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최근 오웬 자작가는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오웬 자작과 그의 보좌관 단둘이서 결정을 하곤 했다. 이번에도 역시 오웬 자작은 집무실에서 그의 보좌관과 의논을 하고 있었다.
“이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수락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손해를 본다고 해도 저희가 보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런가. 역시 노엘 그대는 믿음직해.”
오드리아의 예상대로 오웬 자작의 보좌관은 노엘이었다. 그는 오웬 자작의 머리가 되어 온갖 사업에 끼어들고 있었다.
그가 진행하는 사업은 언제나 성공적이었고 그럴수록 오웬은 노엘을 더더욱 신뢰했다.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들을 정도로.
“자작님 덕분에 저희 남매가 편안히 지내는 것인데요. 그 은혜를 갚으려면 한참 남았습니다.”
“은혜는 무슨. 내 부인과 처남을 위한 일이었는데!”
오웬 자작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단지 에이미를 잊지 못해 데려왔을 뿐인데 그 덕분에 모든 일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신나고 들떴다.
노엘이 오웬 자작과 대화를 끝내고 집무실에서 나왔을 때였다. 티 파티에 참석했던 에이미가 자각가로 돌아왔다.
“만나고 왔습니까?”
노엘이 궁금하다는 듯이 에이미의 뒤를 쫓으며 물었다.
“응. 잘난 척하는 건 여전하던데.”
에이미는 오드리아가 오필리아 숍을 무기로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건방지기는.”
에이미가 입술을 짓이기며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어떻게 할 겁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엘이 물었다.
“두고 봐. 사교계에서는 아무리 잘난 가문의 영애라도 쉽지 않다는 걸 알려 줘야지.”
에이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른으로서 꼬맹이에게 제대로 가르쳐 줄 기회야.”
“기대되는군요.”
감히 트루디 공작가를 건드릴 수 없어 숨죽이고 있었지만 사교계에서만큼은 교묘하게 복수할 수 있었다. 드디어 자신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고 에이미는 생각했다.
“자작님은?”
“집무실에 계십니다.”
“그리로 가야겠어. 부탁할 게 있거든.”
에이미는 오웬 자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앞으로가 굉장히 기대된다는 얼굴을 하고서.
* * *
오필리아 숍에서 열리는 새로운 드레스를 선보이는 시간.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발표회는 많은 귀족들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초대장을 보내는 것은 오로지 오필리아 숍의 권한이었고 초대장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도 출입할 수 없었다.
그런 곳에 오드리아의 한마디에 입장한 부인들이 흥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페이지는 오드리아를 위해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정성을 쏟아부었다.
발표회가 진행되는 곳은 오필리아 숍에서도 극소수만 출입이 가능한 3층이었다.
그곳은 발표회가 진행될 때만큼은 3층 전체가 하나의 무대처럼 변했다. 이것은 오래전 오드리아가 처음 건물을 지을 때부터 일부러 만든 공간이었다.
그 의도를 에이미는 알지 못해서 전혀 쓸 수가 없었지만 오필리아 숍의 주인이 페이지가 되면서부터 다시 활용되었다.
3층의 문이 열리고 초대를 받은 귀부인과 영애들이 하나둘씩 입장했다.
“오드리아 영애. 초대해 줘서 너무 고마워요.”
“저는 여기 처음 와 봐요. 너무 기대돼요.”
“저기가 무대인가 봐요.”
그녀들은 하나같이 감탄을 이어나갔다. 대단히 화려한 인테리어는 없지만 이 공간 자체가 특별했다.
발표회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한 영애가 말을 꺼냈다.
“오웬 자작 부인께서는 오지 않으셨네요.”
오드리아는 그녀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오웬 자작 부인께서 센스가 있다고 하셔서 귀중한 조언을 얻고 싶었는데요.”
“오웬 자작 부인의 출신이 아무래도 그렇다 보니, 이런 곳에는 감히 오지 않죠.”
에이미가 없는 곳, 특히 아무나 올 수 없는 곳에 들어선 부인들은 특권 의식에 휩싸였다. 그 순간 지금까지 들은 것과는 전혀 다른 에이미에 대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아무래도 에이미와 노엘이 오필리아 숍을 운영할 때를 기억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과거에 오필리아 숍 사건으로 인해 두 사람이 노예가 되었던 사실이 알음알음 전해졌다.
‘나와 에이미를 두고 눈치를 보는 것 같던 게 기분 탓은 아니었구나.’
에이미와 노엘이 운영하던 오필리아 숍이 오드리아의 것이 되었고 두 사람은 노예가 되었으니까.
