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6/48)

* * *

트루디 대공은 평소에도 바빴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얼굴도 보기 힘들 정도로 바빴다. 제레미아 또한 라미엘을 훈련시키느라 얼굴도 보기 힘들었다.

그러다 보니 오드리아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최근에는 오필리아 숍을 자주 방문했다. 오늘도 아이작과 함께 오필리아 숍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이작.”

“네, 아가씨.”

갑자기 오드리아가 아이작을 돌아봤다.

“구경 가 볼까?”

“어디로요?”

“연무장!”

오드리아는 제레미아와 라미엘의 훈련이 어떤지 궁금했다. 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라미엘이 매일같이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는 건지.

오드리아 역시 제레미아가 라미엘을 일대일 훈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훈련이 어떤지에 대한 소문 역시.

“지금요……?”

어쩐지 아이작이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아이작이 말릴 틈도 없이 연무장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연무장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마침 연무장에서 나오는 제레미아와 마주쳤다. 방금 전에 훈련이 끝난 것이다.

“오빠!”

“어? 리아.”

갑자기 오드리아가 나타나자 제레미아가 잠깐이지만 당황하는 것 같았다. 오드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레미아는 뒤를 힐끔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지금 연무장에 있는 라미엘의 몰골이 처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긴 무슨 일로 왔어?”

“놀러 왔어요. 오빠도 여기 있을 것 같아서요!”

“……!”

제레미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후원에 갈까?”

제레미아가 손을 내밀며 물었다. 오드리아가 제레미아의 손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활짝 웃었다.

“다음에 가요!”

여기까지 온 목적은 제레미아와 라미엘의 훈련 모습을 보려는 것이다. 하지만 훈련은 이미 끝났고 연무장에는 라미엘이 남아 있었다.

훈련 직후의 모습을 보면 대체 어느 정도의 훈련을 받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드리아가 활짝 웃으며 거절하자 제레미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더니 어깨가 축 처졌다. 그 모습이 안쓰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제레미아는 갈 생각이 없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힐끔, 오드리아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상황에서 제레미아가 소심하게 제 눈치를 볼 이유가 뭐지? 오드리아는 바로 이유를 알아차렸다.

제레미아 역시 자신의 훈련에 기사들이 혀를 내두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오드리아가 라미엘의 상태가 걱정되어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지금 연무장에 가서 라미엘의 상태를 눈으로 확인하면 오드리아가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빠.”

오드리아가 제레미아를 불렀다. 제레미아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오드리아를 바라보았다. 오드리아가 화사하게 웃었다.

“힘들죠?”

“어……?”

뜬금없이 던져진 오드리아의 걱정 섞인 물음에 제레미아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저 때문에 바쁜 시간 쪼개 라미엘을 가르쳐 주시잖아요. 정말 감사해요!”

오드리아가 더욱 활짝 웃었다. 입이 귀에 걸릴 만큼 크게 벌리며 활짝. 그 모습을 넋이 나간 것처럼 보던 제레미아의 입술 끝이 점점 올라갔다.

오드리아는 제레미아에게 화를 내거나 책망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드리아가 라미엘을 신경 쓰는 것은 책임감 때문이다.

그러니 라미엘과 제레미아 중에서 무게를 따진다면 당연히 제레미아였다. 그리고 제레미아는 한번 상처받고 삐지면 달래 주기 까다로웠다.

제레미아는 미련 한 톨 남기지 않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오드리아는 제레미아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열심히 팔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며 아이작의 입 역시 벌어졌다. 그도 오드리아에 관해 고용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오드리아가 공작가를 사로잡았다는 말을 흘려 넘겼다.

그래 봐야 단순히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설레발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그 때문에 덩달아 오드리아가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 전 오드리아가 제레미아를 조련하는 모습을 보니 아이작은 새삼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정말로 이 작고 어린 아가씨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알게 모르게 조련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후보에 연무장에 있는 라미엘 역시 곧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드리아와 아이작이 연무장에 들어갔을 때 라미엘은 바닥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라미엘은 두 사람이 온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라미엘의 상체가 부풀었다 줄었다를 반복했다. 숨을 몰아쉬는 것 같았다.

오드리아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라미엘을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오드리아가 햇빛을 가리자 라미엘에게 그늘이 생겼다.

갑자기 햇빛이 느껴지지 않자 라미엘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바로 눈앞에 오드리아의 얼굴이 보였다.

