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5/48)

* * *

오드리아는 두 사람의 저녁 식사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했다.

“식사 잘하고 오셨어요?”

“그래, 잘하고 왔단다. 공작가에서 먹는 것처럼 입에 잘 맞더구나.”

트루디 대공에게서 무심하지만 분명 호의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야 오드리아가 그의 입맛을 신시아에게 알려 주었으니까. 그의 입에 잘 맞을 수밖에 없었다.

‘식사 자리는 나쁘지 않았나 보네. 다행이다.’

오드리아가 그게 단순한 식사 이상이 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에 입꼬리를 씰룩였다.

그래서 오드리아는 다음 날이 되자마자 바로 유스티오 후작가를 찾아갔다. 신시아에게 식사 자리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기 위해.

“어서 와요.”

신시아는 오드리아를 보자마자 웃으며 반갑게 맞이했다.

하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오드리아는 잔뜩 설레던 마음이 가라앉고 물어보려던 말을 할 수 없었다.

신시아가 자신을 보자마자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주는 모습에서 모든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역시 내 미련이었던 것 같아요.”

신시아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체념이 묻어났다. 기나긴 시간 동안의 미련을 정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오드리아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신시아는 오히려 식사를 함께한 것을 계기로 마음을 정리했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그녀를 찾아와 당돌하게 도와주겠다며 나선 것이 문제였던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그 말에 오드리아의 마음이 더 아파 왔다.

신시아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그 속내까지 아무렇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닐 테니까.

“오드리아. 도와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너무 든든했어요.”

신시아가 오드리아를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미소 바로 옆에 그늘이 여전히 있었지만.

“정말이에요. 그대 덕분에, 지금 이렇게 결정을 내릴 수도 있는 거예요.”

혹시라도 오드리아가 마음을 쓸까 봐 신시아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를 배려하고 있었다.

‘역시 안 되는 건가.’

오드리아는 차마 그런 그녀에게 응원도 위로도 할 수 없었다.

‘괜한 욕심이었던 걸까.’

두 사람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한 행동들이 오히려 신시아를 더 힘들게 한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 * *

그 후로,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 사이에 교류는 없었다. 정말 단 한 번의 식사로 끝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트루디 대공은 보좌관으로부터 유스티오 후작가에 대한 보고를 듣게 되었다. 다른 가문들의 주요 현황에 대한 통상적인 보고였다.

보좌관의 말에 따르면 유스티오 후작가의 주요 사업은 무역인데 최근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큰 손해를 입었다.

보좌관이 다른 가문에 대한 보고로 넘어가려고 할 때였다.

“유스티오 후작가가?”

트루디 대공이 되물었다.

“네. 몇 번이나 바다에서 배가 난파되거나 실종되어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게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 지금은 위험한 상황이 된 것 같습니다.”

무역을 하다 보면 물건을 실은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문제가 생기는 일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손해를 입는 것은 무역을 하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게 연달아 몇 번이나 발생한다면 사정이 달랐다. 한 번 배를 띄울 때마다 막대한 자본이 그 안에 실린다.

그런데 수익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계속해서 손해만 입게 된다면, 웬만한 가문은 버티지 못할 만큼 피해 막심한 일이다.

“그래서 지금 정확히 어떤 상황이지.”

트루디 대공이 유스티오 후작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자세히 물었다.

“일단 신시아 후작 영애께서 상황을 수습하시려는 거 같은데 그다지 진척은 없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알아볼까요?”

“상황을 지켜보도록 해.”

“네, 알겠습니다.”

보좌관은 유스티오 후작가에 대한 체크를 하며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유스티오 후작가는 트루디 공작가와 사업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는 몇 안 되는 가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트루디 대공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하긴…… 오드리아 님하고도 인연이 깊은 곳이니.’

트루디 대공이 유스티오 후작가의 사정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오드리아라면 저절로 납득이 되는 상황이었다.

보좌관은 하나라도 빠짐없이 알아봐야겠다고 결심하며 유스티오 후작가에 중요 표시를 잔뜩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유스티오 후작가는 발칵 뒤집혔다.

지금까지 보낸 배들이 연달아 전부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당장 융통 가능한 돈을 전부 끌어모아 보낸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유스티오 후작가가 그동안 다스리던 영지조차도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급박한 상황에 몸이 좋지 않은 유스티오 후작이 몸을 일으켜 움직이려고 했다.

“내가 직접 항구로 가겠다!”

“안 돼요! 지금 무리하시면 정말 큰일 나세요!”

“지금 상황이 이 지경인데 내 목숨이 대수냐!”

