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둘만의 시간 (1)
“폐하께서 제게 선물을요?”
“훌륭한 수하의 마음을 잡아둔 이유로 줬다는데.”
어떻게 별장을 받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로이드의 표정이 딱히 밝지 않았다. 그는 선물이라고 던져주고는 한 달을 오도 가도 못 하게 잡아둔 황제를 향한 불만을 넌지시 내비쳤다. 차라리 에일린을 만나도록 보내주지, 그러나 한 달을 밤낮없이 일한 덕분에 다시금 며칠간의 여유를 얻었으니 더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로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에일린이 기대한 눈으로 열쇠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어떤 별장일지 궁금해요.”
에일린이 열쇠를 든 채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최대한 이른 시간에 출발했는데 벌써 해가 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려요?”
“여기서 이틀은 더 가야 한다고 하던데.”
로이드도 처음 가는 길이라 대략적인 시간으로 대답했다. 에일린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어떤 곳이고, 얼마나 걸리는지 미리 다녀올 생각도 못 했다. 로이드가 처음으로 애매하게 답하자 에일린이 소리 없이 웃었다.
“진짜 처음이네요.”
로이드가 바로 알아듣지 못해서 바라보고만 있자 에일린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위로 열쇠를 올린 후 로이드의 손까지 함께 감싸듯이 꼭 쥐었다.
“우리 하나씩 같이 만들어 가는 거요. 저 너무 기쁘고 설레요. 이 처음을 같이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좋고요.”
로이드는 기도하듯이 제 손을 감싸고 눈을 감은 에일린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를 다시 잡을 수 있게 된 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 그렇게 에일린을 보던 로이드가 홀린 듯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짧지 않은 시간 입을 댄 로이드가 천천히 입술을 뗄 때까지 에일린은 눈을 감고 있었다. 에일린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저도 당신이 좋아요.”
로이드가 제 이마에 입을 맞출 때 느낀 점을 그대로 돌려줬다.
***
호수를 발견하고부터는 다른 곳을 볼 수 없었다. 에일린은 계속 호수를 보고 또 바라보았다. 대공가에서 소유한 호수도 있지만 그것과 다른 매력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제 안에 담을 듯 넓고 맑은 호수를 보고 있으니 언제 마차가 떠났는지도 몰랐다.
그저 에일린은 호수에 비친 하늘이며 나무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에일린의 뒤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에일린이 놀라지 않게 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을 끌어안은 로이드가 좌우로 약한 반동을 주었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아늑함에 에일린이 머리를 뒤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넓고 따뜻한 로이드의 가슴에 기대고 있으니 저절로 몸이 나른하게 풀려왔다. 로이드는 에일린의 어깨에 턱을 대고 호수를 보았다.
“이렇게 안고 있어도 돼요?”
“모두 보냈어. 여기 우리 둘뿐이야.”
그래서 아무 신경 쓰지 않고 안았구나, 하면서 에일린이 몸에서 힘을 뺐다. 잠시 눈을 감고 여유로움을 즐기던 에일린은 그 표정 그대로 말했다.
“그럼 우리 식사는요?”
순간 에일린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 반응으로 로이드가 그 부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해 볼게.”
에일린이 재밌다는 듯 웃어댔다.
***
“한 번은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에일린이 집게로 허공을 집는 시늉을 했다. 로이드가 보낸 사람들을 다시 데려오려면 산 아래까지 내려가야 했다. 그래서 직접 요리를 해 주겠다는 로이드를 억지로 앉힌 후 에일린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제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만들어줄 수 있다니 벌써 기대가 돼요.”
아직 시작도 안 했지만 벌써부터 좋다는 듯 에일린의 말에 로이드가 황당한 미소를 흘렸다.
“무슨 요리를 할 건데?”
“일단 이것들을 잘 다듬어야죠. 지금껏 요리를 해 본 적은 없지만 옆에서 많이 봤어요. 그리고 조합하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어요.”
약 배합을 생각하면 요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에일린이 제 팔을 걷어붙였다. 로이드와 결혼하기 전, 가문에 돈이 많진 않아도 늘 식사를 담당하는 하녀가 있었다. 간간이 맛있는 요리를 해 주던 사라 부인도 있었고.
그렇기에 지금이 에일린에겐 첫 요리가 되는데도 무슨 자신감인지 목소리가 들떠있기까지 했다.
“옆에서 본 거랑 직접 하는 건 다를 텐데?”
그 모습에 로이드가 얕은 불안감을 느꼈지만 이내 아무 상관 없다는 듯 턱을 기댔다. 요리의결과가 중요하긴 하지만 어쨌든 먹는 사람은 에일린과 자신뿐이니까.
에일린은 어색하지만 본 대로 야채를 다듬고 과일도 씻어서 먹기 좋게 잘라 한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몇 가지를 조합해 만든 소스를 샐러드 위에 뿌렸다. 그렇게 하나를 완성한 에일린이 곧장 다른 요리에 신경을 썼다.
