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예정된 이별
“이제 정말 봄인가 봐요.”
“꽃이 얼마나 많이 피었는지 몰라요.”
“아침에도 햇살이 따뜻했어요.”
하녀들의 재잘거리는 이야기에 치장을 위해 눈을 감고 있던 에일린이 입매만 살짝 올렸다. 그녀 역시 봄이 왔음을 느끼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아쉽네.”
“마마께서는 겨울이 더 좋으셨나요?”
“대공가에 눈이 쌓이면 정말 예쁘잖아. 그걸 못 보니 아쉬워.”
따뜻한 봄이 온 것도 좋지만 하얗게 눈이 쌓인 대공가를 보는 즐거움을 이제 누리지 못해 아쉬웠다. 눈이 온 다음 날이면 로이드와 함께 손을 잡고 대공가 주변을 둘러보곤 했던 시간이 사라졌다.
“겨울은 매년 찾아오는걸요. 다음에 올 겨울을 기다리면 되죠.”
“맞아.”
제인의 위로에 에일린은 대답을 아꼈다. 대신 붓이 스친 눈을 천천히 떴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에도 봄이 찾아왔다. 은은한 봄의 색이 눈과 볼에 올라왔다.
“마음에 드시나요?”
“응.”
“아름다우세요. 마마.”
“맞아요. 저는 마마만큼 아름다운 분을 본 적이 없어요.”
하녀들이 재잘거리며 에일린의 머리를 매만지고 꽃을 형상화한 장신구를 꽂아주었다. 봄을 즐겼으면 하는 그녀들의 마음이 느껴지니 에일린의 아쉬워하던 표정도 점차 사라졌다.
“에일린.”
로이드가 들어오자 에일린의 주변에 모여있던 고용인들이 일제히 예를 취하고 옆으로 물러났다. 로이드는 성큼 걸어와 에일린의 의자 뒤로 갔다. 거울에 비친 에일린의 얼굴을 본 그가 곧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오늘도 예쁘네.”
로이드의 감상에 에일린의 얼굴에 발긋한 열이 올랐다. 색조로 물을 들인 볼이 부끄러워 달아오른 열기와 섞이니 다른 느낌을 자아냈다.
에일린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로이드의 칭찬에 어쩔 줄 몰랐다. 자기만 있는 자리도 아니었고 다 듣고 웃음을 참는 게 느껴졌다.
“그런 말은…….”
“알아. 알아. 둘이 있을 때만 하라고 했던 거. 아는데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니 이해해줘.”
“로이드.”
로이드의 장난에 에일린이 목소리를 높였다. 막 치장을 돕던 제인이 예쁘다고 할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로이드의 말은 에일린의 심장을 자꾸 흔들어댔다.
“알겠어. 부인이 예쁘단 감상은 속으로만 할게. 그보다 오늘 점심은 다른 곳에서 하려는데 어때?”
그 와중에 능글맞게 한마디를 붙였지만 곧바로 화제를 바꾸는 통에 에일린은 기가 막혀 하면서도 더 말리지 못했다. 본래 로이드는 하고 싶은 말은 꼭 하는 사람이었으나,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더욱더 솔직해졌다.
“가자.”
로이드가 에일린의 옆으로 와 팔을 벌렸다. 에스코트를 위해 제 팔짱을 끼라는 의미에 고용인들이 물건을 정리하던 작은 소음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모두 로이드를 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와중 로이드의 시선이 자기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니 에일린은 겨우 식었던 열기가 다시 올라오는 듯했다.
“일부러 이러는 거죠.”
자꾸 자신을 놀리는 거 같지만 에일린은 순순히 로이드의 팔짱을 꼈다.
“당연하지. 당신이 보이는 반응이 정말 재밌거든.”
로이드의 말에 에일린이 뭐라고 말하려는데 한쪽에서 고개를 끄덕이던 제인과 눈이 마주쳤다. 제인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는 걸 보니 로이드가 말한 제 반응이 재밌다는 게 정말인가 보다. 에일린은 더 따질 의욕을 잃고 그의 팔에 살짝 몸을 기댔다.
어쨌든 그에게 기대 걷는 건 좋았으니까.
로이드가 가는 대로 발을 놀리는 에일린은 익숙하고도 낯선 기분에 계속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공가의 구석구석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어느 길이든 다 눈에 익었으나, 이상하게도 오늘은 로이드가 방향을 꺾을 때마다 낯선 느낌이 들었다.
서로의 닿은 부분을 통해 에일린의 행동을 보지 않아도 알아챈 로이드가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옆을 돌아볼 때나 자신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에일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로이드의 팔을 놓지 않으려는 작은 바르작거림이지만 그 별거 아닌 게 좋아서 어디로 가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 멀고도 가까운 길의 끝에는 장미정원이 있었다. 벌써부터 풍겨오는 장미향에 에일린이 잠깐 멈춰 있는 사이 로이드가 그녀의 의중을 살폈다.
“어때?”
“향기로운 식사가 될 거 같아요.”
