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48)

chapter 1. 공작가의 버려진 영애

제국의 수도 외곽에서도 가장 외지고 경사가 심한 곳에 오드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제국 최고의 가문이라고 불리는 트루디 공작가의 영애, 오드리아 트루디와 이름만 같을 뿐 접점이라고는 전혀 없는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읜 순간부터 오드리아는 평범한 소시민에서 가난한 소녀 가장이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귀족도 아니고 풍족하게 살았던 적도 없었지만 소박한 일상에 만족하며 살아가던 순간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이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한 명씩 있었다.

머리가 좋은 만큼 하고 싶은 게 많은 남동생 노엘과 남들이 하는 건 곧 죽어도 전부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여동생 에이미.

그들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에이미와 노엘을 향해 욕심이 지나쳐 오드리아를 힘들게 한다고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오드리아에게 동생들은 이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이자 행복이었다.

오드리아는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 주기 위해,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하녀부터 시작해서 식당의 종업원과 목욕탕 청소까지. 그저 오늘 음식을 살 돈을 받을 수 있다면 일의 종류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악착같이 일해도 돈은 언제나 부족했다. 노엘과 에이미는 지금 당장보다 미래를 위해 투자를 해야 한다며 벅찬 것들을 요구했다.

당장은 그럴 처지가 아니라며 동생들을 달래 보았지만 입을 닫고 그녀를 무시하고 집을 나가는 강수를 써 가며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 내고야 말았다.

예기치 못한 과도한 지출로 인해 당장 먹을 음식마저 살 수 없게 되는 날이 늘어갔다.

남아 있는 식량과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는 것들로 최대한 버텼다. 심지어 그것마저도 동생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느라 오드리아는 일주일 동안 제대로 된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동생들에게는 필요할 때마다 옷을 사 주고 공부를 하는 데 필요한 지원만큼은 아끼지 않았다.

정작 그녀는 옷 한 벌을 헐고 뜯어지다 못해 걸레짝이 될 때까지 입어야 했지만 오드리아는 상관없었다.

그렇게 해서 에이미와 노엘이 원하는 것을 해내기만 한다면, 그게 곧 자신의 기쁨이리라.

드디어 그녀의 노력과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그녀의 헌신 덕분에 동생들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컸기 때문이다.

남동생 노엘은 그의 욕심을 현실로 이루어 낼 수 있을 만큼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다.

오드리아의 지원 속에 공부한 끝에 황궁에서 일하게 되었다. 다른 귀족들에 비해 한없이 낮은 자리이긴 했지만 그녀의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동생 에이미는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최근 상승 가도를 달리고 있는 오웬 자작에게 시집을 갔다.

영지도 없고 가문의 존속 기간이 짧은 허울뿐인 자작가이긴 하지만 그래도 에이미가 원하는 대로 귀족이었다. 게다가 그는 자작이긴 했지만 젊고 잘생긴 데다가 유능한 인물이었다.

나이 들고 못생긴 백작이나 후작에게 시집갈 바에야, 지위는 좀 낮아도 그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영애들이 있을 만큼 잘생긴 오웬 자작이 몇 배는 나았다.

그런 그가 에이미에게 반해 청혼했다. 결혼식에서 에이미가 얼마나 행복한 얼굴을 했는지 그 모습을 떠올리면 저절로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끝이구나.”

에이미의 결혼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드리아가 하늘을 향해 한 말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동생들을 이렇게 다 키우고 나니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있었다. 그야말로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동생들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존재였지만 그녀 자신만을 위한 인생을 살아보지 못한 것이 언제나 하나 남은 아쉬움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정말로 모두 끝났다. 노엘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황궁에서 열심히 해나갈 것이고 에이미는 오웬 자작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날만 남았다.

두 사람이 모두 독립했으니 이제부터는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 보자.

오드리아는 생각을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동생들을 떠나보내고 남은 얼마 안 되는 푼돈으로 아주 작은 사업을 시작했다.

사실 오랜 시간 동안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던 것이기에 시작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동생들을 키우기 위해서 그동안 수많은 일들을 해 왔지만 평범한 일로는 충분한 수입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수많은 일을 돌아가며, 혹은 동시에 하기도 했다.

그중에서 오드리아가 가장 오랜 시간 동안 해 온 일이 귀부인들의 시중을 드는 것이다. 처음에는 저택에서 단순한 업무를 하는 하녀였는데 그녀의 재능을 눈치챈 어느 귀부인에 의해 그녀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재능은 다른 귀부인들에게 입소문이 나면서 모두가 탐을 내게 되었다.

오드리아의 재능은 바로 상대방에게 어울리는 게 무엇인지 알아보는 ‘안목’이었다.

그녀는 드레스와 핵심이 되는 신발이나 목걸이, 귀걸이와 같은 것은 물론이고 머리 장식이나 브로치, 입술 색까지 조언을 해 주었다.

그렇게 오드리아의 추천대로 하고 중요한 자리에 다녀온 부인은 언제나 입이 귀에 걸릴 것처럼 기뻐했다.

자신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방법. 그것도 자신의 취향을 놀랍도록 빠르게 알아차리기까지 하자 귀부인들은 중요한 자리에 나가야 할 때면 일부러 오드리아를 찾았다.

귀부인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그녀가 유명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덕분에 오드리아는 에이미와 노엘을 키울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동생들을 위해 능력을 사용해 왔다면 앞으로는 오로지 자신의 사업을 키우는 데 쓸 생각이었다.

오드리아의 안목은 사교계 여인들 모두가 탐내는 능력이었고 그녀를 뛰어넘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 결과, 그녀가 더 이상 누군가의 시녀가 아니라 독립을 해 사업을 시작했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모두가 그녀를 애타게 찾게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의 고객들 중에는 남성들 역시 생각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좋아하는 영애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영식, 여자 못지않게 연회장에서 멋있어 보이고 싶어 하는 남자, 내연녀에게 한껏 멋을 내고 싶은 유부남까지.

수많은 고객들이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돈을 아끼지 않다 보니 오드리아의 사업은 엄청난 대박이 났다. 지금껏 힘들게 살아온 인생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푼돈으로 시작한 사업은 승승장구해서 어느새 삼 층으로 지어진 건물을 사들일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숍의 벽면에 ‘오필리아 숍’이라고 적힌 간판이 걸리는 모습을 보며 오드리아는 생각했다. 드디어 지난한 자신의 인생이 보상받는다고.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을 만큼 길고 막막했던 힘든 시간에 비하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의 행복을 망친 것이 그녀가 모든 것을 희생해 온 동생들이었다는 것이다.

