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3/48)

chapter 12. 사교계에서 사랑받는 오드리아

오드리아의 본격적인 사교계 데뷔는 지금부터였다. 영애와 귀부인들 간의 교류는 천하의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도 어쩌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게다가 오드리아는 데뷔 무도회 전까지 다른 가문의 영애들과 교류가 전혀 없었다. 데뷔 무도회가 처음이었고 오늘 참석하는 티 파티가 겨우 두 번째였다.

지금부터는 그동안 하지 못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파티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드리아가 티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하려는데 마차 앞에 제레미아가 있었다.

“오빠, 여긴 무슨 일이에요?”

“티 파티에 간다고 들었어.”

“바오른 공작 부인이 초대해 주셔서요.”

“가는 길에 배웅이라도 하려고.”

그렇게 말하는 제레미아의 모습이 어딘가 어색해 보였다.

“티 파티 가는 거…… 괜찮겠어?”

제레미아는 걱정스러웠다. 연회나 티 파티는 겉으로 보는 것처럼 화려하고 웃음이 오가는 즐거운 자리가 아니었다.

그곳은 웃는 얼굴로 날카로운 비수를 얼마든지 던지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오드리아가 과연 잘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오늘은 그냥 나랑 같이 차라도 마시는 게 어때?”

그래서 제레미아는 괜히 배웅이라는 핑계를 대고 오드리아가 가는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오드리아 역시 제레미아가 걱정하고 있는 걸 알았다. 하지만 제레미아의 걱정은 그녀에게 해당하지 않는 문제였다.

지금까지 수많은 귀부인과 영애들을 상대해 왔던 오드리아다. 제레미아의 생각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휘둘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오드리아가 입꼬리를 늘였다.

“저 잘하고 올게요.”

오드리아는 제레미아를 달래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그러자 제레미아 역시 더는 말릴 수 없었다.

데뷔 무도회를 거친 이상 오드리아는 사교계에 진출해야 한다. 그것이 귀족 사회에서 레이디들의 생존법이었고 그것은 오드리아 트루디라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니 트루디 대공 역시 내심 못마땅해하면서도 겉으로 말리거나 하지는 않은 것이다.

“그럼 다녀올게요.”

“……조심히 다녀와.”

제레미아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마지못해 배웅했다.

오드리아가 활짝 웃으며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제레미아가 다급하게 오드리아를 붙잡으며 말했다.

“혹시 괴롭히는 자가 있으면 앞에 있는 물이나 차를 그대로 끼얹어 버려.”

“네……?”

“아님 테이블을 엎어 버리든가.”

제레미아는 걱정하는 마음에 오드리아에게 여러 가지 방책을 알려 주었다. 제레미아는 진지했지만 실제로 오드리아가 할 만한 건 하나도 없었다.

제레미아가 마차가 떠나는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돌아서는데 그웬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는 제레미아가 이럴 때마다 창피했다. 제레미아는 전쟁터에 나갈 때도 금방 갔다 올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갔다. 그런데 오드리아가 고작 티 파티에 가는 것뿐인 데도 마치 다신 돌아오지 못하는 전쟁터에 가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봐야만 하는 그웬은 죽을 맛이었다.

“뭘 봐.”

제레미아가 그웬을 노려보며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웬이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며 해명했다.

“지금 나와 눈 마주치는 건 무슨 의미지.”

그와 동시에 그웬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고용인들 역시 제발이 저려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 * *

오드리아는 가벼운 마음으로 바오른 공작가 앞에 도착한 마차에서 내렸다.

“오드리아 트루디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문지기의 안내와 함께 오드리아가 입장하였다. 이미 많은 레이디들이 도착해 있었다.

티 파티 장소는 연못이 옆에 있는 후원에 준비되어 있었다. 테이블보부터 티포트와 찻잔, 접시들에는 화려한 장식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저택의 외부와 후원에 장식되어 있는 동상과 티 파티를 구성하고 있는 장식품들은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저택의 건물과 동상은 투박해 보일 정도로 단순하지만 그 크기가 웅장해 보여 힘이 느껴졌다. 그건 아마도 바오른 공작의 취향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티 파티를 위해 놓인 테이블과 의자의 다리 부분에 장식된 꽃, 그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화병과 티포트와 같이 정밀한 세공을 요하는 화려한 장식이 눈에 띄는 물건들은 바오른 공작 부인의 취향이고.