봄이 정말 성큼 다가왔다.
***
장미정원에서의 식사는 정말로 향긋함이 배가 되는 시간이었다. 장미를 이용한 요리를 즐기고 있으니 이 시간이 계속 이어지면 좋겠단 생각도 들었다.
“정말 맛이 좋네요.”
“장미정원에서 식사한다니 요리사가 특별히 신경 썼지. 어제 만찬으로 의욕이 넘쳐있기도 했고.”
만찬이라는 건 요리사를 포함, 대공가의 고용인들이 특별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에일린이 마련한 자리였다. 에일린은 대공비 앞으로 주어지는 돈을 사용하지 않고, 중화제를 통해 번 돈으로 베풀었다. 그건 대공비로서가 아니라 에일린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표현하는 감사의 마음이었다. 한 달에 한 번, 그 시간만큼은 그들을 위한 시간이었고 즐겼으면 하는 에일린의 배려였다.
더불어 고용인의 급여체계를 보다 체계적이고 상세하게 정리했다. 또한 대공가에 상주 의사를 늘려서 고용인과 그 가족의 건강을 돌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했다.
“그들에게 고마워서 그런 것뿐인데 이렇게 돌려받네요.”
에일린이 장미꽃잎이 떠다니는 음료를 마시며 말하자 로이드가 정말 그것뿐이냐는 듯 물어왔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인데도?”
“그러게요. 그 사람들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왜 제게는 자꾸 그들의 마음이 느껴지는 걸까요.”
에일린이 지켜본다고 거북해하던 기사들은 고작 식사 하나에 자신을 더욱 열심히 지켜주었고 제인을 비롯한 하녀들의 손끝에도 따뜻한 정이 묻어나왔다.
“이렇게 큰 저택도 결국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걸 알았어요.”
제 친정과 대공가를 비교하던 때가 있었다. 친정은 워낙 사람이 적어서 매일같이 부딪히기에 더 정이 도탑게 붙었고 대공가는 커서 안 그럴 줄 알았다. 전부 자신의 착각이었지만. 어느 곳이든 사람이 사는 곳이었고 그런 장소에 오래 머물다 보면 정들기 마련이었다.
에일린이 다시 포크를 들어 꽃 모양을 한 살라미를 들자 로이드 역시 이 시간에 있어 만족스러움을 드러냈다.
“내일은 어디 갈까?”
로이드의 질문에 에일린이 잠시 식기를 든 채 생각에 빠졌다. 접시가 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으니 꼭 호수의 윤슬 같았다. 그래서 에일린은 접시를 보던 눈동자를 들어 대답했다.
“호수가 보고 싶어요.”
***
호수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마법이 있었다. 에일린이 호수를 보면서 점점 안정되어가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다. 조금씩 가둬두었던 제 페로몬을 흘리자 그에 반응한 로이드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둘의 페로몬은 은은한 향을 풍기다가 허공에서 얽혀들어 바람결에 실려 사라졌다.
“정말 좋네요.”
에일린의 목소리는 호수를 닮아 있었다. 잔잔한 윤슬이 오가는 깊고도 청아한 소리였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좋잖아요. 여름의 호수도 좋고 겨울의 호수도 좋고. 언제 와도 좋아서 자꾸 오고 싶어요.”
어느덧 호숫가에 야생화가 자라는 계절이었다. 언제 와도 특유의 아름다움이 있으니 에일린은 로이드와 자주 호수를 찾아왔다.
오늘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에일린은 이제 익숙하게 느껴지는 호수의 전경에 감탄하며 로이드와 둘만의 시간을 즐겼다.
“오늘은 저기에 꽃이 피기 시작했네요.”
“이제 겨울보다 봄에 더 가까워지고 있으니까.”
로이드가 에일린의 어깨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서로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이렇게 여유로운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나.”
로이드가 턱을 괸 채로 말했다. 그동안 후계자로 또 대공으로 일에 치여 살았던 시간을 보상하듯 로이드는 느긋한 하루를 보냈다.
“황궁에서 매일 기사가 오던데요?”
“매일은 아니야.”
로이드가 억울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이삼일에 한 번씩 기사가 정문을 두드리곤 했다. 로이드가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오겠다며 황궁을 나올 때, 황제는 한 달 정도의 시간을 생각했었나 보다. 그런데 겨우내 제 동굴에 틀어박혀 안 나오는 로이드에게 겨울잠이라도 자냐면서 기사를 보내왔다.
“그만큼 당신이 필요하다는 거잖아요.”
에일린은 로이드를 위로할 겸 그의 어깨를 살살 두드렸다. 황제가 계속해서 찾고 있다는 건 좋은 의미라고 생각하라면서.
“어제 기사는 제가 돌려보냈어요. 이제 곧 대공께서 갈 테니 그리 전해달라고 말했어요.”
에일린이 로이드의 어깨를 매만지던 손끝을 굽혔다. 그에게 느껴지는 온기를 느끼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끊어내고자 하는 의지였다. 에일린은 방금까지 대화를 나누던 그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시간이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