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115)화 (115/120)

115화. 꽃을 닮은 남자

“부인께 일이 생긴 듯합니다.”

러츠 경의 보고에 로이드는 방금까지 보던 서류를 내려놨다. 행정관에게 후에 다시 들어올 것을 지시하고 내보낸 로이드가 러츠 경을 돌아보았다.

“자세히 말해 봐.”

“제라미 경의 서신입니다.”

러츠 경이 작게 접힌 종이를 내밀었다. 로이드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지 모르기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로이드가 러츠 경에게서 종이를 가져가 펼쳤다.

에일린이 저택을 나온 시간과 간단한 내용이 시간순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 한 시경 저택에서 나와 곧바로 후원으로 들어감. 머문 시간은 30분. 꽃향기가 진해짐.

- 밖으로 나오다 문에 기대 숨을 고름. 꽃향기가 이전보다 짙어짐.

-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음.

- 후원으로 들어간 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음.

마지막 것은 잉크가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종이를 접은 듯 잉크가 번져 있었다. 

“이게 언제지?”

“오늘입니다.”

로이드가 종이에 적힌 내용을 다시 읽어내려갔다. 아무래도 에일린에게 사이클이 다가올 조짐이 보였다. 종이를 든 채 생각에 빠진 로이드가 그것을 구기듯 쥐었다. 

“클라우디아 백작가에 비축해둔 사이클 안정제는?”

“2개 있었습니다만 둘 모두 에단 공자가 사용했다고 합니다.”

“가문에 몇 개가 남아 있나?”

“3개입니다.”

“모두 백작가로 보내. 더불어 호위 기사를 늘려 클라우디아 백작가의 주변을 철저히 지켜.”

혹시나 에일린의 페로몬에 지나가는 알파가 사고를 일으키지 않도록 로이드는 꼼꼼하게 지시를 내렸다. 

“베타로만 구성된 기사를 보내도록 하고 제라미 경은 잠시 거리를 두라고 해.”

“준비하겠습니다.”

러츠 경이 깍듯하게 예를 취하고 돌아설 때였다. 

“잠깐.”

로이드가 러츠 경을 다시 불렀다. 그에 러츠 경이 태연히 돌아서며 무슨 일이십니까, 대답했다. 그의 몸에서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페로몬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우성 알파이기에 러츠 경의 페로몬을 예민하게 알아챈 로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러츠 경마저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직접 다녀오지.”

***

저택의 문에 기댄 에일린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요즘 들어 점점 진해지는 장미 향이 봄이 무르익었다는 걸 느끼게 해 주었다.

아침에도 장미꽃을 보고 왔는데도 후원을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망설임 없었다. 후원에 앉아서 장미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몰라 자꾸 찾아가게 되었다.

대공가의 장미 정원은 한눈에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크고 화려했다면 백작가의 장미 정원은 정원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담했다.

그래도 관리가 잘 된 장미꽃은 대공가만큼이나 진한 향을 내뿜었다. 에일린은 익숙하게 의자에 앉아 화단을 바라보다가 문득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지 살펴봤다. 요즘 에일린이 후원에 자주 나오는 걸 알아서인지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에일린이 꼼꼼하게 주변을 다시 돌아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치맛자락을 잡고 조심스럽게 화단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나 장미꽃을 밟을까 한 걸음 한 걸음 신중을 기하면서. 

안쪽까지 다다른 에일린은 제 눈에 유독 또렷하게 들어온 장미 앞에 웅크리고 앉았다.

“예쁘네.”

에일린이 꽃잎에 닿을 듯 말 듯 살살 어루만졌다. 붉은 장미 사이로 언뜻 비치던 분홍빛의 꽃잎이라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전부 같은 장미꽃인데 말이지.”

에일린이 다리에 팔을 올리고 장미꽃을 자세히 관찰했다.

“꼭 로이드 같네.”

아무리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눈에 띄는 로이드와 닮았다. 로이드와 꽃이라니.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의 섬세한 눈매가 꽃잎을 닮았고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웃을 땐 꽃이 활짝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가끔 뾰족하게 올라오는 성질마저 가시를 닮았다고 생각하니 에일린이 소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나도 참.”

이 순간에 로이드를 떠올리고 있다는 게 웃겼다. 에일린이 이번엔 고개를 기울여 꽃을 감상했다. 정확하게는 그 꽃을 통해 떠오르는 로이드를 생각하는 거지만.

‘보고 싶다.’

헤어지고 나서 혹시나 그와 부딪힐까 집 밖으로는 조금도 나서지 않았다. 같이 황비 마마를 만나러 가자는 엄마의 제안도 거절할 만큼 에일린은 몸을 사렸다. 

우연히라도 만나면 다음을 또 기대하게 될까 봐. 