노엘은 욕심이 많았다. 하지만 도움이라곤 되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집 안, 그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는 부인, 그런데 자신에 비하면 별거 아닌 놈들이 가문의 힘으로 더 잘나가고 있는 현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를 괴롭혔다.

“나보다 멍청한 놈들이, 이건 부조리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신은 앞으로 더 찬란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앞을 향해서 막힘없이 달려 나가야 했다.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돈이 없고 배경이 없어서 번번이 막혔다. 여기서 이대로 만족할 수 없었다. 아직 올라갈 곳이 한참 남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돈이 필요했다.

오웬 자작과 결혼을 한 에이미는 자작가에 온 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화가 났다. 그녀는 사기 결혼을 당했다는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다.

사업이 번창해서 비록 영지는 없지만 웬만한 백작가에 견줄 만한 가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안에서 본 자작가는 허울만 좋을 뿐 언제 망할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런 주제에 나랑 결혼을 해?! 이건 사기 결혼이야!”

에이미는 분노했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혼 전에나 아름다운 외모로 찬사를 받았을 뿐, 이혼 후에 돌아간다고 해도 그녀는 전과 같은 주목을 받을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런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볼품없는 신세로 늙어 갈 수 없었다. 나는 빛나야 해, 아름다운 모습에 모두가 나를 우러러 보게 만들어야 해.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때, 노엘과 에이미는 생각했다.

“이건 다 누나 때문이야.”

“이건 다 언니 때문이야.”

처음부터 자신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한 누나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오웬 자작과 결혼하는 자신을 말리지 않은 언니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어떤 계획을 세우는 동안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이건 모두 제대로 우리를 책임지지 못한 오드리아의 잘못이야. 그들은 그렇게 확신했다.

‘우리는 이렇게 힘든데 혼자만 잘살잖아.’

그녀가 잘살기 때문에 자신들의 인생이 꼬였다. 어떤 근거도 증거도 없지만 에이미와 노엘은 당연하다는 듯 생각했다.

그러니 오드리아의 돈을 자신들도 같이 써야 한다고. 두 사람은 오드리아의 재산을 욕심냈다.

오드리아는 에이미와 노엘이 오랜만에 찾아와 도와 달라고 하자 흔쾌히 돈을 내주었다. 그녀에게는 여유가 있었고 그걸로 동생들에게 보탬이 된다면 바랄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드리아의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의 행동은 두 번이 세 번이 되는 등 끝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찾아오는 간격은 점점 짧아져 갔다.

이번에도 에이미와 노엘이 찾아오자 오드리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 너희에게 줄 돈은 없으니 앞으로는 너희 힘으로 살도록 해.”

두 사람이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고 오드리아는 깨달았다.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모든 것을 감싸 준 자신의 잘못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동생들을 모질게 내쳤다. 에이미와 노엘이 자신의 삶에 충실하기를 바라면서.

오드리아의 기대에 돌아온 것은 동생들의 노력이 아닌 배신이었다. 그들에게 더 이상 도움이 되지 못하는 오드리아는 가족이 아닌 장애물이었던 것일까?

오드리아가 부모님의 기일에 맞춰 무덤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어린 시절 가난할 때 묻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무덤은 산 너머에 있었다.

그런데 그곳을 가던 도중 알 수 없는 이들의 습격을 받았다. 조용히 부모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 오필리아 숍의 호위도 데려가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 무덤을 찾는 이가 아니면 아는 사람도 드문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오드리아를 노릴 만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지만 오드리아는 그게 누구인지 역시 기습을 당한 순간 알아차렸다.

그녀의 동생들. 에이미와 노엘, 두 사람이 그녀를 노렸다.

결국, 오드리아는 무방비한 상태에서 기습을 당해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눈이 가려진 채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발끝에 느껴진 허공이 이곳이 어디인지를 시리도록 알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벼랑 끝에서 힘없이 떠밀렸다.

아래로 추락하는 짧은 순간 동안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지나온 인생들이, 그녀가 죽어라 노력한 순간들이.

죽음이 턱 밑까지 쫓아온 순간, 그녀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자신은 운이 없다고.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족 운이 지지리도 없다고.

* * *

완전히 끊어질 뻔했던 오드리아의 의식이 희미하게 돌아왔다.

칠흑같이 어둡기만 하던 그녀의 세상에 옅은 빛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눈이 부시다는 감각이 느껴질 때였다.

그녀의 귓가에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느 여자가 터져 나오려는 울음소리를 애써 참으며 흐느끼는 것이다.

“흑. 으윽, 읍…… 흐으…….”

깜박. 눈꺼풀이 흔들렸다.

서서히 눈이 떠졌다. 희미하게 느껴지던 빛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환해진 분위기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 말을 하고 자신이 깨어났음을 알리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말을 한 적이 없는 것처럼 잠겨 있었다.

“이러다가 정말로 못 일어나시면 어떡해요?”

“왜 그런 말을 해.”

여자의 흐느낌은 여전했다. 한쪽에서는 울고 있는데, 목소리는 안 나오고 몸 위에 돌덩이를 올려놓기라도 한 건지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오드리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난 왜 가는 곳마다 우울한 거야.’

오드리아는 다시 눈을 감고 싶었다. 도로 의식을 잃어서라도 지금 들리는 이 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질질 짜는 건 끔찍해.’

오드리아는 어느 순간부터 눈물 흘리는 행위를 경멸했다.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이 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피도 눈물도 없다, 철인이라고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었지만 그녀는 무시했었다.

“흑, 그래도 너무 불쌍하잖아요.”

“일어나실 거야! 그러니까 불길한 소리 좀 그만해.”

청승맞은 울음소리는 쉴 줄 모르고 이어졌다. 사실, 오드리아가 울음소리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그 울음소리는 10년 동안 그녀가 흘렸던 눈물이었으니까. 단 하룻밤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잠든 날이 없을 정도로, 눈물은 곧 그녀이기도 했다.

그런데 죽을 위기를 뚫고 다시 살아남은 순간, 그 불길한 울음소리가 가장 먼저 들렸다. 그게 마치 앞으로의 일을 예기하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

‘듣고 싶지 않아.’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저히 훌쩍이는 저 목소리들을 듣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대로 계속 눈을 감고 있으면 다시 의식을 잃을 수 있을까? 오드리아가 눈을 감으려고 할 때였다.

“아, 아가씨?”

