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48)

* * *

오웬 자작가의 마약 파동은 제국 전체로 퍼졌다.

제국에서는 이미 수백 년 전에 마약과의 전쟁을 치른 적이 있었고 그 결과 마약은 철저하게 관리 감독되어 오고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가문이 릴스테인 후작가였고.

그렇기에 오웬 자작가의 사건은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다.

자신들이 사용하던 화장품에 마약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영애들은 억울함과 분노를 넘어 불안에 떨었다. 앞으로 자신의 몸에 어떤 문제가 생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릴스테인 후작가에서 해독제를 만들었다.

마약과 해독제에 대해 연구했던 연구원들이 각 가문을 방문해서 상황에 맞는 처방을 내려 주었다. 그 덕분에 마약 부작용 문제는 크게 번지지 않을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에이미와 노엘은 처참하게 끌려갔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기 위해 모두 거리로 나왔다.

오드리아는 페이지와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페이지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저는 두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페이지가 분노를 겨우 억누르며 말했다. 하지만 손끝이 떨리는 것이 생각만으로도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는 것 같았다.

“미안해. 걱정 많이 했지.”

오드리아가 그런 페이지를 달랬다. 하지만 여전히 페이지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에요!”

“…….”

“욕심에 눈이 멀어서 그토록 아껴 주던 오드리아 님을 죽게 만들더니 오필리아 숍을 망치고 결국엔…… 사람들의 인생을 망칠 뻔했어요.”

페이지가 오드리아를 한참 바라보았다.

“오드리아 님.”

페이지가 ‘오드리아 님’이라고 부르는데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녀의 따뜻한 목소리가 오드리아의 목 언저리를 뜨겁게 만들었다.

방금 전에 페이지가 이전의 삶이었던 오드리아를 언급해서일까. 지금 부른 오드리아가 오드리아 트루디가 아니라 과거 오필리아 숍의 주인이었던 마담 오드리아를 부르는 것 같았다.

페이지가 오드리아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라도 살아 계셔서 다행입니다.”

“……!”

오드리아의 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흔들림 없이 바라보고 있는 페이지의 시선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하고 있었으니까.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녀를 알아볼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설마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

그럴 리 없었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때 페이지는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어떻게 하지. 그래도 아닌 척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척해야겠지? 짧은 순간 동안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런 고민은 의미 없었다. 페이지는 이미 확신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또다시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은 기만이었다.

“언제…… 부터 알았어?”

“글쎄요.”

페이지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어딘가 그리운 듯한 얼굴을 하고서 언제인지 모를 시간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다만…….”

페이지는 그리운 얼굴을 하며 말을 이었다.

“오드리아 님과 함께한 시간이 어느새 육 년이 넘었으니까요.”

그녀의 말대로 페이지와는 이번에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제가 모셨던 오드리아 님은 동화 같은 이야기를 좋아하셨습니다.”

페이지가 갑자기 과거의 오드리아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에서는 이미 한 번 죽었지만 과거로 돌아가거나, 다른 사람의 몸에 영혼이 들어가 새로운 인생을 살고는 했습니다.”

“…….”

“그분은 그저 취미라고 하셨지만 해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갈망이 있으셨던 분이니, 이야기 속에서나마 다른 삶을 살아 보시고 싶었던 거겠지요.”

오드리아는 페이지의 말을 듣는 내내 과거의 자신에 대해 페이지가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녀의 말대로 오드리아는 이야기책을 통해 그녀가 포기했던 인생에 대한 꿈을 꾸곤 했었다. 그게 현실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페이지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처음엔…… 제가 아는 그분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을 어린 아가씨께서 꿰뚫어보시는 모습이 그저 신기했습니다.”

“…….”

“더군다나 이상하게도 오드리아 님을 보면 예전의 그분이 떠올랐거든요.”

페이지는 지금의 오드리아에게서 과거의 마담 오드리아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착각이라고 계속 외면하고 무시했었는데…….”

