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48)

chapter 7. 오필리아 숍 (1)

오드리아가 이곳에 온 지도 이제 몇 개월이 지났다. 세 사람은 이제 우연히 마주치면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관계가 되어 있었다.

제레미아가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트루디 대공이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횟수가 줄어들었으니, 나름 많이 좋아진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오드리아는 생각했다. 물론, 여전히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서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이 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더 이상 갑자기 도망치거나 숨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중에서도 엄청난 발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저녁 식사는 세 사람이 함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식사 도중 조용하다 싶으면 한 번 씩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유치한 신경전을 벌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 평화로운 식사 시간이었다.

안정적인 나날이 유지되자 오드리아는 얼마 전부터 그녀의 취미 생활을 시작했다.

후원에서 꽃을 몇 개 꺾어서 삭막했던 방을 조금씩 화사하게 바꿔 나가고 메릴과 옐라에게 부탁해 받은 원단으로 손수건을 만들었다.

처음 손수건을 만들어서 메릴과 옐라에게 하나씩 나눠 주자 무척이나 기뻐하며 감동했다.

“아가씨. 너무 감사해요. 이건 절대 못 쓸 거 같아요.”

“다음에 또 만들어 줄 테니까 편하게 써.”

오드리아가 웃으며 말하자 옐라가 고개를 도리질 치며 말했다.

“아뇨. 괜찮아요. 저는 이걸 고이 간직할 거예요.”

“적당히 해. 아가씨께서 부담스러워하시잖아. 저도 감사해요. 정말 소중하게 사용할게요.”

메릴이 옐라를 말리며 감사 인사를 했다.

사실 두 사람에게 손수건을 주면서 따로 만든 손수건도 있었다.

“하다 보니 만들기는 했는데…… 어떡하지.”

오드리아가 고민하고 있는 손수건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생각하고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만들고 나니 이걸 어떻게 줄지 망설여졌다. 두 사람이 손수건을 사용하는지도 미지수였다.

오드리아의 고민은 며칠 동안 이어졌다. 그러다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가기 직전, 여전히 서랍 맨 위 칸에 놓여 있는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일단 가지고 가 보자.’

그런데 막상 도착하고 나니 오늘은 제레미아가 일이 있어서 외출을 하고 없었다.

평소에는 제레미아가 오드리아에게 이것저것 관심을 보이며 말을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그가 빠지고 트루디 대공과 단둘이 식사를 하다 보니 어색한 시간이 이어졌다.

힐끔. 오드리아가 눈치를 보다가 용기를 냈다. 어색한 분위기를 핑계 삼아 소매 안쪽에 넣어 뒀던 손수건을 꺼내 테이블 아래에서 양손으로 꼭 붙잡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드릴 게 있어요.”

“내게?”

트루디 대공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네……!”

오드리아는 애써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자 트루디 대공은 기대로 일렁였다.

오드리아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지?”

“손수건이에요.”

오드리아가 트루디 대공에게 손수건을 선물했다.

“손수건……?”

오드리아는 여전히 방에서 쉬는 날이면 틈틈이 여러 가지 물건들을 직접 만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만들다가 생각이 나서 한번 만들어 본 것이었다.

“손수건이라고……?”

트루디 대공의 시선이 계속 손수건에 걸려 있었다.

“잘 받아 두도록 하지.”

트루디 대공이 덥석 집었다.

‘이걸 거절할 수가 있을 리가.’

트루디 대공은 넘치는 감격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 지었다.

“고맙구나.”

트루디 대공은 한참을 망설인 끝에 손수건을 펼쳤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손수건이 접혀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천천히, 혹시 찢어지기라도 할 듯 조심히 손수건을 펼쳤다.

손수건에 수놓인 새가 당장이라도 뚫고 날아오를 수 있을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하지만 그보다는 손수건 끝에 작게 표시되어 있는 오드리아의 이름이 더 마음에 들었다. 손수건을 한참 동안 응시하던 트루디 대공이 물었다.

“만드는 거에 관심이 많은가 보구나.”

“네. 좋아해요.”

오드리아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야, 과거에 그녀가 평생 해 온 일이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그녀가 만든 것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는 게 어느새 즐거움이 되어 있었다.

다음 날, 오드리아가 언제나처럼 방에서 여러 가지 원단과 작업 물품을 꺼내는데 메릴과 옐라가 들뜬 얼굴로 들어왔다.

“아가씨. 잠시 가 보셔야 할 곳이 있어요.”

“지금?”

“네. 지금 꼭이요!”

어디기에 그러지. 오드리아는 두 사람을 따라 방에서 나왔다.

“여기예요.”

그녀의 방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있는 방을 가리키며 문을 열었다.

오드리아는 여전히 의아해하면서도 두 사람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이게 다 뭐야?!”

방 안을 살핀 오드리아의 눈이 커졌다. 방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책상과 물건을 만들 때 필요한 다양한 물품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그뿐 아니라 벽 한쪽에는 종류를 알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소재와 색깔의 원단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대공 각하께서 아가씨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하실 수 있도록 작업실을 만들어 주셨어요.”