“옐라. 이번에는 또 왜 그래.”

방금 전까지 눈물을 흘리던 여자의 이름이 옐라였다. 그녀가 때마침 고개를 돌렸다가 오드리아가 눈을 뜬 것을 발견했다.

“메릴 님! 아가씨 좀 보세요. 정신을 차린 것 같아요!”

그녀가 흥분하며 말했다. 옐라의 곁에서 그녀를 위로하고 질책하던 중년의 여성, 메릴이 대꾸했다.

“옐라. 그게 무슨……. 에그머니나! 아가씨!”

무심하게 말하던 목소리가 멈칫하더니 크게 놀라 외쳤다. 메릴이 다급하게 다가갔다.

약간의 소란이 일더니 갑자기 오드리아의 얼굴 위로 메릴과 옐라의 얼굴이 쑥 나타났다. 두 사람의 눈이 발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런데 눈물이 멈춘 것 같았던 옐라의 눈이 다시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물이 오드리아의 얼굴 위로 떨어질 기세였다.

제발 진정하고 좀 떨어져 줬음 좋겠는데. 오드리아는 진심으로 바랐지만 두 사람의 희로애락이 혼재된 얼굴을 보니 쉽게 진정될 것 같지는 않았다.

“아가씨. 정신이 드세요?”

“…….”

“괜찮으면 눈이라도 한 번 깜박여 주세요.”

깜박. 오드리아가 눈을 깜박이자 옐라의 눈물샘이 결국 터지고야 말았다.

“천만다행이에요! 정말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옐라. 이제 막 깨어난 아가씨 쉬시게 해 드려야지. 언제까지 그럴 거니?”

메릴이 옐라를 말리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 흥분한 기색이 보였다.

“죄송해요. 흑. 너무 기뻐서 그랬어요. 너무 다행이라. 아가씨, 죄송해요. 저 때문에 정신없었죠.”

“일단 의원을 불러서 진찰을 받아 보는 게 좋겠어요. 혹시 불편하신 데 있으세요?”

메릴이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하며 오드리아에게 물었다.

몸이 너무 무거워서 움직이기 힘들다는 것과 목이 잠겨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 불편하긴 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드리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의사가 도착해 오드리아를 살폈다. 체온을 재고 입 안과 몸 이곳저곳을 살핀 그가 입을 열었다.

그가 진료하는 내내 곁에서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메릴과 옐라의 시선이 집중됐다.

“약간의 탈수 증세를 제외하면 괜찮으십니다.”

“며칠을 의식도 없이 생사가 위험했습니다. 혹시 다른 데 무슨 문제가 있을 수도 있잖습니까.”

“정말로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체력도 더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그게 정말인가요?”

의사의 말에도 안심할 수 없다는 듯이 메릴이 몇 번이고 확인을 했다.

“네. 영양 있는 식사와 충분한 휴식을 취하시면 될 겁니다.”

의사가 다녀가고 나서야 메릴과 옐라가 안도했다.

그런데 오드리아는 의식을 차린 순간부터 지금까지 가장 궁금한 부분이 있었다.

“다행이에요, 아가씨.”

메릴이 오드리아를 안심시키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가장 안심한 것은 그녀 같았지만.

오드리아가 가장 궁금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향해 ‘아가씨’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

대체 이 사람은 뭔데 내게 이렇게 공손하게 행동하는 거지?

그녀는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입을 여는 순간 오랜 시간 동안 말을 한 적 없는 사람처럼 목이 긁히는 불쾌한 느낌과 함께 목소리가 겨우 나왔다. 완전히 잠긴 채 나오는 목소리는 그녀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누구…… 세요……?”

“아가씨…… 설마 저 기억 안 나세요?”

메릴이라는 여자의 얼굴에 걱정이 한층 더 짙어졌다.

“저 아가씨의 유모인 메릴이잖아요.”

“유모……?”

“네. 설마…… 기억 안 나세요?”

당연히 메릴이라는 여자를 기억할 리 없었다. 그녀의 인생에 유모라는 존재가 있었던 적이 없으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저 여자가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건가.

하지만 메릴이라는 여자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어릴 때부터 돌본 아이를 보는 것처럼 상냥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그럼…… 혹시…….”

잠시 망설인 끝에 오드리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뭐예요?”

“네? 아가씨 이름이요……?”

그녀가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하는 불안감에 메릴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졌다.

여러 생각이 스치는지 복잡한 얼굴을 하던 메릴은 뭔가를 떠올린 듯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오드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럴수록 오드리아는 더더욱 의문이었다. 이 사람은 누구기에 자신에게 이러는 거지.

“아가씨는 오드리아 트루디시죠.”

메릴이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한 말에 오드리아의 눈이 커졌다.

“……오드리아?”

“네. 트루디 공작가의 막내 따님이요.”

“…….”

“그건 태어나실 때부터 정해진 거니 잊으시면 안 돼요.”

따뜻한 미소와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은 마치 그녀를 위로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그 이름…… 아니, 정확히는 그 이름과 성에 할 말을 잃었다. 오드리아 트루디라니, 믿을 수 없었다.

오드리아는 그녀의 이름이다. 또한, 제국 최고의 가문이자 황가와 비교될 정도로 부유한 것으로 유명한 트루디 공작가의 막내딸 이름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메릴이 말한 ‘오드리아 트루디’는 바로 트루디 공작가의 막내딸 단 한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내가…… 오드리아…… 트루디라고요……?”

“당연하죠. 아가씨 이름이 오드리아 트루디인걸요.”

믿을 수 없어 다시 한번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왜 내가 오드리아 트루디인 거지……?’

그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유모라고 말하는 메릴이라는 여자 역시 착각을 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고 이상한 기분에 몸이 떨렸다.

“아가씨……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세요? 의사를 다시 불러올까요?”

오드리아의 이상을 눈치챈 메릴이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뒤에 있던 옐라가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나가 의사를 불러 올 기세였다.

“아, 니, 괜찮아요. 그냥 좀 멍해서…….”

“정말 괜찮으세요?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바로 말씀하세요.”

“응, 그럴게요…….”

다행히 의사는 다시 불러오지 않았다. 하지만 메릴과 옐라는 여전히 걱정이 떨어지지 않아 불안한 듯 몇 번이고 확인을 받았다.

“아가씨. 좀 더 누워 계세요. 당분간은 푹 쉬셔야 해요.”

그런데 그 모습을 본 메릴은 그녀가 추워한다고 생각했는지 이불을 끌어올려 오드리아의 목까지 덮어 주었다.

