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5/48)

chapter 13. 에이미와 노엘

“내가 못 이긴다고?”

에이미는 자작가로 돌아오자마자 오드리아의 말을 곱씹으며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비틀었다.

‘어디 두고 보자고. 내가 이기는지 못 이기는지.’

고작 이번 일 한 번으로 자신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을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에이미는 다짐했다.

에이미는 곧바로 노엘의 집무실에 들이닥쳤다.

“누님? 갑자기 무슨 일입니까.”

“노엘. 지난번에 얘기했던 그 사업 지금 해야겠어.”

“이렇게 갑자기 말입니까?”

노엘의 눈이 커졌다. 에이미는 이미 흥분한 모습이었다.

“갑자기가 아니야. 그 얘기가 나온 지가 언젠데 많이 늦은 거지.”

노엘이 작게 한숨을 쉬며 에이미를 설득하려 했다.

“아직은 좀 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고 난 다음에…….”

“그 준비를 언제까지 할 건데. 나는 지금 바로 해야겠어.”

“아직 준비가 필요합니다.”

“대체 언제까지! 그러다 정작 중요한 건 다 놓치고 나서야 할 거야?”

노엘이 에이미를 말려 보려고 했지만 눈이 뒤집힌 에이미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밀어붙였다.

“더는 여유부릴 때가 아니야.”

에이미는 오드리아를 이기기 위해 숨 가쁘게 일정을 소화했다. 그녀가 오랜 시간 계획해 오던 것을 실행하기 위해서.

* * *

오드리아가 오랜만에 오필리아 숍을 방문했을 때였다. 오필리아 숍의 맞은편이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저게 뭐지?”

오드리아가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나온 페이지가 답했다.

“오웬 자작 부인이 직접 운영하는 곳이에요.”

“에이미가?”

에이미가 운영하는 곳이라는 설명에 오드리아는 오필리아 숍의 맞은편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람들 때문에 그 안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네. 드레스는 물론이고 여러 화장품을 판다고 합니다.”

한동안 조용하다 싶었는데 그사이에 숍을 차리다니. 그것도 귀부인이 직접.

수도에 있는 귀부인들 중 수입을 위해 숍을 운영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경우 오드리아처럼 간접적인 운영이 많았다. 다른 누구보다도 품위에 집착하는 에이미가 직접 숍을 운영한다고?

오드리아는 의아했다. 몇 가지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다.

“……일단 들어갈까.”

오드리아는 맞은편에 있는 숍을 보던 눈길을 거두고 오필리아 숍으로 들어갔다.

‘저거였나.’

오드리아 역시 어느 정도 소문을 들은 것이 있었다.

최근 오드리아에게 오는 초대장의 수가 줄어들었다.

그 원인이 영애들이 빠져 있는 연회가 따로 있어서라는 얘기를 들었다. 다만, 그 연회 초대장은 오드리아에게는 오지 않았다.

그걸 확인하려고 오필리아 숍에 방문한 것이었는데 그 맞은편에 있는 에이미가 운영한다는 숍을 보고 모든 상황이 파악되었다.

페이지는 오드리아에게 숍에 관한 내용을 자세하게 보고했다. 우선 숍은 부티크 형식으로 소규모였다.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에게 특별한 것을 선물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부티크를 오픈하자마자 굉장히 반응이 좋습니다. 아무래도 오웬 자작 부인 자체가 얼굴이나 스타일로 사교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해 그런 것 같습니다.”

확실히 에이미는 사교계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건 그녀의 가문이 대단하거나 오웬 자작가가 최근 상승세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로지 에이미의 외모 자체가 이목을 끌만큼 대단히 화려하고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웬 자작 부인의 부티크에서 매일 밤마다 파티를 연다고 합니다.”

“파티?”

“네. 굉장히 화려하고 엄청난 파티라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환호했고 휘청거리던 에이미의 입지 역시 다시 높아졌다.