“저를 믿어 주세요! 어떻게든 해결을 할 테니까 아버지는 부디…… 몸을 챙기세요.”

“…….”

“아버지라도 제 곁에 있어 주셔야죠.”

신시아의 간곡한 부탁에 유스티오가 흔들렸다. 유스티오 후작이 가장 앞장서서 일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직접 항구로 나가서 상황을 살피고 해결책을 찾아낼게요.”

그녀는 든든하게 약속했지만 그럴수록 후작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그녀에게 가문을 잇게 할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모든 책임을 그녀의 어깨에 올릴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이 이러니 자연스레 신시아는 그의 몫까지 모두 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안타까웠다.

신시아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항구로 나가 직접 상황을 알아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땅한 방법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전부 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풍랑을 만나 배가 좌초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번이고 반복된다면 그건 자연이 아닌 인간의 짓일 가능성이 컸다.

신시아는 당장 닥친 문제를 해결하고 바다에서 유스티오 후작가의 배를 갈취하는 자들을 잡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잠재적인 후계자로 대접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작위도 수여받지 않은 영애로서는 벅찬 일이었다.

오드리아 역시 유스티오 후작가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녀도 사업을 해 본 적 있었다. 한때는 트루디 공작가의 일을 도맡아 하기도 했었다.

그러니 지금 유스티오 후작가의 상황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날씨가 문제였다면, 애초에 무리해서 보내지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미리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바다 한가운데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외부의 원인이 있을 거야.’

유스티오 후작가와 다른 가문 간의 이해관계, 이 일로 인해 이득을 취할 가문, 최근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상황들 모두.

하지만 그녀가 직접 움직이는 것은 너무 눈에 띄어서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기에는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의 관계가 마음에 밟혀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걱정을 하십니까?”

라미엘이 오드리아의 어두운 얼굴을 보며 물었다. 오드리아는 그에게 지금 유스티오 후작가의 사정에 대해 말했다. 그녀를 돕고 싶다고.

“저도 돕겠습니다.”

라미엘은 한 치의 고민 없이 말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겠다고. 하지만 오드리아가 섣불리 말하지 않고 고민하자 오히려 그가 재촉했다.

“저를 믿고 말씀하세요. 뭐부터 하면 될까요?”

오드리아의 부탁에 라미엘은 지체 없이 항구로 직접 나가 상황을 알아보았다. 그는 오드리아가 눈치채지 못한 것까지 직접 알아냈고 그 덕분에 상황을 더욱 자세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오드리아가 트루디 대공의 집무실을 찾아왔다. 그녀의 등장에 트루디 대공이 미소를 지으며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아빠. 부탁이 있어요.”

“그게 뭐지.”

“유스티오 후작가를 도와주세요.”

“…….”

“지난번에 저 역시 큰 도움을 받았어요. 그러니 저도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요.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빠에게 부탁하는 것뿐이니까요. 도와주실 수 있나요?”

“리아. 네가 원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은 어디에도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을 에둘러 부정하는 말이었다.

트루디 대공은 오드리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뜻대로 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해 생각을 좀 해 봤는데요.”

오드리아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는 것들을 얘기했다. 바다 위의 사정, 무역을 하는 상대국의 상황, 유스티오 후작가와 제국 내 다른 가문들 간의 이해관계 역시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구나.”

“유스티오 후작가가 이번 일로 피해를 입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드리아가 진심으로 걱정하며 말했다.

“그래야지. 걱정 말거라. 이미 거기에 관해 알아보고 있으니.”

트루디 대공 역시 유스티오 후작가에 대해 보좌관으로부터 추가로 보고를 받으며 오드리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출항했던 다른 가문의 배들에는 문제가 없었던 것이 그 증거였다. 유스티오 후작가의 배에만 문제가 몇 번이고 발생했다. 단순한 불운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이미 그와 관련한 조사를 지시한 상황이었다. 그의 말에 오드리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도울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거라.”

“네. 그럴게요.”

오드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트루디 대공이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상황은 곧 해결될 것이다.

오드리아가 걱정하고 있던 부분에 대한 조사는 이미 모두 끝나 트루디 대공의 집무실 책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유스티오 후작가는 지금 상황이 어떻지?”

트루디 대공이 보고서를 살피며 물었다.

“자금 부족으로 곤란한 상황입니다.”

지금 벌어진 일의 수습과 원인 파악도 중요하지만 가장 코앞에 닥친 문제는 바로 돈이었다. 당장 유통 가능한 돈이 부족하다 보니 상황이 더더욱 복잡하게 꼬여 가고 있었다.

