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둘만의 시간 (2)
에일린이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살며시 감싸며 욕조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씻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게 무색하게 욕조에 가득 차오른 알맞게 식은 물이 에일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덕분에 잘 씻고 나올 수 있었던 에일린은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편한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에일린,”
아직 채 말리지 않은 머리 때문에 수건을 들고 있던 에일린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로이드가 보이지 않았다. 에일린이 몇 걸음 걸어가다 결국 별장의 발코니로 나가보니 벤치에 앉아 있던 로이드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리 와.”
“잠시만요.”
에일린이 급히 돌아가 로이드가 있을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막 그를 향해 달려가니 로이드가 못 말린 듯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로이드는 제 품에 뛰어 들어오는 에일린을 안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뭐가 급하다고 뛰어와.”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그 잠깐을 참지 못한 건 에일린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음이 그렇게 흘러갔으니까. 그렇게 끌어안고 있다가 누구랄 것도 없이 벤츠에 앉아 서로에게 기댔다.
로이드는 수건으로 에일린의 머리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닦아주었다. 금발이 해가 저문 호수에 새로운 태양처럼 반짝였다.
“정말 언제 봐도 좋네요.”
호수에 도착했을 때는 햇볕이 가장 강할 한낮이었다. 요리하고 씻고 나왔더니 해가 지기 시작하는 호수는 또 다른 모습을 드러냈다.
“내일도 보고 싶어요.”
에일린이 정신없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자 로이드는 그녀의 모습을 눈을 담았다.
“왜 그렇게 봐요?”
“당신을 일찍 만나서 다행이야.”
에일린이 호수에서 눈을 떼곤 로이드를 보았다.
“당신이 베타일 때의 모습 그리고 지금의 모습을 다 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렇네요.”
베타일 때 로이드와 결혼해서 발현했으니 제 달라진 모습은 전부 알고 있었다. 에일린은 괜히 쑥스러운 마음에 그의 눈을 피했다. 자기도 오메가로 발현하면서 예전보다 외모가 나아졌다는 걸 알았다. 그걸 로이드가 그대로 느꼈을 거라고 생각하니 발현하고 나서 만나지 못한 게 조금 후회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이어지는 로이드의 말에 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그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면 이번엔 또 어떤 사고를 벌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내 아내란 여자가 얌전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게 그렇게 유쾌할 수가 없었어.”
“아니 베타일 때를 말하면서 왜 그런 말이 나와요?”
에일린의 황당하다는 말에도 로이드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발현했어도 여전히 당신이니 조금 다른 모습으로 일을 벌이는 게 또 좋기도 했고.”
“들으면 들을수록 뭔가 이상한데요?”
에일린이 로이드를 흘겨보았다. 제 껍데기가 조금 달라졌을지언정 알맹이는 그대로라는 말이었다.
“그저 당신 자체가 좋았던 거야.”
로이드가 에일린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고백했다.
“내게 베타나 오메가는 다른 옷을 입은 것과 마찬가지야. 에일린 당신에게 빠져들었고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고 이젠 당신을 사랑해.”
진지하게 제 마음을 내보인 로이드가 슬쩍 다른 말을 덧붙였다.
“페로몬이 생긴 건 마음에 들어.”
그것 말고는 어떤 모습이든 에일린을 사랑한다는 달콤한 고백이었다. 에일린은 제 모든 것을 사랑해주는 로이드의 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에일린이 늦게 발현한 것에 대한 그 어떤 후회나 걱정도 담을 수 없게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녹여버리는 말이었다. 에일린은 목이 메 어떤 말을 하지 못하다가 아예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천천히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면서 내려오다 보니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그의 탄력적인 입술을 살살 베어 물다가 고개를 기울여 더욱 깊게 입을 맞췄다. 서로의 숨 하나마저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면서 에일린이 로이드의 옷을 꼭 쥐었다. 입술이 떨어질 때 에일린은 아직 부족하다는 듯 로이드의 입술을 아프지 않게 물었다.
“사랑해요.”
에일린의 고백에 그녀를 끌어안은 로이드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저는 이제 당신이 없으면 우리가 함께한 추억으로 버텨갈 수밖에 없게 되었어요.”
친정에서 장미가 있는 후원으로만 향한 이유였다. 장미를 보고 있으면 그와 있었던 좋았던 기억이 떠올랐고 그 기억을 계속 되새기고 싶어서 에일린은 계속 장미 후원에 갔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우리 이제 추억으로 버티지 말고 매일 새로운 순간을 꿈꿔요.”