처음 에이미를 만났을 때,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오드리아가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장내가 술렁였다. 부인들이 빠르게 주위를 살피고 있을 때 페이지가 우아한 발걸음으로 걸어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여기까지 걸음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곧 발표회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혹시 마음에 드시는 것이 있으면 모든 차례가 끝난 후에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역시나 발표회는 성공적이었다. 참석한 여인들은 모두 발표회가 진행되는 내내 한시도 눈길을 떼지 못했다.
“언제나 대단하긴 했지만…….”
“저만 느끼는 게 아닌가 보네요. 이번이 특히 엄청나요.”
발표회를 보던 중 마치 영혼마저 홀린 것 같은 표정을 짓던 여인들이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이번에는 특별히 오드리아까지 가세해서 준비한 발표회였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달랐다.
“역시, 오필리아 숍의 드레스는.”
“어느 것 하나 탐나지 않는 것이 없네요.”
“하나같이 모두 예쁜데 각자 개성적이기까지 해요. 역시 오필리아 숍은 다르네요.”
“오로지 단 한 사람만을 위한다는 특별한 느낌을 주잖아요.”
여인들은 넋이 나갈 만큼 황홀해했다.
“오늘 참석해 주신 분들이 만족하셨으면 좋겠네요.”
페이지가 모두의 앞에 나서서 인사했다. 그녀는 겸손하게 말했지만 표정에서는 자신감이 흘러 나왔다.
오드리아는 그 모습을 뿌듯하게 지켜보았다.
“오늘 초대해 줘서 너무 고마워요.”
“덕분에 즐거운 시간이었답니다.”
“모두 만족하셨다니 저야말로 기쁘네요.”
역시나 모두가 오드리아에게 가장 먼저 인사했다. 앞으로도 오드리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오드리아는 오필리아 숍을 등에 지고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제 존재를 각인시켰다.
오드리아는 영애들의 반응을 보며 자신의 목적을 이뤘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일수록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참. 와 주신 분들에게 선물이 있습니다.”
오드리아의 말 한마디에 페이지가 고용인들에게 지시했다. 고용인들은 영애들에게 준비한 선물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이게 뭔가요……?”
“선물까지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들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잔뜩 기대하는 얼굴을 하고서 선물을 확인했다. 뭐가 들어 있는지 궁금해 미칠 것 같은 얼굴이 보였다.
“어머!”
선물을 확인한 귀부인들의 감탄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저택에 가서 확인하려고 참고 있던 사람들의 손까지도 바쁘게 움직였다.
체면이고 뭐고 선물을 확인하기에 정신없었다. 그리고 그 선물을 확인한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이건 방금 전에 봤던 그 드레스잖아요!”
“이걸 이렇게 줘도 되나요?”
“귀한 손님에겐 그만큼 가치 있는 것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드리아의 말에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감동을 받았다.
페이지는 새로 선보인 드레스 중 각 영애와 귀부인들에게 어울리는 것들을 선물로 준비한 것이다.
“실은, 마담 페이지가 특별히 신경을 써 주었답니다.”
오드리아는 잊지 않고 페이지의 존재를 각인시켜 주었다.
“오드리아 님의 부탁인데 당연하지요.”
페이지 역시 오드리아의 존재를 치켜세웠다. 이런 식으로 오드리아와 페이지는 서로의 관계를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보여 주었다.
“고마워요, 오드리아 영애.”
그와 동시에 줄지어 감사 인사가 쏟아졌다. 이로써 오드리아의 주가는 더더욱 높아졌다.
“다음에도 꼭 초대해 주세요.”
“원하신다면 얼마든지요.”
오드리아는 부인과 영애들의 기대에 화답하며 미소 지었다.
원하는 것은 전부 얻은 발표회였다.
* * *
오드리아가 오필리아 숍에 영애들을 초대해 과시하는 동안 에이미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외부 인력이 필요할 때마다 오필리아 숍을 드나드는 하녀를 매수해 놓았었다.
에이미에게 매수된 하녀는 오필리아 숍에서 잡일을 하며 상황을 지켜보다가 발표회가 끝나자마자 에이미를 찾아왔다.
“오필리아 숍에서 있었던 일 전부 말하도록 해.”
“네, 네…….”
하녀는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보고했다.
“……참석한 모든 분들에게 이번 발표회에 나온 신작들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하녀의 보고를 듣는 내내 에이미의 기분은 밑바닥을 뚫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데 보고를 이어 가던 하녀가 갑자기 머뭇거리며 말꼬리를 늘였다.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그게…… 이건 영애분들끼리 대화하다 나온 말인데…….”