에이미는 새로 오픈한 부티크에서 다양한 파티를 주최했다. 물론 오드리아는 교묘하게 제외하면서. 처음에는 오드리아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던 영애들 역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부티크로 향했다.

에이미의 부티크 2층에서 소문의 파티가 한창 이어지고 있었다.

부티크다 보니 일반 연회장에 비해서는 작은 공간이지만 최고급으로만 꾸며진 장식품과 악단, 그리고 와인과 음식들로 인해 오히려 선택된 사람들만 올 수 있는 프라이빗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천장을 채운 거대한 샹들리에, 보석으로 테두리를 장식한 액자가 곳곳에 걸려 있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물을 마시기 위한 잔마저도 최고급 크리스털로 만든 것이다.

눈길 가는 곳, 손길이 닿는 곳 모두 눈을 의심할 만큼 값비싼 것들로 채웠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파티에 참석하는 귀족들도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차려 입었다.

“그런데 오드리아 영애는 오지 않는 건가요?”

파티에 참석한 영애 중 한 명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초대장을 보내도 답장이 없네요.”

에이미가 은근슬쩍 오드리아를 탓하는 뉘앙스를 풍겼다.

“아무래도 지난 연회 때 있었던 일을 아직 마음에 담아 두고 있나 봐요.”

“지난 연회 때요?”

순식간에 영애들의 시선이 오갔다. 플로렌스 연회에서 오드리아와 에이미의 드레스가 겹쳤던 일을 떠올리는 것이다. 에이미는 그녀들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보다가 갑자기 곤란한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때 저도 드레스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 건지…….”

에이미는 플로렌스 연회에서 있었던 일은 일종의 사고였다며 해명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신을 감싸주지 않은 오드리아의 대처가 나빴다는 듯이 은근슬쩍 분위기를 몰아갔다.

부티크 파티에 참석한 영애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에게는 지금의 파티가 중요하지 그날의 진상이 어떻게 된 건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영애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호사스런 파티에 다시 한번 초대받는 것이다.

“오늘 참석해 주신 분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부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에이미의 눈짓에 하녀들이 선물을 가져와 손님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었다.

“어머, 이것 좀 봐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부인. 다음에도 꼭 초대해 줘요.”

“저도요. 잊지 말고 불러 줘야 해요.”

귀부인과 영애들의 성화에 에이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럼요. 얼마든지 또 와 주세요.”

호화로운 파티에 호사스러운 선물까지. 에이미의 파티는 점점 선망의 대상이 되어 갔다.

* * *

그 영향 때문인지 오필리아 숍은 한산했다. 주 고객들이 모두 부티크에 가 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사교계에 데뷔한 후부터 이곳저곳 참석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던 오드리아는 오랜만에 한가해졌다.

다들 에이미가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하느라 개인적인 티 파티나 연회를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드리아가 페이지의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말했다.

“이러다 망하는 거 아냐?”

오드리아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말하는 오드리아도 페이지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저희를 버리시면 안 됩니다.”

“그럴 리가. 잊었어? 여긴 내 놀이터인 거.”

오드리아의 말에 페이지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곳은 과거에 트루디 대공이 오드리아에게 놀이터로 선물해 준 곳이다.

“그러네요.”

애초에 수익이 목적이 아닌, 오로지 오드리아의 즐거움과 만족을 위한 곳.

반달 눈웃음을 짓고 있던 오드리아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당하기만 하는 건 싫어. 재미없잖아.”

“물론이죠.”

페이지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오드리아가 얘기하지 않아도 페이지 역시 이대로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이것들입니다.”

오드리아가 소파에 앉자마자 페이지는 오드리아 앞에 부티크에서 현재 팔고 있는 화장품들을 내놓았다. 미리 직원을 시켜 구매해 온 것이다.

“특히 이것이 가장 인기가 많습니다.”

페이지가 오드리아가 있는 쪽으로 밀어낸 것은 드레스나 주얼리가 아니었다. 어떤 병이었다.

