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113)화 (113/120)

113화. 완전한 끝

에일린은 꼬박 하루를 쉬고 난 다음 날, 드디어 방에서 나왔다. 드레스룸에 둔 드레스로 갈아입고 머리를 가볍게 하나로 올려묶은 에일린을 집사가 푸근한 미소로 반겼다.

“그렇게 입으시니 예전 아가씨 때로 돌아오신 것 같습니다.”

에일린은 화장기가 없는 민얼굴을 가볍게 쓸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아침 에일린도 즐겨 입었던 드레스를 입으면서 느꼈던 감정이었다.

대공비가 되었던 1년의 시간이 감쪽같이 사라진 듯한 기분. 그러나 에일린이 곧 제 머리카락의 끝을 매만졌다. 오메가로 발현하면서 달라진 외양이 대공비로서의 삶을 잊지 말라는 듯 햇살을 받을 때마다 반짝였다.

“에단 오빠는요?”

“볼일이 있어 이른 아침에 나가셨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어제저녁 마주친 부모님은 에일린이 잠시 놀러 온 것으로 생각했다. 에단은 에일린이 헤어졌다는 걸 짐작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부모님은 평소와 다름없이 황궁으로 갔고 에일린은 오늘 혼자 남았다. 결혼하기 전에도 부모님은 자주 집을 비우셨고 에단은 함께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에일린은 이전 누렸던 일상과 다름없는데도 이상하게 어딘가 텅 빈 기분이었다. 로이드와 함께 식사했던 기억이 그녀의 허전한 마음을 더욱 부추기고 있었다.

에일린이 자리에 앉으니 집사가 곧바로 준비해 온 접시를 내려놨다.

“부인께서 오신 걸 알고 사라 부인이 직접 요리를 만들어 주고 싶다면서 찾아왔습니다.”

집사가 고소한 향의 수프를 내려놓고 막 구워서 식힌 따뜻한 빵이 담긴 바구니도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것을 함께 곁들어서 드셔도 좋다고 하더군요. 살구잼입니다.”

작은 접시에 담긴 반투명한 살구 빛깔의 잼이 신기하다는 듯 에일린이 상체를 기울여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예쁜 빛깔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집사가 이어 말했다.

“작년 가을에 부인을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합니다. 살구가 알맞게 익었는데 부인을 만날 수 없으니 이리 잼을 만들었다지요. 겨울에 잘 보관하다가 이렇게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사라 부인에게 고맙다고 전해줘요.”

사라 부인의 따뜻한 마음이 내내 가라앉았던 에일린을 위로하듯 감싸주었다. 방금까지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었던 에일린이 뒤늦게 가족 말고도 자신을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음을 깨달았다. 세심하게 신경 써 주는 집사와 사라 부인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와서 손발이 되어주던 고용인. 

에일린은 사라 부인의 정성이 들어간 살구잼을 빵 위에 올려 베어 물었다. 따뜻한 빵에 차가운 잼이 잘 어우러졌다. 사라 부인에게 잘 먹었단 말이 전해질 수 있도록 에일린은 빵 하나를 전부 먹었다. 최근 장미정원 이후로 가장 마음에 드는 식사였다.

잠시 물을 마셔 입에 남아있는 살구 향의 여운을 느끼던 에일린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구잼을 먹었는데 장미잼을 먹은 기분이었다. 

왜 그런가 싶었는데 살구의 향이 눌릴 정도로 진한 장미 향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에일린의 눈동자가 주변을 훑었다. 다이닝룸 곳곳을 살펴보던 에일린은 장미를 발견하지 못하자 살짝 시무룩해져 눈을 내렸다. 

아무래도 장미 향은 제 착각인 거 같았다. 장미정원에서 로이드와 나눴던 식사가 기억에 남아서 그런 거였다. 

“왜 그러십니까?”

집사의 물음에 에일린이 방금까지 식기를 들고만 있다는 걸 떠올렸다. 따뜻한 김이 오르던 수프 위로 얇은 막이 생겼다. 에일린은 수프를 먹을 마음이 들지 않아 조용히 식기를 내려놓았다. 접시와 부딪히면서 낸 소리에 집사의 시선이 에일린의 손을 스치며 올라왔다. 

“다른 요리를 가져올까요?”

“음…… 어디선가 장미 향이 느껴져서 살펴보고 있었어요.”

당연히 그렇게 느껴질 리가 없기에 에일린이 미소로 때웠다. 집사에게 굳이 대답을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라 자신을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집사가 지그시 웃으며 에일린이 잘못 맡은 게 아님을 알려주었다.

“날이 좋아서 창문을 열어두었습니다. 후원에 장미가 가득 피었는데 그 향기가 흘러들어왔군요.”

“아, 그렇군요.”

에일린이 후원을 보려는 듯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클라우디아가 후원에도 매년 장미가 피어났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괜찮으시다면 후원을 둘러보시지 않겠습니까?”

에일린이 왔을 때부터 세심하게 신경 써 주고 있던 집사가 잘됐다는 듯 굴었다. 집사의 물음에 에일린은 다시금 느껴지는 장미 향에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요.”

