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갑자기 사랑받으려니 간지러워요
오필리아 숍은 오드리아의 것이 되었고, 운영에 관한 권한을 위임받은 페이지가 숍을 운영했다. 그 이후로,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오드리아는 오랜만에 작업실을 찾았다. 만들고 싶은 것이 있어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메릴이 물었다.
“어디 불편하세요?”
“어?”
갑작스러운 물음에 오드리아가 되물었다. 그런 건 왜 물어보지? 오드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메릴의 시선이 오드리아의 옆구리로 향했다.
“……!”
오드리아가 무의식중에 옆구리를 긁고 있었다. 심지어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참을 수 없을 만큼 온몸이 간지러웠다.
“……간지러워.”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디가요? 얼마나요? 지금 당장 의사를 불러 오겠습니다!”
“아니, 잠깐…….”
그녀의 한마디에 메릴이 흥분하며 바로 뛰쳐나갔다.
“그 정도는 아닌데…….”
하지만 오드리아의 말을 메릴은 들을 수 없었다.
작업실에서 메릴이 의사와 함께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오드리아는 그 뒤로 따라오는 사람들에 깜짝 놀라야 했다.
그녀가 의사를 찾아가자마자 그 소식이 실시간으로 알려지면서 공작가가 발칵 뒤집힌 것이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함께 왔다. 그리고 그 뒤로 트루디 대공의 보좌관들과 방금 전까지 제레미아와 함께 훈련 중이던 기사들까지 줄을 서 있었다.
‘이게 다 뭐야?!’
갑작스러운 총출동에 오드리아는 황당했지만 바로 이어지는 속사포 질문에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지도 못했다.
“어디가 아픈 거냐.”
“오드리아! 괜찮아? 많이 아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걱정이 가득한 게 얼굴에 드러났다. 오드리아는 당혹스러웠다.
조금 간지러울 뿐이었다. 그냥 진료만 받으면 되는 일인데,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 같았다.
‘그냥 좀 간지러운 건데.’
오드리아는 대수롭게 생각했지만, 사실 증세는 오드리아의 생각보다 심각했다.
처음에는 옆구리였지만 어느새 온몸이 간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었다. 오드리아가 무의식적으로 팔을 긁으면서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앗.”
갑자기 오드리아가 낮게 신음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오드리아!”
“오드리아! 왜 그래! 괜찮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화들짝 놀라며 오드리아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오드리아는 양손을 꼭 붙잡은 채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더는 못 참아!”
오드리아가 잡고 있던 양손을 풀고 팔과 어깨를 전투적으로 긁기 시작했다. 손이 닿지 않는 등을 긁기 위해 온몸을 움츠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미치도록 간지러웠다.
오드리아의 갑작스러운 모습에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저…… 잠시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기세에 뒤에 물러나 있던 주치의가 소심하지만 큰 결심을 하고 용감하게 말을 꺼낸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어깨가 움츠러든 것을 오드리아는 순간적으로 보았다.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주치의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사이를 힘겹게 뚫고 오드리아의 앞에 섰다. 고작 그 몇 걸음만으로 주치의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의사가 오드리아의 상태를 보고 질문을 던졌다.
“다른 곳이 불편하거나 아픈 곳이 있으십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아. 그냥…….”
오드리아는 대답하면서도 몸을 열심히 긁었다.
“간지러워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계속 긁다 보면 피부에 상처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가려움은 생각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오드리아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계속 긁었다.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주치의가 오드리아의 몸 상태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특히, 팔의 경우에는 이미 피부가 발갛게 올라와 있었다.
언제부터 이런 증세가 나타난 것인지, 가려움에 통증은 동반되는지 등 주치의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오드리아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대체 어디가 안 좋은 건가.”
“그, 그게…….”
진료가 끝나자마자 트루디 대공이 주치의를 재촉했다. 하지만 주치의 역시 확신하지 못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정확한 이유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특정 물질에 이상 반응을 일으키시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게 뭔데!”
“거, 거기까지는 저도 잘…….”
한 마디 할 때마다 트루디 대공의 노성이 따라붙었다. 가뜩이나 두 사람에 비해 왜소한 의사의 몸이 점점 크게 떨리고 있었다. 겁을 먹은 것이다.
‘불쌍해…….’
오드리아는 생각했다. 그 와중에도 긁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치료 방법을찾아내.”
