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외전
공작가의 과거
제국이 탄생하던 시기부터 트루디 공작가는 언제나 황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정점에 달한 시기는 바로 지금이었다. 지금의 트루디 대공이 젊었을 때 세운 수많은 공적과 전설처럼 따라다니는 일화는 트루디 공작가를 범접 불가한 가문으로 만들었다.
황제마저도 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제국을 위험으로부터 수호하는 가문이기에 더더욱 그의 명성은 끝없이 올라갔다.
트루디 공작가가 제국에서 원하는 것 중에 갖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가문의 사람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었다.
트루디 공작가의 축복이자 온 사랑을 받던 존재, 대공 부인인 레이첼이 두 번째 아이를 낳고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실패도 좌절도 모르던 인생에 처음으로 찾아온 엄청난 상실. 그녀의 부재는 트루디 공작가에 처음 닥친 비극이었다.
모두가 슬픔에 겨워 그 눈물이 어느새 강을 만들어 모두를 잠기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한참 동안 트루디 공작가는 멈춰 버렸다.
저택 너머 바깥세상과는 교류도 하지 않고 오로지 저택 안에 틀어박힌 채, 이 거센 슬픔의 풍랑이 조금이라도 잠잠해지길 기다리며.
그렇게 그들은 슬픔에 빠진 나머지 레이첼이 낳은 딸, 오드리아 트루디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레이첼이 죽고 반년이 흘렀을 때였다.
트루디 대공은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정신을 차렸다. 레이첼의 죽음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과 레이첼의 딸, 오드리아를 생각하지 못했다.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오드리아의 유모인 메릴이 그녀를 보러 오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오드리아의 방 앞에서 몇 번이고 망설였다. 이제야 겨우 대면하는 것이다.
반년 동안 아이가 얼마나 자랐는지, 어떤 모습일지 걱정되는 마음에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아이가 놀라지 않도록 최대한 인기척을 내지 않고 다가갔다.
오드리아의 얼굴이 보일 듯 말 듯해 애가 탔다. 얼굴을 조금이라도 잘 보기 위해 고개를 앞으로 뺐을 때였다.
“으아아앙!”
방금 전까지 방긋거리며 웃던 오드리아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아기씨. 울지 마세요. 아버님하고 오라버니세요.”
메릴이 당황하여 오드리아를 달랬다. 하지만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으아아아앙! 아아앙!”
오드리아가 숨이 넘어갈 기세로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무서운 것을 봤다는 듯이 세상이 떠나가도록 우는 아이를 보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 아기씨. 진정하세요. 괜찮아요. 쉬이이…….”
메릴이 서둘러 오드리아를 품에 안고 흔들흔들 움직이면서 등을 살짝 토닥였다. 메릴이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난처한 얼굴로 봤다.
아이가 울기 시작한 것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얼굴을 본 직후였다. 두 사람이 무서워서 우는 것이다.
“이만 돌아가지.”
“네…….”
트루디 대공은 제레미아와 함께 방을 나왔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방금 전까지 멈출 줄 모르고 들리던 울음소리가 어느새 그쳐 있었다.
“하아…….”
“……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어깨가 나란히 처졌다. 짧은 한숨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너무 늦어 버린 걸까? 그 후 몇 번을 더 시도했지만 오드리아는 두 사람을 보기만 하면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그렇게 또다시, 반년이 흘렀다.
오드리아가 한 살이 되었다. 메릴의 품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아이는 방긋거리는 미소를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오드리아 님께서 말을 떼셨습니다.”
그동안 메릴이 오드리아에게 몇 가지 단어를 반복해서 알려 주었다. 엄마, 아빠, 오빠. 이 세 가지 단어를 어눌하지만 말할 수 있게 되자마자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트루디 대공에게 보고했다.
“그런가.”
