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48)

chapter 6. 공작가의 금기어

제레미아는 평소 오전마다 연무장에 가서 훈련을 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언제나처럼 들리던 검을 부딪치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대신, 이상한 스킨십의 향연이 펼쳐졌다.

이상한 것은 스킨십을 당한 사람들의 얼굴이 한결같이 일그러지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때?”

제레미아가 아이작의 팔을 잡은 상태로 물었다. 그는 트루디 공작가 소속의 기사로 동갑인 제레미아와 친한 편이었다.

“글쎄요. 괜찮은 것 같은데요.”

아이작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이 정도는 별거 아니라는 듯.

제레미아는 기사들을 상대로 힘을 조절하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어서 다른 기사들의 팔이 엉망이 되었다.

이제는 제레미아와 눈이 마주치지만 해도 도망가려고 해서 그의 훈련을 상대해 주는 사람이 아이작밖에 남지 않았다.

제레미아 다음으로 강골인 그가 인내심을 가지고 상대해 준 덕분에 제레미아는 어느 정도 감을 잡아 가기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불안한 상태이지만.

“그럼 이건. 아파?”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

제레미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아이작의 반응이 못 미더웠다. 그 역시 오랜 시간 훈련으로 다져진 몸이었다. 그와 오드리아의 몸은 전혀 달랐다. 그가 괜찮다는 게 오드리아에게도 괜찮은 걸까.

겉모습만 본다면 그 아이는 살짝만 잡아도 부러질 것처럼 연약해 보였다. 그러니 아이작의 말만 듣고 안심할 수 없었다.

여러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지자 제레미아는 자신도 모르게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이작의 무심한 얼굴 근육들이 꿈틀거렸다.

“으윽!”

아이작이 반대편 팔로 잡혀 있는 팔을 잡으며 고통스러워했다. 제레미아가 마지막에 엄청난 악력으로 그를 잡은 것이다.

“제레미아 님!”

아이작이 제레미아를 향해 소리쳤지만 제레미아는 그의 고통스러운 발악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그럴수록 아이작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져 갔다.

“역시 다른 방법을 찾아 봐야겠어.”

“……!”

제레미아가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그제야 아이작의 팔이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팔이 부어 있었다.

제레미아는 오드리아의 팔이 다 나을 때까지는 힘 조절을 완벽하게 할 생각이었다. 다시는 실수로라도 오드리아를 다치게 하는 게 싫었다.

게다가 다칠까 봐 안절부절못하며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은 더 싫으니까.

제레미아의 연습 상대는 불쌍하게도 그웬이 되었다.

언제나 책상 앞에서 공부만을 해 왔기 때문에 운동과는 거리가 먼 그는 웬만한 시녀들보다 힘이 없었다.

그건 나름 그웬의 콤플렉스였는데 제레미아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적임이라며 훈련 상대를 시켰다.

몇 번인지 모를 고성과 비명이 오간 끝에 제레미아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그웬은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드디어!’

제레미아는 이제 자신이 오드리아를 만지거나 잡았을 때 그 아이가 다치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됐다.”

오랜만에 성취감이라는 것을 느꼈다. 학문도 검술도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는 제레미아였다. 근래에는 무엇을 해도 지루했다.

그런데 지금의 제레미아는 안달이 나 있었다. 조금이라도 오드리아에게 안전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드디어 됐어!”

제레미아가 환호했다.

“오드리아 님께서 오늘 붕대를 푸신다고 합니다.”

“그래?”

심지어 타이밍까지 완벽했다. 이제 오드리아를 보러 갈 수 있어! 제레미아는 망설임 없이 오드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제레미아는 드디어 오드리아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들떠 오드리아의 방에 들어섰다. 그녀는 마침 팔에 하고 있던 보호대를 풀고 있었다.

“……계셨습니까.”

제레미아가 트루디 대공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제레미아가 도착했을 때 트루디 대공은 이미 그녀의 옆에 있었다.

“팔을 접었다 폈다 해 보십시오.”

“……괜찮은 거 같아요.”

오드리아가 자신의 팔을 접었다 폈다 반복하더니 대답했다.

“혹시 통증이 있으십니까.”

“아뇨. 없어요.”

“이제 정말로 괜찮아지신 것 같습니다.”

주치의가 미소를 지으며 제레미아와 트루디 대공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제레미아는 여전히 불안했다. 오드리아는 너무 가냘파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약해 보였으니까.

“확실한 거지?”

제레미아가 미간을 좁히며 주치의에게 물었다.

“네. 괜찮으신 거 같습니다. 다만, 이번에 다친 곳을 다시 다치면 아무래도 한번 약해졌던 곳이다 보니 좋지 않습니다. 앞으로 그 점만 유의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해요.”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주치의는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제레미아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는 오드리아의 부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부상을 몇 번이고 당했었다.

어깨뼈가 완전히 반대로 돌아간 적도, 살이 파인 것을 넘어 무릎 뼈가 드러날 정도로 큰 부상을.

그때마다 제레미아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연고 하나 대충 바르면 된다고 건성하게 대답했었다. 그러고 부상이 다 나으면 언제 다쳤냐는 듯이 날뛰고 다녔다. 대공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두 사람이 오드리아에게는 유난이었다.

‘공작가의 주인들에게 외면당한 영애인 줄 알았는데.’

주치의는 오드리아의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한 번은 사달이 나겠군.’

문을 닫으면서 확신했다. 분명 이때까지 자신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드리아 영애를 공작가의 버려진 막내딸이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오늘로서 그는 확신했다. 버려지기는커녕 지나치게 사랑받는 존재였다.

하지만 자신처럼 곁에서 지켜보지 않는 이상 10년 동안 쌓인 편견을 쉽게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면 분명 언젠가는 오드리아 영애를 향해 무례한 짓을 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볼만하겠군.’

주치의는 피식 웃으며 진료실로 돌아갔다.

오드리아의 팔이 다 낫자마자 제레미아가 오드리아를 찾아왔다. 이 날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희망찬 기대를 품에 안은 얼굴을 하고서.

제레미아는 오드리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녀를 만나러 올 때까지만 해도 바로 자신이 연습한 것을 자랑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막상 오드리아의 팔을 보니, 다치게 한 주제에 이제는 안 다치게 잡을 수 있다고 자랑하려고 하는 게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다.”

결국, 제레미아는 오드리아의 상태를 눈으로 열심히 확인하면서도 막상 다가가지 못한 채 일정 거리 이상 떨어져 있었다.

“이제 괜찮아 보이는구나.”

그때 트루디 대공이 찾아왔다. 아니, 제레미아의 기준에서는 끼어든 것이다.

“오셨습니까.”

“그래.”

못마땅한 인사와 불성실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 역시 무심하게 흘리듯이 대답할 뿐이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오드리아가 있었다.

“팔은 이제 괜찮니?”

오드리아의 팔을 고정하느라 단단히 여몄던 것들이 모두 없어져 있었다. 오랜만에 그녀의 팔이 편해 보였다.

“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에게 여전히 딱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공손했고 그의 눈치를 보는 대답을 이어 나갔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제레미아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을 때었다.

“팔도 다 나았으니 가고 싶은 곳이 있느냐?”

“아…… 후원에 좀 가려고요.”

“후원……?”

트루디 대공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그래도 아직 조심하는 게 좋을 텐데…….”

트루디 대공은 뭐가 불안한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내가 데려다주지.”

“네……?”

트루디 대공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오드리아와 제레미아 모두 깜짝 놀랐다.

“오드리아. 내가 데려다 줄게.”

“힘 조절도 제대로 못하면서 뭘 한다는 거냐.”

트루디 대공의 무시에 제레미아가 울컥했다.

“이제 저도 할 수 있습니다.”

“괜히 억지 부리지 마.”

“억지가 아니라……! 그동안 저 나름대로 훈련했습니다.”

두 사람의 신경전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오드리아는 그 모습을 이제는 덤덤하게 지켜보았다.

오드리아가 다친 내내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대화는 이런 식이었다. 오드리아를 사이에 두고 마치 경쟁을 하는 것처럼 말다툼을 벌이고는 했다.

또다시 두 사람 사이에 낀 오드리아가 남모르게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럼…… 같이 가요.”

오드리아의 한마디로 두 사람의 신경전이 뚝 끊겼다.

“같이……?”

그녀의 한마디에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눈빛이 빛났다.

‘에휴.’

오드리아는 입 안으로 한숨을 머금었다.

“네. 다 같이 가요.”

“……그럴까.”

“할 수 없지. 오드리아가 그렇게 말하는데.”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괜히 퉁명스러운 척 말하면서도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럼 후원에나 가 볼까.”

