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공작가의 비밀
후원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오드리아는 시간이 한참 흐르도록 쉽사리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제레미아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의 모습이 여전히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은 이미 해가 저물어 어둑해지고, 멀리서 옐라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아 걱정되어 찾으러 온 것이다.
그런데 오드리아가 후원에 주저앉아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옐라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어느새 오드리아 앞에 도착한 옐라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흙 묻은 것 좀 봐.”
옐라가 오드리아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며 그녀의 드레스에 묻은 흙과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냈다.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괜찮아.”
오드리아가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럴수록 옐라의 걱정은 깊어졌다. 최근에는 이렇게까지 멍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설마 예전으로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옆에 붙어 있을걸. 잠깐 사이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옐라가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한 채 조심스럽게 오드리아를 일으켰다.
“어서 돌아가요. 목욕 준비할게요.”
“응.”
오드리아는 여전히 멍하니 대답하면서 제레미아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바라보았다.
“……?!”
그 순간, 제레미아가 사라진 곳 너머에 있는 정자가 눈에 띄었다. 정확히는 정자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이.
여기서 정자까지 거리상으로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자가 높은 곳에 있어서 후원이 전부 내려다 보였다.
물론, 이쪽에서도 정자에 있는 사람 정도는 똑똑히 확인할 수 있을 만큼은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연분홍색 머리카락을 지닌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저 사람은…….’
이미 제레미아를 만난 후였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남은 한 명일 수밖에 없었다.
트루디 공작가의 주인, 오드리아와 제레미아의 아버지, 제국에서 유일무이하게 대공의 호칭을 수여받은 트루디 대공. 그였다.
오드리아는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당황한 나머지 그를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트루디 대공의 얼굴은 보였지만 그의 눈빛이나 표정까지는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어떡하지.’
오드리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르며 방황했다.
‘그래도 인사하는 척이라도 취하는 게 낫겠지.’
하지만 오드리아가 뭔가를 하기도 전에 정자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트루디 대공이 등을 돌렸다. 그는 그대로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점점 멀어졌다.
그가 먼저 무시한 것이다. 그 순간, 오드리아는 진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먼저 무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오드리아가 꼴도 보기 싫어서 돌아선 것이라도 고마웠다.
오늘 하루 사이에 제레미아에 이어 트루디 대공까지 마주하는 건 부담스러웠으니까.
“저녁 드시기 전에 먼저 씻으셔야겠어요.”
옐라가 엉망이 된 드레스를 보며 말했다. 오드리아는 그런 옐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 * *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따뜻한 공기가 주위를 감쌌다. 보기만 해도 따뜻한 물에 오드리아가 발을 하나씩 집어넣었다.
“아으으-.”
오드리아는 뜨거운 물속에 눈 밑까지 몸을 담그며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옐라가 쿡쿡거리며 웃었다.
“아가씨는 가끔 나이가 많은 사람 같아요.”
“……헤헤.”
오드리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과거에 했던 버릇들이 나오곤 했다. 그중 하나가 애늙은이 같은 신음 소리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고생을 많이 한 나머지 몸 어디에도 성한 구석이 없었다. 목과 어깨는 근육이 뭉쳐서 풀리지를 않았고 앉아 있다가 일어날 때마다 허리는 욱신거렸다.
자연스레 따뜻한 물에 들어가면 찌뿌둥한 몸이 풀리는 듯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녀가 씻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옐라가 다가오자 오드리아가 욕탕 안에서 살짝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나 혼자 씻고 싶은데.”
“아가씨 혼자 씻으시는 건 힘들 텐데, 목욕할 때마다 그러시네요.”
옐라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아직 열 살짜리 어린아이였다. 혼자서 씻는 게 어설플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등에는 팔이 닿지도 않는다.
혹시라도 씻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었다. 안 된다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불편하면 그때 부를게. 응?”
오드리아가 먼저 옐라를 향해 씩씩하게 말했다. 이곳에서 지낸 지 시간이 꽤 지났다.
이제 메릴과 옐라에게도 익숙해졌다. 그녀들이 들어주기 곤란한 부탁에 곤란해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요령도 생겼다.
그녀들은 오드리아가 씩씩하게 원하는 것을 요구하면 쉽게 거절하지 못했다. 그녀의 변화가 반가운 것도 있었지만 의사가 당분간은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주라고 조언한 것도 영향이 있었다.
옐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드리아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이럴 때면 어린아이인 게 좋단 말이야.’
오드리아 트루디는 어리다. 그렇기 때문에 메릴과 옐라는 언제나 그녀를 걱정하고 돌보면서 혼자 뭔가를 하게 두지 않았다. 뭐든지 혼자 해내는 것에 익숙한 그녀는 그게 가장 불편했다.
“정말…… 제가 옆에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오드리아가 눈을 몇 번 깜박이며 보호본능을 자극하면 메릴과 옐라는 웬만해서는 그 부탁을 거절하지도 못했다. 그녀가 어리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기 때문에 제약이 많았지만 그만큼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도 많았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다.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뒷받침할 근거를 대며 열심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럼 앞에 있을 테니 불편한 게 있으면 꼭 부르세요. 알겠죠?”
“응!”
역시나 옐라는 오드리아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대신 마지막까지 신신당부를 한 뒤에 물러났다.
혼자 남은 오드리아는 따뜻한 물에 몸을 맡겼다. 정적이 흘렀다. 순간 오드리아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스스하게 소름이 돋았다.
후원에서 제레미아가 마지막에 한 말과 표정이 갑자기 떠오른 탓이다.
‘아까 그거…… 화낸 거 맞지?’
‘조심해’라고 말할 때 싸늘하게 굳은 표정. 그건 분명 불쾌한 얼굴이었다.
‘조심해’에 담긴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상황만 두고 봤을 때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드리아의 귀에는 마치 ‘앞으로 조심해.’라는 말로 들렸다.
경고하는 것처럼.
그러고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
순간 자신이 제레미아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 예쁘다…….
아니, 그건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지만 그것을 제레미아가 알 리 없었다.
“미쳤구나.”
오드리아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언제 봤다고, 그것도 남자에게 다짜고짜 예쁘다니. 게다가 그녀를 원망하는 사람한테.
순간 방심하고 말았다.
‘그래서 화낸 건가?’
오드리아의 고개가 바닥을 향했다. 충분히 당황스러울 상황이다.
게다가 그 말을 한 사람이 하필이면 오드리아, 그녀였다.
‘아무래도 맞는 거 같아.’
역시 가족들은 오드리아 트루디를 원망하는구나.
오드리아 트루디도 그 표정을 본 걸까? 그래서 점점 방에서 나오지 않게 됐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어리고 작은 이 아이가 한없이 불쌍해졌다.
씻고 나온 오드리아는 저녁을 먹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이미 짙은 밤이 되었다.
“오늘 하루도 재미있게 노셨어요?”
“……응.”
메릴이 미소를 지으며 침대를 정리했다.
오드리아는 그런 메릴을 빤히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오드리아 님, 오늘 밤도 편안한 밤 되세요. 저는 이만 물러나 볼게요.”
메릴이 정리를 끝내고 나가려고 할 때였다.
“메릴.”
오드리아가 그녀를 불렀다.
“네. 필요한 거라도 있으세요?”
메릴이 미소를 지으며 돌아보았다. 그녀는 오드리아가 침구 정리, 잠들기 전 차 한 잔 같은 것을 부탁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드리아에게 필요한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후원에서 제레미아와 트루디 대공을 연달아 만난 날부터 두 사람의 존재가 계속 신경 쓰였다.
그런데 두 사람에 대해 물어볼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메릴밖에 없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오드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씀만 하세요. 제가 말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요.”
메릴은 이미 그녀의 물음에 대답할 만반의 자세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호기심을 가졌다는 사실에 무엇을 물어볼지 기대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공 각하…… 께서는 어떤 분이야?”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오드리아가 지금까지는 전혀 교류가 없었던 트루디 대공에 대해 궁금해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일 거라는 생각에 오드리아는 돌직구적인 방법을 택했다.
다만 그녀가 망설인 것은 트루디 대공을 뭐라고 부를지였다.
그는 그녀의 아버지였다. 그러니 당연히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 같지만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오드리아 트루디가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을까? 왠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녀 역시도 아버지라는 단어가 도저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니까.
결국, 아버지라는 호칭 대신 대공 각하라는 표현을 썼다. 그저 가문의 주인을 부르듯이.
“각하요?”
메릴은 그녀의 물음에 내심 깜짝 놀랐다. 오드리아는 그동안 가족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물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지금 그녀의 궁금증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던 엄청난 변화였다.
‘먼저 다가가시려는 걸까?’
메릴의 얼굴에 기대로 인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녀는 성심성의껏 대답하기 위해 자세부터 고쳐 앉았다. 등을 꼿꼿하게 펴고 오드리아의 말을 경청했다. 그녀가 만족할 만한 대답을 해 주고 싶었다.
“굉장히 훌륭하신 분이죠.”
메릴은 오드리아가 트루디 대공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품을 수 있도록 최대한 장점들만 골라 말했다.
“공작가에 속해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대공 각하를 존경하고 있지요. 영지민들이 배곯을 일 없는 것 역시 각하 덕분입니다. 덕분에 공작가의 영지는 제국에서 가장 풍요롭지요.”
하지만 오드리아는 들을수록 메릴이 좋은 얘기들만 골라서 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정보는 그의 업적과 대외 평판이 아니었다.
“특히, 눈앞에서 각하를 가로막는 거슬리는 적들을 거침없이 무찌른 압도적인 모습은 아직도 많은 기사들에게 회자되고는 한답니다. 그 때문에 각하를 어려워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존경하는 마음이 더 크지요.”
“…….”
“대공 각하께서는 기사들도 저희 고용인들도 또 영지민들까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감사히 여기는 분이랍니다.”