“따뜻한 스프를 좀 가져올게요.”

메릴이 이불을 잘 덮어 준 뒤에 방을 나섰다.

혼자 남은 오드리아는 메릴이 덮어 놓은 이불을 살짝 들어 그 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몸인데도 다른 사람의 몸을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심장이 쿵쾅 거세게 뛰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침대에서 내려 바닥에 발을 디뎠다. 그동안 오래 누워 있었는지 다리에 힘을 주자마자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거울…… 내 눈으로 확인해야 돼.’

다행히 방 안에는 전신 거울이 있었다. 오드리아는 그 앞에 섰다.

사실 거울을 보기 전부터 이럴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다. 발을 딛는 순간 침대 위에서 바닥까지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높았다. 한 발 내딛는데, 어린아이처럼 작은 발이 보였다.

그 순간 거울 앞에 선 모습을 각오했다.

‘정말로…… 내가 오드리아 트루디가 된 거야?’

아직은 덜 성장한 듯 짧은 팔다리, 창백하다 느껴질 만큼 하얀 피부. 그 어느 것도 ‘오드리아’의 것이 아니었다.

‘어린아이 몸이야…….’

정말로 오드리아 트루디가 되어 있었다. 오필리아 숍의 마담이 트루디 공작가의 영애가, 스물여섯 살이 열 살이 되었다.

죽었다 살아난 것만 해도 어떻게 된 일인지 혼란스러운데 심지어 다른 사람의 몸이라니.

게다가 이름마저도 같다니.

“…….”

오드리아 트루디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자 그녀가 처한 상황이 떠올랐다. 저절로 얼굴이 구겨졌다.

만약 그녀가 오드리아 트루디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전부 사실이라면 죽음에서 살아남은 그녀는 이번 생도 지지리 운이 없었다.

그녀는 오드리아 트루디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귀족들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던 그녀가 제국, 그중에서 수도에 있는 영애 중 모르는 영애는 없었다.

그러니 오드리아 트루디에 대해서도 알음알음 소문으로 들은 것이 있었다.

제국에서 황가와 힘을 겨루어도 유일하게 대적하거나 능가할 수 있다는 트루디 공작가.

그 가문의 단 하나뿐인 영애인 그녀는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현재 10살이었다.

바깥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아서 그녀를 직접 본 사람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무엇 하나 정확한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것들이 있었다.

오드리아 트루디, 그녀는 얼핏 보면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 같지만 실상은 공작가의 버려진 영애라고.

내가 바로 그 오드리아 트루디라니. 몇 번을 생각해도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오드리아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럼 내 몸은 어디에 있는 거지?’

오드리아는 죽지 않았다. 아니, 죽긴 죽었다. 동생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다가 결국 개죽음을 당한 지지리 운도 없고 멍청했던 오드리아는 죽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살아남았다. 그것도 제국 최고의 가문이라 불리는 트루디 공작가의 막내딸이 되어.

트루디 공작가의 핏줄이라 하면 다이아몬드를 물고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오드리아 트루디 역시 모두의 부러움을 받으며 누구보다도 행복해야 할 텐데,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가족들에게 외면받은 그녀는 평생을 움츠리며 사느라 방에서조차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귀부인들은 그녀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언제나 ‘어린아이가 불쌍하기도 하지.’라며 혀를 차고는 했었다.

오드리아 트루디가 동정을 받는 존재가 된 것은 트루디 공작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와 관련이 있었다.

많은 귀족들이 트루디 공작가의 눈치를 보는 만큼 그들은 모두에게 경외의 대상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모든 이들에게 두려움이 아닌 동경과 선망을 한 몸에 받은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지금은 돌아가신 레이첼 트루디 대공 부인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오드리아의 어머니이기도 한 그녀의 존재가 오드리아 트루디에게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트루디 공작가는 세간에 알려진 이미지와는 달리 가족들 간의 사이가 굉장히 화목했다.

대외적으로 트루디 대공은 언제나 무뚝뚝한 얼굴에 표정 변화가 없는 데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 편이라 다들 어려워하지만 레이첼과 함께할 때만큼은 웃음이 넘쳐흘렀다.

트루디 대공은 언제나 그녀의 이름을 감미롭게 불렀다. 그녀의 이름에 마치 꿀이라도 흐르는 것처럼.

트루디 대공의 낮고 서늘한 목소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달콤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레이첼 트루디는 건강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한 편이라 약간의 추위에도 쉽게 감기에 걸려 보름이 넘도록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그녀가 처음 임신을 했다고 했을 때, 트루디 대공은 기쁨보다는 걱정과 두려움이 더 컸다.

만약 아이를 낳다가 그녀가 버티지 못하고 죽어 버리면 어떡하지? 해산하기까지 트루디 공작은 모든 일을 뒤로하고 오로지 레이첼의 곁에서 그녀의 수발을 들었다.

그의 정성 덕분인지 그녀는 건강하게 제레미아 트루디를 낳았다.

그래서 방심했는지도 모른다. 두 번째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제레미아를 낳았을 때처럼 자신이 곁에서 돌봐 주면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져만 갔고 결국 그녀는 오드리아를 낳고 지친 몸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렇게 대공과 제레미아는 사랑하는 아내와 어머니를 잃어야만 했다.

그녀는 비록 몸은 약하지만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녀는 귀족들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 따위 무시하고 스스로의 의지와 마음으로 모든 일을 결정했다.

아이를 낳으면 귀족들은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백일 이내에 유모에게 아이를 맡겼다.

하지만 레이첼은 그러지 않았다. 아이가 자라 웬만한 것은 스스로 할 수 있게 되기까지 직접 제레미아를 키웠다.

아이의 이름을 제레미아로 짓기까지 트루디 대공과 레이첼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수많은 후보 중에서 고르고 골라 지은 이름이었다.

그녀는 직접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로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했다.

아이가 엄마와 아빠를 처음 부를 때의 기쁨, 아이가 첫 뒤집기를 하고 첫 걸음마를 떼는 모습들은 모두 기적이자 넘치는 행복이었다.

제레미아가 처음으로 말을 시작하고 어눌하지만 원하는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글자를 배우기까지 모든 것을 레이첼이 직접 가르쳤다.

그만큼 제레미아 역시 엄마, 레이첼에 대한 애정이 컸다. 트루디 대공도 제레미아도 레이첼을 사랑했다.