깜짝 놀란 라미엘이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는데 여전히 상체를 숙이고 있던 오드리아와 그대로 머리를 부딪혔다.

“앗!”

“괘,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오드리아가 머리를 잡으며 짧은 신음을 흘렸다. 라미엘이 바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감싸고 있던 머리를 풀고 오드리아가 그런 라미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얼굴만 보면 라미엘의 상태가 더 안 좋아 보였다.

“괜찮아?”

“죄송합니다!”

라미엘은 대답 대신 사과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적대심을 드러내던 모습을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다른 모습이었다. 특히, 라미엘은 오드리아를 철저하다 싶을 만큼 정중하게 모셨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을 구해 주고 호위기사까지 만들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라고 얘기했지만, 오드리아는 그 말에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 라미엘은 단지 목표를 변경하고 날카로운 이빨을 숨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오드리아가 라미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라미엘의 몸은 하루라도 멀쩡한 날이 없었다.

라미엘은 괜찮은 척하려고 했지만 오드리아와 아이작의 눈에는 그의 온몸에 선명한 멍 자국이 보였다.

“오빠가 괴롭혀?”

결국 오드리아는 툭 내뱉었다. 누가 봐도 라미엘의 지금 몰골은 동정심을 불러 일으켰다.

“아닙니다.”

하지만 라미엘은 고개를 돌리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리고 앞장서서 먼저 씩씩하게 걸어갔다. 자신은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아니긴 뭐가 아냐.’

하지만 그럴수록 라미엘이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오드리아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라미엘이 걸어가는 뒷모습이 뒤뚱거렸다.

‘완전 맞는데.’

강하게 부정할수록 오드리아는 제레미아가 라미엘을 괴롭힌다고 확신했다. 오드리아가 걱정스러워하며 그 모습을 바라보자 뒤에 있던 아이작이 옆으로 다가왔다.

“훈련 끝났으면 옷이나 갈아입고 와.”

“네!”

아이작이 라미엘에게 말했다. 라미엘은 오드리아에게 다시 한번 죄송하다며 사과를 한 후에야 환복하러 들어갔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드리아가 아이작을 바라보자 그는 특유의 능글거리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자기 일 아니라고 괜찮다는 거지!

오드리아가 눈을 흘기자 아이작이 억울하다는 듯 웃었다. 그래도 능글거린다. 오드리아가 살짝 소리 내며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모든 기사들이 그렇게 배웁니다. 그는 남들보다 더 빨리 배워야 하니 그만큼 더 힘든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다 사달이라도 나면 어떡해.”

“그게 걱정되면 기사가 될 생각은 하지 말아야죠.”

아이작이 냉정할 만큼 단호하게 말했다. 오드리아에게 하는 말도 아닌데 순간 마음이 상할 정도로. 오드리아가 아이작을 올려다보자 아이작이 그녀를 빤히 보며 말을 이었다.

“그걸 견뎌야 기사가 됩니다.”

“…….”

“이건 아무리 대단한 가문의 영식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라미엘도 그걸 알기에 어떤 투정도 없이 참고 버티는 것이다. 아직도 씩씩하게 걷고 있는 라미엘을 바라보았다.

“아이작.”

“네, 아가씨.”

“근육통에 좋은 약 좀 챙겨 줘.”

오드리아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아이작에게 말했다. 오드리아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어차피 이 정도였다. 쉽게 힘을 기를 수 없으니까. 그것을 오드리아 역시 모르지 않았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이작이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사이에 라미엘이 환복하고 돌아왔다. 비를 맞은 것처럼 땀에 젖고 중간중간 찢어진 훈련복과는 달리 말끔한 옷이었다.

오드리아가 라미엘을 향해 슬쩍 미소를 지었다.

“힘내!”

“……네?”

“힘내라고!”

오드리아가 주먹을 꽉 쥐고 ‘아자아자!’ 하며 응원했다. 아이작의 말이 맞았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오드리아는 라미엘을 도와줄 수 없었다.

라미엘을 그만 괴롭히라고 제레미아에게 말하는 순간, 삐친 그가 라미엘을 더 괴롭힐지도 모른다.

대신, 오드리아는 라미엘에게 힘내라고 응원했다.

시간이 지나니 라미엘의 상태도 조금씩 괜찮아 보였다. 훈련에 적응해 가는 것 같았다. 공작가에서의 생활 역시도.