트루디 대공의 대답은 생각보다 무미건조했다. 그녀의 성장을 보고받는 것은 즐거웠지만 과연 그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번 보러 와 주세요. 오드리아 님께서 분명 기뻐하실 겁니다.”
메릴은 포기하지 않고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에게 몇 번이고 말했다.
그날 밤이었다. 오드리아가 쌕쌕, 고른 숨을 내뱉으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 옆에 메릴이 오드리아를 보다가 잠들었는지 불편한 자세로 잠에 빠져 있었다.
그때 방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다. 어린 제레미아다.
잠들어 있는 오드리아는 제레미아를 보고 겁먹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난만하게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방문이 또다시 열렸다. 이번에는 제레미아가 들어올 때보다 문틈 사이가 더 많이 벌어졌다. 트루디 대공이었다.
“여긴 어째서!”
“지금 뭐 하는 거냐!”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동시에 터트린 말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온 거였는데 갑작스레 마주친 상황에 놀라 터져 나온 말이었다.
“으아앙~!”
그 순간 잠에서 깬 오드리아가 울음을 터트렸다.
“……!”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둘러 방을 빠져 나왔다.
“아이구, 아가씨. 깨어나셨네.”
두 사람이 나오자마자 한 박자 늦게 방 안에서 메릴이 오드리아를 달래는 목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방을 빠져나온 두 사람 사이에서는 서늘한 밤공기만이 돌았다. 어색한 공기. 서로를 흘깃 바라보다가 제레미아가 먼저 입을 뗐다.
“왜 갑자기 들어오셔서는.”
제레미아는 트루디 대공이 방해했다며 투덜거렸다. 오드리아를 조용히 보고 가려고 했는데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나와야만 한 상황에 대한 불만이었다.
“누가 널 이 시간에 돌아다니게 한 거냐. 내일 그놈을 보내라.”
트루디 대공 역시 지지 않고 말했다.
“읏…… 치사합니다!”
“먼저 시작한 건 너다.”
달밤이 유난히 밝은 어느 날에 벌어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싸움은 눈 뜨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유치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되는 공작가만의 비밀이 되었다.
결국 두 사람은 잠들어 있는 오드리아의 모습을 아주 잠시 잠깐 본 것이 전부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트루디 대공도 열심히 한다고는 했지만 제레미아를 키운 것은 레이첼이었다. 그녀가 하나부터 열까지 챙겼고 그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따랐을 뿐이다.
게다가 제레미아는 트루디 대공을 빼닮았다. 태어나기를 강골이었으며 성격마저도 그를 닮아 무심했다. 어릴 때부터 레이첼을 사이에 두고 다투었다.
그런데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과는 정반대였다.
레이첼을 닮아 연약해서 잘못하면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아직은 어리지만 분명 성격도 레이첼을 닮았으리라.
어린 여자아이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가까이 다가가면 이 아이를 망가트릴까 겁이 났다.
레이첼이 있었더라면 그녀가 알려 줬을 텐데.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없었다. 그녀를 똑 닮은 아이를 남겨 놓고.
제레미아도 아직 어렸다. 이제 고작 열 살.
아무리 또래에 비해 키가 크고 힘이 세다고 해도 마음까지 성숙할 리 없었다. 그런 아이에게 너무나도 사랑하는 엄마의 죽음은 세상의 전부를 잃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제레미아에게도 오드리아는 자신과는 다른 생명체 같았다. 함부로 만졌다가는 부러질 것 같은 연약한 생명체.
어째서 보기만 하면 울음을 터트리는 걸까.
무서운 걸까, 싫은 걸까, 낯선 걸까. 이유조차도 알 수 없었다. 오드리아가 울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무서워졌다.
혹시 이 아이도 잘못되면 어떡하나 싶어서.
멀리 떨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최대한 멀리 떨어져 그녀의 눈에 띄지 않게 숨었다.
그래서 오드리아가 더 이상 탈진할 정도로 울음을 터트리지도, 덜덜 떨지도 않도록.