오드리아는 메릴이 말한 것 중에 거슬리는 적을 무찌른다는 것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전쟁터에서 승리하기 위해 적을 무찌르는 것이 아니라 눈에 거슬리는 바퀴벌레를 밟아 죽이는 것 같은 이미지가 떠올리는 것은 착각일까.
메릴은 오드리아가 말이 없자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골몰히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아가씨?”
“그럼 제레미아 오라버니는?”
메릴의 부름에 생각에서 빠져나온 오드리아가 물었다. 이번에는 제레미아에 대해.
그 역시 트루디 대공처럼 좋은 부분에 대해서만 찬양하듯 말할 것이 보였지만 들어 보고 판단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순간 메릴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대답하기 곤란한 것처럼.
“제레미아 님은…… 어린 나이서부터 뛰어난 검술 실력과 학업 성취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말을 흐린 메릴이 식은땀을 흘리며 열심히 말을 고르고 있는 게 보였다.
“분명…… 각하를 이어 훌륭한 분이 되실 겁니다.”
마지막 말은 제발 그렇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드리아가 메릴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메릴이 머뭇거리며 답하는 이유는 제레미아는 트루디 대공에 비해 다혈질적이고 종종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트루디 공작가에 삼십 년 이상 근무한 베테랑 고용인들에 의하면 그 모습 역시 트루디 대공의 어린 시절을 닮았다고 하지만.
지금의 트루디 대공은 능수능란하게 감정을 절제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흥분하지 않았다.
트루디 대공은 분노할 때면 흥분하기보다는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는 편이었다. 그 모습을 눈앞에서 보면 제레미아의 분노보다 훨씬 더 무서웠다.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전쟁에서 공적을 세우셨답니다.”
그래도 최대한 있는 사실을 잘 추려내어 포장했다. 그게 오드리아의 눈에도 보인다는 것이 함정이었지만.
역시 제레미아 트루디는 조심해야 하는 건가. 오드리아는 메릴의 답변에 오히려 그를 위험한 인물로 정의했다.
“특히나, 적을 가차 없이 무찌르는 모습은 각하의 분신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라고 합니다.”
“…….”
게다가 메릴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칭찬이 아닌 다른 의미로 해석되었다. 전쟁에서 활약하는 그들에게 따라다니는 말은 경외였다.
그들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적을 해치우는 모습이 마치 전쟁의 화신 같다는 말은 제국민이라면 모두가 한 번쯤은 들어본 적 있는 말이었다.
전쟁에서의 활약상은 결국 제레미아 역시도 거슬리는 것은 가차 없이 베어 버린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게 꼭 전쟁터에만 한정될까.’
메릴의 의도와는 달리 오드리아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져 갈 때였다.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는 걸 눈치챈 메릴이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게다가 제레미아 님께서는 영애들께 인기가 굉장히 많으세요.”
메릴이 이번만큼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리고 그건 오드리아 역시 충분히 공감되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메릴이 한 말 중에서 오드리아가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를 떠나 그 외모로 인기가 없는 것이 더 이상했다. 얼굴 뜯어먹고 산다는 건 그를 위해 존재하는 말이었다. 게다가 그는 뜯어먹을 것이 얼굴 외에도 넘치도록 있으니까 더더욱.
그런데 메릴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다만, 제레미아 님께서 다가오는 영애분들을 워낙 싫어하시는데 간혹 눈치 없는 분들이 계셔서 호되게 당하기는 하지만…… 아하하, 제가 말이 너무 많았네요.”
메릴이 한창 말을 이어 가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아차, 하며 말을 멈췄다. 제레미아의 장점을 말하려던 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필요 없는 뒷말이 튀어나왔다.
그의 드높은 인기와 그의 경기에 가까울 정도로 강한 거부 반응은 언제나 한 세트였으니까.
“혹시…… 더 궁금한 게 있으신가요?”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메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제대로 된 답변을 하리라, 다짐하면서.
“아니. 이제 그만 쉴래.”
“벌써요? 좀 더 물어보셔도…….”
오드리아는 이미 이불 속으로 다리를 집어넣고 있었다.
더 이상은 대화를 이어 갈 생각이 없다는 명확한 표현이었다.
그녀는 어느새 이불이 목까지 올라오도록 덮고 눈을 감았다.
“알겠어요. 그럼 푹 쉬세요.”
메릴은 오드리아가 덮으면서 흐트러진 이불 끝 부분을 정리하며 말했다. 오드리아가 금세 흥미를 잃는 것 같아 아쉬웠다. 더 얘기해 드리고 싶었는데.
‘원하시는 대답이 아니었나.’
메릴이 입술을 달싹이며 오드리아를 살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이미 침대에 누운 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안락하게 조용히 지내고 싶은 것뿐인데.’
그런데 지난 며칠 동안 그녀를 지켜보던 사람은 제레미아 트루디였고 오늘은 트루디 대공까지 마주쳤다.
아무리 넓어도 같은 저택 안이니 얼마든지 마주칠 수 있지만 어쩐지 두 사람의 집요한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아주 작은 관심이라도 받고 싶지 않았다. 분명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까지 신경도 안 쓰던 가족들이 갑자기 오드리아에게 관심을 가지려고 하다니. 이건 분명한 위기였다.
‘이제 겨우 편하게 살아 보나 했는데.’
어째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앞으로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와 이렇게 마주치게 되는 건지 신경 쓰였다.
메릴이 나가지 않고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오드리아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고 눈을 감은 채 입술을 열었다.
“메릴. 나갈 때 불 좀 꺼 줘.”
“……네.”
이제 그만 혼자 있고 싶으니 나가달라는 뜻이었다. 메릴은 할 수 없이 창문을 단속하고는 불을 끄고 나갔다.
어둠만이 남은 방 안, 오드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한숨을 쉬었다. 왠지 지쳤다.
오드리아는 눈을 감은 채로 메릴이 한 얘기들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트루디라는 이름에 걸맞게 모두 전쟁에서 뛰어난 공적을 세울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너무 강하기 때문에 거슬리는 것들을 가차 없이 치워 버린다. 그게 오드리아, 그녀라고 해서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거슬리는 걸까.’
지금까지 오드리아 트루디는 병약하고 자신의 가족들이 무서워서 주로 방 안에만 있었다고 했다.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가족들의 눈에 띄지 않게 최대한 몸을 웅크린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오드리아가 변하면서 그들의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것이다.
‘오드리아가 갑자기 여기저기 돌아다니니까 거슬려서 그렇게 본 거였을까?’
갑작스러운 변화에 거부감을 일으키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충분히 그럴싸했다. 그동안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은 것은 오드리아가 눈에 띄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변화로 인해 그들의 일상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지금까지 보기 싫어서 방치해 놓은 아이가 그들의 반경에 들어오기 시작해서.
‘맞는 거 같아.’
오드리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후원에서 마주친 제레미아가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조심하라고 경고한 거야.”
거슬리게 눈에 띄지 말라고. 앞으로 계속 돌아다니면 그땐 각오해야 할 거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당분간 조심해야겠다.’
오드리아는 결심했다. 이제는 저택 안에서도 남들 눈에 띄지 않게 더 조심히 다니기로. 앞으로 펼쳐져야 할 평온한 일상에 괜한 걸림돌이 생기지 않도록.
이번만큼은 가족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부딪치지 않고 눈에 띄지 않은 채 성인이 될 때까지 무사평안하게 지내는 것이 그녀의 목표니까.
그러니 오드리아를 향한 그들의 부정적인 관심마저도 사라질 때까지만 행동반경을 줄이는 것을 선택했다.
그다음에 이 저택에서 나만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아내면 된다.
* * *
평소처럼 메릴이 오드리아의 머리를 빗겨 주면서 물었다.
“요즘엔 후원에 안 가시네요?”
오드리아는 최근 후원에 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예전으로 돌아가는 걸까 걱정을 했는데 그건 또 아닌지 종종 도서관으로 향하곤 했다.
그래도 방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져서 메릴이 조심스럽게 오드리아에게 물었다.
“그냥.”
오드리아는 별다른 말없이 웃었다.
침대에 누워 도서관에서 가져온 소설책을 읽었다. 메릴이 추천해 준 것이었는데 오드리아의 취향은 아니었다.
“도서관 좀 다녀올게.”
오드리아는 여전히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이제 공작가의 지형에도 익숙해져서 웬만한 곳은 전부 혼자 찾아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후원을 대신해서 도서관으로 간 것이다. 그곳이라면 두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도서관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곳이었다.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종류를 구분하지 않고 다양한 책들이 있었다. 그게 꼭 어려운 역사나 정치, 철학, 경제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림책부터 소설책, 동화책은 물론이고 외국어 책까지 있었다. 심지어 외국어 책은 기초부터 시작해서 고급 단계까지 단계별로 있어서 앞으로 해외로 갈 그녀에게는 딱이었다.
오드리아는 종종 외국어 책 중에 기초 단계인 것을 꺼내 공부하고는 했다.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은 그녀에게는 즐거움이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피해 온 것이지만 오드리아는 현재에 만족했다.
오늘도 방을 나서 도서관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걸음이 멈췄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전에도 오드리아는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있었다. 제레미아의 시선을 눈치챘을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이유 때문이다.
오드리아가 앞에 있는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앙상해 보일 정도로 나뭇가지가 없었다. 얼마 전에 오드리아가 실수로 긁혔을 정도로 가지가 무성한 나무였다.
주위에 있는 나무들도 오드리아가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을 만한 곳부터 나뭇가지가 있었다. 그 아래는 모두 인위적으로 친 것이다.
얼마 전에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던 곳은 어느새 돌멩이 하나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뿐 아니었다. 도서관의 입구는 문턱이 높았다. 아무래도 어린이가 사용할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설계 구조였다. 그래서 도서관에 들어가려면 양손으로 치마를 한껏 들어 올려 한 발짝씩 조심히 문턱을 넘어야 했다.
