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트루디 대공은 집무실에 있었다.
“각하. 오필리아 숍은 어떻게 할까요?”
트루디 대공의 지시에 따라 그동안 오필리아 숍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던 보좌관이 물었다. 오필리아 숍에 대한 자료를 살핀 트루디 대공이 답했다.
“잠시 보류하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습니다.”
에이미와 노엘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있는 보좌관이 말했다.
“그래도 일단 대기해.”
“네, 알겠습니다.”
보좌관은 그 결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지?’
그것은 집무실에 있는 모든 보좌관들의 하나 된 마음이었다. 트루디 대공이 망설이고 있는 것은 오필리아 숍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
트루디 대공은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밖에서 약간의 소란이 일어났다. 시녀의 놀란 목소리가 집무실 안까지 들렸다.
“무슨 일이 있나 봅니다?”
보좌관이 밖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일어나며 트루디 대공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었다.
“무슨 일이지?”
대답을 듣지 못한 보좌관이 직접 문을 열었다. 놀라서 눈이 커진 시녀와 보좌관의 눈이 마주쳤다. 보좌관의 시선이 그대로 시녀의 허리 부근으로 향했다.
“가, 각하!”
“……?”
밖을 나갔던 보좌관이 놀라서 트루디 대공을 불렀다. 트루디 대공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왜 그러지.”
하지만 트루디 대공은 보좌관에게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전에 작고 통통 튀는 것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아버지!”
보좌관의 등 뒤에서 오드리아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둔탁한 소리와 함께 트루디 대공의 의자가 부러졌다.
트루디 대공은 테이블에 올려놓은 팔에 힘을 주어 넘어지지 않았지만, 의자는 이미 부서진 채 바닥을 뒹굴었다.
“여, 여긴 어떻게…….”
걸어왔겠지, 어떻게 여길 왔겠어. 이건 멍청한 말이다. 트루디 대공이 질문을 바꿨다.
“갑자기 여긴 왜…….”
자신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건지 물어보려던 트루디 대공이 멈칫했다. 다짜고짜 왜 왔냐니, 그건 너무 매정하지 않을까. 그 말에 오드리아가 상처받으면 어떡하지.
역시, 일단 웃으며 인사를……. 트루디 대공의 머릿속에서는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아, 아니 그것도 아니라, 어서 와?”
누가 봐도 트루디 대공은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최근 메마른 얼굴로 감정 변화가 전혀 없었던 트루디 대공에게서 처음으로 나온 극적인 감정 표현이었다.
트루디 대공은 여전히 자신이 무슨 말을 뱉는지 몰랐다. 의미 없는 말이 허공에 흩어졌다.
“잠시 괜찮으신가요?”
어색한 상황에서 오드리아만이 활짝 웃으면서 트루디 대공의 말에 대답했다. 오드리아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뻔뻔해지기로 했다. 그리고 거침없이 트루디 대공을 향해 다가갔다.
“……!”
트루디 대공은 전쟁에서 단 한 번도 뒤로 물러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드리아가 거침없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럴수록 오드리아는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돌격하는 영애와 도망치며 당황하는 대공이라니. 어느 순간부터 보좌관들은 이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물론, 나중에 트루디 대공에게 추궁을 당하지 않게 겉으로는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사실 오드리아 역시 긴장하고 있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이 모든 것은 앞으로 그녀가 꺼낼 말 때문이다.
오드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트루디 대공을 빤히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트루디 대공이 시선을 피할 정도로. 오드리아가 머뭇거리지 않고 한 번에 내뱉었다.
“저 부탁이 있어요!”
“부탁……?”
현관에서 집무실까지 달려오는 길, 오드리아가 고민 끝에 내린 방법은 ‘부탁하기’였다.
오드리아에게 부탁이란 어려운 것이다. 그녀에게 부탁이 어려운 것은 조건이 없기 때문이다.
조건이 있는 것은 서로 주고받을 것이 있는 거래에 불과했지만 조건 없는 부탁이란 것은 결국, 응석을 부리는 것이다.
응석이라니, 그녀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행위였다. 벌써부터 팔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부탁이라고……?”
