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오드리아는 복잡한 마음에 잠이 오지 않아 혼자 후원에서 산책을 하다 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다.
“연회는 즐거우셨습니까.”
라미엘이 다가왔다. 전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물었다.
“그때 연습하신 춤은 추셨습니까?”
오드리아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자 라미엘이 이번에는 다른 것을 물었다. 사실 그가 진짜 궁금한 건 두 번째인 것 같았다.
“……아니…….”
오드리아가 의기소침해하며 중얼거렸다. 그러곤 불만스러운 듯 발로 땅을 살짝 쳤다.
그렇게 연습을 했는데 결국 제대로 춰 보지 못했다.
연회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는 모두 의미가 있었다. 가족, 친구, 연인 상관없이 함께 추는 춤이 있는가 하면 오로지 연인 혹은 호감이 있는 이성과 추어야만 하는 춤이 있었다.
데뷔 무도회의 꽃은 바로 그 춤을 누구와 추느냐였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결국 그 춤을 추지 못했다. 그녀에게 춤을 신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와는 출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럼 저라도 춰 드릴까요?”
“……?”
라미엘의 말에 오드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라미엘이 오드리아 앞에 서며 손을 내밀었다. 연회에서 댄스를 신청할 때 하는 제스처였다.
“비록 모두가 보는 화려한 데뷔 무도회는 아니지만.”
“…….”
“제게 영애와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라미엘의 입꼬리가 그림처럼 올라갔다. 오드리아는 라미엘이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달빛에 이끌리는 것처럼 오드리아는 라미엘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러자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라미엘의 팔이 오드리아의 허리를 안았다. 라미엘이 한 발 앞으로 움직였다. 오드리아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앗…….”
그런데 오드리아가 실수했다. 하지만 라미엘은 당황하지 않고 오드리아를 끌어안은 등에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여기서 한 발 앞으로. 제게 기대십시오.”
“……?”
라미엘은 이미 많이 춰 본 사람처럼 능숙하게 오드리아를 리드했다.
“……왜 이렇게 잘해?”
라미엘은 오드리아를 능숙하게 리드했다. 그녀가 실수한 것을 메꿔 줄 만큼.
“상상해 봤거든요.”
“상상……?”
오드리아가 고개를 살짝 올려 라미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 전부터 오드리아를 보고 있었는지 두 사람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지면서 눈이 마주쳤다.
“……!”
오드리아는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굳었다.
한창 스텝을 옮기고 있던 라미엘의 발에 걸려 오드리아가 몸의 중심을 잃고 휘청하는데 라미엘이 오드리아를 붙잡았다.
“조심하세요.”
그의 품에 안긴 듯한 자세로 라미엘의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왜 이렇게 귓가가 간지럽지.
‘지금 내 얼굴…… 괜찮나?’
어쩐지 얼굴이 붉어져 있을 것 같아 불안했다.
방금 전, 라미엘의 얼굴이 닿을 것처럼 가까웠을 때 오드리아는 본능적으로 소리를 지를 뻔했다.
‘라미엘의 얼굴이 저랬었나?’
그가 어렸을 때와는 달리 남자다워졌다고는 생각했었는데……. 그녀를 향한 깊은 시선과 올곧은 눈빛에 압도될 뻔했다.
오드리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
“춤은 아직 어색하신 것 같습니다.”
라미엘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를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오드리아가 울컥했다.
“원래는 지금보다 더 잘해. 지금은…… 음악이 없어서 그런 거야.”
말이 안 되는 변명이었다. 같은 조건에서 춤을 추는데 오드리아만 몇 번이나 발이 꼬이는 등 작은 실수들이 있었다.
언제나 뭐든 잘하던 그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한 번도 춰 본 적 없으니까…….’
연인과 함께 추는 춤은 그동안 여성인 댄스 교사와만 춰 보았다. 정작 연회 때는 누구와도 춰 보지 못했으니 남자와 추는 춤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라미엘이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속삭였다.
“저는…… 이 순간을 몇 번이고 질릴 때까지 떠올렸습니다.”