메릴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에요. 이제 후원으로 가 보세요.”

“후원은 왜?”

“가 보시면 알아요.”

옐라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앞장서 걸어갔다.

오드리아는 메릴과 함께 그녀를 따라 후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옐라가 가는 방향은 오드리아가 자주 가는 곳이 아니었다. 여기는 왜 가는 거지. 오드리아가 아리송할 때였다.

갑자기 옐라가 오드리아의 앞을 가로막아 시야를 차단했다.

그러더니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팔을 펼치며 옆으로 비켜섰다.

“짜자잔-!”

그곳에는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품종의 꽃이 어느새 피어나 있었다.

“와아……!”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경관이었다.

“꽃을 좋아하는 오드리아 님을 위해 각하께서 새로운 품종의 꽃을 들이셨어요.”

“이걸…… 하루아침에?”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작업실을 그렇게까지 만든 것도. 이토록 다양한 꽃들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도.

“네.”

메릴은 당연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지만 오드리아는 여전히 얼떨떨했다.

어제 ‘만드는 걸 좋아하는가 보군.’이라고 말할 때 설마 이걸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하루아침에 뚝딱, 하고 만들 수가 있는지 믿기지가 않았다.

“오드리아 님. 별로 마음에 안 드세요?”

그녀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보이지 않자 메릴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며 물었다.

“그럴 리가. 굉장히 마음에 들어.”

오드리아가 환하게 웃었다. 어제 그 손수건은 아무 의미 없이 내민 거뿐이었는데.

그래도 새로 생긴 작업실은 오드리아의 마음에 쏘옥 들었다.

* * *

제레미아는 최근 굉장히 언짢았다.

얼마 전부터 트루디 대공이 때와 상황을 가리지 않고 보여 주기 식으로 몸에 달고 다니는 것이 있었다.

그걸 처음 발견했을 때 제레미아는 자신이 하필 그날 외출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가뜩이나 아쉬워 죽겠는데 심지어 트루디 대공은 제레미아를 볼 때마다 그것을 자랑했다.

트루디 대공에게 교육을 받기 위해 집무실에 찾아온 지금도 그랬다.

트루디 대공은 괜히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살짝 닦았다. 한쪽 팔을 쓰윽 걷으며 제레미아에게 손수건이 잘 보이도록 했다. 제레미아에게 보이도록 일부러 위치까지 잡으면서.

제레미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뭐로 만들었는지 매우 부드럽군.”

“…….”

“편하고.”

“…….”

“아주 마음에 들어.”

트루디 대공이 제레미아 보란 듯이 극찬하고 있는 손수건은 평범한 천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재료를 이용해 만든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준 것인지가 중요할 뿐.

***

“이걸 대체 누가 만들었을꼬.”

“오드리아 님께서 만드셨죠.”

트루디 대공의 자랑은 몇날며칠 질릴 줄 모르고 이어졌다. 그의 자랑을 가장 많이 듣는 건 그의 보좌관이었다.

처음에는 그도 오드리아가 선물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그런데 트루디 대공의 자랑이 지칠 줄 모르고 이어지자 이제는 영혼 없는 대답이 자동으로 나왔다.

“그래서 그런가. 손수건인데 차마 쓰질 못하겠단 말이야.”

“그렇습니까.”

“이거 한번 보겠나? 손은 대지 말고.”

보좌관이 고개를 앞으로 내밀자 혹시라도 만질까 봐 트루디 대공이 매섭게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저따위가 어찌 그리 귀한 손수건을 만지겠습니까.”

보좌관은 빈정이 상했지만 이것 역시 여러 번 있었던 일이라 익숙하게 넘겼다.

“이거 봐 봐. 어린아이가 넣었다고 하기에는 굉장히 정교한 자수야.”

“그렇습니까? 굉장히 뿌듯하시겠습니다.”

“그럼. 이런 대단한 손수건을 선물받았는데 당연하지.”

트루디 대공은 손수건을 볼 때면 위엄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헤실거렸다. 입이 찢어질 듯한 미소를 보며 보좌관은 내심 걱정했다.

‘설마 밖에서도 이러시는 건 아니겠지.’

보좌관의 걱정은 적중했다. 트루디 대공의 자랑은 저택 안에서 끝나지 않았다.

황궁에 입궁한 트루디 대공은 황제와 독대하고 있었다. 최근 자꾸 불거지고 있는 전쟁 위기 때문에 대화가 점점 무거워졌다.

“기회를 주는데도 계속 무시한다면…… 깨닫게 해 줘야겠죠.”

“무엇을.”

“뻔하지 않습니까.”

트루디 대공이 피식, 조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것은 황제가 아닌 자꾸만 도발하는 적국을 향한 것이다.

“자기들이 뭘 건드렸는지.”

황제는 트루디 대공의 그 한마디에 어쩐지 안심이 됐다. 사실, 지금의 황제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제국이 평안하게 사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다가오는 전쟁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럴 때면 트루디 대공의 존재가 든든했다. 무서울 정도로.