그녀의 말에서 그간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느껴졌다.

“에이미와 노엘의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시면서 위험을 무릅쓰시는 걸 보면서 어쩌면……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페이지가 오드리아를 올곧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어째서 얼토당토않은 그 이야기들이 기억났는지 모르지만 그때 오드리아 님께서 즐겨 보시던 이야기책이 떠올랐습니다. 죽어서 다른 사람의 몸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꿈같은 이야기가.”

“…….”

“설마 하면서 아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분명 돌아가셨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인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정말 가능한 걸까.”

페이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기쁜 것 같기도 슬픈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공작가의 영애께서 아무 연관도 없는 오필리아 숍을 구해 주신 것도, 그곳을 제게 맡겨 주신 것도요.”

“…….”

“어쩌면…… 오드리아 트루디 님이 제가 알고 있는 그 오드리아 님일 수 있겠구나…… 하고요.”

“그렇구나.”

그저 어느 날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기분은 오드리아가 성인이 되면서 페이지도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을 동일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드리아 트루디 역시 그런 대접이 몹시 익숙해 보인다는 것이다.

설마 하는 의심은 자연스럽게 강한 확신이 되었다. 어느 한순간의 깨달음이 아니라 여러 시간들이 쌓여서 생긴 것이다.

때론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분명한 계기나 사건이 아니라 물 흐르듯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어렴풋이 깨닫게 되는 것들.

“이렇게 다시 모실 수 있어 다행이에요.”

오드리아와 페이지는 마담 오드리아 때부터 오드리아 트루디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긴 시간을 함께했다. 그 어느 순간에 깨달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해.”

오드리아는 페이지에게 손을 내밀었다.

“얼마든지요. 지금부터는 제가 오드리아 님을 도울 수 있게 해 주세요.”

페이지 역시 오드리아의 손을 맞잡았다. 지난 인생과 지금의 인생을 잇는 유일한 관계가 다시 맺어졌다.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말 할 수 없는 비밀. 오드리아와 페이지는 지금 특별한 비밀을 함께 공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건 어쩐지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 * *

트루디 대공은 이번 사건에 대해 보고를 하기 위해 황제와 독대했다. 황제도 이미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마약은 모두 압수했고 그동안 사용해 온 구입 통로는 모두 차단했습니다. 혹시 몰라 다른 곳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는지 조사할 계획입니다.”

“그렇군. 수고했네.”

“오드리아 영애가 이번 일을 밝혀냈다고?”

“그렇습니다.”

오드리아의 활약에 대해서는 이미 수도 전체에 소문이 났다. 그녀가 화장품 성분이 수상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눈치 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사실을 밝혀내기까지 했다고. 사람들은 오드리아를 향해 감탄과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대단한 일이었다.

“하하. 대단하군. 자네의 가문은 비범하지 않은 인물이 없군 그래.”

제국을 발칵 뒤집은 사건의 전말을 밝혀내고 마무리까지 한 사람이 이제 열여섯밖에 안 된 오드리아 트루디라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황제의 말에 트루디 대공은 기뻐하기는커녕 불편한 듯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번 일에 오드리아의 활약이 큰 것은 사실이고 그 부분에 기뻐해야 하는 것도 맞지만, 오드리아가 위험할 뻔했던 일을 떠올리면 트루디 대공은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대단한 영애이지 않은가. 사건의 진상을 알아채고 그리 신속하게 움직이다니. 과연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제국에 몇이나 되겠는가.”

“…….”

트루디 대공은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그의 입술이 씰룩였다. 오드리아는 그가 생각해도 대단한 아이였다.

이건 불쾌감이 아니라 자식을 자랑하고 싶어 간질거리는 걸 억지로 참고 있을 때 나오는 반응이었다.

