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8/48)

chapter 10. 전쟁

오드리아는 어느새 열세 살이 되었다. 키도 조금이지만 컸다. 하지만 정말 조금에 불과했다. 여전히 그녀는 또래에 비해 작은 편이었다.

“혹시 음식을 제대로 못 먹은 건가?”

“편식한 것이냐.”

제레미아와 트루디 대공이 오드리아의 키를 보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정말 그냥 좀 작은 건데…….”

아무리 잘 먹고 잘 자도 키는 얼마든지 작을 수 있다는 걸 두 사람만 모르는 것 같았다.

“좀 더 많이 먹자.”

“키 크는 데 효과가 좋은 것들 위주로 먹다 보면 언젠가 크겠지.”

두 사람은 오드리아의 키가 자신들처럼 커져야만 만족할 것 같았다.

“앞으로 리아의 식사를 신경 쓰도록 해라.”

“그래, 고기 위주로 많이 먹어.”

두 사람은 진심으로 걱정하며 오드리아의 키가 커질 수만 있으면 무엇이든 먹일 것만 같았다.

오드리아의 크지 않는 키와는 달리 일취월장하는 것이 있었다. 오드리아는 제레미아의 학문 스승으로부터 교육받는 모든 분야에서 탁월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학업 속도는 제레미아 님보다 빠르십니다.”

오드리아의 교육을 전담하고 있는 학자가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그냥 좋게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 저자가 얼마나 꼬장꼬장한데.”

“제레미아 님. 제가 말 한마디를 할 때도 세 번 이상은 생각하셔야 한다고-.”

“이것 봐.”

제레미아는 훈계하는 스승을 향해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 잘 지도해 주신 스승님 덕분이에요.”

오드리아가 웃으며 말하자 그녀의 스승은 인자한 미소를 지었고 제레미아는 ‘아냐. 우리 리아가 똑똑해서 잘한 거야.’라며 스승을 도발했다.

한편, 지난 3년 동안 성장한 것은 오드리아뿐만이 아니었다.

라미엘은 그동안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혹독한 훈련을 전부 버텨 내면서 엄청난 속도로 실력을 키워 나갔다.

이제는 어떤 기사와 대결을 펼쳐도 지지 않았다. 오히려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검을 맞대는 순간부터 힘의 차이가 느껴졌고 탄탄한 기본기 덕분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상대의 급소를 단숨에 노리는 빠른 판단력과 속도까지 갖췄다.

그 결과, 제레미아마저도 깜짝 놀랄 만큼 라미엘은 급성장했다.

“처음부터 재능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눈앞에서 목격한 라미엘의 실력은 재능 정도가 아니었다. 어쩌면 제레미아에 필적할 만한 천재였다.

천부적인 재능과 치열한 노력이 합해졌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러다 괴물이 나오겠는데요?”

“괴물은 무슨. 그냥 좀 잘하는 거지.”

아이작의 말에 제레미아는 과장이 심하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아이작은 그런 제레미아를 오히려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진짜 괴물의 눈에는 자기 말고는 다 평범하게 보이는 건건가?’

아이작은 생각했다.

* * *

오드리아는 후원에서 페이지와 한창 얘기 중이었다. ‘그날’ 이후로 오드리아는 오필리아 숍을 방문하지 않았다. 볼일이 있을 때는 페이지가 공작가를 찾아오곤 했다.

“아가씨를 뵙기를 청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나 보시겠습니까?”

“응……?”

아이작의 말에 그의 주변을 살폈지만 아이작이 말하는 사람은 그의 덩치에 딱 가려져 누구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구지?’

오드리아가 아이작의 등 뒤에 있는 사람을 보려고 고개를 살짝 틀었을 때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을 두리번거리다 목소리의 주인을 본 오드리아의 눈이 커지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라미엘!”

라미엘이 오드리아의 앞에 멈춰 섰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제레미아 님께서 호위로 복귀해도 좋다고 허락해 주셨습니다.”

지난 3년간 훈련만 거듭한 끝에 드디어 그 실력을 인정받고 다시 오드리아의 호위로 배정받은 것이다.

“정말……?”

“네.”

라미엘이 자신감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동안 라미엘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오드리아보다 조금 작았던 라미엘은 어느새 훌쩍 자라서 오드리아가 고개를 들고 봐야 할 정도였다. 체격 역시 몰라보게 좋아졌다.

분명 오드리아가 아는 라미엘이지만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낯선 느낌이 들었다.

“잘됐다.”

그만큼 라미엘이 성장한 것 같아 오드리아가 활짝 웃으며 반겼다.

“이제부터 아가씨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라미엘이 결연하게 다짐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오드리아는 당황하지 않고 라미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기뻤다.

