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1/48)

chapter 14. 공작가의 실세

마약 화장품 사건의 영향이 미친 곳이 하나 더 있었다. 불법 약물의 오남용을 막기 위해 제국에서 직접 시행하는 인증 절차가 생겨난 것이다.

오드리아는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는 대중을 상대로 한 제품에 불법 재료나 약물이 사용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제도의 필요성을 제안했다.

“특히 이번 일로 사람들은 제품 성분에 대한 경각심이 생겼어요. 이럴 때 믿을 수 있는 곳에서 인증을 받은 물건이 있다면 사람들은 믿고 쓸 수 있을 거고, 관련 사업을 하는 쪽에서도 제품 홍보를 위해 인증제를 적극 이용하게 될 거예요.”

오드리아가 트루디 대공에게 인증 제도의 필요성과 그로 인해 생길 현상에 대해 피력했다.

대공은 결코 오드리아의 말을 흘리는 법이 없었고 그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한 후에 실제로 진행하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전면에 나선 것은 오필리아 숍의 마담 페이지였다. 페이지는 제국과 릴스테인 후작가가 연계해서 만드는 인증 절차에 대해 실제로 운영을 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 효과적인 방법 등에 대해 많은 의견을 제시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뒤에 오드리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번 마약 사건을 알아내서 해결한 사람이 오드리아 영애라면서요?”

“제가 그 현장에 있었어요.”

신시아가 주최한 티 파티에 참석했던 한 영애가 그날의 일을 치를 떨며 말했다.

그날 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아직까지도 그 충격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에이미처럼 될까 봐.

“게다가 이번에 제국에서 주도해서 만든다고 하는 인증 절차 역시 오드리아 영애가 대공 각하를 직접 움직인 결과라고 해요.”

“아직 어린 영애인데, 벌써 이런 일들을 하다니 대단하네요.”

“어리다뇨. 이제 누가 오드리아 영애를 어리게 볼 수 있나요.”

“맞아요. 감히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죠.”

소문은 급속도로 퍼졌다. 물론 그게 전부 사실이기는 했지만.

이번 사건이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오드리아의 위상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모두가 그녀를 향한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다.

* * *

오드리아는 에이미와 노엘의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도 한동안 바쁘게 지내야만 했다.

인증 제도를 제정하는 실무자 중에 하나로 페이지가 선정된 이후, 오드리아는 거의 매일 페이지와 함께 인증제에 대해 검토하고 개선점을 살폈다.

그뿐 아니라, 릴스테인 후작가에서 지원해 준 마약의 해독제가 피해자들에게 모두 적절하게 처방되었는지, 혹시라도 창피함에 그 사실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 없는지 살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도 밖으로는 퍼지지 않아 수요 파악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번 일의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귀족들 사이에서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에 수도 안의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이럴 때야말로 황제의 특기가 발휘될 때였다.

성대한 황궁 연회가 열렸다.

황제의 언질이 있은 만큼 오드리아와 제레미아, 대공 역시 참석할 예정이다.

이번 사건에 공이 있다고 해도 모두가 전면에 드러나지는 않았다. 특히 신시아와 쥬아나의 경우에는 약간의 조력을 했을 뿐이라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신시아와 쥬아나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을 어떤 식으로든 보답하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신시아가 오드리아에게 호의를 보인 것은 트루디 대공 때문이다. 어린 시절 오드리아가 우연히 목격했던 것을 떠올린다면 더더욱.

“이번에 신시아 님께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그렇구나.”

그래서 오드리아는 황궁으로 출발하기 전 일부러 트루디 대공에게 신시아에 관해 얘기했다.

트루디 대공은 오드리아의 말에 무심하게 대꾸하며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역시 이걸로는 힘드려나.’

오드리아는 두 사람 사이를 이어 주거나 중간에서 어떻게 해 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신시아의 존재를 떠올리게 해서 아주 작은 기회라도 주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트루디 대공이 원치 않는다면 오드리아도 어쩔 수 없었다.

“트루디 공작가에서 도착했습니다!”

문지기의 보고와 함께 언제나처럼 가운데에 있는 오드리아를 중심으로 양쪽에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서서 입장했다.