오드리아의 가려움증의 원인을 찾기 위해 그녀의 몸에 닿았던 모든 것들을 역추적했다. 하지만 증상의 원인이라고 추측되는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최근 변화라고는 페이지가 가져온 드레스 외에 없었다. 설마 드레스 원단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보관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괜히 자신의 갑작스러운 증세 때문에 페이지에게 안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아서 오드리아는 순간 덜컥 걱정되었다.
“하지만 이 드레스와 같은 소재의 드레스는 이미 여러 벌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없었고요.”
문제가 커지지 않은 것은 메릴의 증언 덕분이었다. 메릴은 오드리아가 그동안 입었던 드레스에 대해서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소재 자체에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곳에 원인이 있다는 것인데 그 어떤 것에서도 원인이 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여기 있는 것들 전부 바꿔.”
원인을 찾을 수 없어 답답했던 트루디 대공은 오드리아의 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교체하도록 지시했다. 그녀의 손이 닿는 것이라면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전부.
공작가의 청결을 위해 고용인들은 대대적으로 청소를 했다. 오드리아가 잠시 외출하기만 해도 그녀의 몸을 닦고 가려움을 완화시킨다는 향유를 발랐다.
“괜찮으세요?”
“으, 응…….”
괜찮다는 말과는 다르게 오드리아의 얼굴은 불편해 보였다. 결국 참지 못한 오드리아가 다시 긁기 시작했다.
“간지러워…….”
하지만 그 어떤 것도 효과는 없었다. 오드리아는 여전히 간지러워했고 자꾸만 몸을 긁었다. 한 곳을 지나치게 긁어서 상처가 생기기도 했다.
피부에 이상이 있을 때 먹는 약과 모든 민간요법까지 총동원해 봤지만 소용이 없자 의사는 매일같이 찾아오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눈치를 보느라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갔다.
참는 것이라면 이골이 날 정도로 자신 있는 오드리아였지만, 가려움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가려움 때문에 긁다 보면 몸이 발갛게 부어오르고 상처가 났다.
그럼 약을 바르고 긁지 말라는 처방이 내려지지만 가려움을 무조건 참으라는 것은 고문에 가까웠다.
방에서 쉬라고 메릴이 권유해도 매일같이 작업실로 향해 뭔가를 만드는 데 열중했다. 사실, 오드리아는 이렇게 생각했다.
‘딱히 상관없지 않나?’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또다시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달려와서 혼이 빠질 때까지 걱정을 할 것 같아서 속으로 삼키긴 했지만.
게다가 오드리아의 가려움은 컨디션과 상황에 따라 증세의 정도가 달랐다. 갑자기 간지러웠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지곤 했다.
문제는, 그 증세가 불규칙적이라 원인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드리아는 내심 자신의 증상이 어떤 물건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드리아는 작업 중에도 무의식적으로 몸을 긁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메릴이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모두가 그녀의 상태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몸도 안 좋으신데 쉬세요.”
“괜찮아. 쉬면서 할게.”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응!”
메릴이 만류했지만, 오드리아는 작업에 열중했다. 오드리아는 꼭 만들고 싶은 것이 있었다.
“지금 만드시는 건 뭐예요?”
메릴이 궁금해하며 물어봤다.
“비밀이야.”
그렇게 말한 오드리아가 메릴을 향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 * *
이상하다.
오드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몇 걸음 더 걷다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아무 것도 없었다.
‘뭐지, 이 데자부는…….’
오드리아는 분명 지금과 똑같은 경험이 한 적이 있었다.
‘이상한데…….’
오드리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 걷다 보니 보좌관과 함께 대화를 하고 있는 트루디 대공이 보였다. 아마 곧 외출할 예정인 것 같았다.
“아…… 아버지……!”
“……!”
트루디 대공이 오드리아를 보고 환하게 웃더니 갑자기 얼굴 근육에 경련을 일으켰다. 한 발, 두 발, 뒤로 물러나더니 어색하게 몸을 돌렸다. 시선은 앞으로 고정한 채 그대로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
오드리아를 본 트루디 대공이 다가오기는커녕 도망치다니.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드리아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우뚝 멈춰 서 가만히 있을 뿐. 지금 이 상황은 오드리아가 처음 이 몸에 들어왔을 때 있었던 일이었다.
‘갑자기 왜 처음으로 돌아온 거지.’