그녀가 자신의 취향을 마음껏 드러내며 즐길 수 있는 것은 이 넓은 공작가에서 고작해야 공작이 관심이 없으면서 크기가 작은 이런 것들이 전부일 것이다.

이렇게 보니 그녀가 티 파티를 왜 그토록 자주 여는지 알 것 같았다,

오드리아가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먼저 도착해 있던 쥬아나가 오드리아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오드리아. 왔어?”

“먼저 와 계셨네요.”

오드리아가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화답했다.

“사람 많지? 원래 바오른 공작 부인의 티 파티는 이렇게 많아.”

쥬아나가 속닥였다. 확실히 보통 티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은 많아야 열댓 명 정도인 데에 반해 공작 부인의 티 파티에 온 사람은 한눈에 담기 어려울 만큼 많이 와 있었다.

“오드리아 영애. 오랜만이네요.”

“지난번 황궁 연회 이후 처음이죠.”

쥬아나와 함께 있다 보니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씩 다가왔다.

아는 사람끼리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잠시 자리를 비웠던 티 파티의 주최자인 바오른 공작 부인이 다가왔다.

“벌써 모여 계셨군요.”

그녀는 기분이 좋아 목소리가 한껏 올라간 채로 말했다.

“오늘 내 티 파티에 참석해 주어서 감사해요.”

“저희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영광이죠.”

의례적인 인사들이 오가는데 바오른 공작 부인이 오드리아를 발견했다.

“오드리아 영애. 초대에 응해 줘서 기뻐요. 부디 좋은 시간 보냈으면 좋겠네요.”

“감사해요. 벌써부터 무척 설레고 있답니다.”

오드리아는 산뜻한 미소와 함께 적절한 인사를 건넸다.

모두가 관심을 보이는 오드리아가 데뷔 무도회 후, 처음으로 참석하는 게 자신의 티 파티라는 사실에 그녀의 어깨가 올라갔다.

바오른 공작 부인이 주위를 다시 둘러보는데 그녀의 시야에 특별한 존재가 들어왔다.

“신시아 영애도 참석해 주었군요. 오늘 내 티 파티를 빛내 주는 사람이 많네요.”

바오른 공작 부인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만면에 드러났다. 자신의 티 파티에 오드리아에 이어 신시아까지, 유명한 인사들이 모두 모였기 때문이다.

신시아는 사교계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티 파티나 연회의 품격이 올라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어요.”

“이런, 기대에 부응하려면 특히 신경 써야겠네요.”

바오른 공작 부인이 눈꼬리를 휘어잡으며 기분 좋게 말했다.

서른 명 남짓한, 연회를 방불케 하는 인원이 길게 늘어진 테이블에 하나둘씩 착석할 때였다.

오드리아의 눈에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중 유난히 화려하게 빛나는 존재가 보였다.

“부인은 오늘도 역시나 아름답네요.”

“역시나라뇨. 저야말로 부인을 보고 깜짝 놀랐는걸요.”

서로 칭찬을 주고받는 대화였다. 그런데 그 중 얼굴이 반쯤 가려 보이지 않는 부인에게 눈길이 갔다.

‘누구지?’

유심히 보던 오드리아의 눈이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급속도로 커졌다.

‘에이미?’

오드리아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자리에는 오드리아가 절대 못 알아볼 리 없는, 하지만 다시 볼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있었다.

그때, 에이미 역시 오드리아를 보고 다가왔다. 마치 오드리아가 이곳에 있을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로.

“에이미 오웬이라고 해요.”

에이미는 오드리아를 처음 보는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인사했다. 생글거리는 눈웃음을 지으며.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분명 몇 년 전 있었던 일로 인해 멀리 보내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귀족 부인으로서 티 파티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녀가 과거에 그토록 원망하고 이혼까지 했던 오웬 자작의 부인이 되어서.

‘어떻게 다시 오웬 자작 부인이 되어 있는 거지?’

오드리아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바쁘게 생각했다.

“저는 지난 황궁 연회에 참석하지 못해서 영애를 뵙는 건 처음이네요.”

그녀가 오드리아를 몰라볼 리 없었다. 아니, 성장한 오드리아의 얼굴을 못 알아보았다고 해도 그녀의 이름을 들은 순간 알아차렸을 것이다.

“오드리아 트루디입니다.”

“반가워요. 앞으로 자주 보면 좋겠네요.”

에이미는 오드리아를 전혀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오드리아는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그녀가 내민 손을 보고도 잡지 않았다. 순간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오드리아 영애. 왜 그러나요?”