라미엘이 다시 오드리아의 호위가 되었다. 그녀의 뒤에는 항상 라미엘이 따라다녔다.

그런데 이상했다. 뭐가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딱히 구체적으로 콕 짚을 수는 없지만 돌아온 라미엘은 뭔가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분명 키도 크고 실력도 늘어나면서 자세라든지 분위기라는 것이 변하긴 했지만 오드리아가 신경 쓰는 것은 그런 부분이 아니었다.

“……왜 그래?”

결국 오드리아는 걸음을 멈추고 라미엘을 돌아보며 물었다. 라미엘은 어느새 오드리아보다 한 뼘 더 커져있었다. 오드리아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라미엘은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아냐.”

그냥 넘어가자. 할 말은 많지만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오드리아는 결국 말을 삼켰다. 괜한 기분 탓이겠지. 그렇게 합리화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라미엘의 변화가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런데 라미엘의 변화를 느낀 것은 오드리아 혼자가 아니었다. 공작가의 고용인이라면 모두가 똑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주인만 보면 쫓아가는 똥강아지네.’

‘충견 등장이군.’

라미엘은 어느새 오드리아의 말 잘 듣는 똥강아지가 되어 있었다. 라미엘은 누가 봐도 오드리아를 졸졸졸 쫓아다녔다.

오드리아의 곁에는 언제나 라미엘이 있었고, 그 수준은 마치 스토커처럼 한시도 떨어질 줄 몰랐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것을 라미엘 혼자만 몰랐다. 그날 이후, 라미엘은 결심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겠다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 * *

트루디 공작가는 오드리아를 둘러싸고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신경전을 벌이지 않는 이상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려는 건지 트루디 대공뿐만 아니라 제레미아까지 얼굴도 보기 힘들 만큼 정신없이 바빠졌다. 공작가 역시 지난 며칠 동안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걱정되어 물어봐도 아무 일도 아니라고 걱정하지 말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별일 아닙니다. 대공 각하께서도 제레미아 님께서도 곧 돌아오실 테니 심려치 마세요.”

“정말 별일 아니야……?”

“그럼요.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오드리아의 불안한 물음에 집사장을 비롯한 모든 고용인들이 한결같이 대답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전쟁이 터졌습니다!”

결국, 오드리아의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 그동안 긴박하게 흐르는 듯한 분위기는 전쟁 때문이었다.

‘그럼…… 아빠랑 오빠는?’

두 사람이 전쟁터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자마자 덜컥 겁이 났다.

전쟁이 결국 일어나고야 말았다는 소식을 접한 그날, 며칠 동안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던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오늘은 이른 저녁에 귀가해 오드리아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오드리아는 저녁을 먹는 내내 말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도 물어보고 싶은 말도 너무 많은데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리아, 괜찮아……?”

그녀의 눈치를 보던 제레미아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제야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던 오드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리…… 리아……?”

“지금…… 우는 건가……?”

오드리아의 커다란 눈에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질 듯했다.

그 모습을 본 두 사람은 당혹감에 제레미아는 말을 더듬으며 손을 떨었고 트루디 대공은 벌떡 일어났다.

“전쟁이…… 났다면서요……! 두 분도 거기 가야 하는 거죠?”

오드리아는 알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났고, 그렇다면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역시 출정하리라는 것을. 그것이 트루디 가문의 임무니까.

그녀가 떼를 쓴다고 해서 안 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불안함을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전쟁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여 버리니까. 전쟁터로 떠난 가족이 시체로도 돌아오지 못했다는 건 민가에서는 흔한 이야기였다.

그동안 전쟁에서 수많은 공을 세우고 대단한 업적을 쌓은 트루디 대공이라고 하더라도 한순간에 죽을 수도 있는 게 전쟁이었다.

그런 곳에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가야 한다니, 불안해서 참을 수 없었다.

“그동안 잘 지낼 수 있지?”

트루디 대공이 오드리아를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 그녀를 달래려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그건 결국 갈 수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전쟁터로 떠난다. 그것은 이미 결정된 사항이었다.

오드리아는 결국 고개를 떨궜다. 방금 전까지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눈물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전쟁이라니. 어째서 지금 전쟁이 터진 걸까.

전쟁터로 가면 언제 돌아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멀리 떨어진 채로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을까 봐 불안해하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을 것이다.

“리아. 네가 그렇게 싫다면…… 가지 말까?”

트루디 대공이 오드리아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 어디에도 빈말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트루디 대공이 빠진 전쟁이라니, 그 파장은 전쟁의 결과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아뇨. 저 기다릴게요.”

오드리아가 애써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무사하셔야 해요. 절대 다치시면 안 돼요.”

“그래. 그러마.”

트루디 대공이 오드리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에 질세라 제레미아도 그 위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금방 돌아올게.”