하지만 라미엘은 공작가에서 일을 하면서도 다른 고용인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저 부르면 대답하고 시키면 할 뿐이었다.

하지만 성실하기에 다들 넘어가 주었다. 오드리아는 어쩐지 그런 것들이 신경 쓰였다. 서로 잘 지내면 좋을 텐데.

“라미엘.”

“예. 아가씨.”

오드리아가 부르자 라미엘은 하던 일을 멈추고 바로 그녀 앞에 섰다.

“열심히 하네.”

오드리아가 건넨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그것을 라미엘이 이해했을지는 모르지만.

하지만 오드리아의 말대로 라미엘은 그녀의 기대 이상으로 열심히 했다. 그 모습을 보면 흐뭇한 미소가 나오곤 했다.

어떤 의미로든 모든 것을 거부하고 벗어나려고만 했던 라미엘이 조금씩 변한 것이니까.

“열심히 할 겁니다.”

오드리아가 그를 자신의 호위로 만든 것은 그가 최소한의 방어를 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길 바라서였다.

“그래서 약속대로 바로 여기를 나갈 겁니다.”

“공작가가 싫어?”

오드리아 트루디여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공작가는 고용인이라면 모두가 일하고 싶어 하는 일터였다. 대우도 좋고 벌이도 좋으니까.

“좋습니다.”

“……?”

“밥도 주고 잘 곳도 줍니다. 게다가 일하고 나면 월급을 준다고 합니다.”

“…….”

“월급도 열심히 모을 겁니다.”

오드리아가 라미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열심히 돈을 모으고 힘을 키워서 나가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오드리아가 갑자기 씨익, 웃었다.

“그래. 그것도 열심히 해 봐.”

오드리아는 응원했다. 어떤 이유든 목표를 가지는 건 좋은 일이다. 그걸 위해서 최선을 다할 테니까.

그리고 어른이 된 라미엘과 아름다운 이별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드리아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내가 사람을 제대로 본다니까.’

오드리아는 라미엘의 악바리 근성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그에게 원하는 것은 트루디 공작가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 그를 구하기로 마음먹었을 때처럼 그가 포기하지 않는 것,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는 것.

오드리아는 그가 목적을 이룰 때까지 잘 참기를 바랐다.

라미엘은 황당했다. 자신이 공작가에서 이용할 것만 이용한 뒤 나갈 거라는 말에 힘내라니.

라미엘은 종종 생각했다. 공작가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트루디 대공도 제레미아도 아닌 오드리아 트루디일지도 모른다고.

오드리아가 라미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라미엘이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보이지만 오드리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너. 나중에 나한테 은혜는 한번 꼭 갚아야 해.”

“……?”

“알았지?”

오드리아가 뜬금없이 요구했다.

“어……?”

라미엘은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아차, 너무 황당해서 반말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 ‘푸핫!’ 하고 오드리아의 웃음이 터졌다. 라미엘이 당황해서 빈틈을 보이도록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약속이랑 좀 다르잖아요.”

분명, 자기 몫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되면 원하는 대로 나가라고 했으면서 이제는 은혜를 갚으라니. 흔한 사채업자들의 수법이었다. 오드리아 역시 라미엘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하지만 오드리아는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내가 구해 줬잖아.”

“정확히는 제레미아 님이시죠.”

“야!”

오드리아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심정으로 눈을 부릅뜬 채 입을 뻐끔거리며 손가락질을 했다.

라미엘은 그대로 연무장을 벗어나 훈련복을 갈아입으러 갔다. ‘푸훗’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렸다. 오드리아가 돌아보자 아이작이 웃음을 참고 있었다. 오드리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1승 1패. 오드리아와 라미엘을 옆에서 지켜보던(혹은 구경하던) 아이작이 속으로 카운트를 세며 웃었다.

“역시 아가씨도 아직 어리네요.”

“뭐……?”

아이작의 말에 오드리아가 당황했다. 아무리 몸이 이렇다고 해도 오드리아는 스물여섯이었다.

‘그런데 아직 어리다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싶었다.

“평소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른스러우신데.”

당연하지! 오드리아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런데 아이작은 여전히 능글맞은 미소를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라미엘, 저놈하고 있을 때 보면 영락없는 어린아이입니다.”

오드리아의 입이 살짝 벌어지고 눈이 커졌다.

