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기로 했다
그녀의 인생은 언제나 3인분이었다. 오드리아와 에이미, 노엘. 세 사람의 몫을 그녀 혼자서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동생들을 책임지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드리아도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강해져야만 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흔들리거나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됐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언제나 쫓기는 것 같았다. 하루라도 쉬는 날에는 동생들을 먹일 음식조차 구할 수 없었다.
오늘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무리 아프고 힘들고 비참해도 일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에 그녀도 아직 어린 나이일 때부터 아등바등하며 살아남았다.
그렇게 살아가는 인생이 싫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드리아는 동생들을 정말 좋아했으니까 견딜 수 있었다.
그래도 하루하루가 힘겹고 버거운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녀도 쉬고 싶고 남들처럼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연애하고 싶었다.
하지만 동생들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그녀의 인생을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기대감을 내려놓으니 모든 것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가족들을 위해 포기해 온 모든 것들을 더 이상은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나만 생각할 거야.’
어차피 오드리아 트루디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가족들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도 무시하면 되는 일이었다. 서로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생각하니 마치 지금 이 상황은 그녀를 위한 적절한 안배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정신없이 살아왔으니 편히 쉬어도 좋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번 생에는 오로지 나만을 위해 살자.’
동생들도 잊고 오드리아 트루디를 버렸다고 하는 트루디 공작가의 사람들도 무시하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자고 그녀는 결심했다.
오드리아에게 먹고 사는 것은 더 이상 목표가 될 필요가 없었다. 먹을 것은 썩어 남아돌 만큼 있었고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은 황궁 다음으로 가장 큰 저택이었다.
게다가 오드리아는 지금 열 살이었다. 굳이 강한 척, 씩씩한 척 따위 할 필요가 없는 나이였다.
그녀는 대단한 것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잘 먹고 잘 자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했다.
오드리아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식사를 맛있게 하는 것이다. 요리를 직접 할 필요도, 매일같이 치열하게 식비를 계산하지도 않고 남이 해 준 근사한 요리를 그저 맛있게 먹는 것.
오드리아의 건강을 위해 식탁 위에는 갖은 영양소가 배합된 음식들이 올랐다. 입 안에 음식이 들어오고 그녀의 혀에 닿는 순간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맛있다. 맛있어도 너무 맛있다.
‘맛있는 걸 먹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처음 느껴 보는 맛이자 충만감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특별한 식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일상적인 메뉴와 식사였지만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은 달랐다.
그저 편한 마음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느끼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일 수 있는지 새삼 감탄하고 있었다.
“이것 좀 더 드세요.”
“이것도 드세요. 지금이 제철이라서 가장 맛있을 때예요.”
이전에는 스프와 샐러드 외에는 입에도 잘 대지 않는 오드리아 트루디였다. 그런데 갑자기 맛있게 식사하는 오드리아의 모습에 메릴과 옐라 역시 덩달아 신이 났다.
오물오물.
오드리아의 작은 입 안이 음식으로 가득 찼다. 그녀의 볼이 볼록 튀어나왔다. 열심히 씹을수록 볼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메릴과 옐라는 그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이 열심히 지켜보았다.
“잘 드셔서 다행이에요.”
메릴이 드디어 마음이 놓이는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디저트도 좀 드시겠어요?”
“응. 초코케이크랑 홍차로 할래.”
“네. 바로 준비할게요.”
메릴은 오드리아에게 조금이라도 많이 먹이고 싶어 했다.
식사를 그만큼 하고도 초코케이크라니. 믿을 수 없는 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메릴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초코케이크와 홍차를 가져왔다.
오드리아가 초코케이크를 한 입 맛있게 먹던 중 갑자기 신음과 함께 얼굴을 구겼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왜 그러세요?!”
깜짝 놀란 메릴이 오드리아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상태를 살피며 혹시 차와 디저트에 문제가 있는 건가 초조해했다.
“아예 지어서.”
“……네?”
오드리아가 메릴에게 다급하게 뭔가를 말했지만 발음이 뭉개져서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오드리아가 다시 말하려고 하지만 아파서 얼굴이 점점 더 험악하게 구겨질 뿐 제대로 된 발음이 나오지 않았다.
“말하기 어려우시면 입을 조금만 벌려 보세요.”
결국, 오드리아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덕분에 메릴이 오드리아의 입 안을 살필 수 있었다.
