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오웬 자작가가 저지른 일은 순식간에 알려졌다.
마약이라는 존재에 모두가 분노했고 화장품을 모두 모아 한꺼번에 불에 태우고 땅에 묻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오웬 자작가는 고립되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이 지경에 와서 그들을 도와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모두를 이용하려다 결국 버려지는 것. 그들에게 어울리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제 정말로 에이미, 노엘과의 지긋지긋한 악연은 머지않아 끝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후련함과 동시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이렇게 되는 게 맞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통쾌하거나 시원하지는 않았다.
이미 더 이상 자신의 동생들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떨쳐 낼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었다.
한때 자신의 전부를 바쳐 키웠던 동생들이었다. 내가 잘못 키운 걸까, 하는 후회가 남지 않을 리 없었다.
이 질긴 악연을 이제는 정말로 마무리 지어야 한다.
‘내가 직접 에이미와 노엘에게 알려줘야 해.’
두 사람이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이 어떤 짓인지, 처절히 후회하도록 만들어 줘야 한다.
그러려면 두 사람을 만나야 했다.
‘어떻게 만나지?’
오드리아가 고민에 빠진 동안 라미엘은 그런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결심을 할 때의 표정이었다.
‘그리고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하려고 하겠지.’
라미엘은 직감했다. 오드리아의 생각이 길어질수록 초조했다.
그녀가 혼자 결정하고 움직이는 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져도 뒤늦게 알게 될까 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라미엘이 초조해하며 그녀의 대답을 듣기 위해 다시 물었다.
순간 오드리아의 눈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의 입술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오드리아 님. 저를 믿어 주세요.”
라미엘이 간곡하게 말했다.
“제발 혼자 하지 마시고 제가 도와드릴 수 있도록 해 주세요.”
“…….”
라미엘이 호소하는데 순간적으로 트루디 대공의 목소리가 들렸다.
- 혼자서 하려고 하지 마.
트루디 대공의 다정한 목소리에 오드리아는 망설여졌다.
트루디 대공은 오드리아가 뭘 해도 믿고 지지해 주었다. 언제나 그녀의 뒤에서 든든하게 버텨 주었다.
그러면서 항상 하는 말은,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하라는 것이다.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닌데.’
오랜 습관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혼자서 아등바등하는 게.
그러다 도저히 오드리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어져서야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 부탁하고는 했다.
오드리아의 무모한 행동 때문에 가족들이 얼마나 불안해할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라미엘. 나 좀 도와줄래?”
“얼마든지요.”
라미엘이 안도하며 그제야 웃음을 보였다.
* * *
에이미와 노엘은 여기서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었다.
급한 대로 몸을 숨긴 에이미와 노엘이 앞으로의 대책을 논의했다.
“이제 어떡하죠.”
“일단 도망쳐야 해. 여기 있으면 무조건 죽을 거야.”
“하지만 여길 벗어나는 것도 무리에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지.”
두 사람이 위기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어떻게든 외국으로 무사히 도망치는 것밖에 없었다.
“오드리아 트루디를 인질로 요구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게 두 사람이 외국으로 떠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떻게든 혼자가 될 때를 기다렸다가 노려야 해요.”
“지금 자금이 얼마나 되지?”
“외국으로 갈 수만 있으면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정착할 수 있을 만큼은 됩니다.”
“그럼…… 그중에 반을 써서 용병을 사자.”
에이미가 말했다.
“용병이라도 있어야 오드리아를 납치하고 무사히 빠져나갈 때까지 우릴 지켜 주지.”
“알겠어요.”
에이미와 노엘이 저지른 짓은 이미 제국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이 용병을 고용하기 위해서는 위험수당을 얹어야 해서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그들로서는 엄청난 출혈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트루디 공작가 근처에서 오드리아를 납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녀가 가장 많이 드나드는 오필리아 숍이었다.
그곳에서 몇날 며칠을 기다렸는지 모른다. 드디어 오드리아가 나타났다.
심지어 하늘이 두 사람을 돕기라도 한 것처럼 오드리아는 마차를 이용하지 않고 라미엘과 단둘이 걸어오고 있었다.
“잠시 혼자 걷고 싶어.”
“아직은 위험합니다.”
“잠깐만…… 부탁할게.”
오드리아의 부탁에 라미엘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바로 오필리아 숍으로 오셔야 합니다.”
“응. 바로 갈게.”
결국 라미엘이 뒤로 물러나고 오드리아 홀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숨도 쉬지 않고 지켜보던 에이미와 노엘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때야!’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에이미와 노엘은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두 사람은 바로 용병에게 신호를 보냈다. 지금 오드리아를 납치하라고.