트루디 대공은 애써 생각했다. 이건 내가 팔불출이라서가 아니라 황제의 말대로 우리 오드리아가 정말 대단한 아이니까. 하지만 그런 걸 황제의 앞에서 떠들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황제는 트루디 대공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피식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말을 이어 나갔다.

“이번 일에 공을 세운 이들을 치하하고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해 연회를 열 예정이네. 그때 오드리아 영애가 꼭 참석해 주었으면 좋겠군.”

“감사한 마음으로 참석하겠습니다.”

연회의 주인공은 오드리아가 될 것이다. 이번 일을 직접 본 사람들, 소문으로 들은 사람들 모두 그녀를 보고 싶어 하니까.

“이번 일의 뒤처리는 모두 그대에게 일임하겠네. 이번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트루디 공작가에서 해결한 일이니, 나는 그대의 결정을 존중할 생각이야.”

“그것 역시, 감사한 마음으로 받들겠습니다.”

오웬 자작가에 대해 트루디 대공이 무슨 짓을 해도 눈감아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건 이번 일에 대한 감사의 인사이자 오드리아가 위험할 뻔한 일로 분노한 트루디 대공에게 건네는 위로였다.

트루디 대공은 감사한 마음으로 황제의 명을 받들 것이다. 철저한 응징으로 단 한 톨의 용서나 관용 따위 없이. 사실 그것이 황제가 원하는 것이기도 했으니.

트루디 대공은 황제를 만나고 나오자마자 황궁 감옥에 갇혀 있는 노엘과 에이미를 찾아갔다.

오웬 자작을 비롯하여 노엘과 에이미가 황궁 지하 감옥에 갇혔다. 세 사람은 그곳에서 매일같이 고문을 받으며 차라리 죽는 것이 더 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이럴 거면 차라리 죽여 줘……. 제발 죽여 줘…….”

고통을 참다못한 노엘이 빌었다. 하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워, 원하는 게 뭐야…… 뭐든 말만 해. 다 할 테니까. 그러니 제발 이것 좀… 멈춰 줘….”

에이미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이것 역시 소용이 없었다. 에이미와 노엘에게서 더 이상 알아내고 싶은 것도 받아낼 것도 없었으니까. 이건 철저한 응징이었다.

“아아아아악!”

결국, 계속되는 고문과 함께 기분 나쁜 비명이 쉼 없이 울려 퍼졌다. 그때 계단을 통해 트루디 대공이 들어왔다.

그는 에이미와 노엘의 몰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생각보다 얼굴이 좋아 보이는군.”

하지만 그의 말과는 달리 얼굴은 피와 상처로 뒤덮였고 입고 있는 옷은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퀭한 눈은 트루디 대공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처참하다고 할 몰골이었지만 트루디 대공은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보자마자 처리했어야 했는데.’

트루디 대공의 눈빛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너희는 내일 참수형을 당할 것이다.”

트루디 대공의 선택지에서 참수형은 두 사람에게는 가장 편한 죽음이었다.

“너희가 한 짓에 비하면 너무 편한 죽음이겠지.”

노엘과 에이미에게는 절망이겠지만 트루디 대공에겐 너무 모자란 처벌이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공개적으로 경고하기 위해서는 역시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트루디 대공의 사심은 그 이후에 챙길 생각이었다.

“너무 아쉬워 마.”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데 트루디 대공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두 사람은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너희는 시체가 되어서도 편하지 못할 테니.”

“……!”

“사, 살려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트루디 대공의 시선이 싸늘했다. 귀찮은 벌레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지금 밟아 죽이기 전에 그 손 치워.”

냉정하고 단호한 목소리에 노엘이 손을 조심히 거뒀다.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하는데도 지금 죽는 것이 두려웠다.

트루디 대공은 자신의 눈치만 보며 벌벌 떨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에이미는 바닥에 쓰러진 채 미동조차 없었다. 벌써 죽어 버린 것처럼.

