 연미복을 입은 모습을 오드리아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라미엘.”

오드리아가 딱딱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라미엘은 그의 커다란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긴장했다. 그녀가 뭐라고 할지 불안해하면서. 어느새 바짝 다가온 오드리아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라미엘이 어깨를 움찔하고 떨었다.

“오늘.”

“…….”

라미엘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오드리아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그녀의 한쪽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엄청 멋있었어.”

“……!”

라미엘의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 오드리아를 향했다. 오드리아가 그를 향해 사랑이 가득 담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연미복을 입은 라미엘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면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그를 보자마자 순간 입을 벌리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빤히 쳐다볼 뻔했다.

연회 내내 오드리아는 라미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보다 더 눈에 띄어서 큰일이야.”

오드리아가 장난기 가득한 모습으로 걱정하는 척 말했다. 그 모습에 라미엘 역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요. 제가 있어서 오히려 더 돋보이셨겠죠.”

두 사람이 연회장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아직 연회는 한창 진행되고 있었지만 트루디 대공에 의해 신시아, 그리고 제레미아와 쥬아나와 함께 연회장 밖을 벗어나 황궁을 나왔다.

연회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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