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8/48)

* * *

부티크의 문제를 서로 공유하게 된 이후로 세 사람은 부쩍 가까워졌다. 오늘도 역시 오드리아는 신시아, 쥬아나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요즘 오웬 자작가가 위태롭다네요. 진행하던 사업이 모두 정지되고, 숨기고는 있지만 자금난에 빠진 것 같아요.”

오웬 자작가에 대해 꾸준히 정보를 모으고 있는 신시아가 말했다.

‘이거 아무래도…… 아빠랑 오빠겠지?’

오드리아는 직감했다. 분명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뭔가 손을 쓴 것이라고.

이미 예전에 문제를 일으켜 노예가 된 에이미와 노엘이 돌아온 것을 두 눈으로 보았다.

그런데도 오드리아의 부탁으로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참고 있는 것만으로도 용했다.

“덕분에 일단 시간이 생겼으니 다행이에요.”

어찌 되었든 오웬 자작가의 사업이 멈췄다.

그리고 깨달았다. 트루디 대공은 오드리아가 직접 얘기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신시아, 쥬아나와 헤어지고 공작가로 돌아온 오드리아는 곧바로 집무실에 있는 트루디 대공을 찾아갔다.

“리아. 무슨 일이니.”

갑작스런 방문에도 트루디 대공은 그녀를 반겼다. 방금 전까지 바쁘게 보고 있던 서류를 옆으로 밀어 놓고 다가와 소파에 앉았다.

오드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래. 무슨 일인지 말해 보렴.”

트루디 대공은 여유롭게 오드리아의 말을 기다렸다.

“감사해요.”

“……?”

트루디 대공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이 살짝 커졌지만 역시 고맙다는 인사가 우선이었다.

“오웬 자작가의 일 말이에요. 제가 아빠한테 숨겼는데도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거 말이구나.”

그리고 두 번째는 역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어차피 모든 상황을 알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숨기는 것은 트루디 대공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사실 이번 일의 시작은 전부 이것 때문이에요.”

“이건…… 뭐지?”

트루디 대공이 처음으로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야 그가 쓸 일이 없는 화장품이니 당연했다.

사실 제국에는 자신을 가꾸기 위해 화장품을 쓰는 남자들이 꽤 많았지만 거기에 트루디 대공은 들어가지 않았다.

오드리아는 모든 것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그도 이미 대부분 아는 얘기일 텐데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지겨워하지 않고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오드리아의 말이 전부 끝나서야 트루디 대공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랬구나.”

“좀 더 일찍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아니다. 뭔가 생각이 있었겠지.”

언제나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면서 뒤늦게 말하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오드리아를 향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오드리아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오드리아가 자신에게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을 뿐.

“걱정 말거라. 오웬 자작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트루디 대공은 오드리아가 무슨 부탁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그 외의 일은, 직접 해결하고 싶은 거지?”

“네.”

“그래.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해.”

오웬 자작가의 사업 확장 외에는 건드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대신 힘든 일이 있으면 꼭 얘기해야 한다.”

“그럴게요.”

오드리아의 씩씩한 대답에 트루디 대공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돌아가고 트루디 대공은 집무실 책상에 앉자마자 보좌관에게 지시했다.

“오웬 자작가에 대해 알아 둔 보고서를 모두 가져오도록.”

“네. 알겠습니다.”

보좌관이 서류를 트루디 대공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며 입을 열었다.

“이 중에서 불법적인 것들을 따로 정리해. 그중에서 기존에 하던 사업과 최근 사업을 따로 분리하고.”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감시하고.”

“네, 알겠습니다.”

사실 이미 한번 본 적 있는 서류였다. 어떻게 처리할지도 정해 놓았지만 오드리아를 기다리느라 멈췄을 뿐이었다.

트루디 대공에게 오웬 자작가를 정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다만 예전부터 오드리아는 에이미와 노엘의 존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었다. 중요한 건 오드리아가 두 사람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다.

그리고 역시나 오드리아는 부티크 문제를 직접 해결하고 싶어 했다.

이제 오드리아가 에이미와 부티크의 문제를 폭로할 때까지 트루디 대공은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그저 너무 앞서지 않게 적절히 속도를 조정하면서 오웬 자작가의 사업을 서서히 무너트릴 것이다.

“그나저나 이 정도면, 결과는 하나뿐이겠군.”

그동안 저질러 온 불법적인 거래는 물론 마약의 사용까지.

모두 제국에서 엄하게 금하는 것들이었다. 이 모든 것이 수면 위에 드러날 때 그들에게 내려질 처벌은 하나뿐이었다.

