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쥬아나를 향한 제레미아의 혼란을 눈치챈 것은 연무장에서 함께 훈련하는 기사들 중에서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눈치가 빠르고 제레미아와 친한 아이작이 제일 빨랐다.
매일같이 연무장에서 훈련을 하다 보면 상대의 컨디션이라든지 여러 상황들을 저절로 알게 되고는 한다.
그리고 아이작은 제레미아의 훈련 상대이기도 했다. 그와 자주 검을 맞대다 보면 다른 기사들보다 더 빨리 많은 것을 눈치채고는 했다. 제레미아가 평소와는 다르게 쥬아나를 생각하느라 종종 한눈을 팔았다.
“그거, 좋아하는 겁니다.”
아이작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어째서 그걸 모르냐는 한심한 눈초리까지 느껴졌다.
제레미아는 순간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보다는 아이작이 한 말이 더 충격이었다.
‘좋아한다고? 내가? 쥬아나를?’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가능성이었다. 제레미아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커졌다.
‘말도 안 돼…….’
하지만 그 말이 제레미아의 머릿속에 계속해서 맴돌았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강하게 부정하면서도 이상하게 그 말이 떠나지를 않았다.
“너 그 말 무슨 뜻이야.”
결국 스스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어긋난 화살이 향한 곳은 아이작이었다. 쓸데없는 말을 꺼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제레미아는 아이작을 붙잡고 화를 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제레미아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어째서 이렇게 아무것도 모를까.
“제레미아 님이 쥬아나 님을 좋아하시는 겁니다.”
그 사실이 타인인 아이작의 눈에는 보이는데 당사자인 제레미아만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여전히 그를 혼란스럽게 하는 말을 하는 아이작에게 분노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실은, 아이작의 말을 전부 부정할 수는 없어서, 자꾸만 마음에 걸려서.
쥬아나와 만난 날, 그녀가 떠나기 전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너는 네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하고 해.
쥬아나는 무덤덤했다. 그럴수록 그녀의 앞에서 어쩔 줄 모르겠는 제레미아였다.
요즘 들어 제레미아는 그녀를 대하는 것이 어색하고 어려웠다.
- 내가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 그게 누군 줄 알고!
제레미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얼굴이 흥분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 ……있어?
쥬아나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덤덤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 이, 있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은 말이었다.
- 누군데……?
쥬아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하지만 자신이 내뱉은 말에 당황한 제레미아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이 하필, 쥬아나여서.
최근 그녀를 떠올린 일이 많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이 계속해서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보니 어느새 하루 종일 그녀를 떠올리는 날이 많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그의 머릿속에 오로지 그녀뿐이었다.
제레미아는 이쯤 되면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쥬아나를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도 몰라 의심부터 한다는 게 웃기지만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언제나 쥬아나를 친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관계가 될 수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갑자기 그녀를 다르게 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제레미아가 지금까지 애착을 가지고 좋아하는 사람은 오드리아가 유일했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마음과 이성에 대한 마음은 다르고 제레미아는 다른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작의 충고에도 제레미아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그녀를 정말로 좋아한다고 해도 쥬아나가 아니라면 어떡해야 하지? 그녀는 심지어 자신과 결혼할 바에는 다른 사람과 하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결혼에 거부감이 더 강한 것은 쥬아나 쪽이었다.
제레미아가 감정의 혼란으로 헤매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오드리아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라미엘과 오랜 시간을 함께하면서 계속 외면하던 그녀처럼 제레미아도 쥬아나와 어린 시절부터 함께하면서 서로에게 특별한 우정을 유지해 온 탓에 그 이상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드리아의 눈에도 제레미아가 쥬아나를 얼마나 의식하는지 보이는데도.
오드리아는 제레미아가 혹시라도 자신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실수라도 할까 봐 걱정되어 조심스럽게 조언을 해 주었다.
“오빠가 싫은 게 아니라, 그 반대 아닐까요?”
“반대……?”
“쥬아나 언니에게는 오빠가 그만큼 소중하니까, 불편해지고 싶지 않은 거 아닐까요?”
오드리아의 말에 제레미아는 온몸이 엉망진창이 된 것처럼 강한 통증을 느꼈다. 그제야 깨달았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했던 쥬아나라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을.
‘아무래도 좋아하는 게 맞나 보군.’
낯간지러워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제레미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쥬아나가 다른 놈과 결혼한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으니까.