그게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오드리아는 세 살이 되었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고 짧은 단어뿐인 말에 알아듣기도 힘들지만 뭔가 자기주장을 하고 싶어 하는 나이였다.
시간은 멈출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흘러서 다섯 살, 일곱 살이 되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아직까지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보면 눈물부터 흘리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어깨를 움츠리고 몸을 떨었다.
그런 그녀가 겁먹게 않게 두 사람은 여전히 멀리서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극소수의 최측근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 * *
모두가 사랑하는 대공 부인의 죽음, 그 이후로 아무도 찾지 않는 공작가의 영애.
고용인들은 당연히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오드리아를 원망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자신의 주인이 공녀에게 최소한의 것만 제공한 채 무시한다는 소문이 고용인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퍼져 나갔다.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트루디 대공이나 제레미아에게 직접 확인해 본 사람은 없었다. 그저 눈치로 확신할 뿐.
그렇게 두 사람 앞에서는 모두 입을 다물고 침묵을 유지했고, 자연스레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도 모르는 사이에 오드리아는 암묵적으로 공작가의 버려진 영애가 되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오드리아를 원망하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 다가가지 못해서 어쩔 줄 몰라 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가 열 살이 될 때까지 말도 안 되는 착각이 유지되어 온 것이다.
제레미아가 오전 훈련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종종종-.
인기척이 느껴졌다. 토끼 정도 되는 작고 가벼운 짐승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문제는 여기에는 그런 동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곳은 연무장에서 트루디 가문의 일원들이 머무는 본 건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후원이 있었고 동물들이 뛰어다닐 수 있는 작은 숲은 본 건물 뒤에 있었다.
침입자인가. 그럴 리 없지만 혹시 모를 가능성에 제레미아가 검집을 붙잡은 채 인기척이 나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
그곳에 있는 사람은 토끼도 침입자도 아니었다. 그의 여동생, 오드리아가 종종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하는 것을 목격했다.
‘오드리아?’
오드리아가 짧은 다리로 어딘가를 향해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오드리아는 자랄수록 점점 방에서 잘 나오지 않으려 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우연히 마주칠 수조차 없었다. 그런 오드리아가 밝은 얼굴로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제레미아는 감격스러웠다.
‘그런데 어디 가는 거지?’
저렇게 밝은 얼굴을 하고 어디를 가는 건지 궁금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그녀를 뒤쫓는 자신이 있었다.
그때, 오드리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제레미아는 반사적으로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는 단순히 뒤에 있는 꽃을 보기 위해 돌아본 거였지만 순간적으로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제레미아는 몸을 숨긴 채 해가 떨어질 때까지 후원에서 신나게 노는 오드리아의 모습을 지켜봤다.
‘오드리아가 후원에서 산책을 하다니!’
지금까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오드리아가 최근에 눈에 띄게 밝아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오전과 오후 내내 후원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도.
오드리아는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여전히 후원에 있었다. 제레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라도 오드리아를 볼 수 있다니.’
후원에서 제레미아가 지켜본 오드리아는 제레미아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웃고, 웃고, 또 웃고.
“오늘도 가십니까?”
“당연하지.”
제레미아는 후원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무가 많은 쪽에 자리를 잡고 눈만 빼꼼 내밀어 오드리아를 바라봤다.
그웬은 요즘 들어 제레미아가 창피해지려고 했다. 무뚝뚝하고 차갑고 냉정하고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게 흠이긴 하지만 멋있고 잘나고 빈틈없는 사람이었다, 그웬이 모시는 제레미아는.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가 그토록 혐오하던, 자신을 짝사랑하는 영애들이 하는 짓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그것도 그의 여동생을 상대로!
“하지만 본인은 전혀 모르시겠지.”
자신이 하고 있는 게 흔히 말하는 스토킹이라는 것을. 그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끄응-.