그건 오드리아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더 끔찍한 결말을 원한다면 그건 도와줄 수 있지만.

* * *

페이지가 오드리아에게 에이미의 부티크에 대한 정보를 늘어놓았다. 겉보기에는 여전히 번창하고 있지만 역시 내실은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부티크가 한계에 몰렸습니다.”

“그래? 겉으로 봐선 잘 모르겠던데.”

오드리아가 보기엔 부티크는 여전히 성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찾고 있었고 열풍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물론 오드리아 역시 그게 계속 유지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오드리아 님도 아시다시피…….”

페이지가 의미심장하게 입을 열었다.

“매출이 높다고 해서 그 사업이 무조건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순이익이 얼마인지, 그 자금을 얼마나 유용하게 돌리느냐가 관건이죠.”

페이지의 말이 모두 옳았다. 그리고 오드리아 역시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에이미의 행보를 보면 부티크는 절대 이익을 낼 수 없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큰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지금 오웬 자작가가 휘청거리고 있다 보니 부티크라도 어떻게든 문제없이 유지하려고 무리하고 있다고 해요. 사실상 가문의 사활을 부티크에 전부 건 거죠.”

“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저 부티크를 살핀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내부 사람만 알 내용을 페이지가 알고 있었다.

“부티크에 심어 놓은 아이로부터 들은 내용이니 확실합니다.”

페이지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은밀하게 답했다. 역시나 그녀가 말한 정부는 내부 인물에게서 얻은 것이다.

“언제 사람을 심은 거야?”

미처 오드리아도 알지 못한 일이었다.

“부티크를 오픈하자마자 그곳에서 일하는 하녀에게 접근해 몇 가지 조건을 거니 손쉽게 입을 열었습니다.”

페이지가 그때를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자기 사람들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게 분명해요.”

에이미가 하녀들을 대하는 방식을 떠올린 페이지가 화를 겨우 참으며 말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지금의 에이미를 보며 이전의 일이 떠오른 것이겠지. 오드리아가 갑자기 사라지고 에이미가 오필리아 숍의 주인 행세를 하면서 벌였던 만행들을.

“나중에 부티크에 문제가 생기면 이번에 도와준 아이들을 오필리아 숍에서 고용하려고 합니다.”

페이지가 오드리아에게 허락을 구했다.

“여긴 마담 페이지가 운영하는 곳이야. 어떤 사람을 쓰든 그것 역시 마담 페이지의 선택이고.”

그녀가 누구를 고용하든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내 대답에 페이지가 미소를 지었다.

“부티크는 지금 겨우 버티고 있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할 거예요.”

페이지가 확신조로 강하게 말했다. 그만큼 부티크가 위태롭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이미는 이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는 발악할 것이다.

“에이미가 뭔가 새로운 일을 저지르려고 할지도 모르니까 잘 지켜봐 둬.”

“네. 명심할게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힐 만한 일들은 특히.”

오드리아도 페이지에게 당부를 해 두었다. 분명 에이미는 부티크에서 새로운 뭔가를 계획하고 있을 것이다. 불길한 확신이 들었다.

과거에도 오드리아에게서 오필리아 숍을 빼앗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었으니까.

“분명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야. 그때 나를 죽인 것처럼.”

오드리아가 무심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녀의 말에 페이지가 충격을 받은 듯 눈이 커지고 목소리가 떨렸다.

“내가 뭐라고 했는데?”

하지만 오드리아는 자신이 혼잣말로 중얼거린 말이 무슨 뜻인지 자각하지 못한 채 고개를 갸웃했다.

“에이미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네. 그렇게 할게요.”

페이지가 멍하니 대답했다. 오드리아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페이지는 ‘나를 죽인 것처럼’이라는 말에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편, 오웬 자작가의 내부 사정이 어떤지를 떠나서 에이미의 부티크는 외부에서 보기에는 여전히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어쩌면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처음에는 그저 화장품에 든 성분을 알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기이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를 보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사람들은 사실을 알면서도 믿지 않을 것이다. 에이미가 모든 것이 오해라고 하면 레이디들은 의심을 하면서도 당장 보이는 효과에 그 유혹을 참지 못하고 계속 사용할 것이다.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능력만큼은 인정해 줘야겠네.’

오드리아는 에이미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그 능력을 좋은 일에 쓰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했으니 이런 상황에 다다른 것이겠지만.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레이디들에게 경각심을 줄 수 있을까.

그녀들은 마약의 증상인지 점점 판단력이 흐려지고 감정적으로 변해 갔다. 아무리 봐도 위험하다.