“얼굴에 바르는 것인데 혈색이 좋아 보이게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특히 붉어진 피부에 바르면 진정시켜 주면서 피부 톤이 깨끗해지는 효과도 있다고 합니다.”

오드리아는 병의 뚜껑을 열어 안에 있는 내용물을 확인했다. 코를 가까이 가져가 냄새를 맡아 보기도 했다.

“오웬 자작 부인이 항상 사용하는 것이라고 해서 더욱 인기가 많습니다.”

오드리아는 에이미의 얼굴을 떠올렸다. 에이미는 어릴 때부터 피부가 좋았다.

과연 이걸 발라서 그런 걸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녀가 사용한다고 하면 영애들이 따라 하고 싶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한번 발라 볼까?”

별생각 없어 보이는 오드리아와 달리 페이지는 고민이 깊어 보였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야…… 왜 없겠습니까.”

페이지가 왜 모르는 척하냐는 듯이 말했다. 그 말에 오드리아는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럴수록 페이지는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오드리아 님은 걱정되시지도 않습니까?”

“글쎄. 나는 별로 걱정되지는 않는데.”

오드리아가 태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허세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페이지가 이대로 당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 안 그래?”

오드리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페이지를 믿고 있다는 눈빛으로. 순간 페이지는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페이지를 믿는걸.”

오드리아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쐐기를 박았다. 페이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부티크에 밀릴 수 없었다.

“그럼요.”

페이지가 대답했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드리아는 생글생글 웃었다.

“부담에 체할 수는 없으니까, 소화시켜야지.”

페이지는 오드리아의 기대를 충족시킬 것이다.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보란 듯이 오필리아 숍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오웬 자작가의 부티크. 페이지는 그곳을 가만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일단 무슨 속셈인지는 알겠고.”

역시 새로운 뭔가를 내놓아야 하나?

‘화장품이라…….’

오필리아 숍에서 취급하지 않는 것이 바로 화장품이었다.

* * *

에이미는 어느새 사교계의 중심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옆에 있으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짧은 사이에 체험한 영애들이 완벽하게 에이미에게로 돌아서면서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흘러갔다.

이번에는 오드리아가 외면당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영애들의 마음이란 그때그때 달라지곤 했다. 그러니 지금 당장의 상황만으로 초조해할 필요는 없었다.

오드리아는 오랜만에 티 파티에 참석했다. 확실히 에이미의 부티크에서 판매하는 화장품이 유행인지 한눈에 봐도 비슷한 화장을 한 영애들이 많았다.

‘흐음…….’

다만 오드리아는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그래서 다른 영애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동안 그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오드리아 영애. 이쪽으로 오세요.”

신시아 후작 영애가 오드리아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오드리아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녀가 트루디 대공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사실이니까.

“감사합니다.”

오드리아는 신시아에게 인사했다.

“사실 저는 오웬 자작 부인을 싫어해요.”

그런데 신시아가 갑자기 훅 치고 들어왔다. 지금까지 오드리아가 알고 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오드리아는 당황해서 눈만 동그랗게 떴다.

“혹시 영애는 오웬 자작 부인을 좋아하나요?”

“아뇨.”

오드리아는 칼같이 대답했다. 오히려 굉장히 싫다는 것이 그녀의 얼굴에 드러났다. 순간 너무 노골적이었나 싶어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이미 신시아가 전부 본 후였다.

“역시 그렇군요. 우리 생각이 같네요.”

신시아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드리아마저도 반할 정도로 환한 미소였다. 그때였다. 밝고 명랑하면서도 품위는 잃지 않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런, 저도 같은 생각인데 우연이네요.”

“쥬아나 영애.”

쥬아나 릴스테인였다. 그녀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오드리아를 바라보았다.

“나도 오웬 자작 부인 별로야.”

쥬아나가 다시 한번 확인사살을 했다. 신시아는 쥬아나와 오드리아가 앉을 만한 자리를 따로 만들었다.

“오드리아, 오랜만이야.”

쥬아나는 오드리아를 향해 눈을 찡긋, 하며 인사했다.