얼마 전까지는 싱글벙글거리며 오드리아에게 다가와 조금이라도 같이 있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드리아가 보이기만 하면 우물쭈물하더니 그대로 돌아갔다. 제레미아는 아마도 예전처럼 뒤에서 몰래 훔쳐보는 것 같고.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지.’
오드리아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 * *
‘다 만들었다!’
오드리아는 최근 원인을 알 수 없는 가려움 때문에 몸을 긁으면서도 계속 작업을 한 결과 드디어 완성했다.
“어디 가세요?”
벌떡 일어나는 오드리아를 보며 메릴이 물었다.
“아버지랑 오라버니 보러!”
옆에서 지켜보던 메릴이 묻자 오드리아는 활짝 웃으며 말하고는 두 사람이 있을 집무실로 향했다.
늦은 오후, 이 시간이면 제레미아는 트루디 대공의 집무실에서 업무 전반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있을 시간이었다.
오드리아가 가려움을 참고 만든 것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 줄 선물이었다. 오필리아 숍에서의 일을 겪으면서 오드리아는 깨달았다.
‘분명 처음에는 지지리 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드리아는 어느 순간부터 달리고 있었다.
‘빨리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오드리아가 선물을 줬을 때 좋아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오드리아의 예상대로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집무실에 있었다.
“꽤 늘었구나.”
트루디 대공이 제레미아가 하는 것을 보더니 무심하게 말했다. 순간 제레미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다면 분명 칭찬이었다.
“정말입니까.”
“그래, 생각보다 많이 괜찮아졌어. 아직 혼자 맡기에는 부족하지만.”
“…….”
트루디 대공에게서 이 정도 칭찬이 나온다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제레미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좋아하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참고 있지만 자꾸만 입꼬리가 가만있지 못하고 올라가려고 했다.
제레미아가 잘되지 않는 표정 관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순식간에 오드리아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아버지!”
“오드리아?”
오드리아의 부름에 트루디 대공이 잡고 있던 펜을 떨어트렸다.
“오라버니. 저 왔어요!”
“어……?”
평소라면 두 팔 벌려 반겼을 제레미아마저도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갑작스러운 오드리아의 등장에 두 사람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개의치 않고 직진했다.
어느새 두 사람 앞에 가까이 도착한 오드리아가 손을 뒤로 숨긴 채 활짝 웃었다.
“저 드릴 게 있어요.”
“내게?”
“나한테?!”
오드리아가 두 사람을 향해 방긋 웃으면서 뒤에 숨기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여기요.”
그녀의 손에는 선물 상자가 있었다.
“이게 뭐지?”
“선물이에요.”
오드리아는 어떤 선물을 할지 고민했다. 그러던 중 페이지의 패밀리 룩이 오드리아의 선물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오드리아의 드레스 룸은 머지않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와 똑같은 스타일의 드레스로 가득찰 것만 같았다.
오드리아는 미래에 벌어질 드레스 룸 참사를 방지하기 위한 속내를 가미한 선물을 만들었다.
“고맙구나.”
“……?”
그런데 트루디 대공은 의외로 덤덤하게 받았다. 분명 선물을 받자마자 감동해서 말을 잇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읏.”
오드리아의 예상 그대로의 반응을 보인 것은 제레미아였다. 그는 지나치게 감격한 나머지 목 안까지 눈물로 가득 찼다.
이것은 평범한 선물이 아니었다. 오드리아가 앞으로 오드리아 트루디가 되어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와 함께 가족으로 살기로 결심하는 증표이기도 했다. 물론, 오드리아 혼자 하는 결심이긴 하지만.
그래서인지 오드리아는 왠지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한마디 덧붙였다.
“제 마음이에요!”
오드리아의 한마디에 덤덤한 척 표정을 유지하던 트루디 대공의 얼굴이 오드리아의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졌다.
“오드리아…….”
제레미아가 마치 앓는 것처럼 오드리아를 불렀다. 당장 달려와 오드리아를 꽉 안을 기세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오드리아가 좀 더 빨랐다.
“일하시는데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죠?”
“아, 아니.”
“그럴 리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손사래를 치며 만류하려 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이미 돌아선 후였다.
“저 이만 가 볼게요! 저녁 식사 때 봬요!”
오드리아는 그대로 폴짝 뛰어 집무실을 벗어났다. 집무실에 남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오드리아가 나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준 선물을 소중히 꼭 쥔 채.
오드리아는 선물을 주고 집무실에서 나왔다.