막 입장했을 뿐인데 오드리아는 바로 알아차렸다. 이전과는 달라진 분위기를. 처음 황궁 연회에서 데뷔 무도회를 치렀던 오드리아와 이번 황궁 연회에 참석하는 오드리아의 위치는 사뭇 달랐다.

그때는 대단한 가문의 영애라 할지라도 모든 것이 처음이라 서투른 어린아이였다면 지금은 제국의 엄청난 사건이 될 뻔한 일을 해결한 존재로서 거듭나 있었다.

언제나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양옆에서 보호하듯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새 오드리아 역시 두 사람 사이에서 당당하게 서 있었다.

역시 트루디라는 성에 어울리는 존재라는 것을 모두에게 각인시키는 순간이었다.

놀라운 것은 한때 에이미의 화장품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오드리아를 멀리했던 영애들의 재빠른 태도 변화였다.

민망함이라는 단어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태연하게 오드리아에게 다가와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드리아 영애. 이번 일에 활약이 대단했다면서요.”

“영애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그래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닌지 영애들의 손이 자꾸만 얼굴과 목 위로 올라왔다. 겸연쩍은 듯 목을 매만지는 모습을 보면서 오드리아는 미소를 지었다.

“저 혼자 한 일이 아닌걸요.”

오드리아는 정중함과 예의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거리감 역시. 이미 오드리아는 영향력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더 이상 모두와 어울릴 필요도 받아 줄 이유도 없었다.

지금 오드리아에게 필요한 것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이다. 그리고 두루두루 관계를 유지하는 것. 오드리아는 영애들을 향해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인사하며 돌아섰다.

오드리아는 신시아와 쥬아나를 발견하자마자 활짝 웃으며 다가갔다. 이번 일로 세 사람 사이에서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끈끈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오늘 오드리아의 인기가 대단하네.”

쥬아나는 언제나처럼 가식 없이 직설적인 화법으로 말했다. 그만큼 오드리아를 편하게 여긴다는 뜻이기에 좋았다.

“큰일이 있었는데 피곤하지는 않나요?”

신시아는 지금 화제인 것보다도 오드리아를 걱정해 주었다. 신시아도 쥬아나도 각자의 방식으로 오드리아를 생각해 주는 것이 느껴졌다.

“두 분은 혹시 저를 도와주시다가 곤란해지지 않았나요?”

대외적으로는 모두가 호의적이었지만 혹시 가문 내에서 곤란한 상황이 생겼는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그 일 이후에 너무 바빠서 만나지도 못했기 때문에 확인차 물었다.

“옳지 못한 일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바로잡는 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신시아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서 품위와 위엄이 느껴졌다.

“저는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을 왜 먼저 알아차리지 못했냐고 혼났어요. 아버지께서 관리가 소홀해졌다고 어찌나 성화신지.”

쥬아나는 아직도 아버지의 고함 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는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약을 전문으로 하는 가문이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어 소동이 있었던 듯했다.

그 모습에 오드리아와 신시아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세 사람이 한창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장의 보고와 함께 연회에 참석한 모든 귀족들이 행동을 멈추고 황제가 입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황제는 모두의 앞에 나서 짧은 인사말을 했다.

“비록 안 좋은 일이 있었지만 지혜롭고 영리한 영애의 발 빠른 판단 덕분에 일이 커지기 전에 마무리할 수 있었다. 오늘은 이번 일에 손을 보탠 자들을 치하하기 위한 자리니 모두 즐기도록!”

연회는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처음에는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는 했지만 음악과 춤, 그리고 와인과 샴페인이 함께 있으니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오드리아는 조금 곤란하다고 느꼈다. 그녀를 향한 관심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쏠려 있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 황제가 직접 그녀에게 다가오다니. 시선이 더욱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드리아 영애.”

황제가 그녀를 불렀다. 그는 미소를 띤 채 뭐가 즐거운지 오드리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오드리아는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황제는 그런 오드리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분 좋은 얼굴로 여전히 오드리아를 바라보았다.

“소문으로만 듣던 영애를 이리 보니 반갑군. 이번 일에 대해서는 감탄했어.”

“과분한 말씀입니다.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드리아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황제는 오드리아를 치켜세우고 있었지만 오드리아는 가시밭길이 이보다 더 편할 것만 같았다. 황제가 오드리아를 보더니 호탕하게 껄껄거리며 웃었다.

