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48)

* * *

라미엘은 고용인들이 지내는 방으로 옮겼다.

아직 일을 시작하지 않은 아이들은 네 명이서 함께 방을 썼다. 라미엘 역시 다른 소년들과 함께 쓰는 방을 배정받고 자신의 침대 옆에 짐을 풀었다.

짐이라고 해 봐야 공작가에서 맞춰 준 여벌 옷 한 벌이 전부였지만.

라미엘은 완전히 변했다.

그동안 지칠 줄 모르고 반항하고 고집을 부렸던 모습을 지켜보고 또 당하기까지 했던 고용인들이 모두 경악할 정도로.

라미엘은 고용인들의 말에 순응하며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 열심히 하려고 했다.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 하는 일이니 서투른 것이 당연하겠지만 전혀 꾀를 부리지 않고 성실히 일을 배웠다.

처음, 소년이 공작가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외모 때문에 약간의 소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너 얼굴 좀 보자!”

같이 일하는 고용인 중 하나가 라미엘의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하지 마.”

그는 화를 꾹 누르며 말했다. 하지만 상대는 오히려 빈정대며 라미엘을 놀렸다.

“뭐 하는 짓이야!”

이를 지나가다 목격한 집사장이 화를 내며 다가왔다.

미리 오드리아가 집사장을 비롯한 책임자들에게 주의를 둔 사항이었다. 라미엘의 외모를 언급하지 말 것. 칭찬을 하는 것도 시비를 거는 것도 조롱하는 것도 모두 금지.

가능하면 최대한 무시해 달라고 오드리아가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벌써 말썽을 부리는 놈이 있다니. 집사장의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 그게 아니라…… 좀 얼굴을 익히려고 한 것뿐입니다.”

방금 전까지 라미엘을 괴롭히던 시종이 억울한 목소리로 해명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라미엘은 눈이 가려질 만큼 긴 머리카락 때문에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로 괜찮은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라미엘은 집사장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곤 할 일을 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마치 설움을 익숙하다는 이유로 참아 넘기는 것 같았다.

라미엘은 이미 자리를 비웠지만 집사장의 무시무시한 눈빛이 남아 있는 시종을 향했다.

“너는 당분간 마구간에 가서 일해라.”

“네?! 아니 그건!”

“불만이 있는 건가. 그럼 대장간으로 가든가.”

“……죄송합니다.”

만약 불만이 있다고 하면 당장 내쫓길 것 같았다. 시종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이, 오드리아의 얼굴을 매일같이 보고 지내는 고용인들이었다. 하지만 라미엘의 외모에 시선을 빼앗겨 실수를 하는 시녀들이 속출했다.

그게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상들은 분위기를 흐트러트렸다. 결국, 집사장이 당부를 무시하고 행동하는 이들을 본보기로 삼은 후에야 잠잠해졌다.

그래도 걱정한 것에 비해 라미엘은 생각보다 금방 적응하는 것 같았다.

“라미엘!”

“네!”

라미엘이 힘껏 대답하며 달려갔다.

“여기 이것 좀 주방으로 옮겨 줘.”

“네!”

라미엘은 자신의 반만 한 것을 번쩍 들었다. 조금 힘겨운지 걸음이 느려졌고 짐을 들고 있는 팔을 자꾸 고쳐 잡았다. 라미엘에게 일을 가르치고 있는 고용인이 오드리아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지나가는 중이었어.”

“생각보다 일을 곧잘 합니다.”

오드리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라미엘에게 향하는 것을 눈치챈 고용인이 말했다.

“다행이네.”

오드리아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아직 버거워 보이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였다. 라미엘은 오드리아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 이쪽은 한 번도 보지 않고 있었다.

“지금은 간단한 잡일을 시켜 보고 있습니다. 조금 더 지켜보고 어느 일을 시킬지 결정할 생각입니다.”

“응. 잘 부탁해. 일단은 내가 데려온 애니까.”

“네. 걱정 마세요.”

오드리아가 보기에 라미엘은 잘 적응하는 것 같았다. 그럴 것 같았다. 오드리아가 라미엘을 보고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한 것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의 눈빛에서 오드리아와 비슷한 강한 생존력이 느껴졌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처절함.