* * *
트루디 대공이 오웬 자작가에 들이닥쳤다. 그동안 불법적으로 행해 온 사업의 책임을 묻고 저택을 뒤졌다.
사실 이미 모든 증거를 가지고 있지만 이건 그의 화풀이였다. 그동안 지겹도록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한.
감히 대항할 수조차 없었다. 오웬 자작은 기사단이 들이닥치자마자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체념했다. 순순히 붙잡힌 채 자신의 처분을 기다렸다.
오웬 자작가는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정리되었다. 그런데 노엘과 에이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작의 부인과 보좌관은 어디 있지.”
“그건…… 저도 모…… 모릅니다.”
오웬 자작이 파들파들 떨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그래도 부인은 숨기는 건가.”
“아, 아닙니다! 정말 모릅니다!”
혹시라도 오해를 받아 죄를 뒤집어쓰고 싶지 않은 오웬 자작이 필사적으로 부인했다.
“애, 애초에…… 사업을 제안한 것도 모두 부인과 보좌관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제게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으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오웬 자작이 어떻게든 죄를 덜어보기 위해 최선을 다해 변명을 늘어놓았다.
“결국 그걸로 돈을 벌고 좋아하지 않았나.”
물론, 그 변명이 트루디 대공에게 통할 리는 없었다.
트루디 대공이 오웬 자작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가 열심히 변명을 하고 당황하는 모습이 아무래도 알면서도 숨기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도 정말로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뭐, 그 둘은 천천히 찾아보면 되지. 어차피 그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보좌관이 다가와 귓속말을 전했다. 보고를 전해 들은 대공은 오웬 자작을 향해 조소를 날렸다. 고작 그 정도의 존재였군. 트루디 대공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 느껴졌다.
껍데기만 남은 오웬 자작은 필요 없다는 듯 에이미와 노엘은 미련 없이 그를 버렸다. 그 사실에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을 때였다.
“각하. 예상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가.”
트루디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작가에 도착했을 때 이미 두 사람만 없는 것을 보고 예상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자들을 모두 끌고 와.”
“네!”
트루디 대공은 명령을 내리고 그대로 돌아섰다.
* * *
오드리아는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오드리아를 덮치며 머리카락이 뒤로 흩날렸다.
오드리아가 오필리아 숍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갑자기 입과 코가 천으로 막히고 이상한 냄새가 느껴지자 순식간에 의식을 잃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팔과 다리가 묶인 채로 절벽 위에 서 있었다.
“네가 공작가의 유일한 약점이니까 협조 좀 해 줘야겠어.”
에이미가 비열하게 말했다.
상황을 파악한 오드리아는 자조적인 웃음이 나왔다.
에이미와 노엘은 오드리아를 납치했다…… 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분명 자신들이 그녀를 이곳까지 데려왔으니 당연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두 사람이 이런 짓을 벌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안 하기를 바랐는데.’
혹시라도 마지막으로 깨달은 게 있어 가만히 처분을 기다리기를 바랐는데, 역시나 두 사람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오드리아의 예상대로 움직였다.
자신들의 행동을 반성하기는커녕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짓을 벌였다.
“살고 싶으면 우리 말 듣는 게 좋을 거야.”
에이미가 오드리아를 협박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주시하던 오드리아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나만 잡으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런데 왜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런 짓을 벌이지 않았을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오드리아를 끔찍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오드리아를 이용해 트루디 공작가를 쥐고 흔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 끝에 있는 결말이 너무 뻔하니까.”
달콤한 유혹에 빠져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지금의 에이미와 노엘처럼.
그녀의 말에 에이미와 노엘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드리아 역시 위험을 감수하고 이런 행동을 한 것이다. 아무 일 없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녀는 마지막까지 두 사람에게 무언의 책임감을 느꼈다. 마지막만큼은 제대로 매듭을 지어야 했다.
“내가 기회를 줄게.”
오드리아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하지만 둘 중에 그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야.”
물론 그것이 용서는 아니었다. 오드리아의 말에 에이미와 노엘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들이 오드리아를 납치해 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이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을 뿐.
그러니 오드리아의 말을 듣는 순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뭔데.”
노엘이 오드리아에게 물었다. 오드리아는 그 순간 확신했다. 이들은 자신이 던진 미끼를 물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구나.
“나를 풀어 줘.”
“하,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였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미쳤다고 너를 풀어 줘?!”
오드리아의 당당한 요구에 흔들리던 에이미와 노엘이 다시 강경해졌다. 그녀를 풀어 주는 순간 자신들의 동아줄은 완전히 끊기는 것이다.