“…….”
“눈을 감아도 완벽하게 출 수 있을 만큼요.”
갑자기 진지하게 들리는 그의 말에 오드리아는 왠지 대답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몸을 맡긴 채 춤을 이어 나갔다.
연회장도 아니고 음악도 없었지만 오드리아의 허리를 감은 라미엘의 팔은 단단했고 두 사람의 모습은 밤하늘의 별처럼 어두운 곳에서도 존재감을 밝혔다.
오드리아가 고개를 돌렸다가 라미엘을 바라보는데 그의 얼굴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오드리아는 순간 당황한 나머지 굳어 버렸다. 고개를 뒤로 빼지도 돌리지도 못한 채 눈만 깜박이는데 라미엘이 천천히 고개를 들면서 멀어졌다.
“……!”
그 순간 그녀의 이마에 뭔가가 닿았다. 바람이 스쳐간 건지 라미엘의 입술이 스쳐간 건지 헷갈렸다.
그동안에도 두 사람의 춤은 계속 이어지는데 라미엘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 이마에 닿았던 부드러우면서 따뜻한 감촉이 그녀의 착각 같았다.
하지만…… 오드리아의 이마에는 여전히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게 굉장히 낯설고 이상하면서도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오드리아가 살짝 고개를 들어 라미엘의 입술로 시선이 향했을 때였다.
두근.
오드리아의 심장이 갑자기 크게 뛰었다.
‘뭐야…….’
이마에 남아 있던 온기가 점점 퍼져 나가 어느새 오드리아의 온 얼굴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갑자기 찾아온 오묘한 기분에 오드리아의 행동이 느려지자 라미엘이 의아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에서도 오드리아의 얼굴이 붉은 게 보였다. 라미엘이 움직임을 멈췄다.
“오드리아 님.”
하필 이럴 때 라미엘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렀다. 눈빛은 잔잔하면서도 그윽해서 눈을 사르르 접으며 미소를 짓자 오드리아의 열기에 불을 지피는 것 같았다.
갑자기 라미엘에게서 낯선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열이 나는 것 같습니다.”
라미엘이 오드리아의 이마를 짚으며 걱정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찬바람을 너무 쐬었나 봅니다.”
라미엘이 재킷을 벗어 오드리아의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감기에 걸리기 전에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라미엘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역시나 조금 전의 일은 착각인 것이 분명했다. 오드리아는 자신의 착각이 우스워 설핏 웃음이 나왔다.
“……그래.”
오드리아를 감싸고 있는 재킷에서 라미엘의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방에 도착할 때까지 오드리아의 심장은 전력질주를 하는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오드리아는 라미엘과 춤을 춘 후부터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언제나 뒤에서 당연하다는 듯 지키고 있어서 그녀에게는 메릴과 페이지만큼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라미엘의 시선이 자꾸만 느껴졌다.
‘나를 호위하는 거니까 지켜보는 게 당연한 건데.’
자의식과잉인 건지, 그의 시선에 왠지 얼굴이 뜨거워졌다.
* * *
데뷔 무도회는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나름의 수확 역시 있었다. 귀부인과 영애들에게 그녀의 존재감을 알린 것.
본격적으로 사교계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그녀들과 어울리는 것 역시 중요했다.
물론,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감히 오드리아 트루디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교계는 가문의 위세와는 상관없는 나름의 세계와 질서가 있었다. 그것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황궁 연회에서 대부분의 귀부인과 영애들이 오드리아에게 호기심을 드러내며 관심을 가졌지만 그중에 진짜 호의가 몇이나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부터가 더 중요했다. 때마침 지난 연회에서 만났던 바오른 공작 부인으로부터 티 파티 초대장이 왔다.
오드리아는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연회와 비교하면 좀 더 사적인 티 파티에서 여러 사람들과 교류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제레미아가 놀란 얼굴을 했다.
“티 파티를 왜 가?”