공작가에 있는 동안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배우면 좋을 텐데. 그러면 나중에 혼자서 살아가게 되어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라미엘이 하는 일은 단순한 잡일이었다. 어떤 힘도 기술도 필요로 하지 않고 단순히 시키는 일을 하기만 하면 되는 심부름.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공작가의 고용인들은 모두 고급 인력이었다. 오랜 시간 실력을 쌓고 인정받아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라미엘에게 다른 일을 맡길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잡일이라도 하면서 이곳에서 버티는 수밖에. 오드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라미엘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뒀다.

오드리아가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고용인이 꺼낸 말에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런데…… 연무장을 자꾸만 힐긋거리는 게 기사가 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기사……?”

그의 말에 오드리아의 시선이 라미엘을 향했다.

“아무래도 주위에서 자꾸 건드리니 힘을 기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사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연무장에서 일하며 조금이라도 배우면 좋기는 할 것 같았다.

오드리아가 생각에 잠기자 그가 그녀의 눈치를 보며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그쪽에 한번 얘기를 해 볼까요?”

라미엘이 연무장 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는 그녀가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아냐.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적당한 곳으로 배정해 줘.”

여기서 더 이상 라미엘의 거취에 대해 오드리아가 간섭하는 건 적절하지 못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라미엘과 눈이 마주쳤다. 라미엘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오드리아를 자신의 주인으로 여기는 행동이었다.

라미엘은 다시 움직이지 않고 계속해서 오드리아를 바라봤다. 그녀가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이곳에 찾아왔을 때 오드리아는 라미엘에게 다가가 인사도 나누고 대화도 나눌 생각이었다.

‘여기까지만 하자.’

더 이상 관여하지 말자.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먹고살 수 있게 해 주는 것, 그녀가 할 일은 거기까지다. 오드리아는 그대로 돌아섰다.

* * *

오필리아 숍을 가지게 된 후부터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오필리아 숍에 관한 모든 것은 페이지에게 위임했지만 그녀의 보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아야 했다.

물론, 오드리아는 그런 것을 받지 않아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제껏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 없는 오드리아가 모든 것을 척척 이해하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오드리아는 적절하게 모르는 척하며 기초 학문을 비롯하여 여러 수업을 받았다. 그럴수록 오드리아의 일과는 점점 쌓여 가고 활동 반경 역시 넓어졌다.

“오늘은 오전에 연무장에 가셔야 합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메릴이 말했다.

“연무장?”

“네. 오늘 거기서 아가씨의 호위 기사를 선발하셔야 합니다.”

저택 안에서라면 지금 이대로도 괜찮았지만, 오드리아 혼자 외출하거나 할 때 곁을 지킬 호위 기사는 이제 필수였다.

그래서 오늘 연무장에서 오드리아의 호위 기사를 선정하기로 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직접 선정할 예정이었다.

오드리아가 연무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끌벅적했다. 젊은 기사들은 모두 오드리아의 호위 기사가 되고 싶어 했다.

공작가의 어린 주인. 과거에는 오해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공작가에서 사랑받는 존재였다.

그런 그녀를 호위하게 되면 앞으로 공작가에서의 탄탄한 출셋길이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오드리아를 호위하고 싶은 이유는 넘쳐 났다.

“희망자 있나.”

트루디 대공이 묻자 기사들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대부분이 앞으로 나와서 좀 전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희망자는 기사단 전원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한 명씩 나와.”

그때였다. 기사들의 들떠 있는 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힌 존재가 앞에 나타난 것은.

“실력 확인은 해 봐야지.”

제레미아가 검을 한 바퀴 돌리며 주위를 한번 쓱 둘러보았다. 오드리아의 호위 기사가 되고 싶으면 나부터 넘어야 한다는 경고였다.

“뭐 해, 나오라니까.”

제레미아가 재촉했다. 그 순간, 앞으로 나왔던 기사들 중 절반이 뒤로 물러났다. 공작가의 기사단원 중에 제레미아를 일대일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일 대 다수라고 해서 이긴다는 보장 역시 없었지만.

“자, 잘 부탁드립니다!”

아직 앳된 티가 다 벗겨지지 않은 기사가 제레미아 앞에 섰다. 그는 두려워하면서도 가까스로 용기를 냈다.

“좋아. 용기는 있군.”

제레미아가 여유롭게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힘도 주지 않고 설렁설렁하는 것 같은데 검을 맞댈 때마다 기사는 뒤로 밀려나며 힘겨워했다.

결국, 대결은 오래가지 않았다. 몇 번의 부딪힘만으로 기사는 쓰러졌다.

“고작 이것도 못 막으면서 누굴 지키겠다는 거야.”