“그래, 그동안 아파서 좋아한다는 후원에도 가지 못했을 텐데 지금 가 보자.”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연달아 말했다.

“네, 가요.”

오드리아가 눈을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얼굴이 환해졌다.

오드리아 트루디는 보호받아야 할 어린 소녀였지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사이에서 일이 커지지 않도록 중재해야 하는 게 어쩐지 오드리아가 다 큰 두 어른의 보호자가 된 것 같았다.

“오드리아…… 그래도 거기까지는 내가 데려다 주는 게 어떻겠니.”

제레미아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듯 말했다.

“저는 그냥 걸어가도 괜찮…….”

“너도 아무리 훈련을 했어도 아직 스스로 불안할 텐데.”

트루디 대공이 제레미아의 불안요소를 정확하게 지적했다.

“……윽, 알겠습니다.”

제레미아는 분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래, 그럼 가자.”

트루디 대공이 팔을 뻗었다.

“아니, 잠깐만…….”

당황한 오드리아가 팔을 뻗으며 말려 보려고 하는데 그대로 트루디 대공의 품에 쏘옥, 안기는 모양새가 되었다.

“……?”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오드리아는 어리둥절하기만 한데, 그녀를 품에 안은 트루디 대공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럼 이제 가 볼까.”

“후원에 가서는 제가 오드리아를 돌볼 겁니다.”

제레미아는 마지막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했다.

결국, 오드리아는 얼떨결에 트루디 대공의 품에 안긴 채 후원으로 향했다.

‘다친 건 팔이었고 심지어 다 나았는데 어째서 후원까지 안겨서 가야 하는 걸까.’

하지만 오드리아는 굳이 팔과 다리의 역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후원에서 짧은 산책을 즐기는 동안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는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지 한 손으로 가볍게 그녀를 안고 있었다.

꼼지락-.

트루디 대공에게 안긴 채 가만히 있으려니 답답했다. 발과 손을 살짝 움직였다. 그녀가 움직이자마자 트루디 대공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오드리아는 다시 얌전히 있었다.

오랜만에 오는 후원이었다. 오드리아는 후원을 볼 때마다 감동을 받고는 해서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트루디 대공의 품에 안겨 있어서 힘들었다.

꼼지락. 꼼지락.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려다 보니 몸의 중심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럼에도 트루디 대공은 단단하게 그녀를 받쳐 주며 다시 안쪽으로 당겼다.

안 되겠다. 내려가고 싶어.

도저히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오드리아가 트루디 대공의 눈치를 보다가 그의 가슴을 살짝 두어 번 두드렸다.

“왜 그러지.”

트루디 대공이 살짝 고개를 숙여 물었다.

“내려가고 싶어요.”

오드리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트루디 대공이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직은 조심해야 한다.”

트루디 대공은 오드리아를 내려놓을 생각이 없는지 단호했다.

‘그니까, 애초에 제가 다친 건 팔이지 다리가 아니었는데요.’

오드리아가 트루디 대공을 보며 눈으로 말했다. 트루디 대공이 그 말을 알아들었을지 못 알아들었을지는 모르지만.

“저…… 조심히 움직일게요.”

오드리아는 포기하지 않고 트루디 대공을 향해 불쌍한 얼굴을 하며 동그란 눈을 두 번 깜박였다.

깜박깜박-.

“……!”

단 두 번만에 트루디 대공의 단호한 얼굴이 무너졌다.

“그럼 정말 조심해야 한다.”

“네!”

오드리아가 씩씩하게 답했다.

트루디 대공이 상체를 살짝 숙여서 오드리아를 내려 주려고 했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은 지나치게 컸고, 오드리아는 아직 많이 작았다.

트루디 대공은 이쯤이면 오드리아의 발이 땅에 닿았다고 생각해 힘을 뺐는데, 오드리아의 다리는 아직 땅이 아닌 허공에서 달랑거리고 있었다.

“으앗.”

순간 허공에 멈춰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오드리아가 짧은 비명을 냈을 때였다.

“어, 어……?!”

어느새 트루디 대공이 양팔로 오드리아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고 있었고, 제레미아가 바로 그녀의 밑을 양팔로 그물처럼 받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색이 된 얼굴로 오드리아를 바라 봤다.

“……괜찮아?”

라고 물어보는 제레미아가 더 안 괜찮아 보였다.

두 사람은 후원에 있는 동안 오드리아의 움직임에 따라 신경을 곤두세웠다.

오드리아가 꽃을 보기 위해 손만 뻗어도 안절부절못하고.

“조심해……! 가시라도 찔리면 어떡해.”

연못 속 물고기를 보려고 허리만 숙여도 그녀가 중심을 잃고 넘어질까 봐 비상사태였다.

“그러다 빠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오드리아가 나무에 있는 열매를 향해 손을 뻗자 그 위로 다른 손이 튀어나왔다.

“여기.”

트루디 대공이 열매를 오드리아에게 건넸다.

“……감사해요.”

고맙기는 한데…… 조금만 뭔가를 하려고 하면 바로 옆에서 허둥거리는 두 사람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드리아가 혹시라도 다칠까 봐 불안하고 걱정되는지 주위를 서성이며 망설이던 제레미아가 오드리아에게 손을 먼저 내밀었다.

“손…… 잡을래……?”

제레미아는 오드리아가 눈꺼풀을 깜박일 때마다 억겁의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았다. 사실, 이 한마디를 하는 데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제레미아의 손에서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오드리아는 지금 고민 중이었다. 제레미아의 손을 어떻게 잡을지.

이 손이 무슨 의미인지 오드리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이 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제레미아가 자신을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과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두려움을 극복하느냐, 아니면 더욱 심해지느냐가 정해지는 것이다.

‘계속 안절부절못한 상태일 수는 없으니까.’

꽈악-. 오드리아가 제레미아의 손을 맞잡았다.

제레미아의 손은 이미 땀으로 흥건해져 있었다. 그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그것만으로도 느껴졌다.

“고마워요.”

그래서 오드리아는 제레미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를 본 두 사람의 눈코입이 모두 확장되었다. 경악에 가까운 충격을 받은 듯.

기쁨과 설렘으로 인한 놀라움과 충격과 경악의 놀라움이었다. 당연하게도 전자는 제레미아였고, 후자는 트루디 대공이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오드리아가 말할 때마다 놀라고 당황하고 기뻐하고 황홀해했다. 만날 때마다 오드리아에 대한 마음이 점점 커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정작 오드리아는 아직 두 사람에 대한 태도를 완벽하게 정하지 못했다.

그녀가 아주 조금 변한 것만으로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태도는 이전의 소문과는 정반대로 바뀌었다.

그게 오드리아에게 과연 좋은 일일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원래 목표는 혼자 조용히 잘 살다가 떠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공작가에서 괜한 존재감을 키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관심이 오드리아를 향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그 관심을 없애는 것은 힘들었다.

처음 제레미아의 반응을 반대로 해석하고 그를 피하고 다녔을 때, 그는 오드리아에 대한 관심을 지우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어린아이처럼 사랑스러운 딸인 것처럼 방긋 웃고, 활짝 웃고, 씩씩하게 웃고, 환하게 웃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좋아한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오드리아의 표정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마치 오드리아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라도 지금까지 오드리아를 방치해 온 시간들을 잊어버리고 싶은 걸까.

* * *

침대 위에 올라와 이불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평소보다 느렸다.

‘왜 이렇게 피곤하지.’

최근, 오드리아는 침대에 누우면 이상할 정도로 눈꺼풀이 무겁고 졸렸다.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등을 댔다 하면 바로 잠들었다. 문제는 그다음 날이 되어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도 침대에 등을 대자마자 눈이 자꾸만 감겼다. 계속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지 어깨가 뻐근했다.

몸이 무겁고 자꾸 피로를 느끼는 이유를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는 공작가의 버려진 영애였다면 지금은 공작가의 지나칠 정도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피곤한 것도 같은 이유겠지.’

대공과 제레미아를 상대하느라 정신적인 피로가 많이 쌓인 모양이다.

오드리아는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리며 생각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행동은 예상 밖이다.

특히나 그들에 대해 외부에 알려진 것과 오드리아를 대하는 모습 사이에 간극이 너무 커서 종잡을 수 없었다.

만약 그녀가 수많은 시간을 귀족들의 눈치를 보고, 오필리아 숍을 운영하면서 갈고닦은 노하우가 아니었다면 오드리아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은 좀 괜찮아졌지만 처음을 떠올린다면 심각했다. 제레미아는 멀리서 훔쳐보기만 할 뿐 눈이라도 마주치는 순간 도망치기 바빴다.

