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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청혼을 거절하지 않은건 (106)화 (106/120)

106화. 마지막 일을 끝내고

케이트 황비는 자신을 부른 황제를 만나러 복도를 걸어갔다. 그제 로이드를 만나면서 느꼈던 불안감을 억지로 누르며 황제가 있다는 홀을 떠올렸다. 

집무실이 아니라 그랜드 홀이라니. 그곳은 대리석과 금으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계단 위에 황좌가 있는 곳이었다.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하지 못한 자리. 그러나 한편으로는 황제의 위대함이 더욱 크게 돋보이는 그런 장소였다. 

기사가 문을 열어주자 케이트 황비는 멈출 필요 없이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찝찝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케이트 황비가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는 루사벨라 황후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황후 폐하도 계시는군요.”

루사벨라 황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케이트 황비는 보란 듯이 황제와 나란히 앉아 있는 그녀를 불만스럽게 보았지만 티 내지 않았다. 

“황궁이 시끄러운 이유를 황비는 아시오?”

케이트 황비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죄인 알란 때문이 아닙니까?”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자를 말하듯 케이트 황비의 어투는 단조로웠다. 황제는 오묘한 시선으로 케이트 황비를 보다가 시종장에게 손짓했다.

“들라 하게.”

케이트 황비는 자신만 모르는 일이 진행된다는 불안한 느낌에 표정이 굳어졌다. 곧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자를 확인한 케이트 황비가 미간이 찌푸려지려는 걸 참았다.

“리하스트 대공.”

로이드를 부르는 황제의 평이한 목소리와 다르게 케이트 황비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루사벨라 황후와 리하스트 대공은 저에게 반감이 있는 자들이었다. 이 자리가 그녀를 몰아가기 위한 덫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폐하, 대공을 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케이트 황비가 부들 떨리는 입술을 감추며 물었다. 

“그거야 보면 알겠지. 대공.”

“예, 폐하.”

“말해 보게.”

황제는 태연한 얼굴로 상황을 주도했다. 그 분위기가 전염된 듯 로이드 역시 차분한 얼굴로 뒤에 선 제라미 경에게 손짓했다. 제라미 경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밀자 로이드가 그것을 받아 황제가 잘 볼 수 있도록 세웠다.

“알란을 심문한 결과입니다.”

황제가 그것을 받아들여 진중한 태도로 넘겨보았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케이트 황비는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커지고 있었다.

“여기 어디에도 황비에 관한 건 없군.”

황제의 말에 케이트 황비가 로이드를 노려보았다. 알란 그자와 자신의 관계를 알아내려고 했다는 걸 알자 이루 말할 수 없는 화가 치솟았다. 역시나 이 자리는 케이트 황비에게 전혀 좋을 게 없는 자리였다.

“혹 알란의 주장 때문인가요? 폐하, 그것은 일전에도 제게 묻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씀드렸고요.”

“이게 단가?”

케이트 황비의 말에 황제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로이드에게 물었다.

“알란이 주기적으로 황비 마마와 교신하던 증거입니다.”

로이드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다른 것을 내밀었다.

“황비 마마가 오늘 독을 사 간 정황입니다.”

케이트 황비의 얼굴이 확연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뒤로 사람이 붙었다는 게 전혀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케이트 황비는 일단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고 부정했다.

“말도 안 됩니다. 폐하. 제가 독이라니요. 황후 폐하께서도 말해 보세요. 저 정말 억울합니다.”

케이트 황비는 당황한 것도 잠시 루사벨라 황후를 보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누군가의 손을 타서 들키지 않기 위해 직접 움직였다. 그사이에 약간의 위기는 있었지만 결국 성공할 거라 믿었다.

그런데 어디에서부터 상황이 꼬였는지 알 수 없었다. 케이트 황비가 대공비에게 신경이 쏠리는 동안 다른 이가 지켜보고 있었음을 모르고 말이다.

“그렇다면 외출 시 어디에 다녀왔는지 말해 주시겠습니까?”

공간을 울리는 낯선 목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들어섰다. 케이트 황비가 다급히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1황자 루시드였다.

“황자, 그게 무슨 말입니까.”

“황비 마마께 들르던 길에 우연히 나가는 걸 보았습니다. 그래서 물은 것뿐입니다.”

케이트 황비는 기가 막힌 심정으로 루시드를 노려보았다. 평소엔 서로 마주하는 것조차 꺼려 하던 사이였다. 자신이 황후를 싫어하는 감정을 다 알고 있는 루시드가 어떤 연유든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황자가 내게 무슨 볼일로요?”

“그야 마마를 뵙고 싶어 갔었지요.”

“나를요?”

“저를 낳아주신 분은 황후이시나 황비 마마 역시 제게 어머니 아닙니까.”