제레미아가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역시나, 이 중에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럴 거면 왜 자원하라고 한 거고, 왜 호위 기사를 뽑겠다며 이곳으로 모두를 부른 거야. 오드리아는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제레미아가 모두를 떨어트릴 생각이어도 어차피 최종 결정권자는 트루디 대공이었다.

그렇지 않고 제레미아의 기준대로 그를 이겨야만 한다면, 공작가에는 오드리아의 호위기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제레미아의 기사단 능욕에 가까운 실력 검증 시간은 계속되었고, 앞서와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왜 이렇게 약해?”

제레미아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돌리거나 바닥을 향했다.

“혹시 이들 중 원하는 놈이라도 있느냐?”

트루디 대공이 물었다. 기사들 모두가 제레미아에게 당하는 중이었다. 드디어 트루디 대공이 정리할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쩐지 그의 말투가 이상했다. 분명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데 기사들을 ‘놈’이라고 표현하며 잠깐이지만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쩐지 오드리아가 누구를 지목하더라도 못마땅해할 것 같았다.

사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자신이 직접 호위를 해 주고 싶었다. 다른 놈들에게 맡기자니 도저히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제레미아는 하루 일과가 촘촘하게 정해져 있었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할 수 없었다. 트루디 대공은 최근에 벌어진 국경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문제를 일으키는 적국에 대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은 오드리아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눈초리가 아래로 내려가고 입가에는 유려한 미소를 머금었다.

트루디 대공의 말에 오드리아가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라도 오드리아의 선택을 받을까 기사들이 반듯한 자세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사실, 여기서 고르라고 해도 오드리아는 기사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나마 눈에 익은 얼굴이라고는 뒤에 서 있는 아이작 정도랄까.

그와 눈이 마주쳤다.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오드리아를 바라보았다.

홱, 오드리아는 마치 바람이라도 가를 기세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연무장 구석에 있는 라미엘이 보였다.

‘열심히 하네.’

오드리아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라미엘은 기사들이 훈련 중에 마실 물을 가져온 것 같았다.

라미엘은 다른 고용인과 잠시 얘기를 나누더니 모퉁이에 있는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시끌벅적한 이곳을 구경하는 것 같기도 했다.

“원하는 놈이 있으면 얘기해 보거라.”

트루디 대공이 자상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

순간, 오드리아에게 충동이 일었다. 트루디 대공이 원하는 호위 기사를 얘기하라고 하는데 자꾸 라미엘에게 시선이 갔다.

라미엘은 절대 오드리아의 호위 기사가 될 수 없었다. 일단, 오드리아와 비슷한 또래에 작고 왜소했다.

공작가에 오는 동안 있었던 그의 반항기를 들어 보면 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 봐야 아이였다.

그런데도 오드리아는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라미엘을 관리하는 고용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

- 그런데…… 연무장을 자꾸만 힐긋거리는 게 기사가 되고 싶은 것 같습니다.

- 기사……?

- 아무래도 주위에서 자꾸 건드리니 힘을 기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오드리아를 지킬 만큼 강해지려면 오늘부터 훈련만 한다고 해도 몇 년은 걸릴 것이다.

‘더 이상 나서면 안 되는데…….’

지나친 호의는 독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냉정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그건 오드리아 트루디 이전의 그녀의 인생에서 깨달은 것이다.

오드리아는 이미 라미엘에게 필요 이상으로 신경 썼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더 이상 신경 쓰는 것은 과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오드리아의 입술이 무심코 열렸다.

“제 호위는 라미엘한테 맡길래요.”

오드리아의 뜬금없는 발언에 연무장에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펼쳐졌다.

그중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라미엘 같았다. 모퉁이에 있던 라미엘이 허둥지둥 일어나 이쪽을 눈이 빠질 것처럼 보고 있었다.

“라미엘? 그게 누구지.”

트루디 대공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공작가에 속한 기사들의 이름은 전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기사도 있는 건가, 싶을 때였다.

“저기 있는 아이예요.”

오드리아가 팔을 번쩍 들어 모퉁이에 있는 라미엘을 가리켰다. 왜소한 체구에 볼품없는 몸, 한눈에 봐도 제대로 검을 잡아 본 적조차 없는 것이 분명했다.

“리아, 지금 고르는 것은 시종이 아니라 호위 기사다.”

“네, 알아요.”

“호위 기사는 너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해.”

