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데뷔 무도회 (1)
오드리아는 평소처럼 아침을 먹고 있는데 메릴이 말했다. 이제부터 데뷔 무도회를 준비해야 해 바빠질 거라고. 그녀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데뷔 무도회?”
갑자기 데뷔 무도회라니. 오드리아가 메릴을 빤히 쳐다보자 그녀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살짝 상기된 듯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 데뷔 무도회를 기점으로 사교계에 본격적으로 나서시게 되는 거예요.”
메릴은 그 모습을 상상만 해도 기대가 되는 듯 즐거워 보였다. 그녀는 눈을 빛내며 오드리아가 묻지 않은 것까지 설명했다.
“이번 전쟁에서 제국이 승리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황궁에서 연회가 거대하게 열릴 예정이에요. 당연히 전쟁에서 누구보다도 큰 공을 세우신 대공 각하와 제레미아 님이 중심이 될 테죠. 바로 그 자리에서 데뷔하게 되실 거예요. 가장 화려한 곳에서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그 누구보다도 빛날 모습이라니.”
메릴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설레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꿈속을 거닐고 있는 것처럼 황홀한 모습이었다.
“다른 영애들은 절대 누리지 못할 특별한 데뷔가 될 거예요.”
메릴의 말대로라면 분명 평범한 데뷔 무도회가 아니었다. 일부러 가장 빛나는 자리를 노린 것 같았다. 모두가 사교계 활동에 첫발을 내딛는 그녀를 부러워하도록.
하지만 오드리아는 메릴의 말들이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교계 데뷔라니. 모두의 앞에 그녀의 존재를 내보이고 본격적으로 귀족 사회에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오드리아가 데뷔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그동안은 전쟁으로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무기한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구나. 아빠랑 오빠가 돌아왔으니까.’
그들이 돌아왔으니 오드리아의 데뷔는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게다가 메릴의 말대로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는 시기적으로 적절했다.
그건 좋았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몇 년이나 고생한 공을 기념하기 위한 연회였다. 두 사람이 빛나는 자리에 자신도 함께 참석해 새로운 첫발을 내딛는 것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제국의 그 어떤 영애들보다 화려하고 잊지 못할 신고식이 될 거예요.”
사실 메릴은 이 순간만을 고대하고 또 기다려 왔다. 공작가에서 오랜 시간을 일한 메릴은 트루디 공작 부인이 돌아가신 후에 제대로 솜씨를 부릴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니 이번 무도회야말로 그동안의 한을 씻어 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메릴은 내심 세상에서 가장 눈부시게 오드리아를 꾸미겠다고 비장한 각오를 했다.
의지를 불태우는 메릴과는 달리 오드리아는 마음이 복잡했다. 그녀는 오드리아 트루디로 살기로 했다. 이제는 트루디 대공도 제레미아도 그녀에겐 가족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활동 반경이 공작가를 벗어나는 일이 많지 않기에 그 마음 역시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오드리아 트루디로서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은 또 달랐다. 이제 정말 물러날 곳이 없게 된다. 이제는 오필리아 숍의 마담이었던 그녀를 잊고 뒤돌아 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도 괜찮을까.’
오드리아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계속 미뤄지고 있어서 내심 마음을 놓고 있었다.
정말로 이렇게 오드리아 트루디로서 계속 살아가도 되는 걸까. 오드리아는 망설여졌다.
하지만 그녀의 미래에는 어느새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당연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과 가족으로서 함께하기 위해서는 이 고민 역시 극복할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한 번은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번 황궁 연회가 나을 것이다. 어차피 할 거면 제대로 하자.
오드리아가 이번 황궁 연회에서 데뷔 무도회를 갖는다는 사실에 저택 내의 분위기가 이전과는 다르게 들떴다.
오드리아 역시 데뷔 무도회 준비 때문에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가만히 그녀의 뒤를 따르던 라미엘이 새삼스럽게 모두가 아는 사실을 물었다.
“데뷔 무도회를 가지신다고 들었습니다.”
“응. 그래서 앞으로 바빠질 거 같아.”
오드리아가 바빠지면 라미엘 역시 바빠질 테니 미리 말해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라미엘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뭔가 불만이 있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오드리아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데뷔 무도회가…… 기대되십니까?”
물어보면서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오드리아는 그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의아해하면서도 그의 물음에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응. 조금은 기대되는 거 같아.”
데뷔 무도회에 대해 들은 순간부터 내내 걱정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되기도 했다.