그런데 오늘은 어쩐지 다른 게 자꾸만 걸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눈에 거슬리는 것이, 무언가가 트루디 대공의 몸에서 자꾸만 보였다.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대공, 근데 그거…….”

“무엇을 말하시는 겁니까.”

황제는 트루디 대공의 팔을 가리키며 말했다.

“손목에 달려 있는 그거…… 그게 대체 뭐지?”

“손수건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트루디 대공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트루디 대공은 오드리아가 준 손수건을 손목에 묶고 다녔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보이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굉장히…….”

“……?”

“예쁘지 않습니까.”

“……!”

황제는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불안해졌다. 이런 사람에게 제국의 안녕을 맡겨도 되는 것일까.

* * *

예전에는 한 푼이라도 아껴 보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즐거움이 되었다. 심지어 지금은 그녀가 직접 만들지 않아도 최상품의 물건이 모두 오드리아의 것인데도.

작업실이 생긴 후부터 오드리아는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오드리아 님은 손재주가 좋으시네요.”

“어쩜, 너무 예뻐요.”

메릴과 옐라가 감탄하며 말했다.

오드리아는 사실 무엇을 만드는 것보다 만드는 동안에 집중하는 것이 좋았다.

그동안은 잡다한 생각들이 모두 사라지고 오로지 눈앞에 있는 것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런데 작업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집중하고 있다 보면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는 자신이 운영하던 숍이 떠올랐다.

오필리아 숍.

귀족들의 외양을 최상의 상태로 꾸밀 수 있게 도와주는 숍이었다.

그곳은 요즘 어떤 모습일까?

오드리아가 죽은 후 그곳이 여전히 운영되고 있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다. 오드리아는 그 숍을 그녀의 비서 역할을 하던 페이지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다.

‘페이지가 잘해 줬으면 좋을 텐데.’

더 늦기 전에 확인하러 가고 싶었다. 한번쯤 가 본다고 해서 이상하지 않겠지. 오드리아는 메릴에게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메릴, 오필리아 숍이라고 혹시 알아?”

“어머, 아가씨는 어떻게 아세요?”

메릴은 오히려 그곳을 오드리아가 알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알아?”

오드리아가 다시 한번 물어봤다.

“그럼요, 거길 모르는 귀족가도 있나요. 잘 알다마다요.”

“그럼 거기 아직도 해?”

“아직도라뇨? 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곳인걸요.”

페이지가 잘 운영하고 있나 싶어 오드리아는 안심했다. 오드리아의 질문에 대답하던 메릴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드레스 중에서도 그곳에서 주문한 게 많은걸요.”

“정말?”

“그럼요. 아가씨가 입으실 건데 당연히 최고인 곳에서 해야죠.”

오드리아는 뿌듯했다. 메릴이 눈을 휘어 접으며 오드리아에게 말했다.

“혹시, 거기 가 보고 싶으세요?”

메릴이 오드리아를 바라봤다. 아직 어린아이다. 하지만 열 살, 조금씩 예쁜 것에 관심이 생길 때이기도 했다.

“응!”

오드리아가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랜만에 나들이 갈까요?”

“응. 좋아.”

메릴이 흔쾌히 허락했다. 오드리아는 이때다 싶어서 호기심으로 가득 찬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눈을 반짝였다.

메릴은 오드리아가 점차 새로운 것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반겼다. 아무것도 않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던 예전의 오드리아는 살아 있어도 죽은 사람처럼 보여서 위태로웠다.

오드리아가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지 않도록 메릴은 오드리아가 원하는 것은 최대한 하게 해 주고 싶었다.

오드리아의 머리카락은 너무 눈에 띄었다. 연분홍색 머리카락은 트루디 공작가에만 존재하는 색이다 보니 연분홍색 머리카락의 어린아이라고 하면 오드리아 트루디밖에 없었다.

머리카락 색으로도 충분히 눈에 띄는데 그동안 외출을 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그녀가 갑자기 나타난다면 여러모로 소란이 일어날 것이다.

조용히 외출하고 싶은 그녀는 메릴에게 부탁해 가장 흔한 색 중에 하나인 갈색 가발을 쓰고 그 위에 모자를 썼다.

메릴과 옐라, 두 사람이 함께 방문한 오필리아 숍은 여전히 잘 운영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드리아가 운영했던 오필리아 숍은 3층 건물로 총 열다섯 명의 고용인을 두고 있었다. 그중 페이지는 오드리아의 비서이자 최측근이었다. 그녀가 실질적인 일을 대부분 총괄했었다.

1층은 각종 잡화가 있었고 2층은 드레스와 연회복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3층은 소수의 로열층만 출입할 수 있는 곳으로, 그곳에서 판매되는 것은 완벽한 커스텀 오더였다. 또한, 당시의 오드리아가 직접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경 쓰는 곳이기도 했다.

오드리아가 있는 곳은 1층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트루디 공작가의 영애가 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유모와 시녀를 데리고 온 어느 귀족가의 영애라고 여겼다.

