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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109)화 (109/120)

109화. 최고의 남편

“이렇게 자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로에가 가볍게 허리를 숙였다 펴며 귀부인들을 돌아보았다. 가장 상석에 있는 제이나 황비를 시작으로 한 명씩 눈을 맞추던 클로에가 본격적으로 입을 열었다.

“모임을 만들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매번 보내 주신 초대장에 미안하다는 답변만 보내드리다 보니 죄송한 마음이 들었어요. 해서 자리를 만들고 한 번쯤 초대하고 싶었어요.”

“좋은 생각이군요.”

제이나 황비가 클로에의 생각이 기특한 듯 대꾸해주었다. 그녀가 먼저 칭찬을 건네오니 다른 귀부인들도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그러면서도 그녀들은 오늘 클로에가 어떤 모임을 열지 궁금해하며 바쁘게 주변을 살펴보았다. 대공가의 커다란 응접실은 오십여 명의 귀부인을 전부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었지만 그 외 특별할 게 없었다. 

굳이 새로운 것이라고 해봐야 클로에의 앞에 놓인 길쭉한 테이블과 작은 병들.

“제가 준비한 건 이게 다예요. 그리고 모임은 한 가지 성격으로만 진행되지 않고 만날 때마다 다른 주제로 진행될 거예요.”

클로에의 말에 귀부인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속삭였다. 안 그래도 이번에 어떤 모임이 진행될지 궁금해서 왔는데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하니 호기심이 더욱 피어올랐다.

“그 말은 매번 다른 주제로 클로에 영애가 모임을 주최한다는 건가요?”

“그럴 수 있다면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제 재능은 이거 하나예요.”

클로에가 미리 준비해둔 시약병 하나를 잘게 흔들어 보였다. 

“저는 운영회의 일원이 되어, 매번 새로운 주제를 가지고 모임을 열고자 하는 분을 도울 거예요.”

클로에의 말에 귀부인들이 전부 에일린을 보았다. 에일린은 그녀들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태연히 차를 들었다. 누구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마시고 있으니 클로에가 가벼운 박수로 제게 관심을 유도했다.

“다음 모임을 이끌 분을 소개합니다. 줄리아나 후작 부인.”

클로에의 호명에 줄리아나가 일어나 귀부인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클로에가 직접 가서 초대장을 건네줄 정도로 신경 쓴 인물이었다.

줄리아나 후작 부인의 재주를 알고 있는 몇몇 귀부인이 벌써 기대감에 차올랐다.

“맞아요. 줄리아나 후작 부인이 타는 차가 기가 막히다고 하죠? 특유의 블렌딩으로 허브를 아주 잘 쓰는 부인이지요.”

“부풀어진 소문일 뿐이에요. 그렇게 대단하진 않답니다.”

줄리아나는 겸손하게 말하지만 차에 대한 자부심만은 넘쳐흘렀다. 귀부인들은 줄리아나 후작 부인에게서 차를 타는 기술을 들을 수 있다면 다음 모임에도 선뜻 올 생각이 있었다.

“그럼 우리 모임의 성질을 알았으니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요?”

클로에가 제 시약병을 높이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저는 그동안 베타인데도 불구하고 이 연구를 많이 해왔어요.”

그건 모르는 이가 없었다. 대공이 우성 알파라고 할지라도 베타의 몸으로 그런 약을 연구하는 것 자체가 특이한 이력이었다. 그러나 클로에는 소신껏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밀어붙였고 결국 아카데미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이건 그동안 연구하던 하나의 실험에서 우연히 나온 건데요. 이 안에 담겨있는 액체는 마셔도 아무 상관 없는 케리아 액체랍니다.”

케리아라는 식물에서 추출한 것으로 실험에 많이 쓰이는 액체였다. 목이 말랐을 때 식물의 줄기에서 나오는 액을 먹어도 될 정도로 안전하기도 했다.

“여기에 저만의 비법을 하나 넣었답니다. 어떤 효능이 있냐면…….”

클로에가 작은 시약병을 가져가 귀부인들의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들은 클로에가 무슨 생각인지 궁금해서 눈을 떼지 못했다. 클로에가 선 곳은 에일린의 바로 앞이었다.

“여기에 새언니의 페로몬을 담아줄래요?”

에일린은 클로에의 갑작스러운 부탁에도 당황하지 않고 시약병을 들었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입구에 살짝 대고는 페로몬을 손끝으로 흘려보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자 에일린의 몸에서 피어오른 페로몬이 은은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어머나.”

같은 오메가인 귀부인이 진한 꽃향기에 놀란 표정을 드러냈다. 뒤늦은 발현으로 인해 혹시나 열성은 아니었을까 생각하던 사람이 많았다. 페로몬의 양이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소문이 무색하게 에일린의 몸에서 청아하고도 농도 짙은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은데요.”

에일린이 손을 떼자 클로에가 고맙다는 눈빛을 보낸 뒤 시약병의 입구를 마개로 막았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온 클로에가 병의 목을 잡아 귀부인들이 잘 볼 수 있도록 내밀었다. 그리고 조금씩 흔들고 있으니 투명한 액체에 불과하던 시약병 속 액체가 점점 분홍빛을 띠기 시작했다.