‘지금 내가 라미엘하고 똑같은 수준이다, 이 말 하는 거지?’

그 말에 오드리아는 괜히 울컥했지만 따질 수는 없었다. 라미엘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일단, 겉보기에 두 사람은 또래였으니까.

“하하, 역시 어리세요.”

오드리아의 뾰루퉁한 표정을 본 아이작이 웃음을 터트리며 쐐기를 박았다. 오드리아의 입술이 다시 한번 더 세차게 튀어나왔다.

* * *

모두가 라미엘을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었다. 노예 출신 아이가 공작가에 와서 실력도 없는데 아가씨의 호위 기사가 되었다.

심지어, 공작가의 아가씨인 오드리아는 최근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공작가의 고용인이라면 모두가 원하는 자리를 별 볼 일 없는 노예 소년이 꿰찬 것이다.

철저하게 교육받은 고용인들이기에 당장 표면적으로 문제가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아주 작은 계기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분위기는 이미 술렁이고 있었다.

“라미엘이 왜 이렇게 안 오지?”

오드리아가 심부름을 보낸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라미엘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작이라면 중간에 다른 곳으로 세서 그럴 수 있지만 라미엘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러지 않아도 최근 오드리아의 편애가 심하다는 말이 고용인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오드리아가 직접 라미엘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고용인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줄 것이 뻔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없습니다.”

아이작이 능글거리는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라미엘을 찾으러 가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드리아는 결국 라미엘을 찾으러 직접 움직이고 있었다.

라미엘에게 심부름을 시킨 곳으로 향하는데, 근처에서 여러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굴러들어 온 게 아가씨 옆에 달라붙어서는.”

“노예가 신분 상승 제대로 했네.”

“건방지게. 눈 안 깔아?”

“이 새끼가 진짜!”

오드리아와 아이작의 눈이 마주쳤다.

“왜. 평소처럼 무시하게?”

“네가 아가씨의 호위라고 해서 정말 뭐라도 된 줄 아는 거냐.”

라미엘을 향한 시비가 분명했다.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지금 상황을 보면 그녀가 없을 때는 항상 벌어지는 일인 것 같았다. 라미엘의 익숙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면 더더욱.

하지만 그들의 막말이 심해질수록 라미엘의 눈빛 역시 매서워졌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상황이 더 커지기 전에 아이작이 나서려고 할 때였다.

“잠깐만.”

오드리아는 아이작을 불러 세우고 자신이 직접 나섰다.

“라미엘이 내 호위가 된 데 불만이 많나 봐.”

“오…… 오드리아 님……!”

“여긴 어떻게……?!”

방금 전까지 라미엘을 몰아세우던 고용인들이 당황하며 서로 눈치를 봤다.

자신들이 한 말을 아무래도 그녀가 다 들은 것 같다는 생각에 얼굴이 구겨졌다.

“내 호위가 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기회를 가질 수 있어.”

“네……?”

분명 문책을 당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드리아는 의외의 말을 했다. 어리둥절한 그들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혹시 하고 싶어?”

오드리아가 물었다.

“그, 그야…….”

공작가의 일원과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는 일은 모든 고용인들이 원하는 자리였다.

“대신 라미엘이 지금 받고 있는 훈련을 모두 받아야 하는데…… 괜찮겠어?”

“…….”

호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얼굴에 화색이 감돌던 그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흙빛이 되었다.

라미엘은 제레미아에게 직접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의 훈련은 정식 기사들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혹독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원한다면…… 내가 오빠한테 직접 얘기할 테니까.”

오드리아의 시선이 어느새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제야 그들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

오드리아는 고용인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들이 불만을 가지는 걸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라미엘이 그녀의 호위가 된 것은 분명 특혜가 맞았으니까.

“앞으로는 조심해.”

이 정도면 그들에게도 충분한 경고가 되었을 것이다.

“그럼 돌아가자.”

오드리아가 라미엘과 아이작에게 말하며 돌아섰을 때였다.

“……?”

라미엘은 그녀의 뒤를 따랐는데 이번에는 아이작이 고용인들과 함께 남아 있었다.

“먼저 가십시오. 저는 마무리 좀 하고 가겠습니다.”

아이작이 고용인들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싱긋 웃었다. 그와 동시에 고용인들은 히익,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겁을 먹었다.

아무래도 아이작은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생각인가 보다. 오드리아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라미엘과 함께 먼저 돌아갔다.

