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110)화 (110/120)

110화. 최선

‘황비 마마께 그런 말을 서슴없이 했다니…….’

에일린이 달아오른 얼굴을 감쌌다. 차가운 손바닥을 대서 볼을 식히고 있으니 다시 아까의 대화가 떠올랐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샘솟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가족이 아니라서 더욱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대공 전하의 옆에 오래오래 있어야겠네요.’

제이나 황비가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한 말에 에일린은 언제 좋아했냐는 듯 쓴웃음을 삼켰다. 자신과 로이드의 비밀을 모르기에 할 수 있는 말인데 그걸 그냥 넘기지 못한 제가 너무 못나 보였다.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제이나 황비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때마다 그 말을 신경 쓸 순 없었다. 에일린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생각을 털어내려 했다. 그런데 마침 에일린에게 생각을 지울 수 있는 일이 생겼다.

“에단 오빠.”

집에 돌아갔던 에단이었다. 그는 언제나와 다르지 않은 해사한 미소로 에일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것도 잠시 에일린이 에단에게 기쁘게 다가갔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괜찮은지 보려고 왔어.”

“난 괜찮아.”

“그럼 같이 산책은 어때?”

에단이 에일린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에일린은 에단에게 잡힌 제 손을 보면서 순순히 그가 가는 대로 따라갔다. 

예전에 자주 가던 정원으로 가려는지 에단은 본채를 나왔다. 에일린은 어디에서 산책을 할지보다 다른 것에 신경이 쓰여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에단 오빠의 손.’

제 손을 덮을 만큼 커다랗지만 남자의 손 치고 부드러웠다. 이 손을 매일같이 잡아가며 살아왔었다. 그런데 지금 이상하게 오빠의 손이 익숙하고도 어색했다. 조금 더 자라면서 굳은살이 박인 손이 생각나서 그랬다.

‘로이드.’

에일린은 문득 로이드가 있을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이 많겠지?’

오늘은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 좋겠는데. 클로에 아가씨가 싫어하겠지만 셋이서 오늘 모임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에일린.”

“응?”

에단이 부르는 소리에 에일린이 조금 늦게 반응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아닌 듯 에단을 보았다가 뒤편에 자리한 마차를 발견했다.

“산책하자면서 마차까지 타고 나가야 해?”

에일린은 산책을 너무 멀리 갈 수 없는 이유를 말하려고 했다. 일단 대공비이기 때문에 그냥은 나갈 수 없었다. 특히나 에일린은 사고를 당한 지 얼마 안 되서 그녀가 안 보이면 걱정할 사람이 많았다.

“산책은 거짓말이었어. 에일린, 이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자.”

“……뭐?”

에일린이 알아들을 수 없다는 듯 에단을 보았다. 자신이 들은 말이 맞는지 에단을 보고 있으니 그는 한 치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에일린을 보고 있었다.

“대공에게도 말했는데 전혀 내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은 거 같아서.”

에단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에일린을 불렀다는 것을 드러냈다. 그는 여기서 에일린을 데리고 간다고 해도 대공이 말리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에단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에일린이 적응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마차도 가문의 마차이고 마부도 익숙한데 에단만 평소와 달랐다.

에일린은 일단 낯선 기분을 감추려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장난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왜 그런 말을 해.”

“너 계속 대공비로 살 거야?”

“오빠,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대공비로 사는 건 당연하잖아.”

“아니. 지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어.”

그의 단호한 표정에 에일린이 당황한 표정을 그대로 내보였다. 늘 상냥하고 친절한 오빠였는데 오늘만큼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에단은 에일린의 손을 힘줘 잡았다. 에일린은 제 감정에 따라 떨리는 손끝이 잡히니 복잡한 마음을 그에게 들킨 것만 같았다. 에단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에일린을 응시했다. 에일린이 에단의 차가운 눈빛에 꼼짝없이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처음부터 네가 아니라 나였잖아.”

“오빠… 설마.”

로이드를 좋아하는 거냐는 물음이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분명 에단 오빠는 에일린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른 속마음이라도 말하려는 걸까 봐 에일린이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네가 독을 먹고 납치당한 거 전부 내가 겪었어야 할 일이잖아. 에일린. 나는… 나는 당장 그 사람과 결혼하기 싫다고 모든 걸 네게 떠밀었어.”

에단이 지난 시간 차곡차곡 쌓였던 후회의 감정을 전부 내보였다. 

“그래서 대공에게 말했어. 널 놓아달라고.”

“로이드에게…. 그랬다고?”

“그래. 그리고 기다렸지만 아무 답이 없었어.”

“오빠! 왜 그랬어.”

에일린은 자신이 모르는 둘만의 일에 불안감을 드러냈다. 어떤 말을 더 한 걸까? 하지만 에단은 에일린의 불안감을 누르기는커녕 더욱 부추기기만 했다.

“처음엔 네가 위험해도 대공이 지켜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너 죽을 뻔했잖아.”

