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대공가로 돌아가는 길
“대공 전하께서 오십니다.”
미리 나가 있던 시종의 보고에 집사가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대공 전하를 모시는 자들을 불러 모으게.”
“알겠습니다.”
“잠깐.”
집사가 뒤돌아선 시종을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마마를 모시는 자들 역시 모으도록 해.”
“알겠습니다.”
시종은 잠깐 의아한 눈빛을 띠었지만 금방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집사의 말을 지시하러 사라졌다. 분분히 흩어져 있는 자들을 모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시종이 사라지는 걸 본 집사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마차는 들어오지 않았지만, 꼭 두 사람이 함께 오길.
집사 역시 마중 나가기 위해 저택 밖으로 나섰다.
점점 가까워지는 대공가의 건물을 보면서 에일린은 뒤늦은 걱정을 했다. 에일린의 눈빛이 고민에 가라앉자 그녀의 어깨로 손이 다가왔다.
“에일린.”
로이드의 다정한 부름에 에일린이 깜짝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해?”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가 자신을 보는 줄 몰랐다. 에일린은 솔직하게 말할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제 어깨를 덮어오는 온기에 용기를 냈다.
“혹시 우리의 비밀을 다 알고 있나요? 아니면, 제가 대공가를 떠난 이유를 아는 사람이 있나요?”
“직접 말해온 자는 없지만 눈치챈 이는 있겠지. 제라미 경이라던가 러츠 경 말이야.”
말하는 로이드의 눈동자에 위험한 빛이 스쳐 갔다. 에일린과 다시 만나게 해준 건 고맙지만 자신을 가지고 놀다니. 그대로 갚아줄 생각이었다. 고마운 마음을 듬뿍 담아.
“그럼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모를 거야. 일단 당신과의 일은 대외적으로 말한 게 없거든. 클라우디아가에 가서 며칠 쉬고 온다고 했으니 그렇게만 알아도 돼.”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과연 그 말을 그대로 믿을까, 싶지만 에일린은 더 물어보지 않았다. 어쨌든 그와 완전히 이혼하고 나서 다시 이어진 게 아니니까.
“에일린.”
아직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는 로이드는 아예 에일린을 자신을 향해 돌아 세웠다.
“다른 사람 말고 내 생각부터 하는 게 어때?”
“당신을요?”
“그래.”
로이드가 뻔뻔하게 요구했다. 그러자 외려 당황한 건 에일린이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 불만이 있거든.”
로이드는 에일린의 몸을 끌어안아 제 위로 앉혔다. 아까 마차가 출발할 때 키스를 나누던 그 자세였다.
로이드는 자신보다 올라간 에일린의 눈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이제 곧 황궁으로 들어가야 해. 이제껏 버틴 시간만큼 일이 쌓여있겠지. 당신과 이렇게 눈을 마주치는 시간이 별로 없을 거란 말이야.”
“아직 안 들어갔, 그건 참 안타깝네요.”
아직 안 들어갔냐고 말하려던 에일린이 로이드의 표정을 보고 말을 바꿨다. 자신이 클라우디아 가문으로 들어간 후 로이드도 황궁에 들어갔을 줄 알았다. 왜 그러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안타깝다고 말을 돌리니 로이드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당신과 다시 만났는데 다시 일에 파묻히게 되는 거잖아.”
“안타까운 일이네요.”
“에일린 그 말은 한 거 같은데.”
같은 말을 두 번씩이나 한 것으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 게 들통났다. 에일린은 그런가요? 대답하다가 웃음을 흘렸다.
“저는 당신이 바빠도 좋아요. 보고 싶겠지만 그래도 제게 돌아올 거잖아요.”
에일린이 로이드의 목을 살짝 끌어안으며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빨아들였다.
“그것만으로도 좋아요. 제가 당신을 기다릴게요.”
에일린이 입술을 맞대고 속삭이자 로이드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고개를 기울인 로이드가 에일린과 깊은 입맞춤을 나누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신을 데리고 다니고 싶어.”
“집 잘 지키고 있을게요.”
정말로 그렇게 할까 봐 에일린이 웃으며 받아쳤다.
“나와 함께 다니기 싫은 거야?”
로이드가 반쯤은 장난스럽게 묻는 말에 에일린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전에 시간을 비운 것도 자신과 있으려고 모든 일을 미뤄둔 것일 텐데 더 부담 주고 싶지 않았다.
“로이드 당신도 좋지만 리하스트 대공 전하도 존경스러우니까요.”
에일린은 로이드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그가 이름을 걸고 하는 모든 것이 잘되기 위해서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흔쾌히 양보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물러설 수밖에 없잖아.”
“하지만 이게 맞는걸요.”
에일린이 로이드에게 몸을 기대며 속삭였다.
“저는 이제 어디 안 가요. 당신을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다녀오세요.”