부티크의 식을 줄 모르는 인기와 영애들의 맹목적인 신뢰가 장기화 되고 있었다. 그럴수록 에이미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끌면 사실을 밝혀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은 신시아와 쥬아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루라도 빨리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 일을 의논하기 위해 세 사람은 오늘도 유스티오 후작가에서 모였다.

“확실하게 알려야 해.”

쥬아나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화장품의 문제점, 마약의 부작용들을 영애들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그건 세 사람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그걸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계속 그 부분에서 막혔다. 쥬아나는 상황이 풀리지가 않자 답답함을 참지 못했다.

“다들 왜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거야.”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에이미의 부티크는 수상했다. 하지만 지금 제국의 수도 안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오드리아와 쥬아나, 신시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혹은, 그렇게 생각해도 외면하고 있거나.

쥬아나가 답답함을 토로하는 것이 당연했다. 신시아와 오드리아 역시 지금 이 상황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으니까. 근심은 깊어만 가고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빨리 무슨 수를 써야 되는데.’

모두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엄청난 충격을 줘야 한다.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도록.

단순히 어떤 마약이 들어갔는지 보여 주고 그 증상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너무 약했다.

무슨 방법을 써야 할까. 깊이 고민하던 오드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티 파티를 열어 주세요.”

그때 긴 침묵을 깨고 오드리아가 말했다.

“일단 모두가 모일 만한 계기가 필요해요. 여러 사람의 입을 거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 들어야 해요.”

직접 보는 것과 전해 듣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신시아와 쥬아나는 그녀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유스티오 후작가에서 주최하는 티 파티가 가장 적합한 것 같아요.”

신시아는 사교계의 세력 싸움과는 다르게 모두에게 존경과 동경의 대상이었다.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레이디들도 그녀가 주최하는 티 파티는 반드시 참석하고 그 순간만큼은 얌전해지고는 했다.

“그렇게 하죠.”

신시아는 고민 없이 오드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은?”

쥬아나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재촉했다.

“단순히 티 파티를 열어서 사람을 모은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그다음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건 신시아도 몹시 궁금했다. 지금까지 모아 놓은 증거와 정황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확실하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생각해 둔 바가 있는데…… 확실하지가 않아요.”

오드리아는 쥬아나의 물음에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몇 번이고 입을 떼기를 망설였다.

“확실해지면 그때 말씀 드릴게요.”

오드리아는 말을 아꼈다. 그럴수록 쥬아나는 더더욱 궁금해졌지만 오드리아가 말한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때까지 해독제는 가능할까요?”

티 파티를 할 때 해독제도 만들어져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레이디들의 패닉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걱정 마. 그때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들어 놓을 테니까.”

“나도 곧 티 파티 초대장을 보내도록 할게요.”

쥬아나와 신시아가 든든하게 말했다. 오드리아는 그녀들을 믿고 자신이 할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신시아가 보낸 초대장에 당연히 대부분의 레이디들이 참석을 하겠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신시아가 티 파티를 주최하는 것은 일사천리였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준비를 했고 대부분의 영애들 역시 이 티 파티에 또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는 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참석할 것이다.

* * *

모든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티 파티가 열리는 날이 왔다. 오드리아는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하고 있었다.

티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데 걱정과 긴장에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툭툭, 치고 있을 때였다.

“라미엘?”

뭐 하는 거지, 당황한 오드리아가 그를 빤히 쳐다보는데. 라미엘이 약을 꺼내 오드리아의 손등에 조심스럽게 바르기 시작했다.

“약은 제때 바르세요.”

“…….”

“괜찮을 거라고 방심했다가 잘 낫지 않으면 어떡합니까.”

라미엘은 속상함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드리아의 손등에는 지난번에 피었던 열꽃이 희미해졌지만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정신없이 바빴던 나머지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었다.

라미엘은 그게 계속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잘 바를게.”

오드리아는 라미엘이 약을 바르는 내내 가만히 손을 맡겼다.

유스티오 후작가에 조금 이른 시간에 도착했는데 쥬아나도 이미 와있었다.

“해독제는 만들었어.”

“감사해요.”

“당연히 만들어야 할 걸 만든 거야.”

쥬아나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준비는 다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모인 곳에서 알리기만 하면 된다.

신시아 주최의 티 파티.

수도에 있는 대부분의 레이디들에게 초대장을 보낸 만큼 티 파티는 연회를 방불케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 덕분에 유스티오 후작가 역시 티 파티를 성대하게 준비해야만 했다.

신시아 역시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레이디들을 한 명씩 모두 맞이해 주느라 정신없었다.