오드리아가 굳이 티 파티에 참석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이제 사교계에 본격적으로 데뷔도 하셨으니 다른 곳에도 참석을 하실 계획입니다. 지난 연회에서 아쉬운 점도 있었으니, 그걸 위해서라도…….”
제레미아의 물음에 메릴이 대신 대답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말을 끊고 들어왔다.
“그때 연회 잘 끝났잖아.”
“…….”
“무슨 문제라도 있어?”
제레미아가 되물었다. 데뷔 무도회는 완벽하게 끝났는데 뭐 때문에 사교 활동을 더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듯이 덧붙였다.
“감히 함부로 수작 거는 놈도 없었고.”
“그게 무슨?”
함께 듣고 있던 메릴이 불안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제레미아가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그때 얼마나 신경 썼는데.”
마치 황궁 연회가 잘 끝난 데에는 자신의 역할이 컸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그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는 것을.
오드리아는 순간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설마…….’
어린 시절 오드리아의 ‘설마’는 언제나 현실이 되곤 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나였다. 오드리아는 데뷔 무도회에서 아무도 자신에게 댄스 신청을 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모두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때문이다. 두 사람이 감히 오드리아에게 다가오려고 하는 영식들을 전부 막은 것이다.
오드리아는 연회 날 사람들의 반응을 다시 떠올렸다. 어쩐지 위화감이 들더라니. 그래서였나.
오드리아가 연회장에 들어섰을 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목과 쇄골 외에는 노출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투명하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 모습에 연회장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당연히 모두가 오드리아에게 댄스 신청을 하고 싶었다. 서로 눈치를 보며 보이지 않는 경쟁이 치열했을 만큼.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오드리아의 앞에 서서 댄스 신청을 한 사람은 없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오드리아에게 조금이라도 다가가려는 기색이 보이면 흉흉한 분위기를 뿜으면서 그들을 노려보았으니까.
트루디 대공이 황제와 자리를 비웠을 때가 기회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다시 한번 시도하려 했지만 연회장에는 여전히 제레미아가 지키고 있었다.
제레미아는 오드리아에게 다가오려는 자들에게 뒤에서 조용히 위협을 하거나 아니면 따로 불러내서 좋은 말로 조언 혹은 협박을 해 주었다.
연회장에서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 협박을 받으면서까지 오드리아에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일단 살아야 하니까.
‘연회에서 나랑 눈이 마주칠 때마다 놀란 듯이 도망친 것도…….’
연회에서 오드리아가 시선을 돌릴 때마다 제레미아나 트루디 대공과 자주 눈이 마주쳤었다. 언제나 오드리아가 있는 곳을 보고 있다는 듯이.
그땐 혼자 있는 자신을 걱정해서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오드리아는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는 것 같았다.
결국, 오드리아의 데뷔 무도회가 그렇게 된 것은 모두 오드리아에게 다가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철저한 경비 때문이었던 것이다.
데뷔 무도회의 전말을 모두 알게 된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지금쯤 있을 법한 곳으로 향했다.
두 사람은 집무실 근처에 있는 정자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오드리아는 두 사람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번 일의 전말을 알게 된 후 오드리아는 다른 사실도 알게 되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오드리아의 데뷔 무도회를 망쳤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음흉한 놈들로부터 오드리아를 지켰다고 뿌듯해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성공적인 데뷔 무도회였던 것이다.
같은 데뷔 무도회를 두고 전혀 다른 해석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방해를 받는다면 오드리아는 앞으로 원만한 사교활동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제대로 설득을 해야 할 텐데. 대체 어디서부터 이해를 시켜야 할까. 오드리아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애초에 오드리아가 어떻게 말해도 두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되레 그녀를 설득하려고 들 수도 있었다.
이번 데뷔 무도회로 인해 확실해진 것은 있었다. 앞으로 오드리아의 사교계 적응이 험난할 거라는 것. 그것도 바로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때문에.
‘제대로 된 연애는 틀렸네.’
오드리아는 직감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오드리아의 면전에서 대놓고 움직인 적은 없었다.