“그래.”
로이드가 에일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를 지그시 응시하던 어느 순간,
“안으로 들어가요.”
에일린의 유혹에 로이드가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이제 호수를 바라볼 여유가 사라졌다. 로이드가 에일린을 품에 꽉 안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
한껏 달아오른 페로몬이 방을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의 페로몬이 어우러지면서 서로를 보듬고 사랑을 나눴다. 에일린은 마음껏 제 페로몬을 풀어내며 로이드를 향한 마음을 전달했다.
서로의 숨결을 나누는 이 시간은 에일린이 발현하면서 갑자기 맞았던 상황과 달랐다. 그때보다 더 여유를 가지고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에일린은 이제 제 모든 것을 드러내는 데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감싸줄 수 있을 것만 같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로이드는 에일린이 뿜어내는 페로몬을 받아들이며 그녀를 그의 영혼에 깊게 새겼다. 서로의 마음이 통하고 그 어느 때보다 서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은 자연스럽게 각인의 단계로 흘러 들어갔다.
각인이란 심장에 이름을 새기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만큼 제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을 만큼 상대를 사랑해야 하고 상대 역시 그에 반응해 주며 서로의 마음이 통해야지만 각인이 이뤄질 수 있는 거였다.
기준이 까다로운 대신 한번 각인을 맺으면 서로를 향한 마음이 평생 이어진다.
‘이게 각인이구나.’
로이드를 끌어안고 깊은숨을 내쉬던 에일린이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각인에 미소 지었다. 마음이 통했다. 제게 다시 주어진 삶은 축복이자 신이 제게 준 선물이었다.
***
얇은 드레스 위로 가운을 여민 에일린이 밖으로 나왔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에 솜털이 일어났지만 시원하기도 해서 에일린은 가운을 더욱 여미고 계단을 내려갔다. 간밤에 비가 내렸는지 풀에 맺힌 이슬과 공기 중에 느껴지는 습기가 느껴졌다. 풀과 물이 섞인 냄새를 맡으며 걸어가자 머지않아 호수에 도착했다.
새벽이슬을 머금은 호수는 어제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어제 앉았던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니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완전히 다른 배경에 신비로운 호수가 모든 것을 잊게 했다.
에일린이 호수를 보다 긴 숨을 내뱉으며 다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팔 위에 턱을 대고 잠깐 눈을 감았다. 눈을 떠도 환상적인 분위기인데 눈을 감으니 또 다른 느낌이었다. 자연의 소리에 빠져들고 있으니 등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에일린에게 외투를 덮어준 로이드가 몸을 숙여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공기가 차.”
“일찍 일어났네요.”
“당신이 없어서.”
에일린이 옆에 앉은 로이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와 함께 보니 호수가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에일린의 감상을 들으며 로이드도 호수를 감상했다.
“당신의 페로몬까지 느껴져서 호수에 꽃이 핀 거 같아.”
에일린의 꽃향기가 어우러지자 로이드에게는 호수 주변에 보이지 않는 꽃들의 향기까지 맡아지는 듯했다.
“저는 당신의 페로몬을 맡으니 더욱 청량하게 느껴지는데요.”
에일린이 로이드의 어깨에 턱을 대고 말했다. 호수를 품은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웃음 지을 때 로이드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여기서 계속 살까?”
로이드의 제안에 에일린이 호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참이나 호수를 보던 에일린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꿈만 같은데 매일 꿈을 꿀 순 없잖아요. 아주 가끔 둘이서 와서 꿈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지금이 좋다고 해도 현실을 배제하고 살 수는 없었다. 에일린은 로이드를 필요로 하는 곳이 많기에 이 순간을 정말 소중하게 쓰고 싶을 때만 쓰기로 했다.
에일린의 마음을 읽은 로이드가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언제 또 올까?”
언제 와야 특히나 기쁘고, 이 순간을 잘 누릴 수 있을까 생각하던 에일린이 살살 제 배를 어루만졌다.
“첫 아이를 낳은 후에?”
사랑의 결실을 낳고 나서 오면 좋겠다.
“빨리 와야겠네.”
로이드가 에일린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의 턱을 살짝 들었다. 맞닿은 둘의 입술이 틈 없이 메워졌다. 평생 잊지 못할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 건,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