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숨길 수 없는 마음
에일린의 인사에 로이드가 다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에일린을 향한 미련을 끊으려 단호하게 돌아섰다. 이제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된다. 어려울 게 없다는 생각과는 다르게 로이드는 발을 떼지 못했다.
그의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망설임이 이번이 마지막 기회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다신 이런 날이 오지 않을 거라는 내면의 속삭임이 로이드의 심장을 죄고 있었다.
에일린은 돌아선 로이드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던 그가 가만히 있으니 에일린은 그의 모습을 보고 싶을 만큼 봤다.
그를 만나지 않아야 이 마음이 정리될 걸 알면서도 막상 그를 보고 있으니 계속 제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넓은 어깨, 곧은 등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뒤돌아선 그의 가슴에서부터 천천히 시선을 밟고 올라갔다. 왜 가지 않고 돌아섰는지 몰랐지만 그의 얼굴을 더 볼 수 있어서 기뻤다.
“에일린.”
다신 들을 수 없을 거라 여겼던 그의 목소리가 에일린의 심장을 흔들었다. 에일린이 부들 떨리는 입술을 깨물며 로이드와 눈을 마주쳤다.
“만약 당신이 조금이라도 위험하다면 어김없이 찾아올 거야.”
로이드는 다음에도 언제든 앞에 나타날 것을 말했다. 그를 향한 마음을 접어야 하는 에일린에게 절대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제 의지를 단단히 굳히겠다는 듯 굴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 때까지 내가 지켜줄 거야.”
뒤늦게 에일린이 로이드를 말려야 한다고 여겼지만 그의 말이 더 빨랐다.
“그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방식이야.”
에일린이 쿵 떨어진 것만 같은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가 한 말이 에일린을 뒤흔들었다. 제대로 생각을 이어가지 못하던 에일린이 뒤늦게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로이…….”
그를 부르는 제 목소리가 떨려오자 에일린이 입을 다물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떨림이 진정될 때 에일린이 다시 말했다.
“지금 당신이… 그러니까 당신이 나를…….”
“사랑해.”
로이드가 다른 생각할 수 없게 깔끔한 말로 제 마음을 고백했다.
“당신을 사랑해.”
한 번 터지자 봇물 터지듯 그가 제 감정을 내보였다. 애초에 제 마음을 말하지 않고 보냈던 게 그렇게 후회될 수 없었다.
“우리가 약속한 시간이 끝나가는 걸 알면서도 모른척했어. 당신을 보내기 싫었거든.”
에일린과 헤어지던 날을 떠올리는지 로이드는 아련한 미소와 함께 제 손을 내밀었다. 마치 그날의 에일린을 잡으려는 것처럼 그의 손이 허공을 붙잡았다.
그의 떨리는 손끝을 본 에일린은 잡아주고 싶은 마음과 달리 자신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그만큼이나 떨리는 제 마음을 드러낼까 봐.
에일린이 제 손을 쥐는 걸 본 로이드가 빈손을 내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내 마음이 부담스럽다면 언제든 말해. 이기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을 거야.”
에일린이 신경 쓰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녀의 앞에 나타나고 그녀를 직접 보고 싶지만 그게 에일린을 힘들게 한다면 하지 않는 게 맞았다. 그녀를 사랑하는 이 마음을 짐처럼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제 마음은 자신이 혼자 추스르면 된다는 듯 로이드가 씁쓸한 미소와 함께 돌아섰다. 이제 정말 에일린의 앞에서 머물 이유가 없었다.
‘안 돼.’
에일린은 돌아서는 로이드를 보며 안타까운 듯 손을 뻗었다. 저 사람이 손을 내밀 때 잡아줄걸. 자신의 마음이 들킬까 봐 겁을 먹었다. 뒤늦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에게 닿지 않았다.
‘놓치고 싶지 않아.’
에일린은 이대로 그를 보낼 수 없기에 그에게 달려갔다. 멀게만 느껴졌던 그의 등이 점점 가까워지자 에일린은 무작정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닿지 않을 것만 같던 그의 등이 손끝에 걸리자 사정없이 그것을 휘어잡았다.
로이드가 제 옷을 잡아당기는 에일린의 힘에 걸음을 멈췄다. 그는 바로 돌아보지 못한 채 제게 닿은 온기를 느꼈다.
“저도…….”
에일린은 로이드와 눈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로이드의 등에 이마를 기댄 에일린이 침을 삼켰다. 에일린은 시선을 땅을 둔 채 긴장된 호흡을 삼키고 또 삼켰다.