‘근데 리아는 어떻게 안 거지?’
자신도 알지 못했던 감정을 오드리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알고 있었다. 설마 오드리아에게 어떤 놈이 있는 것인가? 제레미아의 레이더는 곧바로 라미엘을 향했다. 하지만 그는 국경으로 떠나고 없었다.
“그야, 저는 오빠도 쥬아나 언니도 좋아하거든요.”
오드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제레미아는 더더욱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 사람 모두 저에게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알 수 있었어요.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걸요.”
오드리아의 말은 반은 진심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있을 때 유난히 빛났다.
오드리아의 말에 제레미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첫 번째는 오드리아가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우면서도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스러운데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어떤 식이든 알게 해 주었다는 사실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역시 리아는 존재 자체가 기적이야.’
제레미아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오드리아의 환한 미소는 제레미아에게 용기를 넣어 주는 것 같았다. 제레미아는 결심했다, 쥬아나에게 고백하기로.
하지만 언제나 거침없었던 제레미아는 의외의 순간, 쥬아나에게 고백을 하려고 할 때마다 세상에 다시없을 숙맥이 되어 말 한 마디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그웬이 옆에서 답답해하며 한 소리 하지만 제레미아는 그웬에게 버럭 할 힘도 없을 만큼 축 늘어졌다.
그런 그를 위해 오드리아가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도록, 최근 유행하고 있는 프라이빗한 공간이 있는 커피숍에 자리를 마련했다.
“오랜만이네.”
쥬아나가 먼저 아무렇지 않은 척 제레미아에게 다가왔다. 그동안 친하게 지내 왔던 것처럼. 순간 제레미아의 마음이 편해졌다.
“잘 지냈어?”
“솔직히 너랑 나랑 그런 걸 생각할 만한 게 없었잖아.”
쥬아나의 오랜만에 보는 미소에 순간 넋이 나간 나머지 제레미아의 입에서 말이 잘못 나왔다. 좀 더 안부를 나누고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내려고 했는데 변명부터 튀어나왔다.
“우린 처음부터 친구였잖아. 나는 그래서 우리 관계가 절대 변하지 않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너무 늦게 눈치챘다고, 그녀를 좋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너무 둔해서 늦은 거라고 에둘러 변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이 쥬아나에게 그렇게 들릴 리 없었다.
결국 쥬아나가 폭발하고 만 것이다.
“이제 그만해!”
쥬아나가 정색했다. 정말로 화가 난 것이다. 순간 제레미아는 자신이 실수한 것 같아서 뻘쭘해졌다. 어떡하지, 쥬아나의 눈치를 보지만 그녀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미안.”
“됐어. 이만 돌아갈게.”
쥬아나는 제레미아를 노려보더니 그대로 돌아섰다. 평소에도 다투다가 쥬아나가 토라져서 돌아가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것과 지금은 다른 상황이라는 것쯤은 제레미아도 알 것 같았다. 이대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쥬아나!”
제레미아가 다급하게 그녀를 불렀다. 쥬아나는 무슨 용건이냐며 제레미아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걸음을 멈췄다는 것이다.
“뭐야. 할 말도 없는데 부른 거야?”
쥬아나가 다시 가 버리기 전에 뭔가 말해야 한다. 제레미아는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입 안에 가득 담긴 말이 있는데 그걸 꺼내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더 이상 머뭇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눈을 질끈 감고 힘겹게 내뱉었다.
“조, 좋아해.”
쥬아나는 깜짝 놀랐다. 제레미아가 자신을 좋아할 거라고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혹시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제레미아의 얼굴은 절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사실 쥬아나는 오랜 시간 동안 제레미아를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티를 낼 수도 없었다. 제레미아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었고 아마 그 이유는 어린 시절 헤어져야만 했던 어머니의 존재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자신의 마음이 전달될 거라고는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돼…….”
쥬아나의 입에서 마음속의 생각이 새어 나왔다. 벌어진 입술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이거 진짜 현실 맞는 거지? 만약 이게 꿈이라면 그건 너무 잔인했다. 쥬아나가 눈만 깜박거리자 긴장을 넘어 숨도 쉬기 힘든 제레미아가 그녀의 눈치를 봤다.
“너 만약 그 말이 장난이면…….”
“이런 말을 장난으로 할 정도로 생각 없지는 않아.”