처음 오드리아 트루디의 몸에 빙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은 평생 가족의 사랑은 받지 못할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오해와 서투름으로 공작가의 버려진 영애라고 불리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도,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제껏 동생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내주기만 하면서도 마냥 좋았던 오드리아였다. 하지만 애정은 보상받지 못했고 비참한 결과를 맞이해야 했다.
애정이란 것이 얼마나 힘없고 보잘것없는 것인지 이미 한번 뼈저리게 경험했기에 그런 얄팍한 오해로 어긋났던 애정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살기로 했었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달랐다. 매정하고 이기적이었던 자신의 동생들, 에이미와 노엘과는.
오드리아의 작은 행동만으로도 두 사람은 달라졌다. 그녀가 애정을 표현할 때면 진심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그녀의 부탁이 마치 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뻐했다.
오드리아는 깨달았다. 애정을 주기만 하고 받아 본 적 없어서 갑자기, 그것도 넘치도록 받기 시작한 사랑에 어색하고 당황스러워서 겁을 내고 있었다는 것을.
오드리아에게 가족은 더 이상 한쪽이 일방적으로 애정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을 받고 또 줄 수 있는 가족이 있었다.
오드리아의 걸음이 빨라졌다. 조금이라도 빨리 진짜 선물을 주고 싶었다.
이제는 그만 에이미와 노엘의 그림자를 지워 버리고 새로운 가족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려움을 참고 선물을 만드는 모든 시간들이 즐거웠다.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가는데 오드리아의 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그녀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그러고 보니…….’
오드리아는 자신의 팔과 목을 괜히 만져 봤다.
“이제 안 가렵네?”
오드리아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간지러운 증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오드리아의 몸이 나비처럼 가벼웠다.
‘역시 별거 아니었어.’
오드리아를 지난 며칠 동안 괴롭혀 오던 가려움이 완전히 지워졌다.
“이제 괜찮아.”
“정말요?”
“응.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그럴 리가…….”
메릴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오드리아를 살폈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오드리아는 가뿐해 보였다. 무의식적으로 간지러운 곳을 긁는 것도 없어졌다.
“진짜 괜찮아졌으니까 걱정하지 마.”
오드리아가 환하게 웃었다.
* * *
‘이 정도면…… 가까워진 건가.’
그런 거 아닐까. 오드리아가 부탁이라는 걸 했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라서 다행이라는 말도 들었다. 게다가 오드리아가 선물까지 주었다.
‘이거 어쩌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커다란 변화였다. 마냥 행복해야 하는데…… 트루디 대공은 최근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자꾸 욕심이 생기는군.’
자신은 그런 것이 없는 줄 알았다. 언제나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고, 그의 것은 언제나 최고였다. 굳이 욕심낼 것이 없었다. 그가 욕심냈던 것이라고는 레이첼, 그녀의 존재가 유일했다.
그런데 요즘 트루디 대공은 이상할 정도로 자꾸만 욕심이 늘었다. 만족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내가 만족이란 걸 애초에 생각한 적이 있었나.’
그는 언제나 부족한 것도 필요한 것도 없는 만큼 만족도 불만족도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전혀 아니었다. 자꾸만 불만족스러웠다.
“흐음…….”
트루디 대공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의 고민은 오드리아 때문이었다. 오드리아가 자신을 보고 웃었다. 그때 느낀 충만함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갈증이 났다.
이제는 오드리아를 좀 더 가깝게 불러 보고 싶었다. 평범한 이름이 아니라 조금 더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호칭을 가지고 싶었다.
문제는 한 번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 그의 머릿속이 오로지 그 생각뿐이라는 것이다. 업무를 처리할 때도, 잠을 잘 때도, 식사를 할 때도, 오드리아와 마주쳤을 때도. 머릿속에 있는 호칭을 부르는 것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 생각한 일을 거침없이 처리하는 것과 딸을 대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딸이라니…… 딸이라…….’
트루디 대공은 머릿속으로 한 말마저도 곱씹었다. 생각해 보니 딸이라고도 말해 본 적이 없었다. 마음속으로만 한 말인 데도 불구하고 입 안에 행복이 감돌았다.
몇 번이고 타이밍을 노리면서도 기회를 놓치는 사이,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서로 눈치챘다.
지금 두 사람 모두 오드리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것을.