“게다가 막상 문제가 터지고 나니 가주 대행인 신시아 후작 영애를 믿을 수 없다며 나서는 가문들도 있어서 아무래도 버거운 상황입니다.”

보좌관은 유스티오 후작가에 대해 구체적인 보고를 이어 나갔다. 트루디 대공은 그 보고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급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우리가 도와주지.”

“자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트루디 대공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직접 나서서 도우실 생각이십니까.”

보좌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트루디 대공이 그를 흘끗 바라보다가 보고서를 덮으며 말했다.

“유스티오 후작가는 이번 일이 어떻게 되든 정말 큰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거다. 다만 조금 난처할 뿐이지.”

그 정도로 휘청거릴 만큼 뿌리가 얕은 가문이 아니었다. 아무리 돈이 전부인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고 하지만 가문의 뿌리는 결국 가문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유스티오 후작가의 뿌리는 트루디 공작가만큼이나 깊었다. 그러니 지금의 위기도 한순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럴 때 도와주는 건 오히려 우리에게 이득이지, 절대 손해는 아니지.”

트루디 대공이 냉정하게 말했다. 유스티오 후작가에게 손을 내민다면 그곳은 절대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은 철저하게 계산된 특유의 말투 그대로였다.

보좌관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났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트루디 대공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의 말대로 이번 기회에 유스티오 후작가를 도와준다면 분명 나중에 도움이 되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

트루디 대공이 다른 가문이 트루디 공작가에 도움이 될지를 생각한 적이 있었나? 애초에 다른 가문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유스티오 후작가는 다른 가문과는 다르니까.’

보좌관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한 부분을 그렇게 납득했다. 사실 트루디 대공의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트루디 공작가가 손해를 보게 된다고 해도 그는 유스티오 후작가를 지원했을 것이다.

보좌관은 트루디 대공이 지시한 대로 유스티오 후작가를 돕기 위해 움직였다. 트루디 공작가의 이름으로 후작가에 지금 당장 필요한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도움에 유스티오 후작과 신시아 모두 깜짝 놀랐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어째서 도와주시는 겁니까?”

신시아가 돌아가려는 보좌관을 향해 물었다.

그녀는 한동안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여러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차마 트루디 공작가에는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다. 다급한 사정에 망설이기도 했지만 도저히 트루디 대공을 마주해 그런 부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신시아는 이 도움을 받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받으십시오. 어떤 조건도 없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요청하라는 대공 각하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보좌관은 신시아에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신시아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져만 갔다.

차라리 조건이라도 있었으면 마음이 한결 편안했을 것이다. 조건이 있다는 것은 거래였으니까.

하지만 일방적인 지원이라니. 그가 무슨 의도로 도와주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불편했다. 이렇게 또다시 그에게 도움을 받고 나면 그를 잊지 못할까 봐.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런데도 신시아는 거절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그가 내밀어 준 손이 너무나 간절하고 필요해서.

그리고 얼마 후, 트루디 대공이 연락을 해 왔다. 만나서 할 얘기가 있다며 공작가를 방문해 달라는 것이다.

신시아가 공작가를 방문했다.

그러자 오드리아가 가장 먼저 달려와 그녀를 반겼다. 그녀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걱정이 섞여 있었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신경 쓰이는 거라면, 부담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드리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불쾌하게 받아들일까 봐.

“마음만으로도 고마워요.”

신시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제야 깨달았다. 트루디 대공이 나서서 유스티오 후작가를 도와주는 이유를.

오드리아가 부탁을 해서였구나. 그럼 그렇지. 입 안이 텁텁해졌다.

신시아는 트루디 대공이 기다리고 있다는 집무실로 향했다. 그녀가 들어섰을 때 그는 서류를 보고 있었다.

“이번 일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나.”

“의심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벌어진 일들을 수습하느라 자세히 알아보지는 못하고 있지만, 상황이 좋아지는 대로 자세히 알아볼 생각입니다.”

신시아 역시 대강의 의심 가는 정황들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지금 바로 해결하지.”

“하지만 지금은 여건이……?”

지금 유스티오 후작가로서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신시아가 난처해하며 말을 할 때였다. 트루디 대공이 테이블 위에 문서를 올려놓았다.

“이번 일에 대해 알아본 것을 정리한 거니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군.”

조심스럽게 보고서를 한 장씩 넘겼다. 그 안에는 그녀가 의심만 하고 아직 자세히 알아보지 못한 것들이 상세하게 나와 있었다.

