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둘은 모를 남모를 움직임
“러츠 경.”
“이로얀이라고 불러.”
“그럴 수야 없지요. 엄연히 대공가의 기사로 당신의 이름은 러츠 헤밀리 경 아닙니까.”
에단의 선을 긋는 행동에 러츠 경은 난처한 듯 제 눈썹을 긁적였다. 자신이 대공가의 기사인 건 맞지만 엄연히 에단을 불러낼 땐 이로얀이라는 이름을 썼다.
그런데 에단은 꼭 말끝마다 러츠 경이라 불렀다. 더 다가오지 말라는 에단의 무언의 거부였다.
러츠 경은 제게 완전히 등을 돌릴 듯 구는 에단의 쌀쌀맞은 행동에 러츠 경은 슬쩍 아쉬운 미소를 바람결에 흘려보냈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보자고 했습니까?”
“혼자 돌아다니기 심심해서?”
러츠 경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에단이 코웃음 쳤다. 어제는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고 부르고, 그제는 날씨가 좋다고 불렀다.
그게 벌써 며칠인지 몰랐다. 매일같이 자신을 찾아대는 통에 에단은 심술이 바짝 올랐다.
“쓸데없이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아예 부르지를 마세요. 이젠 불러도 안 나옵니다.”
“그럼 집으로 찾아가도 돼?”
러츠 경의 기다렸다는 듯한 대답에 에단이 휙 고개를 돌렸다. 러츠 경이 집에 오지 못하도록 그가 나오고 있는 걸 알면서 일부러 저러는 게 틀림없었다. 아침마다 외출하는 통에 에일린에게 괜히 변명거리만 쌓이고 있었다.
“집 근처에 오기만 해봐.”
결국 예의고 뭐고 집어던진 에단이 이를 드러냈다.
“내가 못 가게 하니까 널 부르는 거잖아.”
“애초에 날 부르지 말라고.”
“하지만 난 친구가 없는걸?”
“거짓말하지 말고.”
“진짜야. 이로얀의 친구는 너뿐이지.”
이로얀이라는 이름은 그림자로만 쓴다는 걸 밝힌 뒤로 러츠 경은 필요할 때마다 그것을 끌어왔다. 나도 이로얀일 때가 그립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하긴 이로얀이든 러츠 경이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이제 그만 불러. 이 말 하려고 오늘 나온 거야.”
에단은 이제 절대로 나오지 않겠다고 못을 박으려고 나왔다. 더는 대공가의 기사를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집에 혼자 있을 에일린이 신경 쓰였다. 그동안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거 같아 뒀지만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갈 생각이었다.
에단의 표정에서 진심을 엿본 러츠 경은 더는 그를 부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지금이 에단과 마주하는 마지막 시간이라면 내내 미뤄왔던 본심을 드러내야만 했다.
“대공비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
“이제 대공비가 아니야. 그러니 그 호칭은 치워.”
“미안하지만 그녀는 아직 리하스트 가문의 대공비가 맞아. 아직 서류를 정리하지 않았거든.”
러츠 경은 에일린 클라우디아가 아니라 에일린 리하스트라는 걸 강조했다. 에단이 싫어할 걸 알지만 그걸 고려할 시간은 지났다. 러츠 경의 예상대로 에단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발을 강하게 굴렀다.
“너 처음부터 그걸 말하려고 날 부른 거였어?”
“친구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대공비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도 맞아.”
“흑심이 있었네.”
에단이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돌아섰을 때 러츠 경이 재빨리 그의 팔을 잡았다. 에단이 팔을 빼려고 힘을 줬지만 단련한 기사의 손아귀가 족쇄처럼 잡고 놔주지 않았다. 에단이 어떻게든 벗어나려 하자, 러츠 경이 애원하듯 말했다.
“끝까지 들어줘. 다 들으면 그때는 붙잡지 않을게.”
러츠 경은 그가 다칠까 손에 힘을 주지 못했다. 그게 느껴지자 에단은 울컥했던 마음을 억누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말해.”
“마마께서 어떻게 지내는지는 미안하지만 제라미 경에게 들었어.”
“호위가 아니라 스파이를 심어놨네.”
에단이 에일린이 온 날부터 호위 기사라면서 나타난 제라미 경을 떠올렸다. 에일린을 살피는 듯한 눈빛이 거슬렸는데 역시나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이고 있었다니.
“마마께서 처음부터 전하께 1년의 시간을 제안하신 모양이야.”
에단은 몰랐던 뒷이야기에 팔짱을 풀고는 러츠 경을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1년?”
“그래.”
“…왜?”
에단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에단을 다락방에 올리고 자발적으로 한 결혼이었다. 그날 그렇게 에일린을 보내는 게 아니었다며 에단이 집으로 돌아가자고 할 때도 에일린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었다.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몰라. 그저 그 시간이 끝나서 돌아왔던 거야. 그것으로 가문 간의 약속을 정리하고 나면 전하께서 어느 여자든 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 처음에 왔을 때 마마는 베타였잖아.”
우성 오메가인 에단이 있는데도 로이드가 에일린과의 결혼을 밀어붙일 수 있었던 건 이런 이유였나? 실제로는 형질을 띤 후계자를 만들지 않으려는 로이드의 속셈이었지만 그 사정을 모르는 그들은 어떻게든 이유를 찾아내려 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중요한 게 있잖아. 어쩌면 그 약속 때문에 원하지 않는 이별을 했을 수도 있다는 것. 그 증거로 전하께서는 아직 어떤 서류도 작성하지 않으셨어.”
“아니, 그럴 리 없어.”
