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아름답고도 슬픈 봄의 시간
로이드는 계약 종료를 말해오는 에일린의 말에 떠오르는 대답이 없어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모른 척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이 자리를 피할 잠깐의 회피성 대답밖에 되지 않았다.
작년 이날, 에일린은 로이드에게 1년의 시간을 제안했었고 로이드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로이드는 절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렀고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녀와 헤어질 걸 알기에 더욱 그녀에게 집중했지만 막상 이별의 순간이 오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고 지끈거리는 심장마저 로이드를 도와주지 않았다.
“……에일린.”
로이드는 안개같이 뿌예진 머릿속에서 유일하게 떠오르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수십 수백 번을 불러왔던 이름이었고 그때마다 상냥한 눈빛을 보내오던 에일린은 무심한 눈으로 로이드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대공 전하.”
친근하게 부를 수 있는 시간이 끝났다는 듯 에일린은 그에게 거리를 벌렸다.
“서류가 정리되면 당신의 성을 도로 내려놓고 제 친정의 성을 다시 가져오겠죠. 에일린 클라우디아로요. 그때는 알아서 호칭을 바꿔주세요.”
에일린이 아니라 클라우디아 영애로.
에일린이 로이드와 제 사이에 선을 그었다. 에일린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로이드에게 예의상의 미소 외에 상냥했던 모습을 모두 감춰버렸다.
에일린의 가라앉은 눈빛을 본 로이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음을 깨달았다. 이미 마음이 떠난 그녀는 로이드와의 이별을 덤덤하게 언급하고 있었다.
로이드는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참으려 주먹을 꽉 쥐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에일린에게 주먹이 보이지 않도록 팔짱을 꼈다.
“저는 여기에서 바로 제집으로 돌아가려고 해요.”
“당신의 물건을 다 놓고 갈 셈이오?”
로이드는 정말 싫은 얼굴이지만 에일린이 원하는 대로 맞춰주었다. 클라우디아 영애를 향한 예의에 에일린은 살짝 입술을 다물었다가 도로 열었다.
“제 것은 아무것도 없는걸요.”
에일린은 대공가로 올 때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그의 갑작스러운 청혼과 함께 반협박으로 빈손으로 마차에 태워져 대공가로 왔다. 그렇기에 따로 챙겨서 가져갈 게 없었다.
“그렇다면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저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아직.”
로이드가 일어나려는 에일린을 향해 강한 제지의 말을 건넸다. 눈은 에일린의 팔을 스쳐보며 마치 잡고 싶은 듯했지만 그는 팔짱을 끼고 에일린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아직 할 말이 있으신가요?”
“우리가 나눈 계약은 단순히 시간적 종결만을 뜻하지 않을 텐데요.”
로이드는 에일린에게 우리가 정리해야 할 게 더 있지 않냐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그래서 에일린이 그날의 기억을 되새겨보았지만 바로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에일린이 입을 다물고 있자 로이드가 뒤편에 서 있는 제라미 경에게 손짓했다. 그에 에일린이 감을 잡은 듯 로이드와 제라미 경을 번갈아 보았다.
“당신이 누군가를 만나 안정되기 전까지 제라미 경이 지켜줄 것입니다.”
“하지만 대공 전하…….”
에일린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로이드를 불렀고 멀리 있었던 제라미 경도 이게 무슨 일인지 싶은 눈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특히나 두 사람이 나누는 경직된 대화 때문에 더욱 영문을 모르겠지만 그 모든 의문점을 감춘 채 상관의 지시를 기다렸다.
“제라미 경. 오늘부터 클라우디아 영애의 호위를 담당한다. 그대가 다시 내게 돌아올 시기는 내가 정한다.”
“지시를 따릅니다.”
제라미 경이 어떤 의문도 표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하니 에일린만 당황했다. 그녀는 그 당시 로이드가 왜 그렇게 손해 보는 제안만 하느냐 싶어서 충동적으로 떠오른 말을 했던 것뿐이었다.
에일린과 에단을 지켜달라는 것.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 제안을 로이드가 받아들였으면 하는 마음에 한 말이었는데 이렇게 돌아올 줄 몰랐다. 그것도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키는 자를 보내올 줄은.
“대공 전하, 제라미 경은 전하를 지키는 기사입니다. 저는 부담스러워요.”
“그럴 것 없습니다. 그저 이 자리에 있는 기사를 부른 것뿐이고 처음 우리의 약속에 어떤 기사를 보낼지에 대한 말은 없었으니까요.”