제레미아가 오드리아를 달래기 위해 말했다.

“네. 약속이에요.”

오드리아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배시시 웃었다.

공작가의 고용인들은 전쟁 준비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특히, 공작가의 고용인들은 이런 분위기가 낯설었다. 제국은 십여 년 전에 확대한 국경으로 인해서 국경선 인근에서 잦은 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다 지엽적인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도 흔했다.

그렇기에 전쟁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고,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출정한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 역시 없었다. 언제나 하던 대로 준비를 할 뿐이었다.

오드리아는 전쟁터로 떠날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 부족한 것이 없는지 직접 확인하고 다녔다.

그래 봐야 어린아이가 얼마나 꼼꼼히 볼 수 있을까, 그저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직접 보고 싶은 거겠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따뜻한 소재이지만 가벼워야 해. 움직이는 데 방해도 되지 않아야 하고.”

“네.”

“언제까지 가능해?”

“밤을 새서라도 최대한 빨리 가져오겠습니다.”

“부탁해.”

오드리아는 가장 먼저 페이지에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전쟁터에서 입을 옷을 주문했다.

소재부터 용도까지 빠짐없이 챙기는 모습이 고용인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꼼꼼했다. 특히, 여러 번 반복되었기에 의례적으로 챙기는 것들까지 오드리아는 더 좋은 것을 찾아서 바꾸기까지 했다.

그럴수록 고용인들이 언제나 해 오던 대로 준비하는 것들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드리아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끝내 말했다.

“그래도 이제 가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오드리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고용인들은 왠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게 아닌데. 고용인들은 오드리아에게 죄송하면서 동시에 억울했다.

이제까지 대공과 제레미아는 집사장을 비롯한 공작가의 고용인들이 출정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별짓을 다 한다느니, 유난이라느니, 온갖 무시를 했었다.

때문에 나중에는 고용인들도 필수적인 준비 외에는 하지 않게 되었다.

고용인들은 억울했다. 이번만큼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제대로 해명을 해 줘야 한다! 고용인들은 모두 같은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고용인들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드리아를 황홀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아니잖아!’

고용인들은 외쳤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하지만 오드리아는 걱정되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덩달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마음은 복잡해져만 갔다.

오드리아가 걱정하는 것은 마음 아프지만 반대로, 자신들을 걱정하느라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괜히 약한 척, 겁먹은 척하기까지 했다.

그러면 오드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울먹이며 두 사람을 위해서 무엇이든 해 줄 기세였다. 덕분에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전쟁터로 출정하기 전까지 꿈만 같은 시간을 보냈다.

오드리아가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하는 것과는 별개로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역시 혼자 남게 될 오드리아가 걱정되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조짐을 보이던 전쟁이었다. 결국 전쟁까지 이르게 된 것을 보면 쉽게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소국이 제국에게 전쟁을 걸어온다는 것은 나라의 명운을 거는 것이다. 그들은 악착같이 버틸 것이다.

언제까지인지 모를 시간 동안 오드리아 혼자 공작가에 남겨 놓는 것은 아무래도 불안했다. 하지만 누굴 곁에 두면 좋을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라미엘이 있지 않습니까.”

제레미아가 인상을 구긴 채 말했다. 못마땅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실력은 이미 공작가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듭니다. 하지만 아직 정식 기사가 아니니 전쟁에 나갈 필요도 없죠.”

“믿을 수 있는 놈인가.”

트루디 대공이 물었다. 그러자 제레미아의 얼굴이 좀 전보다 험악해졌다. 굉장히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 추천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다른 건 몰라도 리아에 한해서는 믿을 만합니다.”

제레미아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하면서도 라미엘을 인정했다.

라미엘은 지극한 오드리아바라기였다. 언제나 그녀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고 누가 그녀의 험담이라도 하는 날에는 싸움이 일어났다. 라미엘은 오드리아의 일에서만큼은 양보라는 것을 몰랐다.

결국, 트루디 대공이 라미엘을 불렀다. 제레미아도 옆에 있었지만 그는 꾹 다문 입과 강하게 째려보는 눈빛만으로 제 의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라미엘은 트루디 대공의 부름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트루디 대공 역시 라미엘을 한참이나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 라미엘에 대한 파악을 끝낸 트루디 대공이 입을 열었다.

“너는 공작가에 남아라.”

트루디 대공이 라미엘에게 지시했다.

“리아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말고 잘 지키도록.”

“……네!”

순간, 트루디 대공의 말을 제대로 입력하지 못한 라미엘은 뒤늦게 외쳤다. 진심과 의지가 강하게 묻어나오는 대답이었다.