“겸손도 지나치면 독이지. 이미 모두가 아는 일인데 괜한 겸손을 떨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저 혼자서 할 수 없었던 일이니 겸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그저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렸을 뿐이지 다른 분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

황제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오드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시선은 여전했다. 혹시 무슨 실수라도 했나, 살짝 걱정이 될 때였다.

“이래서인가.”

“……?”

“공작가의 실세는 트루디 대공도 제레미아 트루디도 아닌 오드리아 트루디라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

오드리아의 눈이 커졌다. 황제의 앞인 것도 잊고 입이 살짝 벌어졌다. 설마 황제의 입으로 그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그녀의 모습에 황제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이만 물러날 테니 마음껏 즐기도록.”

“…….”

그는 그녀에게 말한 대로 자리로 돌아가서 앉은 뒤로는 옥좌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는 한참이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혼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유난히 지친 기분이 들어 오드리아는 잠시 연회장에서 벗어나 주위를 걸으며 바람을 쐬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드리아에게 이목이 집중되다 보니 연회 내내 긴장이 돼서 몸에 힘이 들어갔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여유를 느끼는데, 오드리아의 발걸음이 멈췄다.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가 함께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왠지 봐서는 안 될 것을 자꾸만 보는 것 같았다.

‘돌아가자.’

하지만 오드리아는 돌아가지 못했다.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눌지가 궁금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엿듣는 것을 택했다.

“우리 리아를 도와줬다고.”

“……정말 별거 아닙니다.”

“고맙군. 다음에 보답을 하도록 하지.”

연회에서 트루디 대공이 신시아에게 감사를 전했다. 평소의 우아하고 흔들림 없는 신시아라고는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오드리아는 그 모습을 멀리서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역시 신시아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보답은 이거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그럼! 그 보답을 제가 정해도 될까요?”

신시아가 트루디 대공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트루디 대공의 고개가 살짝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후작가에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뇨, 그런 것보다는…….”

신시아는 말끝을 흐리며 애먼 입술만 깨물었다. 입술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듯이.

“그럼 원하는 보답이 뭐지?”

이런,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 사이에 존재하는 대화의 균열을 알아차리곤 안타까웠다.

트루디 대공의 보답은 지극히 공적인 것이다. 이번 일에 대한 보답으로 유스티오 후작가에 문제가 생기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갚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시아가 원하는 보답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이겠지.’

신시아 영애는 잠시 고심을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 저택에 방문해 주세요.”

“유스티오 후작가에?”

트루디 대공이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신시아는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 저희 아버님께서는 몸이 좋지 않으셔서 거동하시기가 힘들답니다.”

“그게 어째서 보답인 거지.”

무심한 목소리에 신시아가 움찔했다.

“대공 각하께서 방문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유스티오 후작가에 힘을 실어 주시는 것이니까요.”

트루디 공작가와 유스티오 후작가가 우호 관계를 이어 가고 있다고 다른 가문에 비쳐지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말하는 신시아는 어엿한 유스티오 후작가의 후계자로 보였다. 씩씩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한 모습.

혹시라도 트루디 대공이 부담을 느낄까 봐 애써 숨기는 것이겠지. 오드리아는 그녀의 마음이 한눈에 보였다.

“그러도록 하지.”

트루디 대공은 별다른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신시아의 입가에 사르르 미소가 감겼다. 고작해야 가문을 핑계로 하는 만남인데도 그녀에게는 특별한 것이다.

* * *

괜히 돌아왔다.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발견한 오드리아는 생각했다.

한눈에 봐도 다른 귀족들보다 더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을 전신에서 뿜어내고 있는 남자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오드리아 영애.”

그가 오드리아에게 아는 체를 하며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갑자기 왜 친근한 척 다가오는가 싶었지만 오드리아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이번에 그대의 활약이 대단했다고 들었소.”

“과장된 얘기입니다.”

황태자는 이번 일을 꺼냈다.

“그럴 리가. 폐하께서도 칭찬하시던데. 대단한 영애라고 말이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대화였다. 그런데도 오드리아는 황태자와 나누는 몇 마디 대화조차도 왠지 불편했다.