그만큼 그녀를 잃었을 때 두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상실감은 지독하기만 했다. 세상 전부를 잃은 것처럼 힘들어했다. 트루디 대공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문제는 두 사람이 레이첼을 그리워하며 괴로워하는 동안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오드리아를 돌봐 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고용인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차마 트루디 대공에게 물어볼 분위기조차 아니었다.

급한 대로 유모를 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당시, 메릴 역시 임신 중이었다. 그녀는 아이를 낳기 위해 장기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휴가를 끝내고 돌아와 보니 자신의 주인인 레이첼이 죽고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가 덩그러니 혼자 숨이 넘어갈 기세로 울고 있었다.

모두가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을 본 메릴이 화를 내며 세상이 떠나갈 듯 울고 있는 어린 아기를 품에 안았다. 그렇게 메릴이 오드리아의 유모가 되었다.

정신적인 지주였던 레이첼의 죽음으로 인해 공작가는 일 년여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슬픔에 잠겼다.

그사이에 오드리아는 모두에게 잊힌 채로 유모 메릴의 손에 자랐다.

레이첼의 죽음 이후로 공작가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삭막해졌다.

모든 것을 얼릴 것 같은 혹한의 겨울이 지나가고 숨을 죽이고 있던 새싹과 동물들이 기지개를 펼 때도 공작가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오드리아가 자랄수록 소심하고 움츠러들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린아이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만큼 저택 안은 굳어 있었다. 그게 레이첼이 자신을 낳다가 죽어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처럼 여겨졌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태어난 게 잘못이었다고, 자신이 죽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럴수록 오드리아는 점점 더 위축되었고 어느새 자신의 방에만 틀어박힌 채 잘 나오지도 않게 되었다.

아직 어려서 사교계에 데뷔할 나이는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인맥을 중요시 여기는 귀족들은 서로의 가문을 오가며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끼리 어울리고는 했다. 하지만 오드리아는 그런 친구조차도 없었다.

여기까지가 그녀가 공작가의 막내딸인 오드리아 트루디에 대해 들은 이야기였다.

무슨 이유로 자신이 그녀의 몸에 들어오게 된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메릴과 옐라의 말에 따르면 여느 날처럼 오드리아는 이불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날이 많았기 때문에 메릴과 옐라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오전이 오후가 되고 저녁이 될 때까지 오드리아가 이불 속에만 있자 메릴이 식사라도 하시라고 다가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메릴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썰렁한 분위기. 메릴은 무례한 짓임을 알면서도 이불을 들췄다. 그곳에는 있어야 할 오드리아 대신 베개 두 개가 세로로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오드리아를 찾기 위해 난리가 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찾을 수 있었다. 오드리아는 후원을 벗어나면 있는 담장 밑에 쓰러져 있었다.

그 뒤로 오드리아는 고열에 시달리며 깨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가 눈을 뜨기 전까지는.

‘오드리아 트루디는 죽었다.’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고열에 시달릴 때 그녀의 숨이 멎었을 가능성.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죽은 자신이 그녀의 몸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럼 나는? 내 몸은 어떻게 된 거지?’

벼랑 끝에 떨어진 채로 바다 어딘가를 떠돌다 바위나 나뭇가지에 걸려서 그대로 부패해 짐승들의 먹이가 되어 버렸을까,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었을까.

어느 쪽이든 지금 당장 확인할 수는 없었다. 갑자기 고열 속에서 깨어난 그녀가 이름만 같을 뿐 연결고리가 전혀 없는 상인에 대해 알아본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우선 이 몸에 적응해야 한다. 열 살짜리 소심하고 내성적인, 가문의 모든 불행의 씨앗이라고 믿는 공작가의 버려진 영애, 오드리아 트루디가 되기 위해.

“휴우.”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한숨이 나왔다. 오드리아가 바라는 것은 부귀영화 같은 것이 아니었다.

가난해도 좋았다. 단지,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도란도란 살아가는 것, 그것이 그녀가 바라는 삶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에게 다시 한번 살아갈 수 있는 기회는 주었지만 가족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는 주지 않았다.

그녀는 또다시 가족들에게 버려진 채로 살아야만 했다. 그 사실이 조금은 쓸쓸했다.

* * *

트루디 공작가의 후광을 제외한다면 오드리아 트루디의 상황은 별로 좋지 못했다.

공작가의 영애로 태어났지만 모두의 관심과 보살핌은커녕 원망 속에서 버려진 신세. 그녀는 스스로 방 안에 자신을 고립시킨 상황이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오드리아는 소문으로 접한 정보가 전부인 상황에서 그녀의 몸에 적응해야만 했다. 과연 그녀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한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지금까지 방 안에서만 지내고 하루에 한 마디를 하면 말을 많이 한 편이었다고 하는데 그런 오드리아 트루디가 뭘 할 수 있지?

‘생각해 보면…… 처음 눈을 떴을 때 목소리가 안 나온 것도 이상했어.’

목이 완전히 막혔던 것은 아프기 훨씬 전부터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서였던 것이다. 그 지경이 될 정도로 스스로 입을 닫아 버린 오드리아 트루디는 무슨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을까.

그녀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앞이 보이지가 않았다. 과연 잘해 낼 수 있을까.

‘일단 해 보자.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지만 오드리아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두 동생을 키우고 자신의 사업을 성공시키기까지 했던 인물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지금의 상황에 쉽게 굴복할 수 없었다.

오드리아는 지금의 상황을 파헤칠만한 방법을 찾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작가의 분위기를 살피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메릴과 옐라가 오드리아에게 호의적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공작가의 영애라고 해도 이런 처지에 속한 영애들은 하녀들에게조차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만약, 곁에서 시중을 드는 하녀들이 그랬다면 오드리아도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나마 그녀의 편이 있다는 것은 공작가의 수많은 악조건 속에서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제는 괜찮아지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오드리아의 안색을 살피던 메릴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지난 며칠 동안 메릴과 옐라는 오드리아가 하루라도 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 덕분인지 무거웠던 몸도 가벼워졌다.

“저어…… 근데…….”

“네. 말씀하세요.”

오드리아가 두 사람을 향해 입을 떼자마자 그녀들은 쏜살같이 반응했다. 너무 빠른 대답과 부담스럽게 빛나는 눈빛에 오히려 오드리아가 깜짝 놀랄 뻔했다.

“산책…… 을 좀 하고 싶은데…….”

저택 내부를 둘러보기 위한 가장 무난한 방법이었다.

식사를 했으니 자연스럽게 산책을 하려고 했는데 그녀의 말에 메릴과 옐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정말…… 산책을 하실 거예요?”