하지만 오드리아의 힘겨운 도서관 입성은 이틀도 가지 못했다. 자고 일어났더니 문턱이 사라져 있었다.
얼마 전부터 이런 일들이 반복해서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도서관까지 가는 길은 마치 레드카펫을 깔아 놓은 것처럼 변해 있었다.
“……?”
대체 누가 이런 짓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메릴과 옐라였다. 그녀의 건강 상태에 예민한 두 사람이 한 일인 건가.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돌멩이와 나뭇가지 정도는 그렇다 해도 도서관 입구의 문턱을 하루아침에 없애는 일을 메릴이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문제는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대체 누구지.’
오드리아는 도서관에 올 때마다 안을 한번 쭉 둘러보았다. 도서관은 높았다. 그리고 넓었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거대한 공간에 셀 수 없을 만큼의 책들. 3층 건물 정도의 높이였다.
처음 도서관에 왔을 때 그 모습을 보고 오드리아는 한동안 넋을 잃었다.
죽을 때까지도 다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서적들, 비현실적으로 높은 책장과 양옆에서 시작해서 한가운데에서 만나는 계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들이었다.
제도에도 백 년 전, 엔조 뷔르엘 후작이 죽기 전에 기부한 도서관이 하나 있었다.
그의 이름을 딴 엔조 도서관. 그곳은 일반 백성들이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도서관이기도 했다.
오드리아는 그곳을 좋아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곳에서 하루 종일 책을 읽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하지만 공작가의 도서관은 엔조 도서관에서는 볼 수 없는 도서들로 가득했다. 오드리아에게는 보물창고여서 후원 못지않은 색다른 매력이 있었다.
양옆에 있는 계단 중에서도 오른쪽 맨 위에서 두 번째 계단. 오드리아는 그 자리에서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주로 트루디 공작가에 관한 책을 읽었다. 트루디 공작가는 유명세에 비해 알려진 바가 별로 없었다.
오드리아는 사업을 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그것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
지금 오드리아에게 필요한 것은 공작가에 대한 정보였다. 그리고 공작가의 도서관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트루디 공작가에 관한 서적들이 책장 한 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트루디 공작가는 제국이 건국될 때부터 황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가문이었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가문이 아니었다. 아닌 만큼 책자도 넘쳐났다.
책장에는 그림첩도 있었다. 선대와 선선대, 그보다 더 이전 공작 부부의 그림첩들.
크기와 상태로 보아 이 그림첩은 단순 기록용일 확률이 컸다.
‘아마, 진짜 제대로 된 그림첩은 따로 보관 중이겠지.’
오드리아가 가장 끝에 있는 그림첩을 펼쳤다. 그 안에는 레이첼 트루디가 살아 있을 때 그린 가족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금발 머리에 하얀 피부, 그림인데도 느껴지는 다정한 시선, 살짝 올라간 입꼬리. 레이첼 트루디는 그림으로 보는데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림첩에서마저도 트루디 대공의 시선은 레이첼에게 향해 있었다.
그림 같은 가족. 그림으로 기록되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이 그림이 그려지는 동안 그들이 얼마나 행복했을지가 오드리아에게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무 상관도 없는 오드리아마저 뭉클하게 만들 정도로.
이러니 오드리아 트루디가 위축될 수밖에. 이 행복을 자신이 깼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오드리아 트루디는 그런 죄책감에 빠질 이유가 없었다.
오드리아는 그림첩을 덮었다. 괜히 울적해졌다. 갑자기 도서관 안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바람이라도 쐴까.’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오드리아는 도서관을 나와 그 주위를 천천히 걸었다.
도서관 근처에서만 산책하려고 했는데, 오늘따라 날씨가 너무 좋았다. 하늘은 파랗고 유난히 신기한 구름 모양이 많고 선선한 바람에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조금만 더 걸어야지, 저기 보이는 코너만 돌아야지, 저기 있는 나무까지만 가야지, 하다 보니 오드리아는 어느새 도서관에서 꽤 떨어진 곳까지 와 버렸다.
“여기가 어디지?”
공작가의 구조는 거의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반대로, 또 반대로 걷다 보니 처음 보는 곳이었다.
‘혹시 연무장인가.’
연무장이라면 후원이랑 이어지는 길이 있었다.
그 길을 찾으려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데 때마침 기사들 여럿이 연무장에서 나오고 있었다.
“여기에 어린애가 왜 있지?”
“꼬마야. 너 여기 왜 있어?”
기사들이 오드리아를 발견하고 다가오려고 할 때였다.
“잠깐만! 저 머리…….”
기사들 중 한 명의 발언에 모두의 시선이 오드리아의 머리로 향했다. 그녀의 연분홍색 머리색을 뒤늦게 눈치챈 그들의 눈이 커졌다.
“오드리아 님……?”
“오드리아 님 맞으십니까.”
기사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드리아는 왠지 모르게 상체를 뒤로 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서로 시선을 주고받던 기사들이 동시에 씨익, 미소를 지으며 오드리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들이 정중하게, 하지만 부담스러운 눈빛을 쏘며 물었다.
“길을 잃어서…….”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저희가 알려 드리겠습니다.”
“혹시 그곳까지 데려다 드릴까요?”
오드리아가 대답을 하자마자 기사들의 말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방에 돌아가려고…… 근데 알려 주기만 하면 알아서 갈 수 있는데…….”
사방에서 쏟아지는 눈빛에 오드리아가 당황하며 말했다.
‘이 사람들은 왜 나를 반기는 거지.’
기사들은 오드리아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레이디를 지키는 건 기사의 의무인데 그럴 수는 없죠.”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그들이 앞장서서 안내했다.
“어서 오십시오.”
“왜 재촉을 하고 그래. 오드리아 님,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응.”
오드리아는 얼떨결에 기사들을 따라갔다.
“오드리아 님 방으로 가시려면 후원을 지나가시는 게 빠를 듯합니다.”
기사 중 유난히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 자가 말했다.
“이렇게 오드리아 님을 뵈어서 영광입니다.”
“맞습니다. 저도 꼭 뵙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다니 상상도 못 했습니다.”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후원까지 정신없이 가고 있을 때였다.
“요즘 오드리아 님이 활기차신 거 같아 다행입니다.”
“그래서인지 제레미아 님도 얼마 전부터…….”
“……?”
기사들의 입에서 제레미아가 나왔다. 제레미아가 왜? 오드리아가 호기심을 가졌을 때였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어느새 후원에 다다랐을 때였다. 오드리아와 기사들의 눈앞에 제레미아가 있었다.
“오드리아 님께서 길을 잃어버리셨다고 해서 저희가 모셔다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게 넷이나 같이 해야 하는 일인가.”
이런, 아무래도 기사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네……? 저희는 좋은 마음으로 다같이…….”
그런데 제레미아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기사들을 훑어보았다.
아무래도 그 이유는 오드리아 때문인 것 같았다. 그녀는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부터는 가는 길을 아니 나 혼자 갈게…….”
“그래도 끝까지 같이 가 드리겠습니다.”
그 와중에 기사 한 명이 나서서 말했다.
“아냐. 정말 괜찮아!”
오드리아가 고개를 도리질 치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아쉬워했다.
“그럼 저는 가 볼게요…….”
오드리아가 제레미아에게 꾸벅 인사하고 돌아가려고 할 때였다.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잠깐!”
오드리아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제레미아를 돌아보았다. 그는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네?”
오드리아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라 봤다.
“그…… 내가 데려다줄까?”
“네?”
오드리아는 ‘네?’밖에 나오지 않았다. 기사들은 어느새 쭈뼛거리며 물러난 후였다.
“저 정말 괜찮아요. 여기부터 아는 길이거든요.”
“그래도…….”
“괜히 저 때문에 기사들까지 신경 쓰이게 하고…….”
오드리아가 돌아가기 위해 발을 살짝 옆으로 틀었을 때였다. 그 미세한 움직임을 눈치챈 제레미아의 눈이 커지고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초조하게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겨우 입을 열었다.
“왜…… 피하는 거야.”
제레미아의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오드리아는 단번에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피하다니. 무슨 얘기지?
그는 오드리아가 자신을 피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 저 때문에 거스, 불편해하시는 거 같아서요…….”
오드리아가 방금 전 제레미아의 불편한 표정을 떠올리며 말했을 때였다.
그런데 오드리아의 말에 제레미아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마치 풀 죽은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만약 강아지라면 그의 귀가 아래로 축 처져 있을 것만 같았다.
제레미아는 시무룩한 모습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항변을 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았다.
“아니야…….”
“……?”
처진 귀가 쫑긋 올라오는 것 같더니 제레미아가 오드리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에 불과했지만.
“안 불편해, 싫어하지 않아!”
“……?!”
“오히려! ……아니, ……그냥, 아니라고…….”
제레미아가 오드리아의 눈을 똑바로 보고 점점 소리를 높이더니 갑자기 다시 줄어들며 말끝을 흐렸다. 더 이상 오드리아의 눈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럼……?”
오드리아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면 대체 뭔지.
왜 계속 지켜보고, 그러다 정작 눈이라도 마주치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자리를 피해 버리는지? 그게 불편하지 않으면 뭐였던 거지.
“그럼 왜…… 저를……?”
“절대 안 싫어해. 그것만은 확실해!”
왜 계속 피하는 건지 오드리아가 제대로 묻기도 전에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오드리아의 눈으로는 좇지 못할 정도였다. 알 수 없는 말을 내뱉고는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오드리아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오드리아는 당연히 제레미아가 그녀를 싫어하고 원망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저주를 할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그가 오드리아에게 하는 행동은 전부 부정적으로 보였다.
전제 조건이 원망이니 당연했다.
다른 방향으로는 가능성조차 떠올려 보지 않았다. 그런데 아니라니. 그럼 뭐지?
오드리아는 고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전 제레미아의 표정은 오드리아를 싫어하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게다가 끊어질 듯 불안한 목소리로 외치던 말은 거짓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애초에 그가 오드리아에게 변명을 하고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혼란스러웠다.