‘데뷔 무도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설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갑작스럽게 결정된 데뷔. 단 한순간을 위해 준비할 것은 넘치도록 많았다.
혹시라도 오드리아가 힘들어할까 봐 메릴은 활짝 웃으며 외쳤다.
“저만 믿으세요!”
메릴이 자신의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하지만 오드리아의 데뷔 무도회를 위해 한 몸 불사를 사람은 메릴 혼자가 아니었다.
“드디어 오드리아 님이 데뷔를 하시다니.”
“벌써 이렇게 크셨다는 게 믿겨지지가 않아.”
그들은 잠시 회상에 잠겼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다. 그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잔뜩이었다.
“오늘부터 목욕물은 특별 관리를 하도록 해. 지금부터 해야 피부가 더 매끄러워지지.”
“연회용 댄스와 예절에 대해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때 참석하는 영애들이 무슨 드레스를 입을지도 미리 알아봐.”
고용인들은 이미 서로가 담당할 역할을 정하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드리아의 데뷔 무도회를 모두가 고대하고 있었다.
이런 일에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사람이 다음 날, 해가 뜨기 무섭게 공작가를 찾아왔다. 오필리아 숍의 마담 페이지다.
“오드리아 님. 이번에 데뷔 무도회를 하신다면서요!”
어느새 소식을 접한 페이지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목소리가 높아진 그녀의 말이 빨라졌다.
“저만 믿으세요! 제가 오드리아 님을 세상에서 최고로 아름답게 만들어 드릴게요!”
페이지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녀는 오드리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심하게 살피며 온 신경을 집중했다.
오드리아의 데뷔 무도회, 즉 사교계 데뷔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물론, 사소한 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준비 과정에서 벌어진 사소한 충돌의 대부분은 페이지와 메릴의 의견 차이였다. 두 사람은 오드리아의 데뷔 무도회 준비의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적극적인 나머지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머리를 올리는 게 좋아요.”
“머릿결이 찰랑이는 게 얼마나 매력적인데 머리를 묶다니요.”
지극히 별것 아닌 것들이 주를 이뤘다. 특히, 두 사람의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바로 연회 때 오드리아가 입을 드레스를 정하는 순간이었다.
“저는 오필리아 숍의 마담이에요. 제 안목을 믿으세요!”
“저는 오드리아 님이 말도 못하는 시절부터 함께였어요. 저보다 오드리아 님에 대해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나요!”
페이지의 말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제국의 최신 유행을 이끌고 있는 곳이 오필리아 숍이었다. 연회가 있을 때마다 수도에 있는 대부분의 영애들이 오필리아 숍을 찾았다. 그곳의 주인인 페이지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메릴 역시 물러나지 않고 맞섰다. 그녀의 말도 맞는 말이었다. 오드리아가 공작가의 영애가 된 순간부터 그녀를 곁에서 지킨 사람이 메릴이었다. 그녀의 취향부터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잘 알았다.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한 치의 물러남이 없이 팽팽하다.
“오드리아 님. 어느 쪽이 마음에 드세요?”
두 사람이 오드리아에게 의견을 구했다. 이것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언제나 선택받지 못한 쪽에 짙은 그늘이 생기고는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오드리아의 대답을 기다리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드리아가 말끝을 늘리며 메릴과 페이지의 눈치를 봤다. 어느 한쪽의 편을 들자니 다른 사람이 마음에 쓰였다. 두 사람이 서로 잘 맞으면 좋을 텐데.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하나부터 열까지 말다툼을 벌였다. 그녀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두 사람인데.
“푸는 게 낫지 않을까.”
이번에는 메릴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얼굴이 상반되게 변했다.
두 사람의 싸움은 질리지 않고 데뷔 무도회 준비 기간 내내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두 사람의 밑에서 지시를 따라야 하는 고용인들이 죽어 나갈 뿐이었다.
“오드리아 님. 어떤 게 더 마음에 드세요?”
“이게 더 낫죠?”
두 사람의 선택을 바라는 부담스러운 눈빛은 준비하는 내내 몇 번이고 반복됐다. 그럴 때마다 오드리아는 난감해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그렇다고 해서 오드리아의 준비에 차질이 생긴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오드리아의 완벽한 데뷔 무도회이었고 서로 팽팽하게 대립하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목적을 잊지 않았다.
언제나 그들의 피 말리는 신경전이 끝난 후에는 가장 좋은 선택이 남았다.