그런데 1층에 있는 고용인들을 대충 눈으로 확인했을 뿐인데도 기존에 있던 고용인들의 수보다 배 이상으로 늘어난 것 같았다.

몇 달 사이에 갑자기 사업 확장을 한 것일까. 오드리아가 숍 내부보다는 그 안에 있는 고용인들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아가씨, 이것 좀 봐 보세요.”

“우와-!”

오드리아가 제대로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감탄을 했다. 물건을 본 건 그다음이었다.

“……이게 뭐야?”

“요즘 유행하고 있는 아동용 구두예요.”

그건 보면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무조건 값비싼 보석을 박아 놓은 무식한 구두였다. 이런 게 유행하고 있다니.

‘사람들 눈이 이상해진 건가.’

숍 내부를 돌아보니 오드리아가 있을 때와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옆에서 메릴이 오드리아에게 보여 주는 물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드리아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건 오드리아가 추구하는 숍의 아이덴티티가 아니었다. 화려한 것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비싸고 화려한 것으로 가득 채우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양한 아름다움, 개성을 추구하면서 원래 지니고 있는 매력을 부각시키는 것.

그렇기에 오필리아 숍에는 제국에서 보기 힘든 물건이 유일하게 있기도 했고, 평민들이 사용할 것 같은 수수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도 있었다.

‘그게 오필리아 숍의 자부심이었는데.’

지금 이곳에는 오로지 과시용일 뿐인 화려하고 값비싼 물건밖에 없었다.

“요즘 많이 변했네.”

“그러게, 오필리아 사장이 바뀌었다더니 여기도 끝났군.”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와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그러게 말이야. 이런 물건들뿐이라면 차라리.”

“마담 졸리의 숍에 가는 게 낫지.”

숍 입구 근처에 서 있는 귀부인들의 대화가 들렸다. 그녀들은 곧 숍을 나갔다.

오드리아는 방금 전의 귀부인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녀들은 오필리아 숍이 아직 자리를 잡기 전부터 그 가치를 알아보고 입소문을 퍼트린 장본인들이었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사람들이긴 했지만 그만큼 자신들의 안목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오드리아가 아무것도 아니었을 때도 그녀를 인정해 주었다.

그녀들이 오필리아 숍에서 고개를 돌렸다. 오드리아가 숍의 내부를 돌아보았다. 아직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시간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페이지를 만나야 한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옆을 보니 메릴과 옐라가 오드리아의 물건을 고르는 데 푹 빠져 있었다. 조용히 빠져나가면 잠깐은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았다.

오드리아가 조용히 페이지가 있을 사무실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아직 사무실까지는 멀었는데도 불구하고 오드리아는 걸음을 멈췄다.

‘이런 곳이 있었나?’

오드리아가 보고 있는 곳은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숍은 지상 3층뿐이지만 지하 공간도 존재했었다.

다만 그곳은 창고로 사용됐기에 고용인들만 드나들었다. 그러니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곳에 고용인이 아닌 것이 확실한 사람들이, 그것도 여럿이 지하로 내려가는 것을 몇 번이나 목격했다는 것이다.

‘뭐지?’

오드리아는 사람들 속에 섞여서 지하로 내려갔다. 사람들은 각자 대화를 나누는 데 정신이 팔려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그녀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드리아는 그 사람들의 대화를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얼핏 들은 것이 있었다.

“오늘 얼마까지 생각해?”

“은근 중독성이 있다니까.”

“괜찮은 물건이 있었으면 좋겠군.”

오드리아는 대화의 단편들을 모으며 생각했다. 지하에서도 뭘 파는 걸까?

‘하지만 대체 뭘?’

오드리아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지하에 내려간 순간 모든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서들 오십시오!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날이 아닙니다!”

오드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하는 이미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오드리아는 지금 펼쳐진 게 무슨 상황인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 역시 어릴 적 팔려 갈 뻔한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극적으로 도망쳤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은 인력 시장이라는 거짓 명분으로 위장된 노예 시장이었다.

그것도 경호원들의 통제도 없이 사람들이 쉽게 이곳 지하에 드나들고 있었다.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렇게 공공연히 운영할 수 있는 거지?

‘그래도 괜찮다는 확신이 있는 건가.’

오드리아의 눈이 차분하게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노예 시장은 이미 한창 진행 중이었다. 무대 위 노예의 주인이 확정되면 사람들은 다 같이 함성을 질렀고, 새로운 노예가 나타날 때는 상대의 외관을 보고 환성을 지르거나 야유하며 그들의 값을 저울질했다.

오드리아는 지금 이 장소, 이 상황, 이 분위기, 모든 것들이 전부 불쾌했다.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가 지하를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등 뒤에서 사람들의 커다란 환호성이 들렸다.

“……?”

돌아보니, 노예 시장의 진행자가 한 소년의 머리채를 잡아끌면서 청중들에게 소개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번에는 아직 열다섯밖에 안 된 소년입니다! 어떤 용도로 쓰냐에 따라서 가치가 천정부지로 높아질 물건입니다.”