트루디 대공 역시 오드리아 앞에서는 얼어붙어서 표정을 풀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보면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녀 역시 처음에는 그 모습에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정도니까.

오드리아는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어린 소녀가 안타까웠다.

대공이, 제레미아가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어린 오드리아는 처음부터 공작가의 버려진 영애라는 오명을 쓰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 * *

오늘은 이른 오전부터 고용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오늘 밤에 공작가의 중앙 홀인 플로렌스 홀에서 열리는 연회 때문이었다.

오드리아는 일명 플로렌스 연회라고 불리는 트루디 공작가의 정기 사교 모임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꽃들이 가장 만개했을 때 트루디 공작가에서 주최하는 연회는 황가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초대장이 없으면 출입 불가였다.

평소 사교 활동을 잘하지 않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와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 그것이 플로렌스 연회였다.

오드리아가 트루디 공작가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것 역시 바로 이 연회였다. 그녀가 사업을 할 때 수많은 귀족들이 찾아왔었다. 남녀노소 불문, 황궁 연회보다 더 신경 쓰는 것이 보였다.

대부분의 가주들은 주눅 들지 않게, 그러면서도 튀지 않게. 평소에는 화려하고 남들보다 눈에 띄는 것을 찾는 가주 역시, 플로렌스 연회에 참석할 때만큼은 절제되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것을 원했다.

그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은 이해됐다. 그들이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보다 화려할 수는 없었다.

그들보다 눈에 띄려고 괜히 아등바등했다가는 스스로를 하이에나 같은 영애들에게 마음껏 비교하고 물고 뜯을 수 있게 제물로 바치는 것과 같았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반응은 영애들이었다. 그녀들은 무조건 가장 아름답게, 가장 눈에 띄게, 한눈에 반할 수 있을 만큼 사랑스러운 것을 원했다.

플로렌스 홀에서 연회가 열리는 시기가 되면 꽃들이 홀 주위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 되는데, 한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장관이라고 했다.

“시끌벅적하네.”

오드리아가 말했다. 오드리아가 있는 방은 플로렌스 홀에서 거리가 꽤 있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곳까지 연회의 열기가 느껴졌다.

“아가씨도 보고 싶으세요?”

“아니.”

메릴이 물었다. 오드리아는 바로 거절했다. 비록 처음에 결심했던 계획과는 조금 틀어지긴 했지만, 오드리아는 공작가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성인이 되면 독립할 생각이었다. 괜히 사교계와 얽히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피곤하기만 하지.’

다만 아쉬운 점은 이른 아침부터 연회 준비를 하느라 오늘은 후원에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후원의 일부까지 연회 장소니까.

메인 무대는 플로렌스 홀이지만, 연회가 무르익었을 때 사람들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도록 야외에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플로렌스 연회에 참석하겠다고 온갖 난리를 부리던 영애들의 모습이 떠오르니 저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그때가 일 년 중 가장 큰돈이 들어오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트집을 잡는 진상 손님이 극성인 시기이기도 했다.

“오늘은 저택에 사람이 많이 돌아다닐 테니 일찍 주무세요.”

메릴이 오드리아가 덮은 이불을 다시 잘 덮어 주며 말했다.

오드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메릴은 잠시 그런 오드리아를 지켜보다가 불을 끄고 나갔다.

오드리아는 사실 잠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일찍 잠이 든 척한 후, 방에서 몰래 빠져나왔다. 연회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단 하나, 소문으로만 듣던 플로렌스 홀의 밤의 풍경이 보고 싶었다.

분명, 낮에는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이라고 귀부인들이 감탄하면서 말했었다.

“와아…….”

왜 낮에는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이라고 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해 보니 알 것 같았다.

“예쁘다…….”

밤하늘에 다채로운 빛을 내는 꽃가루가 날아다녔다. 스스로 빛을 내는 꽃가루 덕분에 주위는 조명을 켠 것처럼 밝았다.

그 모습에 넋을 잃은 채 시선을 빼앗겼다. 특히, 플로렌스 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호수는 낮과는 또 다른 은은한 경취가 멋스러웠다.

‘어? 저건…….’

호수와 달, 그리고 플로렌스 홀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던 오드리아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녀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달밤을 품은 호수 건너편에 있는 트루디 대공과 그와 함께 있는 묘령의 여성이었다.

오드리아는 묘령의 여성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그녀는 신시아 후작 영애였다.

신시아 유스티오. 그녀는 제국의 소문난 딸 바보 제이든 유스티오 후작의 딸이자 스물여덟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혼이라는 사실 때문에 유명했다.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애임과 동시에 노처녀. 그녀가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가 그녀를 유난히 싸고도는 유스티오 후작 때문이라는 말이 돌았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남성들의 구애를 언제나 도도하게 거절하는 것으로도 유명한 그녀가 지금 트루디 대공과 함께 있었다.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많이 취한 것 같군.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

“……제이 님!”

트루디 대공이 가차 없이 돌아섰다. 신시아가 드레스가 구겨지도록 꽉 쥐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이?’

오드리아는 그 모습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았다. 오드리아의 생존 능력 중에 하나였다.

그녀는 언제나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그곳에서 나오는 소문과 화제가 곧 그녀의 사업 수완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오드리아는 제법 멀리서 나누는 대화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정확하게 들리지 않더라도 그녀의 경험으로 인해 대화 내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제발 한 번만 돌아봐 주세요.”

“…….”

“제이 님…….”

신시아 영애가 트루디 대공을 향해 애타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냘프게 떨렸다. 눈가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젖어 있었다.

신시아 영애가 떨고 있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그녀의 어깨도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트루디 대공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모습이 너무 애달파서 지켜보는 오드리아마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트루디 대공은 역시나 그녀의 절절한 마음 따위 관심도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그는 지금 살벌하게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했기 때문에.

“당장 이 영애를 내보내도록.”

“예, 각하.”

트루디 대공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가 신시아를 공손하게 모신 채 밖으로 인도했다.

“잠시만요!”

신시아가 애타게 그를 불렀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신시아는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는 듯이 절박하게 말했다.

“대단한 것을 바라는 게 아니에요. 저는 그저, 조금이라도.”

트루디 대공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마치 벽을 보고 말을 하는 것 같으리라.

“저를 봐주셨으면 해서…….”

신시아의 목소리는 점점 힘을 잃었다. 그녀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앞으로 신시아 후작 영애의 출입을 금한다.”

신시아의 애절한 고백을 들은 트루디 대공은 여전히 냉정하고 매몰찼다. 그는 싸늘하게 명령을 내리며 발걸음을 뗐다.

“제……!”

“…….”

“각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그 모습에 신시아가 크게 동요하며 사죄했다. 그녀가 끌어모은 용기는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그녀의 고백은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외면당했다. 그녀의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또한 향후 반년간 유스티오 후작가와 모든 거래를 중지한다.”

“……!”

트루디 대공은 가차 없었다. 그녀의 심장을 나락으로 떨어트릴 말을 매몰차게 내뱉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기력을 잃었는지 신시아가 휘청거렸다. 그 모습을 본 기사가 다급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신시아는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이 몸을 떨며 흐느꼈다.

멀리서 지켜보는 오드리아의 심장마저도 서늘해졌다. 방금 본 트루디 대공은 오드리아가 지금까지 봐 온 모습이 아니라 그녀가 소문으로 듣던 모습 그대로였다. 차갑게 얼어붙어서 파고들 틈을 찾을 수 없는 냉정한 성격.

‘……이런, 늦었어.’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신시아가 걱정되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어차피 오드리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보다 그녀는 지금 바로 침실에 돌아가야 했다. 자는 척 몰래 나왔지만, 새벽에 메릴과 옐라가 차례로 그녀가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하러 오기 때문에 그 전에는 다시 자리에 누워 있어야 한다.

그녀들 중 한 사람이 찾아왔을 때 자신이 침대에 없으면 사달이 날 것이다.

오드리아가 왔던 방향이 아닌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어 빨리 돌아가야 해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야 했다.

드레스 치맛자락을 발목까지 끌어올려 달리며 방금 전 봤던 모습을 떠올렸다.

‘메릴의 말이 사실이었네.’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에 대한 명성은 많이 들어 봤지만 그가 저토록 살벌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

그가 화낸 이유는 명확했다. 제이 트루디, 그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트루디 가문에는 몇 가지 금기 사항이 있었다. 모두가 알고 있을지라도 절대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금기어.

그것을 발설하는 순간, 공작가의 고용인이라면 당장 쫓겨나서 더 이상 제도에 발을 붙일 수 없다.

만약 다른 귀족들이 금기어를 발설한다면 그들은 공작가가 주최하는 모든 이벤트에서 배제될 것이며 공작가와 연관되어 있는 사업은 모두 끊길 것이다.