언제나 그 뒤에서 오드리아는 모르도록 조용히 처리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걱정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오드리아가 알지 못하도록 처리했을 것이다. 그걸 왜 생각 못했을까.
하지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와만 춤을 춰서 싫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두 사람과 함께한 것만으로도 넘치도록 행복했다. 페이지와 메릴의 수고가 아주 헛되지 않았으니까 괜찮았다.
오드리아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가끔 문제를 일으키고 오드리아를 난감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때로 추리를 하게 만들곤 하지만 어쨌거나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 받는 사랑이 좋았다.
* * *
데뷔 무도회를 치르고 나니 그동안 잊고 지내던 몇 가지 사실들이 떠올랐다.
어느 순간부터 오드리아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아 당연하게 여기던 라미엘의 존재 역시.
그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약속했었다.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을 만큼의 어른이 된다면 언제든지 떠나도 좋다고.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지금이 바로 그때일 것이다.
“이제 라미엘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제레미아 님밖에 없습니다.”
“아이작은?”
“저도 집니다.”
아이작은 자신이 진다는 얘기를 능청스럽게 얘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진심이었다. 오드리아는 깜짝 놀랐다. 라미엘의 실력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확실히 라미엘은 어린 시절의 모습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남들보다 작고 왜소했던 키와 체구는 이제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누구라도 돌아보게끔 했던 아름다운 외모는 여전히 사람들을 돌아보게 만들지만 더 이상 아름답거나 예쁘지 않았다. 선이 굵은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젠 라미엘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드리아는 깨달았다. 라미엘이 이젠 제국에서도 손에 꼽힐 만한 실력을 지니게 됐다는 것을.
‘이제는 보내 줘야겠지.’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좀 더 머물러 줬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오드리아는 결심했다. 라미엘을 이제 보내 주기로. 그가 원하는 곳으로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 * *
오드리아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이작과 라미엘이 대화 중이었다. 순간 오드리아는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옆에서 메릴이 뜯어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싫습니다.”
라미엘이 단호하게 말했다. 뭐가 싫다는 거지? 혹시 또 고용인들 중 누군가와 문제라도 일으킨 건가. 오드리아는 덜컥 걱정부터 들었다.
라미엘은 공작가에서 잘 지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용인들과의 관계까지 원만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작을 비롯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고용인들 중 누군가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하면 라미엘과 시비가 붙은 경우가 대다수였다. 오드리아의 귀가 더욱 쫑긋해졌다.
“왜?”
아이작이 물었다.
“저는 여기서 벗어날 겁니다.”
라미엘의 말에 오드리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이미 라미엘을 보내 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속마음을 확인하니 왠지 섭섭했다. 그래도 공작가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역시 보내줘야겠지.’
라미엘은 지금까지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말해야지. 이제 떠나라고.’
오드리아는 다시 한번 결심했다. 지금까지 머뭇거리던 마음까지 깨끗하게 정리했다.
하지만 그 결심도 잠깐이었다. 결국 오드리아는 잠깐 사이에도 수십 번 바뀌는 마음 때문에 모두가 자는 한밤중에 후원을 산책하며 머리를 식혔다.
오드리아는 그동안 자신이 따로 모아 놓은 돈을 꺼내 펼쳤다.
이 정도면 적당한 집을 하나 사서 일 년 정도는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이었다.
원래는 그녀가 성인이 되면 독립할 때 가지고 나가기 위해 모아 놓았던 돈이다.
‘이걸 라미엘에게 주자.’
그가 떠날 때 보태 쓰라고 줄 생각이었다. 여기에 그동안 라미엘이 모은 돈을 더하면 경제적인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쓰이니 다행이다. 오드리아는 돈을 넣은 상자를 정리하며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라미엘에게 어른이 되면 얼마든지 떠나도 좋다고 했을 때까지는 오드리아 역시 성년이 되면 공작가를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니 라미엘이 어디로 가든 상관없었다.
‘그때는 이렇게 될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었는데…….’