“그래서 얼만데!”

성질 급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하, 진정하시죠.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1파운드부터 가겠습니다!”

노예 시장 진행자의 높고 경쾌한 목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그의 경쾌한 목소리 때문에 오드리아의 얼굴은 점점 심각해져 갔다.

“주인을 알아볼 줄 아는 놈이냐!”

방금 전에 들렸던 성질이 급하고 왠지 포악할 것만 같은 목소리가 다시 한번 사람들 틈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하, 먼저 보여 드리겠습니다.”

청중들을 향해 웃으며 말한 진행자의 얼굴이 잠깐 어두워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어서 인사하거라. 발밑에 고개를 조아려야지!”

노예 시장의 진행자가 소년의 고개를 청중들을 향해 누르며 말했다. 하지만 멀리서 봐도 느껴졌다. 소년이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는 것이.

“뭐야, 교육도 똑바로 안 시키고 데려온 거야!”

“우리가 우스워?!”

소년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의 항의와 욕설로 뒤덮였다. 사람들의 비난이 강해질수록 진행자의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잡고 있던 소년의 머리채를 바닥을 향해 집어던졌다.

“인사하라니까!”

퍽-! 진행자가 거침없이 그의 복부를 걷어찼다.

“……읏.”

소년의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진행자가 그의 머리카락을 다시 한번 쥐어뜯듯이 붙잡아 위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눈 밑까지 자란 머리카락 사이로 소년의 눈빛이 살짝 보였다.

소년은 제대로 씻지도 않고 나온 것인지, 온몸이 거무튀튀했다. 게다가 풀어헤친 머리카락은 짚보다 더 엉키고 질겨 보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드리아는 소년에게 더욱 집중했다. 그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검은 재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은 모습에서 눈만큼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본 순간 오드리아는 한눈에 알아봤다. 동류. 저 소년과 오드리아는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오드리아는 불쾌한 이 장소에서 당장이라도 떠나려고 했지만, 소년을 본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일단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기로.

“뭐야! 이런 놈을 대체 뭘 보고 사란 거야! 이딴 불량품을!”

소년이 나오고부터 내내 소리를 냈던 남성이 소년이 있는 무대 위로 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온갖 큰소리와 욕설을 내뱉던 남성은 걸음걸이마저 뒤뚱거려야 할 만큼 배가 튀어나와 있었다.

오드리아는 순간 소년이 저 배불뚝이 남성에게 팔려 가면 그대로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소년의 몸에 손을 대려다 말고 “윽!” 소리를 지르더니 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남성이 코를 막으며 진행자에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윽. 이렇게 냄새나는 애를 누가 그 가격에 사.”

“하하. 이놈이 씻는 걸 거부해서. 하지만 데리고 가서 씻겨 보면 충분히 납득하실 겁니다.”

진행자가 소년을 노려보다가도 배불뚝이 남성에게는 굽실거리며 답했다.

소년의 몸에서는 악취가 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흙탕물에 구르면서도 보름 동안 제대로 씻지도 않았으니까.

그는 이 무대에 세우기 전에 그를 씻기려는 사람들에게도 반항하며 씻기를 거부했다.

“그런 말에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이미 진행자의 말에 속은 적이 있는 듯 남자는 불신 가득한 얼굴이었다. 진행자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드러났다. 이대로 있다가 소년은 팔리지도 않은 채 처치곤란이 될지도 모른다.

진행자가 번뜩 좋은 생각이 났는지 소년의 긴 머리카락을 쥐어 잡고 자신의 팔에 한 바퀴 감았다. 그대로 소년의 머리카락을 끌어올렸다.

소년은 강제로 얼굴이 천장을 보도록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놈이 지금 꼴이 이래서 그런데 일단 한번 씻겨만 놓으십시오.”

진행자가 소년의 몸에서 나는 악취에 머뭇거리는 것도 잠시였다. 그는 자신의 소매로 소년의 얼굴을 사정없이 닦아냈다.

그의 코가 눌리든 입술이 찢어지든 상관없이, 흙과 먼지로 뒤덮인 그의 얼굴을 닦아 내는 것에만 혈안이 되었다.

“으아악!”

그러다 진행자가 팔을 붙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소년이 진행자의 팔을 엄청난 힘으로 물어 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경악에 가득 찼다.

“너 이 새끼!”

결국, 이 안을 지키는 경호 인력 둘이 나타나서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붙잡는 모든 이들을 물겠다는 심산인지 무서운 기세로 날뛰었다.

“저놈 얼른 치워!”

“그러게, 어떻게 저런 걸 데리고 와!”

사람들의 격렬한 항의가 이곳저곳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물린 것처럼 격노하고 있었다.

“……!”

하지만 오드리아가 놀란 것은 다른 이유였다. 명색이 오필리아 숍의 주인이자 제국 최고의 안목이라고 불리던 오드리아였다. 오드리아는 제대로 지워지지 않은 소년의 얼굴을 보고 알아차렸다. 그의 진짜 외모를.