에이미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러면서 눈빛은 오드리아의 표정을 뚫어지도록 확인하고 있었다.

오드리아가 계속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녀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손이 조금…… 민망하네요.”

에이미가 내밀었던 손을 머쓱하게 들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민망한 상황을 자연스럽게 넘기는 유연한 모습에 사람들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오드리아만큼은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오드리아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평정심을 잃었다. 그래서 에이미가 내민 손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실수를 했네.’

오드리아는 뒤늦게 아차 싶었다. 에이미의 손을 민망하게 만든 것이 실수가 아니었다.

그로 인해 상대의 호의를 아무 이유 없이 무시한다는 인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인 것이 실수였다. 에이미는 바로 그것을 노린 것이다.

아직 오드리아는 그녀들에게 낯선 존재였다. 이런 작은 행동 하나도 그녀들에겐 오드리아에 대한 강한 인상으로 남을 수 있었다.

“혹시 제가 별로인가요?”

에이미는 좀 더 몰아붙이려는 듯이 눈치를 보는 척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기서 오드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그럴 리 있냐고 얘기해야 분위기가 수습될 것이다. 하지만 먼저 손을 내밀고 싶은 마음이 도저히 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나,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을 놓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는 힘으로 갑자기 확 당긴 사람이 나타난 것은.

“정말 별로네요.”

쥬아나가 에이미를 향해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녀의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오드리아와 에이미에서 쥬아나와 에이미로 이동했다.

하지만 쥬아나는 시선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오히려 눈을 더 크게 뜨고 말했다.

“고작 악수에 그렇게까지 의미를 담다니, 너무 생각이 많은 거 아닌가요? 저는 그런 건 좀, 별로더라고요.”

쥬아나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괜히 물고 늘어지지 말라는 뜻이었다.

쥬아나의 한마디로 이전과는 또 다른 의미의 정적이 감돌았다. 오드리아가 주위의 분위기를 살피는데.

“……?”

생각보다 다른 영애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 조금씩 관심을 거두기까지 했다.

쥬아나는 사교계의 이단아 같은 존재였다. 언제나 거침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은 하고야 마는 성격.

영애들 사이에서도 그런 쥬아나에 대한 호불호는 심하게 나뉘었다. 하지만 내심 아무도 하지 못하는 말을 당당하게 하는 그녀를 부러워하는 이들 역시 많았다.

그녀가 이토록 당당할 수 있는 데에는 릴스테인 후작가의 명성과 그녀의 화려한 이목구비에서 나오는 시원하고 도도한 이미지의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높은 자존감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어릴 때부터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교류를 해 왔기 때문인지 완급 조절에 능숙해서 한계점까지 갔다가도 결코 그 선을 넘지 않았다.

“천천히 해요. 인사도 친목도. 뭐, 그게 아니라 다른 거라도.”

날카롭게 공격하는가 싶다가도 지금처럼 쥬아나는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지금 쥬아나가 에이미에게 이 정도에서 적당히 물러나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처럼.

인사를 하자마자 음침하게 공격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리고 이 정도에서 각자 물러나자는 제안이기도 했다.

“반가운 마음에 제가 좀 서둘렀네요. 우리 천천히 인사해요.”

에이미가 오드리아를 향해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말했다. 그녀는 쥬아나가 갑자기 끼어들어도 당황하지 않고 받아쳤다.

지금 상황에서 굳이 그녀와 말을 오래 끌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한 발 물러났다.

오드리아는 그 순간 제레미아와 쥬아나가 어떻게 어린 시절부터 친분을 유지해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전혀 다른 성격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똑 닮은 게 보였다. 물론, 이 말을 제레미아나 쥬아나에게 하면 분명 화를 낼 테지만.

“서로 인사를 나눴으면 이제 다 같이 차라도 마실까요?”

티 파티의 주최자인 바오른 공작 부인이 화제를 전환하자 불편하던 분위기가 적당히 지나갔다.

겉보기에는 한창 즐거운 티 파티가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오드리아가 오늘 티 파티에 참석한 목적은 그녀의 존재감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에이미의 존재 때문에 이미 계획은 틀어져 버렸다.

‘오늘은 조용히 있다가 돌아가자.’

그리고 바로 에이미에 대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였다.

“혹시 오웬 자작 부인을 알고 있었나요?”

지금까지 침착함을 유지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신시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시아는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오드리아에게 가진 호의를 숨길 생각을 하지 않았고 오드리아는 그녀의 호의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기 때문에 그녀가 내민 손을 의심하지 않았다.