“차 좀 더 마실래요?”

신시아는 옆에 있는 하녀에게 차를 더 가져올 것을 부탁했다.

오드리아와 신시아, 그리고 쥬아나까지. 세 사람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은 그림 같았다. 같은 여자들의 시선을 끌 정도로.

* * *

에이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금은 누가 뭐라고 해도 에이미의 황금기였다. 모든 레이디들이 그녀를 동경하고 따라 하고 싶어 했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화제가 되었다.

많은 레이디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존재. 그녀가 하는 귀걸이, 머리 장식, 드레스가 모두 품절되었다. 그녀의 파티에 초대받기 위해 잘 보이려 애썼다. 언제나 그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녀에게는 늘 시선이 따라 다녔다. 그중에는 투기와 질투도 섞여 있었지만 그거야말로 그녀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그 사이에는 동경과 부러움이 섞여 있으니까.

모두의 중심에 서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시선은 당연한 것이다. 에이미는 오히려 더욱 즐겼다.

그녀가 원하던 인생이 바로 이런 것이다. 모두에게 주목을 받고 반짝반짝 빛나는 인생. 그녀에게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에이미는 오드리아를 비웃었다. 절대 자신을 이기지 못할 거라고 말하던 오만한 눈빛을 떠올리며 마음껏 조롱했다.

‘이걸 봐. 결국 내가 다 해내잖아.’

에이미의 자신감은 한없이 높아졌다. 언제나 바라던 모습이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외모를 지녔다.

자신의 외모만큼 아름다운 것을 동경했다. 저 빛나는 모든 것들이 그녀의 것이어야 하는데 정작 그녀의 손에 있는 것은 볼품없는 것들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등바등하며 노력했다.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웃을 수 있었다.

화려한 것이야말로 그녀의 적성이었다. 빛나는 것이야말로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마님. 이제 식당으로 가셔야 합니다.”

시녀는 한창 기분을 내고 있는 에이미의 심기를 거스를까 눈치를 보며 최대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그렇게 됐나.”

다행히 에이미의 기분은 여전히 좋았다. 그녀는 오웬 자작과 노엘이 기다리고 있을 식당으로 향했다.

오웬 자작과 에이미, 그리고 노엘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노엘은 오웬 자작의 충실한 보좌관이자 에이미의 동생으로 그의 인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오웬 자작은 그를 가족처럼 대했다.

“부인. 지금 하고 있는 숍은 잘되고 있나요?”

오웬 자작이 물었다. 최근 에이미가 운영 중인 부티크에 대해 묻는 것이다. 에이미는 사르르 눈을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소문 못 들으셨나요?”

“하하. 역시 우리 부인은 뭐든 뛰어납니다.”

“그럼요. 제가 누군데요.”

오웬이 에이미의 말에 시원하게 웃었다. 그녀는 오웬 자작에게 하는 말 한마디에도 콧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이번 사업은 자작가에도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돼요.”

“걱정 마세요. 이미 영애들의 마음은 확실하게 잡았습니다.”

오웬 자작의 당부에 에이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사실 부티크를 시작한 것은 오웬 자작가의 새로운 사업과 연결된 것이다. 사업의 규모를 확정 짓기 전에 반응을 살피기 위해 만든 것이다.

“한 번 사용하면 절대 헤어 나올 수 없을 거예요.”

에이미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미소 지었다. 오웬은 그녀의 말을 신뢰하는 것인지 그녀의 미소에 세뇌된 것인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과 노엘이 이렇게 힘이 되어 주니 든든합니다.”

저녁 식사 내내 오웬은 즐거운 듯 대화를 이어 나갔다. 최근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는 것이 부인인 에이미와 그녀의 동생 노엘 덕분인 것 같아서 자신의 안목에 자신감도 붙었다.

식사가 끝나고 오웬 자작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집무실로 향했다. 식당 안에 노엘과 에이미만 남자마자 식사 내내 방긋방긋 웃던 에이미의 표정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하여간 욕심만 많아서. 자기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다고.”