라미엘이 그녀의 호위 기사가 되고 함께 지내다 보니 모든 것이 추억이 되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가족으로서 사랑하게 될 줄 몰랐다. 그들과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게 될 줄 전혀 알지 못했다.
‘이제 여행은 못하겠네.’
여행을 떠난다면 어디를 가면 좋을지 후보지도 선정했었는데. 그 목록을 정리한 종이도 여전히 있었다.
‘외국어도 조금은 할 수 있게 됐는데, 소용없어졌네.’
나름 외국어 공부 열심히 했는데 써먹지 못하게 되었다. 오드리아는 아깝다는 듯 피식 웃었다.
오드리아는 거울을 보지 못해 몰랐을 것이다. 가족을 떠올리는 순간 오드리아가 얼마나 행복한 얼굴을 하는지.
* * *
식사를 하고 있는데 다른 기사와 교대하는 라미엘이 보였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는 그녀의 그림자 같았다.
‘이제는 없겠구나.’
그동안 정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오드리아는 라미엘을 떠나보내는 게 아쉬웠다.
그래서 벌써 몇 번이나 말할 기회를 놓쳤다. 라미엘에게 말하기로 결심하고 며칠이나 지났다.
“요즘 자꾸 저를 이상하게 보시는 거 같은데…….”
고민하는 날이 길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라미엘을 빤히 쳐다보게 되었고 결국, 라미엘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챘다.
“아무것도 아냐.”
“……?”
그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보였지만 오드리아는 발뺌할 수밖에 없었다.
막상 라미엘을 보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제 말하지?’
오드리아의 고민이 길어졌다.
‘말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그전에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오드리아는 라미엘에게 할 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동안 라미엘은 오드리아의 곁에 언제나 있었다. 그녀의 그림자처럼 당연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라미엘이 떠나고 나면 분명 허전할 것이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아는 법이니까. 어쩌면 그가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그도 오드리아처럼 공작가에 익숙해져서 이곳에 있고 싶어 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래도 떠나고 싶어 하니까.’
그럼 보내 줘야 한다. 그게 약속이니까.
억지로 붙잡고 싶지 않았다. 오드리아가 원하는 인생을 살 듯 라미엘도 그가 원하는 대로 살기를 바랐다.
‘말하자.’
오드리아는 결심했다.
그가 약속대로 지난 시간 동안 공작가에 충실했던 만큼 오드리아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오드리아가 벤치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라미엘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여기서 뭐 하십니까.”
“라미엘.”
밤늦게까지 혼자 훈련을 했는지 라미엘은 훈련복을 입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는 훈련복이 아니었네.
순간 오드리아의 머릿속에 라미엘과 함께 음악도 없이 춤을 췄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라미엘은 연미복까지는 아니었지만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춤을 추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연회장에서 라미엘과 함께 춤을 추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요즘 따라 밤에 산책이 잦으시군요.”
확실히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산책을 나올 때마다 라미엘과 마주치는 것 같았다.
“혹시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는 겁니까.”
라미엘이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라미엘의 농담을 받아 줄 수 없었다.
오드리아는 라미엘에게 말할 기회를 노리면서도 ‘내일 오전에, 아니 저녁에’ 그렇게 조금이라도 나중에 말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지금 만나 버리고 말았다.
‘지금 해야겠지?’
오드리아는 라미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라미엘이 막상 눈앞에 있으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드리아는 말해야 하는 순간이 오자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라미엘에게 익숙해져 있었다는 걸.
“왜 그러십니까?”
오드리아가 아무 말도 없이 빤히 보기만 하자 라미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에도 말하지 못하면 오드리아는 정말로 라미엘을 못 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약속을 지킬게.”
“……?”
혼자서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면 얼마든지 보내 주겠다고 했던 그 약속. 오드리아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해하지 못한 라미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오드리아는 여전히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 여기서 한 마디만 더 하면 끝이었다.
앞으로 라미엘은 더 이상 공작가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말해야지. 그게 약속이었으니까. 오드리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만 여길 떠나도 좋아.”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되었지만 라미엘은 한때 오로지 이 순간만을 기다리면서 버티는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동안 여기서 지내느라 수고 많았어.”
