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다신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로이드 리하스트 대공입니다.”
“들이게.”
황제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커다란 문이 열렸다. 로이드가 성큼 안으로 들어섰고 단숨에 황제의 앞에 도달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푹 쉬다 온 것치곤 표정이 안 좋군. 잘 못 쉬었나?”
오랜만에 만난 로이드를 향한 황제의 인사였다. 쉬겠다고 나가서 황궁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수하를 향한 은근한 질책까지 담겨 있었다. 보통의 귀족이라면 당황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로이드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황궁에서 왔다는 기사가 매일 문을 두드려서 말입니다.”
그것도 잘 못 지낸 원인이 황제라는 걸 간접적으로 드러내면서까지.
“잘 지내고 있나 보고 오라 한 건데 굳이 인사까지 건네고 왔나 보군.”
황제는 자신이 시켰지만 어디까지나 지켜보라는 지시를 내렸다며 기사에게 책임을 밀어버렸다. 물론 로이드가 믿지 않을 소리였지만.
“그래, 쉬는 동안 일은 잘 처리되었나?”
알고 물어보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인사에 불과한 말인지 몰랐다. 그러나 로이드는 그 물음을 쉽게 흘려넘기지 않았다.
자신이 보낸 시간을 돌아보는지 그는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심각했다가 진지해지고 또 차가워졌다가 평온해지는 듯 다채로웠다. 에일린과 마지막일 수 있는 시간을 누렸고 이별했으며 다시 만났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잘되었습니다.”
다행이군.”
황제가 묘한 미소를 흘렸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시종장을 불렀다. 시종장이 들고 있던 상자를 로이드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지금껏 놀다 온 신하를 보자마자 선물이라니 나도 참 마음이 넓지 않은가?”
황제가 열어 보라는 듯 손을 흔들자 로이드가 상자를 받아들였다. 남색 빛깔이 도는 상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열어 보지 않고는 알 수 없었다.
결국 로이드는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고급스러운 재질의 푹신한 천 위에 놓인 하나의 열쇠를 발견한 로이드가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게 무엇이냐는 듯한 시선에 황제가 말했다.
“호수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누구를 뜻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은 로이드가 열쇠를 집었다.
“내 훌륭한 신하의 마음을 든든히 잡아둘 사람이니 이런 선물 하나쯤은 해 줘야지. 호수를 품고 있는 별장이네. 그것을 하사하지.”
황제는 에일린이 로이드의 곁으로 돌아온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방황하던 로이드와 다시 만나 진정한 부부가 된 것을 축하하고 있었다.
“이것보단 아내와 함께 할 시간을 주시는 게 더 감사할 것 같습니다만.”
감사하다는 말은커녕 보내달라는 투정 비슷한 소리가 돌아오자 황제가 기막힌 웃음을 흘렸다.
“지금껏 놀다 와 놓고 그게 할 소린가?”
“제가 이제 막 아내와 함께 있다 온 것도 아실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뻔뻔하기는.”
“그럼 허락으로 알고 다음에 뵙겠습니다.”
로이드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황제가 준 선물은 기쁜 마음으로 챙겼다. 가서 이 열쇠를 보여 주면서 같이 별장에 가자고 말하고 싶어 걸음이 빨라졌다.
“거기 서게.”
그러나 황제는 막 나가려는 로이드를 붙잡았다. 딱 한 걸음을 두고 나가지 못한 로이드가 불안한 감정을 애써 누르며 돌아섰다.
“왜 그러십니까.”
“황궁에 왔으니 일해야지.”
황제의 단호한 말과 동시에 로이드의 앞에서 문이 탁 닫혔다.
***
“새언니,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털어놓지 그래요?”
졸업식만을 앞두고 돌아온 클로에가 에일린이 어디도 가지 못하게 막은 채로 추궁했다. 그녀는 자신이 없는 동안 있었던 일을 두고 자신이 모르는 비밀이 있다는 걸 알았다.
클로에의 날카로운 눈빛에 에일린이 차를 마시는 척 피해 보려고 하지만 소용없었다. 황궁에 간 로이드는 한 달이 넘도록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데 클로에가 와서 빨리 솔직하게 말하라며 자신을 탈탈 흔들고 있었다.
“친정에 갔던 거 쉬러 간 게 아니었죠?”
에일린이 클라우디아가로 간 이유를 몇 명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클로에는 알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에일린은 난감한 미소로 대충 넘기려고 했지만 클로에가 가만 놔둘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래서 반쯤 포기하고 물으니 클로에가 코웃음 치며 의심스러웠던 정황을 하나씩 꼬집었다.