아무리 달콤한 조건을 내걸어도 들어줄 수 없었다.
“나를 풀어 주면 나는 아버지에게 말씀드릴 거야. 이 사람이 나를 살려 준 생명의 은인이라고, 그러니 이 사람만은 살려 달라고, 그리고 앞으로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 돈과 신분을 주라고.”
“그런 말을 어떻게 믿어!”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은 오드리아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은 에이미와 노엘이었다. 절대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오드리아가 그럴싸한 조건을 내걸자 마음이 크게 출렁였다.
노엘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윽박을 질렀지만 이미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차피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에겐 기회가 없어. 여기서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너희는 절대 편하게 죽지 못해.”
오드리아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에이미와 노엘은 어쩐지 뒤를 돌아보기가 무서워졌다. 자신들의 뒤에 있는 것은 평평한 땅인데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보면 낭떠러지가 있는 것 같아서.
오히려 오드리아가 더 여유로운 얼굴로 벼랑 끝에 흔들림 없이 서 있었다.
“설마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잡혀 온 거 같아?”
오드리아가 두 사람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기 위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야.”
역시나 에이미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건 너희가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알게 되겠지.”
지금 선택권을 쥐고 있는 것은 오드리아였다. 그녀는 여유롭게 기다렸다. 그럴수록 에이미와 노엘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에이미와 노엘이 서로를 보며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기세가 꺾이고 약해지는 것 같던 에이미가 갑자기 눈이 뒤집혀 오드리아를 노려봤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그 순간 에이미의 눈에 광기가 감돌았다. 어차피 이렇게 끝나는 거라면 죽기보다 싫은 사람을 데려가고 싶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너라도 죽어.”
에이미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뭐 해! 당장 그년을 밀어 버려!”
에이미가 용병들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그들이 서서히 오드리아를 향해 다가왔다.
“어서 빨리!”
에이미가 용병들을 재촉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용병들은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
“너, 너희 뭐야! 왜 나한테 검을 겨눠!”
용병 중 하나가 오드리아를 낭떠러지가 아닌 땅 쪽으로 끌어당겼다.
게다가 다른 용병들은 오드리아가 아닌 에이미를 향해 검을 겨눴다.
벼랑 끝으로 다가오지 않은 나머지 용병들은 노엘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우리가 너희한테 얼마를 썼는데! 지금 뭐 하는 거야!”
에이미가 분을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만해.”
그때였다. 에이미의 발악에 가까운 괴성을 멈추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라미엘이 에이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제레미아와 함께.
“그들은 내 말만 들을 거야.”
“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설마……!”
에이미가 흥분해서 화를 내는 동안 노엘은 뭔가를 깨달은 듯 놀란 모습이었다.
“맞아. 그거.”
라미엘은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지금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다고.
“……!”
에이미와 노엘이 사들인 용병 역시 라미엘이 따로 심어 놓은 자들이었다.
처음부터 이런 상황에서 오드리아를 지키도록.
에이미와 노엘은 미리 설치해 놓은 함정에 스스로 들어온 꼴이었다.
“이제 전부 끝났어.”
오드리아의 쐐기를 박는 한마디에 에이미와 노엘은 경악에 빠졌다.
어느새 라미엘의 뒤로 나타난 제레미아와 공작가의 기사단이 주변을 포위했다.
“이, 이대로 끝낼 순 없어…….”
에이미가 극한으로 몰리자 이성을 잃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오로지 오드리아를 향한 살의로만 가득 차 있었다.
“네가 내 인생을 망쳤어!”
에이미는 여전히 오드리아를 탓하며 원망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기가 막혔다. 자신의 잘못은 하나도 깨닫지 못하고 끝까지 남을 원망하다니.
“그래서 가족도 죽인 거야?”
에이미에게 다가간 오드리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에 에이미의 눈이 커졌다.
“지금 나처럼 그렇게 죽였어?”
“……?!”
에이미는 오드리아의 입에서 자신들이 죽였던 언니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굳어 버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멈칫하며 바라보는 얼굴에 당황한 게 드러났다.
“너희가 욕심을 채우려고 다른 사람을 희생시킨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
오드리아는 거침없이 과거의 그녀를 떠올리며 말했다.
“네가 그걸 어떻게…….”
당황해서 거칠게 흔들리던 에이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다. 뭔가를 결심한 듯 오드리아를 향해 손을 뻗을 때였다.
“……!”
뒤에서 제레미아가 에이미를 뒤로 끌어냈다.
“감히 어디다 손을 뻗어.”
제레미아가 에이미의 목에 검을 가까이 갖다 댔다. 그녀가 공포에 질려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자, 잠시만요……!”