그 모습을 막상 보니 오드리아는 자신의 부탁 때문에 너무 많은 수고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대부분의 영애들이 도착했을 때쯤 에이미 역시 참석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와 줘서 고마워요, 오웬 자작 부인.”

“생각지도 못한 초대를 받았는데 당연히 와야죠.”

에이미의 눈초리가 휘어졌다.

그녀는 얼마 전, 신시아의 티 파티에서 안 좋은 기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에이미는 화사한 미소 뒤로 신시아에게 이전에 당한 일을 갚아 주겠다고 벼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이미는 곧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누며 티 파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오드리아는 내심 역시 에이미라고 생각했다. 절대 움츠러들지 않고 스스로 화려하게 빛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아이.

어느새 티 파티가 한창 진행되었다.

에이미의 파티에 자주 참석하는 단골들을 추려서 초대한다고 했는데도 그 수가 너무 많다 보니 덩달아 오늘 티 파티에 참석한 귀부인과 영애들 역시 많아졌다.

티 파티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인원수 때문에 다소 산만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신시아의 침착한 정리 덕분에 오래가지 않았다.

각자 아는 사람들끼리 인사를 나누고 가볍게 대화를 하다가 준비되어 있는 자리에 모두가 자리를 잡았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다 보니 긴 테이블을 세 줄로 놓았다.

“오늘 모두 참석해 주셔서 고마워요. 이렇게 다 같이 만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네요.”

신시아의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하녀들이 준비한 차를 손님들에게 따라 주었다. 사람이 많다 보니 오늘 동원된 하녀들도 수십 명이었다.

음식에만 순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차에도 순서가 있었다. 신시아는 가볍게 시작하는 차와 코와 입을 풍요롭게 해 주는 무게가 있는 차, 마지막으로 입 안이 시원해지는 차를 준비했다. 그에 맞춰 디저트는 몇 번이고 바뀌었다.

차를 마시고 티 파티가 한창 진행되었을 때였다.

사실, 에이미에게는 티 파티에 참석한 목적이 있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 얘기를 꺼내기 위해 티 파티 내내 눈치를 보던 에이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제가 오늘 선물을 가져왔어요.”

에이미의 말에 주위가 술렁였다.

“선물이라면…… 혹시……?”

그녀가 가져온 선물이 무엇인지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다.

“맞아요. 아직 판매하지는 않지만 곧 새로 나올 화장품이에요.”

그녀의 말에 오드리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평정심을 유지했다.

레이디들은 에이미의 선물에 관심이 가면서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에이미가 신시아에게 선물을 했다가 망신을 당했던 일이 얼마 전이었다. 게다가 하필 이번에도 신시아가 주최한 티 파티였다. 자연스레 신시아의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에이미는 그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 끝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신시아의 앞이라는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이번에 저희 부티크에서 정말 심혈을 기울여 이전의 것에서 부족한 것들을 개선해서 만들었어요.”

좋게 포장해서 심혈을 기울인 신상품이라는 것이고,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새로 돈을 긁어모으기 위해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그걸 많은 레이디들이 모이는 이번 기회에 선보이고 싶어서 참석한 것이다. 그럼 그렇지. 오드리아의 얼굴이 수습할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최근 에이미의 화장품은 수도 내에서 새로운 미의 기준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화장품을 사용해서 피부톤을 얼마나 잘 조절하는지, 햇빛에 노출되어 생긴 주근깨가 얼마나 잘 가려지는지.

“놀랄 만큼 피부가 매끄러워진다니까요? 저도 한번 쓰고 얼마나 놀랐는지.”

에이미는 마치 달달한 꿀을 맛본 것처럼 사람들을 말로 유혹했다.

“어머, 정말요?”

“지금 오웬 자작 부인이 바르고 있는 건가요?”

“확실히 오늘따라 부인의 피부가 유난히 빛이 나는 것 같더라니!”

한 명씩 터트리기 시작한 감탄은 어느새 에이미를 향한 찬사로 이어졌다.

“어서 빨리 써 보고 싶어요!”

“저도요! 혹시 지금 써 볼 수는 없나요?”

“저도 조금이라도 빨리 사용해 보고 싶어요.”

이미 에이미의 부티크에 빠져 있는 레이디들이었다. 어느새 이 자리에 누가 있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에이미의 손에 들려 있는 새로운 화장품에 온 관심이 쏠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써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럴수록 에이미의 입꼬리가 더 높이 말아 올라갔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만큼 레이디들은 한순간에 빠져들었다. 에이미가 손안에 있는 화장품으로 그녀들을 조정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역시 위험해.’