문서를 뒤로 넘기는 그녀의 손끝이 떨렸다. 신시아는 마치 치부를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다. 자신의 가문에 일어난 일을 미리 파악하지 못하여 이렇게 됐다는 사실에.

“이런 일일수록 원인은 최대한 빨리 뿌리 뽑는 게 좋지.”

시간을 지체할수록 범인과 증거들이 사라진다. 그것을 신시아 역시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도 미리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일이더군.”

트루디 대공이 신시아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그녀를 위한 변명을 대신해 주었다.

해적과 무역 상단이 짜고 친 일이었다. 바다 한가운데서 벌어진 일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이용해 자연재해로 위장해 저지른 일이다.

바다란 원래 그런 곳이다.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세계. 그래서 처음부터 의심할 수 없었다.

사실 신시아는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 대해 자책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너무 늦게 눈치채서 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었다고.

그래서 그녀는 지난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자고 강행군을 이어 오고 있었다.

그런데 트루디 대공의 무뚝뚝한 한마디가 신시아의 마음고생을 위로해 주었다. 순간 감정이 올라온 신시아는 눈앞에 있는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필요하면 내가 도와주지.”

트루디 대공이 먼저 제안했다. 사실 그는 이미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도 머릿속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독단적으로 움직일 경우, 신시아를 무시하는 게 되어 버릴까 봐 그녀에게 먼저 제안하는 것이다.

신시아는 잠시 망설였다. 여기서 더 이상 트루디 대공의 도움을 받는 것은 지나쳤다. 하지만 그가 도와준다면 이번 일은 확실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부탁드릴게요.”

신시아가 정중하면서도 결단력 있는 모습으로 그에게 말했다.

그녀가 지금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야 가문에 최대한 피해를 입히지 않고 이번 일을 수습할 수 있는지였다.

거기에 개인적인 감정이나 사정이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그건 유스티오 후작가의 후계자로서 그녀가 지켜야 할 자세였다.

“얼마든지.”

트루디 대공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길게 올라갔다.

처음으로 그의 눈에 신시아가 의젓한 후작의 대행으로 보였다. 그와 동등하게 나란히 설 수 있는 존재.

트루디 대공이 나서서 도와주자 문제가 해결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미리 준비한 것들을 지체 없이 실행시켰다.

곧 유스티오 후작가의 문장을 단 배가 출항했다. 무역에 필요한 재물이 아닌, 트루디 대공가와 유스티오 후작가의 기사들을 태운 채.

배가 바다 한가운데로 가게 되면 더욱 정확해질 것이다. 지금까지 후작가의 무역을 방해해 온 자들이 누구인지. 이제부터는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그때부터 트루디 대공은 한발 물러났다. 제국으로 붙잡혀 온 그들을 처리하는 것은 유스티오 후작가의 역할이었으니까.

이번 일은 유스티오 후작의 병세가 깊어지자 그의 보좌관이 타국의 상단과 손을 잡고 벌인 일이었다. 무역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데다가 땅을 디디는 시간보다 바다 위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증거를 남기지 않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결국, 이번 일을 저지른 자들에게 막대한 배상금이 청구되었고 미리 빼돌려 놓은 재물들은 트루디 공작가와 유스티오 후작가가 보낸 수색대에 모두 적발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불법으로 쌓은 재산이기에 제국에 몰수당했다. 사건의 전말을 아는 황제가 유스티오 후작가에 재물의 절반을 돌려주었다.

덕분에 유스티오 후작가는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유스티오 후작가의 배는 얼마 뒤에 다시 출항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무런 문제없이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올 것이다.

모든 일이 정상궤도로 돌아오자 신시아의 보고를 가만히 듣던 유스티오 후작이 낮게 읊조렸다.

“트루디 대공의 도움을 받았군.”

“네…….”

유스티오 후작은 조금 복잡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가문의 위기는 잘 넘겼지만 그게 자신의 딸에게도 좋은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번 일로 간신히 마음을 잡았던 그녀가 흔들릴까 봐 걱정되었다.

트루디 대공의 변덕과도 같은 도움이 신시아를 고려한 행동인지 아닌지 유스티오 후작으로서는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사실 그동안 신시아가 힘들어했던 것은 유스티오 후작가에 닥친 문제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이어 오던 감정을 끝내려 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돌아올 것 없는 짝사랑을 유지했을 때가 더 낫다 싶을 정도로.

유스티오 후작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시아. 내 몸이 불편하니 너라도 감사를 표하고 오거라.”

그래도 인사는 해야겠지.