오드리아는 오른쪽 볼을 붙잡은 채 후회했다. 너무 욕심을 부렸나 보다. 잘 먹다가 입 안을 씹은 것이다.
너무 아팠다. 피곤하고 힘들어서 입안이 헐어 본 적은 있어도 음식을 먹다가 입 안을 씹은 것은 처음이었다.
“괜찮아요. 제가 약 발라 드릴게요. 하루 이틀 지나면 가라앉을 거예요.”
“으읏.”
잘 먹고 난 후에 오드리아가 할 일은 잘 쉬고 잘 자는 것이다. 오드리아는 그 의무를 완벽하게 수행 중이었다.
“오늘도 좋은 꿈꾸시고 푹 주무세요.”
메릴이 따뜻한 인사와 함께 오드리아의 가슴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주었다. 그녀가 나가고 오드리아는 이불 속에 얼굴을 묻었다.
‘푹신하고 따뜻해.’
침대에 벌러덩 누운 순간 떠올랐다. 이렇게 폭신한 침대는 얼마 만이지. 아무 걱정 없이 누워 본 건 또 얼마 만인지.
‘좋다.’
오드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모든 조건이 풍족했다. 침대에 누워서 위를 바라보면 캐노피가 보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아기자기하면서도 침대 기둥을 따라 넓게 펼쳐진 원단은 보기 드문 고급품이다.
정성 들여 만든 캐노피 아래에 누워서 몸을 왼쪽으로 한 번 뒹굴. 다시 오른쪽으로 한 번 뒹굴. 몸을 이리저리 굴려 보았다. 마치 보호받는 기분이 들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편한 나날이었다. 아무런 걱정도 고민도 할 필요가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피곤한 몸으로 무리해서 일하지 않아도 되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면 메릴과 옐라가 준비해 준 대로 얼굴을 씻고 아침 식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처음으로 어린아이다운 취미 생활도 시작했다. 세상에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수많은 인형과 동화책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동안 일하던 귀족 저택과 여러 부티크에서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내 것이 될 수 없었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오드리아의 것이다.
오드리아는 정말 열 살짜리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그녀는 이미 열 살이라는 나이를 살아 본 적이 있는데도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처음이었다.
오드리아가 그저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는 모습만으로도 메릴과 옐라는 기뻐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이라니.’
그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면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며칠 사이에 살이 오른 것 같았다.오드리아 트루디의 앙상한 뼈마디에 보기 좋게 살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잘 챙겨 먹으니 처음보다 체력도 좋아졌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라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오드리아는 만족하고 있었다.
의식주에 한해서는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다양한 재료를 끝이 없는 것 같은 요리법으로 만든 음식들, 푹신한 침대, 언제나 메릴이 공들이는 드레스까지.
아무 노력도 없이 이런 것들을 누릴 수 있다니.
‘그래도 가장 좋은 건…… 아무도 없는 거지.’
오드리아 트루디가 버려진 영애여서일까.
그녀의 방은 본저택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있어서 지난 며칠 동안 가끔 마주치는 고용인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보지 못했다.
특히,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두 사람을 먼발치에서 우연히 보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마치 이 큰 저택을 쓰는 사람이 오드리아밖에 없다는 착각이 들만큼.
오드리아는 두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더 편했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이미 가족을 방치하고 버린 사람들에게.
공작가에서 지내는 동안, 고용인들의 대화 속에서 오드리아 트루디의 아버지와 오라버니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종종 들렸다.
두 사람은 유명 인사였고 언제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존경과 감탄, 경외가 섞인 말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녀는 공작가의 버려진 영애이니까.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뭐라고 감탄하는지 알 필요가 없었다.
오드리아는 공작가에 적응하는 것에 충실했다. 어차피 모두가 관심이 없다면 그저 눈에 띄지 않고 지내면 되었다. 가능하면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와는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다.
‘이 아이도 그렇게 해서 방에 틀어박히게 된 거겠지.’
하지만 오드리아는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겨우 열 살. 오드리아 트루디의 인생은 살아갈 날이 훨씬 많이 남아 있었다. 그 많은 시간들을 방에서만 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성년이 될 때까지만 조심히 살자.