오드리아는 라미엘을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여길 떠나면 어디로 갈 거야?”
혹시 예전의 오드리아처럼 제국을 떠날 생각인 걸까. 그럼 조금 많이 쓸쓸할 것 같다고 오드리아는 무심코 생각했다.
“떠나고 싶은 날을 정해서 말해 줘. 나머지는 내가 정리할 테니까.”
“…….”
“그리고…… 떠나기 전에 줄 것도 있고.”
오드리아가 혼자서 주절주절 말하는 동안 라미엘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오드리아는 더욱 횡설수설 말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도 티 내지는 말아야지. 웃으면서 보내 줘야지.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서 그녀는 억지로 웃었다.
그런데 오드리아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본 라미엘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마치 화가 난 것처럼.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라미엘의 목소리가 끝도 없이 내려갔다. 그의 머리카락에 가려져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그가 결코 웃고 있지 않다는 사실만은 알 것 같았다. 오드리아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여기…… 떠나고 싶다며.”
오드리아는 라미엘이 아이작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런데 라미엘의 일그러진 얼굴은 도통 풀릴 기색이 없어 보였다.
* * *
오드리아가 방심한 동안 라미엘은 조금씩 이상해졌다. 그걸 가장 먼저 느낀 건 고용인들이었다.
최근에 갑자기 이상해진 라미엘에게 시달리다 못해 질린 기사들이 더는 참지 못하고 그를 말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찾아왔다.
그가 유일하게 말을 듣는 사람, 오드리아에게.
“오드리아 님. 라미엘 좀 어떻게 좀 해 주세요.”
기사들이 오드리아에게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훈련 강도가 높아져서 다들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건…… 부단장이나 책임자에게 얘기하는 게 빠르지 않아.”
“지금 책임자가 라미엘이라 문제입니다.”
“아…….”
“라미엘이 훈련을 끝내지 않아서 다들 죽으려고 합니다.”
“이러다 다들 다리나 팔 하나씩은 부러져야 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도 라미엘 때문에 힘듭니다.”
문제는 기사들 사이에서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여긴 또 무슨 일이지, 오드리아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서운 기세로 밤새도록 오드리아 님의 문 앞만 지키고 있으니 다른 아이들이 라미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일을 못하고 있습니다.”
“…….”
라미엘이 새벽 내내 오드리아의 방문 앞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그녀 역시도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오드리아 님도 아시다시피 라미엘은 저희 말을 제대로 안 듣지 않습니까.”
“요즘 다들 라미엘 눈치를 보느라 분위기가 안 좋아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일하는 애들이 버티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고용인들은 혹시 라미엘과 오드리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것까지는 물어보지 못하고 오드리아에게 앓는 소리만 늘어놓았다.
“도저히 저희들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부디 오드리아 님께서 나서 주세요.”
그들의 호소를 듣는 내내 골머리가 아팠다.
대체 어떻게 하면 라미엘을 말릴 수 있지? 문제는 오드리아도 그 방법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제발 부탁드릴게요. 이러다 저희 모두 라미엘 때문에 죽겠어요.”
“저희 좀 살려 주세요.”
그들이 오드리아에게까지 찾아와 직접 부탁하는 걸 망설이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찾아와 하소연을 하는 것을 보면 생각보다 더 절박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방법을 찾아볼게.”
오드리아가 그들에게 약속했다. 사실 그녀 역시 확신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거짓말이라도 해서 고용인들을 안심시켜야 할 것 같았다.
“감사해요, 오드리아 님!”
기사들과 고용인들이 환하게 웃었다. 이제야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다는 듯이.
고용인들은 물러나면서도 오드리아에게 계속해서 부탁했고 오드리아는 알겠다며 안심시켜 주었다.
하지만 고용인들이 나가자마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아…… 대체 어떻게 달래 주지.’
어떻게 해야 라미엘을 달래 주고 지금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기행들을 멈출 수 있는 거지? 오드리아는 머리가 아프도록 고민했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 * *
“페이지한테 가자.”