하녀는 말할 듯 말 듯하며 노골적으로 에이미의 눈치를 봤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 말이 자신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괜찮으니까 말해 봐.”
“마님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뭐……?!”
에이미의 목소리가 심상찮았다.
“마님께서 오필리아 숍에 오지 못하는 이유가 출신 때문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에이미가 테이블 위에 있던 유리잔을 바닥에 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이 튀어 하녀의 얼굴을 스쳤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에이미는 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따돌리기 위해 자기들끼리만 오필리아 숍으로 간 것도 모자라 자신의 출신까지 언급한 것이다.
사교계에 그녀가 오필리아 숍의 주인이었던 시절에 관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얼마나 애를 썼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오필리아 숍에는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 있었다.
‘이것들이 내 앞에서는 뭐 하나 얻을 거 없나 온갖 눈치를 다 보더니, 내가 없는 자리에서 감히 나를 무시해?’
에이미는 하녀에게서 자신에 대해 얘기한 그녀들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절대 잊지 않고 갚아 주기 위해.
‘그깟 발표회가 뭐라고. 거기에 가니까 지들이 뭐 대단해지기라도 한 것 같나?’
에이미는 콧방귀를 꼈다. 하지만 그들을 비웃는다고 해서 분노가 가라앉지는 않았다.
‘두고 봐. 나중에 내 발밑에 모두 엎드리게 만들어 줄 테니까.’
에이미는 오드리아는 물론 자신의 출신을 비웃은 부인들 역시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에이미는 하필 보고를 들으면서 드레스를 갈아입고 있었다. 화려한 연회용 드레스가 아닌 저택에서 입는 드레스는 상대적으로 무난하고 명도가 낮은 색의 드레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에이미의 눈에는 드레스가 너무 초라해 보였다. 언제나 화려해야 하는 자신이 입기에 이 드레스는 너무도 볼품없었다.
“감히 내게 이딴 드레스를 가져와!”
에이미는 하녀가 가져온 드레스를 보고 집어던졌다. 그러자 하녀가 뒤로 밀려나며 우당탕탕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죄, 죄송합니다.”
“지금 네가 날 무시하는 거야? 그래서 이딴 걸 나보고 입으라고 가져온 거구나!”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제가 감히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앞에서는 마님이라 부르며 떠받들면서 뒤에 가서 나에 대해 무슨 말을 하고 다닐지 어떻게 알아!”
“절대 아닙니다!”
그때였다. 노엘이 소란을 전해 듣고는 다가와서 물었다.
“누님. 왜 그러십니까.”
“이것들이 나를 무시하잖아!”
“아, 아닙니다!”
시녀들이 억울해하며 해명했다. 그 말에 에이미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악을 썼다.
“이젠 거짓말까지 해?!”
“누님. 진정하세요. 너흰 나가 있어.”
노엘이 에이미를 달래며 시녀들을 눈빛으로 내보냈다.
“죄, 죄송합니다..”
시녀들이 허둥지둥 도망치듯 방에서 나갔다. 에이미는 여전히 화를 참지 못한 채 씩씩거렸다.
“두고 보려고 했더니, 안 되겠어.”
에이미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중얼거렸다.
“뭐가 말입니까.”
노엘이 물었지만 에이미는 분함을 억누르느라 대답하지 않았다.
“오드리아 트루디군요.”
노엘은 알 것 같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 잘난 얼굴이 수치심으로 물드는 꼴을 보고 말 거야. 어디 믿는 도끼에 발등 한번 찍혀 보라고.”
에이미의 눈이 독하게 빛났다.
“곧 오웬 자작이 돌아올 겁니다. 그때도 지금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겁니까?”
“지금 내 얼굴이 어떤데!”
“거울을 보세요.”
에이미는 신경질적으로 돌아서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순간 깜짝 놀랐다. 독기만이 남은 얼굴은 표독스러워 보였다. 다른 사람이 보면 무서워서 도망을 치거나 욕할 것 같은 얼굴.
“일단 진정하세요. 그리고 그다음에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그래.”
에이미는 노엘의 말대로 화를 내던 것을 멈췄다. 그리고 하녀에게 지시해 얼굴을 마사지하고 팩을 했다.
오웬 자작이 돌아왔을 때 언제나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으로 맞이하기 위해서.
‘내 가치는 아름다움에서 오니까.’