왠지 트루디 대공의 목소리는 묵직했다. 목소리가 살짝 울렸다. 오드리아의 갑작스러운 선언과도 같은 외침에 처음엔 당황하던 트루디 대공이 그녀의 말을 음미하며 곱씹었다. 먼 허공을 바라보던 트루디 대공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와 오드리아를 향했다.
“네!”
“…….”
트루디 대공이 오드리아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지 눈이 빛나는 것 같기도 했다.
“저 오필리아 숍을 가지고 싶어요.”
오드리아가 외쳤다. 그 말을 하는 모습이 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당당했다.
트루디 대공이 침묵했다. 그에 그 모습을 지켜보는 보좌관들이 더욱 긴장했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은 오드리아의 눈을 빤히 보더니 씨익,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오필리아 숍, 저 주세요!”
오드리아가 다시 한번 외쳤다. 트루디 대공에게 응석을 부린다는 것, 그것을 망설인 것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은 오드리아 트루디의 몸을 빌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육체는 어쩔 수 없지만, 그녀의 가문과 그로 인한 모든 권한은 성인이 될 때까지만 잠시 빌리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어차피 성인이 될 때까지 공작가의 영애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온전한 오드리아 트루디가 되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오드리아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트루디 대공이 오드리아의 말에 바로 답했다. 짧지만 단호한 말이었다.
“사 주마.”
사실 트루디 대공은 오드리아의 말에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답했다. 깊이 생각해 봤자 어차피 대답은 같을 것이다. 오드리아가 원하는 이상, 오필리아 숍은 그녀의 것이다.
“감사해요!”
트루디 대공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지 안 들어줄지 걱정했다.
그런데 트루디 대공이 망설임 없이 대답하자 가슴 언저리가 뭉클했다.
“고작 그런 걸로.”
트루디 대공이 갑자기 그의 큰 손으로 오드리아의 얼굴을 가렸다.
“……?”
그가 손을 펼치니 오드리아는 앞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저어…… 앞이 안 보이는데요?”
하지만 트루디 대공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그녀가 손가락 사이로 어떻게든 트루디 대공을 보려고 했지만 그의 손이 워낙 커 실패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요리조리 눈동자를 굴려 보는데.
‘보인다.’
트루디 대공의 중지와 약지 사이에 약간의 틈이 벌어져 있었다. 오드리아가 숨을 쉴 수 있게 손이 살짝 떠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주 작은 틈이라서 자세히는 보이지 않지만 트루디 대공의 얼굴이 살짝 보였다.
‘대체 왜 이러지?’
오드리아가 오필리아 숍을 가지고 싶다고 하자 트루디 대공은 분명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것으로 트루디 대공의 기분이 풀린 줄 알았는데, 갑자기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바위처럼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올려다본 오드리아는 곧 눈을 질끈 감았다.
손가락 틈새는 작았지만 트루디 대공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어서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트루디 대공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으아…… 어떡하면 좋아!’
오드리아의 얼굴 역시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어느새 그와 마찬가지로 얼굴이 잘 익은 딸기처럼 빨개졌다.
“크흠…….”
오드리아가 자신의 얼굴을 봤을 줄은 꿈에도 모르는 트루디 대공이 헛기침을 하며 손을 내려놓았다.
“오필리아 숍은 곧 정리해 주마.”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 말하는 트루디 대공의 모습에 오드리아도 한 발 물러나며 인사했다. 사실, 부끄러워하는 트루디 대공의 모습에 오드리아도 부끄러워졌다.
“……그래.”
트루디 대공이 아쉬움이 흘러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오드리아를 붙잡을 수 없었다. 이미 트루디 대공은 오드리아의 얼굴을 보자 진정됐던 마음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해서.
‘여기서 이상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트루디 대공이 꾹 참고, 오드리아에게 인사를 해 주었다. 오드리아가 문 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오드리아가 자리에 멈춰 선 채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다다다, 트루디 대공을 향해 다시 달려왔다.
갑자기 오드리아가 그의 팔을 꼭 붙잡았다.
“왜, 왜…… 그러지……?”
오드리아는 당황한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각하께서…… 제 아버지라서 너무 다행이에요.”
배시시, 오드리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좋아요.”
“……!”
쨍그랑! 순간 어딘가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지켜보고 있던 보좌관들은 동시에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그럼 저 진짜 가 볼게요!”
오드리아는 그대로 집무실을 나갔다.