하긴, 자신이 생각했는데 제레미아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어쩌면 두 사람이 동시에 이런 우스운 짓을 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질 수 없지.’
‘절대 안 져.’
두 사람은 서로를 견제하며 결심했다. 제레미아보다, 트루디 대공보다 먼저 말하고 말겠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직 못했나 보군.’
트루디 대공이 제레미아의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그는 마치 전쟁에서 패한 것처럼 축 처진 채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 방금 전에 오드리아를 봤지만 제대로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도망친 것이 분명했다. 트루디 대공이 자신의 아들을 보고 피식 비웃었다.
‘역시, 벌써 했을 리가 없지.’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제레미아 역시 자신을 보고 안심하는 트루디 대공을 보며 생각했다.
제레미아가 아버지를 향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오드리아 앞에만 서면 유난히 소심해졌다. 그런 그들이 오드리아를 이름이 아닌 애칭으로 부르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고.
‘오늘은 꼭……!’
결심하고 하루를 시작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실패였다. 덕분에, 아침과 저녁의 기분이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는 주인들 때문에 고용인들만 고생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오드리아에게 말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타이밍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두 사람은 하루 종일 오드리아의 뒷모습에 시선이 고정돼 있었다. 그러다 오드리아가 자신을 보면 그대로 도망치기 일쑤였지만.
이대로 실패하는 걸까, 싶은 순간이었다. 최근, 트루디 대공은 황궁에 갈 일이 많았다. 이번에도 역시 전날에 갔다가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다음 날 오전에야 돌아왔다.
들어가서 쉬기 전에 오드리아를 한 번 볼까 싶어서 찾아갔을 때였다. 오드리아가 후원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꽃에 둘러싸인 채.
‘꽃에 파묻힌 모습이라니.’
이건 당장이라도 화가를 불러서 기록해야 하는 모습이었다. 이것을 그림으로 남기지 못하다니, 천추의 한이었다. 대신, 트루디 대공은 두 눈에 그 모습을 가만히 저장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트루디 대공은 뒤늦게 깨달았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이건 절호의 기회였다. 오드리아가 잠든 이 상황,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용기를 내어 말할 수 있었다.
“……리아.”
조용히 그녀를 불러보았다. 오드리아는 분명히 잠들어 있는데도 대공의 목소리는 떨렸다.
“…….”
아무 반응이 없었다.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트루디 대공은 목을 다듬고 다시 한번 자신의 딸을 불러 보았다.
“……리아.”
자고 있는 오드리아에게 한 말이었는데도 부끄러웠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짜릿한 행복감이었다.
이토록 행복할 수 있다니. 트루디 대공의 얼굴 근육이 완전히 풀렸다. 헤실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보좌관이 황궁에 다시 가야 한다고 그를 불렀기 때문이었다.
웬만해서는 황궁에서의 연락 따위 무시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국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황궁에 돌아가기 위해 오드리아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쉬워.’
아쉬워서 죽을 것 같았다.
황궁에 가기 위해 돌아가던 트루디 대공이 제레미아와 마주쳤다. 트루디 대공이 처음으로 제레미아를 향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훗.”
“……?!”
제레미아는 그 미소의 뜻을 알아차렸다. 한발 늦었다……!
서둘러 트루디 대공이 오던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벤치에 앉은 채 눈을 깜박이고 있는 오드리아가 있었다.
“리아……!”
제레미아는 당황해서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 오는 내내 분하다고 생각하며 입속으로 중얼거리던 말이었고, 지난 며칠 동안 용기가 나지 않아 못했던 말이었다.
“오라버니?”
아직 잠결에 멍한 오드리아가 그를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눈을 깜박였다.
제레미아는 내친 김에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앞으로 리아…… 라고 불러도 돼?”
그의 말에 오드리아가 놀랐는지 눈이 살짝 커졌다. 속눈썹이 몇 번인가 깜박이고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는 동안 제레미아는 숨통이 막힌 것만 같았다. 엄청난 긴장감에 손에 땀이 났다.
“당연하죠.”
오드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순간 제레미아의 얼굴이 붉게 타오르면서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리아……!”
“네. 오라버니.”
감탄하듯 터져 나온 말에 오드리아는 기꺼이 미소와 함께 답했다. 그러자 제레미아가 또 다른 말을 꺼내기 위해서 양 주먹을 꽉 쥐며 심호흡을 했다.
“그럼 리아도 나를…….”
“……?”