* * *
플로렌스 홀에서 연회를 주최하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수고가 들어갔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자신 있었다. 이런 게 바로 그녀의 전문 분야 중 하나였으니까.
오필리아 숍을 운영하기 전, 에이미와 노엘을 책임져야 할 때 그녀에게 고수익을 안겨 준 일이기도 했다.
“그럼 완벽한 연회가 되도록 만들어 볼까.”
오드리아는 자신만만했다. 그 옆에서 메릴과 페이지 역시 자신감 가득한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들 역시 연회 준비에는 전문가였다. 이미 많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세 사람이 뭉쳤으니 이번 플로렌스 연회가 성공할 거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오드리아는 자신만만하게 플로렌스 연회를 위해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준비했다. 가장 먼저 초대할 사람을 선정해 초대장을 보냈다. 그리고 플로렌스 홀을 어떻게 장식할지도 오드리아가 직접 정했다.
연회에서 어떤 음악을 틀 건지, 음유시인 중 누구를 초대할지, 연회의 진행 순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 어느 것 하나 오드리아의 손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제 갓 데뷔 무도회를 치른 오드리아의 섬세함에 모두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적절히 모르는 척 조언을 구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연회에서 술과 음식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같이 방문한 하인들의 휴게 공간은 어느 쪽에 마련하면 좋을까?”
“연회장 밖에도 따로 쉬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메릴과 페이지, 그리고 공작가의 고용인들이 나설 공간을 적절하게 만들어 주었다.
오랜만에 직접 모든 것을 진행하는 것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그래서 연회의 목적과는 별개로 준비하는 기간 동안 오드리아는 기분이 좋았다.
트루디 공작가의 플로렌스 홀에서 오드리아가 주최하는 연회.
이것이 지니는 의미는 남달랐다. 각 가문에 보내는 초대장은 주최자인 오드리아 트루디의 이름으로 각 가문에 보내졌다.
연회의 주체가 오드리아 트루디라는 뜻이었다.
플로렌스 연회가 성공하게 된다면 오드리아는 단순한 사교계 화제의 인물이 아니라 어엿한 어른으로서 인정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번 연회는 매우 중요했다. 절대 실수 없이 성황리에 끝까지 해내야만 한다.
* * *
오웬 자작가에 오드리아가 보낸 초대장이 왔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초대해 줬으니 가 줘야지.”
노엘의 물음에 에이미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이제까지는 트루디 대공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그가 참석할 만한 연회는 고의적으로 피했다. 그 덕분에 오웬 자작가는 별다른 문제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숨기만 할 수 없었다. 에이미는 이제 당당하게 전면으로 나설 생각이었다. 거기에 때마침 오드리아가 직접 주최한다는 플로렌스 연회는 좋은 계기였다.
공작가에서 열리는 연회인 만큼 그 중요성은 남달랐다. 이번에 제대로 연회를 마치면 오드리아의 입지는 단단하게 굳을 것이다. 그러면 에이미가 오드리아를 흔들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게 놔 둘 수는 없지.’
고작 몇 번의 요행으로 기고만장한 어린 꼬맹이에게 에이미는 어른들의 세계의 혹독함을 제대로 알려 줄 생각이었다.
자신만만하게 준비한 연회에서 망신을 당하면 그 후유증은 더욱 클 테니까.
“지난번에 왔던 하녀를 데려와.”
에이미는 지난 오필리아 숍의 발표회 때 매수했던 하녀를 불렀다.
사실 에이미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 오필리아 숍은 한때 자신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오드리아라는 꼬맹이의 함정에 빠져 빼앗기고 만 곳이었다.
에이미는 그 덕분에 노예 출신이라는 말까지 들어야만 했다.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에이미가 또다시 이를 갈고 있을 때였다. 문밖에서 노크 소리와 함께 하녀가 보고했다.
“말씀하신 하녀가 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하녀가 들어오자마자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돌변했다.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하녀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싸늘하게 가라앉은 공기를 느끼고는 불안함에 떨었다. 괜히 심기가 불편한 귀족에게 잘못 걸려 곤욕을 치르고 싶지는 않았다.
“너, 오필리아 숍에 아직도 출입하고 있지?”
“네, 하지만 아주 가끔씩입니다.”
하녀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에이미가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쥐며 천천히 입을 뗐다.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만약 이번 일만 잘한다면 평생 먹고살 수 있는 돈을 주지.”
에이미가 하녀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이용해 오드리아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 * *
연회 준비는 수월했다.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분명 플로렌스 홀에 들어서는 순간 감탄할 것이다.