그럴수록 제레미아는 라미엘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당장 오드리아의 곁에 있을 사람으로 가장 적합한 것은 맞지만 어쩐지 저놈이 오드리아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이 거슬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놈까지 오드리아의 곁에서 치워 버리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공작가에서 갑자기 많은 사람이 빠져나가게 될 것이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비롯하여 상당수의 기사들도 출정한다. 그럼 오드리아가 외로워할 것이 눈에 보였다.

전쟁은 점점 급박하게 흘러갔고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역시 최대한 빨리 떠날 준비를 했다.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날이 결국은 오고야 말았다. 오늘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국경 외곽 지대로 출정하는 날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난 오드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 공을 들여서 배웅할 준비를 했다. 메릴은 오늘만큼은 마음껏 실력 발휘를 해 오드리아를 꾸몄다.

본관의 현관으로 나온 오드리아는 도열한 기사단과 선두에 선 대공과 제레미아를 보았다.

막상 갑옷까지 입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보니 두 사람이 전쟁터로 간다는 것이 실감됐다.

오드리아는 울컥 눈물을 쏟았다. 이젠 정말로 가족이었다. 가족이 죽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각오했던 것 이상으로 걱정되고 불안했다.

“흡, 다치면 안 돼요!”

오드리아는 결국 눈물을 쏟았다. 밤새 제대로 잠도 못 잤다.

“리아. 너도 잘 지내야 한다.”

“리아. 씩씩하게 지내야 해.”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오드리아를 달래기 위해 무릎까지 꿇고 눈을 맞췄다. 목소리는 세상 무엇보다도 다정했다.

그런 세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공작가의 고용인들은 기분이 묘했다. 다정한 주인들을 보니 감동스럽기는 한데, 대체 누가 전쟁터로 떠나는 것인지 헷갈렸다. 모습만 보면 오드리아가 먼 곳으로 떠나는 사람 같았다.

‘유난은 누가 떠는데.’

고용인들은 마음속으로 몰래 생각했다. 세 사람의 유난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동안 고용인들은 한결같은 표정을 유지했다.

“아빠, 다녀오세요!”

트루디 대공의 눈가가 붉어졌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겨우 떠났다. 오드리아는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이제 정말로 두 사람이 떠났다. 공작가에는 오드리아만이 남은 것이다.

하지만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오드리아가 돌아서자마자 집사장이 다가왔다.

“이제부터 공작가의 주인은 아가씨입니다.”

그의 말대로 오드리아는 공작가의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직접 처리해야 한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돌아올 때까지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전쟁에 관한 소식은 계속해서 들렸다. 하지만 전쟁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공작가에 홀로 남은 오드리아는 집사장과 보좌관의 도움을 받으며 공작가의 일을 하나씩 배워 나갔다.

“이건 고용인들의 현황입니다.”

“영지에 관한 보고서입니다.”

“트루디 공작가로 오는 초대장입니다.”

오드리아가 해야 할 일은 생각보다 많았다. 평범한 열세 살이었다면 절대 할 수 없을 양이었다.

‘이걸 내가 다 할 수 있을까.’

불현듯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나름 오필리아 숍을 운영했던 경험이 있어서 자신 있었는데, 당연한 일이었지만 공작가는 오필리아 숍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관리할 것이 많았다.

“나 열심히 할게.”

하지만 오드리아는 다시 한번 각오를 세웠다.

“그러니까 많이 도와줘.”

오드리아가 집사장과 보좌관들을 향해 방긋 웃었다.

오드리아가 눈을 사르르 접으며 웃자 눈이 마주치면 딱딱한 돌이 된다는 전설처럼 사람들이 모두 딱딱하게 굳었다. 곧이어 모두의 얼굴이 붉어지고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요!”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집사장과 보좌관들을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답했다. 오드리아는 안심이 된다는 듯 다시 한번 입꼬리를 활짝 올렸다.

‘오드리아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이 한 몸 부서져라 힘내겠습니다!’

공작가는 오드리아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아직 열세 살에 불과한 아이를 위해 고용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보좌했다.

오드리아 역시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전에는 전담교사에게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집사장과 보좌관들의 도움을 받으며 가문의 중요한 결정 사항들을 해결해 나갔다.

오드리아는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가지기 힘든 판단력과 그것을 강행하는 결정력을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공작가는 기존의 사업을 유지하되 변동사항이 있는 것에 한해서 대응하기로 했다.

또한, 공작가와 영지를 다스리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 부분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아는 집사장과 영지의 관리인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고용인들을 믿어 주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고용인들이 또다시 오드리아에게 매료되기 충분한 일이었다.

공작가의 고용인들 중에는 베테랑이 많았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오드리아는 공작가의 일을 해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떠나 있는 상태로 시간이 흐르고 오드리아가 혼자 있는 동안 라미엘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문제는 의욕이 너무 넘친다는 거지만.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라미엘은 단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지나친 과잉보호에 라미엘을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그를 보고 오드리아의 충성스러운 개라고 비아냥거릴 정도였다.