목숨이 끊어지더라도 육신은 남을 것이고 그 육신은 뼛조각 하나마저 바스러질 때까지 결코 쉬지 못할 것이다. 만약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마저도 붙잡아서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트루디 대공은 말을 끝내자마자 돌아섰다. 더 이상 이들을 볼 이유가 없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불쾌해졌다.

공작가에 돌아온 트루디 대공은 고민에 빠졌다. 오웬 자작을 비롯한 에이미와 노엘의 참수형은 내일 광장 한복판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그것은 노엘과 에이미, 그리고 오웬 자작의 공식적인 최후를 알림과 동시에 좋은 경고가 될 것이다.

“그 현장을 리아가 보지 않도록 하고 싶은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가뜩이나 이번 일로 여러 가지로 힘들었을 텐데. 괜히 그 모습을 보면 충격을 받지 않을까 걱정되니까요.”

제레미아의 말에 트루디 대공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지. 하지만 이번 일은 조용히 처리할 수가 없어.”

공개 처형이었다. 모두에게 본보기가 되도록 사람이 가장 많이 다니는 광장에서 진행될 예정인데 그 사실이 오드리아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혹시라도 오드리아가 사형 집행 장면을 보고 트라우마가 남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세 사람의 처형이 있다는 것은 내일 오전에 알려질 것이다. 오드리아가 아직은 모르지만 내일 언제 알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제레미아의 말에 트루디 대공이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내일은 오드리아가 저택에만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갑자기 나가려고 하면 어쩌실 겁니까.”

“…….”

“저희가 막을 수 있을 리 없잖습니까.”

오드리아를 집에서 나가지 못하게 할 수도 없다. 그녀의 자유에 아주 작은 흠집이라도 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잠시 멀리 떠나게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제레미아가 고민 끝에 말했다.

“어떻게……?”

“뭐 심부름이라고 핑계를 댄다든지.”

차라리 공개 처형이 일어나는 동안 다른 곳에 보내면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나중에 돌아왔을 때 소식을 전해 듣기는 하겠지만.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럼 아버지께서 대충 핑계를 만들어 주십시오.”

“네가 함께할 생각이냐.”

트루디 대공의 물음에 제레미아가 멈칫했다. 물론 시간을 쥐어짜서라도 함께 가고 싶었다.

“저도 내일은 형 집행으로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을 시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제레미아는 라미엘에게 내일 오드리아와 함께 수도 밖으로 나갈 것을 지시했다. 다른 건 몰라도 오드리아에 관해서 그가 가장 믿을 만하니까.

* * *

이른 아침이었다. 평소처럼 하루를 시작하려는데 메릴이 뜬금없이 말했다.

“대공 각하께서 아가씨께서 해 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아빠가?”

오드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해 줬으면 하는 일이라니. 급한 건가?

“무슨 일인데?”

“이 문서를 수도 외곽에 있는 에르헨 후작가에 전달하는 것입니다.”

메릴이 문서를 넣은 봉투를 내밀었다. 오드리아는 더더욱 이상했다. 문서를 전달하기 위해 굳이 저한테 심부름을 시키다니. 이제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지금까지 트루디 대공이 오드리아에게 이런 부탁을 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굳이 이렇게 이른 시간에 부탁을 하다니.

“급한 일이야?”

오드리아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였다. 메릴이 목소리를 낮추며 심각하게 말했다. 마치 비밀스러운 말을 전달하는 것처럼.

“절대 누구도 봐서는 안 되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아가씨에게 부탁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내용인데?”

“그건 저도 모릅니다.”

하긴 그러니까 일부러 부탁한 거겠지. 오드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트루디 대공이 굳이 오드리아에게 부탁할 정도면 굉장히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놀랐을 뿐 대공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알겠어.”

오드리아가 고민 없이 봉투를 받아 들어 바로 외출 준비를 했다.

“제가 동행하겠습니다.”