오드리아는 물론이고 연회 준비를 함께한 고용인들 모두 그렇게 확신했다.
플로렌스 홀의 장점을 극대화해 꾸민 연회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눈이 부셨다.
정원에서 홀 입구까지 꽃길을 걷는 기분이 들게끔 꽃과 밝게 빛을 내주는 수정을 사이좋게 얽어 놓았다. 꽃과 수정은 밤을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그 끝에 있는 입구를 지나 홀 내부로 들어선 순간 정원이 끝없이 펼쳐진 듯한 착각이 들 것이다. 마치 이곳이 꿈속인 것처럼 황홀하고 설레게 해 줄 것이다.
높은 천장 위에서 밤하늘의 별을 박아 놓은 것처럼 은은하게 분위기를 빛내 주는 조명과 음악, 꽃잎 위에 떠 있는 것처럼 조각한 무대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드디어 오드리아가 주최한 플로렌스 연회가 열리는 날이 찾아왔다.
오드리아는 사람들이 모두 모이고 난 후 연회가 시작할 때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와 함께 입장할 예정이었다.
한창 준비를 하고 있는데 플로렌스 홀에 있던 하녀가 다급하게 달려와 페이지를 찾았다.
그에 잠시 자리를 비운 페이지가 다급한 얼굴로 돌아왔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방금 플로렌스 홀에 있던 하녀가 한 말이, 오웬 자작 부인이 오드리아 님과 똑같은 드레스를 입고 왔다고 합니다.”
페이지의 얼굴이 경악과 황망함으로 물들었다.
“똑같다니?”
오드리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제가 직접 확인하고 왔는데, 하녀의 말이 사실이었습니다.”
페이지는 하녀의 보고를 듣자마자 절대 그럴 리 없다며 직접 플로렌스 홀까지 가서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의 두 눈에도 분명 에이미의 드레스는 오드리아와 같았다.
페이지가 고개를 떨궜다.
“저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드레스는 페이지가 오드리아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이다.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그녀가 직접 하기 때문에 똑같은 드레스가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똑같은 드레스를 하필이면 오늘 에이미가 입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지.
페이지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누군가 페이지의 디자인을 빼돌린 것이다. 그렇다면 말이 된다.
“연회가 끝나면 어떻게 된 일인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아내겠습니다.”
페이지가 화를 참으며 힘겹게 말했다. 그녀는 연회가 끝나는 대로 오필리아 숍으로 돌아가서 뒤집어엎겠다고 결심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디자인을 빼돌린 자를 찾아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감히 오드리아 님의 연회를 망치려고 하다니. 두고 봐.’
페이지가 이를 갈았다.
“이미 벌어진 일인데 어쩌겠어.”
오드리아가 페이지를 위로했다. 지금 그녀가 느낄 분노를 오드리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이미 벌어진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다.
“일단 지금 가지고 있는 다른 드레스를 가져오겠습니다.”
분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에이미는 이미 연회장 안에 있었고 오드리아는 아직 입장 전이었다.
이대로 오드리아가 입장하게 되면 그녀가 에이미를 따라 하게 되는 것이 된다.
하는 수 없었다. 아쉬운 대로 드레스 룸에 있는 것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것을 선별하는 수밖에. 페이지가 드레스 룸으로 달려가려고 할 때였다.
“페이지.”
오드리아가 침착하게 그녀를 불렀다.
“네, 오드리아 님.”
페이지는 달려가려다 말고 오드리아를 바라봤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페이지가 적잖이 당황한 것이 보였다.
“그냥 이걸로 입을게.”
“안 됩니다! 이걸 입으면 오웬 자작 부인이 원하는 대로 되는 거예요!”
페이지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오드리아를 향해 외쳤다. 오드리아가 그런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절대 볼 수 없었다. 페이지가 이를 악물었다. 에이미를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이.
“알아.”
페이지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그녀 역시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드레스를 입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 의도를 알아챈 페이지는 불안해졌다,
“그렇다고 다른 드레스를 입으면.”
오드리아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갔다. 그 미소는 오히려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느끼게 했다. 페이지는 오드리아가 할 말을 기다렸다.
“그거 역시 에이미가 원하는 거야. 그녀가 의도한 대로 행동할 수는 없지.”
오드리아는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다른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하려고.
페이지는 오드리아를 믿지만 시간도 여건도 안 되는 상황에서 그녀가 뭘 할 수 있을지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녀의 걱정을 안다는 듯 오드리아가 페이지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걱정 마. 오히려 에이미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줄 테니까.”