진하게 풍겨왔던 장미꽃 향기 대신 그의 페로몬이 제 모든 신경을 앗아갔다. 에일린은 그리웠던 그 향기를 맡았다. 땅이 일렁거려서 눈을 감으니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당신을 사랑해요.”
언젠가 흘러가듯이 당신을 사랑했노라, 말할 수 있는 날을 상상해본 적이 있었다. 그런 말을 해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난다면 한 번쯤 말해도 좋지 않을까.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를 향한 그리움이 쌓여서 절절한 마음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에일린은 무작정 그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제가 잘못했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그런 약속을 하는 게 아닌데. 아니, 당신과 결혼하는 게 아니었는데.”
에일린은 오빠를 살리겠다고 그의 손을 잡았던 제 선택을 후회했다. 그것밖에 없다고 여기면서도 이렇게 마음이 아플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떠올려보려 했을 텐데.
에일린은 흐느낌을 억누르려 억지로 목을 내리눌렀다. 다음 말을 해야 하는데 울음이 묻어나올까 봐 잘 되지 않았다.
에일린이 어떻게든 감정을 누르려고 할 때 로이드가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에일린. 나를 봐.”
로이드의 손이 조심스럽게 에일린의 얼굴을 감쌌다. 부담스럽지 않게 그러면서도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에일린의 얼굴을 살살 들었다.
“내가 아까 말한 거 잊었어?”
로이드가 에일린의 눈에 맺힌 눈물을 엄지로 쓸어냈다. 그러자 눈물로 흐렸던 앞이 선명하게 보인 에일린이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했잖아.”
로이드는 난처한 눈빛과는 별개로 순수하게 기뻐하고 있었다. 그의 환한 웃음에 눈이 시린 듯 에일린이 눈을 감았다.
로이드가 에일린의 입술에 살포시 제 입술을 대며 속삭였다.
“미안한 게 아니야.”
로이드가 그녀의 입술에 몇 번이나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내게 와줘서 고마워. 나와 결혼해줘서 고마워. 날 선택해줘서 고마워.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로이드.”
에일린은 제 입술에 깃털처럼 떨어지는 그의 입맞춤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로이드는 에일린의 몸을 끌어안았다. 다신 놓치지 않겠다는 듯 깊게 옭아맨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다시 계약하자. 이번엔 평생 옆에 있는 거야.”
에일린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래서 서류를 안 보냈던 거지?”
“애초에 작성한 적도 없었어.”
에일린이 대공가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동안 에단이 러츠 경에게 투덜거렸다. 에일린이 공식 이혼서류를 받았을 때가 되면 부모님에게 상황을 말할 걸 알고 에단은 모른 척 있었다.
그런데 오라는 서류는 안 오고 대공이 와서는 동생을 데려간단다. 에단이 단단히 심술이 난 듯 굴자 러츠 경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도 잘됐잖아.”
러츠 경의 말대로였다. 원치 않은 이별을 겪은 두 사람은 언제 마음고생을 했냐는 듯 이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걸 옆에서 지켜본 에단이 모를 리 없었다.
에일린이 자꾸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게 싫었던 에단은 이제 그녀를 보내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어떤 상황이 오든 제 동생은 대공의 옆에 있을 때 더 행복할 것이다.
“꼭 지켜봐. 또 한 번만 더 내 동생을 위험하게 하면…….”
에단이 이전과 비슷한 협박을 러츠 경에게 던졌다.
“내가 대공가로 들어가서 직접 지켜 줄 거야.”
“든든한 오빠네.”
러츠 경이 에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가 거세게 차였다.
에일린이 감회가 남다른 눈으로 마차를 보았다. 처음 대공가를 타고 갔을 때의 그 마차였다. 그것을 보다가 살살 표면을 어루만지고 있으니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페로몬이 나가지 못하게 판을 덧댄 마차. 작년엔 베타일 때 타서 무용지물이었는데 지금은 나름 쓸모가 있어졌다.
“이 마차를 가져올 줄 몰랐네요.”
“당신을 데려갈 때가 생각나서 말이야.”
“제 페로몬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게 하려고요?”
에일린이 반쯤 장난스럽게 말하며 마차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로이드가 바짝 따라 올라왔다.
에일린이 뒤따라온 그를 의아한 듯 올려다보았다. 그는 말을 타고 가는 게 아닌가?
로이드가 에일린의 의아한 시선에 느물스럽게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당신의 페로몬만 감추려는 건 아니야.”
로이드는 애정을 담은 눈으로 에일린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페로몬을 감추기 위해서지.”
로이드가 에일린의 손을 잡아 제게 끌어당기는 동시에 마차의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