“의심스러운 게 한두 개여야 말이죠. 내 이름으로 모임을 만들 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모임에 안 나가는 것도 언젠가 헤어질 걸 알기에 그런 거였죠?”
클로에가 결정적으로 이상하다고 여겼던 게 이것인가 보다. 셀 수 없이 들어오는 초대장을 보다가 생각한 거고 클로에가 적임자라 생각했는데 정작 그녀에게 이렇게 덜미를 잡히게 되었다.
에일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 더 감춰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처음부터 약속을 했었어요. 정략결혼을 하기에 서로의 조건이 좋진 않았거든요.”
“언니가 베타라서요?”
“로이드는 오히려 제가 베타라서 좋다고 했지만 개인적으로 제가 걸리는 게 많았어요.”
오빠를 죽인 원흉이라 생각했고 오빠와 가문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클로에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짐 쌀 때 다신 못 볼 것처럼 굴었어요. 그땐 아카데미로 가면 못 보니까 많이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네요. 진짜 헤어질 생각을 하고 있었어.”
하마터면 이렇게 마주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 클로에의 표정이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새언니는 내 생각 하나도 안 했죠?”
“그렇지 않아요.”
클로에가 시무룩한 분위기로 고개를 돌리자 다급해진 건 에일린이었다. 그녀는 정말 그런 게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다시 못 볼 거라고 생각한 건 맞아요. 그래서 더 클로에 아가씨가 애틋했어요.”
“정말로요?”
“그럼요. 저는 클로에 아가씨가 정말 좋아요.”
동갑이었고 취미가 잘 맞았다. 특히나 자신을 잘 챙겨 준 덕분에 클로에에게 기댈 때도 있었다. 에일린의 진심이 담긴 말에 클로에의 표정이 점점 눈에 띄게 나아졌다.
“그럼 지금은요?”
지난 일보다 앞으로가 궁금했다. 다시 만난 새언니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밝아서 답이 예상되지만 확실히 듣고 싶었다.
클로에의 물음에 에일린은 잠시 제 잔을 매만졌다.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때 평생 함께하자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로이드가 어떤 말을 하든 이제 에일린은 다신 섣부른 약속을 할 마음이 없었다.
“로이드가 좋아요.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로이드와 평생 살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요.”
적어도 좋아하는데 헤어질 일은 없겠단 생각으로 클로에가 무심히 넘겼다. 클로에의 태연한 반응에 에일린이 웃으며 막 잔을 내려놓았다.
그때 제인이 들어오며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오랜만에 돌아온 그를 맞이하러 에일린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클로에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에일린이 일어날 때부터 바라보고 있던 클로에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흘렸다.
“평생 헤어지지 않겠네.”
뭐, 지금이라도 잘 됐으니 좋은 게 좋은 거겠지. 클로에가 여유롭게 찻잔을 기울였다. 어차피 자기가 마중을 나간다고 해봐야 오빠가 쳐다볼 리가 없으니 나갈 생각은 없었다.
“다녀왔어요?”
에일린이 내려가자 세워진 마차에서 막 로이드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아진 에일린이 환한 미소로 맞았다.
반갑기는 로이드도 마찬가지인지라 그는 에일린의 날 듯이 안겨 오는 몸을 끌어안으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황궁에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있는 에일린을 두고 몇 번이나 나와서 얼굴만 보고 갈까 싶은 충동을 느꼈는지 몰랐다.
“황궁에는 언제 다시 들어가요?”
에일린이 로이드의 품에서 바르작거리더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급한 일이 끝났다면 하루 이틀 정도는 쉬었다가 다시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가지고.
“황궁은 아니지만 곧바로 나가봐야 해.”
“무슨 일이 있어요?”
“따로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곧바로 나간다고 하니 에일린이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왔는데 다시 나가봐야 한다니 자꾸만 그의 옷자락을 미련스레 쥐게 되었다.
“다녀와요.”
그래도 로이드를 방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에일린이 한 걸음 물러나려 할 때였다. 등을 감싼 로이드의 손이 에일린이 벗어나지 못하게 힘을 주고 막았다. 에일린이 왜 그러냐는 듯 그를 바라보자 로이드가 아까와 다르게 진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같이 가자.”
“……정말요?”
“그래.”
로이드가 열쇠를 꺼내 에일린의 손에 쥐여주었다.
“폐하께서 주신 별장을 보러 가야 해.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거든.”
로이드가 에일린의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며 함께 갈 것을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