루시드 황자의 뻔뻔한 대꾸에 케이트 황비의 입매가 움찔 떨렸다. 말도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여기서 그것을 짚고 넘어갈 수 없었다.

“그저 답답하여 나갔다 온 것입니다.”

케이트 황비는 아예 루시드 황자를 외면하듯 몸을 틀었다. 그러면서 황제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이리 추궁하는 듯한 대우가 서운합니다. 폐하께서도 저를 의심하시나요?”

케이트 황비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오히려 서운하다는 시선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억울합니다. 폐하, 제 말을 들어주세요.”

“내 일전에 황비에게 물어본 적이 있을 텐데.”

황제는 케이트 황비에게 기회를 주었음에도 그녀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케이트 황비는 여기서 계속 모른다고 발뺌해봐야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다.

“안정제를 받은 것 외에 알란과는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폐하께서 찾아주시지 않으니 안정제가 필요했습니다. 그뿐이에요.”

“이것이 그 독입니다.”

그러나 케이트 황비를 비웃듯 로이드가 품속에서 하나의 병을 꺼내 들었다. 케이트 황비가 기가 막힌 듯 보다가 황제를 돌아보았다.

“전부 모함입니다. 저를 몰아가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케이트 황비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말하면서도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로이드가 들고 있는 병의 모양이 제가 받은 것과 같기 때문이었다.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저것을 어디서 발견했지?

그 순간 래즐 부인을 떠올린 케이트 황비가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말했다.

“모두 절 몰아가려는 것입니다.”

케이트 황비가 황제를 애타게 바라보았다. 자신을 믿어달라는 듯. 평소의 고고하던 그녀가 아니었다. 구석에 몰리면서 케이트 황비는 점점 이성이 흐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처음과 다름없는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대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면서 안정제를 받았다 하는군. 거기다 아니라고 하면서 래즐 부인을 언급하는군.”

결국 어떻게든 관계가 있다는 걸 케이트 황비가 스스로 뱉어낸 꼴이었다.

“그건… 이렇게 의심할까 그랬습니다. 고작 안정제 하나 받은 것으로…….”

“황비 마마께 안정제와 함께 다음 대 황위를 도모하자는 제안을 받은 귀족들의 명단입니다.”

케이트 황비는 일부러 제 말을 끊고 들어오는 로이드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로이드는 케이트 황비를 돌아보지 않으며 또 하나의 자료를 건넸다.

모든 것을 계획하여 실행하는 자 같았다.

“대공. 이런 거짓 정보로 날 몰아내려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루시드 황자와 손을 잡았나요?”

“황비 마마. 저는 그저 지금껏 조사한 것을 폐하께 드릴 뿐입니다.”

로이드는 케이트 황비를 향해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패트릭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황비가 에일린을 죽이라는 명령이 있었다는 걸 알아냈다.

에일린을 죽이라고 사주한 그녀를 향한 눈빛에 살기가 맴돌자 케이트 황비가 흠칫했다. 그사이 황제가 귀찮은 듯 설렁거리는 손짓과 함께 명령했다.

“그녀를 궁에 가두어라.”

“폐하! 폐하! 이거 놔라!”

케이트 황비의 몸부림에도 기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팔을 휘어잡았다. 기사에게 팔이 붙잡혀 질질 끌려 나가는 케이트 황비의 모습을 보며 황제가 중얼거렸다.

“재판이 준비되면 그때 보지.”

황비를 향한 황제의 복잡한 시선에 모두가 입을 열지 못했다. 이렇게 될 걸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황제에겐 평생을 속한 한 사람을 끊어내는 일이었다.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루사벨라 황후가 황제의 손을 잡았다.

말없이 위로하는 그 몸짓에 황제는 옅은 미소를 지어 황후에게 고마움을 표하고는 로이드를 돌아보았다.

“결국 이렇게 만들었으니 아예 재판까지 나설 텐가?”

황제가 복잡한 심경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케이트 황비를 몰아내는 데 있어 가장 큰 공을 세웠으니 그의 충심을 높게 사야 하지만 제 비를 품지 못하게 한 원망도 일부 들어있었다. 

애초 케이트 황비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찝찝한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황제의 물음에 로이드는 잘게 고개를 저었다.

“제 할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로이드는 케이트 황비가 반쯤 끌려 나갔던 모습을 떠올렸다. 이제 재판이 열리면 케이트 황비는 절대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것으로 로이드의 할 일은 모두 끝났다. 에일린을 위협하던 자들을 물리고 나니 로이드의 표정이 한결 편안하게 가라앉았다. 그 표정 그대로 로이드는 황제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폐하, 당분간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자 합니다.”

에일린과 둘만의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기 위한 로이드의 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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