제레미아가 이상했다. 그녀의 예상을 벗어난 반응의 연속이었다. 오드리아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해 오던 것들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 보자.’
오드리아는 제레미아의 행동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지난번 후원에서 마주친 이후로 오드리아는 그가 멀리서 보일 때마다 자리를 피하고는 했다.
그렇게 며칠 만에 마주쳤고, 오드리아가 자리를 피하려고 하자 제레미아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오드리아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변명하듯 강조하자마자 도망치듯 사라져 버렸다.
“…….”
오드리아는 제레미아가 사라진 곳을 보며 무심코 생각했다.
‘관심받고 싶은 건가.’
그는 마치 관심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외면받는 게 싫고 서운하고 섭섭하고.
오드리아 자신이 생각해도 웃긴지, 황당한 미소를 지었다.
‘에이, 설마.’
오드리아는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아닐 거야.’
말도 안 된다.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생각이었다. 이거야말로 자의식 과잉이지. 오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
오드리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정말 그런 거면 어쩌지.’
하지만, 왜. 여동생에게 관심 받고 싶고 친해지고 싶으면 다가와서 얘기하면 되는 일이다. 지금까지 무신경하다가 갑자기 왜.
제레미아의 행동을 하나씩 짚어 보니 새로운 가능성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드리아를 멀리서 지켜보았다.
누군가를 훔쳐보는 건 보통 두 가지의 경우였다. 적의를 품은 자가 상대의 허점을 노리기 위해 지켜보는 것과 정반대로 호감을 품은 경우.
그런데 오드리아는 그녀가 공작가의 버려진 영애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른 한 가지의 경우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가능성이 슬그머니 부상했다.
오드리아 앞에서 경직되는 얼굴, 애타게 부르던 목소리, 살짝 붉어진 얼굴, 눈이 마주치자마자 피하고 말 몇 마디를 하자마자 힘겹다는 듯이 도망을 친다.
‘지금까지 왜 전혀 몰랐지.’
제레미아의 행동을 모두 모아 보니 너무 빤히 보여서 피식, 하고 미소가 새어 나왔다. 그동안 왜 눈치채지 못했지? 오히려 몰랐다는 것이 더 이상했다.
‘편견이 이렇게 무서운 거지.’
그가 오드리아를 싫어할 것이라고 단정을 지은 후에 판단하다 보니 모두 거기에 맞게 퍼즐을 끼워 맞추고 있었다. 눈을 가리고 열심히 추측을 해 봤자 맞출 수 있을 리 없었다.
오드리아는 그동안 제레미아가 보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제레미아 트루디는 오드리아 트루디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부끄러워하는 거였어.’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것도 너무 좋아서였던 거지.’
이제는 다른 의미로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공작가의 버려진 영애가 알고 보니 열성적인 관심을 받고 있었다니.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근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게다가 언제나 냉철하고 무섭다는 제레미아의 부끄러워하는 얼굴이라니. 분명 다른 사람이 그 모습을 봤다면 무사하지 못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엄청난 사실을 알아버린 거 같은데.’
오드리아는 어쩐지 공작가의 어처구니없는 비밀을 알아 버린 것 같았다. 제국에서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을.
* * *
새롭게 눈을 뜬 것 같았다. 생각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그 결과, 앞으로 이곳에서 지내는 방법에도 여러 개의 길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머리는 복잡했다.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새로운 가능성이 한꺼번에 쏟아졌기 때문에 더더욱.
‘오히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단 한 번도 오드리아 트루디가 공작가에서 사랑을 받는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녀가 공작가의 버려진 영애라는 것이 기정사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다른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두 눈으로 보고 겪은 상황은 전혀 달랐다.
제레미아 트루디는 오드리아 트루디에게 다가오고 싶어 했다.
‘근데 왜 이런 오해가 생긴 거지?’
어째서 오드리아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사람들은 그녀가 공작가의 버려진 영애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으며, 제레미아는 마주칠 때마다 도망치는 걸까.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오드리아는 자연스럽게 트루디 공작가의 또 다른 일원, 제레미아와 오드리아의 부모인 트루디 대공이 떠올랐다.
그럼 트루디 대공은 무슨 생각이지?
트루디 대공도 제레미아와 같은 이유인 것일까, 아니면 그는 오드리아를 원망하고 있는 것일까. 두 사람이 같은 입장이라는 확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만약 트루디 대공이 소문대로 오드리아를 원망하는 게 맞다면 그녀가 공작가의 버려진 영애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트루디 대공 역시 제레미아와 마찬가지일 때지.
‘그래. 아직 확실한 게 아냐.’
오드리아는 그것부터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녀 혼자서 추측하는 것은 결국 불확실하다.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서는 제레미아처럼 직접 보고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
‘그나저나 일단 한 번은 마주쳐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텐데.’
제레미아는 오드리아 주위를 맴돌기에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트루디 대공은 달랐다.
그와 마주친 것은 지난번 후원에 있을 때 멀리서 눈이 마주쳤던 것이 전부였다. 어디로 가야 그와 마주칠 수 있지?
오드리아는 고민 끝에 그를 만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을 떠올렸다.
‘일단 나가면 문을 통해서 돌아오니까.’
이럴 때는 수만 가지 고민보다는 한 번의 행동이 더 많은 것을 알게 해 준다는 것을 아는 오드리아는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오드리아는 의도적으로 트루디 대공과 마주칠 법한 곳으로 향했다. 지금까지는 절대 발걸음하지 않던 것과 반대였다.
그녀가 알기로 지금쯤이면 트루디 대공이 외출했다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저택 현관 주위에서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트루디 대공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는 오드리아를 못 보고 지나치려고 했다.
그가 완전히 등을 보이기 전에 오드리아가 서둘러, 하지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오드리아가 트루디 대공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작은 두 손을 포갠 채로 조심스럽게.
“오드리아…….”
갑자기 다가와 인사하는 모습에 트루디 대공은 살짝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들어오시는 거예요?”
오드리아가 그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대화를 이어갔다.
“…….”
하지만 트루디 대공은 오드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더 이상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저는 산책을 하고 있었어요.”
게다가 오드리아가 말을 이어갈수록 트루디 대공은 오히려 화가 난 듯 눈썹 끝이 올라갔다. 그리고 점점 좁아지는 미간, 굳게 닫힌 채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 입술.
그 무엇 하나 그녀를 반기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갑자기 앞에 나타난 오드리아의 모습에 불쾌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드리아는 확신했다. 트루디 대공의 얼굴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역시 싫어하는 건가.’
트루디 대공은 제레미아와 달랐다.
싸늘한 눈빛, 불쾌한 것 같은 표정. 마치 눈앞에 거슬리는 벌레를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것처럼. 오드리아는 분명 트루디 대공의 눈빛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럼 그렇지.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 리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트루디 대공은 오드리아를 싫어한다.
‘앞으로 트루디 대공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자.’
괜한 오해와 착각으로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다.
“……그렇구나.”
너무 낮아서 들릴 듯 말 듯한 대답과 함께 트루디 대공은 넓은 보폭으로 오드리아를 지나쳐 갔다.
그녀를 보고 있는 것 자체가 곤혹스럽다는 얼굴을 하고서.
혼자 남은 오드리아는 확신했다. 앞으로도 오드리아 트루디는 공작가의 버려진 영애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오드리아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역시 직접 확인하기를 잘했다.
그럼 그렇지. 숨겨진 비밀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트루디 대공은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얼어붙을 것 같았다. 여전히 등 뒤에서 느껴지는 제레미아의 어쩔 줄 모르는 시선과는 전혀 달랐다.
공작가의 버려진 영애라는 소문은 틀리지 않았다. 그보다 지금의 제레미아가 잠시 변덕을 부리고 있다는 쪽이 더 가능성 높았다.
오드리아는 산책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에 잠긴 채 걷다 보니 평소 오지 않던 곳까지 와 버렸다. 이제는 저택 내부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새로운 곳이 나오고는 했다.
‘얼른 돌아가자.’
오드리아가 다시 몸을 돌려 돌아가려고 하는데, 트루디 대공을 봤을 때 보았던 보좌관이 복도 끝에서부터 두 번째 방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
그의 어딘가 은밀해 보이는 움직임이 오드리아의 호기심에 불을 붙였다.
어린 나이에 어른이 되어 언제나 참고 희생하고 책임감이 강한 모습이기에 사람들이 자주 착각하는 것이 있었다. 사실 오드리아는 호기심이 많고 간혹 무모한 일을 충동적으로 한다는 것을.
지금 이 순간처럼.
오드리아는 보좌관에 이어 호위까지 조용히 자리를 뜨는 모습에 호기심이 일었다.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조심히 다가가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방 안을 살폈다.
‘아무도 없나?’
방 안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니었나. 오드리아가 다시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흑.”
분명 안에서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누가 울고 있는 건가.
오드리아는 안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안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눈이 조금씩 익숙해지다 보니 어둠 속에서 인영이 보였다.
“……!”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을 확인한 오드리아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양손으로 입을 꽉 막고 숨을 멈췄다. 그녀가 들은 울음소리의 주인은 다른 누구도 아닌 트루디 대공이었다.
오드리아는 순간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초점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두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기지가 않았다. 어쩌면 착각일 수도. 그래, 차라리 그런 게 더 납득이 갔다. 분명 둘 중 하나는 오드리아가 착각한 것이 분명했다.
방금 전 들은 소리가 흐느끼는 것이 아니었거나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트루디 대공이 아니거나.
“흡, 레이첼…….”
“……!”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신이 안다면, 분명 기뻐할 거야…… 오늘 오드리아가 내게…….”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그는 아마도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며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드리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넋이 나간 듯 멍한 얼굴을 하고서 생각했다.
‘뭐야?’
둘 다 착각이 아니었다. 방 안에 있던 사람은 트루디 대공이었고 분명 흐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그의 부인이자 오드리아의 어머니를 부르며.
