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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107)화 (107/120)

107화. 아쉽기만 한 시간들

모임을 앞두고 미리 아카데미에 짐을 보내려는 클로에의 옆에서 에일린이 하나하나 시약병을 들어봤다. 

“제이나 황비 마마께서 오신다고 하니 이제껏 말 없던 부인들 몇 명이 연락을 보내왔어요.”

클로에가 에일린의 옆에서 마찬가지로 시약병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중 가져가야 할 건 옆의 하녀에게 건네자 하녀가 깨지지 않게 잘 감싸서 가방에 넣었다.

“왜 새언니가 아니라 내가 주최하는지 물어보는 사람도 많았고요.”

“그거야 내일 와보면 알 일인 걸요.”

“그렇죠. 그래서 와서 봐라! 라고 했더니 궁금해서 오겠다는 사람도 있었네요.”

클로에가 또 다른 시약병을 들었다가 에일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러다 내일 홀이 다 차는 거 아닌가 몰라요.”

“그래도 좋겠네요.”

에일린은 솔직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내일을 시작으로 이 모임은 꾸준히 지속될 것이다. 그때를 생각한다면 사람이 많을수록 좋았다.

“그래도 꽃꽂이나 교양 등을 쌓으려는 모임이 아닌데 와서 실망할 수도 있겠어요.”

에일린은 자신들이 생각한 주제가 이상한가 생각해 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일 보면 알겠죠.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 믿어요.”

“새언니가 그렇게 말하니까 저도 좀 기대가 되긴 해요.”

클로에가 내일 있을 모임에 기대감을 내보였다. 이걸 위해서 준비한 게 너무 많았다. 그리고 쏟아부은 시간만큼이나 재밌었고 말이다. 

클로에가 다시 시약병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 짐을 정리하던 하녀가 창문을 열었다. 짐을 정리하는 와중에 환기를 하려던 것이었지만 강한 바람이 들어와 에일린과 클로에를 스치고 지나갔다. 

“죄송합니다.”

하녀가 서둘러 다시 창문을 닫긴 했지만 클로에가 제 팔을 쓸어내리며 몸을 떨었다.

“벌써 겨울이 오고 있네요.”

“그러네요.”

에일린이 이 저택에 들어온 때를 떠올렸다. 회귀한 것만으로 정신없었던 때는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던 봄이었다. 막 겨울의 찬 기운을 몰아내고 찾아왔던 봄을 즐기지 못한 채 로이드에게 청혼을 하고 계약 결혼을 하고. 

로이드가 전쟁터로 떠나고 혼자 일 년을 보낼 줄 알았는데 3개월 만에 돌아온 그와 함께 더운 여름날 에일린은 발현했다. 

오메가가 되어 새롭게 적응하는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게 되었다. 누군가의 페로몬에 겁을 먹지 않았고 자신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이가 있었으며 또 에일린의 능력을 높이 사주었다.

그렇게 보낸 시간까지 합하니 어느새 바람이 차가워지는 계절이 왔다. 대공가에서 세 개의 계절을 보내는 동안 단 하루도 계절의 변화를 느낄 틈이 없었다. 

“3개월.”

3개월이 지나면 에일린은 대공가를 떠난다. 더는 로이드의 옆에 설 자격이 없어지고 혼자가 될 것이다. 

좋아해야 하는데 이젠 그럴 수 없었다. 로이드를 좋아하는 마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예견된 이별이 반갑지 않았다. 

“새언니?”

“네, 아가씨.”

“시약병은 도로 놔도 돼요. 챙겨갈 거는 지금 다 챙겼어요.”

“아.”

에일린이 들고 있던 병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채며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아카데미로 가면 언제 와요?”

“글쎄요? 특별한 일이 없다면 다음 방학 때 오겠죠. 아무래도 졸업 학년이라 할 게 많아요.”

클로에가 마지막 짐을 러츠 경에게 내밀며 대답했다. 이번에도 결혼식 때에만 왔었던 걸 생각하면 오지 않을 확률이 컸다. 그러면 클로에와는 모레 헤어지는 것이다.

“아쉽네요.”

“저도 새언니랑 헤어진다니 아쉬워요. 그래도 이번 학기만 끝나면 졸업이니까 기다려줄 거죠?”

클로에가 맞은편에 앉으며 하는 말에 에일린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기다리기는 어려울 거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 했으면 차 마실까요? 아니면 외출?”

에일린의 물음에 클로에가 잠깐 고민하는 듯싶더니 흔쾌히 하나를 선택했다.

“외출이 좋겠어요. 지금부터 부지런히 준비하면 야시장에 갈 수 있겠어요.”

“그럼 준비하고 만나요.”

그렇게 말한 에일린이 클로에의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에일린은 억지로 꾸며냈던 미소를 지웠다. 

“하아.”

끝을 준비하는 데 있어 가장 힘든 건 사람 간의 보이지 않는 감정이리라.

***

한 시간 후 두꺼운 외투를 마지막으로 준비를 마친 에일린이 거울 속 제 모습을 돌아보았다. 

“머리카락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할 것입니다.”