그때까지는 이곳에서 트루디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며 잘 먹고 잘 살다가 성년이 되면 독립해서 공작가를 떠날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혼자가 되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모든 판단과 선택은 자신만을 위해서하는 인생을 살 것이다.
그때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 단 한 사람만을 생각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것이다.
‘이곳을 나가게 되면 뭘 하고 살까?’
상상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감돌았다.
그동안 삶에 지쳐 언제나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했다.
동생들을 독립시키고 사업을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위한 인생을 살겠다고 했지만 손에 얼마 남지 않은 푼돈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당시의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주어진 상황이나 여건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하고 싶은 것을 떠올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
그동안 너무 여유가 없어서일까. 막상 생각하려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뭘 하고 싶은지, 뭘 하면 좋을지.
‘사업을 할까.’
결국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녀가 해 왔던 오필리아 숍이었다. 비록 현실적인 선택이기는 했지만 그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직원을 채용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꿈에 한 발짝 다가갔을 때까지만 해도 보람차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죽어서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까 독립을 하게 되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녀가 겪은 일들 역시 다시 따라다닐 것 같았다. 그녀가 사업에 성공하자 돈을 노린 동생들, 그 돈을 가지기 위해 결국 그녀를 죽인 그들을.
‘이제 그런 건 지긋지긋해.’
새롭게 얻은 인생이었다. 더 이상 예전의 기억을 끌어안고 싶지 않았다. 오드리아는 성인이 된 자신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그래, 외국에 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오드리아는 언제나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았다. 외국에 가서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제국에서 볼 수 없는 물건들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오드리아는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
‘마음에 드는 곳이 생기면 그대로 정착해도 괜찮겠지.’
꽤 괜찮은 생각 같았다. 오드리아는 혼자서 외국으로 떠난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모든 것이 낯설지만 새로운 음식과 문화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며 그녀는 웃고 있었다.
‘그러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연애를 할 수도 있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정말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 것처럼 가슴이 콩닥하고 작지만 재빠르게 뛰었다.
어느새 독립 후에 여행을 떠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일단 이곳저곳을 다녀 보자고.
하지만 여행을 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 있었다. 아직 그녀는 열 살. 독립을 할 때까지 한참 남았지만 상상은 곧 미래에 대한 계획으로 이어졌다.
일단 꿈을 꾸기 시작했으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고려하는 것은 그녀의 오래된 습관이기에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여행 자금은 어떡하지?’
일단 여러 나라를 여행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때는 더 이상 공작가의 영애가 아닌 온전한 그녀 자신만이 남게 될 테니 미리 여행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사실, 떠오르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지금의 오드리아 트루디에게는 이미 돈이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그녀에게 책정된 품위 유지비만 해도 몇 년을 풍족하게 여러 나라를 돌아다닐 수 있을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걸 사용해도 될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건 트루디 공작가의 돈이었다. 잠시 이곳에서 신세를 지고 있을 뿐인데 그 선을 넘어도 괜찮을지 망설여졌다.
‘조금은 가지고 나가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망설임도 잠깐. 어차피 넘치는 게 돈인 가문이었다. 조금 없어진다고 해서 티도 나지 않을 것이다.
오드리아 트루디에게 배정된 예산이었다. 관심조차 없는 버려진 영애에게 의무처럼 할당된 예산을 애초에 알고는 있을까.
어쩌면 당연히 나가는 것 중에 하나이기에 그들조차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쓰라고 준 돈이니까 좀 가지고 나간다고 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오드리아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나중에 독립할 때 필요한 돈을 조금 챙겨서 나가자. 어차피 넘쳐 나는 돈이라 조금 없어진다고 눈치 채지도 못할 것이다.
‘그 정도는 괜찮을 거야.’
그 대신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성년이 될 때까지 오드리아 트루디로서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만큼은 충실히 임하겠다고 오드리아는 결심했다.
사실, 그래 봐야 오드리아가 할 일이라고는 공작가의 한구석에서 눈에 띄지 않는 것 정도일 테지만.
오드리아에게 공작가에서 지내는 시간은 독립해서 혼자 살기 위한 준비 기간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때까지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을 것 같았다. 성년이 될 때까지 외국어를 좀 배워 두는 게 좋겠지. 그래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니까.