오늘 그녀가 트루디 대공에게 인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얼떨떨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언제나 흔들림 없이 위엄을 지키는 트루디 대공의 눈물이라니, 상상은커녕 직접 두 눈으로 봐도 믿기지 않는 장면에 오드리아는 살짝, 아니 많이 당황스러웠다.
지금 이 모습을 목격해도 괜찮은 것일까 하는 걱정부터 들 정도였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당황하면서도 바로 돌아가지 않고 트루디 대공의 뒷모습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벽에 걸린 초상화를 보며 오드리아와 있었던 얘기를 하고 있었다.
“오드리아가 내게 인사를 했어.”
감동을 받은 것처럼 울먹이며 말했다. 오드리아가 방금 전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좀 더 보고 싶었는데……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그가 아쉬움이 뚝뚝 흘러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오드리아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이거…… 아무래도 맞는 거지?’
그의 말대로라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서둘러 자리를 떠난 것이었다.
‘트루디 대공도 오드리아를 좋아하는 거였어. 그럼 아까는 뭐였지?’
분명 불쾌한 표정을 하고 지나쳤는데. 오드리아는 혹시 자신이 놓친 것이 있었는지 그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좁아지는 미간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표정. 오드리아를 보고 화가 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너무 긴장해서 나온 행동이었나? 근육이 굳으면서 수축되는 것처럼.
‘……긴장해서 그랬던 건가.’
그 트루디 대공이 긴장이라니, 쉽게 납득되지 않았지만 제레미아를 떠올리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드리아는 방까지 어떻게 돌아갔는지, 그사이에 누구와 마주쳤는지 전혀 알지 못할 만큼 충격을 받았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모두 오드리아를 원망하기는커녕 좋아한다. 그런데 다가오지 못한다. 그렇게 모두의 오해는 깊어져만 갔다. 그것이 오드리아가 내린 결론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오드리아 주위에 결계라도 쳐져 있는 것처럼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절대 다가오지는 않네.’
시선이 느껴진다 싶으면 한참 멀리 그들이 있었다.
제레미아와는 그래도 몇 번이나 마주치고 나름 대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나누기도 했는데도 그의 포지션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멀리서 오드리아를 지켜보기만 했다.
그녀는 미술 작품도 깨지기 쉬운 조각도 아닌데, 다가오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굴었다.
이걸 어떻게 하지.
제레미아가 훔쳐보는 이유는 이제 명확했다. 오드리아가 좋다. 그래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지켜보고 싶다. 하지만 다가갈 수는 없다.
사실, 이 부분이 조금 애매했다. 왜 다가오지 못하는 거지.
지금 그의 모습만 놓고 보면 낯을 가리고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제레미아가?
눈으로 보고도 제레미아가 부끄러워한다는 걸 쉽게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지금까지 오드리아는 어머니, 레이첼의 죽음 때문에 혼자 고립된 채 외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게 알고 보니 모두 착각이었다고?
‘그런데 그게…… 모두 오해였다고 설명하고 넘어갈 만큼 간단한 문제인가.’
오드리아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어린아이에게 정을 주고 먼저 다가가는 것은 어른의 역할이다. 하지만 오드리아 트루디는 사랑은커녕 관심 하나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지금도 그녀가 알아내지 않았다면 진짜 오드리아 트루디는 두 사람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평생 자책하며 괴로워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제레미아와 대공 모두 다른 의미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오드리아는 이골이 나 있었다. 언제나 동생들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살피고 동생들이 삐치거나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킬 때마다 그녀는 먼저 동생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니 더더욱 두 사람이 용서되지 않았다.
아무리 오해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10년 동안 오드리아 트루디를 방치하다시피 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애정을 믿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책임 없는 동정심과 애정 어린 방치가 섞여 있는 지금 이 상태가 좋을지도 모른다. 호감이 있는 이상 오드리아 트루디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을 테니까.
적당한 거리감. 오드리아는 그것을 유지할 생각이었다.
* * *
“오늘도 도서관으로 가실 거예요?”
아침 식사를 끝내고 오드리아가 나가려고 하자 메릴이 물었다.
“……아니. 오늘은 후원에 갈래.”
더 이상 제레미아를 피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동안 못 갔던 후원을 오늘 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그녀가 어디에 있든 그곳에는 제레미아가 있을 테니까. 오늘 그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후원에 다시 가시는 거예요?”
“응.”
후원에 간다는 말에 메릴은 왠지 기뻐보였다.
“그럼 드레스도 다른 걸로 입혀 드릴까요?”
메릴이 물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이미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굳이 갈아입을 필요가 없었다. 그걸 아는데도 메릴은 다른 옷을 입겠냐고 묻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메릴이 지난번에 후원에 가는데 활동하기 불편할 정도로 거추장한 드레스를 입힌 것이 떠올랐다.
‘혹시, 메릴은 나를 훔쳐보는 사람이 제레미아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됐다. 갑자기 후원에 있는 스토커의 존재를 부정한 것도, 움직이기에는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입힌 것도, 어차피 다 풀어질 텐데 공들여 머리를 만진 것도.
“아니. 지금 입은 게 좋아.”
오드리아는 단호하게 거부하고 그대로 방을 나섰다.
오랜만에 후원에 오니 좋았다. 여전히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고 계절이 무르익으면서 향기 역시 진해졌다.
꽃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진다. 하지만 오드리아에게 있어 꽃은 다른 의미로 중요했다.
오드리아가 사업을 할 때 꽃은 매우 중요한 아이템이었다. 꽃의 모양을 따 액세서리를 만들기도 하고 꽃을 이용한 치료제를 만들기도 했으니까.
“……?”
오드리아가 후원에 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 제레미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오지 않는 건가.
‘역시 한때의 호기심이었나?’
오드리아가 그럼 그렇지, 라고 생각할 때였다. 부스럭, 전과는 다른 인기척이 들렸다. 소리가 난 방향을 보니 제레미아가 있었다.
제레미아는 이미 오드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가 아니라 분명히. 하지만 그 자리에 발이라도 묶인 것처럼 다가오지는 않았다.
원상 복귀.
그는 다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오드리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 발짝, 오드리아가 다가가면 도망치지는 않지만 어깨를 움찔하며 그대로 굳었다.
누가 봐도 제레미아가 사자, 오드리아가 토끼일 텐데 취하고 있는 자세는 정반대였다. 마치, 오드리아가 사자가 되고 제레미아가 연약한 토끼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서운 맹수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오자 겁을 먹은 동물이 신경을 곤두세운 채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이대로는 제레미아가 오드리아가 있는 곳으로 다가올 것 같지 않았다.
지난번에 오드리아를 싫어하지 않는다고 안절부절못하면서 표현하기에 이제 좀 달라지지 않을까 했는데.
그래서 오드리아를 향해 다가오면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고민하기도 했는데.
‘다시 평행 상태네.’
달라진 것이라고는 어차피 들킨 거 더 이상 제레미아가 전처럼 완벽하게 숨어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제레미아의 머리카락, 소매 끝 부분, 그의 허리춤에 있는 검이 보였다.
그러고 나니 제레미아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오드리아를 지켜보는지 역시 새삼 알게 되었다. 제레미아는 거의 반나절 동안 오드리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다가오지도 않고 멀찍이 떨어진 채로 지켜보기만 하는데 지루하지도 않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하지만 집중한 그의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드리아는 그런 제레미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부끄러워서 다가오지 못한다기에는 오드리아를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오드리아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제레미아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몸이 움츠러들었다.
‘하아.’
오드리아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빙의한 아이가 공작가의 버려진 영애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다. 그리고 그녀의 오라버니인 제레미아 트루디가 그녀에게 관심이 많다는 것 역시 알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변하는 것은 없었다.
제레미아는 여전히 오드리아를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다.
오드리아의 머릿속에 이미지 하나가 떠올랐다.
잔뜩 경계하고 있는 고양이에게 고양이풀을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 고양이는 고양이풀에 시선을 빼앗기면서도 다가서도 되는지 아닌지 갈등한다. 제레미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지.’
오드리아는 고민했다. 자신의 주위를 맴돌기만 할 뿐 다가오지는 않는 제레미아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에 대해서.
제레미아는 스토커처럼 훔쳐보고, 트루디 대공은 남몰래 눈물을 훔친다. 제국에 도는 그들의 전설 같은 일화와 명성을 생각하면 상상도 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귀찮아.’
주위를 맴돌면서 정작 눈이라도 마주치면 도망간다. 제레미아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냥 모른 척할까.’
그냥 아무것도 모른 척 그가 훔쳐보든 말든 무시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사실, 오드리아는 그러는 편이 좋았다.
오드리아가 은근슬쩍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하든 제레미아가 다가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제레미아가 원하는 것은 멀리서 지켜보는 것이니까. 그녀가 규칙적으로 후원에 나오는 것만으로 만족할 것이다.
‘괜히 다가가지는 말자.’
귀찮으니까, 괜히 먼저 나서서 피곤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은 오드리아가 먼저 돌아섰다.
‘그냥 이대로 지내는 게 좋아.’
좋은 가문, 풍족한 돈,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 중에 하나가 틀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오드리아에게는 어떤 책임과 의무도 없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다만, 그 모습을 누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 시선이 굉장히 신경 쓰이긴 하지만.’
오드리아는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 걸음 내디뎠다. 제레미아를 신경 쓴 것만으로도 지쳤는지 오늘은 별거 하지 않았는데도 유난히 피곤했다.
등 뒤에서 제레미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오드리아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후원을 벗어났다.
“어……?”
제레미아는 점점 멀어지는 오드리아의 모습을 아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 *
오드리아는 오늘따라 제레미아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아는 척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시선이 따갑네.’
유난히 오드리아를 좇는 제레미아의 시선이 강하게 느껴졌다. 오드리아는 결국 평소보다 빨리 후원을 나가기로 했다.