“긴장하지 말아요. 내가 도와줄게요.”

신시아가 딱딱하게 굳은 오드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말했다. 소곤거리는 듯한 작은 목소리였지만 포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오드리아 역시 자연스레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

하지만 에이미는 이대로 지나갈 생각이 없었는지 계속 오드리아를 주시하던 그녀가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오드리아 영애. 얼마 전에 데뷔 무도회를 치르지 않았나요? 일생에 한 번뿐인 순간인데 어땠나요?”

그녀는 상냥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말은 이곳에서 그 누구도 꺼내지 않던 말이었다.

눈치가 없어서 꺼낸 말이 아니라 일부러 오드리아를 당황시키려 한 말이었다.

오드리아의 데뷔 무도회는 반쪽짜리였으니까.

“혹시 어렵거나 불편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얘기해요.”

에이미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의뭉스러운 오드리아는 차라리 입을 다물었다.

“그건 제가 도와줄 테니 걱정 마세요.”

쥬아나가 끼어들었다. 당황한 에이미를 향해 거만하다 싶을 정도로 당당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호호.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도 있고 든든하겠어요.”

오드리아는 에이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가식적인 연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좋은 가문에 모든 걸 다 가진 인생이라…….”

에이미가 낮게 읊조렸다. 그녀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았으면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지만 오드리아는 에이미의 입술 모양을 보고 대략 알아차렸다.

‘아직도 그런 피해 의식 속에 사는 건가.’

가난한 집안 때문에 원하는 것을 누리지 못한다는 억울함, 그로 인해 다 가진 오드리아를 향한 열등감을 여전히 품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에게 없는 건 그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걸 전혀 인정하지 못한 채로.

점점 날카로워지던 오드리아의 눈매가 어느새 반달 모양으로 접혀 있었다.

“자작 부인은 제게 관심이 굉장히 많네요.”

“네……?”

“처음보자마자 이렇게 관심을 가지시니…… 뜻밖이어서요.”

오드리아의 뼈 있는 말에 에이미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가 풀어졌다.

“혹시…… 저 때문에 기분이 상했나요. 어머, 죄송해요.”

에이미는 일부러 어깨를 늘어뜨리며 위축된 척했다.

“오드리아 영애는 워낙 화제가 됐어서 눈치 없이 너무 관심을 가졌나 봐요.”

에이미는 오로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오드리아가 정색을 하거나 화를 내면 분명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이다.

하지만 오드리아도 여기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 사이에 교묘한 신경전이 오가며 점점 분위기가 애매해질 때였다.

“즐거운 시간이 될 줄 알았는데, 이래서는 앞으로 티 파티에 참석해도 괜찮을지 걱정되네요.”

신시아는 나지막하지만 바오른 공작 부인을 충분히 긴장하게 만들 말을 꺼냈다.

그녀가 사교계에서 미치는 영향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분위기가 다소 어수선해졌네요. 그러지 말고 이번에 내가 특별한 차를 수입해 왔는데 즐겨 주세요.”

바오른 공작 부인이 시녀들에게 눈짓하자 그녀들이 빠르게 새로운 찻잔에 차를 따랐다.

“향이 좋네요.”

신시아가 차를 음미하며 미소를 짓자 바오른 공작 부인의 표정이 그제야 풀렸다.

“맞아요. 향이 일품이네요.”

“입안에 머물렀을 때 은은하게 느껴지는 풍미가 좋네요. 뒷맛도 깔끔하고요.”

오드리아가 차를 마시고 느낀 감상을 이야기했다. 그녀의 말에 바오른 공작 부인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입을 열었다.

“향도 좋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랍니다. 일 년 내내 날이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거라고 해요. 기분을 진정시켜 주고 특히 두통이 있는 사람에게 좋은 차죠.”

바오른 공작 부인은 마음껏 자신이 준비한 차를 자랑했다.

신시아가 한마디를 하고 난 후부터는 바오른 공작 부인이 어떠한 소란도 없게끔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고 덕분에 오드리아는 더 이상 에이미와 마주치지 않고 무사히 티파티를 끝낼 수 있었다.

* * *

오드리아는 티 파티가 끝나자마자 공작가가 아닌 오필리아 숍으로 향했다. 그대로 페이지가 있는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오드리아 님. 갑자기 어쩐 일이세요?”

페이지가 놀라며 맞이하는데 오드리아의 얼굴이 심상찮았다.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한 페이지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오드리아는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얘기를 꺼냈다.