옐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눈이 커졌다.

“응, 그러고 싶은데…… 안 돼?”

아직 공작가의 분위기를 잘 알지 못하는 오드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럴 리가요! 산책 좋죠! 소화시키는 데도 좋고! 건강에도 좋고! 전부 다 좋죠!”

옐라가 과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언제나 방에 틀어박혔던 오드리아가 자청해서 방을 나선다는 말은 메릴과 옐라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격한 감동을 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오드리아의 산책을 반기며 곧바로 준비를 했다.

“어디로 가시겠어요?”

“음, 그냥 후원이나 갈까 하는데.”

오드리아는 저택 내부는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서 어디에나 있는 후원을 언급했다.

“후원 어디에 가고 싶으세요?”

그런데 옐라는 후원 중에서도 어디를 갈지 물었다. 뭐가 어떻게 나뉘어 있는 거지?

트루디 공작가의 저택은 제도 내에서도 가장 크다. 하지만 멀리서 본 적이 있을 뿐이라서 대체 그 안에 어떤 공간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여기서부터는 지레짐작으로 말하기 애매해 망설일 때였다.

“오랜만에 나가시는 거니 가까운 곳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메릴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에서 나가는 것뿐인데도 메릴과 옐라는 마치 외출이라도 하는 것처럼 오드리아의 머리를 단정하게 빗기고 외출용 드레스를 입히고 산책하기 편한 신발을 챙겨 주었다.

방을 나서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오드리아가 기분 좋게 한 걸음 내디디려고 하는데 메릴이 입을 열었다.

“걷다가 힘드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제가 업어 드릴게요.”

옐라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래 봐야 저택 안이고 그중에서도 가까운 후원에 가는 건데.

오드리아는 두 사람의 걱정이 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고마워’라며 웃어 넘겼다.

그녀는 사업을 하면서 제도 내에 있는 귀족들의 저택을 수도 없이 다녔었다. 안 가 본 데가 거의 없을 정도였지만 단 한 곳, 트루디 공작가는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단지, 황궁과도 비교될 정도의 규모와 아름답다는 소문만 무성한 저택 내부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작가에 대한 환상을 키워 줄 뿐이었다. 오드리아 역시 그 안이 어떤 모습일지 내심 궁금하긴 했었다.

방을 나서 긴 복도를 지나 본관을 나오자마자 저택이 얼마나 큰지 보였다. 도저히 끝이 가늠이 되지 않는 규모에 그저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메릴은 후원으로 향하는 동안 몇 번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트루디 공작가는 그중에서도 후원이 유명했다는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분명 레이첼 대공 부인이 직접 신경을 썼다고 했었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한 저택은 그야말로 황홀했다. 저택은 소문 그 이상이었다.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것처럼 다양한 색을 지닌 꽃들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오드리아는 그 풍경을 보자마자 황홀함에 넋을 잃었다.

현실이 아니라 꿈과 환상 속에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공간인 것 같았다. 한순간에 마음이 붕- 떠올랐다. 아름답다. 그 생각만이 모든 감각을 지배했다.

오드리아는 홀린 사람처럼 후원을 천천히 걸었다. 끝없이 이어진 꽃의 세계는 너무 넓어서 오래 걸리지 않아 메릴과 옐라의 과한 걱정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시간도 별로 흐르지 않았고 많이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호흡이 가빠지고 땀이 흘렀다.

오드리아 트루디의 몸은 열 살짜리 어린아이였다. 오드리아의 생각보다 어린아이는 체력이 약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방에서만 지내던 그녀였다. 보통의 어린아이보다도 체력이 부족하다 보니 결국, 전부 구경하기도 전에 지쳐서 포기해야만 했다.

예전에는 하루 종일 걷기만 해도 버틸 만했었는데. 생김새뿐만 아니라 체력도 어린아이가 됐구나.

오드리아는 새삼 깨달았다. 조금만 돌아다녀도 발등 위에 돌덩이가 얹어진 것처럼 무거워졌다.

더는 한 발짝도 걷지 못할 것 같아서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있자 뒤에서 따라오던 메릴과 옐라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어디 불편하세요?”

“혹시 다리가 아프신 거예요?”

옐라가 드레스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다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드리아의 울상인 얼굴이 대답을 대신했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한 발자국도 더는 꼼짝하지 못하겠다고.

옐라가 망설임 없이 오드리아의 앞에 등을 보인 채 한쪽 무릎을 접어 바닥에 댔다. 그리고 팔을 뒤로 살짝 넘겨 오드리아에게 말했다.

“업히세요.”

하지만 오드리아는 옐라의 등을 보기만 할 뿐 선뜻 업히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옐라가 고개만 살짝 돌려 오드리아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약속했잖아요. 만약 아프면 업어 드리기로.”

한 번도 누군가의 등에 업힌 적이 없었다. 게다가 옐라 역시 오드리아의 눈에는 앳되어 보였다. 그녀가 제대로 업을 수 있을까? 힘들 것 같은데.

오드리아는 자신의 몸이 열 살에 비해서도 왜소한 편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죽어도 못 걷겠어…….’

차라리 기어서 가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색하게 팔을 뻗어 옐라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그러자 옐라가 그녀의 다리를 덥석 잡아 올려 상체를 몇 번 들썩였다.

“이제 돌아갈까요?”

어느새 오드리아는 옐라의 등에 편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렇게 오드리아를 등에 업은 채 옐라는 씩씩하게 걸음을 내딛으며 방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와 보니 오드리아의 다리 상태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너무 오랜만에 움직이다 보니 몸이 견디지 못한 것 같았다.

“발이 이렇게 될 때까지 왜 말씀을 안 하셨어요.”

“저희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옐라는 자신의 발이 다친 것보다 더 속상해하고 메릴은 오히려 오드리아에게 미안해했다. 두 사람의 반응에 오히려 오드리아는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도 자신의 발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프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오드리아 트루디의 몸이 얼마나 약하고 깨진 유리조각 같은지 새삼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녀의 발을 보고 속상해하던 메릴과 옐라는 곧바로 오드리아의 발에 약을 바르고 다리가 뭉치지 않도록 주물러 주었다.

결국, 그날은 부족한 체력으로 인해 후원조차 자세히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일단 체력을 좀 길러야겠어. 그래야 저택도 다시 돌아볼 수 있지.

그 정도도 걷지 못한다면 넓은 저택 안을 제대로 확인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오드리아는 체력을 키우기 위해 식사를 열심히 했다.