“그건 어쩔 수 없었어.”

“알란, 그자에 대한 이야기 들었어. 그리고 널 죽이려고 사주한 사람이 누군지도. 내가 널 그 자리로 밀었어. 그래서 나 시간이 돌아가면 너 대신 내가 결혼하고 싶은 생각뿐이야. 매일 밤을 후회해.”

“오빠…….”

에일린은 제가 겪었던 후회를 고스란히 에단이 겪고 있음에 목이 멘 듯 어떤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은 운이 좋아 과거로 되돌아왔다. 에단 대신 로이드와 결혼했고 에단이 죽었던 이유를 파헤쳐 원인을 알아냈다. 

그 사이에 있었던 위기의 순간들을 에일린은 다행히 무사히 넘어갔지만 지켜보는 에단은 절대 그냥 볼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에일린, 처음부터 강제로 한 결혼이었잖아. 이제 네 행복을 찾아. 이제 네가 위험해지지 않게 오빠가 지켜줄게.”

“오빠 그런 게 아니야. 처음엔 오빠가 위험할까 내가 결혼하려고 온 게 맞아.”

그건 에단을 다락방에 올려보냈을 때부터 숨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아니야. 난 내 결정에 후회하지 않아.”

에일린이 어떻게든 오해를 풀고 싶어 말을 두서없이 늘어놨다. 하지만 에단에게 어깨가 잡히며 에일린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에단은 에일린의 속을 들여다보겠다는 듯 뚫어지게 보며 그녀의 속을 헤집어댔다.

“그의 옆에 있는 게 좋은 거야? 에일린. 그가 널 사랑한다고 장담할 수 있어? 그것만으로는 버티기 힘든 자리야.”

“그건…….”

그의 마음을 장담할 순 없다. 

“신뢰로 평생 살아갈 거야? 아니면 대공이 네게 사랑한다는 고백이라도 했어?”

에단의 다소 추궁하는 듯한 물음에도 에일린은 입술이 딱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로이드에게 고백받은 적은 없었다. 제게 최고의 남편이라고 말한 게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현실을 깨닫는 것 같았다.

문득 에일린은 예전에 꾼 꿈이 떠올랐다. 에단 오빠가 로이드와 이혼하라고 했던 그 꿈이 스물스물 올라와 에일린의 발목을 휘어 감았다. 에일린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 바닥을 딛고 있는데 어딘가로 끌려 들어가는 듯한 아득함이 느껴졌다.

에단은 에일린의 손을 조금 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이리 와. 집에 가자. 너는 널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시작하는 거야.”

에단의 말이 주문처럼 에일린을 휘어잡았다. 에일린은 홀린 듯 에단이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자신에게 있어 사랑하는 사람은 로이드지만 왠지 에단의 말을 들으며 그의 앞을 막아서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다정한 남편이지만 다른 여자에게는 사랑을 주는 사람일 수 있는데…….

에일린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어떤 위험과 비교할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마차의 문이 에일린을 향해 열렸다. 이 안에 들어가면 적어도 로이드를 막아서는 여자가 되진 않을 거 같았다.

“자네는 지금 대공에게 가서…….”

“오빠.”

막 마차에 올라탈 줄 알았던 에일린의 작은 목소리가 에단을 흔들었다. 앞을 바라보고 있던 에일린의 차분하게 가라앉은 표정에 에단은 순간 자신을 부른 게 맞는지 헷갈리기도 했다. 

에일린이 마차에 올라타지 않으니 에단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에일린?”

에일린이 마차를 보던 시선을 움직여 에단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조금씩 감정이 스며들고 있었다. 에일린의 단단하게 피어오르는 눈빛에 이제 에단이 당황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는 건 싫어.”

“에일린? 괜히 버텨봐야 좋을 게 없어. 일단 마차에 타고 가면서 이야기하자.”

“떠나야 한다면, 로이드에게 제대로 인사할래. 떠나는 건 그다음에.”

에일린이 에단에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로이드의 앞을 막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는데도 불구하고 에일린이 마차에 타지 않았던 건 아직 시간이 남아서였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제 것인데 싶은 아쉬움이 에일린을 뻔뻔하게 만들어주었다.

에일린은 먼저 에단에게 잡힌 손을 당겼다. 에단이 놓지 않으려고 했지만 에일린은 묵묵히 그의 손에서 제 손을 뺐다.

“오빠.”

손을 따라 고개를 숙이니 에일린의 목소리가 잔뜩 눌린 상태로 흘러나왔다.

“지금 이렇게 가면 도망치는 거잖아.”

“아니야.”

“물론 내가 도망치는 게 부끄럽다거나 그래서 싫은 게 아니야.”

에일린이 미소를 내보였다. 그녀는 항상 당당하게 살진 못했다. 당연히 피할 때도 많았고 모른 척 외면하기도 했었다. 

“내가 이렇게 가 버리면 그 사람은 어떡해. 이렇게 가는 건 아니야, 오빠.”

그게 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