공공연한 비밀.

트루디가의 금기어는 그렇게 불리곤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트루디 대공의 이름 ‘제이’였다. ‘제이’라는 이름은 황제와 황태자의 이름보다 더 부르기 힘든 이름이었다.

제이. 특별한 이름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가지기에는 너무 예쁘고 여자 같은 이름이었다.

오드리아는 물론 제레미아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그가 어린 시절, 트루디 대공의 부모인 선대 공작과 공작 부인은 딸을 원했다.

하지만 아들이 태어났고 그 후에는 후사가 없었다. 하지만 선대 공작은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을 어린 트루디 대공에게 대신 풀려고 했다.

여자가 없는 집에 자꾸 어린 영애들이 입는 드레스를 사 오고, 저택 안에서 그에게 입혀 보고는 했다.

그 당시의 트루디 대공은 비록 어리지만 당장 전쟁에 출정할 수 있을 만큼 훈련을 받은 몸이었다. 그런 그에게 선대 공작의 못다 한 한풀이는 굴욕 그 자체였다.

선대 공작의 이상한 악취미는 그가 선대 공작과의 검술 대련에서 이기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러니 트루디 대공이 자신의 유난히 예쁜 이름을 질색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제이.’

트루디 대공은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십 년 동안 듣지 못했던 달콤한 목소리가 그를 부르고 있었다.

‘제이. 그러지 마.’

“……!”

그를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레이첼 트루디가 유일했다. 싫어하던 자신의 이름을 좋아하게 만들었던 유일한 사람.

하지만 더 이상 달콤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줄 레이첼은 없었다. 그녀가 아니라면 듣고 싶지 않았다.

마치 그녀를 흉내 내듯이 이상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면 더더욱.

트루디 대공이 레이첼을 잊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그를 향해 짓던 사소한 표정들이 전부 눈을 감아도 생생하게 떠오르고는 하니까.

꿈속이나 가끔 깊은 생각에 빠졌을 때도 그녀는 그의 앞에 나타나고는 했다. 어떨 때는 위로와 격려를, 또 어떤 날에는 그를 꾸짖고는 했다.

‘레이첼. 이번에는 왜 그러는 거야.’

트루디 대공이 그립고 애틋한 마음으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더 이상 레이첼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오드리아의 침실은 플로렌스 홀에서 밤늦게까지 벌어지고 있는 연회와는 동떨어진 세상이었다. 혹시라도 오드리아의 잠을 방해할까 봐 그녀의 방이 있는 쪽으로는 사람들의 출입마저도 통제했다.

그래서인지 오드리아의 침실은 고요했다. 쌔액- 쌔액-. 오드리아의 숨결만이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잘 주무시네.”

메릴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오드리아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잠을 자면서 내는 소리는 마냥 귀여웠다.

“오늘 밤에도 좋은 꿈꾸세요.”

메릴이 잠든 오드리아의 이불을 다시 한번 잘 덮어 주고 밖으로 나갔다.

쌔액…….

깊은 잠에 빠진 것 같던 오드리아가 감고 있던 한쪽 눈을 슬그머니 떴다. 메릴이 나간 것을 확인한 오드리아는 스으윽,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네.’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 영애의 모습을 지켜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오드리아는 전력으로 달려와서 간단하게 입었던 외출복도 다 벗지 못하고 대충 다리에 걸친 채 위에만 잠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오드리아는 바깥의 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까지 주의하다가 발목까지 내려온 드레스를 침대 밖으로 꺼내고 잠옷을 제대로 입었다.

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고 이전에 메릴에게 물어봤던 것이 떠올랐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지금까지의 모든 행동들이 오해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오드리아는 메릴에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다시 한번 물어본 적이 있었다.

제국, 그중에서도 수도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트루디 공작가의 표면적인 부분이 아닌 이 안에서 오랜 시간 일한 고용인들의 시선으로 볼 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다.

그들에게 트루디 공작가는 공명정대하며 원칙을 지키고 규칙을 어기지 않는 이상 관대한 주인이었다.

어김없이 메릴이 두 사람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을 때였다. 그녀가 중요한 것이 떠올랐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오드리아를 보며 말할지 말지 고민하다가 결심을 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트루디 가문에는 금기어가 존재해요.”

“금기어?”

오드리아가 처음으로 호기심을 드러냈다.

누구도 트루디 공작가의 일원에게 ‘예쁘다’, ‘아름답다’라는 표현을 쓸 수 없었다. 만약 단명하고 싶거나 개죽음을 당하고 싶다면 예외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들의 외모만 보면 아름답지만 전쟁터에서 구른 그들의 몸은 살아남기 위한 것이다. 몸의 근육은 물론 작은 세포마저도.

저택에서 고고하게 말을 타고 사냥을 다니며 만들어진 다른 귀족들의 몸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그렇기에 외모만 보고 그들에게 함부로 ‘예쁘다’는 표현을 쓰는 일이 생긴다면 그 뒷감당은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

그들의 곁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에 눌려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도 않겠지만.

제레미아가 아직 말도 잘 하지 못할 만큼 어렸을 때를 제외한다면 지금까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향해 감히, 누구도 예쁘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도 무사한 자는 없었다.

“네. 대공 각하와 제레미아 님 앞에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실수로 말하면 어떻게 되는데?”

메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것 같았다.

메릴은 고개를 강하게 젓더니 오드리아의 어깨를 강하게 잡으며 약속을 받아 내려고 했다.

“모두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생각하시고 실수로라도 절대 하지 마세요. 아셨죠?”

“…….”

“약속해 주세요.”

메릴은 간절하게 부탁했다. 오드리아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메릴의 간절함은 모두의 평화를 위해서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오드리아가 가장 원하는 것은 평화였으니, 그것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협조해 줄 수 있었다.

게다가 메릴이 말한 금기 중 하나는 이미 오드리아가 깬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인데, 오늘 본 트루디 대공의 모습을 보면.

‘조심해야겠어.’

오히려 그때 아무 일도 없었던 게 천운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드리아의 표정이 이전과는 다르게 어두워졌다.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때 메릴은 분명 이렇게 얘기했다.

“트루디 가문에 밉보이는 순간 모든 게 힘들어질 테니까요. 단순히 힘든 게 아니라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눈치를 볼 수밖에요.”

메릴의 말은 하나같이 옳았다.

“각하께서 하시는 선택에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그 영향을 대부분의 귀족들 역시 받죠. 트루디 공작가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이 없으니까요.”

문제는 트루디 대공의 선택에 영향을 받는 것 중에 오드리아 자신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행동이 오드리아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오드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라는 트루디 대공과 오라버니라는 제레미아, 두 사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오드리아를 좋아한다.

‘그것도 엄청.’

오드리아는 오만해 보일 정도로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오드리아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의 관심이 드러나기 전까지 오드리아 트루디가 버려진 영애였던 것 역시 사실이니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그녀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오드리아 트루디의 위치가 달라진다.

그것은 그녀가 공작가의 버려진 영애로 살고 있을 때도, 지금 두 사람의 관심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이 오드리아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이대로 괜찮을까.’

연회가 끝난 후, 트루디 대공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고용인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그의 기분이 안 좋은 이유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유스티오 후작가에 한 행동에서 드러났으니까.

갑작스러운 단교 통보에 유스티오 후작가는 항의했지만, 얼마 후에 트루디 공작가에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항의를 철수하고 침묵했다. 분명, 자신의 딸 신시아가 한 행동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플로렌스 연회에서 금기를 깬 자로 인해 트루디 대공의 기분이 풀리지 않는다.

언제까지 이 상태가 유지될지 모른다. 대부분의 고용인들이 암묵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고용인들 사이에서는 오드리아를 둘러싼 변화를 눈치챈 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한 명이 묘안을 냈다. 트루디 대공의 기분을 풀어 주자고. 그러기에 가장 최선의 방법이 오드리아였다.

그들의 의견이 모아지자 행동에 나선 것은 오드리아의 유모, 메릴이었다.

오드리아가 걱정하던 상황이 그대로 벌어진 것이다.

메릴이 오드리아를 그 어느 때보다 사랑스럽게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지금 이런 드레스를 입고 싶지도, 몇 시간이고 붙잡힌 채로 거울만 보고 싶지도 않았다.

메릴이 “다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오드리아는 굳었다. 이건 메릴의 표현대로 사랑스러웠다. 문제는 사랑스러운 ‘인형’ 같다는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인형 같아.’

오드리아는 분명 자신의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거울 속에 있는 상대에게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메릴.”

오드리아가 조용히 메릴을 불렀다. 거울 속에 비친 인형같이 예쁜 모습을 보는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가씨, 너무 예쁘세요.”