“…….”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완전히 간 것이다. 하지만 오드리아가 자리를 떠난 후에도 트루디 대공은 한참을 꼼짝하지 않았다. 딱딱한 바위가 된 것처럼 그대로 굳어 버렸다.
‘미친.’
트루디 대공은 목이 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건, 레이첼이 있을 때도 느껴 보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트루디 대공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상에 저런 존재가 진짜로 있다니.’
* * *
오드리아는 집무실을 나서자마자 페이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는 제레미아가 직접 부른 주치의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다.
“페이지. 괜찮아?”
“타박상이 심하긴 하지만 치명적인 부상은 없어서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오드리아의 걱정에 치료를 마무리하던 주치의가 말했다.
“다행이야.”
그제야 오드리아가 안심했다.
“당분간은 여기서 머무르면서 회복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오드리아의 부탁으로 페이지를 살피던 제레미아가 말했다. 그의 말에 오드리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여기서 더 이상 폐를 끼칠 수가…….”
페이지가 당장이라도 이불을 걷고 일어나려고 했다.
“페이지. 여기서 제대로 치료받고 좀 쉬도록 해. 지금 오필리아 숍으로 돌아가는 게 더 위험해.”
“…….”
오드리아의 단호한 말에 페이지가 고개를 떨궜다.
“걱정하지 마. 오필리아 숍은 괜찮으니까.”
“……감사합니다.”
페이지가 오드리아를 향해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 * *
트루디 대공은 순식간에 오필리아 숍을 장악하고 에이미와 노엘을 비롯하여 노예 시장에 관련된 자들을 모두 붙잡았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수많은 종이들이 쏟아졌다. 그 안에는 두 사람이 그동안 저지른 오필리아 숍의 비리와 세금 탈루, 노예 시장의 불법 운영에 대한 전방위적인 자료가 들어있었다. 에이미와 노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불법을 많이도 저질렀더군.”
트루디 대공이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법은 지켜야지.”
트루디 대공은 제국법만큼은 엄격하게 준수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거리끼지 않는 만큼 철저하게.
“심지어 처음부터 이곳의 주인이 아니었더군.”
“아, 아닙니다……! 원래 주인은 제 언니입니다. 언니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등지는 바람에 제가 이어서 운영하고 있었던 겁니다.”
에이미가 핏대를 세우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트루디 대공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오필리아 숍을 조사했을 때 가장 처음 접한 정보가 원래 주인에 관한 것이었다.
숍의 진짜 주인은 얼마 전 세상을 뜬 마담 오드리아라는 여성이었다. 오드리아와 같은 이름에 두 사람에 대한 적의가 더욱 타올랐다.
“죽은 사람을 이용해서 숍을 차지하다니.”
마담 오드리아의 죽음은 사고사였다. 하지만 시기와 정황이 그건 사고가 아니라 타살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미 모든 것이 정리된 후였다. 살인이라고 할지라도 이제는 증거가 없었다.
‘불쌍한 여자군.’
보좌관에게 그녀에 대해 보고받았을 때, 트루디 대공은 오랜만에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게다가 선물을 이 꼴로 만들다니.”
트루디 대공이 오필리아 숍을 둘러보며 혀를 찼다. 오필리아 숍은 이전의 화려했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대대적인 정비가 필요할 것 같았다.
“여기를 망친 대가를 치러야겠지.”
노엘과 에이미를 향해 말했다. 대답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트루디 대공은 그만큼의 가치를 받아 내고 말 것이니까.
“오필리아 숍을 우리 딸에게 선물로 줘야 하니 한 번에 갚게 해 주지.”
트루디 대공이 마치 자애로운 것처럼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갚을 수 있는 건 그 몸밖에 없겠군.”
그의 신호와 동시에 기사들이 에이미와 노엘을 붙잡고 지하로 데려갔다.
지하를 완전히 정리하기 전, 마지막 노예 시장이 열렸다. 그리고 이번의 상품은 노엘과 에이미였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희는 노예가 아닙니다!”
“왜, 분명 그대들이 말하지 않았나.”
노엘과 에이미가 악에 받쳐 따졌지만 돌아오는 것은 트루디 대공의 조소뿐이었다.