오드리아가 몸을 돌려서 가고 있을 때였다.
“오드리아.”
그녀를 힘겹게 부르는 제레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드리아는 그대로 무시하고 갈까, 잠시 생각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돌아서서 제레미아를 바라보았다.
“네?”
그런데 마땅히 돌아와야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
“…….”
“…….”
제레미아는 오드리아를 봤다가 눈이 마주치면 몸을 움찔하며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순간, 오드리아는 에이미와 노엘이 떠올랐다. 두 동생은 오드리아에게 잘못을 해서 눈치를 보거나 부탁이 있을 때 지금의 제레미아와 비슷한 행동을 했었다.
망설이듯이 오드리아를 부르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꼬리를 늘렸다. 그러면 마음이 약해진 오드리아가 먼저 동생들의 어깨를 감싸 주며 잘못이 있으면 용서해 주고 부탁이 있으면 무리를 해서라도 들어주었다.
과거를 떠올린 오드리아의 얼굴이 단호하게 굳었다.
오드리아는 이대로 돌아서 가려고 했다.
“저 가 볼게요.”
그래도 마지막 인내심을 붙잡고 예의상 말했다.
“갈…… 거야?”
그러자 제레미아가 눈이 커지며 다급하게 말했다.
“네. 돌아가려고 해요.”
“……그렇구나.”
오드리아가 똑 부러지게 말하자 제레미아의 어깨가 축 처지며 실망한 모습이 역력했다.
‘이런 모습에 흔들리면 안 돼.’
오드리아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열었다.
“저는 그럼 이만.”
그대로 돌아서서 가려고 할 때였다.
후다닥.
그런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왠지 등 뒤에서 후다닥,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오드리아의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제레미아는 어느새 오드리아의 앞에 서 있었다.
“잠깐만.”
붙잡는 제레미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왜 그러세요?”
오드리아의 물음에 제레미아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는지 미간이 좁아졌다가 차마 말하지는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무슨 말인데 이렇게 망설이는 거지?
“앞으로는…….”
“……?”
그의 입술이 열릴 듯 말 듯하는 것을 계속 지켜보다 보니 이제는 오드리아도 긴장되었다. 그녀의 동그랗게 뜬 눈이 제레미아의 입술을 뚫어지도록 지켜보았다.
“앞으로는…… 나를…….”
그 시선을 느낄수록 제레미아의 입술은 점점 더 굳어만 갔다.
스스로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알고 있어 언제나 오만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제레미아였다. 하지만 그는 오드리아 앞에서 자꾸만 의기소침해졌다. 지금도 그의 어깨와 고개가 아래로 쳐져 있었다.
“……편하게 불러 줘.”
제레미아가 한참 머뭇거리다 힘겹게 말했다. 하지만 오드리아를 보며 말하는 건 힘들었는지 제레미아는 구름밖에 없는 하늘만 자꾸 바라보았다.
“네……?”
갑자기 편하게 부르라니. 뭘 어떻게 부르면 편하게 부르는 거지. 오드리아가 이해할 수 없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가 눈치를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좀 더 편하게 불러 줬으면 좋겠어.”
다시 한번 강조하는 제레미아의 얼굴이 갑자기 달아올랐다. 부끄러운 건지 창피한 건지, 아니면 둘 다인 건지.
어떻게 불러야 좀 더 편하게 부르는 거지? 공자님, 제레미아 님, 그리고 뭐가 또 있지?
‘설마.’
왠지 잡히는 게 하나 있었다. 혹시 그걸 원하는 걸까.
오드리아는 고민했다. 제레미아가 원하는 게 그 말이라면 해 주는 게 좋을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게 좋을지.
오드리아가 제레미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실 그 말은 오드리아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어색하고 낯간지러운 단어.
하지만 작정하고 한다면 못할 건 또 없었다. 그저 호칭에 불과하니까.
귀부인들을 모시고 일을 하거나 오필리아 숍을 운영할 때 고객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라면 영혼에 없는 말도 얼마든지 하고는 했다. 어렵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처럼 의미 없이 그저 입 밖으로 내뱉으면 그뿐이었다. 그녀가 스스로 의미를 두지 않는 이상 그녀가 몇 번을 말해도 그 단어에는 힘이 없으니까.
그러니 이것 역시 그렇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 밖으로 꺼내기를 망설이는 것처럼.
하지만 오드리아는 제레미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확인하기 위해 그가 원하는 것으로 예상되는 말을 천천히 발음했다.
“오라버니……?”
오드리아는 입을 떼는 순간 이게 아니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뒤늦게 들었다. 하지만 제레미아의 입술이 미묘하게 경련하며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확신했다.
‘맞구나.’
갑자기 자신을 불러 세워 오라버니라고 부르라니, 황당했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드리아 역시 에이미와 노엘이 언니, 누나라고 처음 불러 줬을 때 마치 꿀 발라 놓은 것처럼 너무 달콤해서 자꾸만 듣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에이미와 노엘이 지쳐서 짜증 낼 때까지 계속 부르도록 유도했었으니까.
제레미아가 예전의 오드리아와 겹쳐 보였다. 그는 오드리아의 말 한마디에 반응한다. 그녀가 부르는 오라버니라는 표현에 감동한다.
오드리아가 다시 한번 제레미아를 불렀다.
“제레미아 오라버니.”
몇 번이고 말해 줄 수 있었다.
아무 의미 없이 한 말이다. 그런데 제레미아의 상태가 이상했다. 갑자기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좀 전보다 더 딱딱하게 굳은 것 같았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제레미아의 얼굴이 타오를 듯이 붉어졌다. 당황한 제레미아가 애써 고개를 돌렸지만 목까지 빨개져서 아무리 감추려 해도 드러났다.
“오라버니……?”
오드리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돌려세우기 위해 그의 팔꿈치를 살짝 잡아당겼다. 바로 그때였다.
“……!”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오드리아의 갑작스런 움직임에 당황한 제레미아가 반사적으로 그녀의 팔을 강하게 잡아챘다.
“……미안해!”
제레미아가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붙잡고 있던 손을 뗐다.
“……?”
연달아 일어난 상황에 오드리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깜짝 놀란 것은 팔을 붙잡힌 오드리아보다 붙잡은 제레미아가 더 놀란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안절부절못하며 사과까지 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오드리아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데 제레미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것만 같았다.
제레미아는 오드리아의 팔을 보고 있었다. 오드리아 역시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제레미아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잡고 있던 자리에 붉은 자국이 생겼다.
“괘, 괜찮아?!”
당황한 제레미아가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네. 괜찮은……?”
오드리아는 자신의 팔을 봤다. 얼얼한 느낌이 나기는 했다. 피부가 붉어지고 저릿저릿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이 정도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그런데도 제레미아는 지나치게 당황했다. 마치, 엄청난 짓을 저지르기라도 한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처럼.
“뼈가 부러지거나 그러지는 않았어?”
설마 그럴 리가. 고작 이 정도 일로 뼈가 부러질 리가 없었다. 하지만 제레미아는 정말로 뼈가 부러진 건 아니냐며 안절부절못했다.
“괜찮아요.”
“아무래도 진찰을 받아 봐야겠다.”
“정말 괜찮은데.”
하지만 오드리아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제레미아는 지나치게 초조해하며 그녀를 진료실로 데리고 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진료실에는 연락을 받은 메릴 역시 와 있었다.
“얼른 확인해 봐!”
제레미아가 주치의를 다그쳤다.
그의 재촉에 주치의가 다급하게 달려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주치의가 오드리아의 팔을 살펴보는 내내 제레미아는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오드리아는 제레미아 때문에라도 자신의 팔이 멀쩡하기를 바랐다.
“뼈에 살짝 금이 갔습니다.”
주치의가 살짝 아래로 떨어진 안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말도 안 돼.’
고작 그 정도로 뼈에 금이 가다니. 오드리아는 의사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제레미아의 얼굴은 이미 심각해진 후였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제레미아가 괴로운 목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오드리아는 살짝 커진 눈으로 제레미아를 봤다. 고작 팔을 붙잡은 정도로 그가 호들갑을 떨었던 것도 놀랐지만 그의 과장스러운 예상이 들어맞은 것은 더욱 신기했다.
제레미아의 어깨가 축 처지고 깊은 심연에 빠진 듯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오드리아를 다치게 했다는 사실을 자책하는 것이다.
그가 너무 괴로워하니 오히려 오드리아가 눈치를 볼 정도였다.
괜찮은데.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고 고의도 아니었다. 그저 운이 나빠 다친 것뿐이라고 오드리아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아닌가 보다.
“미안해.”
“…….”
사과하는 제레미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오히려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너처럼 연약한 애들은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몰라서.”
“……?”
제레미아가 혼란스러워하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오드리아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떻게 잡다니. 사람을 잡는 방법이 따로 있기라도 한 건가?
“힘 조절을 제대로 못했어.”
“……?”
“지금까지 조심했는데.”
제레미아는 끊임없이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그가 자책을 늘어놓을수록 오드리아는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지. 힘 조절을 못해서? 조심했다고?’
생각해 보면 제레미아는 언제나 오드리아를 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마치,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그중에서도 특히 그녀와 거리가 가까워지기라도 할 때면 도망치기 바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제레미아가 가까이 오지 않은 것도 접촉을 피했던 것도, 힘 조절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였어?!’
지나치게 강한 힘 때문에 오드리아를 다치게 할까 봐, 그래서 멀리서 지켜만 본 것인가.
드디어 깨달은 오드리아는 허무함에 한숨이 나왔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 귀부인들이 수다를 떨면서 트루디 공작가의 사람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힘이 세다고 얘기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그게 이 정도일 줄이야.
‘아니, 하지만 저번에는…….’
분명 제레미아가 오드리아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때도 제레미아의 손이 닿았고 오드리아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럼 그때는 어떻게 한 거지?
“저번에 저를 일으켜 줬을 때는, 그럼……?”