제레미아는 팔짱을 낀 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중차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미리 가서 기다릴까? 아냐, 멀리서 보고 돌아가면 어떡해. 그럼 우연히 마주친 척할까? 그래, 그게 제일 낫겠지.’
하지만 제레미아가 그 계획에 성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면 간단한 일인데, 어째서인지 제레미아는 근처에 다가가기는커녕 앞에 나타날 생각도 못한 채, 매일같이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그는 모를 것이다. 자꾸만 위로 올라가는 입술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지는 않더라도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결국 오드리아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그날따라, 오드리아가 후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제레미아는 한참을 기다렸다. 해가 저물 때까지.
결국 오드리아를 보지 못한 채 그가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오드리아가 후원에 오면 가장 자주 가는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제레미아는 재빨리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 오드리아는 없었다. 제레미아가 느낀 인기척은 오드리아에게 얘기를 듣고 스토커의 존재를 찾아내기 위해 온 메릴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정확하게 만났다.
“제, 제레미아 님?”
제레미아가 그대로 굳었다. 메릴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빠르게 판단했다.
“설마 제레미아 님이셨습니까?”
이어진 메릴의 설명에 제레미아는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그래.”
“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달려온 그웬은 그대로 돌이 되고 싶었다. 아니면 나비가 되기 전의 번데기 상태가 되고 싶었다. 부끄러움은 메릴도 제레미아도 아닌 그웬의 몫이었다.
“오드리아 님과 만나시겠습니까?”
메릴은 당장이라도 오드리아를 데리고 올 것 같았다. 제레미아가 서둘러 손을 뻗어 메릴을 붙잡았다.
“안 돼!”
“네?”
메릴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굳이 오드리아를 지켜봤다면 만나고 싶다는 뜻일 텐데, 어째서.
“아직은 알리지 마.”
제레미아가 메릴을 막았다. 그의 단호한 말에 메릴이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누군지 궁금해하시는데…….”
여기까지 확인하러 온 것도 오드리아가 이미 눈치를 채고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레미아의 말대로 알리지 않으려면 그녀를 속여야 한다는 것이다. 메릴이 주저하자 제레미아가 말했다.
“내가 곧 오드리아에게 직접 얘기할 거니까.”
“……네. 그리하겠습니다.”
그거라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제레미아가 직접 얘기하겠다고 말하자 메릴이 화색을 띠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긴, 남매간의 일이니 두 분이 직접 얘기하시는 게 맞지.’
메릴이 기뻐하며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그녀는 어쩌면 자신의 선의의 거짓말로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제레미아가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오드리아와 오랜 시간 동안 제대로 된 대화 한번 나눠 본 적이 없다는 것.
그래서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짝사랑하는 상대방에게 말 한마디 걸지 못해 주위를 배회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제레미아는 오드리아의 주위를 맴돌기만 했다.
오늘은 다가가야 하는데, 말이라도 한번 걸어 봐야 하는데, 내가 너의 오빠라고 인사도 해야 하는데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지켜보던 곳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다가가려고 하면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지. 오드리아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떠올리면 긴장이 된 나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드리아가 눈치를 채고 말다니.
다가갈 거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제레미아는 발길을 끊을 수 없었다. 오드리아가 넘어질 뻔한 것을 보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달려 나갈 뻔했다. 오드리아가 갑자기 돌아 봐서 뒤늦게 정신을 차렸지만.
‘역시 알고 있었어.’
이제는 가지 말자.
그렇게 결심했지만 하루를 채 넘기지 못했다. 제레미아는 훈련을 하고 일을 하는 중에도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걷다 보니 언제나처럼 후원이었다.
멀리서라도 밝고 씩씩하고 즐거워하는 오드리아의 모습을 보는 것이 제레미아에게는 휴식이자 힐링이었다.