황태자는 대화가 끊을 생각이 없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오드리아는 그만 돌아가고 싶었지만 황태자를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 없었다. 오드리아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에 최대한 간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웃음을 흘리며 빤히 바라보는 노골적인 시선은 모른 체한다고 해서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의미 없는 이 지루한 대화를 끝낼 생각이 없어 보이자 오드리아는 점점 참아 내기가 힘들어졌다.

슬슬 인내심이 바닥을 향해 가는데 황태자가 눈을 반으로 접으며 말했다.

“나와 함께 춤을 추지 않겠소?”

황태자가 오드리아에게 손을 내밀며 제안했다. 누가 봐도 알 수밖에 없는 치근거림이었다.

황태자가 상대면 영광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드리아는 지난 수년 동안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보고 자랐다. 거기에 라미엘까지 더해졌으니, 오드리아의 눈이 높은 것이 당연했다.

오드리아의 미간이 좁아지려 씰룩거릴 때였다.

“저기 좀 봐요. 황태자 전하와 오드리아 영애가 같이 있어요.”

“어머,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씩 모여들었다. 황태자와 오드리아 트루디의 만남은 저절로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오드리아가 그의 제안을 최대한 정중하게 거절하기 위해 천천히 입을 뗐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서로 반대편에 있었던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그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동시에 오드리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마치 황태자가 오드리아에게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아 격리하려는 듯했다.

“리아. 여기서 뭐 해. 계속 찾았어.”

제레미아가 오드리아와 시선을 맞추며 자연스럽게 황태자가 그녀를 보지 못하도록 시야를 차단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트루디 대공은 황태자를 향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며 그를 향해 입술을 뗐다.

“황태자께서 무슨 일로 우리 리아 와 함께 있는 거지.”

오드리아에게는 상냥하게, 황태자에게는 쌀쌀맞은 목소리가 울렸다.

“가볍게 인사 몇 마디 나눴을 뿐인데, 대공은 왜 이리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오?”

황태자 역시 지지 않았다.

“지금 이 시간을 좀 더 즐겨 보자는 건데, 문제라도 있는 게요?”

심지어 그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울컥할 만한 말을 하며 도발을 서슴지 않았다. 오드리아는 어쩐지 불안해졌다.

역시나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어느새 꽉 쥐고 있는 손등 위로 핏줄이 터질 것처럼 튀어 올랐다.

“황태자께서는 아직도 어리군.”

트루디 대공이 경고했다. 그의 서늘한 음성에 순간 움츠러들었던 황태자가 자존심이 상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트루디 대공. 아무리 그대라 해도 감히 내게 무슨 짓이오.”

황태자 역시 갑자기 자신을 훼방하는 트루디 대공을 보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조금씩 주위에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오드리아가 트루디 대공의 옷깃을 살짝 잡아당겼다. 다른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아주 조심스럽게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신호를 알아차렸다. 트루디 대공이 고개를 살짝 돌려 오드리아를 바라보자 그녀가 간절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저희는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드리아가 나서서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여전히 불쾌한 모습이 역력했지만 오드리아의 뜻을 꺾을 수 없어 가만히 있었다.

두 사람은 황태자가 뭐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오드리아의 어깨를 살짝 감싸며 돌아섰다.

“괜히 상대해 줄 필요 없다.”

트루디 대공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레미아는 옆에서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냥 무시해. 감히 어디다가.”

제레미아가 오드리아를 데리고 자리를 벗어나려고 할 때였다.

“내게 이리 건방지게 군다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피식, 트루디 대공이 명백한 조소를 흘렸다. 황태자의 말에 겁이 나기는커녕 가소롭다는 의미가 명백했다. 그럴수록 황태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꽉 쥔 주먹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떨렸다. 당장이라도 그에게서 큰소리가 터져 나올 것 같을 때였다.

“그럼, 당장 황제에게 가서 일러.”

트루디 대공의 말이 더 빨랐다. 가만두지 않는다고 호언장담한다고 해서 어찌할 거냐고, 기껏해야 황제에게 가서 일러바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냐고 조롱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그의 음성이 지금 당장이라도 황태자를 씹어 먹을 듯이 낮고 싸늘해서 주위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럼 황제에게 말할 것이다. 당신 자식의 멋모르는 치기를 누르지 못한다면 황태자라고 해서 넘어가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결국 문제가 터지고야 말았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나서자 연회장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트루디 대공과 황태자가 대립하는 상황에 어느새 연회장에 있는 모든 귀족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면서도 혹시라도 불똥이 튈까 봐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그만하세요.”