“저러다 발도 핥을 기세네.”

그때, 라미엘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움찔, 정작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들은 겁을 먹고 뒷걸음쳤다.

“오드리아 님. 신발 끈이 풀렸습니다.”

“어? 정말이네?”

오드리아가 고개를 숙이려고 하는데 라미엘이 좀 더 빨랐다.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마치 발등에 키스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라미엘……?”

오드리아 역시 라미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살짝 놀랐다.

“다 묶었습니다.”

어느새 오드리아의 구두끈이 리본 모양으로 예쁘게 잡혔다.

“그럼 가시죠.”

라미엘이 오드리아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지만 싱겁게 웃으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

오드리아가 앞서고 라미엘이 살짝 뒤쳐져서 가는데 갑자기 그가 고개를 돌려 방금 전까지 그를 비웃던 자들을 바라보았다.

피식, 라미엘은 그들에게 보란 듯이 미소를 지었다. 까짓거 발을 핥는 게 대수냐는 듯이.

라미엘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오로지 오드리아의 곁을 지킬 뿐.

이제는 모두의 머릿속에 오드리아의 충직한 호위 라미엘에 대한 인식이 박혀 있었다.

여느 때처럼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곳에는 보좌관들 말고 다른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집사장이었다.

“오드리아 님.”

집사장이 그녀를 불렀다. 오드리아는 그가 왜 자신을 찾았는지 알았다. 환하게 웃으며 집사장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고마워!”

전쟁터에 있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보낸 편지였다. 국경에 있고 전쟁 중이기 때문에 자주 보내지는 못하지만 편지가 한번 오면 많은 양의 편지가 도착하곤 했다.

그때그때 보내지 못하고 쓰기만 한 채 가지고 있던 편지들을 한 번에 부친 것이다.

고용인들이 그녀를 극진하게 모셨지만 그것만이었다면 오드리아는 분명 외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편지가 올 때면 오드리아는 여전히 함께 있는 것처럼 행복했다. 덕분에 외롭지 않았다.

* * *

전쟁은 끝날 듯 끝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전쟁은 지루한 양상을 보였다. 그사이에 오드리아의 시간 역시 흘렀다.

“아가씨가 어느새 열여섯이 되시다니.”

메릴이 추억에 잠긴 채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오드리아는 올해로 열여섯이 되었다.

그토록 크지 않던 키도 3년 사이에 깜짝 놀랄 정도로 자랐다. 분명 두 사람이 보면 깜짝 놀랄 것이다.

게다가 오드리아는 어느새 어른의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봉긋하게 나온 가슴과 여전히 한 줌인 허리, 그리고 전쟁이 터지고 난 후부터 매년 깜짝 놀랄 만큼 큰 키였다.

오드리아는 더 이상 작지 않았다. 여전히 가냘픈 몸매를 지니고 있었지만 어릴 때와는 다른 성숙함이 묻어났다. 더 이상 그녀에게 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작고 어린 모습이 아직까지도 생생한데.”

메릴은 요즘 따라 이런 말을 하며 남몰래 과거를 추억하는 날이 많아졌다. 오드리아가 훌쩍 자란 모습을 볼 때마다 감격과 동시에 쓸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확실히 오드리아는 삼 년 사이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시간은 금방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열여섯은 제국의 레이디들이 사교계에 데뷔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개인차가 있지만 보통 사교계 데뷔를 기점으로 결혼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드리아에게도 이 모든 일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지난 삼 년 동안 사교계와 어떤 교류도 하지 않았다. 귀족가의 여성이라면 데뷔 무도회를 통해서 사교계에 데뷔하는 것이 관례였다.

데뷔 무도회는 보호자가 사교계에 첫 발걸음을 내딛는 레이디를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성공적인 데뷔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의식이다.

만약 미래를 약속한 약혼자가 있다면 그와 데뷔탕트를 함께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오드리아에게 약혼자는 없었다.

만약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면 오드리아는 데뷔탕트를 치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메릴은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전쟁이 빨리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삼 년이나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혹스러움은 더 컸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여전히 볼 수 없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위해 매일같이 편지를 썼다.

그 내용은 두 사람이 걱정하지 않도록 하루 일과 혹은 인상적인 이야기 등을 썼다. 모든 편지 내용이 씩씩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한 편지를 보낼 생각이었다. 오드리아가 메릴에게 말했다.

“베르덴을 불러 줘.”

베르덴은 공작가의 전속 화가였다.

“아가씨. 부르셨습니까.”