다른 나라의 문화도 좀 알아 두는 것도 필요할 거다. 그리고 혼자 살려면 아무래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을 키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녀가 마담 오드리아일 때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은 모두 실전에서 배운 것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방법은 무조건 도망치기. 그래서 달리기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직접 부딪혀서 이길 수 있을 정도의 뭔가를 배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나둘씩 떠올리다 보니 성년이 될 때까지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다.
해야 할 일을 정하면 언제나 바로 시작했다. 그녀에게 게으름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지금 쉬고 있었다. 이전과는 달리 지금의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돈과 시간이 넘쳐흐르니까.
오드리아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데 충실했다. 오로지 먹고 놀고 자는 것. 이 세 가지밖에 하지 않는 하릴없고 무의미한 시간들.
하지만 그녀에게는 가장 뜻 깊고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다.
게다가 오로지 잘 먹고 잘 잔다는 것만으로도 모두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삶이라니.
그녀가 보호자로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게 아니라 돌봄을 받는 것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들이었다.
오드리아는 만족을 넘어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시간은 생각보다 질리지 않았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오드리아는 휴식 같은 시간을 보낸 후, 트루디 공작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가기로 했다.
성년이 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공작가에 대해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 둬야 한다. 웬만한 가문에 대해서는 잘 아는 그녀이지만 트루디 공작가만큼은 예외였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는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고 그만큼 정보 역시 한정되어 있었다.
오드리아에게 필요한 것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좋아하는 곳이나 자주 가는 곳들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두 사람과 최대한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는데, 후원에 가는 도중 들은 고용인들의 대화에 오드리아의 발걸음이 멈췄다.
“대공 각하께서 이제 곧 돌아오시지?”
“빠르면 내일 오후 정도에 도착인 것 같던데.”
“두 분 모두 오래 자리를 비우셨으니 준비를 단단히 해야겠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공작가를 비운 상황이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 것 같았다.
예상하지 못한 사실을 알게 된 오드리아는 눈만 깜박거렸다. 그럼 지금까지 괜히 혼자 조심한 거였나? 정작 주인 없이 비어 있는 저택에서.
그때, 오드리아와 고용인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멍하니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그녀는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들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오드리아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돌아서려 애썼다.
하지만 그 모든 행동을 다른 사람이 봤다면 어색한 행동 하나하나에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고용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돌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그날도 두 사람을 보지 못했다.
정확히는, 이번에야말로 두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을 열심히 피한 것이지만.
그렇게 또 며칠이 흘렀다. 그사이에도 오드리아는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를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오드리아는 지금까지처럼 모두에게 잊힌 채로, 모두의 눈에 띄지 않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녀의 뜻대로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드리아의 바람은 살짝 빗나갔다.
오드리아가 방에서 나오지 않았을 때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사람은 메릴과 옐라가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매일같이 후원에 나왔고 많은 고용인들이 오드리아를 봤다. 짧은 기간이지만 어느새 그녀가 후원에 있는 것이 익숙하게 느껴질 만큼의 변화였다.
아무리 철저하게 교육을 하고 완벽한 일 처리를 자랑하는 고용인들이라고는 해도 그들 사이에서는 수많은 정보가 오고 갔다.
자연스레 고용인들 사이에서 오드리아의 변화에 대해 조금씩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오드리아 아가씨께서 좀 달라지신 것 같지 않아?”
“요즘에 자주 돌아다니시고 얼굴도 밝아지신 거 같아.”
“후원에 많이 가는 것 같던데.”
고용인들이 조금씩 오드리아에게 관심을 가진다는 사실을 그녀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와 마주치는 고용인들마다 그녀를 흘낏, 보기 시작했으니까. 지금까지와는 반응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오드리아를 아는 척하거나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지는 않았다.
공작가의 고용인들은 오드리아를 봐도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규칙인 것 같았다. 아마도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들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조금씩 신경 쓰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오드리아는 그들의 시선에 흥미가 감도는 것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얘기는 자연스레 그 범위가 확장되고 있었고 트루디 대공이나 제레미아의 귀에까지 들어가지 말라는 법 역시 없었다.
한편, 오드리아는 그동안 체력이 되는 선에서 열심히 다니다 보니 처음에는 너무 넓어서 미로 같았던 공작가 내부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직도 여기서 더 멀리 가게 되면 길을 헤매게 될 것 같았지만 거기까지는 갈 일이 거의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후원은 관리하는 정원사와 몇몇 고용인들을 제외하면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오드리아는 마음껏 후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오드리아는 편했지만 한편으로는 아까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찾지 않다니. 아무리 아름다워도 방치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후원이 가치가 있을까.