결국, 용기를 내기도 전에 오드리아와 맞닥뜨렸다. 그 순간 심장이 발밑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 온 신경이 곤두서고 근육은 딱딱하게 굳어서 어찌할 줄 몰랐다.
제레미아를 똑바로 바라보는 동그랗게 반짝이는 눈빛. 그 눈을 마주한순간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녀의 입술이 오물거리며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모든 신경이 오드리아가 무슨 말을 할지에만 쏠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옆으로 퍼지는 듯하더니 ‘예쁘다’라는 한마디가 마치 주문의 한 단어처럼 울렸다.
제레미아는 훈련이 끝나면 후원에 간다. 이 사실은 오드리아를 제외한 공작가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후원에서 오드리아가 하루 종일 머문다는 사실 역시.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식사를 할 때였다. 트루디 대공은 식사 내내 뭔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헛기침을 했다.
“요즘 후원에 간다고.”
“네.”
제레미아가 무심하게 답했다.
“관심도 없던 후원은 왜.”
트루디 대공의 질문에 제레미아가 자신의 아버지를 빤히 쳐다봤다. 그가 자신에게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속이 뻔히 보였다. 제레미아가 무심하게 답하며 포크에 이미 꽂혀 있던 고기를 먹었다.
“예쁘던데요.”
“……!”
트루디 대공이 움찔하면서 제레미아를 봤다. 하지만 제레미아는 여전히 무심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래?”
트루디 대공의 목소리가 아련했다. 물기가 촉촉하게 묻은 목소리. 당장이라도 지난날을 떠올리며 감상에 빠질 것 같았다.
“네. 봄이라서 그런지 꽃이 예쁘게 폈더군요.”
“…….”
트루디 대공의 얼굴이 흙이라도 씹은 것처럼 흙빛이 되었다. 제레미아는 지금 의도적으로 그가 원하는 대답을 피해 가고 있었다.
“제레미아.”
“네.”
“너 지금…….”
트루디 대공의 심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제레미아 역시 모를 리 없는데 그는 무심한 척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후원에 가는 이유를 물어보신 거 아닙니까. 봄이라서 그런지 꽃이 예쁘게 펴서 시간 날 때 가서 봅니다.”
트루디 대공이 제레미아를 무섭게 쏘아보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식사를 거의 마쳐 갈 때쯤이었다. 음식과 함께 마시던 와인을 입에 머금은 제레미아가 갑자기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흐으응~.”
제레미아의 콧노래에 놀란 것은 곁에 있던 고용인들이었다. 제레미아와 트루디 대공의 눈이 마주쳤다.
“봄이라 그런지 기분이 좋네요.”
제레미아가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트루디 대공의 얼굴이 점점 험악해져 갔지만 제레미아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행동했다.
빠각-. 트루디 대공이 잡고 있던 포크가 부러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트루디 대공이 엄청난 발소리를 내며 식당을 나섰다. 소리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걸어간 자리마다 땅이 패었다. 제레미아의 도발 때문에 고용인들이 보수 공사를 해야 할 구역만 늘어난 셈이었다.
“흐으음~.”
트루디 대공이 분노한 상황에서도 제레미아는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며 기분 좋은 감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좋았던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다.
최근 들어 제레미아의 머리 위에는 먹구름이 따라다녔다.
“오드리아가…… 후원에 안 와.”
제레미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의 기분이 밑도 끝도 없이 가라앉은 이유는 그녀의 존재 때문이었다.
오드리아가 제레미아를 마치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갑자기 후원에 발걸음을 뚝 끊었다. 처음에는 아쉬웠고 그다음 날에는 걱정이 되었고 며칠이 지난 지금 제레미아는 상처받았다. 의기소침해졌다.
역시, 그때 마주친 게 문제인 거다. 스토커라고 생각한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나라는 사실을 알고 겁을 먹은 건가.’
온갖 생각이 들었다. 매일같이 후원에서 혹시라도 올지 모르는 오드리아를 기다리며 제레미아는 고민했지만 이유를 찾지 못했다.