“페이지. 알아봐 줘야 할 게 있어.”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오웬 자작 부인에 대해 최대한 빨리 알아봐 줘.”

“네. 알겠습니다.”

페이지가 오웬 자작 부인에 대해 알아보는 데는 반나절이라는 시간도 불필요했다. 오드리아가 사무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페이지는 필요한 정보를 모두 끌어모았다.

페이지 역시 오웬 자작 부인에 대해 알아보면서 가장 먼저 알게 되었다. 그녀가 곧 오필리아 숍의 전 주인이었던 에이미라는 것을.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챙겼어야 했는데.”

“그런 걸 말하려고 온 게 아니야.”

“에이미 오웬 자작 부인. 오드리아 님도 알다시피 육 년 전 오필리아 숍의 주인이었던 그 에이미가 맞습니다.”

페이지는 에이미에 관해 알아낸 정보를 오드리아에게 설명했다.

모두가 알고 있던 대로 과거에 에이미는 트루디 공작에 의해 노예가 되었다. 그리고 에이미는 정말로 노예 생활을 하였다. 그녀가 노예가 된 지 일 년 정도 흘렀을 때였다.

에이미가 있는 곳을 수소문한 끝에 오웬 자작이 찾아왔다. 처음에 에이미는 오웬 자작을 만나지 않으려고 피했지만 오웬 자작이 그녀를 끊임없이 찾아와 설득했다. 오웬 자작의 에이미에 대한 마음은 순정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에이미를 설득해서 그의 전 재산이다시피 한 돈을 내고 그녀를 노예 신분에서 풀어 주었다. 노엘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에이미는 노예에서 풀려난 뒤 오웬 자작과 다시 부부가 되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재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인생 반전이 그때부터 일어난 것이다. 두 사람이 재결합한 후로 오웬 자작가가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한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재산은 점점 증식했다.

“이제는 자작가 중에서 손에 꼽힐 만한 자산가라고 합니다.”

“…….”

“황궁 연회처럼 규모가 큰 자리나 공식 석상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늘처럼 귀부인들끼리 만나는 티 파티나 작은 연회 정도에만 참석해서 그동안 미처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에이미가 소문이 날 만한 곳은 피해 다녔을 거야.”

오드리아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며 말했다.

그녀와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한때 가장 사랑했던 가족인데 이제는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경계하게 되다니. 오드리아는 왠지 서글퍼졌다.

“어떻게 할까요?”

페이지는 오드리아가 명하기만 한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로 물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침묵했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일단은 좀 지켜볼까.”

“네? 그게 무슨, 문제가 될 만한 싹은 처음부터 처리해야 합니다.”

페이지가 오드리아를 설득하기 위해 말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궁금하잖아. 일부러 내 앞에 나타나는 도박을 하는 이유가. 앞으로 뭘 할 생각인지.”

“오드리아 님!”

페이지가 당혹스러워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에이미의 존재에 대해선 함구해 줬으면 좋겠어.”

“그럴 수 없습니다!”

페이지가 이것만큼은 따를 수 없다는 듯이 거부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전혀 흔들림 없이 페이지를 바라봤다.

사실, 오드리아가 오필리아 숍으로 온 이유에는 에이미에 대해 알아보는 것, 그리고 하나 더 있었다. 아직 이 사실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모르게 하기 위해서.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두 사람이 알게 된다면 극단적인 방향으로 흐를 것이 분명했다.

에이미에게 어떤 동정심도 없지만 그래도 뭐라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그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먼저 알아야 했다.

“페이지.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그 한마디에 페이지의 입술이 닫혔다. 오드리아의 단호하면서도 냉정한 말은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오드리아가 라미엘을 바라봤다. 그에게도 페이지와 똑같은 경고를 하려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분명 그가 가장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다. 라미엘은 에이미와 노엘 때문에 노예로 팔려 갈 뻔했으니까. 그런데 라미엘은 오드리아가 의아해할 정도로 순순히 대답했다.

“오드리아 님의 명령이니 따르겠습니다.”

라미엘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흔들림 없이 답했다.

“그래…….”

오드리아는 원하는 대답을 듣고도 왠지 모르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페이지. 앞으로 에이미에 대해 꾸준히 알아봐 줘.”

“그렇게 하겠습니다.”

페이지는 여전히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그녀의 말에는 충실히 답했다.

“그럼 이만 가 볼게.”

오드리아가 일어나자 페이지 역시 따라 일어나 그녀와 라미엘이 마차를 타는 모습까지 보며 배웅을 했다.