“꼭 그러셔야 합니다.”
페이지는 드레스 룸으로 가지 않았다. 대신 오드리아가 가져오라는 물건을 몇 가지 가져왔을 뿐이다.
* * *
플로렌스 홀에는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착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들은 오드리아의 예상대로 다들 플로렌스 홀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어머, 진짜 꽃밭 위를 걷는 기분이에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네요.”
원래도 플로렌스 홀은 후원과 어우러진 장관으로 유명한 장소였지만, 오늘 홀 안은 그 어느 때보다 특별했다.
마치 플로렌스 홀 주위를 감싸고 있는 후원을 안으로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꽃이 화사하게 피어나 있었다.
홀 안에 장식되어 있는 꽃이 유난히 아름다워 보이는 데에는 여러 꽃을 조합하고 배치를 어떻게 했는가도 있지만 그보다는 바로 조명의 역할이 컸다.
보통 연회에는 밝고 화사한 조명을 쓴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이번 연회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따뜻한 조명을 사용했다.
조명의 변화만으로도 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전부 다르게 느껴졌다. 아주 작은 변화도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사람들은 오드리아의 감각에 감탄했다.
그때였다. 문지기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트루디 대공 각하와 제레미아 트루디, 오드리아 트루디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연회의 주최자가 등장하자 참석한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집중되었다. 역시나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양쪽에 세운 채 입장했다.
“저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질리지가 않네요.”
“그러게요. 완벽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 같아서,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네요.”
오드리아를 중심으로 그녀를 보호하듯이 양쪽에 선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모습은 처음에는 충격적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귀족들이 가장 기대하는 장면이 되어 있었다.
“잠깐. 지금 오드리아 영애가 입고 있는 드레스…….”
“뭔가 이상한데요?”
세 사람이 나란히 있는 모습을 기분 좋게 감상하고 있던 영애들이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드레스가 왜요? 무슨 문제라도?”
아직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한 영애가 물었다.
그녀들은 대답 대신 오드리아의 드레스를 보던 시선을 조금씩 옮겼다.
의심이 확신이 되고 사람들의 시선이 바쁘게 움직였다. 너무 대놓고는 볼 수 없으니까 최대한 조심스럽게 힐긋거리며 바라본 것은 바로 에이미의 드레스였다.
“역시 똑같은 거…… 맞는…….”
“아니, 좀 다른 거 같은데?”
한 영애가 확신에 차 두 사람의 드레스가 똑같다고 입 밖으로 꺼냈을 때였다. 유심히 지켜보던 또 다른 영애가 그 말을 잘랐다.
얼핏 봤을 때는 똑같은 드레스였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보니 분명 비슷하긴 하지만 조금 달랐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놀란 것은 영애들만이 아니었다. 이 일을 꾸민 당사자, 에이미도 오드리아의 드레스를 보고 당황하고 있었다.
‘왜, 드레스가 다르지?’
오드리아는 그녀에게 쏠린 뜨거운 시선을 모두 느끼고 있었다. 영애들의 시선은 물론이고 에이미가 당황하는 모습까지도.
특히, 에이미가 오드리아의 드레스를 자세히 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무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오드리아.”
그때였다. 트루디 대공이 작은 목소리로 오드리아를 불렀다. 트루디 대공은 아주 잠깐 스치듯이 에이미를 보았다.
“어째서 여기에 있어선 안 되는 얼굴이 보이는 거지?”
“…….”
“오드리아. 너는 알고 있었다는 얼굴이구나.”
트루디 대공이 걸음을 멈추고 상체를 숙이더니 오드리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순간 훅 들어오는 트루디 대공에 지금까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던 오드리아가 당황하고 말았다.
‘아차.’
오드리아는 사실 이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에이미를 농락해 줄 생각에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에이미를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녀와 자신의 드레스를 보고 단번에 상황을 파악할 것이라는 사실을.
“하하…… 그게…….”
오드리아가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며 변명을 찾았지만 결국 실패했다.
“죄송해요. 제가 말하지 않았어요.”
오드리아의 고백에 트루디 대공의 큰 손이 올라왔다. 오드리아는 자신이 한 잘못이 있어서인지 긴장이 됐다.
그때였다. 그의 커다란 손이 오드리아의 머리 위에 얹어졌다.
“오늘도 예쁘구나.”
일단 오드리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지켜봐 주겠다는 뜻이었다.
“대신 연회가 끝나면 제대로 얘기해야 해.”
하지만 이대로 완전히 넘어갈 수 없는 트루디 대공이 단호하게 조건을 말했다.