오드리아는 잠시 넋을 잃었다. 흑발에 검은 눈동자, 눈 사이에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유려하게 이어지는 콧날 아래로 떨어지는 입술.

‘어쩌면 제레미아보다…….’

더 아름다운 외모일지도 모른다. 오드리아의 시선이 끌려가는 소년을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그 순간 오드리아와 소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뭘 봐.’

소년의 입이 분명하고 단호하게 오드리아를 향하고 있었다.

“앗, 미안.”

당황한 오드리아는 저도 모르게 사과를 하고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왠지 자신이 잘못한 것 같았다.

“…….”

오드리아가 다시 고개를 돌려 소년이 있는 쪽을 바라보자 이미 소년은 무대 밖으로 내려간 후였다.

“에잇. 기분 잡치기나 하고. 다른 놈 데려와 봐. 제대로 된 놈으로!”

배불뚝이 남성이 더 강하게 말했다.

“그래! 다른 놈을 데려와!”

그것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남자의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소년이 사라짐과 동시에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다시 한번 들끓기 시작했다.

진행자는 소년에게 물려 팔목을 다쳤지만 사람들의 기세가 더 흉흉해지기 전에 얼른 다른 사람을 데려왔다.

“…….”

분위기는 새로 나온 노예에게 쏠렸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방금 전 보았던 노예 소년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무대 뒤를 볼 수 있을까 싶어서 기웃거리는데,

“흐엑!”

둔탁하면서 께름칙한 느낌의 손이 오드리아의 어깨 위에 올라왔다.

“꼬마야. 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들어왔니.”

산만한 덩치라는 표현에 어울리는, 마치 겁을 주기 위해 몸을 만든 것 같은 무시무시한 인상의 남자가 오드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들키지 않은 것이 용한 것이다. 노예를 사고파는 이곳에 노예도 아닌 어린 여자애가 혼자 있는 것은 눈에 띄었다.

“보아하니 귀한 집 영애인 것 같은데.”

오드리아가 대답을 하지 않자, 남자가 험악한 얼굴을 점점 가까이 들이 댔다. 오드리아의 얼굴을 당장이라도 삼킬 것처럼 괴이한 미소를 지으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니면 귀한 집안의 장난감인 건가.”

장난감, 그것은 제멋대로에 하고 싶은 건 다해야 직성이 풀리는 귀족가의 어린 자제들을 위해 곁에 두는 비슷한 또래의 노예를 말한다.

장난감이 된 어린 소년, 소녀들은 끔찍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실험 대상이 되기도 하다가 질리면 버려졌다.

버려진 장난감이 노예상에게 잘못 걸리면 싼값으로 다른 곳에 다시 팔리기도 했다.

한마디로, 지금 이 남자는 오드리아가 버려진 장난감이라면 여기서 즉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팔아넘길 심산이었다.

그런데 오드리아가 전혀 무서워하지 않자 방금 전까지 음흉한 미소를 짓던 남자의 얼굴에 조금씩 당황이 깃들기 시작했다.

남자는 어린 소녀가 바로 겁을 먹고 눈물 콧물을 흘리며 살려 달라고 할 줄 알았다. 물론, 보통의 어린아이라면 그의 생각대로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이보다 더 험악한 얼굴을 많이 봤었다. 이런 얼굴에 협박당하는 것은 익숙했다.

“이런 위험한 곳에 함부로 오면 안 되지.”

그 모습에 남자는 오히려 오기가 들어서 더더욱 험악한 얼굴을 하며 어린아이가 무서워할 법한 말을 이었다.

“겁이 없는 건가. 아니면 뭘 모르는 건가.”

남자의 얼굴이 오드리아를 위협하듯 좀 더 바짝 다가왔다.

“무사히 돌아가고 싶으면.”

“…….”

“안 그래?!”

“…….”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위협했다. 하지만 남자가 무슨 말을 해도 오드리아는 무덤덤했다. 겁먹은 기색 없이 남자를 빤히 보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남자였다.

사실, 귀족의 장난감이니 뭐니 하는 것은 모두 겁을 주기 위한 말이었다. 소녀는 틀림없는 귀족 영애였고, 이곳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조심해야 했다. 남자가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데 오드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갈게요.”

“……어?”

기습적으로 내뱉은 오드리아의 말에 순간 남자에게서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곧바로 눈에 힘을 주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여기서 본 것도 말하지 않을게요.”

“……!”

오드리아는 남자가 원하는 말을 해 줬다.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러면 되죠? 그러니까, 이거. 내려요.”

오드리아가 남자에게 붙잡힌 어깨를 가리켰다.

“아!”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치웠다. 어린 소녀의 말 한마디에 깜짝 놀라서 물러난 꼴이 되었다.

“이게!”

남자가 큰 손을 오드리아를 향해 번쩍 들었을 때였다. 오드리아가 재빨리 뒤로 돌아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저게 진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오드리아는 그대로 달렸다.

‘어쩌다 이곳이 이렇게 된 거지.’