“…….”

하지만 메릴은 그녀의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저 손을 맞잡고 입을 벌린 채 감탄만 내뱉었다. 그녀의 기분 좋게 올라간 억양, 올라간 입꼬리는 진심이었다.

“앞으로는 종종 이렇게 꾸밀까요?”

메릴이 들뜬 목소리로 오드리아에게 물었다. 진작 이렇게 꾸며 드릴걸. 아쉬워하면서 그녀는 신이 나 있었다.

“메릴!”

오드리아의 부름에도 메릴이 감탄하고만 있자, 좀 더 크고 단호하게 그녀를 불렀다.

“네?”

오드리아의 인형 같은 모습에 감탄하던 메릴이 화난 것 같은 오드리아의 목소리에 놀랐다.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메릴은 그제야 오드리아의 어두운 표정을 보았다. 그녀의 굳은 얼굴은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메릴은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것 같다고 깨달았다. 언제나 미소를 지으며 싫은 소리 한 적 없는 그녀이기에 더 불안했다.

오드리아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나는 장난감이 아냐.”

오드리아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흘렀다. 소리를 높여 화를 내지도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상처받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냉정하고 담담하게, 그래서 더 그녀의 진심이 강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화가 나 있고 지금 메릴과 옐라의 행동에 불쾌해하고 있다는 것을.

“장난감이라뇨. 절대로 말도 안 되는 오해세요. 저는 단지…….”

메릴은 어떻게든 해명하려고 했다. 그녀는 정말로 오드리아의 모습이 예뻐서 감탄한 것뿐이다.

비록, 그녀가 다른 고용인들의 부탁으로 한 일이라고 해도 그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결코, 감히 그녀를 장난감이라고 생각한 적 없었다. 메릴은 혹시라도 오드리아가 오해를 하고 상처를 입을까 봐, 배신감을 느낄까 봐, 그래서 돌아보지 않을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저는 그저 오드리아 님에게 가장 좋은 것들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당연히 누리셔야 할 것들이고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

오드리아는 지금까지는 방 안에만 있었다. 예쁜 드레스를 입기는커녕 잠옷을 입은 채로 하루 종일 있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러니 드레스 룸에 아무리 많은 드레스와 신발과 보석이 있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그동안 쓰지 못했던 것들을 마음껏 사용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오드리아가 이토록 싫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메릴은 부디 자신의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랐다.

하지만 오드리아의 얼굴은 여전히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건 누굴 위해서야.”

“당연히 오드리아 님을 위해서-!”

메릴은 끝까지 말할 수 없었다. 오드리아에 의해 가로막혀서.

“나는 각하와 오라버니한테 잘 보이기 위해서 살고 싶지 않아.”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이토록 낮고 틈이 없는 목소리는.

오드리아는 메릴이 자신을 붙잡고 한껏 꾸미기 시작할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왜 자신을 이렇게까지 꾸미는지.

최근 공작가의 분위기, 일전에 메릴이 자신을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갑자기 꾸몄던 경험까지.

‘뻔하지. 이대로 트루디 대공에게 데려갈 생각인 거지. 내가 가서 애교라도 부리면서 기분을 풀어 주면 더 좋고.’

오드리아에게 그런 걸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 역시 평소대로라면 모두의 평화를 위해 적당히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것들로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오드리아는 주체가 될 수 없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행동에 따라 오드리아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고,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에 대해 항시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제는 대공의 기분을 풀어 주는 인형 노릇을 하라니.

이런 것은 오드리아가 원하던 인생이 아니었다.

차라리 버려진 영애가 낫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고 혼자 조용히 지내는 편이 그녀의 의지로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잠시 잠깐이라도 잊고 있던 사실을, 오드리아는 플로렌스 연회에서 트루디 대공과 신시아의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결국, 모든 선택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라는 것을.

오드리아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마치 지금 정성스레 꾸민 자신의 모습이 그녀를 위한 게 아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위한 것처럼.

“아가씨.”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해.”

메릴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오드리아를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여전히 싸늘했다. 오드리아는 질린다는 듯 말했다. 더 이상 자신을 휘두르려 하지 말라고.

“각하와 오라버니가 나를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내 의지가 아니잖아.”

그건 원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오드리아 트루디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건 철저하게 두 사람의 감정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두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두 사람이 그녀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달라졌다. 그녀는 쉬지 않고 거침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두 사람의 태도에 따라 달라지는 건 내가 아니잖아.”

오드리아는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오드리아가 메릴을 포함한 주위에 있는 시녀들을 쭉 돌아보았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와 가까워지자마자 고용인들은 오드리아를 극진하게 모셨다. 그것을 지적하는 것을 그들이라고 모를 리 없었다.

오드리아의 시선이 닿자 모두 고개를 숙였다.

“태도가 달라지는 건 나를 제외한 사람들이잖아.”

오드리아가 일침을 가했다. 그 대상에는 메릴과 옐라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의 평화와 이익을 위해 오드리아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서 사랑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그런 것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오드리아가 처음으로 화를 냈다. 모두가 놀라서 그녀의 눈치를 보는 것은 당연했다.

“죄송합니다.”

메릴이 사죄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한 행동이 긁어 부스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상황만 악화시켰다.

오드리아도 알고 있었다. 다른 고용인들이 어떻든 간에 ‘방치된 공녀’였을 적부터 그녀의 곁에 있었던 메릴과 옐라는 진짜라는 것을, 진심으로 오드리아를 걱정하고 생각한다는 것을.

하지만 그들 역시 트루디 공작가의 고용인이었고 그녀들의 목숨과 밥줄을 쥐고 있는 것은 트루디 대공이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너무나 당연하게 그들의 사고는 트루디 대공을 중심으로 돌아가리라.

하지만 그것을 오드리아에게 강요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멈출 수 없게 되기 전에 오드리아는 단호하게 선을 그을 생각이었다.

메릴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아는 오드리아 아가씨가 아닌 것 같았다.

열 살짜리 어린 소녀가 아니라 자신을 압도할 정도로 삶의 연륜을 가진 사람 같았다. 갑자기 오드리아 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몸이 긴장됐다.

오드리아의 표정은 여전히 풀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음부터는 나를 이용하지 마.”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네.”

메릴이 자신이 한 일을 자책하며 다짐하듯이 답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그럴수록 단호하게 행동했다. 그래야 비슷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사실 오드리아가 이토록 화를 내는 것은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다. 자신의 최후가. 언제나 동생들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오다가 배신당한 끔찍한 최후.

일방적으로 사랑을 주고 모든 것을 내주던 그때와 지금은 분명히 달랐다. 지금은 오히려 오드리아가 사랑을 받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그 시절이 떠올랐다. 세상의 중심이 동생들인 채, 그들을 위해 아등바등 애썼던 시절.

가끔씩 동생들이 고맙다며 언젠가 이 은혜를 꼭 갚겠다고 말할 때마다 감동으로 벅차올랐던 날들.

동생들의 미소가 그녀에게는 상이었고 동생들의 눈물이 그녀의 죄책감이었다.

오드리아는 언제나 동생들의 눈치를 봤었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도 내가 눈치를 보는 게 당연한 일이지.’

트루디 공작가에서도 역시,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공작가의 중심은 당연하게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였다.

그 중심을 계속해서 뺑뺑 도는 부속품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오드리아는 부속품 중 하나가 되어 돌고 있었다.

‘그러다 관심이 식고, 싫증이 나면 이전과 비슷한 꼴이 나겠지.’

이미 한번 모든 것을 바쳤던 동생들에게 버려지고 배신당해 봐서 알았다. 그게 얼마나 처참한 슬픔인지를.

생각해 보면 진짜 오드리아가 스스로를 탓했던 것도 공작가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동안 그들도 오드리아를 좋아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의 오해가 눈 녹듯이 사라져서 지난날들이 지워지는 것 또한 아니었다.

‘내게 관심받고 싶은 쪽에서 노력해야지.’

오드리아는 더 이상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눈치 보지도 않을 것이다.

앞으로 오드리아 트루디에게 다가오는 것도, 노력하는 것도 제이 트루디와 제레미아 트루디의 몫이 될 것이다.

‘내 멋대로 할 거야.’

오드리아는 결심했다. 더 이상 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신경 쓰지 않기로. 그들이 싫어할 것 같다고 해서 참지 않기로.

처음에는 그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그다음에는 두 사람의 관심에 적당히 맞춰 주기 위해서 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의 기분, 감정에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 행동을 그대로 드러낼 것이다.

오드리아는 달라지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휘둘리지 않기 위해.

그런다고 해도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여전히 그녀의 방에서 먹고 자고 메릴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했다.