에이미는 오웬 자작이 돌아가자마자 냅킨을 테이블 위에 던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이 가문을 일으킨 건 전부 너와 나잖아. 근데 잘난 척은 자기가 다 한단 말이야.”

에이미가 불만을 터트렸다.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도 이제는 지겨웠다.

그녀와 노엘이 노예가 되었을 때 전 재산을 써서 구해 주었을 때까지만 해도 그를 외면한 자신을 반성하고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오웬 자작의 한심한 부분들만 보였다.

“어쩜 나아지는 게 하나도 없어.”

저런 사람을 좋아하는 척해야 하다니. 에이미는 짜증이 났다.

하지만 정작 노엘의 걱정은 오웬 자작이 아니라 에이미였다.

“실수로라도 자작님 앞에서 티 내지 마세요.”

“내가 오웬처럼 멍청한 줄 아니? 나를 뭘로 보고. 걱정 마.”

“그래도 조심하세요.”

에이미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그녀는 처세에 있어서만큼은 감탄이 나올 만큼 뛰어나지만 언제나 감정적인 것이 문제였다.

에이미가 식당을 나와 방으로 향하려고 하자 노엘은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런데 누님. 정말로 괜찮은 거 맞습니까?”

그 말에 에이미의 발걸음이 잠깐이지만 멈췄다.

노엘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가 보고받은 내용에 의하면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호화로운 파티에 언제나 미어터지는 손님들, 영애들 사이의 인기로만 보면 부티크는 잘나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을 운영하고 있는 내부를 보면 상황이 달랐다. 처음부터 지출이 너무 많았다.

게다가 매일 밤마다 하는 파티와 선물은 지나치게 호화로웠다. 이제 막 오픈한 부티크가 감당하기에는.

결국 자작가의 재산을 끌어들여 메우고 있었다. 계속 이 상태로 자작가에서 가져오는 액수가 늘어난다면 노엘의 선에서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이미는 여기서 멈출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일단 지금은 버텨야 돼.”

에이미는 오필리아 숍이 무너질 때까지 버틸 계획이었다.

“이건 이제 누가 더 오래 버티느냐 하는 싸움이야.”

“좀 더 안전한 방법을 택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노엘의 말에 에이미가 그를 돌아보았다. 에이미의 눈빛이 흉흉했다.

“이제 와서 안전한 방법이 어디 있어?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금 눌러 놔야 돼.”

노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에이미의 말대로 지금 자신들은 불안한 상황이었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하는 것은 맞으니까.

오필리아 숍을 무너트리기만 하면 그때부터 회복할 수 있다. 지금 포기하면 돌아오는 것은 손해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노엘은 찜찜한 마음이 남아 있었다.

“걱정 마. 자신 있으니까.”

에이미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하지만 노엘은 여전히 불안한지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하지만 노엘이 에이미를 말릴 방법은 없었다. 부디 에이미의 뜻대로 흘러가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래도 조심하세요.”

노엘은 찝찝한 마음에 마지막으로 조언했다. 에이미는 제대로 듣지도 않는 것 같았지만.

노엘이 돌아가고 에이미 혼자 남았다. 그 순간 에이미의 아름다운 얼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졌다. 입술을 피가 날 기세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실 에이미 역시도 부티크의 위험요소 때문에 굉장히 초조했다.

오드리아에게는 커다란 배경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트루디 공작가, 또 다른 하나는 오필리아 숍이었다.

트루디 공작가는 에이미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오필리아 숍이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에이미는 오드리아의 배경 중 하나를 무너트려 그녀의 위치를 흔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부티크를 오픈하자마자 무리를 해 가면서 영애들을 현혹했다.

하지만 에이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드리아의 위상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처세술로 사교계에 입성해야 했던 에이미와는 시작부터 달랐으니까.

오드리아는 무려 트루디 공작가의 사랑받는 영애였다. 거기에 그녀와 함께 어울리는 신시아와 쥬아나.