베르덴이 왔다. 오드리아는 머리를 다시 한번 정리한 뒤에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

오드리아는 초상화를 편지와 함께 전쟁터로 보낼 생각이었다.

공작가를 책임지다 보니 오드리아도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래서 자신이 이렇게 성장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한번 자신의 변화를 느끼고 나니 이 모습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가장 보고 싶어 할 텐데.’

그래서 베르덴을 불러 초상화를 그린 것이다.

편지를 마무리하려는데 오드리아는 어쩐지 오늘따라 펜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두 사람이 보고 싶었다. 자신은 이렇게 변했는데 두 사람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어떤 모습일까. 그립고 보고 싶었다.

결국 오드리아는 편지에 두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가득 적었다.

[오늘따라 너무 보고 싶어요.]

오드리아는 편지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 * *

편지를 보낸 지 한 달이 지났다. 오드리아는 오전 교육이 끝나자마자 집무실로 향하기 전에 집사장을 찾아갔다.

“나한테 온 거 없어?”

“네, 별다른 건 없는데…….”

아직까지도 답신이 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오드리아는 의기소침했다. 이번에는 특별히 초상화까지 보냈는데, 보고 싶다는 말도 있었는데.

‘안 돼. 이러면 안 돼.’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있는 곳은 전쟁터다. 고작 이런 것에 일일이 섭섭해하면 안 된다.

오드리아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어깨가 자꾸만 처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고 또 한 달이 지났다. 여전히 편지는 오지 않았다. 이제 오드리아는 섭섭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크게 다치기라도 한 건 아닌지 안절부절못했다.

두 사람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을 텐데, 오드리아는 아직 사교계에 데뷔하지도 별다른 인맥이 있지도 않았다.

그나마 보좌관들이 정보를 얻어 오기는 하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오드리아는 불안을 떨쳐 내기 위해서라도 매일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부디 이번엔 답장이 오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두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려고 할 때였다.

“아가씨!”

문 너머에서 오드리아를 부르는 급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 있는 오드리아의 귀에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지 싶어 문을 열어서 밖을 확인하는데 공작가의 고용인들이 평소와는 다르게 흥분해서 달려왔다.

“무슨 일인데 그래?”

오드리아가 묻자 고용인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외쳤다. 마치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전쟁이 끝났습니다!”

“제국이 승리했습니다!”

“공작님과 제레미아 님께서 돌아오신답니다!”

고용인들이 기쁜 마음에 정신없이 소식을 쏟아 내었다.

“…….”

오드리아는 멍했다. 갑자기 터져 나온 말을 소화할 수 없었다. 고용인들이 하는 말이 뜻하는 바를 오드리아는 한참이 지나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오드리아의 눈이 가장 먼저 커지고 입이 벌어지고 저절로 손이 입을 가렸다. 마지막은 비명 같은 환호성이었다.

“정말?!”

“네!”

편지를 보내고 기다린 지 두 달, 그사이에 길고 길었던 전쟁이 끝났다. 곧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돌아온다. 승전 소식을 들고.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활약으로 제국은 또 한 번 영토를 확장했다. 오드리아는 또다시 영웅이 되어 돌아오는 두 사람을 맞이할 날을 고대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돌아왔다. 오늘 두 사람이 도착한다는 소식을 들은 오드리아는 낮이 되어야 도착한다며 말리는 메릴과 집사장을 비롯한 고용인들을 뿌리치고 이른 아침부터 대문 앞에서 두 사람을 기다렸다.

메릴은 어차피 황궁에 들렸다 와야 해서 더 늦어질 수도 있다며 햇빛을 맞으며 오래 서 있으면 몸에 안 좋으니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들어가지 않고 기다렸다. 자신이 아는 아빠와 오빠라면 분명 황궁에 들리지 않고 한달음에 이곳으로 달려올 것이다. 저절로 잡고 있는 치맛자락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아빠! 오빠!”

“어……? 아직 낮도 안 됐는데?”

멀리서 점처럼 보이는 무리가 공작가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드리아의 외침대로 그 점들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비롯한 공작가의 기사들이었다.

제도 도착 예정은 한낮. 황궁에 들렀다 오면 빨라도 이른 저녁이었다. 하지만 오드리아의 고집에 부응하듯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가장 먼저 공작저에 들렀다.

“보고 싶었어요!”

“리아.”

“리아! 나왔어!”

오드리아가 달려가 안겼다. 순간, 누구에게 안겨야 하나 괜히 달렸나 잠시 갈등하기는 했지만 걱정 따윈 필요 없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동시에 오드리아를 안아 들었기 때문이다.

“다친 곳은 없어요?”