열 살에 불과한 오드리아에게는 그런 생활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으니까.

메릴은 오드리아가 정색한 날 이후로 그녀의 앞에서 조심했다. 작은 것 하나에도 그녀의 눈치를 보고 혹시 불편해하지는 않는지 예의 주시했다.

오드리아는 더 이상 그들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지만 다른 시녀들은 물론이고 메릴과 옐라 앞에서도 그녀는 아직 화가 난 모습을 유지했다.

어린아이니까 쉽게 잊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그녀의 경고를 금세 잊고 또다시 그들이 편한 대로 생각하지 않도록, 그들이 긴장감을 잊지 않고 기억하도록 오드리아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단단히 삐친 것처럼 보이는 오드리아를 달래고 설득하려는 메릴과 시녀들의 노력은 헛수고였다.

그날 이후,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와 마주칠 만한 곳은 피해 다녔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두 사람의 존재감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게 다 뭐야?”

“요즘 입맛이 없으신 것 같아 하셔서 대공 각하께서 선물한 것들입니다.”

제국에서 보기 드문 과일과 초콜릿이었다.

“이건 또 뭐야?”

“말린 꽃인데, 제레미아 님께서 보내 주셨어요.”

후원에서도 본 적 없는 꽃이었다. 아마 외부에서 구해 온 것 같았다.

오드리아가 최근 후원에도 잘 나가지 않자 걱정된 두 사람이 선물을 보낸 것이다. 아마 그녀가 고용인들에게 화를 냈던 것도 전해 들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럴수록 오드리아는 오기가 생겼다. 이대로 그냥 지나갈 수는 없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피할 것이 아니라 만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직접 알려야 했다. 그녀는 결코 두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을 거라는 것을.

오드리아는 평소처럼 후원으로 산책을 나왔다.

어쩐 일인지 두 사람이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경우는 보통 의례적인 저녁 식사 자리, 혹은 오드리아와 함께 있을 때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당연하게도 우연이 아니었다. 오드리아가 후원에 가기 위해 이곳으로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드리아. 오랜만이구나.”

“후원에 가는 거야?”

두 사람은 뭔가 기대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드리아가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도 가던 길인데…… 같이 갈까?”

오드리아는 땅이 발을 옭아매고 있는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애가 탔다.

달라지기로 결심했어도 두 사람에 비해 오드리아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트루디 대공은 공작가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제레미아는 그의 후계자로서 트루디 대공이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물려받게 될 것이다. 게다가 제레미아는 이미 강한 힘과 스스로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드리아 트루디는 아무것도 없었다. 트루디라는 성을 제외하면.

그녀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 할 수 있는 반항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것도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장난에 가까운 것들.

이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가. 그녀는 한동안 시무룩했다.

그런데 그때 아이러니하게도 에이미와 노엘이 떠올랐다. 그 애들은 어릴 때부터 오드리아는 물론이고 주위 어른들이 넌덜머리를 낼 정도로 악동이었다.

그때의 에이미와 노엘이 대단히 머리가 좋거나 해서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린아이다운 행동을 했기에 놀랐던 것이다. 순수와 악의는 한 끝 차이인 것처럼.

지독할 정도로 천진난만한 얼굴로 그들의 기준에서 상상하지도 못할 장난을 치고는 했다.

‘차라리 장난처럼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을까. 오드리아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였다. 오드리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린아이가 저지를 수 있는 실수.

굳이 대단한 일을 할 필요는 없었다. 단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 오드리아가 한없이 순하고 마냥 잘 따르는 아이가 아님을 보여 주면 충분했다.

장난과도 같은 한마디.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 순간 오드리아의 눈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볼이 부풀어 올랐다. 뭔가 곧 튀어나올 것 같았다.

- 트루디 공작가에는 절대 말해서는 안 되는 금기어가 있어요.

메릴의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귓가에 속삭이는 그것은 달콤한 목소리로 그녀를 유혹하는 것 같았다.

살랑이며 간질이는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 그중 하나가 제레미아 님께…….

사실 제레미아에게 이 말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제레미아의 얼굴을 보고 그녀도 모르게 감탄하며 말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래도 그때랑 지금은 다르지.

오드리아와 제레미아 모두 정신이 없을 때 나온 말은 흐지부지 지나갔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작정하고 하는 말을 제레미아가 지난번처럼 넘어갈 리 없었다.

“오라버니…….”

오드리아는 제레미아를 부르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후-. 오드리아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한꺼번에 내뱉으며 담아 놓았던 말을 그대로 부었다.

“……정말 예뻐요!”

벼락처럼 내리친 한마디에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이 기겁했다. 비명을 지를 뻔한 걸 겨우 참은 자도 있었다.

제레미아 역시 너무 놀란 나머지 굳고 말았다.

후아-! 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한마디에 주위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멈추지 않고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녀가 뭔가 말을 더 할 것 같자 주위에 있는 고용인들도 덩달아 긴장했다.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는 달콤한 목소리가 목표를 다른 사람으로 옮겼다.

- 각하의 이름을 절대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됩니다.

메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럴수록 오드리아는 환청을 떨치기 위해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을 똑바로 쳐다보며 혓바닥을 입천장에 댔다가 떼었다. 그리고 입술을 가로로 벌리며 외쳤다.

모두가 예상하면서도 아니기를 바라는 그 말을 하기 위해.

“……제이.”

“……?!”

풋풋한 소녀의 봄 같은 이름, 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래서 입 안에 남아 있는 그 이름은 부드럽고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공작가에서는 절대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이름이었다.

“제이, 이름이 너무 예뻐요!”

오드리아의 입은 예쁘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얼굴은 마치 전장에라도 나가는 것처럼 결의에 차 있었다.

“제이!”

적의 이름이라도 되는 것처럼 악에 가까운 지름이었다. 오드리아는 마치 폭주하는 마차처럼 멈추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 말했다.

자신이 어린아이의 몸이라는 것을 방패 삼아 그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억지를 부리며 쏟아 내다가 뚝, 멈췄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미동 하나 없이 가만히 있었다. 너무 놀라서 굳어 버린 것만 같았다.

“후아-.”

오드리아는 속이 시원하다는 듯 숨을 몰아쉬었다.

이건 오드리아의 경고장이었다. 앞으로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행동은 다 할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비록 방법은 자신이 생각해도 유치했지만.

‘그럼 어때. 일단 할 수 있는 걸 하는 게 중요하지.’

금기어를 외치는 것이 지금 오드리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이었다. 금기어를 공공연하게 말함으로써 앞으로 그녀에게 어떤 일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감내하는 것으로서 거리를 둘 생각이었다.

한순간에 트루디 가문의 금기를 깬 오드리아는 시원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리고 그대로 돌아서 달려갔다.

“아, 아가씨.”

주위에 있던 고용인들이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이, 메릴이 허망한 목소리로 오드리아를 급히 쫓아갔다.

오드리아가 떠나고 남은 자리에, 버려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주인을 기다리듯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두 사람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것이 분노인지, 다른 의미인지 고용인들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오드리아는 모든 말을 내뱉고 전력으로 달려서 방에 들어왔다.

혼자 있으니 그제야 자신이 한 말이 떠올랐다.

“으아, 아아.”

외마디 비명이 흘러나왔다. 창피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오드리아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무리수를 뒀다.

‘아무리 몸이 열 살이라고 해도 그렇지, 내가 진짜 어린애도 아니고!’

그 순간에는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보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뿌듯해했는데.

‘무슨 용기로 그랬지?’

오드리아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머리가 풀어지고 산발이 되었다. 그대로 머리와 손을 끌어 모아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가려지지 않은 몸이 배배 꼬였다.

“미쳤나 봐 진짜.”

오드리아는 지금 당장 쥐구멍이 필요했다. 크고 안락한 도피처가 아닌 오드리아의 몸이 겨우 들어가서 공간이 꽉 차는 쥐구멍.

하지만 애석하게도 방 안에 그런 공간은 없었다. 방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컸고 숨을 곳이라고는 딱히 없었다.

그때, 오드리아의 눈에 한 곳이 보였다. 그대로 달려가서 침대 위에 폴짝, 이불을 들썩,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완전히 뒤집어쓴 채 몸을 웅크렸지만 자신의 만행(?)을 잊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드리아는 이불을 뚫을 기세로 다리로 이불을 퍽퍽 차올렸다.

‘으아…… 쪽팔려!’

나름의 반항이라고,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 선언하려던 행동이 졸지에 흑역사가 되었다. 오드리아가 여전히 이불로 꽁꽁 싸맨 채 발버둥을 치고 있을 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곳에 들어올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메릴이었다.