신시아가 조용히 사교계를 장악하고 있다면 쥬아나는 사교계에서 거리낄 것 없이 날뛰는 존재였다.

한마디로 둘 다 사교계에서 대단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에이미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오드리아를 비롯해 신시아와 쥬아나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두 명은 왜 오드리아 그년 옆에서 알짱거리고 난리야.’

이대로 가다가는 자칫 오드리아에게 타격 하나 입히지 못하고 부티크만 휘청거리게 된다.

부티크에 문제가 생기면 오웬 자작과 노엘이 구상하는 사업에도 차질이 생긴다.

‘안 돼. 절대 그렇게는 안 돼.’

결국, 에이미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 * *

오드리아가 그동안 여유로웠던 이유 중 하나는 에이미의 호화 파티가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재화는 한정적인 것이다. 특히 오웬 자작가처럼 최근 성장 중인 곳은 한창 사업을 확장 중이다. 사업을 확장할 때는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간다. 즉, 여유 자금이 부족하게 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런데 에이미는 소문으로만 들어도 과하다 싶을 정도의 지출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허영을 충족시키고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

‘이제 슬슬 반응이 올 텐데’

오드리아의 예상대로 에이미는 한계에 직면하고 있었다.

부티크에 있는 연회장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본 에이미의 눈이 뒤집혔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거지?!”

“더 이상의 파티는 불가능합니다. 파티를 준비할 자금이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부티크와 파티의 전체적인 운영을 맡은 관리인의 말에 에이미의 눈매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그런 판단을 왜 당신이 하지?”

“마님……!”

“난 분명 준비하라고 했어. 제시간 안에 제대로 세팅해 놓지 않으면 각오해야 할 거야.”

에이미가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그대로 돌아섰다.

슬슬 반응이 오고 있을 때 끝장을 봐야 한다. 그런데 고작 관리인 주제에 이 중요한 시기에 더 이상의 파티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한편, 오필리아 숍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은 증명하는 일이 생겼다. 지금까지 수도에서는 본 적 없는 귀부인이 오필리아 숍을 방문했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찾으시나요?”

페이지가 정중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귀부인은 주위를 살짝 두리번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황궁에 갈 때 입을 드레스를 맞추려고 하는데, 내가 수도의 유행은 잘 알지 못해서요.”

“그럼 제가 몇 가지 추천해 드려도 될까요?”

“부탁해요.”

페이지는 몇 가지 스케치를 귀부인에게 보여 주었다. 귀부인은 그 스케치를 꼼꼼히 확인했다. 하지만 맘에 드는 것이 없는지 계속 보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

“확실히 제가 사는 곳과는 스타일이 다르네요.”

“혹시 찾으시는 스타일이 있으신가요?”

페이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국은 넓은 영토를 자랑하는 나라였다. 그만큼 수도와 각 영지 사이에는 엄연히 다른 문화가 존재했다. 그렇기에 수도의 유행과는 다른 각 지방만의 스타일이 존재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유행을 선도하는 수도의 스타일을 하루라도 빨리 접하기를 바라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가지고 유행과는 다른 것을 추구하는 사람 역시 존재했다.

이름 모를 귀부인의 경우 얼핏 보면 수수해 보이는 드레스지만 매우 고가의 소재를 사용했다.

필시 평범한 귀부인은 아닐 것이다. 페이지는 귀부인의 정체에 대해 유추하면서 그녀가 원할 만한 스타일을 고심했다.

귀한 신분인데 수수한 차림이라는 것은 과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수도의 유행은 모른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귀부인이 사는 영지의 유행이 수수한 스타일이라는 뜻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깔끔하게 묶은 머리와 작은 움직임에서도 느껴지는 품위는 귀부인 개인의 성향 역시 화려한 스타일보다는 단정한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페이지는 귀부인의 드레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부인께서 입고 계신 드레스에 수도에서 유행하고 있는 스타일을 살짝 섞으면 유행에 뒤처져 보이지 않으면서도 단정해 보일 겁니다.”