제레미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힘겹게 꺼낸 말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진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쥬아나에게 했던 행동들이 모두 후회됐다. 설마 저번 일 때문에 거절하려는 걸까? 설마 일 년 전에 했었던 행동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한번 생각하니 과거의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수도 없이 떠올랐다.
‘대체 왜 그딴 유치한 짓을 한 거야!’
후회가 됐지만 이미 저지른 일들이었다. 제레미아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쥬아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백을 받아 주기를.
쥬아나의 커진 눈이 조금씩 작아지고 벌어졌던 입술이 닫혔다. 그리고 제레미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미묘한 시선으로.
* * *
쥬아나와 제레미아의 관계는 변한 듯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틈만 나면 싸웠다. 저런 두 사람이 과연 괜찮을까 남들이 걱정할 만큼. 하지만 오드리아에게는 그런 두 사람의 눈빛에서 애정이 느껴졌다.
“후훗.”
오드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틈을 보이지 않던 제레미아 트루디, 그가 약혼을 한다. 상대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쥬아나였다.
“결혼은 조금 시간을 두고 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해.”
그런데 두 사람은 의외로 바로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다. 트루디 대공은 이유를 묻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제레미아의 뜻대로 해 주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트루디 대공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제레미아를 존중해서가 아니라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라는 것을.
쥬아나의 아버지는 결혼을 바로 하지 않겠다는 말에 실망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이 약혼을 한다는 말에 기꺼워했다. 트루디 공작가와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가문으로서 엄청난 기회였으니까.
쥬아나는 욕심이 많았다. 결혼을 하더라도 가문에서 자신이 배울 수 있는 것은 모두 배우고 싶었다.
그녀의 가문에는 오히려 과거의 이력과 독을 전문으로 한다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며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쥬아나는 그 반대였다.
언제나 위기에는 독이 쓰였다. 그것을 잘 쓴다면 그만큼 강한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쥬아나는 그 힘을 가지고 싶었다.
제레미아와 쥬아나의 약혼은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지 않고 오로지 두 가문만 참석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제레미아는 서툴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경건한 자세로 쥬아나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두 사람은 아직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쥬아나는 거의 트루디 공작가에서 살다시피 할 정도로 매일 방문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함께 식사를 하고 후원을 다 함께 걸었다. 그러다 기분이 내키면 정자에 자리를 잡아 차를 마셨다.
가족들이 다 함께 후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오드리아는 가족들보다 뒤에서 천천히 걷던 도중 깨달았다.
언제나 후원을 산책할 때면 오드리아의 양옆에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서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트루디 대공의 옆에는 신시아가 서 있고 제레미아의 옆에는 쥬아나가 있었다. 그리고 오드리아는 한 발짝 뒤에 있었다.
오드리아를 만나기 위해 공작가를 찾아온 페이지가 오드리아에게 말했다.
“서운하지는 않으세요?”
“서운……?”
오드리아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페이지를 바라보았다. 페이지는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 제레미아와 쥬아나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이제 오드리아 님만 남으셨으니까요.”
오드리아가 원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에 분명 서운할 일이 생길 것이다. 페이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드리아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서운한가?’
언제나 자신만 바라보던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더 이상 그러지 않아서? 오드리아가 네 사람의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오드리아의 생각을 깨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리아!”
“어서 오지 않고 뭐 해?”
“얼른 와.”
“여기에 앉아.”
제레미아가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키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레미아의 반대편에는 쥬아나가 앉아서 제레미아의 주책을 나무라고 있었다. 모두가 오드리아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오드리아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전혀.”
오드리아는 페이지를 향해 활짝 웃으며 대답하고는 그대로 가족들이 있는 정자로 향했다.
그렇게 정자로 향하는 오드리아의 모습 위로 햇빛이 내리쬐어 눈부시게 빛났다. 애초에 오드리아의 가족들은 그녀에게 서운함을 느낄 틈조차 주지 않았다.
서로 각자의 자리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오드리아는 그런 두 사람, 아니 네 사람으로부터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게 되었다. 오드리아는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서운하지는 않지만 원하기는 했다. 아빠와 오빠의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하는 것처럼 자신에게도 그런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라미엘이 보고 싶어졌다. 라미엘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어디 다친 곳은 없을까?
‘나도, 라미엘과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가족들의 행복한 모습 옆에 그녀와 라미엘이 함께하는 그림을 머릿속에서 그려 보았다.
* * *
바쁜 일을 마무리하고 오드리아와 신시아가 함께 있다는 소식에 후원에 들린 트루디 대공은 두 사람이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상해.”