오드리아와 라미엘이 사라지자 아이작이 고용인들을 향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자, 우리는 따로 저기로 가서 깊고 찐한 대화를 나눠 볼까?”

고용인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죄송합니다……!” 몇 번이고 빌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 * *

“오필리아 숍에 갈 거야.”

오드리아는 라미엘에게 말했다. 방금 전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아이작은 같이 안 가는 겁니까?”

라미엘과 함께 마차로 출발하려고 하는데, 그 모습을 본 집사장이 물었다.

“응. 따로 할 일도 있어 보이고. 어차피 마차로 금방 다녀올 건데.”

“그래도 제가 다른 기사를 불러올 테니 잠시만…….”

“아냐, 괜찮아. 그리고 라미엘도 있고.”

“하지만…….”

“대신 아이작한테 먼저 오필리아 숍으로 갈 테니까 바로 따라오라고 전해 줘. 지금 좀 바쁘거든.”

오드리아가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작이 무슨 일로 바쁜지 알고 있다는 듯.

“알겠습니다. 아이작에게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응!”

“……그럼 조심히 다녀오세요.”

“다녀올게.”

오드리아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리고는 곧바로 마차를 타고 라미엘과 함께 오필리아 숍으로 향했다.

“오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오필리아 숍에 오면 오드리아는 페이지와 함께 사무실에 들어가서 대화를 나눴다.

“저는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응. 알았어.”

라미엘이 사무실을 나갔다.

라미엘은 사무실을 나와서 필리아 숍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오필리아 숍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평화로웠다. 지하로 가는 문이 있는 곳은 완전히 막혀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예로 팔려갈 뻔했던 일이 그저 악몽에 불과했던 것처럼 느껴져서 라미엘은 기분이 묘했다.

라미엘은 복도에서 기다리다가 사람들의 힐긋거리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잠시 밖에 나와서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이봐. 너 그때 노예 그놈 아냐?!”

갑자기 라미엘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자가 있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라미엘은 얼굴을 구겼다. 노예 시장에서 그를 사려고 했던 배불뚝이 남자였다.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신경 꺼.”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참고 무시하려고 했다.

“어딜 가려고.”

“……!”

라미엘이 그를 지나치려고 하자 배불뚝이 남자가 라미엘의 팔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읏……!”

분하게도 라미엘이 아무리 뿌리치려고 해도 그의 우악스러운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힘의 차이가 너무 컸다.

“혹시 갈 곳이 없어서 다시 노예 생활하려고 돈 많은 마나님 곁을 기웃거리기라도 하는 거냐?”

그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개소리를 늘어놓았다.

“이거 놔!”

무시하고 싶어도 남자가 라미엘을 놓아주지 않았다.

“여기서 너를 만날 줄이야.”

남자는 더러운 미소를 지으며 히죽거렸다.

한편, 사무실에서 오드리아와 페이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지하에 남아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는데 이런 게 있었습니다.”

페이지가 따로 보관해 둔 물건을 담은 상자를 내밀었다.

“노예들의 소지품들을 따로 보관해둔 거 같은데 대부분 평범한 물건들뿐인데 그중에 눈에 띄는 게 있었습니다.”

오드리아가 상자를 열어 안에 있는 물건을 확인했다.

“이건…….”

펜던트 목걸이였다. 보석이 앞에 박혀 있고 펜던트를 열어 보면 그 안에는 문구와 함께 주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니셜이 박혀 있었다.

문구와 이니셜이 군데군데 흐릿해져서 정확하게 알아볼 수는 없지만 이니셜 중 알파벳 L과 E 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라미엘 거 같아서요.”

오드리아가 보기에도 그랬다.

목걸이는 한눈에 봐도 굉장히 고가였다. 웬만한 실력으로는 만들 수 없을 만큼 정교한 세공과 그의 흑발을 연상시키는 검은색이 감도는 보석은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걸 어떻게 가지고 있었던 걸까요.”

“글쎄…….”

“혹시 라미엘의 출신에 대해서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페이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냐.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해. 이건 내가 라미엘한테 전해 줄게.”

오드리아 역시 페이지의 말대로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덮어 두기로 했다.

분명 이거에 대해 추궁하면 라미엘은 또 다시 몸을 웅크리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숨을 테니까.

“나는 이제 갈게.”

“제가 배웅할게요.”