제인의 말에 에일린이 거울에 비친 제 머리를 보았다. 완전히 감추지는 않았으나, 한데 모은 머리를 깃털 장식으로 덮은 것을 보니 괜찮게 느껴졌다.

“모자 쓰는 것보다 훨씬 좋은데?”

에일린의 기분 좋은 대꾸에 제인이 다행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났다. 

“클로에 아가씨도 준비를 마쳤다고 합니다.”

“그럼 가자.”

에일린이 갑자기 결정된 외출에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나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고 있는 클로에를 확인한 에일린이 환한 미소를 내보였다.

“오늘 야시장에서 파는 물건은 하나씩 다 사겠어요.”

클로에가 에일린을 보자마자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내보였다. 그 인사에 에일린이 웃음을 터트리더니 클로에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럼 나는 관심 가는 걸 사겠어요.”

얼마큼 산다고 하진 않았다. 그러나 에일린도 야시장에 가면 뭐든 관심 있게 보겠다는 뜻을 내보였다. 

에일린이 가보자는 눈빛을 보이며 걸어갔다. 따라올 줄 알았던 클로에는 제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아가씨?”

에일린이 클로에를 돌아보면서 부르는 목소리에 클로에가 창문을 가리켰다.

“저기…….”

에일린이 뭔가 싶어서 클로에의 옆으로 돌아왔다.

“오빠가 온 거 같은데요?”

클로에의 시선을 따라 밖을 보니 대공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문을 지키는 병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유유히 들어오고 있었다. 황궁에서의 일이 끝나지 않았다며 언제 올지 모르던 로이드의 갑작스러운 귀가였다. 

에일린은 잠시 클로에의 눈치를 보다가 로이드를 마중 나가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클로에는 천천히 뒤따라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러다 셋이서 야시장에 가는 거 아니겠지?”

새언니랑 둘이 놀고 싶은데.

클로에는 어쩌면 딱 이 시간에 왔는지 싶은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한편 저택을 나온 에일린은 정확하게 제 앞으로 다가오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삼 일 정도인가? 로이드가 황궁에 있던 시간이.

그를 보러 황궁에 가고 싶기도 했지만 방해될까 봐 꾹 참아야만 했던 에일린이 야시장은 완전히 잊어버릴 정도로 마차에 집중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며 익숙한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내려오는 남자를 본 에일린이 충동적으로 그를 안고 싶은 마음에 다가갔다가 멈춰 섰다.

로이드 역시 에일린을 보고 팔을 벌렸는데 그녀가 멈춰버리자 어정쩡한 자세가 되어버렸다.

“어, 황궁에서의 일은 잘 끝났나요?”

“응.”

에일린의 어색한 인사에 전염된 듯 로이드도 어색하게 받아쳤다. 누 가봐도 서로를 반가워하던 두 사람이 멋쩍게 서 있으니 지켜보는 고용인들의 입가에 남몰래 미소가 떠올랐다.

“피곤하지 않아?”

대공 부부 사이에 끼어든 건 클로에였다.

“어서 쉬어. 집사, 마차는 준비되었죠?”

“그렇습니다.”

그제야 뒤늦게 에일린의 옷차림을 보게 된 로이드가 클로에에게 물었다. 

“어디 나가려고?”

“야시장.”

클로에가 에일린의 팔을 잡아끌자 에일린이 못이기는 척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로이드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오늘 로이드가 올 줄 알았으면 야시장에 가지 않는 건데 안타깝지 그지없었다.

에일린만큼이나 안타까워하는 이가 있었다. 로이드는 황제에게 당분간 환궁하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말하고 나왔는데 에일린이 나간단다. 그래봐야 몇 시간 정도의 외출이겠지만 그것마저도 아쉬웠다.

“굳이 마차를 따로 준비할 필요가 뭐 있어. 이것을 타고 가지.”

로이드가 멀어지려는 에일린의 손을 잡아 더 가지 못하게 막았다. 덕분에 클로에까지 멈춰서 로이드를 돌아보았다.

“오빠가 타고 온 마차를?”

“그래.”

“왜?”

“괜히 마차 많이 꺼내서 뭐 해.”

“남아도는 게 마차야.”

대공가에 종류별로 효능별로 마차가 구비되어 있었다. 거기다 페로몬을 막아주는 기능도 있는, 값비싼 마차도 있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눈으로 제 마차를 한 번 더 가리켰다.

“그래요. 타요.”

클로에는 물러서지 않는 로이드 때문에 반쯤 포기한 채 마차에 올라탔다. 에일린도 마차에 올라타니 로이드가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라 올라왔다.

그러자 클로에가 불편한 시선을 보냈다.

“설마 같이 가자는 거 아니지?”

“야시장에 볼일이 있어서.”

“새언니한테 볼일 있는 거 아니고?”

클로에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로이드에게 나가라고 하는 대신 마부석을 두드렸다. 아닌 척하지만 내심 좋아하고 있는 에일린의 표정을 보고 클로에는 벌써부터 미래가 보이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셋이 가면 나 혼자 놀라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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