트루디 대공이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신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트루디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뭐가 이상해요?”
신시아가 영문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트루디 대공이 깊은 고민에 빠진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몇 번이고 망설인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째서 뺏긴 기분이 들지?”
트루디 대공이 정말로 알 수 없다는 듯 진지하게 말했다.
“뺏겨요? 뭘요?”
신시아가 이번엔 더 모르겠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안 좋은 일이 생긴 건가? 마음 한편에 살짝 걱정이 들었다.
반면,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이 빼앗겼다는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확신이 들지 않지만.
“근데 누굴 뺏긴지를 모르겠어.”
역시나. 트루디 대공의 말에 신시아와 오드리아의 눈이 마주쳤다. 신시아 역시 눈치를 챈 것이다. 두 사람은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트루디 대공이 빼앗겼다는 것은 신시아와 오드리아 둘 다였다. 신시아와 오드리아의 사이가 부쩍 가까워진 것을 보고 트루디 대공이 질투를 하는 것이다.
다만 자신도 그 질투의 화살이 어느 쪽으로 향해야 할지를 알 수가 없어서 곤란한 것이다. 오드리아도 신시아도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왜 웃지.”
트루디 대공이 원망하듯 물었다. 자신은 진지한데 오드리아와 신시아가 즐거운 듯이 웃다니.
그런데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트루디 대공 혼자가 아니었다. 제레미아 역시 요즘 따라 기분이 묘했다.
“왔어?”
쥬아나가 왔다는 소식에 제레미아는 하던 일을 멈추고 그녀를 맞이하러 나왔다. 제레미아의 인사에 쥬아나가 반달 모양으로 눈을 접었다.
“응. 오드리아는 어디 있어?”
“뭐……?”
그런데 쥬아나는 제레미아에게 스치듯 인사하고 곧바로 오드리아를 찾았다.
쥬아나는 이전처럼 매일같이 공작가를 찾아왔다. 하지만 오늘처럼 공작가에 와서 찾는 사람은 제레미아가 아니라 언제나 오드리아였다.
오드리아와 신시아, 쥬아나는 마치 처음부터 진짜 가족은 세 사람이었던 것처럼 어울렸다. 덕분에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홀로 남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제레미아의 마음 역시 복잡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오드리아와 함께하고 싶을 때 역시 그 곁에는 신시아와 쥬아나가 있어서 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물론 배부른 핑계였지만.
결국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언제나처럼 피식 미소를 지었다. 열심히 자신이 앉을 자리를 차지하면서.
* * *
4번
트루디 공작가는 최근 꽃이 만개한 봄처럼 들떠 있었다.
메릴 역시 ‘신시아 님과 쥬아나 님이 계시니 공작가가 그 어느 때보다 밝아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오드리아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다 같이 있으니까 너무 좋아요.”
“나도 하루하루가 즐거워요.”
“나는 요즘 너무 많이 왔더니 여기가 내 집 같더라.”
쥬아나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가족이 많아지니 좋구나.”
“그래. 앞으로 자주 함께하자.”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역시 지금 이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가족이 늘어날수록 공작가에는 웃음이 늘어났다.
그럴수록 오드리아 역시 자신의 옆에 라미엘이 함께했으면 하는 마음이 커졌다.
트루디 대공의 옆에는 신시아가, 제레미아의 옆에는 쥬아나가, 오드리아의 옆에는 라미엘이. 여섯 사람이 다 함께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서로를 보며 행복하게 웃는 모습이 그려졌다.
‘지금이면…… 얘기를 꺼내 봐도 괜찮지 않을까.’
오드리아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바라보며 은근하게 입을 뗐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별거 아닌 일처럼.
“이제 저도 결혼을 하는 날이 오겠네요.”
트루디 공작가에서 이제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없는 것은 오드리아뿐이니 당연한 말이었다. 이 정도는 슬쩍 꺼내도 크게 놀라지 않을 것이다. 오드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
“……뭐?”
하지만 그녀의 예상은 틀렸다. 오드리아의 한 마디에 네 사람은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처럼 눈과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들의 반응에 말을 꺼낸 오드리아도 살짝 당황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그렇다 치고 신시아와 쥬아나까지 놀라다니. 어째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결혼이라니.”
트루디 대공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벌써부터 우리를 떠날 준비를 하는 거야?”
“리아…….”