오드리아는 얼마 후에 참석할 티 파티와 앞으로 있을 사교 활동을 위한 새로운 드레스를 몇 벌 맞추기 위해 오필리아 숍을 찾았다.
“오드리아 님. 그사이에 좀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오드리아의 치수를 재고 있던 그녀의 미간이 구겨졌다. 뭔가 문제를 발견한 것처럼. 페이지가 오드리아를 유심히 보더니 입을 열었다.
“뭐가?”
“점점 어른이 되어 가고 계세요.”
페이지가 한곳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체형이 좀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페이지의 말에 오드리아가 부정했다. 얼마 전에 데뷔 무도회가 있었다. 그때 페이지는 오드리아의 체형과 치수를 샅샅이 확인했었다.
그로부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사이에 달라질 리가. 오드리아가 웃으며 넘기려고 할 때였다. 페이지의 얼굴이 너무 진지했다.
“아무래도 드레스를 제작하기 전에 오드리아 님의 치수를 다시 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페이지는 반강제로 오드리아의 체형을 다시 확인하려고 했다. 오드리아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페이지에게 떠밀려 결국 그녀에게 몸을 맡겼다. 페이지는 직접 오드리아의 치수를 재기 시작했다.
“오드리아 님 나이에는 하루가 다르게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자고 일어나면 키가 커지고 피부가 달라지고 몸에 굴곡이 생기곤 하죠.”
“…….”
“몸도 마음도 많은 일이 생기는 시기이니까요.”
페이지의 말은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몸도 마음도’라는 것은 무슨 의미지.
“그나저나 요즘 라미엘에 관한 말이 많던데요?”
“그게…… 페이지 귀에까지 들어갔어?”
“고용인들이 숍에 와서 하소연을 해서요.”
페이지는 살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고용인들의 하소연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지 눈에 선했다.
“그러게. 라미엘이 이상한 짓을 그만해야 할 텐데.”
“오드리아 님의 한마디면 해결될 텐데요.”
페이지가 치수를 기록하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 한마디?”
오드리아의 눈이 커졌다. 뒤에 있는 페이지를 돌아보았다.
“네, 오드리아 님께서 하지 말라고 말씀만 하시면요.”
“과연 그럴까.”
오드리아가 회의적인 얼굴로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모르세요? 라미엘이 그러는 이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오드리아가 푸념하듯이 중얼거리자 페이지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간 오드리아는 깨달았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이유를 페이지는 알고 있다는 걸. 페이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페이지는 아는 거야?”
“…….”
페이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중간에서 멋대로 말할 수는 없죠.”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페이지가 후훗, 웃었다. 그 모습이 왠지 얄미워 오드리아의 눈가 사이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럴수록 페이지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오드리아는 고민 끝에 제레미아를 찾아갔다.
지금 그녀가 고용인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은 기사단의 훈련 책임자를 바꿔 주는 것밖에 없었다.
‘일단 가장 빠른 방법부터 찾아야겠지.’
지금도 라미엘이 오드리아의 바로 옆에서 떡하니 지키고 있었지만, 그녀도 라미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원인을 두고 증세만 가라앉히는 격이지만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오빠는 안에 있어?”
마침, 문 앞에서 그웬과 마주친 오드리아가 물었다.
“네. 안에 계십니다만…….”
“고마워.”
오드리아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빠. 저 왔어…… 어?”
그런데 방 안에는 제레미아 혼자 있는 게 아니었다.
“……손님이 계셨네요.”
당황한 오드리아가 물러나려고 할 때였다.
“괜찮으면 잠시 있다가 가요.”
제레미아와 함께 있던 그녀가 오드리아를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옆자리를 권했다.
“잠시 실례할게요.”
결국, 오드리아는 두 사람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연회에서 보고 처음이죠?”
제레미아의 어릴 적부터 친구이기도 한 쥬아나였다. 릴스테인 후작가의 영애.