오드리아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저 화장품을 없애야 한다. 사람들이 다시는 쓰고 싶어 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했다. 오드리아가 매서운 눈으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번에는 모두에게 선물로 드리기 위해 챙겨 왔습니다.”

에이미의 한마디에 영애들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났다. 에이미가 뒤에 있던 하녀에게 눈짓을 하자 하녀가 나서 영애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기 시작했다.

영애들은 물건을 빨리 손에 넣기만을 바라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는 머릿속에 들어오지도 않는 것처럼. 흥분해서 상기되어 있는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사실 오드리아는 에이미가 새로운 제품을 꺼내자 처음에는 당황했다. 오늘 이 자리는 에이미의 화장품이 더 이상 유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준비한 자리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새로운 화장품을 홍보하다니. 어떤 의미로는 에이미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페이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재정 상태라는.

그걸 무마하기 위해서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 정말 장사꾼이라도 된 것처럼 이렇게 홍보를 하는 건가.

오히려 그녀가 얼마나 벼랑 끝으로 몰려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건 그녀의 최후의 발악이다.

‘이걸로 오웬 자작가 역시 반등의 기회를 만들려고 하는 건가.’

하지만 그 노력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오늘 이 자리는 그 화장품을 박살 내기 위한 것이니까.

오드리아는 여유롭게 에이미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최후의 몸부림을.

“이거, 지금 사용해 봐도 되나요?”

어느 영애가 한 말에 오드리아는 순간 당황했다. 에이미의 말을 들어 보면 분명 신제품이라고 하는 화장품은 이전 제품보다 효과를 높이기 위해 문제되는 성분을 더 넣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사용해 온 극소량과는 달리 어떤 반응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럼요.”

그때, 에이미의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 얼마든지 써 보라는 뜻이었다. 영애가 화장품을 사용해 보려고 뚜껑을 열었을 때였다.

지금 한번 쓴다고 갑자기 엄청난 일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 화장품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데 가만히 지켜보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역시 말려야 해.’

오드리아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그녀보다 빠른 사람이 있었다.

“잠깐.”

신시아의 고요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에 모두의 행동이 멈췄다.

신시아의 시선이 천천히, 하지만 드러나지 않고 은밀하게 오드리아를 향했다. 일단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오드리아는 하는 수 없이 뒤로 물러나 기다렸다.

“할 말이 있어요.”

신시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모두가 조용히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렸다.

“그 화장품은 도로 가져가세요.”

“네?”

신시아의 말에 에이미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게 무슨?”

“앞으로는 그 물건을 이곳에 가져올 수 없습니다.”

신시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곁에 있는 하녀에게 눈짓을 해 에이미가 나눠 주었던 화장품을 수거하라고 지시했다. 에이미의 지시에 하녀가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모두 수거해서 갈 때 돌려드리도록 하죠.”

에이미 못지않게 다른 레이디들 역시 당황한 티가 역력했지만 차마 신시아에게 항의하지는 못했다.

자신의 손에서 사라진 화장품에 아쉬운 입맛을 다시면서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눈치를 보기 바빴다.

“제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일부러 신경 써서 가져온 선물이에요. 어떻게 다른 분들에게 드린 선물까지 마음대로 가져가시나요!”

에이미는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듯 강력하게 항의했다.

화가 난 에이미의 목소리가 울렸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흥분한 얼굴을 하고 외쳤다. 자신이 뭔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훼방을 놓는 신시아에게 그동안 쌓였던 것들이 터진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영애라고 해도 이건 지나친 행동입니다.”

에이미는 겨우 진정했지만 여전히 신시아에게 따졌다. 확실히 영애들 역시 신시아의 행동에 놀란 듯 에이미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이유 없이 자신들이 받은 선물을 빼앗겼기에 더더욱.

“설마, 저를 또 잡상인 취급하시는 건가요?”

에이미는 영애들에게 동정심을 사는 것으로 목적을 바꿨는지 가련한 얼굴을 하며 목소리를 떨었다. 그녀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서럽게 말하자 다른 영애들 역시 술렁였다.

“저를 어떻게 보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에이미는 눈물을 한 방울 톡, 떨어트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오드리아는 그녀가 감정 표현에 관해서는 얼마나 탁월한 연기력을 지니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명연기를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지만.

“제가 부티크를 운영하고는 있지만…… 이건 단지 영애들에게 호의로 선물하려는 것뿐입니다.”