애절한 목소리로 오드리아를 부르기까지 했다.
“오드리아도 결혼을 해야죠.”
신시아가 유일하게 오드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도 그녀만큼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오드리아가 그녀에게 희망을 보았을 때였다.
“언젠가 결혼을 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이제야 함께 살게 됐는데…….”
신시아의 애절한 눈빛이 오드리아를 향했다.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아쉬움이 뚝뚝 흘렀다.
“아직 함께한 시간도 너무 부족하고 앞으로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오드리아, 좀 더 천천히 생각해 보는 건 안 될까?”
결혼을 하게 되면 오드리아는 공작가를 떠나야 한다. 사실 가족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오드리아와 헤어지기 싫어서.
‘어쩌지, 이건 예상 못한 반응인데.’
가족들의 반대는 생각보다 격렬했다. 모두가 그녀와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리고 오드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좀 더 천천히는 언제까지고 무기한 연장될 거라는 사실을.
“……네.”
오드리아의 복잡한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이럴수록 라미엘과 함께하는 날이 멀어지게 될 테지만 그녀는 가족들의 사랑을 밀어낼 수 없었다. 오드리아의 대답에 가족들의 얼굴이 햇살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뭐. 다른 방법이 있겠지.’
오드리아도 가족들을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방으로 돌아온 오드리아는 서랍 안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함을 꺼내 열었다. 백년 된 나무로 만든 보석함의 고리에는 그녀의 머리색과 똑같은 영롱한 분홍빛 보석이 박혀 있었다.
보석함이 이 정도인데 그 안에는 얼마나 대단한 게 있을까 모두가 궁금해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오드리아의 손에 의해 열린 보석함 안에는 값비싼 보석이 아닌 여러 장 겹친 종이 뭉치가 담겨 있었다.
오드리아가 자리에 앉아 혹시라도 종이가 찢어질까 조심스레 하나씩 펼쳤다.
[오드리아 님. 저는 국경에 잘 도착했습니다. 비록 분쟁으로 어수선하긴 하지만 잠자리도 식사도 모두 좋습니다. 그러니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이곳에서 지낸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저는 생각보다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드리아 님도 부디 잘 지내세요.]
[오드리아 님이 보내 주신 편지를 받았습니다. 제레미아 님이 약혼이라니 깜짝 놀랐습니다. 축하드린다고 전해 주세요. 가족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저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전부 라미엘이 보낸 편지였다. 오드리아는 라미엘이 보낸 편지를 소중하게 보관했다. 혹시라도 편지지가 찢어지거나 잉크가 닳아 훼손될까 봐 한 장을 만질 때마다 깨진 유리를 다루듯이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처음 그 상태로 깨끗하게 보관한 편지를 잠이 오지 않을 때, 그가 너무 보고 싶어 우울한 날에 꺼내 보고는 했다.
편지 속의 라미엘은 언제나 잘 지낸다, 상황이 나쁘지 않다, 건강하게 잘 지내시라는 얘기들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볼 때마다 오드리아의 마음은 가라앉았다. 라미엘은 국경에서 힘들어도 혹은 부상을 당할지라도 오드리아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녀가 걱정할 만한 일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걱정 끼치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더더욱 보챌 수 없어서 그녀 역시도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오드리아는 라미엘에게 보내기 위해 종이 위에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겁고 우울한 얘기 대신 그날 있었던 소소한 이야기들을 적었다.
[오늘은 가족들과 다 함께 후원에서 차를 마셨어. 요즘 아빠도 오빠도 기분이 좋아 보여. 모두 어머니와 쥬아나 언니 덕분이지. 그래서 나도 결혼에 대해서 슬쩍 말해 봤는데…… 라미엘 미안. 아무래도 가족들을 설득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아.]
오드리아는 편지를 차마 더 써내려가지 못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하다 보니 두 사람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 이야기는 국경에 있는 라미엘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오드리아는 편지를 다시 쓰기 위해 새 종이를 꺼냈다.
[오늘은 라미엘, 네가 유난히 보고 싶었어. 벌써 거기로 떠난 지 한 달이 넘었네. 시간이 빨리 흘렀으면 좋겠다.]
결국, 편지는 여느 때처럼 그립다, 보고 싶다라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어느새 라미엘이 떠난 지 세 달이 됐다. 그사이에 달라진 것은 없었다.