오드리아는 마차를 타고 공작가로 향하는 내내 유리창에 비친 라미엘을 바라봤다.

그는 그날 이후로 정말로 철저하게 호위 기사로서의 역할만 했다. 더 이상 마음을 고백해 오거나 하지 않았다.

덕분에 오드리아와 라미엘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나마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갑자기 달라진 라미엘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오드리아는 페이지로부터 에이미에 관한 정보를 듣는 한편, 사교활동 역시 이어 나갔다. 데뷔 무도회와 한 번의 티 파티는 오드리아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각인시키기 위한 일종의 눈도장이었다.

앞으로는 오드리아가 사교계에서 인맥을 만들어 완벽하게 입지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오드리아는 데뷔 무도회의 경험을 계기로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참석하지 않는 소규모의 모임 위주로 참석했다. 그러다 보니 에이미와 몇 번이나 마주쳐야만 했다.

에이미가 다시 나타난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페이지는 오드리아를 볼 때마다 걱정 어린 말을 했다.

“에이미가 가만히 있을까요.”

“그럼 좋겠지만, 안 그러겠지?”

페이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드리아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오드리아 님. 절대 방심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오드리아는 여유만만이었다. 내가 고작 그런 애한테 당할 것 같냐는 듯.

“그래 봬도 오웬 부인은 사교계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에요. 그 경험은 결코 얕볼 것이 못됩니다.”

“걱정 말라니까.”

오드리아는 에이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할 만한 행동들까지도.

게다가 아무리 갓 데뷔한 영애라고 해도 트루디 가문의 힘은 강력했다. 오드리아는 그 힘을 효율적으로 휘두를 수 있었다.

“그래도 조심하세요.”

페이지는 끝까지 걱정을 떨쳐 내지 못했다.

* * *

오드리아가 방문을 열고 나왔을 때였다. 문 앞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라미엘이 오드리아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

라미엘은 긴장한 모습이었다.

오드리아는 팔짱을 끼고 라미엘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 오드리아 님의 호위로 복귀시켜 주십시오.”

라미엘이 비장하게 말했다. 고집있게 입을 꽉 다물고 있는 모습이 허락을 해줄 때까지 버티겠다는 무언의 시위 같았다.

그 말을 들은 오드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사실 라미엘이 찾아오지 않았어도 슬슬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면 안 되지.’

오드리아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단호하게 얼굴을 굳힌 채로.

“다신 이상한 행동은 하지 마.”

“네.”

오드리아가 라미엘을 지나쳐 걸어나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오드리아가 돌아서 라미엘을 향해 입을 열었다.

“뭐해. 안 오고.”

“…네!”

라미엘은 혹여나 오드리아의 마음이 바뀔 새라 지체 없이 그 뒤를 따랐다.

라미엘은 뒷모습을 보느라 볼 수 없었지만, 앞서 나가는 오드리아의 한 쪽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가 있었다.

* * *

오드리아의 뒤에 라미엘이 따라 다니는 것을 본 사람들은 자연스레 ‘드디어 용서받았네.’라고 생각햇다.

그와 함께 라미엘의 얼굴도 일부기사들의 말에 따르면 눈꼴시리기 밝아졌다.

라미엘은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는지 돌출 행동을 줄이고 철저하게 오드리아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최근 오드리아의 일정은 대부분 사교 활동으로 가득차 있어서 그녀가 티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선이 집요해서 결국 오드리아가 고개를 돌려 물엇다.

“왜 그래?”

“오늘도 오웬 자작 부인이 참석합니까.”

라미엘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마 그러지 않을까.”

얼마 전, 오필리아 숍에서는 무심하게 모른 척하겠다고 답한 라미엘이었지만 지난 며칠 동안 계속해서 마주치는 에이미의 존재가 아무래도 거슬린 것 같았다.

“라미엘. 오웬 자작 부인을 보는 게 많이 불편해?”

“불쾌하긴 합니다. 특히 오드리아 님께 건방지게 구는 모습을 보면요.”

라미엘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아니, 나말고 너는 괜찮아?”

“제가 걱정하는 건 오드리아 님의 안전입니다.”

에이미가 오드리아를 향해 품고 있는 적의를 라미엘 역시 느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라미엘은 불안감에 날을 바짝 세웠다.

“라미엘, 네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오드리아는 무심코 말했다가 아차, 싶었다. 그를 전적으로 믿는다는 뉘앙스가 진하게 풍기는 말이었다.