로이드가 딱 잘라 상황을 정리하자 난감해진 건 에일린이 되었다. 그녀는 이제 제라미 경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호수에 나와서 이별을 말하게 된 게 자신의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로이드의 굳은 눈빛을 보니 다른 사람은 없다는 듯 단호함이 엿보였다. 에일린은 어쩔 수 없이 제라미 경을 호위로 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약속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일린은 더 거절하지 않고 로이드의 뜻을 받아들였다. 제라미 경이 물러나고 다시 두 사람이 남았지만 아까와 같은 대화는 없었다. 이제 대공 부부가 아닌 대공과 백작 영애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에일린은 진심을 다한 감사 인사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행복하세요.”
예정된 이별의 순간이었다.
***
호수로 나갔던 대공 부부의 귀가에 고용인들이 그들을 마중 나갔다. 대공비의 전담 하녀인 제인을 필두로 대공비를 모시는 고용인과 대공을 모시는 고용인이 정확하게 반씩 있었다. 그들은 점점 가까워져 오는 마차의 바퀴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이윽고 마차가 멈춰서고 문이 열리면서 로이드가 내렸다. 로이드를 모시는 고용인들이 그를 에워싸듯 움직였다. 이어서 대공비를 모시는 고용인들이 다가서는데, 어쩐 일인지 마차에서 내리는 이가 없었다.
“들어가라.”
로이드의 지시에 제인이 힐끗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다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공비가 없는 것이었다. 호수를 보러 간다고 부부가 사이좋게 나갔는데 돌아올 땐 대공 혼자였다.
대공비는 어디 갔을까.
“제라미 경을 대신할 자를 새로 배치하라. 내일 황궁에 들어갈 것이니 그리 알고 준비하도록.”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로이드의 차갑고도 간결한 지시에 집사는 사무적인 표정 뒤로 의아한 마음을 감췄다.
***
“돌아왔구나. 잘 돌아왔…….”
에단의 인사에 에일린이 푹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하얗고 말간 얼굴이 주변을 짧게 돌아보았다가 에단과 눈이 마주쳤다.
“응 다녀왔어.“
에일린의 잔잔한 미소와 함께 나온 대답에도 에단은 에일린의 표정만 살폈다. 제 얼굴을 훑는 에단의 시선에 에일린은 뭘 그렇게 보냐는 듯 웃음기 어린 타박을 건네며 화제를 돌렸다.
“부모님은?”
“어, 다 황궁에 계셔.”
“여전하시구나. 오늘 저녁엔 오시려나?”
“그러……겠지?”
에단이 다소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에일린과의 대화가 어딘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럼 나 방에 들어가서 쉴게. 아까 호수에 갔다 왔더니 조금 피곤해.”
“그래.”
에일린은 배시시 웃으며 에단에게 가볍게 포옹을 하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원래라면 에일린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야 했을 에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 왔어요.”
현관문에서 소리치는 에일린의 밝은 목소리에 에단이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딱히 운 것 같지도 않았고 목소리에 울음기가 묻어있지 않았다. 그런데 왜 자꾸 에일린에게 울음이 묻어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여긴 여전하네요.”
“부인의 방은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있습니다.”
“좋네요. 마치 어릴 때의 나로 돌아온 기분이에요.”
“계속 그 생각만 드신다면 한 번쯤 절 돌아보시지요. 제 흰머리를 보시면 부인께서 성장하셨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집사는 가벼운 농담을 하며 방에 온기가 도는 걸 확인하더니 조용히 나갔다. 혼자 남은 에일린은 천천히 방을 거닐었다. 대공가에 있는 제 방의 반도 안 되는 작은 크기라 별로 걷지 않았는데도 벌써 끝에 다다랐다.
침대와 화장대, 작은 협탁. 익숙한 공간은 어릴 적 지내던 그 모습 그대로였지만 어쩐지 낯선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왔을 때가 언제였더라.
로이드가 갑자기 친정에 가자고 했을 때였나? 에일린이 침대를 쓰다듬었다. 그와 같이 자야 하는데 침대가 너무 좁아서 걱정이었던 게 떠올랐다. 그때의 기억이 이젠 하나의 추억이 되어 에일린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에일린이 침대에 몸을 눕히자 그녀의 금발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호수에서부터 묻어온 봄과 로이드의 페로몬의 향을 풍겨왔다. 그 향을 맡고 있으니 아까 보았던 호수의 아름다운 풍경이 여전히 그녀의 눈동자에 머물고 있는 듯했다.
봄의 싱그러운 향에 에일린은 조금씩 몸의 힘을 뺐다. 잠이 올 것만 같이 몸이 늘어지자 에이린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에일린에게 올해의 봄은 아름답고도 슬픈 계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