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공작가의 실세
트루디 공작가.
건국 초기에 황제를 도와 제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가문이자 지금까지도 제국에서 가장 높은 위상을 지닌 가문.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국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 황가와 트루디 공작가라고 일컬을 만큼 트루디 가문의 역사는 제국의 역사 그 자체였다.
그러던 중 이십여 년 전에 있었던 영토분쟁에서의 활약으로 트루디 공작가의 수장 제이 트루디는 제국에서 유일하게 ‘대공’의 지위를 획득했다. 대공의 칭호는 오로지 그의 영광을 칭송하기 위해 수여된 단승 작위로 계승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공작가의 영지민들은 배곯는 일이 없었고 삶의 만족도가 제국에서 가장 높았다.
그 이유는 영지민을 위한 산업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도 있겠지만 공작가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넘쳐나는 재산이 결정적이었다.
공작가의 재산은 황가의 재산을 웃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막대했다. 재산이 넘쳐나니 굳이 세금을 높이 책정할 이유도 없고 영지에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막대한 돈을 들여 해결하곤 했다.
동시에 많은 전쟁에서 세운 혁혁한 공에 뒤따르는 전설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트루디 대공의 무력은 함께 싸우는 기사들의 동경과 절대적인 복종을 낳았고, 그들의 입으로 전해진 수많은 일화는 어느새 전설로 회자되었다.
그들과 한 번이라도 전쟁을 한 나라는 제국의 황제가 아닌 트루디 가문이 무서워서 감히 다시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황제마저도 트루디 가문의 눈치를 보곤 했다.
게다가 트루디 공작가에는 제레미아 트루디라는 든든한 후계자가 있다. 지금의 대공에게 문제가 생긴다고 해도 트루디 가문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실상 제국의 중심이며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권력 그 자체. 그게 바로 트루디 공작가였다.
하지만 바로 그 트루디 공작가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제국의 유일무이한 대공인 트루디 대공도 그의 후계자인 제레미아 트루디도 아니었다.
트루디 공작가에 청탁이나 부탁을 하고 싶으면 대공도 후계자도 아닌 바로 그분을 찾아가라, 그분은 가능한 것은 빨리 되게 만들고 안 되는 것도 되게 만드시는 분이다, 그분에게 밉보이는 순간 뜻하는 바를 영영 이루지 못하리라.
그 인물에 대한 소문을 짧고 굵게 해석하면 ‘공작가의 실세’, ‘가문의 숨은 실력자’로 표현할 수 있었다.
오드리아 트루디, 그 소문의 주인공이자 공작가의 막내딸이었다.
또한, 그 소문은 진실이자 진리였다.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축소되어 있는 것에 더 가까웠다. 그녀는 공작가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황제 앞에서보다 그녀 앞에서 더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사람들은 과하다 못해 꼴불견일 정도로 오드리아 앞에서 몸을 납작 엎드렸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녀 앞에서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제국에서 매장당한 이들을 수차례 목격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근엄하고 냉소적인 트루디 대공을 한순간에 무장 해제시키고 입 안에 든 캔디처럼 살살 녹게 만드는 사람은 오드리아뿐이었다.
그의 후계자인 제레미아 트루디 역시 만만치 않았다. 제레미아는 마치 자신의 아버지와 경쟁하듯이 오드리아에게 애정공세를 펼쳤다.
‘오드리아,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사 왔어.’
제레미아 트루디의 입버릇이었다. 그는 전쟁이나 외교 문제로 장기간 가문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마다 제 동생인 오드리아에게 엄청난 양의 선물을 쏟아부었다.
선물의 종류도 다양했지만 같은 드레스와 보석도 색깔별로 모조리 사 왔다는 것이 압권이었다.
멀리 떠나야 할 때마다 제레미아 트루디는 오드리아의 드레스 자락을 잡고 하루 종일 놓지 않았다.
후원을 산책할 때는 물론이고 밥을 먹을 때도, 손님이 찾아왔을 때도. 그렇게 하루를 함께 보낸 후에야 가기 싫은 얼굴로 겨우 떠나곤 했었다.
오드리아 트루디. 그녀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트루디 공작가의 사랑받는 막내딸이자 고명딸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혼인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작가에 살고 있었다. 이혼을 했거나 별거 중이거나 사별을 한 것도 아니다.
그녀의 남편은 여전히 잘생기고 오늘도 잘생기고 내일도 반짝반짝 빛날 예정이었다.
트루디 대공과 제레미아 트루디에게만 못나고 부족할 뿐이지, 누가 봐도 잘생기고 능력 있고 심지어 오드리아에게 일편단심인 그는 일등 신랑감이다.
아무리 대단한 가문의 레이디라고 할지라도 결혼을 하면 남편의 가문의 성으로 바꾸고 그 가문의 사람이 된다. 그것은 제국의 황녀일지라고 해도 당연히 따라야 하는 관습이었다.
“정말 부러워요.”
“결혼 후에도 계속 자신의 가문에서 살 수 있는 영애가 얼마나 있겠어요.”
하지만 오드리아는 달랐다. 그녀는 결혼을 했지만 남편과의 행복한 신혼생활을 공작가에서 누리고 있었다.
“친정에서 남편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낯선 곳으로 가지도 않고.”
“맞아요. 친정은 모두가 내 편인 곳이잖아요. 너무 부러워요.”
오드리아를 향한 영애들의 부러움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가족이라고 해서 모두가 지지해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트루디 공작가는 절대적으로 오드리아의 편이었다.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당연한 사실이었다.
오드리아가 결혼 후에도 공작가에서 지낼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녀의 남편은 데릴사위였다.
제국에서 데릴사위는 남자에게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드리아의 남편은 자신이 데릴사위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어쩌다 보니 상황이 그렇게 된 거예요. 대단한 일이 아니에요.”
“이러니 사랑받으시나 봐요.”
정작 그녀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으면서도 으스대지 않았다. 바로 그런 점들 때문에 오드리아는 더더욱 사랑받았다.
사실, 오드리아는 사람들의 칭송에 가까운 대화들을 들으며 남몰래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 잘 보이면 뭐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를 한 영애들을 보며 차마 내뱉지 못할 말을 삼켰다.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사람들은 모른다.
모든 것을 가지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존재. 그것이 현재의 그녀를 수식하는 말이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사랑받는 딸이 아니었다.
‘오히려 버려진 존재였지.’
그녀의 나이 10살. 그때까지 그녀는 공작가에서 살아도 죽은 존재, 있어도 없는 존재와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