“노예를 파는 게 아니라 필요한 인력을 찾아주는 거라고. 이제 그대들 역시 실업자가 되었으니 그대들도 일자리를 찾아야지. 안 그런가.”
트루디 대공이 섬뜩하게 웃으며 말했다. 에이미와 노엘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아니면 내가 고용해 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보좌관은 확신했다. 지난번, 에이미와 노엘이 그 말을 했을 때 트루디 대공이 두 사람의 처분을 보류했던 것은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다는 것을.
“경매를 시작하지.”
트루디 대공의 신호와 함께 노예 시장의 열기는 뜨거워졌다. 사람을 유혹하고 다루는 법을 아는 에이미와 비상한 두뇌를 가진 노엘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그런 것 따위에는 관심 없었다. 오로지 아름다운 에이미와 노엘의 외모에만 관심을 가졌다. 경매는 점점 더 치열해졌다.
결국, 노엘과 에이미는 엄청난 돈을 벌어 상인에서 귀족이 된 남작가의 귀부인에게 팔렸다. 그녀는 가학적인 취미를 가진 것으로 유명했고 그곳에서의 생활은 결코 평탄하지 못할 것이다.
* * *
오필리아 숍에 노예로 팔기 위해 잡혀 있던 자들이 모두 풀려났다.
“대공 각하께서 그들에게 일정의 보상비를 챙겨 주셨습니다. 별 탈 없이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다행이다.”
메릴의 말에 오드리아가 안심하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곳에 있었던 모두를 일일이 챙길 수 없어 걱정이었는데 그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아이는 잘 지내고 있나.’
모두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으니 노예 시장에서 제레미아에게 부탁해 구한 소년이 떠올랐다.
저택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얘기만 전해 듣고 아직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가 볼까?’
그때, 트루디 대공이 그녀를 찾아왔다.
“지금 같이 좀 갔으면 하는데, 괜찮니?”
트루디 대공이 먼저 이렇게 제안한 적은 처음이었다.
“……네!”
오드리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어디를 가는지는 모르지만 노예 소년은 외출하고 돌아와서 만나도 되니까.
소년을 만나는 게 또 한 번 뒤로 밀려났다.
트루디 대공이 오드리아와 함께 도착한 곳은 오필리아 숍이었다.
‘여긴 왜 온 거지?’
갸우뚱하면서도 트루디 대공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약속한 대로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트루디 대공은 오필리아 숍에 얽혀있는 문제들을 순식간에 해결하고는 별거 아니라는 것처럼 오드리아에게 선물했다. 이제 오필리아 숍은 완전히 그녀의 것이 된 것이다.
“선물이니 한번 구경하겠니.”
트루디 대공이 태평하게 제안했다. 오드리아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네.”
씩씩하게 대답한 오드리아는 곧 새롭게 변한 오필리아 숍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에게 선물하기 위해 새롭게 단장한 오필리아 숍은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놀이터가, 진심이었어?’
선물 포장한 것처럼 문 앞에 크게 걸려 있는 리본 장식에도 놀랐지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오드리아는 난감해졌다.
오드리아의, 오드리아를 위한, 오드리아에 의한 오필리아 숍으로 단장한 내부는 오드리아를 위한 것들로만 가득 차 있었다.
‘여긴 키즈숍이 아닌데…….’
어느새 오필리아 숍은 열 살인 오드리아의 눈높이에 맞춘 전용 놀이터가 되어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지?’
싫어하는 티를 내면 분명 실망해서 삐칠 텐데. 오드리아는 난감했다. 그런데 트루디 대공의 눈빛은 잔뜩 기대하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와아…… 너무 좋아요…….”
오드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일단, 트루디 대공에게 맞장구를 쳐 준 뒤 생각하자. 오드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거 이제 제 거죠?”
“그래. 여기 있는 건 전부.”
오드리아의 물음에 트루디 대공이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죠?”
“당연하지.”
“그럼 구경 좀 하고 올게요!”
“그러렴. 같이…….”
트루디 대공이 같이 구경하자고 말하려고 하자, 이를 눈치챈 오드리아가 먼저 선수 쳤다.
“그럼 다녀올게요!”
오드리아는 씩씩하게 돌아서 안쪽으로 향했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지금 뒤를 돌아보면 실망한 트루디 대공이 축 처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을 보면 흔들릴 것이다.