만약 자신과 마주치기 싫은 거라면……. 그의 어깨가 또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오드리아가 최근 도서관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제레미아는 도서관에 들어가려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만약, 자신이 도서관까지 쫓아왔다는 사실을 알면 오드리아가 겁을 먹을 것이다. 이제 겨우 무서워하지 않는 거 같은데, 괜히 들어갔다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버릴 수도 있었다.
오드리아가 거부하면 제레미아는 다가갈 수 없다.
‘오드리아는 작고 연약하고 툭하고 잘못 건드리면 당장이라도 잘못될 것 같으니까.’
결국, 제레미아는 도서관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떠나지도 못한 채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러다 보니 오드리아가 넘어지기도 하고 나뭇가지에 찔리기도 했다. 도서관의 입구가 너무 높은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당장 수리하도록 했다. 오드리아가 돌아다니기 편하도록.
오늘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날이었다.
다만 오드리아가 그날따라 이상한 방향으로 산책을 하고 어느새 대장간까지 갔다는 점이 조금 달랐다.
* * *
“오셨습니까.”
집사장이 현관에서 트루디 대공을 맞이했다. 그는 외투를 벗어 집사장에게 맡기고 곧장 들어가려다 말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늘은 안 오나.’
얼마 전, 오드리아가 먼저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최근 오드리아가 많이 밝아졌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설마 먼저 인사를 해올 줄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날부터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마다 ‘혹시 오늘도…….’ 하는 마음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피게 되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오드리아는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더는 오지 않으려는 건가.’
트루디 대공의 어깨가 남들이 알아보지 못할 만큼 미세하게 늘어졌다.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오드리아한테 어떻게 다가가지?
“아무래도 오드리아가 날 피하는 거 같아.”
제레미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제레미아 님을 어려워하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웬의 말에 제레미아의 기분은 더욱 가라앉았다.
“어떻게 하면 가까워질 수 있는 거지?”
제레미아는 그 방법을 도통 알 수 없었다.
“저한테 방법이 있습니다.”
“뭐? 그게 뭔데?”
제레미아의 눈에 희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일단 친근감을 느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음, 그건…….”
그웬의 눈동자가 오른쪽 위를 향했다. 그도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었다.
“…….”
그럼 그렇지. 실망감에 제레미아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오늘은 도서관에도 오드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결국 포기하고 연무장으로 향하는데 화기애애한 기사들 사이에 오드리아가 보였다.
최근 기사들 역시 제레미아가 훈련이 끝나면 오드리아를 보러 후원으로 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드리아에게 관심을 보이는가 싶더니.
‘나도 저렇게 오드리아랑 같이 못 걸어 봤는데……!’
근데 저것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대화까지 하고 있었다.
제레미아는 기사들에게 당장 연무장으로 돌아가라고 눈빛으로 강하게 경고했다.
그리고 오드리아에게 용기를 내서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는데…….
“저 정말 괜찮아요. 여기부터 아는 길이거든요. 괜히 저 때문에 기사들까지 신경 쓰이게 하고…….”
오드리아가 먼저 가려고 발걸음을 돌렸다.
“잠깐…!”
지난 며칠 동안의 고민 때문이었는지 이대로 보낼 수 없다는 마음에 오드리아를 붙잡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그웬의 말이 떠올랐다.
‘오드리아가 나를 좀 더 편하게 대해 줬으면 좋겠어.’
어떻게 하면 좋지? 혼란스러운데 용기를 내서 말했다.
“좀 더 편하게 불러 줘…….”
말을 꺼내자마자 오드리아가 오히려 더 부담스럽게 느끼는 거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에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칠 때였다.
오드리아의 작은 입술에서 믿을 수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오라버니……?”
“……!”
오드리아가 불러 주는 ‘오라버니’라는 단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였다. 갑자기 팔꿈치에 낯선 감촉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잡아챘다.