에일린이 로이드를 달래려는 듯 그의 볼을 살포시 어루만졌다. 로이드가 눈을 감으며 제 얼굴에 닿은 에일린의 손길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가져와 입을 맞췄다.
“내가 없는 동안…….”
그의 손이 에일린의 손목 위를 가볍게 스쳐 지나가자 에일린이 묵직한 무언가를 느꼈다.
“내 생각하고 있어.”
손목을 감싼 팔찌의 존재를 확인한 에일린이 로이드를 보았다.
“이 팔찌 어떻게 찾았어요?”
“서랍에 있더군.”
에일린이 팔찌를 매만졌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팔찌는 가장 놓고 오기 힘들었던 물건이었다. 모른 척 이거 하나만 챙길까? 싶은 고민에 몇 번이나 들었지만 결국 서랍에 넣어뒀었다.
완전히 로이드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그 작은 무엇도 남겨두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외면했다. 그러면서도 가끔 생각날 때가 있었다. 그날 로이드와 함께 야시장을 갔던 추억이 이름과 함께 남아 있어서 가져올 걸 후회하기도 했었다.
“이제 놓고 다니지 마.”
“평생… 평생 차고 다닐래요.”
로이드의 모든 것을 당당하게 가져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것만 같았다. 에일린이 그 팔찌를 위로 들어 올리곤 말했다. 중간에 감정이 울컥해서 입술을 깨물었지만 결국 눈물이 차오르고 말았다.
“지금 울면 곤란해.”
로이드가 에일린의 눈가를 훔치며 난감한 듯 중얼거렸다. 에일린이 몇 번 눈을 깜박여 눈물을 털어내자 로이드는 턱 끝으로 밖을 가리켰다.
“다 왔거든.”
에일린이 얼굴에 남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마차가 서서 두 사람이 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에일린이 그에게서 내려오자 마차의 문이 열렸다. 바깥의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땅을 보던 에일린이 홀린 듯 다가섰다. 그리고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자 그녀를 향한 고용인들의 놀란 눈빛을 받았다.
에일린이 그들을 보고 서자 뒤로 로이드가 따라 내렸다. 로이드의 시중을 드는 이들이 빠르게 움직이는 동안 에일린의 시중을 드는 하녀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거봐, 오실 거라고 했잖아.
제인의 눈빛에 하녀가 고개를 돌렸다. 대공비가 다시 오지 않을 거란 소문을 떠들었다가 민망한 꼴이 되었다.
“오셨습니까.”
제인이 대표로 나와 허리를 숙였다. 그녀를 시작으로 대공비를 모시는 고용인이 예를 갖췄다.
에일린은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을 마주하자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평생 그리워만 할 사람들과의 인연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하니 에일린의 눈에 뜨끈한 열기가 모여들었다.
“다시 보니까 정말 좋네.”
에일린의 대답에 제인이 웃으며 그녀의 뒤로 갔다.
“모시겠습니다.”
다른 고용인들 역시 에일린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에일린은 자신을 감싸듯 둘러싼 그들의 존재감을 느끼면서 로이드를 힐끗 돌아보았다.
마찬가지로 고용인에게 둘러싸인 로이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서 있었다. 에일린의 시선을 느낀 로이드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갈까?”
에일린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가를 나갔던 대공비가 돌아오면서 저택에 다시 활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
로이드가 황궁으로 떠난 사이 에일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러츠 경을 부르는 것이었다.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두 사람 사이에선 별다른 말이 오가지 않았다.
에일린이 왜 불렀는지 궁금하지도 않는지 러츠 경은 제 앞에 있는 차를 마시며 조용히 있었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흘렀을 때 에일린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대뜸 건네는 말이 고맙다는 인사였다. 그러나 러츠 경은 놀라지도 않은 듯 무심히 받아들였다.
“아닙니다.”
“저는 약속된 시간이 끝나면 더 머물지 말아야 한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래서 대공님의 곁을 떠났고 힘든 시간을 보냈죠.”
에일린은 러츠 경이 다 알 거란 생각으로 제 감정을 솔직하게 내보였다.
“솔직히 이 감정이 언제 접힐까 싶었어요.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그를 떠올려도 아무렇지 않을까 했는데……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요. 모두 러츠 경의 덕분이에요.”
러츠 경은 에일린의 말을 곱씹는 듯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마마만을 위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모두를 위해서였습니다.”
모두라는 게 누구까지 지칭하는지 알 수 없어 에일린이 바라보고만 있자 러츠 경이 말했다.
“마마를 사랑하시는 대공 전하도 있지만 두 분의 아픈 모습을 지켜보기 힘든 이들이 많아서 움직였을 뿐입니다.”
“그건…… 에단 오빠도 포함인가요?”
“에단을 걱정하는 이로얀의 마음까지 포함입니다.”
러츠 경이 이만 나가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를 갖추고 나간 그의 뒷모습을 보던 에일린이 다시 잔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