“그게 가능한가요?”

“그럼요.”

귀부인의 미심쩍은 물음에 페이지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얼마 후, 드레스를 직접 찾으러 온 귀부인은 굉장히 마음에 들어 하면서 돌아갔다.

기품이 느껴지던 귀부인의 정체는 황제의 누이였다. 어린 나이에 서쪽의 경계를 지키는 공작과 결혼을 해서 떠났기에 수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특히 서쪽의 공작이 영지를 잘 벗어나지 않아 더더욱 수도와는 인연이 없었다가 결혼하고 20년 만에 황궁을 방문한 것이다.

게다가 황제의 누이가 황궁에 들어섰을 때 입은 드레스에서 기품이 흘러 주위를 압도했다는 호평이 자자했다. 그 소문의 드레스를 만든 곳이 오필리아 숍이라는 것과 함께.

아무리 유행이 급변한다 해도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귀부인이라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오필리아 숍을 찾는다는 것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한동안 발길이 뜸했던 영애들의 발길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럴 걸 예상하고 계셨던 겁니까?”

페이지가 물었다. 오드리아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사실 오드리아는 이런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오드리아가 믿고 있었던 것은 다른 것이다.

오드리아에게 오필리아 숍의 존재란 중요했다. 하지만 그건 오드리아의 개인적인 마음일 뿐 트루디 공작가에게 오필리아 숍이란 단순한 선물이었다.

오드리아가 가지고 싶어 해서 줬고 운영하기를 바라서 그렇게 했을 뿐인 선물.

그러니 오필리아 숍에 단 한 명의 손님도 오지 않는다고 해도 오필리아 숍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

오드리아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트루디 공작가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더군다나 에이미가 무리하고 있는 것을 뻔히 아니 초조해할 필요가 없었다. 시간은 오드리아의 편이었으니까. 여유롭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황은 기대 이상으로 오드리아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 * *

트루디 대공은 에이미와 노엘의 존재를 잊지 않고 꾸준히 그들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최근 오웬 자작가가 승승장구한다는 사실도, 에이미가 오필리아 숍의 맞은편에 부티크를 오픈해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도. 트루디 대공은 보고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오드리아의 부탁대로 거긴 건들지 마.”

“알겠습니다.”

보좌관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플로렌스 연회에서 에이미를 본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격노하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라 지시했다.

메릴에게 들은 보고 외에도 에이미와 노엘이 그동안 어떤 경로를 거쳐 지금의 상황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 모든 것을 공작가에서는 미리 알아내지 못했는지.

보좌관을 비롯한 고용인들 전부 문책을 당했다.

그래서 보좌관은 트루디 대공이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트루디 대공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오웬 자작가는 지금 무슨 사업을 벌이고 있지?”

오웬 자작가를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는 안 했으니까. 트루디 대공은 간단한 분풀이로 일단 그곳부터 헤집어 놓을 생각이었다.

트루디 대공의 의도를 한 번에 이해한 보좌관이 오웬 자작가에서 하고 있는 사업에 대해 상세하게 보고했다.

에이미와 노엘을 해결하기 전에 트루디 대공은 오웬 자작가의 목을 조금씩 옥죄어 갈 생각이었다.

한 번에 끝내면 오드리아가 에이미와 노엘을 처리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 속도를 조절해 가면서, 천천히 느긋하게.

“이번엔 저와 생각이 같으시네요.”

트루디 대공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제레미아가 트루디 대공의 집무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웬이 뒤에서 소심하게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이미 트루디 대공과 보좌관이 나누는 대화를 모두 들은 것이 분명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시선이 얽혔다.

무슨 일 나는 거 아냐? 그웬과 보좌관이 찔끔 겁을 먹고 목을 움츠렸다.

“저도 돕겠습니다.”

제레미아가 말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걱정과는 달리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서로의 마음이 맞은 것을 즐거워하는 미소.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에게는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사악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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