누가 봐도 멀쩡했다. 오히려 너무 좋아 보여서 전쟁터에서 돌아온 게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전쟁터가 체질인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일 것이라고 공작가의 모든 고용인이 한마음으로 생각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돌아오자마자 충격을 받았다. 오드리아는 초상화에서 본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리고 어른이 되는 모습을 곁에서 보지 못한 것이 분하고 억울해서 다시 전쟁터로 달려 나갈 뻔했다. 그 시간을 빼앗은 놈들을 응징하기 위해.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오드리아는 삼 년이라는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언제나 그랬고 어제도 그랬었던 것처럼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그동안 나누지 못한 대화들을 하느라 아침 식사인 데도 불구하고 식사가 끝났을 때는 이미 낮이 되어 있었다.

트루디 대공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황궁으로 옮겼다. 원래는 황궁 먼저 들렀어야 했지만 오드리아가 눈에 밟혀서 공작가로 먼저 왔던 것이다.

황제는 트루디 대공이 공작가에 먼저 들렸다 온 것을 알았지만 그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제국의 영토를 확장시키고 끊임없이 공격해 오는 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취한 제국의 영웅이었다.

그가 반역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황제도 트루디 대공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수고했네.”

황제가 트루디 대공의 공을 치하했다. 그 안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었지만 트루디 대공은 흘려들었다.

전쟁에 나가서 이긴다. 그것은 트루디 대공에게 있어서는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게.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필요 없습니다.”

괜찮다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소용없으니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다. 황제는 내심 놀랐다. 트루디 대공은 원래부터 그다지 공손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불퉁하지도 않았다.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면 그 무엇도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은 단호하게 다시 한번 거절했다.

“시간을 끌라는 명령을 지키느라 제가 잃은 것이 무언지 안다면.”

트루디 대공은 불경하다 싶을 정도로 황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기서 그가 황제에게 다가간다면 황제를 호위하고 있는 사람들이 검을 빼들어 주위를 둘러싸야 하나 고민이 들 정도로 매서운 눈빛이었다.

사실, 이번 전쟁이 길어진 것은 끈질긴 적국 때문이기도 했지만 제국 내부의 사정 역시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트루디 대공은 조금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단번에 전쟁을 끝낼 생각이었다.

제국의 후계자, 즉 지금의 황태자는 황제의 비호와 탄탄한 지지 세력이 있었지만 그 자체는 제국의 차기 황제라고 하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그렇기에 알게 모르게 황태자의 자리를 노리는 세력들이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황제는 황태자의 자리를 노리는 자들에 대한 처리를 이번 전쟁을 통해서 해결했다. 물론, 트루디 대공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지만.

트루디 대공이 언급한 것은 그 일 처리를 하기 위해 질질 끌어야만 했던 시간이었다. 그 때문에 오드리아와 함께 있는 시간을 놓치고 그사이에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어 있었다.

이제 와 시간을 되돌려 오드리아가 자란 모습을 볼 수도 없었다. 트루디 대공은 식사를 하는 내내 오드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놓쳐 버린 시간들이 아까워 미칠 것 같았다.

트루디 대공은 그대로 돌아서려다 멈춰 섰다. 순간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대로 황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 하나 있습니다.”

“……뭔가.”

뭐든 말해라. 황제는 그럼 바로 들어주고 나가라고 하고 싶었다. 트루디 대공이 씨익 한쪽 입술 끝을 올렸다.

“전쟁 보고서는 알아서 올리겠습니다. 그 외에는 찾지도 부르지도 마십시오.”

한마디로 ‘건들지 마’ 이거였다.

“……그러게.”

황제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트루디 대공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황제는 후회했다. 지금 트루디 대공은 황궁에 꼭 필요했다. 그는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은 대단한 전사이기도 했지만 제국에서 가장 유능한 행정가이기도 했다. 전후 처리에 그의 손이 꼭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안 된다고 하면 트루디 대공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라져 버리거나, 아니면 황제의 목이라도 조를 것 같았다.

“그래, 그냥 우리가 좀 고생하면 되지.”

황제는 접견을 기다리고 있는 재상을 비롯한 관리들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 * *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트루디 공작가로 돌아오고 며칠 동안 오드리아와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오드리아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다가 점심을 들고 함께 외출을 하거나 아니면 지난 3년 동안 오드리아의 달라진 점들을 발견하고는 감탄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낸 후에야 꿈 같은 시간을 억지로 끝내고 일상으로 복귀했다.

제레미아는 그사이에도 꾸준히 연무장을 찾아 훈련을 했다. 단 하루도 몸을 쉬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연무장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훈련장에는 라미엘이 혼자 훈련을 하고 있었다. 제레미아는 그 모습을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라미엘은 한참 훈련을 한 후에야 검을 집어넣었다. 제레미아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바로 몸을 돌려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제대로 된 인사를 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라미엘을 본 제레미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너…… 라미엘 맞아?”