메릴은 침대 위에 둥글게 솟은 이불을 발견했다.

‘많이 속상하셨구나.’

얼마 전에 화를 냈었던 오드리아였다. 거기에 오늘의 일까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메릴은 오드리아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이불 속에 들어가서 괴로워하는 오드리아를 보니 메릴은 지난번에 자신의 했던 일에 대한 죄책감이 몰려들었다.

메릴의 눈이 커졌다. 이불이 들썩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소리는 나지 않지만 이불이 규칙적으로 들썩이는 모양이 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정작, 오드리아는 가시지 않는 창피함에 몸을 떨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오드리아의 사정이었고, 메릴의 착각은 자유였다.

오드리아가 떠난 자리에 남은 고용인들은 숨조차 쉬지 못한 채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돌아갔다.

‘최근에 분위기 좋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고용인들 사이에서 눈빛으로 대화가 오갔다. 하지만 곧 흩어졌다. 이럴 때일수록 그들의 역할은 무엇 하나도 삐걱거리지 않게 맡은 바 일을 하는 것이다.

고용인들은 최대한 긴장한 분위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자신의 주인들이 어떤 상황인지를 모르는 상태다 보니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제레미아는 별다른 반응 없이 아침이 되자 훈련을 했다. 심지어, 평소보다 훈련량은 더 많았다. 다만, 가끔씩 멍해지는 순간이 있었다.

훈련이 끝나고 그웬과 함께 그의 전용 집무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보는 업무는 대부분 트루디 대공을 보좌하는 역할이거나 이미 안정적인 사업을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나머지 시간에는 대부분 경영, 무역, 기본 학문, 과학, 어학, 가주로서의 의무에 대한 교양 수업 등을 들었다.

제레미아가 지난날에 오드리아와 우연을 가장해 만났던 길목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후원에서 오드리아와 마주친 이후, 제레미아는 자주 이쪽 길로 돌아다니곤 했었다.

제레미아는 오드리아가 폭탄 발언을 했던 장소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췄다. 그는 오드리아가 있었던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드리아가…….”

제레미아가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제레미아는 어제부터 오늘까지, 하루 동안 시간이 필요했다. 오드리아의 말을 천천히 맛보고 곱씹고 다시 음미할 시간이.

입 밖으로 말을 해 버리면 공기 중에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사라져도 아쉽지 않을 때까지 속으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음미했다.

“나보고 예쁘대.”

제레미아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레미아를 아는 사람이라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미소였다. 물론, 그의 외모에는 미치도록 잘 어울리지만.

결국, 제레미아를 옆에서 지켜보던 그웬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제레미아의 해석은 제멋대로였다.

자신의 말에 심기가 뒤틀린 제레미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심히 걱정되고 무섭지만, 이대로 착각하다가는 오드리아와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게 판단한 그웬이 입을 열었다.

“오드리아 님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

그웬의 말에 제레미아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웬은 순간 흠칫했다. 지금 자신을 보고 있는 제레미아는 방금 전까지 세상 해맑게 웃고 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평소의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한 경고 가득한 시선 역시도 아니었다. 그저 무정하고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그웬은 어쩐지 그 시선이 더 불편했다.

“일부러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그것은 공작가의 금기…….”

“알아.”

제레미아가 그웬의 말을 끊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웬은 당당하게 말하는 제레미아를 보며 속으로는 ‘그럴 리가. 아는데 좋아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엔 또 무슨 착각을 하고 있을지 추측하면서.

그때 제레미아가 말했다.

“오드리아는 화를 낸 거겠지.”

“……!”

그웬의 눈이 커졌다. 제레미아는 당연히 알고 있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어째서 좋아하신 거지? 그것도 ‘예쁘다’는 말만 들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난리치던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그웬의 얼굴이 미묘해졌다.

“금기어를 깨는 걸로 반항이라니…….”

말하는 제레미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갑자기 고개를 아래로 숙이더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웬이 긴장했을 때였다.

“어쩜 그렇게.”

역시, 좋아한 게 아니었나? 그웬이 착각한 것이었나? 그웬이 지금까지 본 제레미아의 모습을 재해석하려 할 때였다.

“귀여울 수가 있는 건지.”

“…….”

“정말이지…….”

그럼 그렇지, 그웬은 왠지 허망해졌다. 제레미아는 오드리아를 떠올리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랑스러워 죽을 것 같은 몸부림이었다.

‘중증이구나.’

그 모습에 그웬이 질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제레미아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웬은 나름 제레미아의 오드리아앓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제레미아는 언제나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웬이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는지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였다.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설마 드디어 공작가의 금기어는 사라지는 건가!’

그동안 공작가의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했던가. 새로운 사람이 들어올 때면 단단히 교육시키고, 예상 밖의 상황에서 누군가가 말실수를 할까 봐 노심초사했었다. 드디어 그것에서 해방되는 건가.

“제레미아 님.”

“왜.”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이 제레미아는 여느 때의 얼굴로 돌아왔다. 제레미아의 들떠 있는 기분에 편승해서 말하려고 했던 그웬은 아쉬운 듯 들리지 않게 쳇, 혀를 찼다. 물론 제레미아에게 들리지 않게 눈치 보면서.

“뭔데.”

그웬이 말하지 않자 되레 제레미아가 재촉했다. 할 말도 없는데 부른 건 아니겠지, 라는 험악한 경고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건 괜찮으십니까.”

“뭐.”

“오드리아 님께서 말씀하신 제레미아 님에 대한…….”

그웬의 말이 점점 늘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레미아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예쁘다는 말을 들어도 괜찮은지 묻고 싶은 거지?”

“네? 네, 네.”

“왜, 너도 하고 싶어?”

제레미아의 입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하지만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조소에 가까운 미소였다.

“하긴, 내가 예쁘긴 하지.”

분명, 오드리아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제레미아가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럼 이제 예쁘…….”

그웬이 이때다 싶어 다시 한번 시도하려고 할 때였다. 순간, 제레미아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웬에게 향했다. 눈빛을 받았을 뿐인데, 목에 검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목이 따끔거렸다.

“마음대로 해.”

“……!”

그웬의 얼굴이 환해지는 순간이었다. 제레미아의 입술 끝이 한쪽으로만 길게 올라갔다.

“대신, 네 목이 안전할 거라는 보장은 못하지만.”

“…….”

“뭐, 말하는 건 자유지.”

꿀꺽, 목구멍 밖으로 나오려던 말 대신 침을 삼켰다.

“오드리아만 할 수 있는 말이야. 그 외엔 절대 안 돼.”

제레미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오드리아가 하니까 기분이 좋아지는 말이었다.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한다면 기분 좋지 않으리라.

“……대공 각하께서도요?”

“뭐……?”

제레미아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야.’

제레미아가 그웬을 한심하게 보며 말했다.

“미쳤어?”

트루디 대공, 아버지가 자신에게 ‘예쁘구나.’라는 말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닭살이 오스스 돋았다.

트루디 대공은 아침 일찍 저택을 나섰다. 지난밤부터 잠도 자지 못하고 밀린 업무를 처리해야 했고, 지금 역시 이동 중인 마차 안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오드리아와 만나지도 못했다. 괜스레 짜증이 났다.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넘기던 중, 유스티오 후작가와 관련한 서류가 눈에 보였다.

유스티오 후작가의 영지에서는 강력한 무기에 필요한 자원이 풍부하게 나왔다. 게다가 무기로 인해 무역 사업까지 활발해서 탄탄한 자본을 확보하고 있는 가문이기도 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속으로 가장 좋아할 가문이지.’

트루디 대공이 전장에서 공급받았던 무기의 절반이 유스티오 가문에서 나온 것이다. 전쟁이 한번 끝날 때마다 유스티오 가문의 몸집이 불어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트루디 대공이 후작가와의 반년 간의 모든 계약을 끊었다. 비록, 당장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도 공작가는 언제나 상당량의 무기를 구입해 왔다. 무기 구입처에 대한 대안이 필요했다. 그 후보 가문이 적힌 서류였다.

무기란 위험한 물건이었다. 함부로 꾀를 부리다가는 무기와 무기를 다루는 사람 모두가 죽는다. 무기는 방패이기도 하다. 그것이 트루디 대공의 확신이었다.

유스티오 후작가가 무기에 대한 성능, 안정도 모두 가장 좋았다. 그렇다고 해서 생각을 바꿀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트루디 대공이 이마를 짚었다. 얼굴의 반이 가려졌다.

- 제이, 이름이 너무 예뻐요!

가슴 한쪽이 울컥하며 올라왔다. 오드리아가 한 말이 귓가에서 계속 맴돌았다.

‘제이라…….’