사실, ‘리아’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과 함께 듣고 싶은 말이 있었다. 제레미아가 말을 더듬거리며 어렵게 입을 뗐다.
“오, 오빠라고 불러주면 안 돼?”
그 말을 하는 제레미아의 얼굴은 이 정도면 정말 터질 수도 있지 않을까 심각하게 걱정이 될 정도로 빨개졌다.
오드리아 역시 좀 전보다 더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그럴수록 제레미아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오드리아의 입술이 몇 번 오물거리다가 조금씩 벌어졌다.
“오…… 빠?”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사실 오드리아에게도 어색한 호칭이었다. ‘오빠’라니. 그 단어를 입 밖에 꺼내는 것만으로도 심장 언저리가 근질근질했다.
“……?!”
제레미아는 지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오히려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뜨겁게 타올랐던 얼굴이 가라앉았다.
‘방금 리아가 나를 뭐라고 부른 거지…….’
만약 그가 들은 게 맞다면 다시 한번만 듣고 싶었다.
“리아…… 한 번만 더…….”
이번에는 용기를 내어 불렀다. 오드리아가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왠지 입 안이 점점 말라갔다.
“네, 오빠.”
오드리아가 해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대로 제레미아의 심장에 꽂히는 것 같았다.
오드리아를 애칭으로 불러서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을 뿐인데, 리아가 웃으며 받아 주자 오히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커다란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도 말하셨을까.’
그러고 보니 방금 전, 수상하게 돌아가던 트루디 대공의 모습이 떠올랐다.
“조금 전에 아버지 만났어?”
“……아뇨. 아버지께서 오셨었어요?”
오드리아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만났어?”
방금 전, 트루디 대공의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고 온 제레미아는 오드리아의 말에 오히려 당황했다. 그건 분명히 목표한 바를 성취하고 기분이 좋아진 맹수의 나른한 모습이었다.
제레미아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네. 저 깜박 잠이 들어서요.”
오드리아가 제레미아를 향해 말했다. 그 순간 제레미아는 우월감에 가득 차서 입꼬리가 올라갔다.
결국, 오드리아에게 있어서 ‘리아’라고 가장 처음 부른 사람은 아버지가 아닌 자신이었다.
두 사람에 의해 존재하던 공작가의 금기어보다 더 꺼내기 어려운 말, 누구도 금기어라고 하지 않았지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는 금기어처럼 느껴지던 말이었다.
“리아…….”
고작 그 한마디에 온 세상에 꽃이 만개한 것처럼 충만한 기분이 들었다.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도 방금 전에 와서 ‘리아’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거 때문이었구나.’
두 사람이 지난 며칠 동안 끙끙거리던 이유를 알고는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히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향해 귀엽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오드리아 말고 또 존재할까.
두 사람의 서툴지만 직진밖에 모르는 애정을 떠올리는데 갑자기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런데 아픈 게 아니라…….
‘아…… 간지러워.’
괜찮아졌다고 생각한 가려움증이 도진 건가. 하지만 몸이 아니라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심장은 간지럽다고 해서 긁을 수도 없는데.
‘뭐, 어쩔 수 없지.’
이 간지럼은 앞으로도 종종 나타날 것이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감정을 느낄 때마다 그녀는 어딘가 자꾸만 간지럽다고 느낄 테니까.
* * *
트루디 대공은 그로부터 며칠이 흐른 후, 오드리아와 제레미아가 후원에 있는 정자에 함께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리아.”
“네, 오빠.”
“리아가 준 선물 잘 쓰고 있어.”
제레미아가 검집에 달린 술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마음에 들어 하시니 다행이에요.”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트루디 대공이 충격을 받은 것은 따로 있었다.
제레미아는 자연스럽게 오드리아를 향해 ‘리아’라고 애칭을 부르고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화답하듯 웃으며 ‘오빠’라고 불렀다.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트루디 대공이 오드리아와 더 가깝다고 생각했었는데.
트루디 대공은 복잡한 얼굴을 한 채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아빠 오셨어요?”
그를 발견한 오드리아가 자연스레 트루디 대공을 향해 ‘아빠’라고 불렀다.
순간 심장이 멎을 듯해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지만 간신히 버텼다.
“……리아.”
잠들어 있지 않은 오드리아를 향해서는 처음 부르는 것이었다.
“어서 오세요, 아빠.”
오드리아의 환한 미소가 사방을 빛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