“입 닥쳐. 너한테 들을 말 따윈 없으니까.”
제레미아의 살벌한 경고에 에이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오드리아 님!”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드리아가 긴장이 풀리자마자 휘청이며 쓰러지는 것을 본 라미엘이 붙잡았다.
허리를 단단하게 붙잡고 쓰러지지 않도록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응.”
그녀의 끊어질 듯 옅은 대답에 라미엘이 울컥했다.
“다시는 이런 위험한 일은 생각하지도 마세요…….”
울먹이는 라미엘의 목소리가 잔뜩 떨렸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정말…….”
라미엘은 오드리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며 호소했다.
“저 좀 살려 주십시오.”
낭떠러지에 걸린 오드리아의 모습을 본 순간 라미엘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만약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라미엘도 멀쩡하지 못했을 것이다. 끔찍한 악몽에서 겨우 벗어난 라미엘의 어깨가 떨렸다.
그 모습에 오드리아가 손을 뻗어 라미엘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거리며 달래 주었다.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가 오드리아에게까지 절절하게 느껴져서 미안했다.
그리고 라미엘의 그 모습 덕분에 오드리아는 드디어 안심했다.
라미엘은 오드리아를 조심히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기사들이 오드리아를 중심으로 원을 그린 모양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 누구도 그녀를 노릴 수 없도록.
한편, 제레미아는 에이미와 노엘을 이미 제압한 후였다.
에이미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은 상태였다.
“둘 다 꽁꽁 묶어서 데려가.”
제레미아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에이미와 노엘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그의 눈빛에 불꽃이 일렁였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들이 벼랑 끝에 서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난 풀어 주려고 했어! 풀어 주려고 했다고! 그니까 약속을 지켜! 나는 살리고 에이미만!”
노엘은 혼자라도 살아남기 위해 마지막 발악을 했다. 그러자 에이미가 도끼눈을 하고 노엘을 노려봤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먼저 저 애를 붙잡자고 했잖아!”
에이미가 지지 않고 노엘을 향해 소리 질렀다. 아무리 우애가 두터운 척했어도 결국 마지막 순간에 서로를 배신한 것이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오드리아는 메마른 얼굴로 두 사람의 최후의 발악을 지켜보았다.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에이미가 분하다는 듯이 소리를 질렀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네가 가장 처음 마약을 가져와서 나를 꼬드겼잖아! 네가 그러지만 않았으면 처음부터 마약 같은 거에 손도 대지 않았을 거야. 그럼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거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 잘난 척하고 다닐 수 있었던 것 아닙니까?! 제가 아니었으면 그 모든 것을 누릴 수나 있었습니까?!”
“그래서 결국 이렇게 됐잖아! 네가 모든 걸 망쳤어!”
노엘은 에이미를 향해 조소를 날리며 말했다.
“고작 반반한 얼굴이 전부이면서. 심지어 지금은 그 얼굴마저도 썩은 거 아닌가?”
“노엘!”
에이미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핏줄이 터질 것처럼 튀어나온 눈으로 노엘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오드리아는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추하게 일그러진 모습을 보면서 끼어들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 너흰 결국 이런 애들이었던 거야.’
두 사람의 욕망의 끝은 어디였던 걸까? 오드리아는 에이미와 노엘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평생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인생을 살았다. 그런 두 사람에게 이런 마지막이 차라리 어울렸다.
에이미와 노엘의 마지막 발악은 트루디 공작가의 기사들 앞에서는 초라하게 보일 정도로 무력했다. 결국 두 사람은 무력하게 붙잡혀 기사들에게 끌려갔다.
이번 일은 사실 오드리아와 라미엘뿐만 아니라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협조까지 더해진 일이었다.
에이미와 노엘이 어느 용병단을 찾아갈지 몰라서 제레미아가 직접 나서서 수도에 있는 용병 전체를 매수했다.
오드리아가 공작저를 나섰을 때부터 이미 작전이 시작되었다.
라미엘은 가만히 물러나는 척하고 몰래 오드리아의 뒤를 쫓았다.
제레미아는 대기하고 있다가 기사단을 이끌고 라미엘이 남겨 놓은 표식을 따라 움직였다.
그사이에 트루디 대공은 두 사람의 행방을 모르는 척 오웬 자작가 주변만 수색하는 척했다.
“모두 잘 해결되어서 다행이구나.”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오드리아는 처음에 대공과 제레미아가 분명 크게 반대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리아 부탁인데 그게 뭐든 완벽하게 해내야지.”
제레미아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두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오드리아를 지켜낼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동의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