오드리아는 앞만 보며 뛰어갔다. 마음속으로 당장 바꿔야 할 것들을 정리하면서.
‘싹 다 바꿔야겠어.’
오드리아의 발길이 멈춘 곳은 사무실이었다. 과거에는 오드리아가, 얼마 전까지는 에이미가 사용하던 곳.
오드리아가 사무실에 들어왔다. 이곳에는 오드리아만 알고 있는 비밀 공간이 있었다.
오드리아는 책상 앞으로 갔다.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는 각종 서류 뭉치가 있었다. 하지만 오드리아의 볼일은 서류 뭉치가 아니었다.
그것들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첫 번째 서랍에는 숨겨진 공간이 있었다. 그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판을 꺼내면 오드리아가 남겨 놓은 종이가 있었다.
오드리아가 그 종이를 펼쳤다. 종이는 한 곳에 대해 알려 주고 있었다. 종이가 제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확인한 오드리아는 몸을 돌려 책상 뒤에 있는 책장을 바라보았다.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을 밀어내면 나오는 벽 사이에 있는 작은 틈 사이를 누르면 한 칸 정도 크기의 공간이 나온다.
그곳에 오드리아의 비밀 금고가 있었다. 책상 서랍에 있던 종이는 이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철컥, 철컥.
오드리아는 간단하게 금고를 열었다.
“…….”
하지만 그 안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그녀의 유서 역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역시 여기 있던 걸 에이미가 찾아냈던 거구나.”
금고 안에 있던 금괴를 차지하고 유서는 감쪽같이 없앴을 것이다.
‘혹시나 내게 무슨 일이 일이 있을까 봐 준비해 놨던 건데.’
그녀는 자신이 부재할 경우를 대비해 유서를 써서 보관했다. 결국, 그것도 소용이 없었지만.
“이제 전부 돌려놔야지.”
오드리아는 다시 금고를 닫고 책장 앞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을 원래 있던 대로 정리한 후, 문을 열어 가장 근처에 있는 고용인에게 페이지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찾으셨습니까.”
“응.”
페이지는 곧바로 사무실로 왔다. 그녀는 초췌한 모습이었다.
‘밥 좀 잘 챙겨 먹지.’
오드리아는 페이지가 걱정됐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페이지에게 해야 할 중요한 말은 따로 있었다.
“일단 자리에 앉아.”
“네.”
페이지는 하루하루 말라 간 것처럼 얼굴이 핼쑥하고 온몸에 기운이 없었다. 아마 오필리아 숍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여기가 그렇게 소중해?”
오드리아의 물음에 페이지가 과거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저는 가난한 집안의 네 번째 아이였습니다. 도저히 먹고살 방법이 보이지 않자 부모님은 고민 끝에 저를 다른 곳으로 보내기로 하셨습니다. 그때 마담 오드리아가 우연히 저를 발견하시고는 손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
“이곳, 오필리아 숍에는 저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곳을 잃으면 또다시 가난에 못 이겨 가족 중 누군가를 버려야만 하는 생활로 돌아가야 합니다.”
페이지는 오드리아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말을 풀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그녀가 말하는 사연을 모두 알고 있었다. 과거 오필리아 숍을 막 시작했을 때 오드리아가 직접 고용한 사람들이었으니까.
“페이지.”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오드리아가 그녀를 불렀다.
“앞으로 이곳은 페이지가 맡아서 운영해.”
“네?!”
페이지가 깜짝 놀라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처음부터 이렇게 할 생각이었다.
“운영 및 관리는 물론이고 인사까지 전부.”
“제, 제가요?”
갑작스러운 말에 페이지가 크게 동요했다.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자신이 오필리아 숍을 책임지다니.
“하지만 이제 이곳은 오드리아 님의…….”
“내 거지.”
오드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공작가가 아닌 내 거야.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 내 거.”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말처럼 들리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오필리아 숍을 망치든 다시 살리든, 트루디 대공의 말처럼 놀이터로 사용하든 오드리아의 마음대로였다.
“나는 여길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어.”
“…….”
“하지만 날 봐.”
페이지가 오드리아의 말에 이끌리듯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나는 아직 어린 데다가 공작가의 레이디야.”
“…….”