“아냐. 앞에 라미엘이 기다리고 있으니 괜찮아.”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오드리아가 페이지에게 인사를 하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라미엘……?”

그런데 사무실을 나와서 복도를 지나 오필리아 숍 현관까지 나왔는데도 라미엘이 보이지 않았다. 오필리아 숍 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혼자만 돌아갔을 리는 없는데……어디 있는 거지?’

오드리아는 라미엘을 찾아 오필리아 숍을 나왔다.

오드리아는 이 거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골목까지 라미엘을 찾아다니던 오드리아는 드디어 라미엘을 찾았다.

“라미엘……!”

오드리아가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읍, 크윽! 아가씨, 여긴 왜…….”

라미엘은 낯선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발로 밟히고 차이며 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머릿속에 불이 붙은 오드리아는 성큼 앞으로 나섰다.

“원하는 게 뭐야.”

오드리아는 상대가 돈을 노린 양아치들이라 판단하고 얼른 그들이 원하는 돈을 던져 주는 게 차라리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역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하하. 이 꼬마 숙녀분께서 돈이 좀 많으신가 보네?”

“그러게. 꼬마 목숨 값이 꽤 나오겠는데?”

하나같이 질이 나쁜 악질들뿐이었다.

“둘 다 데려가자.”

“그러게. 오랜만에 돈 좀 만져 보겠는데?”

“하하, 이거 내가 데려온 놈이다.”

“알았어. 나중에 나눌 때 더 쳐줄게.”

“암, 그래야지!”

그들은 이미 오드리아와 라미엘을 이용해서 돈을 뜯어낼 망상에 빠져 있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좋지 않았다. 오드리아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트루디 대공이나 제레미아와 동행하지 않는 상황에서 오드리아는 주로 머리를 가리는 모자를 쓰거나 가발을 썼고 지금도 갈색 가발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만약 돌발 상황이 벌어지면 가발을 벗고 신분을 드러낼 생각이었다.

감히 트루디 대공의 딸에게 해코지 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상식의 개념이 없는 질 나쁜 이들에게 그녀의 신분을 밝혔다가는 오히려 더 큰 범죄를 꿈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해…….’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녀를 잡아먹을 것처럼 다가왔다. 그늘이 오드리아의 얼굴을 집어 삼키고 그대로 뒷목 쪽 옷깃을 잡아 질질 끌었다.

“아, 안 돼! 그분은 건들지 마!”

그 모습을 본 라미엘이 절규하며 외쳤지만,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오히려 복부를 강하게 걷어차일 뿐이었다.

“하지 말라고!”

라미엘이 피와 멍으로 가득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네발로 겨우 기어서 오드리아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어떻게든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절박했다.

“이게 진짜 끈질기네.”

하지만 남자의 가볍게 손으로 밀어내는 행위에 쉽사리 넘어졌다.

“하아…… 하아…… 하…….”

라미엘의 거친 숨소리가 흩어졌다. 하지만 그는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섰다.

“……!”

오드리아의 눈이 커졌다. 라미엘이 배불뚝이 남자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래 봐야 어린아이의 몸. 그들을 쓰러트릴 수도 없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쓰러지면 또 일어났다.

결국, 라미엘은 흥분한 그들에게 다시 둘러싸여 발로 걷어차이기 시작했다. 오드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만큼 라미엘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라미엘! ……제발 가만히 있어.”

아무리 덤벼 봐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라미엘은 포기하지 않고 덤볐고 그럴수록 그의 몸에 상처가 늘어났다.

라미엘은 혼자서 그들의 발길질을 감당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독해?”

라미엘은 끈질기게 버텼다.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절대로 놓지 않았다. 라미엘을 발로 치고 주먹으로 때리던 사람 역시 이제는 당혹스러워했다.

고통스러운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악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쯤 되면 살려 달라고 빌고 싶을 텐데도 불구하고.

‘아이작이 올 거야.’

분명 오드리아를 데리러 오필리아 숍으로 올 것이다. 그러면 우리 두 사람을 찾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오드리아와 라미엘은 점점 한계에 다다랐다.

‘왜 안 오지. 이제 곧 올 때가 됐을 텐데.’

이곳을 찾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라미엘은 얼굴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피로 범벅이었다. 오드리아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제발 빨리 와 줘.’

오드리아는 간절하게 바랐다. 아이작이 너무 늦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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