“유스티오 후작가는 트루디 대공에게 빚을 진 것이다. 당장 갚지는 못하더라도 정중하게 감사를 표하기라도 해야지.”

“……네. 그럴게요.”

신시아가 유스티오 후작의 손을 꼭 붙잡으며 대답했다.

신시아가 트루디 공작가를 방문했다. 마음을 정리하기 전까지는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결국 이렇게 자신이 찾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만남은 사적인 것이 아니니까. 오로지 유스티오 후작가를 대표해 이번 일을 도와준 트루디 대공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다.

신시아는 마음을 가다듬고 트루디 대공을 만났다. 그를 만나자마자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번 일은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었습니다.”

“별일 아니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트루디 대공은 무심하게 답했지만 유스티오 후작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신시아는 다시 한번 정중하게 감사를 표했다.

“대공 각하께서 도와주시지 않았으면 아직도 곤란했을 겁니다. 유스티오 후작가는 이번 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

“아버님께서도 이번 일에 대한 감사 인사를 대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신시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을 끝내려고 했는데 이렇게 가문 간의 관계가 이어지게 되었다.

이렇게라도 이어져서 다행인지, 이렇게 미련을 끊어 내지 못하게 된 게 불행한 일인지 그녀로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트루디 대공의 얼굴을 보고 있는 순간만큼은 좋았다.

그때였다. 지금까지 꿈쩍하지 않았던 트루디 대공에게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다음엔 공작가로 초대하도록 하지.”

“네……?”

신시아의 목소리가 공허한 메아리처럼 울렸다. 그의 말이 현실성 없어서 와 닿지 않아서.

“앞으로 진행하게 될 사업에 대한 논의를 해야 하니.”

“지금 그 말은…….”

트루디 대공의 무심한 듯한 말에 신시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조심스럽게 묻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저희와…… 계속…… 함께하시겠다는 뜻인가요……?”

신시아는 말 한 마디를 꺼낼 때마다 힘겨웠다. 게다가 트루디 대공의 얼굴은 변화가 없어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더욱더.

“유스티오 후작가는 좋은 사업 파트너이니.”

트루디 대공의 확답에 신시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인연이 계속 이어진다. 그게 마치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의 인연인 것 같아서 그녀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리아가 그대와 함께하는 식사 자리를 좋아하는 것 같더군.”

비록 트루디 대공의 제안이 오드리아 때문이라고 해도 신시아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포기하려고 억누르고 있던 마음이 다시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럼 초대해 주시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신시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이후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의 교류는 계속되었다. 기존에 해 오던 것 외에도 새로운 사업에 대한 협력 얘기가 오고 갔다.

식사 후 차를 마시며 사업 구상을 하는 것이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었다. 달라진 상황은 신시아에게 헛된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여느 때처럼 트루디 공작가를 방문해 논의를 하고 돌아갈 때였다. 트루디 대공은 신시아를 저택 앞까지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돌아섰다.

신시아는 마차에 타지 않고 트루디 대공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최근 그녀의 마음이 일렁였다. 스스로의 마음을 억누르기가 힘들어져 갔다.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딱 한 번만 더…… 기대를 걸어 봐도 괜찮지 않을까? 굳게 닫혀 있던 그녀의 입술이 느릿하지만 아주 조금씩 벌어졌다.

“……제이.”

흐릿한 데다가 갈라진 목소리. 주위가 시끄러웠으면 그녀의 목소리는 그대로 묻혀서 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작고 여린 목소리는 트루디 대공에게까지 분명하게 전달됐다.

신시아는 긴장감에 양손을 꼭 붙잡고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트루디 대공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다. 신시아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무슨 일이지.”

“네……?”

그런데 트루디 대공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그녀를 향했다. 무심한 목소리, 언제나와 다름없는 목소리.

“방금 부르지 않았나.”

“……!”

트루디 대공은 여전히 덤덤하게 물었다.

트루디 대공의 이름을 불렀는데도 화를 내거나 싸늘하게 돌아서지 않았다. 오히려 무슨 이유로 불렀는지를 묻고 있다.

그녀는 얼떨떨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의 이름을 다시 한번 불러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트루디 대공이 돌아가는 것을 걱정하다니. 세상에서 가장 무의미한 인사를 하고 말았다.

하지만 신시아는 그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의 신경은 모두 한 가지 사실에만 꽂혀 있었기 때문에.

‘제이, 라고 불러도 되는 건가.’

그럼 그건 혹시……. 신시아는 한 가닥 희망을 품게 되었다.