지금은 장미를 돌아볼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

“원로원의 구심점이 사라져 지금 많이 흔들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알란이 추방된 후 원로원은 급격히 힘을 잃었다. 몇몇이 비어있는 자리에 욕심을 냈지만 서로를 견제하는 힘이 워낙 강해 여태껏 원로원에서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었다.

로이드는 대답 없이 검의 모형을 딴 장식품을 바라보았다. 제법 예기를 담아서 장식한 장인의 솜씨가 엿보였다. 고개를 기울여 다른 방향에서 장식품을 보던 로이드가 문득 그것을 옆으로 밀어버렸다.

“그럼 버리지요.”

“원로원을 해체하자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원로원은 오랜 시간 가문을 지탱하던 기둥과 다름없습니다.”

칼릭스 원로가 기겁해서 하는 말에도 로이드는 특유의 무심한 표정을 유지했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심드렁한 눈으로 대답했다.

“그 기둥 하나가 무너진다고 대공가가 무너집니까?”

로이드가 별 걱정을 다 한다는 듯 말했다. 이제 대공가를 완벽히 통제하게 된 로이드는 원로원을 굳이 끌고 갈 필요가 없음을 내비쳤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칼릭스 원로가 걱정되어 찾아왔다. 그는 쓰러진 장식품을 집어 로이드의 손에 쥐여주었다.

“꼭 버리는 것만이 방법은 아닙니다. 이렇게 쥐어서 잘 쓸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귀찮네요.”

로이드가 손을 펴서 장식품을 그대로 던지듯 내려놨다. 자신을 힘들게 했던 원로원을 굳이 끌고 가기보단 차라리 원로원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을 만드는 게 수월했다. 

전혀 들어주지 않는 로이드의 꽉 막힌 태도에 칼릭스 원로는 그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더 할 말 있습니까?”

없다면 나가보라는 축객령에 칼릭스 원로가 그를 미련스럽게 바라보다가 집무실을 나왔다. 

칼릭스 원로가 나가자 집사가 들어왔다. 그는 다시 장식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는 로이드의 앞으로 와서 보고했다.

“황궁의 기사가 폐하의 서신을 들고 찾아왔습니다.”

서신을 읽어보지 않아도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지 알겠다. 로이드는 전혀 급하지 않다는 듯 그 자리에 서서 생각하더니 지시를 내렸다.

“응접실로 보내.”

모든 일이 끝난 후 입궁해도 상관없었다. 자신은 아직 황궁으로 돌아간다고 말하지 않았고 황제는 그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에일린이 곧 황궁으로 돌아갈 것을 말했기에 로이드도 그 시기를 가늠하는 중이었다. 

황궁의 기사를 응접실로 보낸 로이드가 가지고 놀던 장식품을 맨바닥에 떨구고 일어났다. 원로원만큼은 정말 그 어떤 노력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를 힘들게 했고 감히 그를 쥐고 흔들려고 했던 자들이었다. 

집무실을 나온 로이드는 에일린의 집무실이 보이자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그가 고개를 돌려 집무실을 바라보다가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 

에일린의 집무실에 들어간 건 반쯤 충동 어린 행동이었다. 그녀는 없지만 그녀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겨진 공간이었다. 제게만 맞춰진 질서에 따라 정리한 책상은 당장에라도 에일린이 와서 일을 할 것만 같았다.

그것을 씁쓸하게 바라보던 로이드는 에일린이 실험실로 쓰던 방으로 들어갔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진 책장과 연구를 위한 긴 책상. 시약병을 비롯한 각종 실험 도구들이 즐비했다. 

전부 로이드가 에일린을 위해 마련해준 것뿐이었다. 에일린은 로이드에게 받은 물건을 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 이리 실험 도구 하나 챙기지 않았다. 

이렇게 다 놓고 갈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주지 말 걸 그랬어.

그럼 적어도 지금 이 씁쓸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 텐데. 대공가의 돈이 하나도 탐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거 참, 돈을 탐하지 않는 게 이렇게 아쉬울 수가.”

외려 욕심 없는 걸 탓하고 있으니 남들이 들으면 이상하다 여길만했다. 그 욕심 많은 알란에게 휘둘렸으면서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로이드가 반쯤 책상에서 기댔던 몸을 뗐다. 이 방을 완전히 비워버리면 에일린을 잊을 수 있을까. 

잠시 고심하던 로이드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살짝 열린 책상의 서랍. 에일린의 성격을 보아, 그녀가 이리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혹시 누군가 다녀갔는지 싶어 로이드의 불쾌감이 올라가려고 할 때 그의 시선이 서랍 안으로 향했다.

설마 하는 생각과 함께 로이드가 서랍을 열자 하나의 물건이 보였다. 햇빛이 물건에 새겨진 음각을 따라 내려앉았다. 제 이름이 각인된 팔찌였다. 

다 놓고 갔어도 이거 하나만큼은 가져갔을 줄 알았다. 그러나 에일린은 정말 단 하나도 로이드와 관련된 걸 가져가지 않았다. 그 팔찌를 본 순간 로이드는 완전한 끝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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