방 안에서도 꾸준히 몸을 움직이고 메릴과 옐라가 보지 않을 때 틈틈이 운동을 했다.

그렇게 며칠 동안 나름의 준비를 하고 난 뒤 오드리아는 다시 저택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오늘도 식사를 마치자마자 나가려고 하자 메릴과 옐라가 걱정을 하며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힘드시면 곧바로 돌아오셔야 해요.”

“응. 그럴게.”

“이게 밑창이 푹신푹신해서 돌아다니시기에 좀 더 편할 거예요.”

옐라가 다리에 경련이 날까 봐 준비한 신발을 오드리아의 발에 신겨주었다.

오랜만에 방을 나서서 조금이라도 움직이려고 하는 그녀가 다시 방에 틀어박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저택을 구경하다가 걷지도 못할 정도로 발이 엉망이 되어 혼쭐이 난 오드리아는 정확한 목표를 두고 움직이기로 했다.

하루는 도서관, 또 다른 하루는 온실. 이런 식으로 구역을 나눠서 돌아봤다.

그동안 오드리아는 가족들과 마주치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그리고 오드리아가 지내는 곳은 같은 본관이었지만 그녀의 방은 두 사람의 방과 멀리 떨어져 있어 사실상 동선이 거의 겹치지 않아 가능했다.

지금까지 돌아보며 느낀 것은 공작가는 후원이 굉장히 잘 관리되고 있다는 것이다. 섬세한 관리가 필요한 온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본관 뒤에는 고용인들이 사용하는 별관이 있었고 거기서 조금만 더 들어가면 마구간이 있었다.

연무장은 후원을 지나서 있는데 그 근처에서 트루디 대공이나 제레미아와 마주칠 수 있어서 오드리아는 그 근처까지만 갔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오드리아가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둘러본 곳은 후원이었다. 첫날에 봤던 후원은 전체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본관 뒤의 넓은 공간을 모두 사용한 후원은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본 건물에서 시작하는 곳과 저택의 현관에서 시작하는 곳 등 여러 군데 입구가 있었고 장소가 바뀔 때마다 후원에 피어 있는 꽃이 전혀 달라져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후원이 끝나는 지점에는 또 다른 공간이 나오는데 늘 일정 온도를 유지시켜야 하는 식물들을 모아 놓은 온실이 있었다.

이 정도의 규모를 관리하다 보면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은 소홀해지기 십상인데, 이곳은 어딜 봐도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잘 관리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오드리아가 공작가에서 본 것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저택이 아닌 그 안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이었다.

저택의 고용인들에게서는 그녀가 오필리아 숍을 운영하면서 만났던 사람들 중 광산을 발견해 엄청난 부를 얻으면서 작위를 받게 된 신흥귀족들보다 더 높은 기품과 품격이 느껴졌다.

고용인들이 입고 있는 옷도 웬만한 자들은 입을 수 없는 고급이었다. 중소 지역의 비교적 부유하지 않은 귀족들이 입을 만한 옷이었다.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도 귀족이었다. 옷은 곧 첫인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첫인상을 중요시하는 귀족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옷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이 입는 옷 역시 만만한 값이 아니었다.

오드리아 역시 사업을 하고 사람들을 고용해 봤기 때문에 고용인들의 걸음걸이, 표정 변화, 시선 처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저 정도로 완벽하게 되기까지 이곳에서 하루 이틀 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랜 시간 이곳에서 자신들이 곧 트루디 가문을 대신한다는 높은 긍지를 가지고 일하며 그들 스스로 가문에 알맞은 모습으로 맞춰진 것이다.

문지기가 저택의 얼굴을 대신한다는 풍문처럼 사람을 보면 그 가문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분명 트루디 가문은 고용인들에게 제국 최고의 대우를 하고 있을 것이다. 대신 그에 걸맞은 요구와 교육을 시킬 것이고 그 교육은 힘들고 빡빡할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용인들은 이곳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이 오드리아의 눈에 너무나도 잘 보였다.

그녀는 많은 귀족가에서 일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트루디 공작가의 모습이 얼마나 보기 드문 상황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저택 내부의 크기, 화려하면서도 조화롭게 꾸며져 마치 동화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후원, 거기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근무 여건까지. 가까이에서 본 트루디 공작가는 모든 것이 대단했다.

트루디 공작가에서 지낸 며칠 동안 가지고 있던 편견과도 같았던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트루디 공작가는 분명 대단한 가문에 많은 존경을 받고 있지만 오드리아가 직접 본 공작가는 지금까지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쌓인 것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태어나서 사랑받았다면 좋았을 텐데.

모든 것을 다 가졌으나 철저하게 혼자였을 오드리아 트루디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에게는 공작가의 엄청난 배경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겠지.

어린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가족들의 사랑이니까.

그녀가 며칠 동안 저택 안을 돌아다니며 트루디 공작가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것처럼 오드리아 트루디의 상황에 대해서도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오드리아 트루디가 공작가에서 모두에게 외면을 받게 된 계기는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낳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모두가 오드리아를 원망하고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방을 나서면 따가운 시선들과 그녀에게 해코지를 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봐도 잠시 시선을 뒀다가 갈 길을 갈 뿐이었다. 그 누구도 적의를 가지고 바라보거나 무시를 하고 조롱하지 않았다.

단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도 아무도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오드리아와 마주쳐도 모두가 그녀를 외면했다.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쏟는 것은 오로지 메릴과 옐라가 전부였다.

오드리아 트루디가 버려졌다는 것에 대한 정확한 의미는 ‘방치’였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관심 가지지 않는다. 무엇을 해도 말이다. 그건 오드리아를 고립시키는 요인이기도 했다.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또 있었다. 그녀는 공작가의 버려진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쓰지 않고 먼지처럼 쌓여 온 품위 유지비는 웬만한 백작가의 일 년치 예산과 맞먹었다.

거기에 그녀가 가족들에게 어떤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녀 역시 오드리아 트루디였다. 트루디라는 성을 지닌 것만으로도 엄청난 힘을 가진 것이다.

게다가 트루디 공작가는 높은 명성과 수많은 공을 세운 것 외에도 유명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였다.

트루디 대공부터 제레미아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레이첼 대공 부인까지 그들의 눈부신 외모는 제국 전역에 유명세를 떨쳤다.

지금까지 오드리아 트루디를 직접 만난 사람이 거의 없어 그녀의 외모에 대한 소문은 나지 않았었지만 눈앞에 있는 거울로 직접 확인한 오드리아 트루디도 역시나였다.