트루디 대공은 사실 눈치채고 있었다. 오드리아가 신시아와 자신을 연결해 주기 위해 나름 애쓰고 있다는 것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드리아는 자신이 신시아와 잘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오드리아가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 주고 싶지만 이것만큼은 예외였다. 트루디 대공에게는 여전히 레이첼의 존재감이 컸고 그건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오드리아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래서 트루디 대공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이대로 두 사람이 포기하기를 바라면서.

그런데 트루디 대공의 결심이 흔들리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제이.”

익숙한 목소리가 트루디 대공의 귓가에 울렸다. 육 년 전에도 한번 불린 적 있었다. 그런데 그때와는 뭔가가 달랐다. 트루디 대공은 남몰래 놀라고 있었다.

지금까지 누군가가 자신을 ‘제이’라고 부르면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금까지 레이첼과 오드리아. 단 두 사람뿐이었다.

그런데 자신도 놀라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신시아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는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한 얼굴을 했지만 내심 속으로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그제야 트루디 대공의 시야에 신시아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같은 공간에 있어도 어디에 있는지 관심조차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트루디 대공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가끔씩 신시아의 얼굴이 떠오르고는 했다. 마치 무너진 둑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 * *

오드리아가 보기에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 사이에 조금씩 변화가 흐르고 있었다. 유스티오 후작가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 두 사람에게는 변화의 계기가 된 것이다.

‘어쩌면…….’

포기하고 있던 일이 이제는 현실화되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를 전적으로 응원할 것이다.

오드리아는 제레미아의 반응을 확인해 보기 위해 살짝 물어봤다. 제레미아는 트루디 대공의 결혼이라는 말에 처음에는 놀라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결혼……?”

제레미아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다는 얼굴이었다. 역시나 싫어하려나. 오드리아가 걱정할 때였다.

“뭐, 아버지 마음이지.”

의외로 제레미아는 덤덤했다. 그다지 관심 없다는 듯이.

“결혼한다면 역시, 유스티오인가.”

제레미아가 중얼거렸다. 그녀라면 나쁘지 않다는 뜻 같았다.

“리아. 너는?”

“저는 좋아요.”

오드리아가 제레미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뜻을 오해하지 않도록. 그런 오드리아를 제레미아가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래. 그럼 나도 좋아.”

제레미아가 미소를 지으며 오드리아의 눈을 맞추고 답했다.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은 오드리아와는 달리 제레미아는 레이첼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나이이긴 했지만 평생 받을 사랑을 받았다고 느낄 만큼 넘치는 애정을 받았다.

그러니 트루디 대공의 재혼 얘기에 레이첼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레이첼에 대한 그리움에 잠겨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실수를 두 번 다시 저질러서는 안 된다.

제레미아는 오드리아를 보며 되새겼다.

하지만 그 후로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 사이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역시나 트루디 대공은 너무나 높은 벽이었다. 신시아가 아무리 애를 써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신시아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지난한 시간에 대한 마무리였다. 신시아가 혼신의 힘을 다해 고백했다. 지난 십수 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지난 몇 번의 교류. 그 시간은 신시아에게 꿈만 같았다. 허망한 희망을 품을 정도로.

“이게…… 마지막이에요.”

신시아는 트루디 대공에게 말했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 고백을 끝으로 더 이상 트루디 대공을 붙잡지 않을 것이다. 완벽하게 포기하고 더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신시아는 그렇게 자신에게 되뇌었다. 하지만 손끝이 자꾸만 떨리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좋아해요. 지난 시간 동안 포기하지 못할 만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요.”

신시아는 트루디 대공의 눈을 흔들림 없이 마주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사력을 다해 꺼내는 고백이었다.

트루디 대공과 가까워지고 꾸준히 교류를 이어 가면서 신시아의 마음은 온탕과 냉탕을 수십 수백 번을 왔다 갔다 했다.

자꾸만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가 그녀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존재가 떠오를 때면 다시 포기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건 아무리 많이 반복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와 다른 점은 혼란과 갈등을 겪은 사람이 그녀 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트루디 대공 역시 신시아와 사업이라는 명분으로 만남을 이어 가며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변화를 맞닥뜨렸다.

그녀가 신경 쓰이고 자신의 말 한 마디에 표정이 바뀌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다 상처를 받은 모습을 하면 그다음부터는 그 표정을 짓게 하고 싶지 않아 조심스러워졌다.

대체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언제 이렇게 된 건지.

그의 심장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오드리아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수많은 감정들을 알게 되었다. 그게 지금의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트루디 대공이 신시아를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 ……마지막이에요.

트루디 대공은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녀의 한 마디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는 신시아와 계속 만나고 싶었다.