“그것도 알아요.”

트루디 대공은 오드리아의 대답에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근데도…….”

“라미엘이 제 호위를 했으면 좋겠어요.”

오드리아가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트루디 대공을 바라보았다. 순간, 올망졸망한 눈빛에 흔들릴 뻔했지만 트루디 대공은 겨우 침착을 유지했다. 호위 기사는 함부로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안 돼.”

트루디 대공이 처음으로 단호하게 반대했다. 이번만큼은 트루디 대공의 반대는 지극히 합리적인 사고에 의한 판단이었다.

“하지만 저한테 결정하라고 했잖아요.”

“그래도 안 돼.”

순간 오드리아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럼 저도 필요 없어요!”

“……!”

오드리아는 평소와는 달리 고집을 부렸다.

“오드리아…….”

한 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 오드리아를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조건 흥분하고 보는 제레미아와는 다르게 트루디 대공은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오드리아와 차분하게 대화해 설득할 생각이었다.

“일단 저 아이는 기사가 아니다.”

“제 호위가 필요한 거지, 꼭 기사여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리아, 너와 체구도 비슷한 아이가 어떻게 호위를 하니.”

“비슷하니까 돌아다닐 때 더 편할 것 같아요.”

하지만 오드리아는 지지 않고 대답했다. 그럴수록 말문이 막히는 것은 트루디 대공이었다.

“원하는 것은 뭐든 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오드리아가 마지막 순간까지 아끼고 있던 말이었다.

그 순간 트루디 대공은 할 말을 잃었다. 오드리아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그가 말했었다.

“정말 저 애가 호위를 했으면 하는 거니.”

“네!”

오드리아가 확신에 찬 얼굴을 하고서 대답을 하자 트루디 대공은 하는 수 없었다.

“그래. 원하는 대로 하거라.”

결국, 트루디 대공이 졌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트루디 대공은 밤새 고민한 끝에 오드리아에게 조건을 내밀었다.

“단, 조건이 있다.”

“네?”

“아무리 그래도 그 애는 너무 어려.”

사실 라미엘은 단순히 어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훈련조차 받아 본 적 없었다.

그웬과 고용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힘과 독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뿐이었다.

호위 기사라는 것은 오드리아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 고작 그 정도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드리아 역시 그 부분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린애처럼 떼를 쓴 것이다. 혹시, 다시 말을 바꾸려는 건가 싶어 오드리아의 입술이 튀어나오려고 할 때였다.

“일단 시종 겸 보조 호위로 하자.”

트루디 대공이 제안했다.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당장 호위 기사로 쓰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었다.

“듣자 하니 지금 심부름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꽤 잘한다고 하더구나.”

트루디 대공이 오드리아를 달래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때문에 트루디 대공은 라미엘을 관리하던 고용인을 불러 직접 확인까지 했었다.

“정식 호위 기사는 따로 두고 그 소년은 보조하는 걸로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

“따로 훈련도 시키고.”

“…….”

“어느 정도 실력을 쌓기 전까지는 시종 역할을 시키는 것이 어떠니.”

오드리아가 트루디 대공을 빤히 바라보았다. 트루디 대공은 오드리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왠지 긴장이 됐다. 오드리아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네, 좋아요!”

오드리아는 고민할 것 없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최선의 방법이었다. 오드리아가 활짝 웃으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트루디 대공도 같이 미소 지었다.

* * *

아이작과 라미엘이 오드리아를 찾아왔다. 오드리아의 정식 호위 기사로 선정된 기사가 바로 아이작이다.

“앞으로 아가씨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작과 라미엘이 차례대로 인사했다. 아이작이 호위 기사, 라미엘이 시종 겸 보조 호위를 맡게 되었다.

아이작은 젊지만 촉망받는 기사였다. 공작가에서는 제레미아 때문에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을 뿐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오드리아가 두 사람을 향해 화답했다. 라미엘은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였다. 꿈쩍하지 않는 어깨, 약간 고개를 숙이는 모습.

오드리아에게 오기 전에 교육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피식, 오드리아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라미엘은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에 저녁 시간에는 연무장에서 특훈을 받을 겁니다.”

“응. 열심히 해.”

오드리아 역시 알고 있었던 부분이다. 사실, 훈련을 받게 해 주고 싶어서 고집을 부렸던 것도 있으니까 잘된 일이었다. 오드리아가 활짝 웃으며 라미엘에게 말했다. 라미엘은 고개를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답해야지.”