릴스테인 후작가는 오랜 시간 동안 독과 각종 약을 취급해 왔다.
제국이 갓 세워졌을 때만 해도 릴스테인 후작가는 귀족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뒷세계의 거물이었다.
그러던 중 제국의 황제가 마약과의 전쟁을 시작했을 때 황제를 도와준 것이 초대 릴스테인 후작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릴스테인 후작가는 제국 내의 모든 독과 약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가문보다 독과 약에 대해 잘 아는 곳이 없었다.
그녀는 데뷔 무도회 때를 말하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땐 재밌었어요.”
그녀는 얼굴에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의 데뷔 무도회 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때문에 그 어느 영식도 다가오지 못한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다들 나중에 얼마나 아쉬워하던지.”
쥬아나의 말에 제레미아가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반응을 보인 것은 라미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시 에드윈 기억나요?”
“누구, 말인가요?”
“금발에 살짝 곱슬인데 키는 저기 뒤에 있는 호위 정도 되는 영식이요.”
“아…… 기억나네요.”
황궁 연회에서 몇 번인가 눈이 마주쳤던 사람이었다. 오드리아가 그를 기억한다고 하자 제레미아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그놈 얘기는 왜 꺼내?”
괜히 쥬아나에게 투덜거리기까지 했다.
“왜긴. 네가 망친 데뷔 무도회에 대해 알려 주려고 하지.”
“망치긴 내가 언제!”
“레이디에게 그건 보호가 아니라 훼방이야.”
“……윽.”
쥬아나는 거침없는 말 한마디로 제레미아의 뼈를 쳤다.
“헤르시안 후작가의 영식이에요. 몇 번이나 영애에게 춤을 청하고 싶었는데, 그럴 때마다 제레미아가 죽일 듯이 노려봐서 포기했다고 아쉬워하더라고요.”
“감히 누굴 넘봐!”
제레미아가 옆에서 역정을 냈다. 혹시라도 오드리아가 화가 났을까 봐 슬쩍 눈치를 보면서. 오드리아는 화가 나기보다는 그녀의 말이 재미있었다.
“그랬나요?”
오드리아는 몰랐다는 얼굴을 하며 미소를 지었지만 그녀의 데뷔 무도회에서 대부분의 영식들이 제레미아와 트루디 대공의 눈치를 보느라 다가오지 못했었다.
“제레미아의 동생 사랑이 너무 대단해서 오히려 귀찮지는 않아요?”
쥬아나가 제레미아를 놀리며 말했다.
“내가 귀찮아……?”
제레미아의 눈꼬리가 처졌다.
“아뇨. 저는 오빠와 함께 춤을 춘 게 더 즐거웠어요.”
“리아…….”
감동을 받은 제레미아가 눈을 빛내며 오드리아를 바라봤다.
오드리아는 두 사람과 대화를 이어갔다. 쥬아나는 유쾌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볼게요. 좀 더 대화 나누세요.”
오드리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레미아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꺼내지 못했지만 시원시원한 그녀의 성격에 기분이 좋았다.
방을 나오고 나서도 오드리아가 싱글벙글 웃자 라미엘이 그런 그녀를 힐끔 쳐다보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이면서.
“누굽니까.”
“……?”
오드리아가 라미엘을 바라보았지만 라미엘의 시선은 그녀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헤르시안 후작가의 영식이란 자가…….”
라미엘은 괜히 먼 곳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쥬아나가 그에 대해 얘기한 후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나 보다.
“그냥 황궁 연회에서 잠깐 본 게 전부야.”
정말 그게 전부였다. 그것도 제대로 된 인사는커녕 고작 눈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 그가 누구인지도 방금 쥬아나가 말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누군지 기억하는 겁니까?”
“…….”
“아니면 금발에 곱슬머리가 오드리아 님 취향입니까?”
왜 말이 그렇게 돼? 오드리아는 황당했다.
그런데 라미엘의 얼굴을 보니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오드리아는 뭐라고 말할까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하든가.”
두루뭉술한 대답을 남기고 오드리아는 그대로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