‘혹시, 라미엘이 이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겠지…….’

오드리아가 라미엘의 얼굴을 살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게…… 너는 뛰어난 호위 기사잖아. 강하고 언제나 내 곁에 있고…….”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꼬이기만 했다.

‘차라리 가만히 있자.’

하지만 오드리아 혼자서 그를 의식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라미엘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혼자 뭐하는 거지, 오드리아가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졌을 때였다.

“……그래도 조심은 하세요.”

라미엘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응. 그럴게.”

오드리아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오드리아가 참석한 티 파티에는 에이미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드리아와 에이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에이미는 오드리아에게 먼저 다가오지도 수상쩍은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아직은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것처럼.

오드리아는 쥬아나와 다른 영애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도 중간 중간 에이미가 있는 곳을 쳐다봤다. 그러던 도중 오웬 자작 부인, 즉 에이미가 화두에 올랐다.

“오웬 자작 부인 말인가요?”

“괜찮죠. 센스 있고, 눈치가 있어서 대화를 하기 나쁘지 않아요.”

에이미는 사교계에서 꽤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오드리아는 그녀들의 대화를 유심히 들었다.

“게다가 최근 오웬 자작가는 상승세니까요.”

“손대는 사업마다 모두 성공하고 있다나 봐요. 그래서 오웬 자작가의 사업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도 괘 있는 것 같더라고요.”

“오웬 자작의 손발인 보좌관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하는 소문이 있더라고요.”

“그래요?”

귀부인들의 말에 의하면 오웬 자작은 일 년 전부터 상승세를 타기 시작하더니 최근에는 놀라울 정도로 성장했다고 한다.

잘하면 작위가 올라갈 수도 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오드리아는 오웬 자작의 보좌관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에이미의 등장, 최근 오웬 자작의 상승세, 굉장히 뛰어난 보좌관의 존재.

‘노엘이겠지.’

오드리아의 동생이자 에이미와 함께 오필리아 숍을 망치던 존재. 노엘은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오웬 자작 부인은 눈에 띄죠.”

“맞아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눈에 확 들어온 달까. 외모도 그렇지만.”

그녀들의 대화가 오웬 자작가를 지나 에이미의 스타일로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에이미가 오드리아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무슨 얘기를 그리 즐겁게 하고 계신가요?”

“부인의 드레스가 어디에서 맞춘 것인지 내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 그럼 제 대답에 따라 내기의 결판이 나는 건가요?”

에이미는 자연스럽게 여인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굉장히 익숙한 모습이었다. 여인들의 환심을 사는 법도 위화감 없이 중심에 서는 법도.

오드리아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에이미는 오드리아의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그녀에게 눈길 한번 던지지 않았다. 일부러 무시하는 것처럼.

그녀는 오드리아를 철저하게 황궁 연회에서 갓 데뷔 무도회를 치른 트루디 가문의 오드리아 영애로 대했다.

‘언제 아는 체할까.’

오드리아는 에이미를 경계하면서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오드리아를 모른 체하고 지내고 싶은 걸까?

‘그럴 리가.’

오드리아는 에이미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을 유혹하고 속이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렇기 때문에 교만하고 이기적이었다. 자신이 당한 수모를 절대 잊는 법이 없었다. 두 배, 세 배로 갚아 줄 때까지는.

오드리아는 요즘 에이미가 오드리아가 참석하는 연회나 티 파티에 일부러 참석하는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처음에는 오드리아가 비교적 규모가 작은 곳에만 참석하기 때문에 우연히 마주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오드리아 영애. 오웬 자작 부인과 인사한 적 있나요?”

그때였다. 에이미와 즐겁게 떠들고 있던 귀부인 중 한 명이 에이미와 오드리아를 향해 말했다

“지난번 바오른 공작 부인께서 주최하신 티 파티에서 잠깐 인사를 나누기는 했는데, 워낙 인기가 많아서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도 못했네요.”

에이미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런. 오드리아 영애. 오웬 자작 부인은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으니 알아 두면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오드리아 트루디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앞으로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에이미가 오드리아를 빤히 보며 말했다.

“어떤 활동을 하시는 건가요?”

오드리아는 귀부인이 한 말을 기억하고 에이미에게 물었다. 에이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별거 아닌데 부인께서 괜히 저를 띄워 주시려 말씀하신 거 같습니다.”

“무슨 그런 말을. 오웬 자작 부인께서는 자선 활동을 비롯하여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어요.”