“네. 감사합니다.”

아이작이 오드리아의 눈치를 보며 라미엘의 팔꿈치를 툭툭 쳤다. 라미엘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대답했다.

“앞으로 아가씨께서 가는 곳엔 저희가 있을 것입니다.”

“응.”

“외출하실 때는 꼭 저와 동행하셔야 합니다.”

“응. 알았어.”

아이작이 오드리아에게 신신당부했다. 어쩐지 외출할 때 꼭 동행해야 한다는 부분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작이 그 부분을 강조한 것이 맞았다. 특히 트루디 대공이 아이작에게 강조한 것이다.

오드리아는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트루디 대공은 오드리아가 몇 번이고 단독 행동을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오필리아 숍에서 혼자 지하에 가고(페이지와 함께였지만 트루디 대공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전에도 메릴과 옐라만을 데리고 오필리아 숍에 갔었던 적이 있다는 것을 보고 받은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더라면 오드리아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트루디 대공은 그 부분을 절대 간과할 수 없었다.

“내일부터 곁에서 호위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오드리아에게 인사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아이작과 라미엘은 오드리아의 방에서 나와 연무장으로 돌아갔다. 라미엘의 훈련 일정을 세워야 했기 때문이다.

이건 전례가 없을 정도로 파격적인 일이었다. 그렇기에 라미엘이 수습 호위가 된 일로 공작가는 꽤 시끄러웠다.

“그나저나 앞으로 큰일이네.”

“네?”

아이작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라미엘을 보며 불쌍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고생 좀 하겠어.”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미엘은 아이작의 말이 자신이 수습 호위가 된 일로 인해 공작가가 소란스러운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분명 자신을 향한 시선이 곱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견뎌 내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었다. 라미엘은 다시 한번 다짐했다.

“힘내.”

아이작은 바로 어제 만났던 제레미아를 떠올렸다. 오드리아의 호위가 결정되고 난 후 가장 흥분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 모습을 떠올린 아이작이 피식, 웃었다.

아이작의 알 수 없는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기까지 라미엘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작의 말대로 라미엘의 고생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 * *

오드리아의 활동 반경이 넓어졌다고 해도 여전히 단조로운 일과였다.

특히, 그녀를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는 메릴은 그녀가 너무 늦은 시간에 잠들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 썼다. 덕분에 그녀의 일과는 늦어도 저녁 전에 마무리되었다.

라미엘은 오드리아의 활동 시간을 고려하여 그녀의 일과가 마무리되는 늦은 오후부터 훈련을 받게 되었다.

간혹, 그녀의 일정이 늦어질 경우에는 아이작이 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은 없었다.

늦은 오후는 통상 훈련이 마무리될 때였다. 라미엘이 연무장에 도착하자 다른 기사들은 모두 떠나고 연무장에는 제레미아밖에 없었다.

그는 오전 훈련에만 참여하지만 가끔 일정을 빨리 끝내고 저녁에 연무장에 와서 혼자 훈련을 할 때가 있었다.

라미엘은 제레미아의 훈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구석으로 가서 자신을 가르쳐 줄 교관이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어디 가.”

라미엘을 발견한 제레미아가 그를 불렀다. 라미엘은 제레미아가 자신을 불렀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지만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오늘부터 훈련을 받기로 했는데 제가 일찍 도착한 것 같습니다. 저쪽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라미엘이 공손하게 대답한 후 다시 구석으로 향했다. 제레미아가 눈썹을 찌푸렸다.

“뭘 기다린다는 거지.”

“저를 가르쳐 주시기로 한 기사님이 아직 안 오셨습니다.”

“그거 나야.”

“……네?”

“널 가르칠 사람.”

“…….”

라미엘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라고.”

“……!”

제레미아가 씨익, 웃었다. 라미엘은 순간 그 미소가 이제껏 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사악하게 보였다.

“침 떨어진다.”

라미엘이 황급하게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한 번에 소화하기에는 너무 충격적인 얘기였다. 라미엘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겨우 붙잡고 자꾸만 벌어지려는 입을 꽉 물었다.

“약한 놈은 리아 옆에 있을 자격이 없어.”

제레미아가 라미엘의 주위를 원을 그리며 돌았다. 맹수가 먹잇감을 사냥하기 위해 관찰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넓었던 원이 점차 좁아졌다.