라미엘이 오드리아의 곁을 지켰다. 최근 그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오드리아의 곁에서 떨어질 줄 몰랐기 때문에 이상하다는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를 타고 얼마나 이동했을까. 거리가 술렁이고 있다는 것을 마차 안에서조차 느낄 수 있었다. 오드리아가 창문을 살짝 열어 바깥을 살피려고 할 때였다.

거리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른 것 같았다. 흥분한 것 같으면서도 긴장한 듯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인 거지. 오드리아가 창문 너머로 자세히 살피려 하자 라미엘이 그녀가 보고 있는 창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라미엘……?”

갑자기 창문이 닫히자 당황한 그녀가 라미엘을 불렀다.

“가져가시는 서류가 중요한 것이라 하니 도착할 때까지 마차의 창문은 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오드리아는 답답했지만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봉투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오드리아와 라미엘 사이에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라미엘이 그녀의 눈치를 보았고 오드리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잠깐 마차 좀 멈춰.”

갑자기 오드리아가 말했다. 라미엘이 당황하며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마차가 멈추자마자 오드리아는 망설임 없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래서 갑자기 심부름을 시켰구나.’

오드리아는 바로 알아차렸다.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그래서 오늘 메릴이 아니라 라미엘과 함께인 건가. 힘으로라도 막아서 내가 그 모습을 보러 가지 못하게 하려고.’

오드리아가 라미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라미엘은 그녀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오늘은 분명 에이미와 노엘이 처형당하는 날일 것이다. 두 사람에게 그 길 말고 다른 마지막은 없을 테니까.

그리고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자신이 그 모습을 보지 않기를 바랐기에 이런 짓을 벌인 거겠지. 혹시라도 내가 상처를 받을까 봐.

언제나 자신이 다칠까 봐 걱정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느껴졌다. 가슴 언저리에 따뜻한 울렁임이 느껴졌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두 사람의 고마운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이번 일이 진행되는 내내 결심했었으니까. 두 사람의 최후를 지켜보겠다고.

“라미엘.”

오드리아가 라미엘을 불렀다.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였지만 라미엘은 순간 ‘읏!’ 하고 입술을 깨물 뻔했다. 지금 그녀가 자신을 부른 이유가 뻔했기 때문이다.

“안 됩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라미엘의 말에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하려는 말이 뭔지 아는구나?”

순간 라미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에게 말렸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아서.

그렇지만 깨달았을 땐 언제나 늦었다. 결국 오드리아의 뜻대로 될 것이다.

그래도 라미엘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버티겠다는 각오로 오드리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최악의 실수였다. 오드리아와 시선을 마주해서는 안 됐다.

“……부탁이야, 라미엘.”

오드리아는 애절하게, 세상에서 가장 구슬픈 목소리와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라미엘을 바라보았다.

자신할 수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사람이 트루디 대공이나 제레미아였어도 반드시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라미엘보다 더 먼저 무릎을 꿇을 것이 분명했다.

“심부름을 아직 끝내지 않았습니다.”

라미엘은 마지막 반항으로 오드리아에게 힘겹게 말했다. 오드리아는 자신의 품에 있던 봉투를 꺼냈다.

이 안에는 분명 아무 내용도 없을 것이다. 오드리아는 그대로 봉투를 뜯었다.

“오드리아 님!”

라미엘이 사색이 되어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망설임 없이 봉투 안에 있는 종이를 꺼내 펼쳤다. 종이에는 단 한 줄의 내용이 있었다.

[에르헨 후작, 잘 지내는가.]

의미 없는 안부 인사였다. 트루디 대공이 할 리 없는 안부. 게다가 이 내용을 비밀리에 전달할 이유 역시 어디에도 없었다. 오드리아가 종이에 적힌 내용을 보여 주며 입꼬리를 올렸다.

라미엘은 항복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결국 오드리아의 고집이 이겼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광장 한복판. 그곳에서는 참수형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다.