오드리아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말렸다.

하지만 귀족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런 말 한마디로 이런 상황이 정리될 리 없었기 때문이다.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마치 꿈속에서조차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중에서는 체면이고 뭐고 눈을 마구 비비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멈췄다.”

한 귀족이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했다.

놀랍게도 오드리아의 한마디에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멈췄다. 오드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활짝 미소를 지었다. 방긋, 입꼬리를 올리면서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조금 시끄러워졌네요.”

단지 약간의 해프닝일 뿐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과 일부러 눈을 맞췄다. 그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아빠.”

오드리아가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면서 트루디 대공을 불렀다.

“오빠.”

그리고 시선을 살짝 옮겨 제레미아를 바라보았다. 순간 두 사람의 어깨가 움찔하고 굳었다.

연회장을 벗어나는 동안 오드리아는 물론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오드리아는 화가 난 듯 앞서 걸어 나가고 그 뒤를 졸졸 쫓는 두 사람이 눈치를 보고 있는 것뿐이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오드리아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오드리아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눈동자가 곧게 응시하는 모습을 보면서 긴장하고 겁을 먹는 것은 아마 두 사람이 전부일 것이다.

그때였다. 오드리아의 눈이 사르르 접혔다.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감사해요.”

“어……?”

“뭐…… 라고?”

메아리처럼 두 사람의 말이 이어졌다.

오드리아의 말에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얼빠진 얼굴을 했다. 분명 방금까지 화난 것이 분명했는데 갑자기 웃으며 고맙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사실 엄청 불편했거든요.”

오드리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황태자의 행동은 불쾌하기만 했다. 다만 함부로 행동할 수 없어서 듣고만 있었을 뿐.

“아빠랑 오빠 덕분에 이렇게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리아, 앞으로 그런 일이 있으면 참을 필요 없다.”

“그냥 정강이를 확!”

제레미아가 황태자의 정강이 사이를 발로 차는 듯한 흉내를 냈다. 문제는 그게 진심이라는 것이었지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오드리아가 혹시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하며 싫은 것을 감내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오드리아는 두 사람의 마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처럼 막 나갈 수는 없었다. 한 명쯤은 잡아당길 사람도 필요하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불쾌한 장소에서 벗어났으니까. 그리고 민망하고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오늘은 오드리아의 공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였으니까.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가족끼리 축하해요.”

조촐하지만 따뜻하게. 오드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 말했다.

황궁에서 공작가로 오는 동안 내용이 어떻게 전달이 되었고 공작가의 고용인들이 어떤 대단한 능력을 사용한 건지, 플로렌스 홀이 화려한 위용을 뽐내며 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오드리아가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자신이 말한 가족끼리 축하는 식당에서 다 같이 와인을 한잔한다든가 차를 마신다든가 하는 것을 얘기했던 것이다.

황궁에서 공작가로 연회를 그대로 옮겨 온 듯한 광경이 아니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메릴을 비롯한 고용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말했다. 갑자기 준비하느라 힘들었을 텐데도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진심으로 기쁘게 준비한 것이다.

오드리아는 플로렌스 홀을 보고 당황스러웠던 마음이 바뀌었다.

“다 같이 즐겨요!”

오드리아는 메릴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 옆에 있던 페이지도, 그리고 라미엘에게도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플로렌스 홀은 넓었고 아직 밤이 깊을 때까지는 시간이 남았고 오로지 오드리아와 트루디 대공, 제레미아 셋이서만 즐기기엔 아쉬우니까. 오드리아의 웃음에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도 넘어왔다.

공작가의 고용인들이 한데 어우러져 즐기고 있었다. 오로지 세 사람을 위해 준비한 공간과 음식들을 어느새 다 함께 누렸다.

아이작은 이미 자리를 잡고 즐기고 있었다. 오드리아는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역시 기사보다는 저렇게 노는 모습이 더 잘 어울렸다.