어느새 라미엘의 코앞에서 그를 빤히 보며 돌고 있었다. 라미엘은 침을 삼키는 소리가 제레미아에게 들릴까 봐 마음대로 삼키지도 못했다.

약한 놈은 자격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라미엘이 오드리아의 호위가 된 것이 못마땅한 것 같았다. 지금 협박해서 관두게 하려는 것일까? 그러면 어떡해야 하지? 라미엘이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 너는 무조건 강해야 돼.”

제레미아는 라미엘을 협박해서 그만두게 할 생각이 아니었다. 제레미아는 딱 봐도 긴장하고 있는 티가 나는 라미엘의 앞에 서서 빤히 바라보았다.

“특별히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지.”

라미엘은 어쩐지 그 말이 앞으로 각오하라는 말로 들리는 듯한 환청을 경험했다.

“못 하겠으면 지금 말해.”

제레미아가 툭 내뱉으며 돌아섰다. 이대로 떠날 듯한 태도였다.

라미엘도 훈련에 참가하고 싶었다. 그동안 거리에서 생활하며 힘이 없어서 당한 억울한 일들이 셀 수조차 없었다. 그러다 결국 노예가 되어 팔려갈 뻔하기까지 했다.

아무 힘도 없으면 혼자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라미엘은 이제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드리아가 자신을 호위로 삼겠다고 했을 때도 무슨 꿍꿍이인가 싶었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배우고 싶었다. 힘을 기르고 싶었다. 라미엘의 눈빛에 불꽃이 튀었다.

“할 수 있습니다!”

라미엘이 눈을 빛내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진짜 할 수 있어?”

“네.”

라미엘은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좋아. 그럼 한 수 가르쳐 주지.”

제레미아가 시원하게 웃으며 검을 잡았다.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되었다.

제레미아는 인정사정없었다. 정말 죽지 않을 정도로만 쉬게 해 주었고 죽고 싶을 때까지 몰아세웠다.

라미엘은 거칠어진 숨을 토하듯이 뱉었다. 그런데도 산소가 부족한 것 같았다.

“다시!”

제레미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라미엘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세워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제레미아는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주지 않았다.

“대답!”

“네!”

라미엘은 혼신의 힘으로 대답했다. 당장 서 있을 기력도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서 있어야 했다.

라미엘은 제레미아가 이제는 괴물로 보였다. 전설 속의 몬스터보다 더 무서웠다.

훈련을 받는 동안 제레미아 역시 라미엘만큼이나 움직였다. 그런데 그는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기운이 넘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라미엘은 도저히 제레미아처럼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바로!”

라미엘의 집중력이 떨어진 것을 귀신같이 눈치챈 제레미아가 외쳤다. 라미엘은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다시 집중했다.

“다시 제대로 해!”

훈련은 혹독했다. 아주 작은 실수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불만을 토로할 수 없었다. 제레미아는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라미엘이 하고 있는 건 평소에 제레미아가 하는 훈련이었다.

라미엘은 죽을 것 같이 숨이 차오르고 눈앞이 어지러워도 두 발이 네발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버텼다.

‘무조건 뛰어넘을 거야.’

라미엘은 제레미아를 보면서 각오했다. 언젠가 제레미아를 뛰어넘을 만큼 실력을 쌓고 말겠다고. 라미엘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여전히 ‘다시! 다시! 제대로! 똑바로 하라니까!’ 제레미아의 외침은 멈추지 않았다. 제레미아가 원하는 만큼 해내어야만 라미엘은 해방될 수 있었다.

“이것밖에 못해?!”

그 후로도 라미엘은 제레미아로부터 극악무도한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첫날에는 다음 날 끙끙 앓는 바람에 오드리아의 호위를 할 수도 없었다.

일주일 동안은 제대로 걷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걷는 게 전부였다. 온몸에 피멍은 당연했고 상처 역시 생기지 않는 날이 없었다.

라미엘은 매일 밤마다 녹초가 되어 쓰러지다시피 잠들었다. 주위에서 지켜보는 기사들마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오드리아의 곁을 지키고 있는 라미엘은 오늘도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였다. 그 모습을 모른 척할 수 없었던 오드리아가 물었다.

“어디 아파?”

“아, 닙니다. 괜찮습니다.”

라미엘은 여전히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표정만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멀쩡한 척을 했다.

“정말?”

“……윽!”

곁에 있던 아이작이 짓궂게 라미엘의 등을 치자 그의 입에서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사실 라미엘은 온몸이 욱신거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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