“신기해라.”

“어떻게 색이 변하는 거죠?”

“페로몬으로 색이 변했다는 건가요?”

나중엔 은은하면서도 빛이 감도는 듯한 반짝이는 분홍빛이 된 병을 들고 클로에가 자랑하듯이 말했다.

“페로몬으로 색이 변하는 게 맞아요. 그리고 이건 그냥 페로몬을 담아두기만 한 게 아니에요.”

클로에는 직접 보여줄 요량으로 마개를 땄다. 그러니 아까 페로몬을 맡았던 귀부인들이 이번에도 그게 맡아지자 에일린과 병을 번갈아 보았다.

“페로몬의 향을 잡아둘 수 있죠. 음, 이름은 페로몬 향수라고 붙였습니다.”

“혹시 다른 사람의 페로몬도 같은 색이 나올까요?”

“몇 번 실험해본 결과 같은 색을 나온 경우는 매우 드물었답니다. 제가 아직 많은 실험을 해보지 못해서 장담할 순 없지만요.”

“그렇다면 내 페로몬도 보태겠어요.”

그 귀부인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페로몬을 보태보겠다는 뜻을 내비쳐왔다. 클로에는 그 반응에 즐거운 듯 웃으며 손가락 사이사이 시약병을 끼웠다.

“그럴 줄 알고 이렇게 준비했답니다.”

그러자 제이나 황비가 클로에를 부르더니 제게 손짓했다.

“나는 두 개를 만들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황비 마마.”

클로에가 신나서 과장되게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날의 모임은 그 여느 때보다 활기차게 진행되었다.

***

모임이 끝날 무렵 에일린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모임의 주최자는 엄연히 클로에였다. 그러니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지 않도록 미리 비켜주었다.

“대공비.”

그런 에일린의 행동을 눈치챈 제이나 황비가 그녀를 불렀다. 에일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제이나 황비를 돌아보며 눈을 마주쳤다. 

“당신의 집무실을 보고 싶은데요.”

제이나 황비는 에일린에게 둘만의 시간을 원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에일린은 어렵지 않다는 듯 가벼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저를 따라오세요.”

에일린 뒤를 제이나 황비가 따라갔다. 몇몇 귀부인들이 둘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관심을 지우고 클로에에게 집중했다.

집무실로 온 에일린은 제이나 황비에게 새로운 차를 따라주었다. 그것을 들며 제이나 황비가 장난스러운 첫말을 던졌다.

“일부러 브리스와 같이 오지 않았어요.”

브리스는 클라우디아 백작 부인으로 에일린의 생모였다. 제이나 황비에게 오랜 친구와도 같았다. 하지만 오늘 제이나 황비는 브리스가 없는 자리에서 에일린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내게 대공비는 당차고 사랑스러운 아이였어요. 어릴 때부터 봐서 더 그럴지도 몰라요.”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일린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에게도 제이나 황비는 친숙한 인물이었다. 어릴 적부터 매일 모친에게 말을 들었으니. 언제나 우아하고 고귀하고 성품이 좋은 황비 마마.

“그런 아이가 어느 날 결혼한다고 한다고 하니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언제 결혼할 나이가 되었나 싶으면서도 그 대공의 아내가 된다니.”

제이나 황비가 웃으며 뒷말을 이어갔다.

“대공의 종잡을 수 없는 성격에 워낙 말들이 많았잖아요. 우성 알파의 형질도 걸리고 말이죠.”

“그렇죠. 저도 많이 들었어요.”

로이드를 둘러싼 소문이야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러나 에일린은 그 소문만이 아니라 제 오빠에게 벌어진 일로 그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랬던 감정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지금은 어떤가요?”

에일린은 로이드가 어떤지를 떠올려보았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평소에도 담아왔던 말을 그대로 꺼내기만 하면 되니까. 말을 꺼내기 전 에일린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살랑이듯 걸렸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건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 더 많이 생각하고 이뤄진 행동이라는 걸 알았어요.”

제이나 황비는 순간 제 남편을 두둔하는 듯한 에일린의 말에 입술을 눌러 웃음을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소문에 대한 해명부터 할 줄이야.

“가끔 고압적으로 내려다볼 때가 있어서 다 무시하는 줄 알았는데 고용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아요. 저와의 정략결혼에도 예의를 갖춰주고 제가 필요할 때마다 달려와 주었고요.”

자신의 트라우마는 전부 로이드가 있음으로 인해서 헤어 나올 수 있었다. 오메가로 발현할 때, 패트릭을 남편으로 두고 겪었던 학대, 그리고 벼랑에서 떨어졌던 일까지.

그 모든 순간에 로이드가 기적처럼 나타나 에일린을 끌어올려 주었다. 그때를 생각하는 에일린의 눈에 따스한 빛이 감돌았다. 제이나 황비가 바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빠져들었네요.”

“……죄송해요.”

에일린은 로이드에 대해 밤새 떠들 수 있을 정도로 할 말이 많았지만 억지로 참았다. 제이나 황비를 붙잡고 계속 자랑만 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에일린은 아쉽지 않게 로이드를 한마디로 표현했다. 

“제게 최고의 남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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