에이미의 말이 다른 영애들의 가슴을 울렸는지 신시아의 눈치를 보던 영애들이 하나둘 에이미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저희 역시 오웬 자작 부인의 선물을 언제나 기대하고 있답니다.”

“저희는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조금은 좋게 봐주셔도 되지 않을까요?”

조심스럽지만 에이미를 옹호하는 말이 이어졌다.

오드리아는 신시아가 괜히 난처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상황을 봐서 언제라도 끼어들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오웬 자작 부인.”

신시아가 에이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에이미나 다른 영애들의 반응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게서는 누구보다 강한 위엄이 흘렀다. 에이미를 옹호하던 영애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깨를 움츠릴 만큼.

“나는 그대가 화장품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어요.”

“……!”

에이미의 동공이 커졌다. 갑작스러운 말에 다른 영애들은 신시아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지만.

에이미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해도 신시아가 어디까지 알고 있다는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러니 이만 물러나세요.”

신시아가 차분하게 그녀를 설득했다. 에이미는 당황하는 듯하더니 어느새 냉정을 찾고서 입을 열었다.

“이번엔 또 무슨 말로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건가요? 언제까지 말도 안 되는 말을 제가 들어야 하는 거죠?”

에이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받아쳤다. 여기서 물러날 수 없었다. 어차피 벼랑 끝이었다. 그래서인지 에이미는 신시아에게 밀리지 않고 버텼다.

두 사람이 팽팽하게 대립하자 주위에 있는 영애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한마디라도 끼어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쥬아나와 오드리아가 나설까 눈치를 봤다. 하지만 신시아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내저었다.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만류하는데 멋대로 나설 수는 없었다. 오드리아와 쥬아나는 하는 수 없이 기다렸다.

“그 말 지킬 수 있나요?”

신시아가 엄격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한 치의 거짓이라도 드러날 경우에는 각오하라는 경고였다.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책임지실 수 있나요?”

에이미 역시 물러나지 않고 신시아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버티는 거지.’

혹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뭔가가 있나 하는 불안감이 들 정도였다.

“저는 오웬 자작님의 부인으로서 가문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자 부티크를 운영하는 거예요. 제가 관심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유하고 함께 나누는 것 역시 저에겐 기쁨이니까요.”

“…….”

“물론 제가 직접 부티크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 안 좋게 말할 수는 있지만, 아무런 증거 없이 저를 모욕하는 것은 가만있을 수 없어요. 그게 아무리 유스티오 후작 영애라고 해도.”

에이미가 그녀를 몰아붙였다. 오드리아는 그 모습을 더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오드리아는 지난 오필리아 숍의 문제도, 이번 일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 가만있을 수만은 없었다.

여기서 에이미에게 휘말리면 안 된다. 확실하게 끊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로는 마약이라는 말을 해도 영애들이 얼마나 믿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에이미가 발뺌을 하며 그런 적이 없다고 버티면 꽤 많은 수의 영애들이 믿을지도 모른다. 논쟁의 여지가 없도록 확실한 증거를 보여줘야 한다.

그때, 유난히 하얀 에이미의 피부가 눈에 보였다.

그토록 흥분을 했는데도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할 정도로 하얘서 얼굴만 보면 흥분한 기색을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였다.

‘잠깐만……. 에이미가 화장을 지운 모습을 본 적이 있었나?’

물론, 외출을 할 때는 모두 기본적인 화장을 했다. 게다가 지금은 부티크를 운영하고 있으니 에이미는 언제나 완벽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섰다.

그러니 당연히 본 적 없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데…… 오드리아는 어딘가 께름칙했다.

‘만약…… 에이미가 화장을 지울 수 없는 거라면?’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순간 쥬아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화장품에 있는 마약의 부작용에 대해.

‘그때 분명 부작용 중에 하나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가능성이 맞는지 확인해 볼 가치가 있었다.

오드리아가 신시아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녀의 강력한 주장에 신시아가 드디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오드리아가 나설 차례가 됐다.

“오웬 자작 부인.”

오드리아가 에이미를 부르며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오드리아의 움직임에 놀란 것은 다른 영애들뿐만이 아니었다. 갑자기 나서는 오드리아의 행동에 에이미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오드리아가 그녀의 앞에 다가섰다.

“뭐, 뭔가요?”

당황한 에이미가 이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목소리를 떨었다.

에이미가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나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흔들림 없이 에이미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자신 있나요?”

“제가 자신 없을 이유라도 있나요?!”

에이미의 목소리에 불안함이 깃들었다. 방금까지는 당당하고 이성적이었던 에이미가 오드리아의 행동에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한 말들, 전부 자신 있나요?”