드레스의 종류는 물론이고 색상을 고르고 거기에 어울리는 주얼리와 슈즈를 골랐다. 애매하게 고른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오드리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 상징적인 것들로 적절하게 조합했다.
“어떠세요? 마음에 드세요?”
“혹시 걸리시는 부분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수정하도록 할게요.”
두 사람은 자신들의 작품을 오드리아가 어떻게 생각할지 긴장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오드리아는 그녀들이 내민 계획이 담긴 스케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드리아의 대답이 나오지 않을수록 목이 바짝 마르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때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굉장히, 마음에 들어.”
사르르 눈이 접히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의 한마디에 메릴과 페이지는 안도와 충만감에 환하게 입을 벌렸다. 서로의 손을 꽉 맞잡았다가 화들짝 놀라며 등을 돌렸다.
빈말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만들어 낸 결과물은 오드리아의 눈에 어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없었다. 모든 요소에 오드리아만을 생각해서 고르고 고른 것이 느껴졌다.
두 사람이 같은 목표를 가지고 치열하게 고민하며 만든 완성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 과정이 결코 평탄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 * *
연회까지 남은 날짜는 고작 며칠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며칠이라는 시간이 몇 달이라고 느껴질 만큼 오드리아의 데뷔 무도회 준비는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오드리아는 식사량까지 제한했다. 가장 아름다운 핏을 만들기 위한 치열한 노력이었다.
최대한 탄수화물을 줄이고 배가 고파서 참을 수 없을 때는 식욕을 억제하는 차를 마셨다. 앞으로 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일을 반복해야 하나 싶어서 끔찍했다.
하지만 페이지와 메릴의 말에 의하면 데뷔 무도회는 특별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신경 쓰는 것이라고 했다.
그 외의 연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해 줘서 오드리아는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오드리아가 저녁 식사에 며칠째 참석하지 않자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걱정되어 찾아온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방에서 식사하고 있는 오드리아를 보고 경악했다. 정확히는 오드리아가 먹고 있는 식사를 보고 기겁을 한 것이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풀떼기 몇 개와 닭 가슴살 두 조각이 전부였다. 사람이 저것만 먹고 살 수가 있다니. 두 사람의 눈에 분노가 들끓었다.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오드리아를 학대하다니!”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분노로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감히 오드리아에게 가한 만행을 용서할 수 없었다.
“학대라뇨?”
분노로 일렁이는 두 사람에게 돌멩이를 던진 것은 오드리아였다. 동그랗게 뜬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가 학대를 당했어요?”
공작가에서 감히 누가 그녀를 학대할 수 있을까. 오드리아가 그런 기억이 없다며 되묻자, 순간 김이 쉬이익- 빠진 것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였다.
“지금 이게 식사냐, 새 모이인 것이냐. 어떻게 사람에게 이것밖에 안 먹여?!”
“이건 원래 연회 전에 많이 하는 다이어트…….”
“얘가 지금 다이어트 할 필요가 어디 있다고! 열심히 먹어도 모자를 판에!”
메릴과 페이지가 처음으로 한마음 한뜻으로 준비한 식단이지만 이번에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반대에 부딪혔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하게 물러날 페이지와 메릴이 아니었다. 평소라면 트루디 대공의 한마디에 벌벌 떨면서 아무 말도 못했겠지만 지금 그녀들 앞에 기다리는 것은 오드리아의 데뷔 무도회라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저희 역시 오드리아 님을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굶기거나 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오드리아 님은 대공 각하와 제레미아 님과는 식사량이 다릅니다.”
“뭐!”
“오히려 대공 각하와 제레미아 님만큼 드시게 하는 것이 학대입니다.”
무서운 기세를 하고 있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앞에서 메릴은 팔을 잘게 떨면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철저하게 식단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영양분은 물론이고 몸이 약해지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
“이번만큼은 저희도 물러날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저희에게 오드리아 님의 데뷔 무도회를 맡기셨으니 전적으로 믿어 주십시오.”
메릴과 페이지의 단호한 기세에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말에 반기를 드는 경우도 처음인데 그 기세가 대단해서 함부로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결국, 메릴의 말대로 ‘이번만큼은’ 트루디 대공의 입김 역시 통하지 않았다. 아무리 무서워도 할 말은 해야 했고 거부할 것은 거부해야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오드리아가 입은 것이라면 무조건 예쁘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애초에 안목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데뷔 무도회를 위해서라는 페이지와 메릴, 두 사람의 말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