“볼만한 것이 못 됩니다.”

라미엘은 지금이라도 오드리아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오드리아의 시선은 이미 참수형이 벌어질 사형대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야 한다. 내 눈에 확실하게 각인시켜서 잊지 않을 것이다. 오드리아는 그런 각오를 했다.

사형대로 에이미와 노엘이 등장하는 순간 주위가 고요해졌다. 그러곤 횃불을 들고 일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의 야유와 비난이 쏟아졌다.

에이미와 노엘, 그리고 오웬 자작. 세 사람의 눈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러니 세 사람은 오드리아를 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분명 내가 있는 걸 알겠지.’

두 사람의 언니이자 누나였을 때, 그리고 오드리아 트루디일 때. 무슨 인연인지 세 사람은 질기도록 엮였다.

에이미와 노엘은 오드리아 트루디의 진짜 정체를 알지 못하면서도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하며 적의를 드러냈었다. 마치 본능처럼.

사형집행인이 세 사람의 죄목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순간이 지나면 그다음은 사형 집행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오드리아는 죄목을 말하는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멍한 것처럼 모든 글자들이 둥둥 떠다녔다.

“……죄는 무겁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이들을 참수형에 처해 본보기로 삼는다.”

집행 시행문 낭독이 끝났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순간이 지나고 세 사람의 참수형이 진행되었다. 허무할 정도로 한순간이었다. 그들의 목숨이 사라지는 순간은.

“괜찮으십니까.”

라미엘이 걱정스레 물었지만 오드리아는 처형대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라미엘은 그 옆을 묵묵히 지켰다. 오드리아가 움직일 때까지.

구경하던 사람들이 반 이상 빠져나가서야 굳은 듯 꿈쩍도 하지 않던 오드리아가 천천히 발을 돌렸다.

“돌아가자.”

오드리아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녀의 등 뒤에서는 노엘과 에이미의 시체를 정리하고 있었지만 오드리아는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정말로 끝.

이제 이 세상에 에이미와 노엘은 없다. 끈질기게 이어져 오던 악연의 끈이 사라졌다. 돌아서는 그녀의 얼굴이 복잡 미묘하게 변해 갔다.

* * *

오드리아와 라미엘이 공작가로 돌아오자 가족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공과 제레미아가 오드리아를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잘 다녀왔어?”

제레미아가 다가오며 웃었다.

“대신 다녀와 줘서 고맙구나.”

트루디 대공이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를 건넸다.

“피곤하지는 않니?”

대공이 걱정을 담은 따뜻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괜찮아요.”

고작해야 반나절 정도의 외출이었다. 오필리아 숍에 가도 이 정도 시간이 지나고는 했다. 전혀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날이었다.

그런데 가족들의 등 뒤로 내려앉은 노을이 유난히 눈이 부셨다. 따뜻한 감정이 오드리아를 감쌌다.

오드리아는 공식적으로 심부름을 다녀온 것이다.

그러니 처형을 보지도, 그 사실을 알지도 못하는 척해야 한다. 그런데 자꾸만 눈가에 촉촉한 감촉이 느껴졌다.

너무 좋아서. 그녀의 진짜 가족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껴서. 벅찬 감동이 올라왔다.

“우, 우는 거야, 리아?”

오드리아의 눈물을 발견한 제레미아가 당황하며 물었다. 오드리아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너무 좋아서요. 아빠도 오빠도요.”

전부 좋았다. 이런 가족들이 곁에 있다는 게 오드리아에게는 가장 큰 기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위에 적막이 감돌았다. 분명 이쯤 되면 쑥스러워하는 말이나 능청스러운 말이 나올 텐데 이상하게 고요했다.

오드리아가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다가 깜짝 놀랐다. 가족들은 모두 먼 하늘을 보며 흐르려는 눈물을 겨우 막고 있었다.

피식, 오드리아는 그제야 가볍게 웃을 수 있었다.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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