에단이 러츠 경에게서 비스듬하게 몸을 틀었다.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거지만 한편으로는 동요하는 눈빛이 드러날까 싶어서였다. 다른 쪽을 집요하게 응시하면서 에단이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지만 러츠 경은 그를 억지로 돌아 세우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쯤 마마께서는 후련한 마음이시겠네. 약속을 지키고 돌아갔으니 더는 옭아맬 것도 없이 홀가분하겠지. 안 그래?”
러츠 경이 넌지시 물었다. 대공비가 가뿐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냐는 물음에 에단의 철옹성 같았던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두 분을 다시 만나게 하자.”
“만나? 누가 들으면 내가 막고 있는 줄 알겠어. 이로얀. 나는 에일린을 억지로 붙잡지 않았어.”
“꼭 줄로 꽁꽁 묶는 것만이 막는 게 아니야.”
다시 만나지 않는 이유에는, 가문이 있을 수도 있었다.
“마마께서도 계속 우울해하고 있다고 들었어. 분명 전하께 마음이 있는데 이렇게 억지로 헤어지는 것보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에단은 잠시 고심하는 듯하다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다 해도 이미 끝난 사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래.”
러츠 경이 에단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다가 알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이 자리에 미련이 없는 듯 그의 움직임에 망설임이 없었다.
“네가 여전히 그 마음이라면 더는 설득하지 않을게. 다신 이런 일로 부르지 않을 거다.”
러츠 경은 이전까지 보였던 살가운 표정을 지우고 사무적으로 에단을 바라보았다.
“실례 많았습니다.”
러츠 경이 돌아서자 에단은 잔뜩 초조하고 혼란스러운 듯 제 머리를 헝클어댔다. 에단 역시 에일린이 억지로 헤어지고 온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웃어도 예전의 그 해맑고 순수했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동생의 웃음 속에 울음이 들어있는 듯한 느낌을 계속 받아왔기에 더욱 혼란이 깊어졌다.
에일린이 대공가로 돌아가 다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면 어떡하지? 혹시나 또 누군가에게 납치되기라도 한다면 차라리 이렇게 헤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
“잠깐.”
러츠 경의 절도 있는 발걸음이 사라졌다. 그는 에단에게 왜 불렀냐는 듯 무심히 바라보았다.
에단은 정말 끝의 끝까지 고민하다가 체념한 듯 눈을 들었다.
“다시…… 만나게만 하면 되는 거야?”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를 곳에 제 동생을 밀어 넣는 게 너무 싫었지만 그게 에일린의 행복을 막아버리는 것만 같아 에단이 러츠 경을 붙잡았다.
“나는 동생이 그대로 대공비로 살길 원하지 않아. 그렇지만…… 기회만 주는 거야.”
어떤 게 에일린에게 더 나은 결정이 될지 그 도움만 조금 주는 거라고 에단이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러츠 경의 단단한 입매가 소리 없이 허물어졌다.
***
“마마께서는 언제 돌아오시지?”
잠시 친정에 가서 쉬는 거라고 알고 있는 고용인들은 처음엔 그렇구나 가볍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고 한 달이 넘어가게 되자 하나둘 에일린을 찾는 이들이 생겨났다.
“이러다 봄이 끝나고 오시면 어떡하지?”
창틀을 닦던 하녀가 안타깝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지금 딱 꽃이 예쁘게 피고 있는데 어떡해. 와서 보셔야 하는데.”
하녀가 방에서 바로 보이는 화단을 두고 안타까워했다. 그 호들갑에 화장대를 정리하던 제인이 그녀를 불렀다.
“오랜만에 가셨잖아. 충분히 쉬다 오시면 좋지 뭘 그래. 안 그래도 큰일 겪으시고도 집에만 계셔서 걱정스럽긴 했어.”
“그래도. 지금이 정말 예쁜 때란 말이야.”
“어차피 지금이 아니어도 볼 날은 많아.”
제인이 별거 아니라는 듯 굴며 마저 화장대를 정리했다. 먼지가 쌓이지 않게 붓 하나하나 꼼꼼히 닦는 게 아닌 듯해도 에일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막 침구를 정리하던 다른 하녀가 주변을 돌아보더니 다른 사람이 없음을 깨닫고 은근하게 말했다.
“소문에 대공 전하와 마마께서 헤어졌다는 말이 있어. 호수에서 둘이 무슨 대화를 심각하게 나누더니 갑자기 제라미 경이 호위 기사로 임명되었잖아. 그리고 마마는 친정으로 가셨으니 곧 공개적으로 이혼하게 될 거라는…….”
“야!”
하녀가 제가 들은 소문을 신나게 떠들고 있자, 제안이 외마디 비명처럼 말을 잘랐다. 하녀가 놀란 제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쉬다가 제인을 노려보았다.
“아, 깜짝이야. 왜 소리를 질러.”
“입 함부로 놀리지 마. 너 그러다 큰일 나는 수 있어.”
“내가 뭘. 그냥 소문을 말한 것뿐인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그렇게 살을 붙여서 떠들어대면서 뭐 그리 당당해.”
제인의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니 하녀가 입술을 삐죽이며 중얼거렸다.
“들은 소문 말도 못 하나.”
제인은 쓸데없는 말을 듣고 와서 떠들어대는 하녀를 못마땅하게 보았다. 그것도 잠시 제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왕 오래 쉬고 오는 거라고 말했지만 그녀도 내심 오지 않는 대공비를 그리워하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늦게 오셔도 돼요. 푹 쉬고 오셔도 되니까 꼭…… 돌아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