트루디 대공은 그런 신시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레이첼을 잊지 못해.”

그것은 트루디 대공의 심장에 각인되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에 관한 모든 기억이 소중하고 귀해서 잊을 수 없었다.

“……알고 있어요.”

역시나 생각했던 대로의 대답이 들렸다. 알고 있었지만 역시나 쓰린 말들에 신시아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신시아가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을 때였다. 가혹하게도 트루디 대공의 말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겠지.”

“…….”

신시아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눈물을 참는 것도 억지로 미소를 끌어올리는 것도 힘에 부쳤다.

“그래도 괜찮다면…….”

트루디 대공이 답지 않게 말을 끌었다. 트루디 대공이 신시아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나와 결혼해 주겠나.”

“……!”

신시아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이게 현실일 리 없었다. 꿈인 건가. 하지만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뒤죽박죽 어지러웠다. 그때 트루디 대공이 다가와 신시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아…….’

신시아는 어느새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동안 꿈만 꿨을 뿐 정말로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대답, 해 주겠소.”

트루디 대공이 신시아에게 다가와 물었다. 신시아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 힘겹게 말했다.

“……네.”

혹시 트루디 대공이 제대로 듣지 못했을까 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고,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그게 자신의 가장 큰 꿈이었다고. 언제나 우아하고 흔들리지 않던 신시아가 어린아이마냥 펑펑 눈물을 쏟았다.

트루디 대공은 갑자기 우는 신시아의 모습에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허공에서 방황하던 손길이 신시아의 어깨에 닿았고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신시아가 진정할 때까지.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가 결혼한다. 갑작스러운 발표에 귀족들은 물론이고 황제까지 깜짝 놀랐다.

가장 먼저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된 것은 역시 오드리아와 제레미아였다. 그런데 제레미아는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듣고도 별로 놀라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십니까.”

제레미아의 반응은 이것이 전부였다. 딱히 놀라지도 화를 내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런가 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게 전부인 건가.”

트루디 대공 역시 그의 무미건조한 반응이 신경 쓰이는지 물었다.

“그저 그런 것으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제레미아는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제레미아만의 인정이라는 것을 트루디 대공이나 오드리아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을 받아들이고 나름 축하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오드리아는 두 사람의 소식을 듣자마자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물론 꾹 참고 환하게 웃는 것으로 대신했지만.

“정말 축하드려요! 두 분 너무 잘 어울려요!”

“고마워요.”

오드리아의 축하에 신시아가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뻐했다.

“리아가 그렇게 말해 주다니…… 고맙구나.”

어느새 트루디 대공의 목소리가 촉촉해져 있었다. 그는 깊은 감동을 받은 표정이었다.

“제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트루디 대공을 제이라고 부르는 신시아가 그의 울먹이는 모습에 놀랐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이미 익숙한 오드리아와 제레미아는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오드리아는 방에 들어와 문이 닫히자마자 돌아서 라미엘의 품에 안겼다.

“오드리아 님?”

라미엘이 오드리아의 등을 감싸 안아 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드리아는 라미엘을 더욱 꽈악 안으며 설렘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이 결혼하신대.”

“그렇군요. 잘된 일입니다.”

“응. 정말 잘됐어.”

오드리아는 잠시 말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기뻐하다가 왜 그러지? 라미엘이 살짝 상체를 뒤로 젖히며 오드리아의 얼굴을 확인했다.

“……우시는 겁니까?”

오드리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너무 기뻐서…….”

두 사람이 잘되기를 계속 바랐으니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마냥 들뜨고 행복했다.

그런데 뒤늦게 밀려오는 수많은 감정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두 분이 함께 행복해질 수 있어서 다행이야.’

처음에는 라미엘과 결혼하기 위해 가족들에게도 함께할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그런 마음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사랑하는 가족들이 행복해졌으면 했다.

그런데 바라기만 한 일이 현실이 되었다. 그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특별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오드리아가 가족들의 일에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라미엘은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저도 오드리아 님이 좋아하셔서 기쁩니다.”

라미엘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오드리아의 젖은 눈가에 입을 맞췄다.

한편, 두 사람의 결혼 소식에 모두가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신시아의 아버지 유스티오 후작의 마음은 복잡했다.

자신의 딸이 오랜 시간 짝사랑을 해 온 상대였다. 그는 제국에서 황제도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오랜 시간 잊지 못한 전부인과 자식들이 있었다.

그동안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기에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많은 것들이 마음에 걸렸다.