오드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제레미아가 그때의 상황이 떠올랐는지 “아.” 하고 짧게 신음했다.
“그땐 힘을 완전히 뺀 채 아래에서 위로, 이렇게.”
“…….”
제레미아가 팔로 그때 자세를 취하며 설명했다. 그것도 허공에서 취하는 자세인데도 매우 조심하면서.
“그때도 혹시나 힘이 들어갈까 봐 굉장히 조심했었어.”
오드리아의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넣어 그녀를 일으켰을 때, 제레미아는 그때 힘을 쓰지 않기 위해서 되레 안간힘을 썼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를 정도였다.
오드리아는 듣고도 믿기지 않는 말을 스스로에게 이해시키고 있었다. 저절로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 모습을 본 제레미아가 오드리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각오를 단단히 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얼마나 힘을 빼야 하는지 좀 알 것 같으니까, 다음엔 제대로 할게!”
제레미아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사람의 팔을 잡는 데 이런 결심이 필요하다니.
하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오드리아는 어렸다. 그리고 약했다. 제레미아는 어느 정도 자란 후부터는 그보다 강한 사람들과만 상대했다. 게다가 그는 트루디 대공을 닮아 괴물 같은 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여리고 작은 존재를 만져 본 적이 없었다. 잘못 만지면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 같아서 오드리아를 잡는 데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아, 네.”
오드리아는 허무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답했다.
지금까지 제레미아가 오드리아만 보면 도망갔던 이유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어서 얼떨떨했다.
그때였다. 언제나 제레미아의 곁에서 그를 보좌하는 그웬이 제레미아를 불렀다.
“대공 각하께서 귀가하셨다고 합니다.”
그웬의 보고에 제레미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신경질 섞인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못 가. 그렇게 전해.”
지금 제레미아에게 중요한 것은 오드리아의 부상이었다. 치료가 잘되고 있는지, 치료를 하고 나면 괜찮아지는 건지, 혹시 아프지는 않은지, 확인해야 할 것이 수두룩한데 다른 곳에 한눈을 팔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가서 인사를 하시는 게.”
하지만 그건 제레미아의 생각이고 그웬이 보기에는 이미 오드리아의 치료는 순조롭게 잘되고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문제가 될 리 없었다.
두 부자의 교류라고는 고작해야 며칠에 한 번씩 돌아오는 트루디 대공에게 인사할 때와 한 달에 몇 번 안 되는 식사가 전부였다.
그렇기에 몇 번 안 되는 시간만큼은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은 그동안 지켜져 온 공작가의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지금은 도저히 바빠서 움직일 수 없으니 나중에 따로 찾아뵙겠다고 전하라고.”
제레미아의 얼굴이 구겨졌다. 귀찮은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오드리아의 치료가 끝날 때까지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오드리아는 지금 이 자리가 불편했다. 괜히 불화의 원인이 된 것 같아서. 역시 제레미아를 모른 척했어야 했는데.
“저는 괜찮으니 가 보세요.”
오드리아가 제레미아에게 가 볼 것을 권했다.
“……정말 괜찮다니까.”
그런데 그녀의 말에도 제레미아는 괜찮다며 자리를 뜨지 않고 버텼다.
“혹시, 내가 있는 게 불편해?”
심지어 제레미아는 축 처진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대로 계속 보내려고 하다가는 마치 버려진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며 온갖 불쌍한 척은 다할 것 같았다.
만약 그런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았다가는 그의 명성에 흠집이 날 것이 분명했다.
“나는 여기서 조용히 지켜보기만 할게.”
그러니 이곳에 있게 해 달라고 제레미아는 거의 사정을 하고 있었다. 차마 안 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오드리아는 더 이상 그를 채근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차라리 빨리 치료가 끝나기를 바랐다.
제레미아는 오드리아가 치료를 받는 내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봤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얼굴을 찡그리면 제레미아는 득달같이 의사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살살해. 그러다 심해지면 어쩌려고.”
설마 의사가 그럴 리도 없었지만 애초에 작은 접촉만으로도 사람의 뼈를 금 가게 할 수 있는 사람이 흔하게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말도 안 되는 채근에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의사는 억울해도 꾹 참고 “조심하겠습니다.”라고 답하며 치료를 이어 나갔다.
덕분에 의사는 치료하는 내내 제레미아의 눈치를 보느라 진땀을 뺐다.
드디어 오드리아의 치료가 마무리 되어 갈 때였다.
“누가 다쳤다고?”
방 안에 낯선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드리아는 목소리의 주인을 보지 못했지만 느껴지는 위엄과 위압감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소리의 주인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는데 어느새 트루디 대공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그대로 트루디 대공과 오드리아의 눈이 마주쳤다.
“……?!”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멈칫, 놀란 것은 트루디 대공이었다.
그가 제레미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더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단호하게.
하지만 오드리아는 이제 그 행동이 오드리아가 싫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오셨습니까.”
제레미아가 트루디 대공을 향해 인사했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지.”
트루디 대공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시 물었다. 사실, 그는 무심한 얼굴 뒤로 굉장히 놀란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는 중이었다. 이미 보고를 들었지만 눈앞에서 오드리아가 붕대를 매고 있는 모습을 보니 심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제 실수로 오드리아가 조금 다쳤습니다.”
제레미아가 주먹을 꽉 쥔 채 대답했다. 트루디 대공에게 한마디 들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어서 화가 난 것이다.
“뭐라고!”
트루디 대공의 짧고 강한 노성과 함께 그의 시선이 오드리아를 향했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면 팔이 망가지는 거지.”
트루디 대공이 무서운 기세로 제레미아에게 쏘아붙였다.
‘금은 갔지만 망가진 건 아닌데.’
오드리아가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걱정 마십시오. 다 나을 때까지 제가 책임을 질 테니.”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이러다 오드리아에게까지 튈 것처럼 뜨거웠다.
“책임이라니, 말은 쉽군.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이냐.”
“오드리아가 다 나을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그건 굳이 네가 아니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
“아직도 힘 조절을 못하는 거냐.”
“……훈련 중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겨?”
트루디 대공이 제레미아를 매섭게 질책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절할 겁니다.”
“지금까지 못했는데 이제 와서.”
“두고 보십시오. 해내고 말테니.”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졌다.
‘말려야 하나.’
오드리아가 끼어들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저기…… 치료는 이제 다 되었습니다.”
주치의가 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가 끼어 든 덕분에 두 사람의 시선이 오드리아에게로 향했다. 오드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남몰래 쉬었다.
주치의 역시 놀란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가 트루디 공작가의 주치의 생활을 한 지 20년. 그는 오랜만에 벌어진 상황에 내심 당황했다.
그의 기억 속에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이렇게 득달같이 달려온 것은 돌아가신 레이첼 대공 부인이 돌아가신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말해라.”
트루디 대공이 주치의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하지만 그는 대공이 원하는 대답을 알아차리고 입을 열었다.
“뼈에 금이 가긴 했지만 큰 부상은 아닙니다. 아직은 여린 몸이니 뼈가 다 아물 때까지 조심만 해 주신다면 괜찮을 것입니다.”
“팔이 퉁퉁 부어올랐는데도 별거 아니라고!”
제레미아가 천을 감기 전에 봤던 오드리아의 팔을 떠올리며 따지고 들었다. 어떻게 그게 큰 부상이 아닐 수 있냐며.
“그, 그게…… 금이 가면 부어오르는 것은 일반적인 증상입니다. 다 낫는 데까지 한 달이 조금 넘게 걸리고 그때까지 불편한 점들이 있겠지만 충분히 잘 드시고 푹 쉬신다면 좋아지실 겁니다.”
“…….”
“오드리아 님은 각하와 제레미아 님과는 달리 강하지도 단단하지도 않습니다. 그 점을 부디 유의해 주십시오.”
주치의는 마지막으로 충고를 덧붙였다. 무심코 한 행동에 오드리아는 얼마든지 다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치료 고마워요.”
주치의는 제레미아에게 겁을 먹은 채로도 할 말을 끝까지 했다. 오드리아가 그런 주치의를 향해 싱긋 웃었다.
하지만 주치의는 오히려 오드리아 때문에 더 곤란해지고 말았다. 그녀가 미소를 짓는 순간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뜨거운 시선이 자신을 향했기 때문이다.
“그, 그럼 저는 이만…….”
주치의는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자신의 진료실이었다. 나갈 곳이 없어서 안절부절못하는데, 어느새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의 시선이 그를 떠나 오드리아를 향했다.
“다 나을 때까지는 조심하도록 해.”
“네, 그럴게요…….”
트루디 대공은 그 말을 남긴 채 오드리아의 대답을 제대로 듣기도 전에 돌아갔다. 그런데 뒤에서 볼 때, 그 걸음걸이가 마치 달리는 것처럼 빨랐다.
치료를 마친 오드리아 역시 방으로 돌아가려고 일어났다. 그런데 제레미아와 메릴이 득달같이 그녀의 앞에 섰다.
“저에게 업히세요.”
메릴은 어느새 오드리아의 앞에 등을 보인 채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은 채 업을 준비를 했다.
“걸어갈 수 있는데.”
오드리아는 이런 행동이 부담스러웠다.
“안 됩니다. 첫째도 조심, 둘째도 조심하셔야 해요!”
“그래. 아무리 팔을 다친 거라고 해도 일단은 전부 조심해야 해.”
메릴과 제레미아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오드리아는 치료를 다 받은 후, 침실까지 메릴에게 업혀서 갔다.
다친 건 팔인데 제레미아와 메릴이 한마음이 되어서 절대 무리하면 안 된다고 걸어서 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가는 내내 제레미아는 자신이 업어 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사실 안절부절못하는 제레미아를 보면서 오드리아는 다른 생각을 했다. 그녀의 앞에만 서면 도망을 가던 제레미아였다. 방금 전 트루디 대공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지금 그는 오드리아가 다친 것에 정신이 팔려서 그녀의 앞에서 말을 더듬지도 얼굴이 붉어지지도 않고 도망갈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계속 도망만 다니더니 이제는 떨어질 생각이 없나 보네.’