‘그와 마주하고도 아무렇지 않을 때가 온다면…… 그때 나가면 되겠지.’

그런 날이 얼마나 될지 몰랐다. 그래도 그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왠지 옛날 생각나네.” 

에단 오빠와 함께 집에 있던 그때와 비슷하고도 달랐다. 

“그럼 이번엔 무슨 연구를 해 볼…….”

장미꽃을 바라보던 에일린이 앞에 드리운 신발을 발견했다. 그 발에 밟힌 꽃이 안타까워 에일린이 손을 움찔했다. 대체 누가 이리 꽃을 밟고도 움직이지 않는지 싶어 에일린이 고개를 들었다.

다리를 지나 허리, 가슴 부근에서 에일린의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향기. 늘 자신을 든든하게 감싸주었던 그 페로몬에 에일린이 차마 상대의 얼굴을 확인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일부러 그와 부딪히지 않으려 집에만 있었다. 아주 우연히라도 마주쳤을 때 제 마음이 흔들릴까 봐 더욱 몸을 사렸기에 이런 상황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에일린,”

에일린이 다시 고개를 숙이자 로이드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에일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무 일 없는 거지?”

그는 에일린의 얼굴빛을 보다가 그녀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말도 없이 나타나서 걱정하는 눈빛에 에일린이 상체를 뒤로 물렸다. 

에일린의 어깨가 빠져나가자 로이드는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그녀를 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얼굴을 매만지며 괜찮은지 아무 일도 없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에일린과 이별을 한 지금 어깨를 잡은 것만으로도 실례가 될 수 있었다.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잘 지내고 있었어요.”

방금까지 그를 떠올리고 있던 걸 속으로 누른 채 에일린이 말했다. 정말로 그가 그리운 것 말고는 일상은 평온하게 흘러갔다. 에일린의 얼굴을 살핀 로이드는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닌 걸 알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로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물러나자 에일린이 밟힌 꽃의 잔해를 보았다. 성한 꽃잎 하나 없이 짓이겨져 본래의 형체를 찾을 수 없었다. 설마, 자신 때문에 이렇게 급하게 들어온 것일까.

에일린도 일어나 아직 그 자리에 있는 로이드를 따라 화단을 나왔다. 

“꽃은 다시 심어줄게.”

로이드가 먼저 자신이 밟은 꽃을 언급했다. 그의 말대로 더욱 싱싱하고 아름다운 장미가 심어질 것이다. 하지만 에일린은 딱히 원하지 않아 고개를 저었다.

“그건 괜찮아요.”

그가 다른 걸 돌아볼 여유가 없을 정도로 바쁜 것을 아니까.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요.”

그보다 에일린은 그가 왜 제 앞에 나타났는지 궁금했다. 

“당신의 페로몬…….”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 로이드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에일린의 목 부근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보다 그녀의 페로몬이 안정되어 있음을 느낀 로이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사이클이 올 줄 알았어.”

“음? 사이클이요? 누가 그러던가요?”

로이드가 제라미 경이라고 대답하려던 것마저 관뒀다. 그의 보고를 보고 혼자 지레짐작한 거다. 어쩌면 그렇게 느끼도록 적었을 수도 있겠고.

이 자리를 벗어나면 제라미 경과 러츠 경을 나란히 부를 생각을 하던 로이드가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사이클 안정제를 가져왔어. 여기 하나도 없다며.”

“2개 있어요.”

“에단 공자가 쓰지 않았어?”

에일린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오늘 아침에도 오빠가 안정제가 2개 있다고 말해 줬어요. 혹시 필요하면 언제든 쓰라면서요.”

“…….”

로이드가 아무 말 없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수하에게 놀아났으니 어떻게 갚아줄지 싶었지만 에일린의 일이라고 앞뒤 따져보지도 않고 온 제 탓도 있었다.

로이드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에일린이 그의 상황을 따져보았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결과가 하나였다.

“날 지켜 주러 왔어요?”

“위험한 일이라도 벌어질까 봐. 내가 지켜 주기로 약속했잖아.”

“하지만 호위 기사를 붙여달라는 거였지 당신에게 직접 지켜달라는 건 아니었어요.”

“어쨌든 난 약속을 지키려던 거야. 당신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기 전까지는.”

아직 에일린이 따로 만나는 상대가 없다는 걸 안다. 그렇기에 에일린의 사이클을 걱정해서 달려왔다.

로이드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에일린에게 아무 일이 없으니 더는 그녀와 있을 이유가 없었다. 로이드가 멀어지자 에일린 역시 그가 갈 것을 예상했다.

또 이렇게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반갑고 좋을까 봐 걱정이 올라왔다.

“잘 가요.”

에일린이 손을 흔들며 로이드에게 인사했다. 혹시나 제 다른 마음이 들킬까 봐 더욱 거짓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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