가족들과는 여전히 화기애애했고, 그녀의 결혼에 대해서는 여전히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오드리아는 오늘도 평소처럼 라미엘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동안 라미엘이 보내온 편지도 다시 찬찬히 훑어 봤다.
라미엘의 편지는 여전히 잘 지낸다는 말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세 달 동안 편지가 꾸준히 온다는 것이었다.
규칙적으로 오는 편지가 그에게 큰 일이 없다는 것 대신인 것 같아서 그나마 위안이 됐다.
‘그래도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어.’
아무리 마음을 굳건하게 먹으려고 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 갔고 이제는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었다.
오늘까지는 멀쩡했다가 다음 날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곳이기에 불안감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편지를 쓰고 나면 언제나 이렇다. 온갖 생각이 복잡하게 떠올라 기분이 가라앉았다.
“오드리아 님. 제가 오늘 무슨 소식을 가져왔는지 아십니까?”
그런데 아이작이 유난히 들떠 보였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제가 말씀드리면 오드리아 님께서도 분명 놀라실 겁니다.”
아이작이 자꾸만 뜸을 들였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건가 싶었다.
“라미엘이 돌아온다고 합니다!”
아이작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잔뜩 들뜬 모습으로 말했다.
“……그렇구나.”
오드리아는 무심히 답했다. ‘역시 별거 아닐 줄 알았어.’라고 생각하면서 아이작을 보았다.
‘잠깐, 방금 전에 뭐라고 했지? 누가 돌아온다고 했는데?’
뒤늦게 아이작이 한 말의 의미를 되새겨 봤다. 오드리아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라미엘이 돌아온다고?”
오드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란 얼굴이 된 것을 보고 아이작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네. 돌아옵니다.”
“……!”
“심지어 그곳에서 활약이 엄청났다고 합니다. 라미엘 덕분에 상황이 빨리 정리되었다고 하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빨라도 반년은 걸린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아직 반년이라는 시간의 반밖에 오지 않았다.
“그러니 대단한 거지요.”
“……그렇구나.”
이제 곧 라미엘을 볼 수 있다니 얼떨떨했다.
“라미엘이 돌아올 때쯤이면 지금까지와는 많은 것이 달라질 겁니다.”
아이작은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된 것처럼 뿌듯해했다. 라미엘이 어릴 때부터 곁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모두 지켜본 그이기에 라미엘의 성장한 모습을 대견해하며 좋아했다.
“……그렇겠네.”
오드리아는 덤덤하게 말하려 했지만 그녀 역시 뿌듯함과 기대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돌아오는구나. 그것도 원하는 것을 이루고.’
벌써부터 라미엘이 돌아올 날이 손꼽아졌다. 빨리 시간이 흐르면 좋겠어. 오드리아의 마음이 붕 떴다.
국경지대에서 라미엘의 활약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전투가 지지부진하게 늘어지며 모두 지쳐 가고 있을 때, 적이 야간에 기습할 것을 예상한 라미엘이 오히려 반격을 해 상황을 단번에 뒤집었다고 한다.
게다가 잦은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라미엘은 수차례 위험에 빠진 동료들을 구하고 실패로 끝날 법한 기습을 성공시키며 전투를 종결시켰다.
그의 활약은 고작 말 몇 마디로 전해졌지만 오드리아는 지난 3개월 동안 라미엘이 그런 활약을 하기까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혹시 어디 다치지는 않았겠지?’
라미엘의 편지는 언제나 좋은 일로 가득했다. 아이작으로부터 그가 돌아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이제 만날 수 있다는 기쁨밖에 없었다.
그런데 만약 돌아온 라미엘의 모습이 이전과는 다르면 어떡하지. 그의 대단한 활약상은 몸을 사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텐데.
갑자기 그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덮쳐 왔다.
그때부터 오드리아는 라미엘이 돌아올 때까지 초조하게 기다렸다. 빨리 두 눈으로 직접 그가 건강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라미엘이 돌아온다는 소식은 공작가에서도 화제였다. 오드리아가 제레미아와 차를 마시고 있을 때였다.
“라미엘이 돌아온다는 거 들었어?”
제레미아가 라미엘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네. 아이작이 말해 줬어요.”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라미엘이 단숨에 정리했다던데.”
제레미아가 무심하게 말했다.
“대단하네요.”
“그래. 대단한 활약이었다지. 분쟁이 길어질수록 소요되는 시간도 돈도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니까.”
제레미아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보여 줬어.”