그게 오드리아 트루디를 닮은 것 같기도 해서 후원이 더 마음에 들었다.
오드리아는 후원에 흐드러지게 핀 꽃을 가장 유심히 바라봤다. 그녀는 꽃을 좋아했다. 그녀의 고된 인생에서 유일하게 꿈을 꾸는 것처럼 만들어 주는 게 바로 꽃이었다.
그래서 오필리아 숍을 시작했을 때 꽃을 활용한 드레스나 주얼리를 많이 만들고는 했었다. 후원에 있는 꽃을 보니 그때가 떠올랐다.
‘이제 사업 같은 건 생각할 필요 없는데.’
하지만 습관처럼 오드리아는 무엇을 보든 사업과 연관 지어 생각했다. 그건 의지를 넘어 본능에 가까운 습관이었다.
‘그림으로만 봤던 꽃들이 다 있단 말이야.’
특히, 후원은 오드리아의 정신을 빼놓았다. 그곳에는 그녀가 이전부터 관심 있었지만 구하기가 힘들어 그림으로만 겨우 보았던 꽃들이 흔하게 피어 있었다.
오드리아는 오늘도 후원으로 향했다. 아무리 가도 질리지 않았다. 후원이 한 번에 구경하기에는 넓었던 것도 이유이기는 했지만 역시 몇 번을 와도 질리지 않았다.
날씨에 따라, 해가 떠 있는 높이에 따라, 기분에 따라 같은 후원을 봐도 전혀 달라 보여서 끊임없이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후원에서 걱정 없이 놀다가 돌아오면 상냥한 목소리와 함께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을 맛있게 먹고 나면 메릴과 옐라가 오드리아가 휴식을 취하다 잠을 잘 수 있게 따뜻한 잠자리를 준비해 준다.
모든 것이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휴식 같은 일상. 오로지 잘 먹고 잘 자는 것만으로도 완벽한 하루.
이대로 성년이 될 때까지 아무 일 없이 평탄하게 가는 것이 오드리아의 목표였다.
“오늘도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응. 다녀올게.”
그래 봤자 저택 안에 있는 후원에 가는 것이다. 그래도 메릴과 옐라의 걱정은 한결같았다. 오드리아가 씩씩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두 사람이 안심하듯 활짝 웃었다.
여느 때처럼 후원에 와서 꽃을 보고 있을 때였다. 오드리아는 이곳에 와서 꽃을 관찰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지만 꽃들 사이에서 아무 생각 없이 산책하는 것도 좋아했다.
꽃들 사이를 지나면 다양한 꽃들이 품고 있는 향기가 오드리아에게 느껴졌다. 꽃은 혼자서도 향기로웠지만 때로는, 다른 꽃과 함께 있어서 그 향기가 배가되고는 했다. 그사이를 걷다 보면 오드리아의 기분까지도 좋아졌다.
저벅, 저벅, 우뚝.
하지만 지금 이 걸음걸이는 꽃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드리아의 기분 좋은 산책을 방해하는 것이 있었다.
오드리아가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산책을 이어 나갔다.
저벅, 저벅, 저벅.
우뚝. 오드리아가 걸음을 멈췄다. 다시 걸었다. 다시 걸음을 멈췄다. 몇 번을 반복하는 사이 신경은 모두 등 뒤로 향해 있었다.
그러다 다시 걸음을 멈춘 오드리아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기습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
오드리아가 돌아본 곳에는 푸른 잎사귀가 풍성한 나무와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꽃들이 만발했다. 그 뒤로 연못과 다리가 있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들.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오드리아가 찾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오드리아는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저벅, 저벅, 우뚝, 휙-.
이번에도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대신 이번에는 방금 전과는 다르게 걸음을 멈추자마자 바로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하지만 이전과 똑같은 풍경밖에 보이지 않았다.
틀린 그림 찾기를 한다고 해도 분명 아무것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드리아의 의심스러운 시선은 계속 그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집요한 시선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진 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상하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해.’
언제부터인지 자꾸만 등이 따가웠다. 누군가 오드리아를 지켜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오드리아가 돌아서는 순간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고요했다.
벌써 며칠째였다. 그녀를 향한 시선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