“그런 내가 직접 여길 운영할 수는 없잖아?”
페이지는 그제야 이해했다. 오드리아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우선 어렸고 공작가의 영애였다. 그런 오드리아가 직접 오필리아 숍을 운영한다는 것은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평소에 원하던 대로 하면 돼.”
“……네.”
“그래도 매달 한 번씩은 보고하러 찾아와.”
매달 한 번씩 찾아와 보고하라는 것은 오필리아 숍을 어떻게 운영하는지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오드리아가 신경 쓰지 않아도 페이지는 오필리아 숍을 그녀만의 스타일로 잘 이끌어 갈 것이다.
오드리아는 그런 핑계로라도 페이지를 자주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오드리아가 만족스럽게 입술을 끌어올렸을 때였다.
“……감사합니다.”
“……!”
페이지가 결국 참지 못하고 양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물을 쏟아 냈다. 그녀는 마담 오드리아가 죽고 그녀의 동생들이 오필리아 숍을 차지했을 때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자기라도 오필리아 숍을 지켜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날이 올 거라곤 확신하지 못했다. 단지, 고집을 부리듯이 참고 또 버텼을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이런 날이 오다니.’
페이지의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그럴수록 오드리아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발만 동동 굴렸다. 페이지는 웬만해서는 울지 않는다. 하지만 한번 울기 시작하면 끝장을 본다.
‘한 시간은 울 텐데, 어떡해!’
페이지는 정말 한 시간을 다 채우고 나서야 눈물을 멈췄다.
* * *
오드리아가 트루디 대공과 함께 공작가에 돌아왔을 때였다. 트루디 공작가의 마차 뒤로 작은 마차가 따라왔다. 오드리아는 그 마차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바로 오필리아 숍 전용 마차였다.
작은 마차에서 페이지가 내렸다. 방금 전에 헤어졌는데 왜 여기까지 온 거지? 오드리아가 바라보자 페이지가 다가와 인사했다.
“드릴 것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다시 찾아왔습니다.”
“나한테?”
“네. 각하와 제레미아 님께도 드릴 것이 있습니다.”
페이지의 말에 응접실로 제레미아까지 모두 모였다. 여전히 퉁퉁 부은 눈을 한 그녀가 가져온 것은 부피가 큰 세 개의 상자였다.
“얼마 전에 주문하셨던 겁니다.”
오드리아가 오필리아 숍에 주문한 것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와 함께 방문해서 난리가 났던 날에 3층에서 골랐던 드레스였다.
하지만 그 후 바로 노예 시장 문제로 사달이 났었는데, 대체 어느 틈에 만든 거지?
“이걸 만들었어?”
“주문을 받았으니까요.”
페이지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그러고 보니 페이지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맡은 바만큼은 기한 안에 끝내는 성격이었다.
오필리아 숍의 존폐가 걸렸던 상황에서조차 페이지는 평소대로 주문받은 드레스를 만들었던 것이다.
오드리아는 뒤에 있는 상자를 봤다. 하나는 그녀의 드레스고 하나는 제레미아가 주문했던 옷이다. 그리고…….
“근데 왜 세 벌이야?”
주문한 것은 분명 두 개였을 텐데. 오드리아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페이지가 답했다.
“이것은 각하께서 따로 주문하신 것입니다.”
대체 어느 틈에 주문한 거지. 오드리아는 그 와중에 주문을 한 트루디 대공도, 그걸 그사이에 만든 페이지도 대단한 것 같았다.
“한번 입어 보시겠습니까?”
페이지가 테이블 위에 상자 세 개를 나란히 올려놓은 후 덮개를 차례대로 열었다. 그 안에 있는 옷은 각각 다른 디자인이었지만 색은 통일되어 있었다.
‘이건 완전 커플룩이잖아.’
그것도 무려 세 벌씩이나. 오드리아의 고개가 저절로 떨어졌다. 낯부끄러워서.
페이지가 가져온 옷을 본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빛났다. 그 눈빛을 본 오드리아는 불안함에 떨었다.
얼마 후, 오드리아의 걱정대로 세 사람 모두 페이지가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었다.
세 벌의 옷을 비슷한 느낌으로 만드는 건 생각보다 공을 많이 들여야 하는 작업이었다.
각각의 옷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조화로워야 한다. 똑같기만 하면 촌스러우니까.