미리 끓여놓고 있던 스튜였다. 보통 수프를 먹던 에일린이 대공가에 와서 유독 많이 먹었던 게 스튜였다. 수프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편하게 넘어갈 수 있다는 장점에 자주 먹었다.
어렵지 않게 빵까지 구워온 에일린은 꽤 오랜 시간을 들였지만 보기 좋은 한 상을 만들어냈다.
“고기를 굽고 싶지만 그건 진짜 눈대중으로 할 수 없는 거라서요.”
어딘가 부족해 보이자 에일린이 말을 덧붙였다.
“이걸로도 충분해.”
말로도 부족한지 로이드가 에일린의 손을 잡아끌어 제 옆에 앉혔다. 나란히 앉으면서 로이드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으니 에일린이 살짝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보고 싶었다.
로이드는 가장 먼저 스튜를 바라보았다. 먹음직해 보이지는 않았다. 형태가 뭉개져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파악이 어려웠다. 그러나 에일린이 자신한 대로 조합은 괜찮아 향이 나쁘지 않았다.
수저를 들어 가볍게 떠서 한 입을 머금은 로이드는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에일린을 돌아보았다. 어떠냐고 눈으로 묻고 있는 그녀에게 로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
“정말요?”
에일린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자기도 수저를 들어 스튜를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뜨거워서 조금 놀라긴 했지만 금방 입을 다물고 맛을 본 에일린이 놀란 듯 눈이 크게 떠졌다.
“진짜 맛있네요.”
스스로도 놀라서 에일린이 이후로도 스튜를 떠먹어 보았다. 그러더니 신난 목소리로 로이드의 팔을 잡고 기뻐했다.
“앞으로 요리를 취미로 해도 좋겠어요”
자신감이 크게 오른 에일린이 과감하게 샐러드를 향해 포크를 움직였다. 그리고 괴상하게 잘린 양상추를 찍어 먹었다.
“읏.”
양상추에 묻은 소스가 톡 쏘자 에일린이 황급히 제 코와 입을 가렸다. 당황한 눈동자가 어디를 향하는지 모르고 흔들리다가 곧 로이드에게 향했다.
“먹지 마요.”
아직 입에 음식이 있는 상태라 발음이 뭉개지지만 알아듣기 어렵지 않았다. 에일린은 아예 로이드의 입을 막을 듯이 손을 내밀었다. 샐러드가 정말 별로라는 걸 강조하고 있으니 로이드가 그걸 보다가 호기심에 재빨리 사과를 입에 넣었다.
“…….”
넣자마자 굳어지는 얼굴에 에일린이 울상을 지었다.
“그래서 먹지 말라고 한 건데.”
과일과 야채는 아무 잘못이 없었다. 소스를 잘못 만든 에일린의 탓이지.
로이드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사과를 씹었다. 그리고 누가 봐도 억지로 밀어 넣듯이 삼키는 걸 본 에일린이 슬그머니 들었던 냅킨을 도로 내려놓으며 변명을 했다.
“나름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네요.”
“중화작용이 되지 않아서겠지.”
로이드가 침착한 눈으로 샐러드를 바라보면서 실패의 원인을 집어줬다.
“약품이라면 서로 중화작용이 있었을 텐데 소스는 그냥 자신의 맛이 나온 거야.”
“그러게요.”
에일린이 어떻게든 샐러드를 살려볼 수 없을까 조금 뒤적이다가 포크를 내려놨다. 아무래도 이건 안 될 거 같았다. 그래서 빵을 로이드의 앞에 살포시 밀어주었다.
“이건 어때요?”
샐러드라는 실수를 덮고 싶은 에일린이 어서 빵을 먹어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따뜻할 때 먹어요.”
로이드가 순순히 빵을 집어 작게 잘라 입에 넣었다. 그리고 몇 번 씹는가 싶더니 점점 움직임이 느려졌다. 에일린이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많이 이상해요?”
“나쁘지 않아.”
로이드가 다시 빵을 먹자 에일린도 같이 먹어봤다. 에일린 역시 처음엔 로이드처럼 몇 번 부지런히 씹어보다가 점점 그 속도가 느려졌다.
“정말 나쁘지만 않네요.”
아무런 맛도 없었다. 고소하면서도 짭조름한 맛이 느껴지면 좋겠는데 뭔가 느껴지는 맛이 없었다. 에일린이 나중엔 빵을 억지로 삼키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맛이 없네요.”
스튜 하나가 성공했다고 다 그런 줄 알았기에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그러자 로이드가 에일린의 볼을 엄지로 살살 쓰다듬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맛있었어.”
“하나만요.”
“다 맛있었는데. 당신이 만든 건데 맛없을 리가.”
“그렇게 위로해줘도…….”
에일린은 순간 제 입 안을 파고드는 그의 입맞춤에 말문이 막혔다. 눈도 감지 못한 채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웃음으로 가늘어지는 걸 보자 에일린의 굳어있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서로를 탐하는 부드럽고도 자극적인 입맞춤이 끝나자 로이드가 마저 말을 했다.
“맛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