“네. 접니다.”

제레미아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전쟁터에 가 있는 동안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에 라미엘은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그래도 그땐 어린 티가 났었는데.’

3년 만에 본 라미엘은 제레미아마저도 긴장할 만큼 건장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어릴 때 모두가 감탄하고 넋이 나간 것처럼 시선을 빼앗기던 예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그대로 남은 것이라고는 흑발과 눈동자 색뿐이었다.

라미엘은 이제 옛날의 꼬마가 아니었다. 게다가 라미엘, 저놈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오드리아가 어른이 되어 가는 모습을 모두 지켜봤다. 자신은 보지 못한 것을!

‘그냥 저놈도 전쟁터에 끌고 갈 걸!’

제레미아는 입술이 찢어지도록 꽉 깨물었다. 라미엘은 제레미아가 왜 갑자기 혼자 분해하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 모습을 본 제레미아의 얼굴이 한순간에 구겨졌다.

오드리아와 트루디 대공, 제레미아가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전쟁에 대한 보고와 꼭 필요한 정리를 해야 할 때를 제외하고는 공작가에서 나가지 않았다.

삼 년 만에 만난 오드리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그것을 방해한다면 황제라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이미 엄포를 놓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업무를 하기 위해 트루디 대공은 집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황궁에서 연회를 연다고 합니다.”

“불참한다고 전해.”

“그러시면 안 됩니다.”

보좌관의 단호한 말에 트루디 대공이 인상을 썼다. 네가 뭔데 나보고 된다 안 된다 말하는 것이냐는 얼굴이었다.

보좌관은 금세 억울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이라고 트루디 대공의 말에 반대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황궁 연회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이번 전쟁에서의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하게 열 것이니 전쟁의 주역인 각하와 제레미아 님께서 꼭 참석하셔야 한다는 당부가 있었습니다.”

트루디 대공이나 제레미아는 연회를 극도로 싫어한다.

공작가에 있는 플로렌스 홀에서 주최하는 연회 역시 공작가의 오래된 전통이자 관례가 아니었다면 절대 열지 않았을 것이다.

승전 축하 연회라는 말에 트루디 대공의 얼굴은 사정없이 구겨졌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이어졌다. 승전을 축하하는 것은 트루디 대공 개인의 기호가 중요한 연회가 아니었다. 황제의 당부가 무서운 것도 아니었다.

전쟁에 가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수많은 병사들을 북돋아 주기 위한 연회였다.

전쟁에서 목숨을 잃고 참석하지 못하는 병사를 기리고 끝까지 살아남아 돌아온 사람들의 영광을 빛내 주기 위한 연회.

전쟁의 총책임자였던 트루디 대공은 그곳에서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참석하도록 하지.”

“그렇게 연락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황궁 연회는 성대하게 치러질 예정이다. 연회 자체는 황궁에서 벌어지지만 그동안 전쟁으로 인해 고생한 제국민들을 치하하기 위해서 거리 곳곳에 축제가 벌어지고 황궁과 주요 귀족들이 갖가지 음식들을 배포한다.

황궁 연회는 남녀노소, 귀족이나 백성이나 모두 기다리는 가장 큰 이벤트였고 연회가 있기 며칠 전부터 사람들은 기대감에 들썩이고 있었다.

* * *

트루디 대공은 마지막 보고서를 검토하고 있었다. 그때 메릴이 찾아왔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트루디 대공을 웬만해서는 찾아오지 않는 그녀였다. 혹시 오드리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트루디 대공이 메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번 황궁 연회에 관한 것입니다.”

트루디 대공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드리아와 관련된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뚱맞게도 황궁 연회였다. 트루디 대공은 긴장이 풀린 듯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메릴을 바라보았다.

“오드리아 님의 데뷔 무도회를 황궁 연회에서 하는 것이 어떨까 논의 드리고 싶었습니다.”

메릴이 긴장했는지 양손을 자꾸 번갈아 잡으며 말했다. 트루디 대공이 오드리아를 예뻐하고 그녀의 앞에서는 한없이 자상해진다는 것을 알지만 메릴에게 트루디 대공은 갑 중의 갑이었다. 여전히 그 앞에만 서면 말 한마디가 조심스럽고 무서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은 메릴의 말에 한 방 먹은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의자에 기댄 등은 어느새 떨어져서 책상 앞으로 당겨져 있었다.

“데뷔 무도회……?”

트루디 대공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 듯이 반응했다. 메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지금도 늦은 감이 있습니다.”

“…….”

메릴의 단호한 대답에 트루디 대공은 할 말이 없었다. 트루디 대공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트루디 대공이 허락했다. 오드리아가 곧 데뷔. 즉, 사교계에 첫 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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