“미, 미안해……!”
그게 오드리아의 팔이었다니!
제레미아는 곧바로 오드리아를 잡은 팔을 바로 놓았지만 이미 그녀의 팔에는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이래서 거리를 유지했던 건데.’
제레미아는 스스로를 탓했다. 아찔했다. 오랜 훈련과 참전 경험 때문에 제레미아는 뒤에서 갑자기 기습 공격을 당했을 때 반사 행동이 몸에 배어 있었다. 적이 아니라면 그를 뒤에서 갑자기 잡을 사람이 없었다.
실수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제레미아는 이질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트루디 대공을 닮은 것이다. 게다가 제레미아는 언제나 강한 힘을 키우기 위해 노력할 뿐, 이렇게 약하고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생물을 대할 때 어느 정도 힘을 줘야 하는지는 연습한 적이 없었다.
그게 결국 자신의 발등을 찍고야 말았다.
트루디 대공 역시 오드리아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진료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순간 화가 난 나머지 제레미아와 신경전만 벌이고 정작 오드리아에게는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나와 버렸다.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그를 찾아 오던 보좌관과 마주쳤다.
“각하.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
보좌관의 물음에도 트루디 대공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발걸음을 좀 더 빨리할 뿐이었다.
‘여린 몸으로, 부상까지 당한 상태에서 저런 미소를 보여 주다니.’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갑자기 울컥하면서 목 안에 뭔가가 걸렸다. 차마 그곳에서 꼴사납게 눈물을 보일 수는 없어서 트루디 대공은 급히 걸음을 옮겼다.
“혼자 있겠다.”
“네.”
대공의 보좌관이 문을 닫고 나갔다. 혼자 남은 트루디 대공의 눈가에 투명한 뭔가가 반짝였다.
“레이첼…… 미안해. 내가 지키지 못했어.”
그가 눈물을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의 어깨를 토닥여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이럴 때마다 트루디 대공은 레이첼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사실, 그의 보좌관은 트루디 대공이 복도 끝에서 두 번째 방에 혼자 들어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이미지를 지켜 주기 위해 모르는 척, 자리를 피해 줄 뿐이었다.
트루디 대공은 결국 밤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충동적으로 방을 나서 어딘가로 향했다.
깊은 밤이 내려앉고 사람의 인기척이 모두 사라진 시간에 오드리아의 방으로 은밀하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스르르-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온 트루디 대공이었다. 그는 어느새 오드리아가 잠들어 있는 침대에 다가갔다.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오드리아의 모습은 지독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가녀린 팔에 칭칭 감겨 있는 붕대가 눈에 띄었다.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더는 아프지 말렴.”
트루디 대공의 목소리가 애달팠다.
오늘 다친 오드리아를 본 순간 도저히 표정을 관리할 수가 없었다. 괴로운 마음에 얼굴이 일그러지고 결국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참느라 오드리아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도망치듯 돌아서야만 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이렇게 보는구나.’
지금 눈앞에 있는 오드리아와 대화는 나누지 못해도 마음 편하게 그녀의 모습을 천천히 볼 수 있었다.
트루디 대공은 잠들어 있는 오드리아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잠든 그녀의 머리카락이라도 쓰다듬고 싶지만 자칫 잘못해서 깨어날까 봐 그의 손길은 허공에 멈춰 있었다.
결국, 트루디 대공은 끝까지 오드리아의 머리카락에 손도 대지 못한 채 돌아섰다.
방을 나서자마자 그의 돌발 행동에 놀란 집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심히 그를 지나치려던 트루디 대공은 마침 생각나는 게 있어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뼈에 좋은 건 모두 사 와서 오드리아에게 보내도록 해. 지금 구할 수 있는 건 전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드디어 오드리아를 위해 해줄 수 있는 한 가지를 찾아낸 그의 입꼬리가 기분 좋게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