특히,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의 결혼이 발표되자마자 많은 귀족들로부터 축하 선물이 쏟아졌다. 이 선물들이 오로지 순수한 마음의 선물이 아니라는 것은 뻔했다.

‘이게 과연 좋은 일일까.’

유스티오 후작은 회의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 결혼을 반대할 수는 없었다. 신시아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유스티오 후작은 결국 자신의 소중한 딸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트루디 대공은 그런 유스티오 후작의 마음을 아는지 신시아 몰래 찾아왔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말은 그게 아니오.”

트루디 대공이 유스티오 후작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원하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리고 유스티오 후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 것 같았다.

“신시아 영애를, 좋아합니다.”

자신의 딸이 사랑받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마음. 유스티오 후작은 그제야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주 놀러 오십시오.”

“하하. 그럼 매일같이 갈 수도 있는데.”

“그러셔도 됩니다.”

“말이라도 고맙네.”

후작의 목소리에 물기가 있었다. 괜히 목이 막혀서 헛기침을 했다.

트루디 대공의 말이 빈 말이라고 해도 그는 감회가 남달랐다. 어릴 때부터 남다르게 영민하고 아름다운 딸이었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딸의 상대가 누가 되더라도 아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딸이 트루디 대공을 좋아한다고 했을 때 얼마나 참담했는지 모른다. 그가 결혼을 했었고 아이들이 있는 것도 걸렸지만, 그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런데 결국 신시아는 트루디 대공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가 누구인지를 떠나 그토록 잊지 못하던 사람과 행복해질 수 있어서, 그리고 그가 진심인 것 같아서, 지난 십여 년간의 근심이 녹아내렸다.

트루디 대공이 유스티오 후작을 만나러 온 것은 오드리아의 영향 때문이다. 오드리아가 결혼해서 떠난다고 생각해 보니 유스티오 후작이 어떤 마음일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귀족들, 그중에서도 특히 귀부인과 영애들 사이에서 신시아가 트루디 대공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가망 없는 외로운 짝사랑이기에 모두가 티를 내지 않았을 뿐.

그런데 그 결실이 이뤄지다니. 많은 사람들이 축복을 보냈다. 물론 그중에는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신도 시도해 볼걸 하는 아쉬움과 시기 역시 공존했다.

“대단하네요.”

“정말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몇몇 귀부인들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감탄했다.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 유스티오의 결혼이었다. 모두가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한 결혼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은 양 가문만 참석한 채 조용하게 진행되었다.

오드리아는 두 사람을 축하해 주기 위해 신시아의 드레스를 직접 준비했다. 오로지 신시아만을 위한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운 드레스를.

“페이지와 함께 만든 드레스예요. 결혼 축하 선물로 꼭 드리고 싶었어요.”

“직접 만든 드레스라니…… 너무 고마워요.”

“한번 입어 보시겠어요?”

“그럴까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페이지가 신시아와 함께 드레스를 갈아입으러 옆방으로 향했다.

신시아가 드레스를 갈아입는 동안 트루디 대공이 초조한지 다리를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오드리아가 남몰래 미소를 지었다.

그사이에 문이 열리고 드레스를 입은 신시아가 들어왔다.

“…….”

실크 원단이 신시아의 몸매를 드러낼 듯 드러내지 않고 몸에 휘감겼다.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드레스에 최소한으로 사용한 보석 장식과 레이스, 얼굴을 반만 가린 면사포까지.

흔한 웨딩드레스는 아니었다. 하지만 오직 신시아만을 위해 만든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드레스였다.

“어때?”

신시아가 부끄러워하면서도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너무 잘 어울려요!”

오드리아가 감탄하며 말했다.

“……아름답군.”

계속 아무 말도 없었던 트루디 대공이 넋이 나간 듯 멍하니 말했다.

“너무 기뻐요.”

신시아가 행복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미소 짓던 얼굴 위로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떨어졌다.

“어? 갑자기 왜 이러지…….”

신시아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당황했다. 하지만 눈물은 멈출 생각 없이 더욱더 흐르기 시작했다. 오드리아는 신시아의 얼굴에서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아서 조용히 물러났다.

문이 닫히기 직전, 트루디 대공이 신시아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안아 주는 것이 보였다.

오드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트루디 공작가에서 진행되었다. 플로렌스 홀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을 축복하기 위한 장소로 탈바꿈했다. 많은 하객이 참석한 것도, 화려한 결혼식도 아니었다.

하지만 넘치도록 충만한 사랑이 있고 아름다운 꽃들과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신시아와 트루디 대공이 있었다. 그렇기에 결혼식은 어느 때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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