“네. 그럴게요.”
오드리아가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드리아와 에이미가 나란히 서 있자 두 사람의 드레스는 극명하게 비교되었다. 누가 봐도 같은 드레스였다. 하지만 분명히 달랐다.
“비슷하지만…….”
영애들의 시선이 얽혔다. 마치 서로의 의견을 확인하는 것처럼.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오드리아와 에이미를 바라보았다.
“역시 오드리아 영애의 드레스에 더 눈길이 가네요.”
“맞아요. 역시 오필리아 숍의 드레스인가요?”
영애들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그 순간 에이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실은, 제가 살짝 드레스를 고쳤답니다. 있는 그대로도 물론 만족스러웠지만 조금 부족한 듯해서.”
오드리아는 쑥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준비된 드레스를 그대로 입는 것도 급하게 다른 드레스를 입는 것도 모두 에이미가 원하는 대로 되는 일이다.
오드리아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승리감을 맛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짧은 시간 동안 직접 드레스를 고쳤다. 처음보다 더 예쁘고 오드리아에게 더 잘 어울리도록.
어깨부터 가슴 위까지 직각으로 떨어진 드레스는 목과 쇄골 라인이 시원하게 보이는 것이 특징인 드레스였다. 오드리아는 바로 그 부분부터 목까지 살이 비치는 레이스를 레이어드했다.
“어머. 그걸 영애가 직접이요?”
“페이지의 도움을 받아 아주 살짝 해 봤을 뿐이에요.”
오드리아는 에이미에게 보란 듯이 쑥스러워하는 척 답했다.
“전부터 느꼈지만 영애의 센스는 사람을 놀라게 하네요.”
“저도! 제 드레스가 뭔가 부족한 기분이 계속 들었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어떤 것 같아요?”
한 영애가 오드리아에게 상담을 했다. 오드리아의 한마디에 영애들이 귀를 기울였다. 어느새 그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에이미는 뒤로 밀려났다. 비슷한 드레스. 분명 둘 중 한 명은 고의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에이미가 입은 드레스보다 오드리아의 드레스에 더 눈길이 갔다. 드레스가 더 예쁘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더 잘 어울리게 만든 것이다. 모두가 오드리아의 안목과 능력을 인정했다.
“그런데 오드리아 영애의 드레스는 오필리아 숍에서 만든 거죠?”
지금까지 영애들 틈에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쥬아나가 물었다. 오드리아를 향한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네. 마담 페이지가 직접 만들었어요.”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단번에 눈치챈 오드리아가 드레스의 출처를 분명하게 밝혔다.
그러자 쥬아나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에이미를 향했다. 그녀와 마주친 에이미의 눈이 커졌다.
“그럼…… 오웬 자작 부인은 어디서 맞춘 건가요?”
“그러게요. 오웬 자작 부인의 드레스는 누가 만든 건가요?”
쥬아나의 질문에 다른 영애들 역시 관심을 드러냈다. 어느새 모두의 시선이 에이미를 향해 쏠렸다.
“설마…… 마담 페이지가 똑같은 디자인을 두 개나 만들었을 리는 없을 텐데.”
쥬아나의 노골적인 의문에 에이미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달아올랐다.
“그, 그게…….”
당황한 에이미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차마 거기까지는 생각해 두지 못한 것 같았다.
사람들의 눈빛은 이미 이 드레스를 따라한 게 누구인지 확신하고 있었다.
이번 연회에서만큼은 더 이상 에이미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오드리아를 망신 주려고 했지만 결국 같은 드레스를 입고 얼굴이 시뻘게진 채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하는 건 에이미가 되었다.
* * *
연회가 아직 한창일 때였다. 구석에서 분을 삭이던 에이미가 자리를 뜨는 것이 보였다. 오드리아는 그녀를 따라 조용히 움직였다.
후원을 벗어나 한참을 걸어 한적한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오웬 자작 부인”
오드리아의 부름에 에이미가 사납게 돌아보았다.
“뭐야?!”
에이미는 연회장 안에서 겨우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풀렸는지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았다.
“이제 돌아가는 건가요?”
하지만 오드리아는 그런 에이미를 향해 차분하게 말했다.
“나를 비웃으려고 여기까지 쫓아온 거야?”
“비웃음을 당할 만한 일을 한 건 아는 건가요?”
흥분한 에이미를 상대로 오드리아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녀가 저지른 짓을 꼬집었다.
“그깟 잔재주 좀 부렸다고 뭐라도 된 거 같아?!”