트루디 대공이 자신의 입가를 매만졌다. 그러곤 자신의 이름을 곱씹어 보았다.

이름이 예쁘다니,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듣자마자 불쾌해서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드리아가 ‘제이’라는 이름을 말하는 순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보는 사람이 많은데 그곳에서 주책없이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다. 트루디 대공은 최대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버텼다. 그러고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 이름이 제이예요?

레이첼의 목소리가 겹쳤다. 레이첼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그날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

트루디 대공은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유스티오 후작가를 대신할 거래처 후보지가 적힌 서류를 따로 뺐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서류를 따로 빼놓는 것을 보고 보좌관이 물었다. 혹시, 후보 가문 중에 마음에 드는 곳이 없다고 하면 제도가 아닌 제국 전체로 영역을 넓혀서 마땅한 가문을 알아봐야 했다.

“유스티오 후작가에 연락해.”

“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 밖이었다.

“거래를 끊은 건 좀 너무했었던 듯싶군.”

“……!”

그 말은 곧, 거래 취소를 엎겠다는 뜻이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유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보좌관은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어 눈만 끔벅거렸다.

트루디 대공은 별다른 설명은 하지 않았다. 대신, 한마디 덧붙일 뿐.

“물론, 앞으로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보좌관이 다급하게 외쳤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트루디 대공이 관대해졌다.

‘이건 분명 변덕이야.’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 보좌관은 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기 위해 마차의 문을 다급히 두드렸다.

“자, 잠깐 멈추세요!”

“무슨 일입니까.”

마차가 멈추고 보좌관이 잽싸게 문을 열고 나왔다.

“각하의 명으로 급히 갈 곳이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다른 곳에 들렀다 갈 테니 각하를 모시고 먼저 가 보세요.”

보좌관이 기사를 향해 설명한 후, 헐레벌떡 달려 나갔다. 트루디 대공은 마차 안에서 구경거리를 감상하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보좌관은 사실, 유스티오 후작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트루디 공작의 입장에서는 꼭 유스티오 후작가와 거래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보좌관들의 사정은 달랐다.

유스티오 후작가는 공작가에도 중요한 거래처였다. 특히, 그들은 신뢰를 중시하고 함께 일하면 깔끔해서 보좌관들이 선호하는 가문이었다.

가뜩이나 업무량이 많고 스트레스가 많았다. 그나마 일을 덜어 주는 가문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면 옆구리가 터질 것 같아도 달릴 수 있었다.

마차에 혼자 남은 트루디 대공은 잠시 서류를 덮고 품속에 있는 작은 그림첩을 꺼냈다. 그 안에는 당연하게도 레이첼이 있었다. 트루디 대공이 레이첼의 그림을 빤히 봤다.

“레이첼과 별로 안 닮은 줄 알았는데.”

트루디 대공이 감상에 빠졌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녀가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곤 했다.

“알고 보니 똑 닮았군.”

흐뭇하게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어떤 면이 닮았는데요?’

레이첼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럴 리 없겠지만, 트루디 대공은 익숙한 듯 그림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보고도 모르는 건가. 그야.”

트루디 대공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흐뭇한 얼굴로.

“오드리아, 그 아이가 성질을 부리는 게.”

갑자기 트루디 대공의 눈가에 장난기가 감돌았다.

“어쩜 레이첼, 당신을 똑 닮았는지. 당신이 내게 화낼 때랑 비슷하더군.”

레이첼 트루디, 그녀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가끔씩 예고 없이 화를 낼 때면 트루디 대공은 물론이고 어린 제레미아 역시 그녀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보기만 해도 쓰러질 것처럼 여린 외모에 언제나 잔병치레가 심했던 몸. 하지만 그녀의 성격만큼은 어느 장부 못지않았고, 제국에서 트루디 대공을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의 눈에는 레이첼이 화내는 것이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진심으로 화를 내고 토라져서 자신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가장 무서울 뿐.

“최대한 일을 빨리 끝내야겠군.”

트루디 대공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지금 황제의 호출로 황궁에 가는 길이었다.

전쟁이 멈춘 지 3년. 이제 슬슬 평화에 익숙해지려 하고 있을 때, 전쟁의 조짐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지난날에도 그래 왔고 이번 역시 몇 왕국이 연합을 해서 전쟁을 준비한다는 첩보가 있었다.

지금 가면 내일 저녁에나 돌아올 수 있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트루디 대공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못해도 내일 오전. 그때까지 돌아간다.’

트루디 대공이 결심했다. 그렇다면 분명, 내일 오전까지 트루디 대공은 공작가로 돌아올 것이다.

제레미아는 평소와는 달리 저녁에도 연무장에 와서 훈련을 했다.

훈련이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오드리아를 찾아갈 것만 같아서였다.

‘그러면 안 되지.’

지금 화나 있는 오드리아였다. 그런데 제레미아는 오드리아를 보면 눈치 없이 마냥 좋아하기만 할 것 같았다. 그랬다가 오드리아가 더 토라지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아무리 귀여워도 그럼 안 되지.’

제레미아의 얼굴에서 미소가 새어 나오고 있을 때였다.

“으읏. 항복! 항복입니다! 더는 죽어도 못합니다!”

아이작이 다급하게 괴성을 지르며 양팔을 번쩍 들었다.

“……?!”

갑작스런 비명에 제레미아의 눈이 커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검이 아이작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큰일 날 뻔한 아이작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순간 이대로 자신의 뼈가 아작 나는 줄 알았다.

“조금 쉬시지요.”

“…….”

아이작이 물을 가져와 제레미아에게 건넸다. 제레미아가 물을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작은 질린 얼굴을 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이작과는 다르게 제레미아의 호흡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대략의 사정을 알고 있는 아이작이 슬쩍 오드리아에 대해 물었다.

“이유는 몰라도 화를 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삐쳤지.”

제레미아도 당연하다는 듯 동의했다. 그러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슬쩍 감돌았다. 토라져서 화내는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좋은 게 분명했다.

그럴수록 아이작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거지?

“왜 그렇게 보지.”

아이작의 시선을 느낀 제레미아가 물었다. 아이작이 민망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화가 난 거라면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제레미아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 미소가 어쩐지 거만함이 섞여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뭘 모르는군.”

“……?”

“그래서 더 좋은 거다.”

그래서 더 좋다니. 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아이작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모습을 본 제레미아가 인심 쓴다는 듯이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 나 때문에 혹사당했으니 그 대신으로 말해 주지.”

“…….”

제레미아의 마치 인심 쓴다는 식의 말에 아이작은 황당했다.

“오드리아가 삐쳐서 화를 냈잖아.”

제레미아가 여운을 즐기듯이 그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그건 오드리아가 더 이상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는 거야.”

“……?”

“자기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만큼은 가까워졌다는 거다.”

해석은 결국 자기 멋대로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만들었다.

“삐친 오드리아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보다 좋은 일은 없지.”

제레미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눈초리가 자꾸만 아래로 내려갔다.

제레미아가 무서운 건 하나였다. 오드리아가 겁먹고 방에 숨어 나오지 않는 것.

그것만 아니라면 오드리아가 보여 주는 반응은 전부 신선했다. 그것은 트루디 대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오드리아와 다른 고용인들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할 테지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콩깍지는 무적이었다.

* * *

오드리아의 폭탄 발언 이후에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아하는 모습이 보였다.

금기어는커녕 그들은 칭찬을 받은 것처럼 반응했다. 오히려 더 좋아하는 그들의 모습에 오드리아는 황당했다.

‘뭐야, 오드리아 트루디가 하는 거라면 무조건 다 좋다는 거야?’

지금까지 금기어였던 사실을 무색하게 만들 만큼?

오드리아는 두 사람의 반응을 보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예상대로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오드리아가 무슨 짓을 해도 좋아했다.

생각해 보면 에이미와 노엘과 함께하던 오드리아 역시 그랬다. 두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가족이기에 용서할 수 있었고 마냥 좋았다.

두 사람은 그런 오드리아의 애정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을 모두 가졌다.

그래서 오드리아는 트루디 공작가의 영애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가족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았다.

그들을 믿지 않고 그들이 오드리아 트루디를 방치했다고만 생각해서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

‘어쩌면 두 사람도 과거의 나랑 같은 걸까.’

그녀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동생들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쏟은 것처럼, 두 사람 역시 많이 어설프고 몰랐을 뿐 오드리아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녀를 한없이 사랑하는 걸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에이미와 노엘과는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까지 유난이라고 여겼던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중에서도 제레미아에게 ‘오라버니’라고 했을 때, 그가 눈에 띄게 당황하고 부끄러워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심지어 얼굴이 붉어지기까지 했었다.

‘한번 정도는…… 다가가 보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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