계단 위를 달리면서도 오드리아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숍이 이런 더러운 장사에 이용당하고 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건지 알아 봐야 했다.

‘빨리 페이지를 만나야 돼!’

오드리아는 이대로 페이지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그런 오드리아의 뒤를 남자가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상태였다. 귀족은 함부로 건들지 말라는 주인의 말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괘씸한 어린 것을 이대로 놔두었다가는 이 열기가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계단을 올라 건방진 아이에게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한 여자가 오드리아에게 달려와 품에 넣었다.

“혼자 돌아다니시면 안 됩니다.”

“……!”

오드리아는 의문의 여자에게 꼼짝없이 안겼다.

“어서 가셔야 해요.”

의문의 여자가 오드리아를 끌고 가다시피 데려갔다.

“……?”

처음에 오드리아는 발버둥을 치려고 했지만, 곧 마음을 고쳤다. 자신을 잡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오드리아는 알지 못했다. 자신의 바로 뒤까지 쫓아온 남자의 존재를, 그리고 오드리아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불꽃 튀기는 신경전을 펼친 것을.

이곳은 지하가 아닌 지상 1층의 복도였다. 사람이 자주 드나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인적이 없는 곳 역시 아니었다. 이곳에서 난동을 부리는 순간 사람들은 순식간에 몰려들 것이다.

결국, 남자는 오드리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오드리아를 조심히 품에 안은 채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오드리아를 붙잡고 있던 여자의 걸음이 어느새 멈췄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오드리아에게서 떨어졌다. 그녀는 오드리아와 눈높이를 맞추며 다정하게 말했다.

“조심하셔야죠.”

어린 오드리아에게 눈높이를 맞춘 채 걱정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는 여자. 그녀는 페이지였다. 오드리아가 그녀를 다급하게 불렀다.

“페이지!”

드디어 만났다! 오필리아 숍에 왔을 때부터 오드리아는 줄곧 페이지를 찾고 있었다.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 잔뜩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너도 알고 있는 일이야? 설마 네가 한 짓들은 아니지! 설마 네가 그럴 리는 없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묻고 싶은 말도, 따지고 싶은 말도 많았다. 그래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노예 시장이라니, 어떻게 된 거야.’

그게 가장 중요했다. 오드리아가 페이지에게 물어보기 위해 입술을 열었을 때였다.

오드리아를 가만히 보던 페이지의 눈이 잠시 커지더니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그녀가 전혀 경계심이 없이 웃을 때 나오는 모습이었다.

“저를 아시나요?”

“……!”

오드리아는 아차 싶었다. 페이지가 자신을 알아볼 리 없었다. 페이지가 여전히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은 채 오드리아를 빤히 보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전혀 모르는 영애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의심하고 있지 않았다. 꼼꼼하고 냉정하지만 사람을 대할 때 왠지 바보같이 순수한 페이지였다.

이 상황에 자신이 원래 이곳의 주인이었던 마담 오드리아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게…….”

“……?”

오드리아가 말을 길게 늘이며 마땅한 대답을 찾아 헤맸다. 페이지는 그런 오드리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여기가 어디죠?”

그렇게 열심히 찾은 답이 고작 이거라니, 오드리아는 자괴감에 빠졌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마음의 소리와는 달리 페이지를 향해 어린애 특유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만 깜박거렸다. 웬만해서는 속아 넘어 갈 완벽한 연기였다.

페이지가 그런 오드리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를 꿰뚫어 볼 것 같은 시선이었다. 하지만 곧 반달 눈웃음을 지었다.

“차림을 보아하니 귀족가의 영애 분이신 거 같은데. 시녀와 함께 오셨나요?”

오드리아는 아마 그녀가 자신의 거짓말을 알아차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모른 척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곳의 실질적인 총책임자였다. 아무리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손님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궁금해하지 않았다.

고객이 곤란스러워하는 대답이라면 고용인 역시 모르는 편이 낫다, 라는 오드리아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페이지가 오드리아와 시선을 맞추며 다정하게 말했다.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

“어디서 시녀와 헤어지셨나요?”

페이지가 앞장서려고 할 때였다. 오드리아가 그녀의 옷깃을 살짝 잡았다. 페이지가 돌아봤다. 오드리아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오드리아가 팔을 살짝 흔들었다. 잡아 달라는 제스처였다. 페이지가 눈을 접으며 오드리아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가시죠.”

“응!”

“어디에 있었는지 아세요?”

“그게, 어디였더라…… 여기가 아니었나?”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2층이었다. 그곳에는 당연하게도 메릴과 옐라, 그 누구도 없었다. 오드리아는 괜히 당황한 얼굴을 했다. 왜 여기 없지, 그런 말을 작게 웅얼거리면서.

오드리아는 페이지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기 위해 메릴과 유모가 없는 곳을 말했다.

오드리아는 아직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적당한 핑계로 무엇이라도 알아내야 했다.

“……어디 있지.”

오드리아가 괜히 주위를 둘러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페이지는 어떤 기색도 없이 다정하게 말했다.

“다른 곳으로 가 보지요.”