황궁 연회와는 다른 밝고 경쾌한 음악이 흘렀다. 가벼운 스텝이 서로 얽혔다. 귀족들의 사교댄스가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이 축제 기간에 다 함께 어울리면서 추는 춤이었다.

서민들의 춤을 한 번도 춰 본 적 없는 제레미아는 허둥대며 고용인들에게 춤추는 법을 배웠다. 처음 보는 제레미아의 어수룩한 모습에 고용인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가운데 가장 의외인 것은 트루디 대공이었다. 그는 한두 번 춰 본 것이 아닌 듯 익숙하게 춤을 췄다. 오히려 오드리아를 리드할 만큼 능숙했다.

“춤, 춰 본 적 있으세요?”

오드리아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트루디 대공은 추억에 잠긴 듯 그리운 얼굴을 잠시 했다가 벗어났다. 오드리아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너의 엄마가 이 춤을 좋아했단다.”

그래서 트루디 대공은 분명 그녀에게 이끌려 이 춤을 몇 번, 아니 몇십 번을 췄을 것이다. 그것을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웃음이 멈추지 않고 흐르는 연회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화려한 황궁 연회와는 다르게 모든 것이 급하게 준비된 것이었지만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 * *

오드리아에 대한 평판은 연회 이후로 더욱더 폭발했다. 오드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날이 지나도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말을 옮기면 옮길수록 소문에 살점이 계속해서 붙어 나갔다.

“연회 때 그거 봤어요?”

“저도 봤어요! 황궁 연회에서 있었던 그 일 얘기하는 거죠?”

황궁 연회에 참석하지 못했던 영애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러자 흥분한 영애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오드리아 영애의 한마디에 대공 각하와 제레미아 님께서 꼼짝을 못했답니다.”

“그, 대공 각하와 제레미아 님께서요?”

“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영애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외쳤다.

“그래서 요즘 이런 말이 돌고 있답니다.”

영애 중 한 명이 목소리를 더 낮추며 은밀하게 말을 이었다.

“트루디 공작가의 진짜 실세는 오드리아 트루디 영애라고 해요. 그녀의 한마디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공작가에서 그 누구도 뜻을 거스를 수 없는 존재라고 합니다. 공작가 안에서는 이미 당연한 일이 된 지 오래라고 해요.”

“지금까지 몰랐던 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요?”

“맞아요. 좀만 더 빨리 알았으면…….”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한 말에 대해 영애들은 각자 생각했다. 트루디 공작가는 난공불락의 가문이었다. 모두가 조금이라도 친분을 쌓아 보려고 시도해 봤지만 실패했다.

이제껏 쉽게 다가갈 수 없었던 트루디 공작가.

마치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누구도 다가갈 수 없었던 트루디 대공과 어릴 때부터 남다른 성질로 잘못 다가갔다가는 큰 화를 당하게 만드는 제레미아로 인해 트루디 공작가는 제국에서 황가 다음으로 힘이 있으면서도 영향력이 강한 가문인데 반해 어느 가문도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또 다른 선택지가 생긴 것이다. 그 가문과 이어질 수 있는 방법이자 잘 보여야 하는 자가. 그것도 어쩌면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마저도 누를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트루디 공작가와 인연만 쌓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트루디 가문의 지원을 약간만 받아도 할 수 있는 사업이나 사교계에서의 위치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런데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사교계 활동에 나타나도 다른 사람들과 그다지 어울리지 않아서 다가갈 틈이 없었다.

그런데 오드리아는 상황이 달랐다. 그녀는 사교계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는 데다가 다른 두 사람에 비하면 친화적인 성격이었다.

그녀라면 어떻게든 친분을 쌓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 공작가의 진짜 실세가 그녀였다니. 좀 더 일찍 대시해 볼걸.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며 서로의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대화를 나누던 영애 중 한 명이 말했다. 마치 은밀하면서도 기회를 노리는 맹수와도 같은 눈빛으로.

“차라리 잘되지 않았나요? 드디어 트루디 공작가와도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잖아요.”

한 영애가 침묵을 뚫고 모두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낸 덕분에 이제부터 공개적인 눈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이중에 누가 더 발 빠르게 움직여 오드리아에게 호감을 살 것이냐, 그것이 관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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