오드리아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는 찻잔으로 입가를 가린 채 라미엘을 떠올리며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얄밉게도 말이야.”
방금 전까지는 흐뭇하게 미소를 짓던 제레미아가 갑자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오드리아는 제레미아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원해서 국경으로 가더니 보란 듯이 해내는군.”
라미엘의 활약이 탐탁지 않은 것일까. 오드리아가 불안해졌을 때였다.
“뭐,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지만.”
제레미아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제레미아는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을 본 오드리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라미엘이 아무것도 모를 때부터 그를 직접 가르친 제레미아였다. 사실은 라미엘의 실력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인정하고 있었고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의 활약에 나름 대견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노예가 귀족이 되고도 남을 공적이야.”
“……?!”
“그놈이 원하는 게 무엇이든 아마 얻을 수 있겠지.”
제레미아는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인지 라미엘에 관한 말을 이어 나갔다. 순간 오드리아가 살짝 움찔했지만 곧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웃어 넘겼다.
* * *
그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부터 오드리아의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다. 하루가 한 달 같고 일주일이 일 년 같았다.
인고의 시간 끝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라미엘이 돌아오는 날이 찾아왔다.
모두가 라미엘은 늦은 오후가 되어야 도착할 거라고 말했지만 오드리아는 몰래 새벽부터 나와 그를 기다렸다.
라미엘이라면 잠도 자지 않고 달려올 것만 같아서.
그녀의 예상대로 라미엘은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멀리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오드리아의 심장이 점점 빨라졌다. 음악이 낮고 느리게 시작하다가 절정에 이르러 장내를 가득 채울 만큼 크고 빨라지는 것처럼.
그러다 라미엘의 눈코입이 또렷하게 보일 만큼 가까워지자 노래는 점점 더 느려지고 그녀의 쿵쾅거리던 심장 역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라미엘이 다가오는 걸음마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기다렸습니까.”
“…….”
라미엘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와서인지 피곤해 보였다.
“많이 기다린 겁니까.”
라미엘이 오드리아에게 다가가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함께 다가오던 오드리아가 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서 그가 다가오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럴수록 라미엘의 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저 다녀왔습니다.”
어느새 오드리아의 앞에 도착한 라미엘이 말했다. 한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하던 그녀가 천천히 팔을 뻗었다.
“몸은?”
오드리아가 다짜고짜 물으며 라미엘의 몸을 앞으로 뒤로, 옆으로 돌아가면서 살피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겁니까?”
라미엘이 당황하면서도 오드리아의 손길에 따라 빙글빙글 돌며 물었다.
“몸은 괜찮아? 다친 곳은 없고?”
“네. 전부 멀쩡합니다.”
“……정말?”
라미엘이 오드리아에게 팔을 내밀며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정말입니다.”
“다행이다…….”
안도와 동시에 라미엘을 향한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혹시 누가 눈치라도 챌까 봐 티내지도 못 하고,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고.”
“편지 보내지 않았습니까.”
“너는…… 편지로 괜찮았어?”
오드리아는 그동안의 걱정과 그리움에 대한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망울에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기다리게 하지 않겠습니다.”
라미엘이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때 잠겨 있던 목이 살짝 갈라지면서 오드리아가 말했다.
“약속 지켜.”
오드리아가 명령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네.”
라미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꼭……!”
너무 쉬운 대답에 오드리아가 눈에 불을 켜며 윽박지르듯이 재차 확인했다. 지키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노려보면서.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라미엘은 그런 오드리아에게 맹세했다. 그런데 이게 아니었는지 라미엘의 말에 오드리아의 눈빛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라미엘의 눈동자가 흔들릴 때였다. 오드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걸지 마. 그냥 목숨 걸지 말고 지켜.”
오드리아는 진지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오드리아의 심각한 얼굴이 라미엘의 눈에는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결국 웃음이 터졌다.
자신은 진지한데 라미엘이 웃음을 터트리자 토라진 오드리아가 라미엘에게 다시 경고를 했다.
“웃지 마.”
“네.”
이번만큼은 라미엘이 웃음을 꾹 참았다. 이런 사소한 일로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너무 좋았지만 이런 걸로 시간을 버리는 건 아까우니까.
“저 다녀왔습니다.”
라미엘이 다시 그녀를 향해 말했다.
“어서 와.”
오드리아가 라미엘을 향해 따뜻한 미소와 함께 그를 꽉 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