“그, 그럼요.”

“그렇군요. 그럼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게 밝혀지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럴 리 없어요!”

에이미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아요. 증명은 내가 해 줄 테니까.”

“……?!”

에이미의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오드리아의 손이 테이블 위에 있는 물 잔을 들었다. 오드리아의 작은 움직임에도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에이미 역시 오드리아가 물잔을 집는 것을 보았다. 설마 자신에게 그걸 뿌리겠어? 불안해하면서도 앞으로 닥칠 상황을 강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우려했던 상황은 한순간에 벌어졌다. 촤아악-, 물이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모두의 눈이 커졌다.

오드리아가 뿌린 잔 속의 물이 에이미의 얼굴을 정확히 강타했다. 그 순간 영애들이 모두 경악하며 소리를 질렀다. 놀란 것은 신시아와 쥬아나도 마찬가지였다.

“꺄아악!”

하지만 가장 놀란 것은 에이미였다. 에이미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쌌다. 그녀의 손가락이 파들파들 떨렸다.

사람들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신들이 본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하지만 오드리아의 시선은 여전히 에이미에게 고정된 채였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품에 있는 손수건을 꺼내 에이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뭐, 뭐야……?!”

에이미가 양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며 밀어내려고 했지만 오드리아가 좀 더 빨랐다.

손수건으로 에이미의 얼굴을 닦아냈다. 그녀의 화장이 지워지고 맨얼굴이 드러나도록.

“역시…….”

오드리아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맨얼굴을 어떻게든 가려 보려고 애쓰는 에이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예상대로네요.”

오드리아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아닌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사람들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오드리아가 보고 있는 에이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에는 대체 뭘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의아해하던 영애들이 뭔가를 발견하고 나서부터 점차 눈이 커지더니 벌어지는 입을 양손으로 겨우 막았다. 그중에선 비명을 참지 못하고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에이미의 얼굴 피부 일부분이 흉측하게 변형되어 있었다. 턱선부터 귀 밑 아래 부분에 까맣게 썩은 것 같은 상태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화장품을 가장 오래 사용한 사람이 부인이니까.”

에이미는 항상 완벽한 모습이었다. 단 한 번도 민낯을 드러낸 적 없었다.

그리고 쥬아나가 말한 부작용이 있는 화장품을 가장 오래 사용한 이 역시 에이미였다. 그녀의 피부가 멀쩡할 리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에이미는 허둥거리며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이미 물로 흘러내리기 시작한 화장 너머로 에이미의 피부가 그대로 노출되었다.

모두가 선망하던 화려하고 아름답던 에이미의 얼굴 너머에는 이미 생명을 다해 두 눈으로 보기 힘든 모습이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해서가 아니라 이미 일그러지고 망가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단 한 순간도 화장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화장품 때문에 생긴 증상인데 그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는 그 화장품밖에 방법이 없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결국 이렇게 된 것일 테지.

오드리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이미의 몰골을 본 순간 우습거나 속 시원하지 않았다.

욕심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망가트린 인생이 가여워서, 이렇게밖에 살지 못하는 에이미가 안쓰러워서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오드리아는 에이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돌아서 다른 영애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신시아 님께서 화장품을 모두 수거한 건 이런 이유입니다.”

“……?!”

“오웬 자작 부인의 화장품에는 마약 성분이 있어서 지속적으로 사용하면 할수록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드리아가 경고했다. 그녀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영애들은 오드리아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화장품을 지속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가장 큰 상징이 지금 눈앞에 있으니까.

오드리아의 예상대로 모두에게 충격을 뛰어넘어 공포라는 경각심이 생겼다.

화장품을 매일같이 사용하던 영애들은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피부가 가려워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면서 피부가 썩어 가는 상상이 들어 참지 못하고 이 자리에서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얼굴이 언제 저렇게 흉측하게 변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지금까지 써 온 화장품을 모두 토해 내고 싶어 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이런 걸 준 건가요!”

“감히 이런 걸로 우리를 속이다니!”

“어떻게 이런 걸 우리에게 내밀 수가 있어요!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만약 무슨 문제라도 나타난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한 번 터진 분노는 에이미를 향해 무서운 기세로 쏟아졌다.

그동안 자신들이 사용했던 화장품이 이런 물건이란 것이 발작처럼 떠올라 끔찍하고 괴로웠다.