그러자 지금까지 속에서 부글부글 끓던 에이미의 분노가 터졌다.
“……뻔뻔하기는.”
오드리아는 그런 에이미가 한심해서 오히려 안타까웠다.
“그럼 도둑질을 한 건.”
드레스의 디자인을 훔치고 그대로 입고 온 것은 에이미였다. 그런데도 분해하는 모습이 오드리아에게는 어리석어 보였다.
“무슨 증거로 도둑질이라는 거야! 사람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인데 우연히 겹친 거야.”
“에이미.”
오드리아가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까지 오웬 자작 부인이라고 꼬박꼬박 불러 주던 것과는 달랐다.
“정말 나를 망신 주고 싶었으면 훔친 드레스 디자인에 너만의 것을 넣었어야지.”
“……!”
“아무 생각 없이 똑같이 따라만 하면 나를 망신 줄 수 있을 줄 알았어?”
에이미의 눈이 붉게 충혈되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네가 뭔데……!”
에이미가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오드리아를 향해 팔을 번쩍 들었다. 그대로 오드리아를 향해 휘두르려는데,
“이게 무슨 짓이지?”
에이미의 손목이 라미엘에게 붙잡혔다.
“넌 또 뭐야!”
라미엘의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바위에 눌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못했다.
“이거 안 놔?!”
“명령하지 마.”
라미엘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뭐……?”
“나한테 명령할 수 있는 건 오드리아 님밖에 없으니까.”
에이미는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앞에는 오드리아 옆에는 라미엘. 어느 쪽도 말이 통하지가 않았다.
“놔줘.”
오드리아가 라미엘을 향해 명령했다. 그러자 당장이라도 그녀를 죽일 듯한 눈을 하고 있던 라미엘이 바로 잡고 있던 에이미의 손목을 놔주었다.
에이미는 분했지만 지금은 도망치듯이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플로렌스 연회가 끝난 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메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주 상세한 보고를 받았다. 단 하나라도 빠트리지 않고. 정확하게는 빠트릴 수 없었던 것이지만.
오드리아는 에이미의 존재를 숨긴 사실로 인해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리아. 그런 걸 숨기면 어떡해?”
“너와 관련된 일인데 어떻게 우리한테 숨길 수가 있어?”
제레미아는 상처받은 것처럼 말했다.
“죄송해요…….”
오드리아는 두 사람이 내심 얼마나 속상해할지 알아서 더더욱 미안했다.
“찝찝한 존재가 리아 주위에 있게 둘 순 없습니다. 당장이라도 해결을……!”
제레미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오빠, 그리고 아빠.”
오드리아가 제레미아와 트루디 대공을 차례대로 부르며 바라보았다.
“제 방식대로 해결하고 싶어요. 과거에 안 좋은 인연이 있기는 했지만 지금은 엄연한 오웬 자작의 부인이에요. 아직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제재를 가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요.”
에이미와 노엘은 잘못을 저질러 노예가 되었지만 오웬 자작이 정당한 대가를 치루고 데려왔다. 거슬리지만 처벌할 정도로 잘못을 한 건 아니다.
그걸 트루디 대공 역시 이해하고 있었다.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 언제나처럼 오드리아의 뜻대로 하게 되었다.
“단, 리아. 네가 확실하게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면 그땐 더 이상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제레미아는 끝까지 불만이었지만 결국 오드리아의 뜻에 따라 주었다. 그러니 오드리아는 에이미에게 당해 줄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손으로 깔끔하게 질긴 인연을 끝낼 생각이었다.
결국 오드리아를 믿어 주기로 하고 돌아가려는데 트루디 대공의 시선이 오드리아의 옆에 쌓여 있는 봉투 더미로 향했다.
“이게 다 뭐지?”
“초대장이에요.”
트루디 대공에게 오는 초대장보다 양이 더 많았다. 이걸 전부 참석한다면 오드리아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전부 치워라.”
“네.”
트루디 대공의 단호한 명에 시녀들은 단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초대장을 모두 챙겨서 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아빠?”
오드리아가 당황해서 트루디 대공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지만 일단 좀 쉬도록 해.”
오드리아는 사교계에서조차 사랑받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불만스러웠다.
“우리 리아는 너무 인기가 많아서 문제군.”
“네?”
트루디 대공은 먼 허공을 바라보았다.
사실 요즘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가장 큰 문제는 오드리아가 사교계에서 너무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다. 왜 자꾸 라이벌이 늘어나는 건지. 두 사람은 오드리아의 애정을 두고 사교계마저도 질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