에이미의 겸손한 말에 귀부인이 나서서 오드리아에게 설명해 주었다. 에이미는 자신의 입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자신을 드높이고 있었다.

‘역시 에이미는 그대로네.’

오드리아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오웬 자작 부인으로 나타난 에이미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드리아가 기억하는 에이미 그대로였다.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다른 곳에서 여인들을 불렀다. 에이미를 한창 칭찬하던 귀부인이 양해를 구했다.

“그럼 잠시 다녀올게요.”

대화를 나누던 귀부인들이 자리를 비우고 오드리아와 에이미만이 남았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오드리아는 잠시 에이미가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영애. 오랜만이에요.”

에이미는 오드리아와 단둘이 있게 되자 드디어 아는 체했다.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오필리아 숍에서 만났던 오드리아를 기억한다는 듯한 노골적인 시선과 함께.

“이렇게 보게 될 줄 몰랐어요.”

오드리아 역시 인사했다. 오드리아의 말에 에이미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저는 알고 있었답니다.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것을요.”

에이미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럼 그렇지, 언제까지나 발톱을 숨긴 채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드리아 역시 에이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라는 듯이.

하지만 오드리아와 에이미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본격적인 티 파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오드리아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가졌다. 그녀에게는 황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트루디 공작가라는 가문이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제국의 모든 영애가 선호하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찾는 오필리아 숍이 있었다.

오필리아 숍은 워낙 많은 영애들이 한꺼번에 찾는 탓에 오히려 차례를 기다리고 그를 위해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인맥을 총동원할 정도였다.

이 두 가지 조건만으로도 오드리아는 사교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었다.

오드리아가 귀부인과 영애들이 관심을 보일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오필리아 숍에서 새로운 디자인들을 내놓는다고 해요.”

“정말요?”

“3층에서 진행한다는 그거 말인가요?”

“맞아요.”

역시나 오드리아의 한마디에 다들 집중했다. 오필리아 숍에서 새로 나오는 드레스는 당연히 모두의 관심이 쏠릴 만한 이야기였으니까.

“이번에는 소수의 분들을 초대해서 먼저 선보일 예정이라고 하는데.”

오드리아의 말에 좀 전의 관심이 이제는 열렬한 구애의 눈빛으로 변했다. 그 누구보다 먼저 새로운 드레스를 볼 수 있는 기회.

그건 유행을 남들보다 앞서나간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마담 페이지가 제게 누굴 초대할지 묻던데…….”

오드리아의 한마디에 여기저기서 불이 들어왔다.

“이미 정했나요?”

“아직 정하지 않았으면…….”

귀부인들의 말에 오드리아가 눈을 반으로 접으며 말했다.

한편, 이 모습을 지켜보는 내내 말이 없던 에이미의 얼굴이 구겨져 있었다. 오드리아는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보면서 다른 귀부인과 영애들을 향해 보란 듯이 말을 이어갔다.

“여기 있는 분들께서 와 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그럼 우리가 더 고맙죠.”

“초대해 주는데 당연히 가는 게 도리 아니겠어요?”

귀부인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곧 제대로 된 초대장을 댁으로 보내도록 할게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오드리아는 단 몇 번의 사교 활동만으로도 많은 귀부인들과 영애들로부터 인정받았다. 아니, 오히려 모두가 오드리아에게 관심을 받으려고 했다.

언제나처럼 오필리아 숍에 들러서 차를 마시며 쉬고 있는데 페이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뭐랄까…….”

“응?”

“걱정한 제가 한심해지네요.”

페이지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오드리아는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사교계의 중심으로 올라섰으니까.

“오드리아 님은 언제나 제 예상을 뛰어넘으세요.”

페이지는 걱정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너무나 잘 적응하는 오드리아의 모습에 허탈해하며 말했다.

“그래서 섭섭해?”

“무슨 말씀을. 그래서 더욱 감격스럽답니다.”

페이지가 웃으며 말했다.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아직이야.”

“네?”

하지만 오드리아는 진지하게 ‘아직’이라고 말했다.

“지금 내게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해. 내 위치를 확실하게 하는 건 이제부터야.”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때 휘청거려서 넘어지면 오드리아의 입지 역시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다. 그러니 사교계에서 진짜로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는 앞으로가 승부였다.

아직 에이미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분명 그녀가 뭔가를 꾸미고 있을 것이다. 오드리아는 단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았다.

‘내가 방심하는 순간, 분명 허를 찌를 거야’

에이미는 호시탐탐 그것만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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