트루디 공작가의 일원임을 증명하듯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하게 가득 찬 이목구비는 살아 있는 인형이 아닌가 싶을 만큼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 특히, 동그란 눈을 깜박일 때마다 나풀거리는 나비가 연상되는 속눈썹이 어딘가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냈다.

게다가 어리기 때문일까, 마른 몸매에 비해 통통한 볼살이 그녀를 인형처럼 귀여워 보이게 만들었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그런 일만 없었더라면, 아니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가 좀 더 신경 썼더라면 어린아이가 그토록 외로워하고 힘들어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어린 오드리아 트루디를 떠올리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오드리아의 가족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그녀와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사이에는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을까? 그래도 가족인데 최소한의 교류는 있지 않았을까?

이걸 그녀에게 알려 줄 수 있는 사람은 메릴과 옐라밖에 없었다.

오드리아는 그녀들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두 사람은 당황한 티를 숨기지 못하고 굳었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메릴과 옐라의 말에 따르면 자신들의 불쌍한 아가씨, 오드리아는 태어나자마자 이곳에 방치되었다.

그녀가 독감에 걸려 생사가 위험해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삼 일 밤낮을 울기만 해서 탈진을 해도 공작가의 주인들에게서는 어떤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메릴 역시 주인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들이 슬픔에 잠겨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 아가씨를 외면할 리는 없다고 확신한 메릴이 여러 시도를 해 봤지만 모두 무참하게 실패했다고 한다.

말도 못할 정도로 어린 시절의 오드리아는 잘 울지도 않고 메릴이 얼굴만 비춰도 방긋거릴 정도로 순한 아이었다.

메릴의 시선에 그런 오드리아는 사랑스러웠다. 대공과 제레미아가 이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습을 보면 주인님 역시 오드리아에게 사랑을 느낄 것이라고 메릴은 확신했다.

두 사람에게 아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는 책임감에 두려움까지 이겨 낸 메릴이 대공과 제레미아를 오드리아가 있는 곳으로 데려왔을 때였다.

방금 전까지는 방긋거리며 웃다가 메릴이 장난감이라도 흔들어 보이면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던 오드리아였다.

그런데 대공과 제레미아가 다가가자마자 오드리아는 겁에 질려서 숨이 넘어갈 기세로 울기 시작했다.

그 울음은 대공과 제레미아가 멀리 떨어져서야 겨우 그쳤다. 그 모습은 마치 영원히 마주할 수 없는 평행선과도 같았다.

메릴은 후회했다. 대공과 제레미아는 외모와는 별개로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벌벌 떨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서워하지 않을 리 없었다. 생각이 짧았다.

메릴은 후일을 기다렸다. 오드리아가 자라서 짧은 다리로 아장아장 걸어 다니고 간단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메릴은 기다렸다는 듯이 식사 자리에 오드리아를 모시고 나갔다.

원래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였으니 그 자리에 오드리아가 있는 것은 명분상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명분 외에는 모든 것이 불편한 자리였다.

대공과 제레미아는 갑작스러운 오드리아의 등장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식사 시간 내내 세 사람은 불편한 공기 속에서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인 식사를 해야 했다.

그날, 오드리아는 먹은 것을 소화시키지 못해 모두 게워 내야만 했다.

눈물 콧물을 흘리며 메릴의 치맛자락을 붙잡은 오드리아는 메릴에게 다시는 그런 곳에 자신을 데리고 가지 말아 달라며 빌었다. 오드리아는 자신이 잘못한 게 있어서 메릴이 벌을 내린 거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메릴은 정신이 어지러웠다. 그리고 다시는 오드리아를 위한답시고 대공과 제레미아와 함께 있는 시간을 만들지 않았다.

오드리아 트루디가 공작가에서 방치된 것은 결국, 타의에 의해 시작했지만 자라면서 반쯤은 자의가 된 것이다. 그 후, 더 이상 오드리아와 대공, 제레미아가 함께 있는 시간은 없었다.

그녀의 성장 배경을 어느 정도 알게 된 오드리아는 생각했다.

오드리아는 방치되기는 했지만 가족들이 그녀를 원망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

공작가의 버려진 영애, 풍족한 품위유지비, 모두의 무관심. 순간적으로 오드리아의 눈빛이 빛났다. 생각이 정리되었다.

‘지금 이 상황은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살아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잖아?’

트루디 공작가와 얽히지만 않는다면 오드리아 트루디에게는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누구보다 알차게 그러면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조건이라면…… 나쁘지 않잖아?’

모든 것을 가졌고 황제마저도 눈치를 보는 가문이다. 그 가문의 영애로 태어나 누리는 것.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최고였다.

오드리아 트루디, 그녀는 에이미와 노엘의 언니이자 누나인 마담 오드리아와 전혀 다른 조건과 환경인 것 같으면서도 지독한 부분에서 닮아 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하에 많은 것을 참고 견뎌야 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보답받지 못했다. 많은 것을 바란 게 아닐 텐데도.

동생들을 책임지느라 많은 것을 포기한 그녀가 가족의 외면 속에 어린 시절부터 눈치를 보고 움츠러들어야만 했던 아이가 되었다.

그리고 오드리아는 이제 가족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알았다. 더 이상 그 이름에 휘둘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를 떠올리면 안쓰럽지만 그녀의 몸에 들어온 스물여섯 오필리아 숍의 마담 오드리아는 더 이상 가족들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충족되는 삶.

트루디 공작가는 최소한 이 조건을 완벽하게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넘치도록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가족들 사랑이 뭐가 필요해. 그냥 지금까지 고생한 거 더 이상 할 필요 없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거잖아.’

오드리아는 그동안 가족은 서로 같은 피가 흐른다, 모두가 배신해도 마지막까지 내 편이다, 내가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의 죽음으로 깨달았다. 가족은 아무 쓸모도 없다는 것을. 그러니 가족들에게 사랑받을 필요 없었다. 그런 것보다는 차라리 안락한 나날을 추구할 것이다.

오드리아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풍족한 돈, 든든한 가문, 게다가 웬만한 것들은 용서받을 수 있는 어린 나이, 그러면서 어떠한 제약도 의무도 없었다.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가족이라는 단어에 얽매일 필요도 없었다.

이건 완벽한 조건이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기에는.

오드리아는 자신 있었다. 트루디 공작가에서 얼마든지 혼자 잘해 나갈 거라는 자신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