어느새 영애들이 에이미를 둘러쌌다. 온갖 욕설을 퍼붓고 그녀를 사방으로 밀어냈다. 에이미는 힘없이 휘둘리다 바닥에 쓰러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닥을 기고 치맛자락은 밟히고 더러워져서 원래 그 색이 무엇이었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

에이미는 고개를 숙인 채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에이미로서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래서 위험하다싶을 만큼의 성분을 넣어 새로운 화장품을 만들었다.

이것을 성공시켜야만 에이미 자신도 오웬 자작가도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이번에도 오드리아 때문에 망쳤다.

“이 일은 돌아가서 가문에 바로 알리겠어요.”

에이미의 화장품을 사용한 영애들 중 한 후작가의 영애가 에이미에게 일갈했다.

순간 피식, 하고 웃음소리가 터졌다. 분노하고 있는 영애들을 비웃는 것처럼. 에이미가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경고를 한 후작가의 영애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그 뒤에 있는 영애들까지 바라보면서. 에이미는 피식거리며 계속 웃음을 흘렸다.

“그동안 실컷 좋아하지 않았나요?”

에이미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차라리 뻔뻔하게 나가기로 한 것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대가 없이 원하는 모든 걸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요?”

그녀의 입술이 비뚜름해졌다. 영애들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아름다움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라.”

에이미는 흥분한 것 같으면서도 냉정해 보였다.

“뭐, 뭐?!”

“세상에 그냥 얻는 게 어디 있어?”

에이미의 목소리는 점점 차갑게 가라앉았고 영애들의 얼굴이 흥분과 분노로 물들었다. 너무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들은 내가 주는 파티와 아름다움에 홀려서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았잖아.”

“……!”

“이제 와서 피해자인 척하지 마.”

에이미는 여전히 고고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화장이 지워져 드러난 피부는 여전히 흉측했지만 에이미의 자세와 태도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당당했다.

하지만 영애들 역시 물러날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한다고 이런 짓이 용서될 거 같아!”

“마, 맞아요! 이번 일은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두고 봐!”

영애들은 에이미에게 한 마디씩 협박 같은 경고를 하고 돌아갔다. 더 이상 이곳에 있고 싶지 않은 듯 도망치는 것처럼 사라졌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에이미에게 속고 있었다는 것이 민망하고 창피한지 그녀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티 파티는 엉망진창으로 끝났다. 하지만 원하는 것은 모두 이뤘다.

오드리아의 시선이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 허공을 향해 독기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 에이미를 향했다.

“이제 끝났어.”

오드리아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에이미의 죽어 있던 눈빛이 오드리아를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녀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그동안 에이미가 아등바등하게 쌓아 올린 위태로운 탑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모두가 에이미를 비난했다. 그녀는 물론이고 오웬 자작가는 더 이상 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있는 중인 걸까.

그때였다. 미세하지만 분명 에이미의 고개가 살짝 움직여 오드리아를 향했다.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이렇게 허무하게는…… 무너지지 않아.”

에이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두고 봐.”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처절하게 느껴졌다. 에이미가 땅을 짚으며 일어났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번뜩이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일어날 거야.”

“…….”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에이미는 한번 추락했다가 다시 여기까지 올라왔다. 이번에도 그렇게 하면 된다. 바닥에 떨어져도 몇 년, 몇십 년이 걸릴지 모르지만 다시 기어오를 것이다.

에이미는 자신이 한 말처럼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한 걸음 내디뎠다.

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당장이라도 옆으로 넘어질 듯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몸과 헝클어진 머리카락, 밟히고 군데군데 찢어진 곳이 보이는 드레스. 그 모습이 기괴해서 그녀의 앞을 아무도 막지 못했다.

“나는 언제나 화려하게 빛나야 하는 존재니까.”

에이미는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중얼거렸다. 눈빛은 어느새 집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한기를 느낄 만큼 섬뜩했다.

그녀의 걸음이 향하는 곳마다 사람들이 자리를 피했다. 만약 그녀의 눈앞에 보이기라도 하면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오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에이미는 쓰러질 듯 휘청거리면서 저택가를 떠났다.

그녀의 모습이 사라져서야 주위의 공기가 편해졌다. 사람들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돌려보내도 돼?”

쥬아나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오드리아는 에이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으니까.”

에이미가 갈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었고 그중 어디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녀를 기다리는 것은 단 하나였다. 절망, 좌절, 최후. 모두 그에 어울리는 단어들이었다.

‘저지른 짓은 책임을 져야지.’

오드리아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결심했다. 지난날에는 남아 있었을지도 모르는 연민 따위는 던져 버리겠다고, 에이미와 노엘이 벗어날 수 있는 길 따위는 남겨 놓지 않겠다고. 두 사람에게 앞으로 남은 미래 따위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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