그래서 페이지는 세 사람이 나란히 섰을 때를 고려해 패턴은 최대한 단순화하고 같은 계열의 색을 적절히 배치했다.
페이지는 자신이 이 옷을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에 대한 공치사는 생략한 채 그들이 듣고 싶어 할 만한 말을 꺼냈다.
“나란히 계시니 더욱 잘 어울리시네요.”
페이지가 뻔뻔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영업용 미소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세 분의 모습이 마치 명화 속 한 장면 같습니다.”
“그런가.”
트루디 대공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지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역시 뭘 입어도…… 오드리아가 최고야.”
제레미아는 들뜬 목소리로 오드리아를 향해 감탄을 늘어놓으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드리아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차마 먼저 꺼내지는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아는 오드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두 분도 잘 어울리세요.”
그녀의 한마디에 두 사람의 얼굴이 붉어졌다.
결국 오드리아는 민망함을 참으며 어색하게 웃어야만 했다. 사실, 오드리아의 드레스나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옷만 보면 페이지의 센스가 돋보일 만큼 잘 어울리긴 했다.
나란히 있으면 분명 모두의 시선이 집중될 것이 분명했다. 오드리아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체할 것 같았다.
“마음에 드는군.”
트루디 대공은 흡족해하며 말했다. 오드리아와 한 세트처럼 보이는 옷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페이지가 기운을 차린 것 같아서 다행이야.’
오드리아는 한 세트처럼 보이는 옷은 난감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생기가 넘치는 페이지의 모습을 보게 되어 다행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오드리아가 뿌듯해하고 있을 때였다. 페이지가 세 사람을 향해 덧붙인 한마디가 오드리아로 하여금 경악을 넘어 충격과 공포를 느끼게 했다.
“멀리서 봐도 세 분이 가족이란 걸 모두가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불안한 마음에 초조해졌다.
오드리아는 간절하게 그만하라는 신호를 페이지에게 보냈지만 절찬 영업 중인 페이지가 그 신호를 받을 리 없었다.
“그래……?”
역시나, 그녀의 불안이 적중한 듯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솔깃해하는 게 보였다.
“네. 이 모습을 보면 모두가 부러워할 겁니다.”
페이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본 오드리아는 다급해졌다.
“잠깐만…….”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다 함께 나들이 가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페이지는 제발 아니기를 바라던 말을 하며 쐐기를 박았다.
오드리아의 눈이 저절로 돌아갔다. 누가 봐도 맞춘 것 같은 옷을 입고 나들이라니, 상상만 해도 얼굴이 빨개질 것만 같았다.
분명 나들이 내내 구경꾼들이 몰려들 것은 물론이고 제국의 모든 신문 일면에 장식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트루디 공작가의 옷을 만들다 영감을 받아 패밀리 룩 라인을 만들어 볼까 합니다.”
페이지의 말에 트루디 대공이 즉각 반응했다.
“앞으로도 종종 주문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페이지는 천생 사업가구나. 모두가 두려워하는 대공을 상대로 영업을 할 줄도 알고.’
오드리아는 새삼 깨달았다. 그러니 이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걱정 하나를 덜었더니 다른 걱정이 생긴 것 같았다. 오드리아는 부끄러운 옷을 감수할 만큼 얼굴이 두껍지 않았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입술이 귀에 걸릴 것처럼 올라가 있었다.
“하, 하하…….”
오드리아의 어색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드리아에게는 천만 다행스럽게 최근 트루디 대공은 나들이를 할 수 있을 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들이 대신 공작가에서 잊힌 또 다른 존재가 등장했다.
트루디 공작가 전담 화가. 십 년 동안 실력 발휘할 기회를 잃었던 화가는 그동안의 한을 풀 듯이 혼을 실은 작품을 만들었다.
그 그림은 트루디 공작가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복도 끝에 걸렸다.
그 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굳이 그 앞을 지나기 위해 빙 돌아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부러 그 길을 피해 다니는 것은 오드리아뿐이었다.
‘제발 누가 저거 좀 치워!’
오드리아는 정말이지 복도에 떡하니 걸려 있는 그림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고 손발이 오그라들어 괴로웠다. 하지만 그녀의 소리 없는 절규를 들어주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