제레미아는 오드리아의 곁에 붙어서 방에 안전하게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야 돌아갔다.
뼈에 금이 가자마자 오드리아의 주위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건드리면 깨질 것처럼 대했다.
“아무리 가벼운 것도 직접 들지 마시고 저희 시키세요.”
“그 정도는 아닌데……. 이쪽 팔은 괜찮아.”
오드리아가 멀쩡한 팔을 들어보였다.
“작은 행동도 조심하셔야 해요. 방심하다가 다른 곳을 다치시면 어떡해요.”
“맞아요. 오늘 저희가 얼마나 놀랬는지…….”
메릴에 이어 옐라까지 눈물을 글썽였다.
“알았어, 조심할게.”
그러고 나서도 메릴과 옐라는 몇 번이고 걱정을 늘어놓으면서 불편한 일이 있으면 설렁줄을 당기거나 부르라고 당부하고 나서야 방을 나갔다.
오드리아는 침대에 누워서 다친 팔을 가만히 보았다. 뼈가 잘 붙게 천으로 몇 번이고 동여맨 상태였다.
‘별로 아프지는 않은데.’
그런데 금이 갔다니. 오드리아는 왠지 지금 당장 팔을 크게 휘둘러도 멀쩡할 것만 같았다.
오드리아가 뼈에 금이 갔는데도 불구하고 아프지 않은 것은, 어린 그녀가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할까 봐 강한 진통제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고통을 잊게 해 주는 약들은 꽤 있지만 대부분 마약 성분으로 잘못 사용할 경우에는 부작용을 동반했다.
오드리아가 먹은 것처럼 몸에 무리가 되지 않으면서 강한 효과를 보이는 진통제는 한 알에 웬만한 저택 한 채 값이 들어갈 만큼 고가의 약이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하지…… 하암…….’
제레미아에 트루디 대공까지 생각을 이어 나갈수록 하품이 늘어났다.
‘하암…… 졸리다.’
생각을 할 때마다 하품이 나왔다. 강한 진통제는 잠을 부르기도 했다. 오드리아는 자신의 팔을 가만히 보며 반대편 손으로 몇 번 매만졌다.
무거워진 눈꺼풀을 몇 번 깜박이더니 그대로 잠이 들었다. 기분 좋은 숙면이었다.
* * *
정작 다친 오드리아는 아무 생각 없이 깊은 잠에 들었을 때였다. 제레미아는 그의 집무실에서 잔뜩 쌓인 서류들을 옆에 두고 계속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심한 게 아니라고 하니 다행입니다. 제레미아 님도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제레미아가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 생각도 하지도 않은 채 내내 힘들어하자 보좌관 그웬이 제레미아를 애써 위로했다.
“그게 아니라…….”
제레미아가 미간을 구기며 고민하고 있는 것은 오드리아 때문이긴 했지만 그웬의 위로와는 조금 다른 이유 때문이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레이첼을 닮아 연약한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 오드리아를 보니 통증에 무감각한 것 같았다. 뼈에 금이 갔다. 분명 많이 아팠을 텐데 오드리아는 치료 내내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그게 계속 신경 쓰였다.
혹시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했다.
다른 사람이 신경 쓰지 않으면 오드리아는 분명 다친 팔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역시 내가 따로 신경을 써야겠어. 제레미아는 그렇게 밤새도록 오드리아와 그녀의 다친 팔을 떠올렸다.
그웬은 그런 제레미아를 보며 유난이라며 남몰래 고개를 몇 번이고 저었다.
하지만 제레미아의 걱정은 정확했다. 오드리아는 통증에 무감각했다.
하지만 진짜로 통증을 못 느끼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오드리아 트루디가 아니라 오필리아 숍의 마담 오드리아의 증상이었다.
참을 수 있는 통증이라면 아프지 않다고 자신도 모르게 세뇌하는 버릇. 그건 오드리아가 지난한 고통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터득한 것이다.
그러다 어느새 오드리아도 자각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무감각해졌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소리를 지르고 고통스러워 할 통증도 그녀에게는 아프기는 하지만 충분히 참을 만한 것에 불과했다.
뼈에 금이 갔는데 아무렇지 않을 리 없었다. 단지, 그렇게 아픈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
그 미세한 차이를 본능적으로 눈치챈 제레미아는 초조하고 불안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아픈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될까 봐, 그녀가 자신의 몸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까 봐.
가까이서 그녀를 보니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로 인해 제레미아는 수많은 혼란 속에서 기쁨을 누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 * *
오드리아는 새벽녘에 목이 말라서 잠시 잠에서 깼다.
나가서 물을 달라고 할까 싶었지만, 오늘 그녀가 팔을 다치고 난 후부터 메릴을 비롯한 시녀들이 호들갑을 떤 게 떠올라서 포기했다.
‘그냥 참자.’
분명 메릴이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하게 하고 부산스럽게 물을 가져오고 직접 먹여 주려고 할 것이다.
오드리아는 이대로 다시 잠에 들려고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요즘엔 침대에 누웠다 하면 바로 잠드는 편이었으니까 곧 잠에 들 것이다.
그때였다.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지…… 메릴인가……?’
하지만 메릴은 조심스럽게 움직이기는 해도 이렇게까지 은밀하다 싶을 정도로 소리를 죽이지 않았다.
그럼 지금 문을 열고 들어와 침대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인 거지.
오드리아는 본능적으로 눈을 뜨거나 움직이지 않고 잠든 척했다. 누구인지 몰라도 이대로 돌아가 주기를 바라면서.
“오드리아…….”
그녀의 이름을 아주 작게 속삭이는 사람. 분명 낮에 들었던 목소리다.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더는 아프지 말렴.”
트루디 대공의 목소리가 애달팠다. 그는 아무래도 오드리아가 팔을 다친 걸 그가 지켜 주지 못해서라고 자책하는 것 같았다.
그 장소에도 없었고 심지어 사고였는데. 그걸로 자책하는 것은 이상했다.
오드리아는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정말 괜찮다고,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라고 말할까 고민했다.
그때였다.
이불 위에 올려놓은 오드리아의 손 위로 뭔가가 떨어졌다.
열꽃이 피는 것처럼 방울이 터진 촉촉한 감촉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굳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이건 눈물이야.’
트루디 대공이 잠든 오드리아를 보며 눈물을 흘린 것이다.
얼마 전에 복도에서 몰래 훔쳐봤던 트루디 대공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두 번이나 트루디 대공이 우는 현장을 목격하다니. 이건 우연인가, 아니면…… 혹시, 눈물이 많은 건가.
트루디 대공의 훌쩍거림은 바로 그치지 않았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며 숨죽여 눈물을 흘리던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돌아갔다.
그리고 오드리아는 어느새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이었다. 강한 진통제 때문인지 오드리아는 평소와는 달리 늦잠을 잤다. 일어나 보니 어느새 해가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아픈 그녀를 걱정해서인지 아무도 깨우러 오지 않았다. 덕분에 단잠을 자서 그런지 몸이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충분하게 자고 일어난 아침은 개운했다. 기분 좋게 기지개를 펴려던 오드리아는 팔을 다친 것을 떠올렸다.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다친 팔은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어 움직일 수 없지만 그 외에는 전부 멀쩡했다.
기본적으로 침대에 시녀들을 부를 때 쓰는 설렁줄이 있지만 오드리아는 잘 사용하지 않았다. 오드리아는 자신이 일어난 것을 알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보통 문 앞에 메릴이나 옐라, 그들이 아니더라도 다른 시녀 한둘쯤은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있는 거지? 오드리아가 복도를 따라 나갔을 때였다. 밖을 나와 보니 평소와는 달리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이야.”
오드리아가 졸린 눈을 비비며 물었다.
밖에 쌓여 있는 정체불명의 물건들을 열심히 옮기던 메릴이 오드리아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뼈에 좋은 약과 식재료들입니다.”
오드리아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녀가 말한 뼈에 좋다는 약과 식재료들이 작은 동산이 생긴 것처럼 한가득 쌓여 있었다.
“이렇게나 많이 산 거야?”
그렇게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닌데. 저 정도 양이면 평생 먹어도 다 먹기 힘들 것 같았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질리게 만드는 양이었다. 이걸 다 먹기 전에 알아서 나을 것 같았다.
“산 건 아니고, 아침 일찍 받은 겁니다.”
“누구한테?”
메릴의 말에 오드리아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누가 이 많은 것을 보낸 거지?
그러자 메릴이 담담하게 답했다.
“제레미아 님이요.”
“…….”
“견과류부터 홍화씨, 표고버섯과 기타 약재들을 많이 보내 주셨어요. 특히 뼈가 붙는 데는 칼슘이 가장 좋다고 하네요.”
메릴이 제레미아가 보낸 것들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었다.
자기 때문에 팔을 다쳤다고 생각해서 보냈구나. 그래도 너무 과한데. 오드리아가 부담스럽다고 생각할 때였다. 메릴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대공 각하께서도 보내셨습니다.”
“……!”
오드리아가 눈앞에 펼쳐진 물건들을 다시 한번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엄청난 양의 물건들은 마치 누가 더 큰지 경쟁이라도 하듯이 양쪽에 나뉘어져 있었다.
“과일 중에는 자두도 있는데, 오늘 간식으로 드시겠어요?”
선물들을 정리하고 있던 옐라가 오드리아를 발견하고 다가와 물었다. 그녀는 이 많은 물건들을 보고 오히려 신이 난 것 같았다.
“하.”
오드리아의 입에서 짧은 한탄이 새어 나왔다.
‘다들 왜 이러는 거야.’
오드리아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공포의 트루디 가문’이라는 명성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유난들이었다. 이런 걸 극성이라고도 하지. 오드리아가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