“응.”

오드리아는 미안한 얼굴을 하며 페이지와 함께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오드리아가 페이지의 눈치를 흘깃, 보면서 슬쩍 말을 꺼냈다.

“근데 숍이 좀 달라진 것 같아.”

오드리아의 말에 페이지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걸 알아보겠어요?”

“응.”

이 정도는 아는 척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 답했다.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페이지는 그 말과 함께 잠시 생각에 빠졌다. 오드리아는 그녀가 다음 말을 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저희 마담도 안목이 남다른 분이셨어요. 한번 본 사람은 잊지 않고, 그 사람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냈죠.”

페이지가 오드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아가씨를 보고 있으니까 그분이 떠오르네요.”

“…….”

“눈빛이 비슷하세요.”

“…….”

페이지가 그렇게 말하며 그리운 눈을 했다. 그녀가 말한 사람이 바로 오드리아였다.

‘역시 페이지가 일부러 그랬을 리는 없어.’

그녀마저도 자신을 배신했으면 어쩌나 불안했는데 그것만큼은 절대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숍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군지, 확인해야 한다. 오드리아가 페이지를 부르려고 할 때였다.

“여기엔 있나요?”

페이지가 물었다. 어느새 1층 매장에 도착한 것이다. 이곳에는 메릴과 옐라가 있다. 여기서마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오드리아가 대답했다.

“응! 아니……?”

대답이 꼬였다. 오드리아 역시 이번만큼은 당황했다. 분명 1층에 있어야 할 두 사람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오드리아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저택으로 돌아간 건 아니겠지?’

순간 불안해졌다. 두 사람이 오드리아를 두고 공작가에 갔다는 건 그녀가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보고하러 갔다는 의미였다.

‘에이, 그러진 않았을 거야.’

오드리아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만약 두 사람이 공작가에 알린다면 공작가는 발칵 뒤집힐 것이 분명했다.

오드리아는 애써 괜찮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여기서 기다려 볼게.”

“그러실래요?”

오드리아가 말했다. 이번에도 페이지는 별다른 말없이 오드리아의 뜻을 존중할 뿐이었다. 순간 오드리아는 생각했다. 차라리 잘됐다고.

“응! 대신 같이 기다려 줄래?”

“얼마든지요.”

페이지가 웃으며 오드리아의 곁을 지켰다.

‘이 기회에 좀 더 물어보자.’

오드리아가 그녀를 불렀다. 그녀의 이름이 아닌 가게의 주인을 뜻하는 ‘마담’으로.

“마담.”

“그냥 페이지라고 불러 주세요.”

하지만 페이지는 ‘마담’이 아닌 자신을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그저 친근하게 이름으로 불러 달라는 뜻이거나 혹은 그녀가 마담이 아니라는, 한마디로 그녀가 오필리아 숍의 주인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오드리아는 왠지 불안해졌다. 그녀가 예상한 대로 후자가 맞을 것만 같아서.

“페이지가 이 숍의 주인이야?”

“저는 이 숍의 주인이 아니랍니다.”

페이지는 웃으며 답했지만 오드리아는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

페이지가 주인이 아니라니, 그럴 리가. 오드리아의 눈이 커졌다. 오드리아의 불안은 점점 확신이 되어 갔다.

“저는 숍에 고용된 사람입니다. 주인은 따로 계시죠.”

“그게 누구…….”

오드리아는 분명, 미리 작성해 둔 유서에도 페이지에게 숍을 넘긴다고 했었다. 비록 자신이 비명횡사했어도 유서대로 이행되었어야 했는데. 그런데 유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럼 지금 여기의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그 사람이 숍을 망쳐 놓았다. 그리고 어쩐지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오드리아는 알 것 같았다.

“그럼 지금 이 숍의 주인은 누구…….”

오드리아가 물어보려고 할 때였다.

“아가씨!”

사라진 오드리아를 애타게 찾고 있었던 메릴과 옐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메릴과 옐라가 달려왔다.

“오셨네요.”

페이지가 그렇게 말하며 한 발 물러났다.

“……!”

오드리아가 그녀를 붙잡거나 할 틈이 없었다. 곧장 메릴과 옐라가 오드리아의 앞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혼자 여기까지 오시면 어떡해요.”

“이렇게 혼자 계시면 큰일 나세요.”

옐라가 그렇게 말하며 오드리아에게 로브를 걸쳐 주었다. 오드리아는 얌전히 있었다. 그녀가 말한 이 거리가 위험한 이유를 이미 두 눈으로 직접 본 후였다.

“이제 돌아가요.”

“다음부터는 저희와 절대 떨어지시면 안 돼요, 아가씨. 네?”

“응.”

결국, 오드리아는 두 사람과 함께 공작가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오드리아 님. 오늘 힘드셨을 텐데 제가 마사지해 드릴까요?”

당황한 나머지 오드리아에게 큰소리를 낸 것이 마음에 걸린 옐라가 말했다. 오드리아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페이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드리아……?”

페이지는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한 아이의 이름이 오드리아라는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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